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하지 마십시오

by. 하나로백

윤섷 in Dystopia

"의심하지 마십시오."


이 문장을 마지막으로 오늘 아나운서 정윤호는 퇴근이다.


매일 이 문장을 말하기 시작한 지 2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정윤호는 이 말을 내뱉을 때마다 역겨웠다. 통제되는 이 세상을 이겨내기 위해선 끊임없는 고민이 필요하다. 근본적인 고민부터 못 하게 차단하려는 체제의 의도가 오롯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의 방송국은 흔히 알고 있는 방송국과 다르다. 각 방송 회사의 가치관에 맞춘 정보를 제공하는 회사가 아닌, 국가의 체제를 알리고 세뇌하는 목적으로 방송국을 운영한다. 이 세계에서 방송국은 단 하나밖에 없다. 


3년 전 다른 차원에서 이 디스토피아 세계로 넘어와 선동당하지 않았던 것일 뿐, 태어나서 이 세상을 살았다면 정윤호 본인도 순응하며 살았을 생각을 하니 아찔하다. 


그럼에도 이 아나운서 일을 계속하는 것은 정윤호 그가 이 차원에서 해야 할 숙제가 있기 때문이다. 약속된 혁명의 날이 올 때 윤호는 아나운서로, 진실을 사람들에게 전달할 사명을 마음에 품고 있다.


약속의 그날이 오는 순간만을 기다리며, 마이크 앞에서 진실을 말하고 싶은 걸 삼켜낸다. 무미건조한 톤으로 사상을 전파한다. 그 사명을 갖고 3년 전에 이 차원으로 넘어왔다. 그전까지 들키지 않고 살아남아야 했다.







윤호는 스튜디오에서 빠져나와, 아나운서실로 갔다. 아나운서실은 방송이 없는 시간대에 아나운서들이 사무업무를 보는 공간이다. 바로 퇴근해도 되는데 윤호가 사무실에 들르는 이유는 원고를 본인의 책상 위에 올려놓기 위해서다. 한번 방송에 쓴 원고는 윤호에게 종이 쓰레기일 뿐이다. 하기 싫은 말을 업무로 내뱉은 것도 불쾌한데 이걸 굳이 집에 들고 갈 필요가 없다.


원고를 책상에 내려놓았고, 퇴근을 위해 사무실을 떠나려 했다. 그런데 옆자리에 앉은 선배 아나운서 박성화가 아직 자리에 앉아 일하고 있었다. 성화가 늦은 시간까지 일하는 건 흔하지 않았다. 윤호는 그러한 그를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선배, 일이 더 있어요?" 


성화는 윤호에게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아니. 너에게 할 말이 있어서 기다렸어."


윤호는 궁금증에 이끌려 성화를 바라봤다. 성화는 생각이 깊어진 듯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주저했다. 자신의 속내를 최대한 숨기고 싶어 억지로 입꼬리를 올린 채 입 속에 떠도는 말을 머금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기 힘들면 회의실에서 이야기할까요?"

"안돼. 여기서 말하자."

“네. 좋아요.”


윤호는 성화의 표정을 읽은 듯 대안을 제시했지만, 성화는 회의실로 이동하는 것을 거절했다. 보편적인 세계였다면 개인적인 이야기는 회의실에서 하는 것을 더 선호하겠지만, 이 세계의 사람들은 회사 회의실에서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많은 것을 논의하며 결정되는 공간은 통제하에 운영했다.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킬 요소를 미리 감지하기 위해서다. 이 세계는 회의실마다 전부 CCTV가 설치되어있었고, 모든 장면은 빅브라더에게 전송되었으며, 수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가디언이라 불리는 경찰이 바로 현장으로 출동했다.


성화가 말하려는 게 보편적인 주제가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뭐에요?”


성화는 조금 뜸을 들인 뒤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윤호. 너 혁명을 준비하고 있는 거 맞지?”

“저를 신고했어요?”

“아니.”


윤호는 깊게 숨을 마시며 많은 선택지 중에 무엇을 말해야 할지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녁 마무리 방송을 담당한 아나운서는 정윤호 혼자였기에, 이 공간에는 자신과 자신을 기다린 성화 단 두 명만이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윤호는 과감해지기로 했다. 


이 세계의 룰은 혁명을 준비하고 있는 게 의심이 된다면 바로 가디언에게 신고해야 한다. 신고를 빨리할수록 혁명을 신속하게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성화는 신고 대신에 자신에게 먼저 확인받는 질문을 건넸다. 신고하지 않고 자신에게 확인받는 건 특이한 이유가 있을 것만 같다. 판에 박힌 규칙을 따르도록 만드는 이 세계에서 예외적인 행동을 한 성화에게, 정윤호도 예상 밖의 반응을 보여주고 싶었다.


“어떻게 알았냐?"

"네. 저는 선배에게 혁명하자고 제안한 적도 없는걸요. 제가 준비 중인 걸 어떻게 안 거죠?"

"제안한 적이 없다니. 네가 날 계속 흔들잖아."


성화는 윤호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어느 날부터 윤호와 대화를 하면 심장박동이 너무 빠르게 뛰고, 얼굴에 열이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맨 처음엔 건강에 이상이 있는 거 같아 간헐적으로 부정맥이 생기는 것 같다며 의료기관에 가서 검사도 해보았으나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결과지만 받았다. 문제없다는 결과를 알고 있음에도 성화는 정윤호 앞에서 남다른 신체 변화가 느껴지는 게 계속 반복되었다. 의심하지 말라는 이 세계의 지침이 있지만 몇 달간 이어지는 상황에 성화는 의심을 시작했다. 정윤호가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한다고.


“전 선배에게 무엇도 하지 않았어요. 금지된 것뿐만이 아니라 합법적인 선에서도 선배를 포함한 어떤 사람도 흔든 적이 없는걸. 남을 변화시키는 혁명을 아직 하지 않았어요.”

“그러면 내가 흔들릴 수 없잖아.”


성화는 윤호에게 그럴 리가 없다고 했다. 흔들지 않았으면 자신이 왜 퇴근 후에도 정윤호를 떠올리게 되는지, 꿈까지 꿀 정도로 강한 인상을 남기는 게 만든 요소는 무엇이냐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몇 달째 이럴 수 없다고 따졌다.


성화가 덧붙인 예시를 들으니 윤호는 답을 깨달았다. 다른 차원에서 있었으면 쉽게 인지할 수 있는 답을 성화는 깊게 배우지 못했기에 남을 탓하고 있다. 이 세계는 인간의 감성을 배제했다.


“선배가 왜 그런지 알겠네요."

"맞지? 네가 혁ㅁ.."

"아니요. 저 때문이 아니에요. 궁금해요?"

"어."

"하지만 정부는 의심하지 말랬어요. 문제가 없다고 결과지가 나왔는데 왜 궁금한 거죠?” 


성화는 윤호의 말에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현실을 인지했다. 이 세계는 호기심을 가지면 안 되는 곳이다. 의심하는 순간 균열을 만들어내기에 잊혀진 존재가 될 수 있다.

잊혀진 존재가 되는 건 이 세상의 소멸을 의미한다.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서 처벌당하게 되는 결말이다.


"..."

"의심하는 순간 선배도 혁명하는 사람이 된 거예요. 조심하세요."


선배가 저를 한번 신고하지 않았으니 저도 이번에 봐 드릴게요. 안녕히 계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윤호는 성화에게 퇴근 인사를 남기며 자리를 떠났다. 윤호의 예상대로 그 이후에도 박성화는 정윤호를 신고하지 않았다.

가디언에게 의심되는 사람을 신고하지 않는 것은 불법이다. 하지만 무엇인지 모를 이유로 성화는 그를 신고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신고를 해야 하는 것은 알았지만 신고 후 가디언에게 끌려간 윤호가 잊혀진 존재가 된다는 상상을 하였을 때 형용할 수 없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옆자리에 항상 앉아있던 윤호를 앞으로 볼 수 없다는 가정을 하면, 마치 신체가 다친 것처럼 가슴 속이 아픈 느낌이 들었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싶은 생각도 찰나 들었으나 윤호가 했던 말이 맴돌아 사고를 멈췄다. 오늘 안에 박성화, 자신과 정윤호가 했던 모든 행동을 묻어두고 잊기로 결심했다. 이 세계는 의심하면 안 되니까. 잊혀진 존재가 되면 안 되니까.






성화의 마음속 흔들림은 이 세계의 룰과 타협하며 빨리 진정되었다. 하지만 윤호의 상황은 달랐다. 지금까지 흔들림이 없었던 윤호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가 흔들린 이유는 성화의 의심 때문이다.


누군가를 보며 느끼는 빠른 심장 맥박과 체온 상승을 동반한 호감, 그것은 사랑이다.


성화의 마음을 성화보다 더 빨리 알아차린 윤호였다. 남이 나를 좋아한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무덤덤하게 넘길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심지어 잘생긴 사람이 나에게 반했다는데 말이다.


이 디스토피아 세계에 도착한 뒤부터 지금까지 윤호는 혁명을 준비하는 것에만 집중을 해왔다. 그 목표 만이 이 세계에서 살고 싶은 계기였다. 생존의 목표가 추가되었다.


성화가 윤호에게 보여준 호감으로, 윤호는 넘어오기 전 차원의 세계에서 느꼈었던 감성이 다시 깨어났다. 이후 성화와 함께하는 일상에서 윤호는 성화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었다. 그가 말을 건넬 때마다, 프린트한 원고를 전달해줄 때마다, 방송 잘하고 오라는 격려할 때마다, 성화의 모든 행동에 윤호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성화가 윤호를 보며 색다른 생체 변화를 느꼈듯 윤호 또한 성화를 보면서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하지만 윤호는 이런 감정이 죄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디스토피아 세계에서는 사랑이 금기시되는 감정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감을 성화에게 표현하지 않았고 표현할 수도 없었다. 자신은 혁명하고 곧 떠날 사람. 호감을 표현하는 순간 진심으로 성화를 흔들게 되는 것이다.


성화는 자신을 신고하지 않았지만, 그 상황은 예외적인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랑을 품은 성화를 신고할 사람은 방송국만 해도 많을 것이다. 이 디스토피아 세계는 서로서로 감시하고 고발하며 세상의 균형을 유지하는 곳이기에.


성화를 흔드는 일은 딱 한 번이면 충분했다고, 더 이상 무언가를 하지 말자고 매 순간 윤호는 다짐하며 감정을 눌렀다.









* * *









결전의 날이 왔다. 계획을 실행하는 타겟은 저녁 7시 방송이었다. 퇴근과 방과 후에 가장 많은 시간대이며 퇴근길 교통체증이 심해 가디언과 군인이 빨리 올 수 없는 이점이 있는 기간이다.


스튜디오에 들어선 윤호의 마음은 시원섭섭했다. 이 역겨운 시간이 끝나길 항상 바라왔는데 2년여의 세월에 알게 모르게 정이 들었나 보다. 이 세계에 정이 붙인 만큼, 자신이 하는 혁명은 성공해야 한다고 속으로 화이팅을 몇번이고 암시했다. 이 행동을 시작으로 이 세계가 보다 유토피아로 한 걸음 걷길 바랐다.


뉴스가 시작되고, 윤호는 평소와 같이 뉴스 원고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체제가 정당하다는 무료한 정보들의 나열들. 하루에 몇번이고 듣는 맞은 편의 스태프들은 집중하지 않은 채 멍하니 모니터를 쳐다보기만 했다.


집중력이 흐트러진 제작진들은 프롬프터에 비춘 것과 다른 것을 읽어도 눈치챌 때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 시점까지 윤호는 숨죽여 기다렸다.


"오늘의 소식과 상관없는 한마디입니다. 당신은 스스로를 의심하십시오."


방송 일을 한 지 2년여만에 가장 밝은 눈빛을 띤 채 윤호는 말을 이어 나갔다.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과 변화는 성장의 시작입니다. 매일 잠이 들기 전 먹는 그 약에서 벗어나십시오. 약의 효능은 대기오염의 생존이 아닙니다. 무기력하게 통제된 생활을 순응시키는 약입니다. 약을 하루 안 먹은 다음 날 스스로 달라진 모습을 지켜보며 이 세계를 의심하십시오.”


준비해둔 문장을 다 말한 윤호는 가슴팍에 숨겨놓았던 미니 스피커를 데스크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전원 버튼을 켰다. 금지되었던 음악이 재생된다. 윤호가 방금 말했던 말도 계속 반복 재생된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스피커가 보이고 들리기 시작하자 윤호를 지켜보던 방송국 직원들은 잘 못 됨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 아나운서를 어떻게 말려야 할지 우왕좌왕할 사이, 윤호는 스튜디오를 빠져나왔다.


눈앞의 직원들이 당황한 덕분에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시간은 한정적이라는 것을 그는 안다. 생방송으로 나간 뉴스 방송을 보고 감화된 국민들도 있겠지만, 세뇌된 프로세스에 따라 신고한 국민들도 있기 때문이다.


윤호는 이제 곧 자신을 찾아올 가디언으로부터 도망쳐야 한다. 옥상에 올라가 옥상 저 너머에 숨겨둔 크로머를 깨뜨리고 다른 동료들이 기다리는 또 다른 차원, 사막으로 도망치면 된다. 윤호는 이 차원과는 이제 마지막이다. 할 수 있는 무모한 일을 한가지 더 수행하고 떠나려고 한다.


윤호가 향한 곳은 아나운서실이었다. 아나운서실에는 성화가 있었다. 그는 9시 방송을 위해 원고를 정리하는 중일 것이다. 윤호는 복도를 걸어가면서 마음이 떨렸다. 아까 스튜디오에서 진실을 말할 때보다 더 긴장되었다. 성화가 자신을 보고 어떻게 반응할지 예상이 안 되는 것이 그의 걱정거리였다.


성화는 사무실에서 원고를 들여다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었다. 윤호가 저지른 일을 수습하는 방송으로 대본이 급하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오늘 9시 뉴스를 담당하기에 성화에게 주어진 시간은 1시간 남짓이었다. 원고에 적힌 문장들을 자연스러운 발음으로 만들기에 부족한 시간이다. 그럼에도 이 세계에서 살기 위해선 해내야함이 성화의 부담이었다.


종이에 쓰인 글자들을 입에 담고 있을 때 윤호가 성화 앞에 등장했다. 성화는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


“너 신고 당했어. 가디언이 널 곧 찾아갈 거야. 도망가려면 빨리 떠나.”


성화는 가디언에게 신고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고, 윤호를 배려하는 말을 건냈다. 그 사건 이후 성화가 윤호의 충고에 따라서 체제에 순응하며 지내길 바랐지만 성화는 그러지 못했다. 성화도 윤호와 같이 마음을 감추고 지내왔던 것이다. 윤호의 마음은 벅차올랐다.


윤호는 성화에게 대답 대신 본인이 하고 싶던 말을 했다. 이 대답을 성화가 반가워하길 바라며.


“사랑.”


성화는 제대로 못 알아들은 표정을 지었다.


“어? 뭐라고?”

“사랑이에요. 형이 왜 흔들렸냐고요? 형은 나를 사랑하니까.”


성화가 아는 사랑은 글이다. 세상의 파멸, 균열을 만들어서 이 세계에서 금기시된 감정 중 하나이다. 이곳에서는 사랑 없이 출산하고, 가족에 대한 사랑조차 배우지 못하게 공동체 육아로 교육받으며 성장한다.


성화는 사랑이 무엇인지 직접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 생소했다.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데 자신이 하고 있다니. 그것에 대해 더 묻고 싶어졌다.


“윤호야 니가 사랑을 만든 거야?”


성화의 질문에 윤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윤호가 성화를 사랑하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윤호가 만든 것이 아니다. 박성화 본인이 만들어낸 감정일 뿐.


“전 이제 옥상에 올라가서 다른 세계로 떠나요. 함께 갈래요?”


성화의 의문을 다 해소하고 싶었으나 시간이 없었다. 성화에게 추가적인 설명 대신 윤호는 함께 떠나자고 제안했다. 나도 사랑한다는 말보다 함께 희망을 갖고 살아가자는 말이 더 성화를 사랑하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사랑이 어떤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주는지 모르는 성화에게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더 신뢰를 주는 방법이기도 했다.


윤호는 사무실 입구로부터 몇 발자국 걸어 나가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뒤돌아 성화가 오는지를 지켜봤다.

윤호의 기대와 달리, 성화는 움직이지 않았다.


세상을 깰 준비가 안 되어있던 성화는 멈춰있었다. 윤호는 30초 정도 성화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윤호를 보니, 성화는 살면서 느껴보지 못한 마음속 요동을 느낀다. 그럼에도 움직일 수 없었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세계에 순응하며 살도록 훈련받아왔는데 이 순간 바로 바뀔 수 있었을까. 그런 게 가능했다면 애초에 윤호에게 자신의 마음을 더 보여줬을 테다.


그런 윤호와 성화의 귀 너머로 호루라기 소리가 들린다. 가디언이 오는 소리에 윤호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서 마지막 말을 남기고 떠난다.


“형 사랑해. 앞으로 잘 지내. 자유롭게 행복하길.”






가디언들이 쫓아오는 발걸음 소리가 희미해지도록 열심히 뛰었다. 그들을 따돌리는 데에 성공하며 윤호는 옥상에 도착했다.


삭막하게 펼쳐진 도시의 건물들, 이제 이것도 마지막이다. 언젠가 다시 이 차원에 오게 될 때는 하늘과 나무 색깔처럼 알록달록한 도시로 바뀌길 바란다. 그 시작을 윤호와 동료들이 했지만, 이후의 움직임은 이 세계의 국민들이 참여하지 않는다면 해낼 수 없는 미션이다.


성화를 놓고 가야 해서 이 디스토피아 세계에 대한 걱정이 더 크다. 좋은 변화가 없다면 성화가 잊혀진 존재로 징계를 받을까 봐 겁도 났다. 자신에게 호기심을 보였을 때, 이 세계에만 있기에 아까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아 아닌가..? 오히려 그 호기심을 기점으로 이 세계를 잘 이끌 수 있는 사람이려나.


다시 이 차원에 오게 되는 날, 우리 솔직한 자유로 만나자. 그때까지 잘 지내야 해.


윤호는 성화에게 하지 못한 말을 혼자 읊으며 바지 주머니에 들어있던 크로머를 꺼냈다. 크로머는 모래시계와 같은 생김새를 가진 도구로, 차원을 연결해주는 열쇠이다.


차원을 이동하는 방법은 단순하다. 도착지의 풍경을 머릿속에 떠올린 채 손에 쥔 크로머를 반바퀴 돌린다. 방향이 반대가 된 크로머는 모래시계와 같이 모래가 떨어지며 시간이 흐르게 되고, 모래가 떨어지는 동안 출발지에 있는 시전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희미해진다. 시공간을 넘나들다가 모래시계가 끝나는 순간 도착지에 몸이 닿게 된다.


디스토피아로 넘어왔어도 종종 작전을 짜러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가곤 했다. 그래서 도착지의 모습을 그려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끝이 없는 모래가 펼쳐지는 사막, 벽돌 건물 어딘가에서 웃으며 놀고 있는 동료들의 광경을 생각하며 윤호는 크로머를 돌려 모래시계를 작동시켰다.


뒤집은 크로머에 따라 신체가 갈기갈기 뒤틀리는 느낌을 받는다. 제대로 이동하는 게 맞다. 엄청나게 많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느낌. 여러 번의 공간 이동했음에도 이질적이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통증이란 것을 수없이 경험했기에 윤호는 고통 속에 정신을 놓듯 기절했다.





* * *







“야! 정윤호!”


이름이 들리는 소리에 윤호는 살며시 눈을 떴다. 회색빛 디스토피아에서는 느낄 수 없던 햇살에 눈을 떴다가 적응하기 위해 다시 감았다.


윤호는 눈을 뜨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정우영이다. 디스토피아에서 우영과 소통했을 때 항상 통신이 불안정해 지지직거리는 소리로 듣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그 뜻은 근처에서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뜻이겠지.


이 세상에 잘 도착했다는 생각에 윤호는 안도했다. 말할 기력까진 없어서 눈을 감은 채 팔만 흔들었다. 이 정도면 추가로 이름을 안 부르겠지 싶었다. 조금만 더 이 공기와 햇빛에 익숙해지면 일어나 우영과 아지트로 향하고 싶었다.


윤호의 무난한 생각은 우영의 한마디로 끝났다.


“너 누굴 데려온 거야?”


예상하지 못한 우영의 반응.

무슨 말인가 싶어서 윤호는 눈을 떴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쓰러져 있는 자신의 왼편에 누워있는 사람. 박성화였다.


“어떻게… 성화형이 같이 온 거지?”


성화도 같이 차원에서 넘어온 게 맞는 듯, 강한 햇살이 어색해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시간을 돌려 디스토피아에 있던 시간으로 돌아가 보자. 멀리서 가디언들의 발소리가 크게 들려옴에 따라 윤호는 성화와 있던 자리에서 벗어났다. 성화는 그렇게 멀어지는 윤호를 봤다.


"사랑…"


윤호가 말했던 단어를 성화는 한번 따라서 말했다. 사랑을 금지해야 하는 이유를 방송에서 말한 적이 있었다. 주어진 대본을 프롬프터로 읽어 휘발되는 글들이지만, 잊지 못해 외워진 한 구절이 있었다. 그 문단이 성화 머릿속을 헤집는다.


[사랑은 비이성적인 행동을 유발합니다. 사랑의 끝은 대부분 이별이며 이별은 고통으로 이어집니다]


사랑이라는 단어 하나에 성화는 모든 고민이 실타래가 풀리듯 서서히 풀리기 시작한다. 왜 윤호의 행동들을 가디언에게 신고하지 않았는가. 사랑해서다. 마지막으로 나타난 윤호를 붙잡지 않고 왜 빨리 도망치라고 말했는가, 사랑해서다.

사랑 때문에 성화는 평소에 하지 않는 선택을 연달아서 하고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왜 그가 떠난 곳을 보면서 쳐다보는가. 사랑해서다. 함께하자는 말에 움직일 수 없던 건 가디언에게 잡힐까 봐 무섭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금 이렇게 윤호를 보내는 건 … 괜찮을까? 내가 사랑하는 정윤호를 위해 어떤 선택을 하는 게 맞을까?

성화는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의심하지 말라는 세계의 규칙이 성화 안에서 깨지고 있다. 이대로 이 세계에서 잘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 들었다.


아니, 이 세상에 살아가는 걱정보다 앞으로 윤호를 못 보는 막연함이 더 클지도 모르겠다는 마음이 생긴다. 성화는 윤호가 뛰어갔던 복도를 따라갔다. 윤호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점점 발걸음을 빠르게 움직였다. 뛰기 시작했다.


옥상에 다다른 성화가 본 것은 머리끝부터 점점 희미해져 가는 윤호의 모습이었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 세계를 떠나는 무서움은 순간 생각나지 않았다. 윤호와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성화는 몸을 던져 윤호의 발목을 잡고 같이 차원을 넘어섰다.


그렇게 윤호와 연결된 성화의 신체는 크로머에 의해 같이 사막으로 도착할 수 있었다.


“엄청 아파.”

“원래 차원을 이동할 땐 항상 고통스러워요. 오늘도 마찬가지인 거예요.”


윤호는 이 고통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차원에 넘어와서 에이티즈와 함께 하는 것이라면 여러 차원을 오가면서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들어야 하는 미션을 함께 해야 한다. 앞으로 성화는 많은 고통을 참아내야만 할 것이다. 성장통을 느끼며 성화는 한차원 성장한 사람이 되었다. 앞으로 경험할 수많은 숙제들로 성숙해질 성화의 모습이 기대된다.


"옆에 있는 사람은 동료인 우영이에요. 학교 친ㄱ..."

“사랑도 헤어질 때 아프댔어. 너와 나는 언제 이별로 아프게 되는 거야?”


윤호가 생각한 성화의 미래는 함께 떠나는 모험에서 겪는 성장이었다면, 성화가 생각한 미래는 사랑의 종착지였다. 사랑에 휩쓸려 왔으나, 20년 넘게 이성적인 사고만 하도록 훈련받은 성화 입장에서는 사랑의 끝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성화가 세상을 바꾼 건 정윤호가 유일한 이유였고, 정윤호로 만들어진 세상에서 끝이 기다린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당연히 궁금한 요소였다.


윤호가 어떤 마지막을 알려주더라도 성화는 그가 보여줄 세상에 따라갈 준비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마지막 도착지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사랑은 비이성적인 행동을 유발합니다. 사랑의 끝은 대부분 이별이며 이별은 고통으로 이어집니다.]


사랑이 언급된 그 방송을 윤호도 본 적이 있었다. 윤호는 사랑에 대한 정의를 들으며 못 마땅해했다. 사랑의 부정적인 면으로 이 세계의 사랑을 막는 게 너무 불합리하다고 느꼈다. 사랑이 만드는 힘을 윤호는 믿었다. 사랑은 사람과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킬 수 있는 감정이다. 그래서 성화에게 같이 도망치자고 말했다.


윤호는 성화와 자신이 헤어질 수 없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성화에게 다시 한번 제안했다.


“이별은 사랑이 끝날 때 생겨요. 우리의 사랑은 끝날까요?”


영원한 사랑,

그것이 정윤호가 가진 해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