*Triger warning: 부상, 사망, 자살, 시신 훼손 소재 주의
*
딱 맞게 허리를 조인 베스트도 요렇게 저렇게 매듭지은 넥타이도 어색했다. 정장이 교복과 얼마나 다르겠냐 생각했는데, 난생 처음 입어본 정장은 너무 낯설어 처음 교복을 입어본 열네살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쓱 코를 문지른 우영이 옷 매무새를 다듬고 옆에 놓인 조화를 들었다. 묘비 앞에 흰 국화를 헌화하고 물러서 묵념할 순서였다. 하지만 그 전 무언가가 우영의 시선을 끌었다. 모두가 고개 숙여 묵념하는 군중 속 우영만이 고개를 쳐들고 두 눈을 빛냈다. 굳게 닫힌 세개의 관 뒤에 자리한 각자의 비석에 새겨진 말이, 미묘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김홍중 최후의 시간이다.
박성화 살아남는다는 희망도 없었다.
정윤호 이것은 그들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모든 조문객이 떠나가 홀로 묘지에 남았음에도 우영은 노을빛에 의지해 계속해서 글귀를 읽어내려갔다. 좀비 바이러스로부터 지구를 지켜낸 세 명의 영웅을 사람들은 칭송했지만, 정작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는 전혀 궁금해하지 않았다. 이렇게 버젓이 비석에 새겨져 있는 이야기를 우영은 그 누구에게서도 들은 적 없었다.
혹시. 의도적으로 역사에서 지워내는 것일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우영의 시선이 스르륵 내려갔다. 하얀 대리석을 깎아 만든 석관은 보기에도 무게감이 느껴져 듬직한 인상이 있었다. 하지만... 고인의 영면을 지켜줄 보안 체계가 없다.
무사히 있는지 딱 확인만 하는거야. 우영이 조심스럽게 관뚜껑에 손을 올렸다. 묘의 주인이 제 결례를 용서해, 부디 쫓아와서 가위나 누르지 않았으면 했다.
쿠구구구...
"...없어."
믿을 수 없다는 우영의 목소리가 텅 빈 관속을 웅웅 울렸다. 관 안에 시신이 없다. 가짜 무덤인 거야? 고개를 든 우영의 눈에 다른 관이 들어왔다. 멈출 수 없는 호기심에 이끌린 우영이 검은 관뚜껑을 움직일 때, 뒤에서 불쑥 그림자가 다가와 우영의 뒷목을 서늘하게 했다.
젠장. 뒤돌아봤지만 늦었다. 우영이 손을 더듬어 목에 꽂힌 얇은 바늘을 뽑아냈지만 이미 참을 수 없는 졸음이 쏟아져왔다. 오락가락한 의식으로 주저앉은 우영은 저를 습격한 누군가를 올려다봤다. 핵폭탄 떨어진 곳 답사하는 과학자마냥 흰 비닐이 전신을 감싸고 검은 방독면을 쓴 놈이었다.
"너어, 뒤질 줄 알...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우영은 고개를 떨구고 곯아떨어졌다.
*
죽음을 초월하기 위한 인류 최대의 유전자 변형 연구는 끝내 실패로 돌아갔다. 자연의 섭리를 감히 거스르려 한 인류는 스스로를 좀먹으며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불사의 육체를 갖고 연구소에서 태어난 신인류는 엄청난 기대 속에서 지구 전역으로 입양되었다. 그리고 3년 뒤. 그들 중 한 명이 교통사고에 의해 최초로 사망 판정을 받았다. 연구진은 뒤틀리고 뭉개진 시신의 형태를 바로잡고 충분한 영양을 공급했다. 아이는 조만간 되살아날 것이라고. 다시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눈물짓는 보호자에게 그들은 말했다.
사망 판정으로부터 40시간 뒤. 아이는 다시 깨어났다. 시신의 부패를 확인한 연구진이 프로젝트의 실패를 깨닫고 근처 공터에 그를 암매장한 후의 일이었다.
생명활동이 멎어 부패해가던 신체가 원인모를 힘에 의해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다. 생존에 필요한 열량을 갈구하는 생명의 의지 속에서 탄생한 신종 바이러스였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그것이 새벽 순찰을 돌던 연구소의 경비원을 습격했다. 새로운 숙주를 찾은 바이러스는 빠르게 번식하며 살고자 하는, 퍼져나가고자 하는 의지를 더욱 강하게 다져갔다.
인류가 공상 속에서나 즐기던 좀비의 첫 등장이었다.
*좀비사태 24년 후
윤호는 정신없이 숲 속을 달렸다. 각목에 맞은 정강이도 날아온 돌멩이에 맞은 어깨도 뼈가 갈라질 듯 아팠지만 멈출 수 없었다. 지금 윤호를 쫓는 이들은 그의 머리통을 박살낼 각오로 각자의 무기를 치켜들고 있기 때문이다.
숲 속을 어슬렁대던 좀비 몇 마리가 윤호에게 팔을 뻗었지만 윤호는 그것들의 무릎을 걷어차 넘어뜨리기만 하고 지나쳐 도망갔다. 놈들을 끝장내는 것은 무리지어 저를 쫓아오는 망나니들의 몫이 될 것이다. 멸망한 세계에서 자라나며 몸소 체득한 생존 팁이었다.
"어, 으악!"
낙엽으로 덮인 나뭇가지가 뚜둑 부러지는 것이 낡은 운동화 밑창을 통해 느껴졌다. 스르륵 당겨지는 밧줄의 뱀같은 움직임까지. 트랩이다. 윤호가 작동시킨 트랩은 노루나 멧돼지 등 덩치 큰 짐승을 포획하는 그물덫이었다.
한순간에 그물에 감싸여 나무 기둥 옆에 대롱대롱 매달린 윤호가 난처한 얼굴로 그물 사이에 손가락을 걸었다. 제 아래에 수 마리의 좀비가 몰려들어 썩어빠진 팔을 치켜들고 캭캭대며 저 커다란 몸뚱이를 어떻게 나눠먹을지 아우성이었다.
순식간에 낚시바늘에 걸린 미끼 신세가 되어버린 윤호를 추격자들도 비웃었다.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할 새도 없이 그들은 좀비를 피해 자리를 떴다.
-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오지 않았던 하얀 입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늦은 가을의 밤은 고독하고 추웠다. 힘들게 배낭 속에서 담요를 꺼내 두른 윤호가 몸을 웅크리고 덜덜 떨었다. 천천히 목을 졸라오는 추위와 배고픔. 한 걸음 뒤에서 저를 기다리는 고통스러운 죽음. 모두 끔찍하게 싫었다.
추위와 피로 속에서 윤호는 졸다 깨기를 반복했다. 아래에서 거칠게 긁히는 시체들의 목소리는 여전했고 살을 에는 찬바람이 이따금씩 찾아와 나뭇가지를 흔들고 갔다.
쿡. 나뭇가지에 몸이 찔려 윤호가 작게 뒤척였다. 다시 쿡쿡. 이쪽에도 가지가 있나, 대수롭지 않게 여긴 윤호가 무시하고 색색 숨만 쉬자 꾸우욱. 짜증내듯 지그시 눌러오는 힘이 강해졌다.
뭔 놈의 나뭇가지가 사람 엉덩이만 찔러대나 싶어 윤호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손에 든 나뭇가지로 푸짐한 윤덩이 실컷 찔러대던 사람이 움찔 놀라며 물러섰다. 누구세요? 경계심 그득 담아 윤호가 물었다. 상대는 후드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고, 달빛에 그림자진 곳에서 조용히 윤호를 응시했다. 보이는 덩치나 드러난 하관만 봐도 남자인 줄 알았지만 망설이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생각보다 더 낮았다.
"...이 트랩 놓은 사람인데요."
"아 그러시구나. 사냥은 성공하셨나요?"
"...월척인 줄 알았는데."
"네?"
"이걸 먹을 수도 없고."
혼잣말하듯 중얼대며 남자가 들고있는 나뭇가지로 다시한번 윤호를 쿡 찔렀다. 저기요. 저한테도 다 들리거든요? 빈정상한 윤호가 짜증을 내려 얼굴을 구긴 그때 주변이 번쩍 밝아졌다. 번개가 치는 짧은 시간동안이었지만 윤호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사냥감을 보는 포식자의 눈. 아쉽게 입맛을 다시는 혀끝이며 달리기 준비자세처럼 쪼그려앉은 몸과 그 뒤로 숨겨진 칼 든 손까지. 윤호는 그 모습에서 공격 직전 목을 뒤로 물리는 한 마리 뱀을 떠올렸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뱀 앞 개구리마냥 얼어붙은 윤호를 보던 남자가 에휴 한숨을 쉬고 살벌하게 생긴 정글도를 들었다. 히익 숨을 들이키고 그물 안에서 버둥대는 윤호를 무시한 채 남자는 들고있던 나뭇가지 끝을 다듬었다. 완성된 나무 창으로 남자가 저와 윤호 아래 그득 몰린 좀비들의 머리를 하나하나 뚫었다. 좀비사태 이전의 세상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타코야키 뒤집는 포장마차 사장님을 떠올렸을 현란하고 정확한 솜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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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윤호... 어, 너 99년생이네?"
"신인류 아니에요."
"그래. 그러시겠지."
"정말이에요! 다른 서류는 전부 잃어버리는 바람에,"
"으으음. 너무 뻔한 핑계야."
"진짠데..."
윤호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남자의 태도에 윤호는 또다시 억울해졌다. 담배마냥 검지와 중지 사이 불량하게 끼운 윤호의 민증을 남자가 팔랑팔랑 흔들었다. 성인이 되기 직전 발급받았던 윤호의 주민등록증은 좀비 바이러스가 퍼져 5년 전 해체된 대한민국 정부의 마지막 흔적이었다.
신인류가 뭐라고 이렇게 따지고 드느냐면 간단히 답할 수 있다. 보통 사람은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된 후 서서히 좀비로 변하지만, 모든 신인류는 어떠한 경우에도 사망한 이후 몇분 내에 좀비가 되어 깨어난다. 이 시한폭탄을 해제할 방법은 단 하나. 죽은 후든 죽기 전이든 그의 머리통을 박살내야 한다.
문제의 신인류는 1999년 1월부터 실험실에서 태어났다. 그들은 좀비 사태가 발발한 2002년까지 계속해서 생산되었고, 때문에 그 기간 동안에 태어난 이들은 신인류로 의심받으며 생존자들 사이에서 배척받고 심지어는 살해당하기도 했다.
이 남자를 만나기 전 윤호가 다른 생존자들에게 쫓겼던 이유가 이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인간 말종들. 이십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생존자들은 신인류일지도 모른다는 핑계로, 특히나 다른 생존자보다 약탈과 살해의 표적이 되기 쉬웠다.
제 또래로 보이는 눈앞의 남자도 그런 이유로 혼자 행동하고 있던 게 아닐까. 입을 꾹 다문 채 조심스레 추측한 윤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확히는 일어나려고 했다.
"에. 저기요?"
"박성화. 나이는 너보다 한 살 형이야."
"네?"
"앞으로 잘 부탁해."
나른하게 가늘어지는 눈으로 성화라는 남자가 웃어보였다. 성화에게 코트자락이 붙잡혀 앉지도 일어나지도 못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물음표만 띄우던 윤호는 저를 끌어당기는 힘에 풀썩 무릎을 꿇었다. 입맞춤이라도 할 기세로 성화가 윤호의 옷깃을 잡아당겨 얼굴을 가까이했다. 거부감에 뻣뻣하게 굳은 윤호의 뒷목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성화는 그 가까이에서 조곤한 투로 말했다. 성화의 어깨를 밀어내는 윤호의 손에 꾸욱 힘이 들어갔다.
"성화형이라고 불러봐."
"...성화형."
"응. 윤호야."
강아지를 다루듯 머릿결을 따라 쓰다듬는 손길에 윤호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소름에 몸이 으슬으슬했다. 성화의 손에 힘이 빠지자마자 윤호는 불에 데기라도 한 양 빠르게 물러났다. 성화의 손은 윤호를 다시 붙잡으려 들지 않았지만 거둬지는 움직임에는 아쉬움이 묻어났다. 가지런히 접은 무릎을 끌어안고 코를 박은 윤호가 눈을 깜박였다. 성화는 가만히 앉아 둥글게 웅크린 윤호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 나 사냥당한 거구나. 윤호는 쉽게 결론내릴 수 있었다. 동그란 동공을 가진 사람의 얼굴에서 자꾸만 뱀이 보였다.
-
으웅. 감긴 눈을 찌푸린 윤호가 스르르 제 곁을 떠나는 담요를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추워어. 뒤편에서도 저처럼 잠기운에 젖어 칭얼대는 소리가 났다. 맞닿은 등은 그럭저럭 따뜻했지만 두 명의 장정을 포근하게 덮어주기에 윤호의 담요는 너무 작았다.
캬악. 그르르. 온전하지 못한 성대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듣기 싫었다. 예기치 못하게 윤호를 만난 성화는 제때 자리를 뜨지 못하고 좀비 무리가 돌아다니는 숲에서 밤을 맞이했다. 에휴 탄식한 성화가 제 가방을 뒤적여 꺼낸 것은 튼튼한 밧줄이 연결된 천이었다.
"형은 평소에도 이렇게 나무 위에 올라와서 자요?"
"그러겠냐. 불도 못 피워서 추워 죽겠구만."
"자꾸 움직이지 마요. 좁아."
"너나 좀 가만히 있어."
성화가 홀로 쓰던 해먹에 기어코 윤호까지 구겨 들어갔다. 무게가 한 점으로 쏠리는 해먹의 특성상 윤호와 성화는 두 개의 자석마냥 찰싹 달라붙은 채 잠을 자야 했다.
만난 지 몇시간 남짓한 타인을 윤호도 성화도 믿지 못했다. 한 담요를 나눠 덮고 잠자리에 들면서도 마지막 자존심이라고 둘 모두 서로 등을 돌리고 누웠다. 이것도 적과의 동침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억지로 눈을 감고 있던 윤호가 떠오른 생각에 피식 웃었다. 달달 떨리는 잇새로 입김을 뿜다 문득 고개를 돌렸다.
"성화형. 자요?"
"..."
"징그러워도 참아요. 우선 살고 봐야죠."
해먹 위에서 꿈틀대며 몸을 뒤집은 윤호가 저를 등진 성화를 와락 껴안았다. 태아처럼 적당히 구부려진 성화의 자세에 윤호의 몸이 딱 들어맞았다. 똑같은 의자를 겹쳐 쌓는 듯한 모습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화에게 찰싹 달라붙은 윤호가 후드 모자 위로 드러난 성화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얼굴을 묻었다. 축축하고 차가운 흙냄새 대신 따뜻하고 포근한 살냄새가 귓구멍까지 어지럽게 들어찼다. 희미한 이 향기는 비누일까, 바디워시일까. 역겨운 냄새나 안 나면 다행인 세상에 희한한 사람이었다. 한창 코를 킁킁대다 몰래 남의 체취를 맡으며 기분 좋아하는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져, 윤호는 작게 고개를 흔들고 눈을 감았다. 저도 모르게 발개진 뺨은 성화의 어깨에 기대여 있었다.
*
오랜만에 기분좋은 꿈을 꾸었다. 고급 호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새하얀 침대와 이불에 푹 파묻혀 뒹굴대는 꿈이었다. 등 뒤를 내리쬐는 햇살이 따듯했다. 기분좋은 아침이다. 볕이 드는 창가를 향해 몸을 굴리려 했는데. 그랬는데 몸이 뒤집히지 않았다. 이불에 몸이 묶이기라도 한 것처럼 갑갑했다. 당황한 채 낑낑대던 중 성화는 해먹 속에서 눈을 떴다.
아직 서늘한 기운이 있는 아침공기가 거의 남지 않은 나무의 잎들을 가볍게 흔들었다. 이미 해먹 안에도 바짝 마른 단풍잎들이 몇 잎 떨어져 있었다. 바스락대는 낙엽을 하나 집어든 성화가 목덜미를 간질이는 바람에 소스라치며 낙엽을 놓쳤다.
"뭐야...?"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볼 여유도 없이 윤호가 제 뒤에 바짝 달라붙어 있었다. 푸휴, 긴장이 풀려 벌어진 입술에서 섞여나오는 숨소리가 새근새근 계속해서 성화를 간지럽혔다. 일종의 사냥개처럼 이용하려고 잡아놓은 녀석이지만(그리고 생긴 것도 퍽 강아지를 닮았다.), 그렇다고 해서 덩치만 더 큰 개 그 자체처럼 굴길 바란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이 녀석은 뭐지?
제 허리에 단단히 감긴 윤호의 팔에 손을 올린 성화는 담 넘어온 도둑까지 꼬리 흔들며 반긴다는 리트리버를 떠올렸다. 웃는 얼굴도 강아지를 닮았을까, 한번도 본 적 없는 윤호의 표정을 상상 속에서 그려보며 성화는 윤호가 잠에서 깨어나 머쓱하게 물러날 때까지 가만히 눈만 깜박였다. 그깟 백허그 남자끼리 한 걸 가지고 안절부절 못하며 제 눈치를 보는 윤호가 내심 마음에 들었다. 짜식. 충견이네.
-
"한눈팔지 말고 따라와. 그 속도면 따라잡힌다고."
"아, 알았어요 형."
더 가까이 가면 제가 다칠 것 같아서 그래요. 불퉁 나오려는 불만을 눌러담은 윤호가 가방을 고쳐멨다. 성화의 몫까지 도맡았기에 무게가 상당했다. 혼자 길을 헤쳐나가는 것에 익숙한 성화는 뒤따라오는 윤호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거칠게 정글도를 휘둘러댔다. 옛날 망나니처럼 좀비의 목을 베어 머리통이 바닥을 구르게 하고, 이마 정중앙에 칼을 내리꽂은 후 발로 몸통을 걷어차 마무리하기도 했다. 성화가 뚫어놓은 길을 따르는 윤호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윤호와 오랜 세월을 함께한 긴 쇠지렛대는 말라붙은 핏자국이 무색하게 등산 지팡이로 전락했다.
윤호의 예상대로 성화는 하이에나와 같은 스캐빈저 성향이었다. 덫에 걸린 저를 해치지 않고 거둬줬듯이. 직접 인명을 해하는 일은 꺼리나 지금과 같은 도둑질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성화가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로 던져준 가방의 무게가 윤호의 양심을 옥죄었다.
썩은 나무 밑동 아래 낙엽에 덮여 있었던 이 가방은 분명히 다른 생존자가 숨겨놓은 소중한 자원이다. 3인분이 될까 말까 한 적은 물과 식량이었지만 세 끼를 굶으면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는 이들이 이 세상엔 너무나도 많다. 이걸 도둑맞은 사람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땅을 향해 고개를 푹 숙인 윤호는 침울한 생각에 푹 빠져 기계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큰 나무 뒤에 가려져 있던 좀비가 제게 달려들었을 때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캬아악-
"윽...! 이, 이게!"
하필이면 가방을 들쳐맨 팔의 방향에서 튀어나왔다. 팔꿈치로 어설프게 부패한 몸통을 밀어내며, 윤호는 고개를 뒤로 물려 바이러스가 득실대는 이빨에 물리지 않도록 피했다. 하지만 목의 힘줄이 일부 훼손되어 행동반경이 더욱 넓어진 그것은 더욱 가까이 머리를 들이밀어 입을 벌렸다. 썩은내나는 저 시체에게 윤호는 귀 내지는 뺨이 물리기 직전이었다.
"집중 안 하지!"
콰직. 푹. 좀비의 머리통을 밀쳐내 나무기둥에 갖다박은 성화가 곧바로 그것의 턱관절 사이에 칼을 찔러넣었다. 성화가 손을 떼자 풀썩 시체가 쓰러졌다. 아. 고마워요, 성화형.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윤호가 삐걱삐걱 말했다. 뿌득 이를 간 성화가 윤호의 멱살을 잡았다. 한 번 방심하면 그대로 뒤지는 세상이야. 그걸 아직도 몰라? 놀라 크게 뜨인 윤호의 눈을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번뜩였다. 지금 성화에게서 읽히는 감정은 분노, 짜증,
...슬픔?
"네가 신인류건 말건 더 신경 안 써. 너 혼자 바보짓하다 죽어버려도 나는 모르는 일이야. 그 대신, 지금처럼 멍청하게 있다가 어디 물려오기만 하면 내가 먼저 네 머리를 박살낼거야. 알았어?"
"...네, 형."
"그만큼 얻어먹었으면 밥값은 하라고."
거칠게 윤호를 밀쳐낸 성화가 곧바로 뒤를 돌아 가까이 다가온 좀비의 목을 베었다. 회전하는 몸 중심부터 칼을 쥔 손끝까지 전달되는 힘의 흐름이 더할나위없이 깔끔했다. 성화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보인 윤호가 쇠지렛대를 양손에 쥐고 바짝 힘을 주었다. 저를 뒤돌아보며 한껏 폼을 잡고 있는 성화에게로 또 다른 좀비가 비척비척 다가갔다. 윤호는 그것의 정수리에 쇠지렛대의 휘어진 끝에 난 노루발을 찍었다.
땅에 널브러진 시체를 힐끗 확인한 성화가 기특하다는 듯 미소지었다. 요 며칠간 함께 행동하며 처음 본 성화의 웃음이었다. 되로 받은 웃음 말로 퍼주며 윤호도 성화를 향해 눈을 휘어보였다. 닮았네, 리트리버. 성화의 혼잣말이 낮게 들렸다.
전우애일지 뭔지 모를 유대감이 씨앗의 껍질을 가르고 나와 싹을 틔웠다. 그날 밤 처음으로 성화도 윤호를 향해 누워 부둥켜안고 잠에 들었다. 처음 만난 그날처럼 극단적인 환경이 아니어도. 한적한 풀숲에 자리를 깔고 모닥불을 쬐면서도. 그저 서로를 껴안아 체온을 나누는 것이 좋아 윤호와 성화는 한창 뜨거운 연인처럼 포옹한 채 잠들길 반복했다.
자꾸만 부딪히는 다리를 서로에게 감고, 새근새근 고른 숨을 쉬는 몸통을 품 안 가득 안았다. 겨울잠 자는 다람쥐마냥 몸을 둥글게 구기고 누워 궁상떨 일이 더 이상 없었다. 윤호의 품 속에서 깨어난 어느 아침의 성화는 지금은 녹아 없어진 제 마음속 시린 감정이 외로움이었음을 깨달았다.
-
"진심이에요, 형? 저렇게 큰 그룹을 어떻게 털어요."
"이쪽이 오히려 쉽기도 해. 들키지만 않으면, 물건을 도둑맞앚을 때 경비 서는 쫄들을 더 의심하느라 보복을 안 하거든."
"안 들키는 게 어디 쉬워야죠."
"그리고 하나 더. 그룹의 물자를 털어야 각각의 개인에게 가는 피해가 적어. 어제 너 그게 신경쓰였지? 내가 훔친 음식 때문에 그 주인이 굶어 죽을까봐."
"..."
꿈틀 반응한 윤호가 고개를 돌려 성화를 봤다. 기척을 느껴 힐긋 윤호를 향하는 눈동자가 달빛 아래서 갈색으로 반짝였다. 잠깐 눈을 맞추면서도 윤호와 성화는 말 한 마디 주고받지 않고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윤호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생존자 그룹의 쉘터를 내려다보며 구조를 파악하면서도 성화는 계속 윤호에게 신경이 쓰였다. 절도를 포함하여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을 꺼리는 수색자 유형인 윤호는 성화의 방식대로 따라오는 것을 버거워했다. 양심의 가책이 어제처럼 행동에 영향을 줄 정도로 크다면, 윤호의 생존 가능성은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아직 성화는 윤호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한 번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미끼로 소모하기에 정윤호는 강하고 순종적이어서 쓸모가 많았다. 윤호에게서 최대한 이익을 뽑아먹으려면 그를 살려두는 게 먼저라는 것이다.
시각장애인을 놀라게 하지 않도록 안내견은 어떤 상황에서도 짖지 않게 훈련받는다는 말을 성화는 어딘가에서 주워들었다. 생각해보니 걔네들도 리트리버네. 이제는 제가 윤호의 목소리를 빼앗을 차례인가. 성화가 제 등 뒤로 손을 가져갔다. 긴 망토 속에 숨겨져 있던 묵직한 권총을 꺼내 옆에 있는 윤호에게 건넸다.
"받아. 대충 쏠 줄은 알지?"
"...형 총이 있었어요?"
"걸을 줄밖에 모르는 멍청한 좀비들 쏘라고 주는 거 아냐. 누군가 너에게 총구를 겨눈다면 망설이지 말고 쏴버려. 그게 한 번의 고비는 넘기게 해줄테니까."
"사람을 쏘라고요? 성화형, 저는 도저히-"
식겁하는 윤호의 어깨에 손을 얹은 성화가 가까이 다가왔다. 윤호는 성화와의 첫만남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의 목숨을 저울에 올려 그 무게를 가늠하는, 잔인하리만치 냉혹한 시선. 이제는 그 앞에서 눈썹을 찌푸릴 정도로 반항할 용기가 생긴 윤호가 입술을 꾹 물었다.
볼록하게 부푼 윤호의 뽀얀 볼살에 성화의 손가락이 닿았다. 말랑한 살을 지그시 누르고서 떨어진 성화의 손이 윤호의 손 위로 덮였다. 철컥 하고 실탄이 장전되는 묵직한 감각에 윤호가 흠칫 놀랐다.
"정윤호. 내 말 똑똑히 들어. 죽이지 못하면 죽어."
"이, 이거 놔요. 이러다 발사되기라도 하면-"
장전된 권총의 방아쇠에 성화가 윤호의 검지손가락을 걸었다. 총구가 제 몸통을 겨누고 있는 상황에서 너무나도 무모한 행동이었다. 윤호가 손가락 한번 잘못 까딱이면 그대로 배에 바람구멍이 날 상황 그대로 성화는 말했다.
어쩌면 성화는 윤호 스스로보다도 윤호가 저를 쏠 리 없다고 확신하는 듯했다. 그와 달리 확신이 서지 않는 윤호는 손을 덜덜 떨었다. 성화의 눈이 사나운 기운을 거두고 그리로 내리깔렸다.
"너랑 비슷한 애가 있었어. 너처럼 하얗고, 커다랗고, 이 험한 세상에서 살기엔 너무 순진한 남자애가."
"...그런데요."
"충분히 싸워 이길 수 있는 놈한테 어이없게 죽었어. 자길 죽이려 드는 놈에게 총알 한 발 못 쏘고 말이야."
"..."
"그런 멍청이는 걔 하나로 족해. 그러니까 너는 그러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준 성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비해둔 밧줄을 꺼내 고리를 묶은 성화가 서부의 카우보이처럼 고리를 휙휙 돌려보더니, 문득 윤호를 보고 다가왔다.
"엑. 성화형?"
윤호는 제 목에 걸린 이 고리가 강아지의 산책 목줄일까 사형수의 올가미일까 아리까리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목줄이 당겨져 윤호는 몇 걸음 앞으로 끌려왔다. 밧줄을 팽팽하게 당겨보인 성화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가자, 파트라슈."
"음... 이런 게 형 취향이에요?"
"뭐라는거야! 그런 의미 아냐. 네가 하도 강아지같아서 장난 좀 쳐봤어."
성화가 어이없고 민망한 표정을 웃는 얼굴 위로 비추자 경직되었던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너스레를 떨며 윤호의 목에서 다시 고리를 빼낸 성화가 이번에는 윤호의 목 뒤로 손깍지를 끼워 붙잡고 콩 이마를 맞댔다. 성화의 저돌적인 스킨십에 어느정도 내성이 생긴 윤호는 얌전히 눈만 깜박였다. 그것이 마음에 들어 성화가 풋 하고 웃었다.
"그래두, 윤호야. 지금 네 목숨이 형 거인 건 알지? 내가 너 잡은 거잖아."
"그게 그렇게 되나요. 네 뭐..."
"함부로 대하지 않아. 그냥 내가 하는 대로 따라와주면 돼."
진짜 강아지가 아니더라도 그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응? 성화의 말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잠시 머뭇대던 윤호가 성화를 끌어안고 토닥였다. 형 외로움 타서 이러는 거죠. 알면 조용히 해. 성화가 옷 위로 윤호의 어깨를 약하게 깨물었다.
간질간질 온몸을 타고 흐르는 전기같은 감각에 윤호가 몸을 떨었다. 이 무서운 세상을 겁도없이 홀로 헤쳐온 남자가 이제는 잃는 것이 두려워 눈썹을 늘어뜨린다. 성화가 이렇게 애처롭게 매달리니 윤호 쪽에서 한 수 접어줄 수밖에 없었다.
-
부서진 철망에 나무판자며 철판을 덧댄 쉘터의 방어벽 밖에서 윤호는 성화를 기다렸다. 작지 않은 덩치로 날쌔게 이곳저곳을 곧잘 오르는 성화는 밧줄 하나만으로 방어벽을 넘어 쉘터 안으로 잠입했다. 윤호가 맡은 일이라곤 그저 성화가 훔쳐온 물자를 나눠들고 쏜살같이 도망가는 일 뿐이었다.
타앙-
"?!"
무료하게 성화를 기다리던 때 느닷없이 총성이 울려퍼졌다. 뒤이어 메아리치는 남자의 고함소리, 무언가 와장창 무너지는 소리, 경보음이 울리며 분위기가 소란스러워졌다. 윤호는 이 상황의 근원에 성화가 있음을 직감했다.
비상신호를 받은 차 한대가 쉘터 앞으로 복귀했다. 방어벽 밖에 세워진 차에 다가간 윤호가 운전석 창문을 똑똑 두들겼다. 지잉 내려진 창문 너머엔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뭐야?"
"아. 다행이다."
"너, 그때 그 새끼-"
"찝찝할 뻔 했는데 마침 죽어도 싼 놈이 들어있네?"
탕. 운전석에 앉은 남자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넣는 윤호의 손짓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성화를 만나기 전 저를 죽이러 쫓아오던 망나니들 중 한 명이었다. 열린 차창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운전석 문을 연 윤호가 따끈따끈한 시체를 끌어내리고 그 안에 들어갔다.
이유없이 사람을 패 죽이는 인간말종을 품는 그룹이라면. 이유없이 멸망당해도 싸지. 조수석 시트 위로 권총을 던진 윤호가 다시 차에 시동을 걸었다. 수동 기어를 제끼고서 지프를 후진시켜 일직선으로 최대한 멀리 물러났다. 좀비들을 깔아 뭉개기 위한 용도로 달아놨을 차 전면의 철제 스파이크가 위협적이었다.
상대적으로 내구력이 약한 방벽의 나무판자를 향해 앞바퀴를 돌린 윤호가 안전벨트 후크를 채우고 심호흡을 했다. 번뜩 눈을 뜬 뒤 액셀과 브레이크를 동시에 콱 밟자 타이어가 제자리에서 붕붕 돌며 연기를 피웠다.
핸들을 꽉 붙잡은 윤호가 브레이크 페달에서 발을 떼자 묵직한 지프가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콰직. 그대로 나무판자를 들이받은 자동차는 쉘터의 방벽에 커다란 구멍을 내며 안으로 쳐들어왔다. 질끈 감았던 눈을 뜬 윤호의 앞에 마침 성화가 있었다. 폭주하는 아드레날린을 이기지 못하고 무아지경으로 장총을 돌리며 쏴대던 성화는 답지않게 거친 말로 윤호를 반겼다.
"정윤호 이 또라이새끼. 어쩜 이렇게 기특해!"
"타기나 해요, 성화형!"
"여기서 살아 나가면 내가 궁디팡팡 해줄게!"
성화가 조수석에 올라 문을 탕 닫자마자 윤호가 바쁘게 기어를 조작하며 차를 돌렸다. 윤호에게 차창을 내려달라 부탁할 여유도 없이 성화는 장총의 개머리판으로 조수석 창을 깨 구멍을 냈다. 그리고 제가 깔고앉은 권총을 들어 이쪽으로 몰려오는 생존자들을 향해 대응사격을 했다. 호흡이 척척 맞는 두 무법자가 한 그룹의 쉘터를 엉망진창 헤집어 놓은 뒤 유유히 도망쳤다. 시끌시끌한 총성과 비명에 이끌린 좀비 떼에게 천천히 삼켜지는 것은 그곳을 떠나지 못한 이들이었다.
한적한 길 중간에 차를 세운 윤호가 핸들에 쓰러지듯 기대어 식은땀을 흘려 성화를 불안하게 했다. 괜찮다고 중얼대는 윤호는 내뱉는 말과 달리 손을 내저을 힘도 없었다. 왼쪽 어깨와 가까운 팔에서 총상을 확인한 성화가 윤호의 안전벨트를 풀고 피가 물들어가는 코트를 벗겼다. 몸에 딱 붙는 검은 폴라티를 거침없이 걷어올리는 손길에 윤호가 얼굴을 붉혔다. 추위에 떨 걱정은 없었다.
"아악...! 성화형 근데. 총알 안, 헉. 빼내도 돼, 돼요?"
"지금도 아파가지고 못 버티면서 무슨. 괜히 상처 벌렸다가 감염될 수도 있으니까, 그냥 몸 안에 품고 살아."
"으윽-"
뒤로 젖힌 차 시트에 윤호가 엎드려 기대 성화에게 상처를 내어놓았다. 제 쪽으로 놓인 윤호의 왼팔에 소독약을 뿌린 성화가 붕대를 빡빡 감았다. 고통에 수그려져 덜덜 떨리는 맨등을 쓰다듬고 무릎꿇어 발목 위에 올려진 엉덩이 토닥여주니 그게 뭐라고 윤호가 색색 숨을 고르며 몸을 진정시켰다. 처치가 끝난 뒤 식은땀 뻘뻘 흘리는 하얀 강아지 차에서 내려 모닥불에 뽀송뽀송하게 말려주는 일도 성화는 능숙하게 해냈다.
"캠핑 온 것 같다. 형이랑 이렇게 오붓한 시간도 보내네요."
"참나. 언젠 안 그랬어?"
"에, 그랬나요."
"내가 어이가 없어가지고."
"우응?"
어이가 없다며 코웃음치는 성화의 옆얼굴을 향해서 윤호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사르르 웃어보였다. 믿을 사람이라곤 둘밖에 없는 메마른 세상에서도 서로 굳세게 의지하지 않고, 안달나게 밀고 당기는 윤호의 태도에 성화는 조금 약이 올랐다.
입김 나오는 추운 날씨에 젖은 몸 말리느라 맨살 드러내놓고 있는 윤호를 힐긋대던 성화가 윤호에게 무릎으로 기어가 어깨에 둘러진 담요를 더 단단히 매어주고 낙엽 바스락대는 땅 위에 풀썩 드러누웠다. 윤호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우와. 별 엄청 많아요."
"저기 주황색 별 보여? 저게 화성이야."
"화성이요? 화성이라니까 뭔가..."
"웅. 어렸을 때 내 별명이었어. 내 이름에도 마침 별이 들어가거든."
박마-쓰. 그렇게 불렸지. 성화가 발음을 길게 늘어뜨리고서 히죽 웃었다. 반짝이는 화성을 향해 손을 뻗은 성화가 주먹을 움켜쥔 뒤 손 안을 확인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기만 하는 저 별빛이 야속했다.
"나는 인류가 화성에 가서 사는 게 먼저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지구에 갇힌 채 끝나게 될 줄이야."
"아직 안 끝났잖아요. 누군가는 화성에 가게 될지도 모르죠."
"그래. 그랬으면 좋겠다."
"형은 가고 싶어요? 화성."
윤호의 물음에 성화의 눈이 깜박깜박 반짝였다. 검푸른 밤하늘을 비추는 눈동자 한켠에 콕 박힌 별 하나가 선명한 주황빛을 내고 있었다. 윤호는 기분이 묘했다. 섣불리 정의할 수 없는 이 감정에 색이 있다면 저렇게 노을빛을 닮은 따뜻한 주황색일거라고, 모호하게 추측할 뿐이었다.
"음... 아니."
"그래요? 화성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
"좋아하지. 그러니까 안 갈래. 화성에서 살면 저 별빛을 볼 수 없잖아."
"되게 어렵게 생각하네요, 형."
"그런가."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는 성화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윤호가 성화 옆에 나란히 머리를 두고 누웠다. 이렇게 같은 시야로 보면 저 별이 그렇게 매력적으로 보이나 해서. 하지만 별반 다를 건 없었다. 바뀐 것이라곤 저를 향해 돌아누워 아기 재우듯 드러난 맨 배를 토닥여주는 성화뿐이었다. 이렇다 할 살집도 근육도 없는 매끈하고 뽀얀 배를 들썩이며 윤호가 간지럽다고 몸을 뒤챘다.
-
아프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제 몸통에 둘러진 성화의 팔을 풀고 잠자리에서 일어난 윤호가 땀이 맺힌 이마를 손등으로 톡톡 닦아냈다. 근육 사이에서 느껴지는 탄알의 이물감과 아예 구멍이 나 버린 살가죽의 고통이 윤호가 잠에 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제대로 털어왔는지 한껏 빵빵해진 성화의 가방을 윤호가 열었다. 사탕이나 담배같은 기호식품도 소독약과 반창고 따위의 기본 의약품도 이 고통을 덜어낼 수 없다. 하지만 구급상자의 바닥까지 박박 긁어봐도 진통제는 없었다.
한참 성화의 가방속을 헤매던 중 가방 맨 구석에 자리한 묵직한 유리병이 윤호의 손에 잡혔다. 이제는 이름도 가물가물한 여자 연예인을 보던 윤호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경쾌하게 진녹색 뚜껑을 까드득 땄다. 곧바로 병 입구를 주둥이에 꽂고 병나발을 불었다.
*
"윤호 너 술 마셨어? 왜?!"
"으웅, 네에...?"
"추워? 아파? 그것도 아니면... 우울해?"
"아뇨, 아니요. 저 괜찮아요..."
해가 뜨기 전 새벽부터 일어난 성화가 잠기운에 몽롱한 윤호를 연신 닦달했다. 성화에게 짤짤 흔들리는 중 윤호는 제가 하나도 취하지 않았음을 다시한번 깨달았다. 하필이면 술이 조금도 듣지 않는 체질이라 소주 네병을 연달아 마신 후에도 정신이 멀쩡했다. 통증과 싸우던 중 이제 겨우 잠에 들려던 찰나 성화가 쫑알쫑알 저를 추궁하니 그 순한 윤호도 눈썹이 찌푸려졌다.
저 술 안마셨어요. 귀찮아진 윤호가 딱 잘라 거짓말을 뱉고서 담요를 말고 돌아누웠다. 잠깐 흐르는 정적 속에서 윤호가 푸우 단내나는 숨을 뱉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돼? 성화의 못마땅하다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후읍?"
어깨가 잡혀 똑바로 눕혀진 윤호의 입술이 말캉한 무언가로 틀어막혔다. 인공호흡하듯 윤호의 고개를 젖히고 아래턱을 당겨 입을 벌리게 한 성화는 숨을 불어넣는 대신 윤호의 입 안으로 들어가 혀를 섞었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입에 물린 것을 오물오물 받아들이던 것도 잠시 정신을 차린 윤호가 성화를 밀어냈다. 둘의 입술 사이에서 늘어지는 은실이 툭 끊겨 차가운 감각을 전했다. 그것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지를 더욱 상기시켰다.
윤호가 소스라치며 뒤로 물러나 앉았다. 손등으로 입술을 가린 채 얼굴을 붉히고 씩씩 거칠어진 숨을 쉬는 윤호를 성화는 지그시 바라볼 뿐이었다. 그 태도에 기가 찬 윤호가 원망스러운 투로 성화를 불렀다.
"성화형,"
"마셨네. 술."
"지금 그게 중요해요? 갑자기. 갑자기 무슨-"
"왜. 하면 안돼?"
원래 키스라는 게, 저장해둔 음식을 반려가 훔쳐먹었는지 감시하면서 생겨난 거래. 내가 내 반려인간 살펴보는 게 못할 짓이야? 능청스레 다가와 윤호의 허벅지 위에 올라탄 성화가 팔다리로 윤호의 몸통을 옭아맸다. 뱀에게 사냥당하는 쥐의 심정으로 윤호는 내면의 비명을 빽 하고 질렀다. 실제로 뱀의 유연하고 긴 몸에 숨통이 졸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핏대 돋은 윤호의 목 위로는 마냥 희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있었다. 그 꼴을 재미있다는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성화가 반쯤 약올리듯 샐쭉 혀끝을 내밀었다. 남은 절반의 함의가 유혹이라는 것을 윤호는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다.
"...개도 함부로 대하면 주인 물어요."
"뭐야. 그래서 나 물겠다고?"
"엄청 세게 물 거예요. 놔달라고 해도 안 놔줘요."
제게 매달린 성화를 그대로 안아들고 일어선 윤호가 지프 트렁크에 냅다 성화를 집어넣었다. 씩씩 한껏 성이 난 등판을 끌어안는 성화는 윤호의 눈 뒤에서 웃고 있었다. 귓바퀴에 가볍게 입맞추는대로 꿈틀대며 낮게 목을 긁는 짐승이 가슴 벅차게 마음에 들었다.
"윽- 윤호야,"
"..."
완전히 젖혀진 뒷좌석 시트에 눕혀진 성화가 문득 눈썹을 늘어뜨렸다. 우뚝 움직임을 멈춘 윤호가 가만히 제 머리카락이며 뺨을 쓰담는 성화의 손길을 받았다. 어둑한 차 내부에서 성화의 눈이 더욱 큰 빛조각을 머금었다. 그는 울먹이고 있었다.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성화의 복잡하게 일렁이는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받은 윤호도 울 듯 눈을 찌푸렸다.
"고마워 윤호야. 내 곁에 있어줘서."
저도 고마워요 성화형. 꾹꾹 눌러담아도 자꾸만 흘러넘치는 주황색 별빛을 온 마음에 퍼뜨리며 윤호는 대답 대신 길고 긴 키스를 퍼부었다. 위태롭게 너울대던 감정이 맞부딪히며 격렬하게 폭발했다.
*
"아야."
"어디 다쳤어요?"
"별 거 아냐. 살짝 긁힌건데,"
"손 이리 줘요."
"웅."
왼손으로 서툴게 반창고를 붙이려 꼼지락대고 있던 성화에게로 크고 하얀 손이 다가가 반창고와 상처입은 손을 가져갔다. 새빨간 핏방울이 맺힌 상처에 따뜻한 입김을 호오 불어넣은 윤호가 성화의 검지손가락에 깔끔하게 반창고를 붙여주었다. 간지러운 감각에 잘게 도리질치면서 성화도 윤호의 손을 꼭 잡았다. 살색 밴드가 결혼반지라도 되는 양 윤호와 성화는 서로를 마주보고 쑥스럽게 웃었다.
그래. 그나마 의심해볼만한 일이라곤 그것 뿐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총상을 입었던 저도 멀쩡한데 손가락 좀 베였다고 바이러스에 전염당하는 게 말이나 되는가! 윤호는 차 밖을 배회하는 좀비들만 아니었다면 있는힘껏 고함을 지르고 싶었다. 구토를 동반하는 어지러움과 탈수까지 야기하는 고열에 시달리면서 성화가 느릿하게 털어놓았다.
"사실 이거, 좀비한테 긁힌거였어."
"...!"
"이빨은 아니고. 손톱에. 별일 아니라고 생각해서 너한테도 말 안한 거였는데. 하아. 이까짓 상처로 감염될 줄이야."
"괜찮아요, 괜찮아요. 제가 계속 곁에 있을게요.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줄게요."
어디서 맞고 온 제 새끼 감싸듯 윤호가 성화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마음같아선 그 다정한 품에 하염없이 안겨만 있고 싶었지만. 하나의 결말로 귀결될 제 미래를 직감한 성화는 제 마음의 귀퉁이부터 조심스레 접어나갔다. 때론 사랑하기에 놓아주어야 한다는 말을 성화는 이제서야 실감했다.
"그러면 안돼, 윤호야. 그러지 마."
"성화형!"
"부탁할게."
"안돼요. 저는 포기 못 해요. 못 한다고요..."
윤호가 떼쓰는 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평평한 시트 위에 무릎꿇고 앉아 등을 숙여 어정쩡한 자세로 윤호에게 안겨있던 성화가 다리를 뻗고 엎드려 윤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제 귀에 두근두근 박동을 전하는 윤호의 심장은 고동칠 때마다 갈가리 찢어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 잔혹한 파장을 자장가 삼은 탓일지, 뜨뜻한 비가 내리는 차 속에서 성화는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졸리다. 감염증상이 나타난 이후로는 의식불명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큼 불편하고 얕은 잠만 잘 수 있었다. 눈을 떠보니 완전히 다른 풍경이 차창 밖에 있었다. 성화가 지끈대는 머리를 부여잡고 상체를 일으켰다. 윤호가 덮어줬을 게 분명한 담요가 너무 더워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뭐야... 여기 어디야?"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이라네요."
"한국과학... 뭐?"
"카이스트 연구소요."
일반인은 출입금지라는데, 이것도 다 옛말이죠. 지프 운전석에서 내린 윤호가 성화를 업고서 조심스럽게 연구소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을 막아설 이렇다할 경비시설도 없었다. 안과 밖을 구분하는 유리문은 파편 몇 조각만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좀비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백신 개발은 5년 전 정부가 제 기능을 상실하기 직전까지 총력을 기울였던 일이었다. 무정부 상태가 되어도 몇몇 직업정신 투철한 연구원들이 연구소에 남아 백신 개발을 계속하고 있다는 소문은 들려왔지만. 시간이 갈수록 소문은 섬뜩한 면이 강조되었다. 멀쩡한 사람을 잡아다 좀비로 만드는 인체실험이 자행되고 있다느니, 이미 개발된 백신을 소수만이 독점하여 저들끼리 잘 살고 있다느니 하는 흉흉한 이야기들.
하지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다. 성화가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태에서 다른 수를 쓸 수도 없는 윤호는 실낱같은 희망에 기대어 이곳을 찾아왔다. 연구소도 여느 편의점처럼 메뚜기떼가 쓸고 지나간 듯 내부가 엉망진창이었다. 윤호는 희망을 잃지 않고 차근차근 건물 내부를 탐색했다. 그런 윤호의 모습은 복도와 방 곳곳에 설치된 CCTV에 여실히 비춰지고 있었다. 흰 가운을 입은, 누가봐도 이곳의 연구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권총을 챙겼다. 모니터를 꽉 채운 수많은 네모들 속을 윤호는 계속해서 서성였다.
"무슨 일로 여기 온 거야?"
등 뒤에서 들리는 젊은 남자의 목소리에 윤호가 뒤를 돌았다. 철컥. 그와 동시에 저를 겨눈 권총의 안전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성화를 업은 상태에서 허리춤의 권총을 뽑아들 수도 없는 윤호는 두 손을 들지도 못하고 감정에 호소했다.
"치료제가 필요해요. 여기 형이, 바이러스에 감염됐어요."
"...어떻게 알고 왔지?"
"네? 그냥 대학교 캠퍼스 뒤에, 연구소라고 써있길래 들어왔는데ㅇ-"
탕.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가 방아쇠를 당겼다. 놀라 온몸을 바짝 긴장시킨 윤호가 서서히 눈을 떴다. 저도 성화도 멀쩡했다. 대신 뒤를 돌아보니 쓰러진 시신 한 구를 뭉그적 넘어와 저희를 향해 손을 뻗는 좀비들이 있었다. 윤호와 성화를 쫓아 들어온 게 분명했다.
"젠장. 일단 따라와!"
남자가 다가와 윤호에게 업힌 성화의 등을 뒤에서 떠밀어주며 길을 안내했다. 눈앞의 낯선 이에게 총구를 겨눈 조금 전과 달리 친절한 성정이 묻어나오는 태도였다. 김홍중. 흰 가운 위 파란 실로 수놓아진 이름 석 자가 다급한 몸짓에 나부꼈다.
-
"앞에, 문 여는동안 앞에 좀 막아줘!"
"성화형. 형 칼 어디 있어요?"
긴박한 상황에 떨리는 동공이 카메라에 제대로 인식되지 않았다. 홍채인식 카메라 렌즈에 바짝 얼굴을 갖다댄 홍중을 뒤로하고 윤호가 무기를 찾았다. 권총은 소음이 너무 커 사용하기 곤란했고, 제가 애용하던 쇠지렛대는 성화를 업고 오느라 들고오지 못했다.
바닥에 내려져 주저앉은 성화가 제 정글도를 꺼내들었다. 그걸 건네받으려 뻗어진 윤호의 팔뚝을 잡고 일어난 그가 비틀대다, 좀비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성화형!! 미처 성화를 붙잡지 못한 윤호의 절규가 복도를 쩌렁쩌렁 울렸다.
콰직. 퍽. 느리지만 강하게 휘둘러지는 묵직한 칼날이 부패해가는 두개골을 가르고 들어갔다. 좀비의 머리에 박힌 정글도를 두손으로 잡고 낑낑대며 뽑아낸 성화가 저를 지나쳐 윤호에게로 향하는 좀비의 다리를 걷어차 넘어뜨렸다. 성화에게는 일절 관심도 없이 일관된 방향으로 팔을 뻗던 것이 머리에 구멍이 나고서야 얌전히 엎드려 침묵했다.
연이어 좀비들이 성화를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 마냥 통과해 지나갔다. 당황한 성화가 뒤를 돌아보고 윤호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것들은 윤호와 홍중을 먹이로 인식해 캭캭대면서도, 성화와 어깨를 부딪히고 지나가면서도 성화에게 조금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마치 그가 자신들의 동족이라도 되는 양.
"헉... 허억."
"...형. 성화형."
"나는, 아직... 아니야!!"
날카롭게 소리를 지른 성화가 아픈 몸으로 무리하게 정글도를 휘둘러댔다. 닥치는대로 혐오스러운 것들의 목을 베고 뼈를 부쉈다. 몰려드는 좀비떼의 전선을 물러나게 할 정도로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운 전투였다.
흐윽. 큭. 거친 숨과 함께 질질 흐르는 타액을 어찌하지도 못하고 성화는 계속해서 싸움을 이어나갔다. 이 셋 중 가장 전투에 유리한 것도 저였고, 미끼가 되어 희생하기 좋은 사람도 저였고, 이 고비를 넘겨봐야 어차피 죽을 사람도 저였다. 그러니 제가 몸을 던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 그런데 잠깐. 내가 언제는 정직하게 살아남았다고 이 고생을 사서 하는거지. 가쁜 호흡 속에서 성화는 멍하니 생각했다. 칼을 세 번 휘두른 뒤 결론에 다다르자 피식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제 스스로 외에 지키고 싶은 것이 생겼다. 지켜야 하는 존재가 있을 때 사람은 이리 위험한 환경에서도 바보같이 용감해진다. 그것을 성화는 이제서야 깨달았다.
사람은 쉽게 안 변한다던데. 변했네, 박성화. 이제 죽을 때가 됐나보다. 소매를 걷어붙인 팔뚝이 창백해지다 못해 암녹색으로 변해갔다. 바이러스가 최초로 침투했을 손가락의 상처가 난 쪽 팔이었다.
선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은 윤호가 눈물을 줄줄 흘렸다. 윤호는 성화만큼이나. 어쩌면 성화 이상으로 이 상황을 부정하고 싶었다. 더 이상 잃고 싶지 않았다. 소중한 이들을 하나 둘 떠나보내고 혼자가 되는 건 이제 지긋지긋했다. 그래서 친구와 가족을 모두 잃은 후, 윤호는 황량해진 이 땅을 홀로 걸어왔다. 성화를 만나기 전까지.
굳어있던 마음을 천천히 열어 이제 겨우 소중한 걸 만들었는데. 잿빛 먼지 속에서 피어난 한 송이 장미를 찾아냈는데. 세상은 다시 윤호를 외톨이로 만드려 한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윤호는 눈을 질끈 감고 서러운 울음소리를 터뜨렸다. 성화를 잃고 싶지 않다. 죽어가는 순간까지 저를 위해 싸우는 이 남자를 잃고 싶지 않다. 차라리 정 붙일 틈 없이 이용당하기만 했으면 해방감이라도 느낄 텐데. 사랑에 길들여진 채 버려진다는 건 생각도 하기 싫을만큼 비참했다.
삐리릭- 잠금이 해제된 문을 열어젖힌 홍중이 바보처럼 앉아만 있는 윤호의 겨드랑이를 안아 연구실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무거운 쌀가마니 들여다놓듯 낑낑대며 윤호를 실내로 질질 끌고 온 홍중이 문이 닫히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시선 끝에는 검어진 피로 범벅이 된 채 연구실에 들어온 성화가 있었다. 경계심이 짙어진 눈으로 홍중은 제 권총을 뽑아들어 성화에게 겨눴다. 성화는 순순히 정글도를 바닥에 버리고 두 손을 들었다.
"뒤돌아서 무릎 꿇고 뒷짐 지어. 난 무방비한 상태로 감염자랑 같은 방에 머물 멍청한 놈이 아니거든."
"하아, 헥. 네에. 박사님."
"아직 박사 아냐."
"우리 형한테 손 대지 마요!"
"넌 또 뭐야?"
"악-"
"정윤호! 헉, 가만히 있어. 괜찮아."
"끄윽, 혀어엉..."
홍중에게 괜히 달려들었다가 그의 발에 걷어차인 윤호가 바닥을 굴렀다. 바닥에 엎어진 윤호는 계속 울고 있었지만 눈빛이 가라앉은 성화는 오히러 침착했다. 그것이 윤호를 더 서럽게 만들었다.
손목과 발목이 테이프로 묶이고 마스크 씌워진 입 위로도 테이프가 빡빡 감긴 성화가 가쁘게 콧숨을 쉬었다. 그 꼴을 본 홍중이 마스크 필터를 살짝 내려 코를 드러내주었다. 고마워요 홍중씨. 붙임성 좋게 성화가 웅얼대는 발음으로 감사를 표했지만 그게 더 부담스러운 홍중은 헛기침을 하고 성화에게서 물러났다. 다리 펴고 앉아도 된다고 무심하게 덧붙이면서.
*
성화를 연구실에 남겨둔 채 그 안에 딸린 작은 사무실로 홍중이 윤호를 끌고 들어왔다. 정직하게 갖고 있던 권총을 내어주고 절박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윤호를 앞에 둔 홍중이 입술을 가만 두지 못하고 조금은 초조한 기색으로 고민했다. 홍중이 입을 떼자 면접관 앞 면접자처럼 윤호가 가지런히 모은 무릎 위에 주먹을 올려놓고 눈을 반짝였다.
"성화라고 했나. 저 사람에게 필요한 치료제를 찾아서 왔다는거지?"
"네. 맞아요."
"감염된지는 얼마나 됐어?"
"상처가 난 건 2주일 좀 안됐고요. 증상이 나타난 건... 6일째에요."
"하아. 애매하기 짝이 없는 날짜야. 임상실험을 해 봤어야 이게 먹힐 견적인지를 알 텐데."
"그 말은..."
"좀비 바이러스를 파괴시키는 항원이 그저께 처음 발견됐어. 잘만 배양하면 치료제가 될 가능성이 높겠지."
윤호의 얼굴이 놀람과 환희로 젖어갔다. 그러면. 그러면 성화형은 치료될 수 있는거죠? 세상에 백퍼센트라는 확률은 없지만. 아마도. 홍중이 고개를 주억이자 윤호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감격해 어쩔 줄 몰라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연이어 고개를 숙이는 윤호의 앞에서 홍중은 책상 위로 손을 가져갔다. 윤호가 어찌해볼 틈도 없이 홍중이 빠르게 낚아챈 것은-
"잠깐만요. 왜요? 왜 이러시는 거죠?"
"문제는 저쪽이 아니라 너야. 내가 널 믿을 수 없거든."
홍중이 제 권총을 다시 집어들어 윤호를 겨눴다. 이제 겨우 항원이 발견됐을 뿐 연구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어. 항원 자체의 능력도 미지수야. 얼만큼의 용량이 필요한지, 어느 정도의 증세까지 완치할 수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지.
홍중의 설명을 빠릿하게 머릿속에 쑤셔넣으며 윤호가 머리를 팽팽 굴렸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걱정하는 건...
"그걸 무시한 채 네가 항원 샘플을 저 남자에게 몽땅 주사하겠다면, 나는 이 행성에 사는 모두의 목숨을 걸고 널 막을거야."
"그 말은. 항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제가 얌전히 기다린다고 해서 무조건 성화형을 구할 수 없다는 거네요. 그 반대로 행동한다면, 다른 가능성이 있고."
"윽! 너 이새끼. 정신 안 차려?!"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홍중을 밀쳐낸 윤호가 홍중의 책상 위에 있는 제 권총을 들었다. 의자째로 벽에 밀쳐진 홍중도, 책상에 기대 선 윤호도 서로에게 총구를 겨눈 채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사무실 안에서 터져나온 총성에 반응한 좀비들이 복도에서 스산하게 울부짖으며 문과 벽을 두드렸다. 그에 겁먹어 묶인 몸을 웅크리고 덜덜 떨던 성화가 사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카키색 코트가 피에 젖은 윤호가 비틀대며 안에서 나왔다.
성화형. 헐떡이는 날숨과 함께 윤호의 입에서 나온 제 이름이 어색했다. 윤호는 안도한 듯 편안하게 미소짓고 있으면서도, 슬픔에 잠식된 눈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처음보는 윤호의 모습이 이상하리만치 어색했다. 소름끼친다는 말이 가장 정확할까.
"윤호, 너..."
"조금만 기다려요 형. 제가 치료할 방법을 찾았어요."
"너 저기 안에서 무슨 짓을 한 거야! 아까 그 사람, 쏴 죽였어?"
"이거 하나면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어요."
윤호는 성화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제 할 말만 중얼댔다. 제 앞에 앉아 액체가 채워진 주사기를 든 윤호에게서 성화는 처음으로 공포라는 감정을 느꼈다. 셔츠 소매를 걷어올리는 윤호의 손길에 성화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성화가 저항하자 윤호가 거의 성화를 짓누르듯 올라타 압박했고, 팔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결국 주사는 남김없이 성화의 몸 속으로 들어갔다.
옆에 떨어진 정글도로 조심스럽게 테이프를 뜯은 윤호가 성화에게서 마스크를 벗겨내고 온 얼굴에 쪽쪽 입을 맞췄다. 불길한 예감에 부르르 몸을 떠는 성화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방금 제 몸에 들어온 치료제가 얼마나 무거운 가치를 지니고 있었을지 생각할수록 더더욱 떨림이 커졌다.
"성화형. 사랑해요. 이 지구의 누구보다도 사랑해요. 그 무엇도 형과는 바꿀 수 없어요."
"안돼. 안돼 윤호야. 나만 치료한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 우리 모두를 생각해. 누구에게나 소중한 사람이 있어. 네가 이러면, 흑. 안된다고..."
"형은 제 별이에요. 형이 제 빛이고, 살아갈 땅이에요. 계속 제 곁에 남아줘요, 성화형."
"윤호야..."
계속해서 고개를 젓는 성화를 끌어안고 윤호가 흐느꼈다. 윤호가 60억(으로 줄어든) 인간의 목숨을 건 저울질에서 이렇게 이기적인 선택을 할 줄은 성화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만큼 맹목적으로 저를 사랑했던 것인가. 그렇다면 제 책임도 있다는 것이다. 윤호에게 감염된 사실을 조금만 더 오래 숨겼다면. 그날 입맞추지 않았다면. 아예 같이 행동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까. 물밀듯 쏟아지는 후회 속에서 성화는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어지러운 머릿속이 엄청난 졸음으로 잠겨갔다. 다정하게 뺨을 쓰담는 윤호의 손길과 짠내음 나는 눈물에 젖어도 여전히 달콤한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흐릿한 시야 속에 애써 웃어보이는 윤호의 얼굴이 담겼다. 세상을 감각하는 모든 것이 윤호에게 둘러싸인 채 성화는 눈을 감았다.
...
*
숨쉬는 게 불편했다. 코와 입안에 꽂힌 관이 공기를 주입하고 빨아당기며 억지로 정상적인 호흡을 유도했다. 코와 입 전체를 감싼 호흡기 속에서 구역질을 하며 성화는 깨어났다. 몸의 움직임이 둔한 것이, 저는 물 속에 있었다.
물이 가득 찬 관 속에서 몸부림을 치니 유리관 안에 푸른빛이 들어오고 삐용삐용 비상신호가 울렸다. 그에 놀란 성화가 눈치를 보며 주춤 움직임을 줄였다. 어슴푸레하게 비치는 이곳은 창문 하나 나지 않은 실험실이었다.
대략 상황을 파악하고 마음을 가라앉히자 성화는 자연스럽게 결론내릴 수 있었다. 나, 살아났나보다. 호흡기하며 팔에 꽂힌 링거들, 머리와 가슴에 붙은 정체모를 전선들을 보니 저는 이 연구소에서 지극정성으로 치료받은 게 분명했다. 이것도 전부 윤호의 뜻대로 된 것일까. 성화는 불안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윤호를 만나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듣고싶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흰 가운을 걸친 소년이 성화가 있는 방문을 열어젖혔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을 웅크리는 성화는 신경쓰지 않고 소년은 바쁘게 유리관 아래 복잡한 그래프와 숫자들을 확인했다. 보다 나이가 많고 노련해보이는 이들까지 실험실에 모이고 난 뒤에야 성화는 유리관 밖으로 나와 삽관된 호흡기를 빼낼 수 있었다.
"윤호. 윤호는 어디 있어요?"
커다란 수건을 두르고 앉아 투명한 호흡기를 남겨둔 채로 색색 숨을 쉬다, 낮게 갈라지는 목소리를 가다듬은 성화가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왜인지 성화를 둘러싼 모두가 서로 눈치를 보며 대답하기를 주저했다. 탈색한 금발이 목덜미까지 내려오는 소년이 그들 사이를 가르고 나와 성화의 앞에 섰다. 기껏해야 이 연구소의 인턴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소년이 이들의 우두머리라도 되는 듯 아빠뻘 되는 연구원들이 소년의 손짓 한번에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 전에 확인해볼 게 있습니다. 본인이 누군지 기억하시나요?"
"박성화. 스물여섯이에요."
성화가 올바른 대답을 했음에도 연구진들은 성화에게 큰일이라도 벌어진 것마냥 웅성댔다. 그렇군요. 우선 회복실로 이동할까요. 홀로 동요하지 않은 소년이 성화에게로 직접 손을 뻗었다. 볼펜이 꽂힌 가슴주머니에 그의 이름이 수놓아져 있었다. 강여상.
병동 입원실처럼 꾸며진 회복실에, 환자복 같은 민무늬 천옷을 입고 들어간 성화를 찾아온 것은 윤호가 아닌 얇은 태블릿 한 대였다. 침대 위에 탁상을 펼쳐 태블릿을 올려놓은 여상은 애타게 윤호만을 찾는 성화에게 저장된 영상을 보라는 말만 남기고 떠나갔다. 성화는 하는 수 없이 재생 버튼을 눌렀다. 영상 속에는 윤호가 있었다.
[어... 이게 얼마만일까요, 성화형. 우선 속여서 미안하다는 말부터 하고 싶어요. 제가 형에게 주사한 건 치료제가 아니라 수면제였어요. 지구와 성화형 모두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홍중이형이 알려줬거든요. 아, 홍중이형은 우리가 만났던 연구원이에요. 기억나죠?]
영상 속 윤호의 웃음은 어딘가 작위적인 구석이 있었다. 애써 저를 안심시키려는 윤호의 태도에 의심을 품으며 성화는 더욱 불안해졌다.
[충분히 연구하고 여럿에게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항원의 양을 불리는 데엔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때의 형에게는 시간이 없었어요. 형은 거울을 못 봐서 모르겠지만 그때 형 눈이 회색으로 질릴 정도였거든요. 그래서 잠시. 시간을 벌어야 했어요.
냉동인간 기술은 정부의 지원이 끊기기 전까지 활발히 연구되고 있었어요. 지금 치료제를 개발해서 사회를 다시 정상적으로 회복시키면. 몇 년 안에 형을 깨울 수 있을지도 모른대요. 좀비 바이러스도 없는 예전의 형 그대로 말이에요.]
성화가 팔의 옷소매를 걷어 바이러스가 감염된 상처를 확인했다. 과연 윤호의 말이 맞았는지 팔은 상처는 물론 부패한 흔적 없이 말끔했다.
[그때가 되면 제가 형이 되어 있겠네요. 그래도 저는 계속 성화형이라고 부를래요. 형은 어떻게 하고 싶은지 생각해둬요. 그럼 안녕.]
영상은 그게 끝이었다. 재생이 끝난 검은 화면에 비치는 제 얼굴만 바라보던 성화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바탕화면에 있는 폴더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성화형 생일축하영상" 폴더를 연 성화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일축하영상이... 뭐 이렇게 많아?"
[사랑하는 성~화~형~ 생일 축하합니다~ 스물일곱번째 생일 축하해요, 형!]
얘도 참. 이걸 매년 같은 날에 찍고 있었던거야? 이렇게나 많이, 이렇게나 오래...
[마흔살을 불혹이라고 부르는 이유. 혹시 성화형은 알아요? 나이가 충분히 들어서 쉽게 혹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붙여진 말이래요. 음, 저는 그 말에 동의 못하겠는데. 형은 어때요?"
...그러면. 지금은 대체 몇 년이나 지난거지?
[와, 시간 진짜 빠르다. 형 벌써 환갑이에요. 형은 아직 이렇게 젊은데. 저만 이렇게 늙어버렸네요.
성화형. 근데요, 형의 마음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형이 사랑하던 제가 지금의 제게도 남아있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그만 일어나주면 안돼요? 저 너무 힘들어요...]
성화는 그만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회복실에 의료진이 쳐들어와 성화에게 안정제를 놓았다. 그들 뒤에서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저를 구경하는 여상에게 성화가 절박하게 물었다. 두 가지 질문 중에서 고민했던 걸 예상했다는 듯 여상은 성화의 두 가지 의문을 모두 해소해 주었다.
"우리 윤호 어딨어...!"
"딱 100년이네요. 저 멀리 어딘가로 여행을 떠난 당신이 그의 곁으로 돌아오기까지 자그마치 100년이 걸렸어요. 그렇다면 당신이 애타게 찾는 그 사람은, 과연 지금까지 살아있을까요?"
*
"저런... 그런 안타까운 사연이 있었군요."
고개를 푹 숙이고 바닥으로 눈물을 떨구는 윤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이나 진정하지 못해 인터뷰를 중단한 윤호는 꼬박 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어렵게 입을 열었다.
"김홍중 연구원이 우리를 좀비 바이러스로부터 해방시킨 영웅임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다만 이 방송을 지켜봐주시는 여러분께서는, 여러분을 위해 희생한 인간 박성화 또한 기억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홍중이 개인적으로 손을 대 냉동인간이 된 성화는 사회가 부활한 뒤 자연스럽게 실종 처리되었고, 시간이 흘러 사망으로 처리되었다. 그리고 성화의 희생을 높이 산 대중은 실종된 성화 또한 홍중과 같은 격으로 추존되길 바랐다. 그렇게 형식뿐인 성화의 관은 새하얀 대리석을 깎아 만들어, 홍중의 관 옆에 안치되었다.
검은 현무암과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석관은 완전하게 대비됨과 동시에 하나처럼 어우러졌다. 그것을 의식한 것일지. 단명한 둘과 달리 천수를 누리고 간 윤호는 성화의 옆에 나란히 안치되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의 염원을 이루어주었다.
흰색과 검은색이 점점이 섞인 화강암 석관이 추가로 놓이는 것을 끝으로 좀비 바이러스 사태를 종결시킨 세 명의 영웅은 두고두고 회자되며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연구소 지하 구석에 숨겨진 유리관의 정체를 알면서도 여상은 사람들 앞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슬피 웃어보이고 박수를 쳤다. 여상은 그렇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성화가 잊혀지기만을 기다렸다.
쓸데없이 호기심이 많아 남의 무덤이나 파헤치는 사내아이 하나만 아니었다면. 여상은 얌전히 지내려고 했다.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