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트리거가 될 수 있는 소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상처, 유혈 묘사, 자살 시도 요소 내포) 감상 시 유의해주시길 바랍니다.
*본 글의 세계관은 에이티즈 킹덤 <원더랜드> 무대의 배경 및 시대 요소와 무대에 쓰인 오브제를 차용하였으나, 에이티즈 세계관과는 결이 완전히 다른 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성하였음을 말씀드립니다.
01
철컥.
고요한 숲속에서 장전음이 고독하게 울렸다. 가만히 총을 내려다보던 정윤호는 푸른 꽃으로 채워진 관으로 시선을 옮기더니, 마지막 남은 꽃 한 송이를 관 안에 천천히 심어 넣었다. 거대한 나뭇잎 사이사이로 한줄기의 햇살이 정윤호를 비추었다. 정윤호는 관 앞에 두 무릎을 꿇고, 두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제 입 속으로 총구를 밀어 넣었다. 방아쇠에 올린 손가락엔 조금의 흔들림이 없었다. 정윤호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그의 죽음을 묵인하는 것처럼 고요했다.
그러나 정윤호가 손가락에 힘을 주어 방아쇠를 완전히 당기기도 전에, 주변 공기가 완전히 뒤흔들렸다. 정윤호가 눈을 떴을 땐 이미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던 총은 저 멀리 나가떨어진 뒤였고, 별안간 제 앞에 나타난 의문의 남자가 제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그의 눈높이에 맞춰 앉아 멱살을 잡아 끌었다.
“당신 미쳤어?!”
정윤호의 멱살을 쥔 남자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 간단히 끝내 버릴 만큼, 당신 목숨이 고작 그 정도야?”
정윤호의 동공이 조여들었다. 칠흑 같은 우주를 머금은 것만 같은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찡그린 미간, 그리고 크고 동그란 눈매, 익숙하지만 낯선 체향, 스스로 바닷속에 가라앉기로 결심했을 때 다급히 내밀었던 구원의 손길마저 똑 닮았다. 정윤호는 분명 관 안에 아무도 없었기에, 불현듯 나타나 제 멱살을 잡고 있는 남자의 등장을 더더욱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믿을 수 없는 건, 남자의 얼굴이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과 똑같이 생겼다는 것이다. 생전 처음 보는 옷차림새를 하고 있었지만,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의 눈빛은 전혀 낯설지 않았다. 정윤호는 남자의 뺨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손바닥으로부터 흘러드는 생경한 감각을 느끼고서야 정윤호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정윤호는 입술을 달싹였다. 정말 살아 돌아온 건가요? 하지만 정윤호는 어떠한 고백보다 다시금 부르고 싶었던 그의 이름을 제일 먼저 골라 소리내어 물었다.
“박성화 대령님?”
숨겨진 쌍둥이가 있었던 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똑 닮은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하지만 정윤호는 서서히 상념에서 깨어나기 시작하더니 점차 이성을 되찾고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푸른 꽃으로만 가득했던 관 속에서, 그러니까 아무도 없어야 하는 게 마땅했던 관 속에서 별안간 남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남자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처럼 낯선 옷을 입고 있었다. 말투도 자신이 지나온 대륙에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투였다. 이때, 정윤호의 뇌리에 무언가 빠르게 스쳤다. 그럼과 동시에 정윤호는 제 멱살을 잡고 있는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 묵직한 힘으로 그를 제압했다. 남자의 잇새 사이로 고통스런 신음이 흘렀다. 정윤호는 순식간에 남자의 두 팔을 등 뒤로 끌어내 밧줄로 상체를 단단히 포박하고, 무릎 뒤 오금을 쳐 중심을 흐트러뜨린 다음 무릎을 꿇렸다.
“네 놈의 정체가 뭐지? <크라켄>인가? 기습치곤 제법 정성을 쏟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어. 감히 그분의 얼굴로 위장해 내 앞에 나타나다니.”
분노가 이성을 앞섰다. 감히, 감히, 감히! 이빨로 짓씹은 입술에 핏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저 가면을 벗겨내 그 안에 있는 진짜 정체를 밝히고, 죽음 직전까지의 고통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풀숲 너머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메아리쳤다. 풀숲 너머 인기척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의 말소리로 쪼개졌다. 이윽고 몇 초 뒤, 두 명의 사내가 풀숲을 헤치며 나타났다. 머리를 꽁꽁 싸맨 은색 두건 아래로 구릿빛의 피부가 제법 눈에 띄었고, 서로 닮은 이목구비와 두건 아래로 검붉은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뜨려져 있었다. 개중 한 명은 왼쪽 뺨에 길다랗게 흉터가 파여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오랫동안 거친 여정을 지나왔는지 소매 끝자락이나 옷깃 곳곳이 헤졌지만, 전체적으로 몸짓이며 눈빛이며 귀티가 흘렀다. 또한 움직임 하나하나 교육을 받은 것처럼 정교했다.
그들이 정윤호와 남자를 향해 가까이 다가가니 남자는 제 코끝을 스치고 가는 바다의 짠 내 음을 맡았다. 시선을 겨우 들어 올리자, 왼쪽 뺨에 흉터가 새겨진 사내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는 남자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 대령님?”
“뭐? 미오, 무슨 소리야. 대령님이라니. 뭘 보고 그런 말을……대, 대령님?!”
미오를 뒤따르던 치오는 그의 어깨 너머로 슬쩍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가 이내 안색이 싹 굳으며 크게 동요했다. 미오는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윤호 소령님.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대령님은 분명 돌아가셨는데, 그자는 대체 누굽니까?”
“많이 놀란 것 같네, 미오. 임무 중에는 직급이 아닌 ‘활동명’으로 불러야 하는 걸 까먹을 정도로.”
“아, 시…시정하겠습니다. 소, 아니 부선장님.”
“그보다, 무슨 일이길래 그리 다급하게 달려와?”
“그게….”
미오는 남자를 한 번 쳐다보았다가, 정윤호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난처한 눈치를 보냈다. 그 의미를 읽은 정윤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해도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미오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가볍게 숨을 고르곤 입을 열었다.
“바닷가에서 시체 한 구가 발견됐습니다. 그때와 똑같은 사건, 그러니까 벌써 스물다섯 번째 연쇄살인 사건입니다.”
“시체 상태는?”
“나흘 전 사건과 똑같이 시체 목덜미에 ‘나침반’ 문양의 상처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우선 자세한 건 레온이 조사 중이지만, 나침반 문양의 상처 외엔 별다른 타박상이나 찰과상 등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독살일 확률이 높아 보입니다.”
“……. 너희, 여기까지 오는 데 대략 걸린 시간이 몇 분 정도지?”
“시체 발견 후 정황 확인되자마자 바로 부선장님께 달려왔으니…. 대략 10여분 정도 걸렸습니다.”
정윤호는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남자를 일으켜 세운 다음 몸을 두르고 있는 밧줄의 끝부분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미오에게 천을 받아 들고는 남자의 얼굴이 다 가려지도록 덮었다. 가려진 시야 너머로 나지막한 음성이 남자의 귀를 간지럽혔다. 조용히 있어. 남자는 이 이상의 저항은 소용없음을 인정하고 몸부림치는 것을 그만두었다. 시야가 완전히 가려진 이상, 의지할 것이라곤 제 몸을 속박한 밧줄을 잡고 이끄는 정윤호뿐이었다.
“얌전히 따라오는 게 좋을 거다. 현재 정황상, 넌 유력한 용의자니까.”
“…….”
“부선장님! 그자를 살려 두실 겁니까? 수상한 녀석일 지도 모르잖습니까! 선장님의 얼굴로 둔갑한 <크라켄> 선원일 수도 있고요. 위험합니다!”
“그러니 더더욱 정황을 살펴야지. 시체가 언제쯤 사망한 건지, 그 시간대를 조사한다면 이자가 용의자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으니까.”
미오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남자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미오는 나와 함께 가고. 치오는…. 관 정리를 부탁해.”
“네…. 정리는 다 되신 겁니까.”
“……일단은.”
“금방 뒤따르겠습니다.”
세 사람은 인적이 전혀 드나들지 않아 거칠게 자란 숲속을 굽이굽이 걸었다. 정돈되지 않은 길 때문에 땅을 뚫고 나온 굵은 나무줄기나 이곳저곳 막 놓인 돌덩이로 인해 남자는 여러 번 발끝에 걸려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했는데, 그럴 때마다 정윤호는 남자의 몸을 붙잡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정윤호는 의연하게 구는 척했지만, 여전히 머릿속이 복잡했다.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가득한 남자였지만, 이 남자를 데리고 가지 않으면 모든 실마리를 풀 수 없을 것 같다는 무의식이 자기도 모르게 남자를 끌고 오게 된 꼴이 되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관자놀이가 조여들 것 같을 때 즈음, 어느새 세 사람은 바닷가에 도착했다.
곱게 퍼진 모래밭 위를 청록빛 파도가 부드럽게 빗으며 지나가고, 해변가 중앙 부근에 커다란 해적선 한 척이 정착해 있었다. 그 맞은편으로 한 무리가 우글부글 모여 있었다. 무리에 점점 가까워지자, 험상궂게 생긴 이들은 하나둘씩 정윤호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저마다 입을 모아 ‘부선장님! 오셨습니까!’를 외쳤다. 미오가 두꺼운 기록지를 들고 있는 사내를 향해 입을 열었다.
“레온. 지금까지 수사한 내용에 대해 보고해.”
레온이라 불린 사내는 무리 중앙으로 걸어 나와 정윤호를 향해 고개를 꾸벅이곤, 안경을 살짝 들어올리더니 기록지를 하나하나 펼치며 현 상황에 대한 보고를 시작했다.
“사인은 독살로 인한 즉사이고, 시체의 목뒤에 칼날로 새겨진 나침반 문양이 발견됐습니다. 동일범의 소행이 분명합니다.”
“대략적인 사망 추정 시각과 발견 시각 사이의 간극이 어느 정도 되지?”
“시체 상태로 보건대, 대략 죽은 지 15분도 안 되었을 때쯤에 저희가 발견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 따로 특이점은 없었나? 사건 현장은 어땠지?”
“그것이… 바람과 파도에 의해 일부 손상되긴 하였으나 이전과 동일하게 시체 주변으로 커다란 나침반 모양의 그림이 모래밭 위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시체는 마치 나침반의 자침처럼 이용한 모양새였고…. 모래밭 상태를 살펴봤을 때, 나뭇가지로 새긴 게 아닌 칼을 사용한 듯 좁고, 정교하게 흙이 파여져 있었습니다. 흉기는 이 부근에서 발견되지 않았고, 유추하건대 범인이 소지하고 있거나, 숲속 어딘가에 깊숙이 묻었거나 혹은 바다에 던져버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군. 우선 이 부근에 살고 있는 마을 주민 중 목격자는 없는지 조사해줘. 시체전담반은 시체를 수습하고, 현장 정리되는 대로 이동하자.”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부선장님, 뒤에 그 사내는 누구입니까? 혹시 용의자입니까?”
“아니, 근데 옷차림이 저게 뭐야? 요 근방에선 못 보던 차림새인데.”
순식간에 무리가 크게 들썩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험악한 인상의 무리 너나 할 것 없이 남자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남자는 눈앞이 보이질 않으니 무리의 이리저리 뒤섞인 음성이 점점 가까워지자 움찔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이때, 천 너머로 미세하게 비치던 햇빛이 가려졌다. 정윤호가 남자 앞을 가로채듯 막아선 것이다.
“이 자는 이번 사건과 무관한 자야. 나중에 공식적으로 인사시킬 테니 일단 다들 현장부터 수습해. 수사용 군함 3척은 남겨두고, 우린 ‘원더랜드 호’를 타고 부대로 이동한다.”
정윤호의 말이 끝나자마자, 무리에 뒤섞인 해적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입을 모아 명령을 받들고는 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삽시간에 흩어졌다. 정윤호는 조용히 흩어져가는 무리를 보다가 이내 남자를 향해 몸을 돌렸다.
“조용히 따라와.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말고.”
남자는 군말없이 정윤호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온몸을 단단히 포박하고 있는 밧줄이 점점 갈비뼈를 조여드는 듯했고, 때문에 호흡이 불규칙해지기 시작했다. 남자는 점점 조여드는 시야에 놀란 나머지 정윤호를 불러 세웠다. 잠깐, 잠깐만…. 하지만 정윤호가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남자의 몸은 모래밭 위로 쓰러졌다.
02.
허억…! 남자는 기도를 조이는 듯한 감각에 눈을 퍼뜩 떴다. 얼굴을 뒤덮던 천은 어느새 사라지고 나무 재질의 천장이 시야에 들어찼다. 용수철 튀어 오르듯 상체를 일으켜 숨을 몰아쉬자, 옆에서 누군가 남자의 흔들리는 몸을 바로잡아 세웠다.
“괜찮으세요?”
동그란 안경 너머로 선한 눈매가 인상적인 사내가 걱정 어린 얼굴로 남자를 보고 있었다. 남자는 차분히 눈동자를 굴려 자신이 누워있는 침대부터 공간 곳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수상한 이를 가두는 곳치고는 일상적으로 지낼 수 있는 생활 공간에 지나지 않았고, 머리맡 쪽 협탁엔 물병과 레몬차, 그리고 식삿거리까지 놓여있었다.
“피로가 많이 쌓인 듯합니다. 좀 더 누워 계세요. 탈수 증세도 좀 있으셔서, 물과 레몬차를 챙겨왔으니 목마르시면 말씀해 주세요.”
“당신은….”
“아! 인사드리는 걸 깜빡했네요. 저는 해적단 <원더랜드>의 기록자, 레온입니다. 당신이 깨어나기 전까지 감시하라는 부선장님의 명령이 있어서요. 원래는 당신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는데, 시체 사망 추정 시간과 당신이 부선장님을 마주친 시간대가 맞지 않아서 의혹은 풀린 상황이고요. 하지만 예의주시 인물임은 맞으니, 저희의 감시망 밖으로 벗어날 생각은 꿈도 꾸지 마세요. 문 밖에도 저희 동료들이 보초를 서고 있으니 도망칠 생각은 일절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레온은 말을 끝마치자마자 흥미를 거둘 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남자에게로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남자의 머릿속을 부유하는 수많은 단어들이 점차 차례대로 조합을 이루기 시작했다. 해적과 수사라는 단어 간의 상관관계…. 남자는 짧은 시간 내에 제 앞에 있는 사람들이 어떠한 조직과 체계를 갖춘 ‘무리’인 지를 단번에 정리할 수 있었다.
“………. 그러니까 당신들은….”
남자는 확신에 가득 찬 얼굴로 레온을 올려다보았다. 레온은 남자가 다음에 이을 말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해적으로 위장한 해군의 위압감이 여실히 느껴지는 미소와 함께.
“그나저나, 정말 저희 선장님과 똑같이 생기셨네요! 저는 정말 선장님이 살아 돌아오신 줄 알았다니까요!”
“도대체 누굴 얘기하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 사람이 아닙니다.”
“알아요. 정말 신기하리만큼 똑같이 생겼지만, 당신과 선장님은 다른 사람이란 거. 성격도 완전 정반대인 걸요. 우리 선장님은 따뜻하고 다정한 면이 있지만, 당신은 뭐랄까…. 조금 차가운 느낌? 아, 제가 너무 일반화한 걸까요? 기분 나빴다면 죄송해요. 하지만 신기한 건 신기한 거죠. 당신이 기절해 있는 동안 혹시 이상한 술수로 선장님의 얼굴을 복사한 것은 아닐까 했는데, 주술은 전혀 걸려있지 않았더군요. 그래서 우선은 당신을 경계하되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레온은 남자를 가만히 응시하더니, 곰곰이 속으로 말을 고르곤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그런데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방 안을 싸고도는 정적을 흩트렸다.
“저는 여기까지. 그럼 이만.”
레온은 남자를 향해 고개를 꾸벅이곤,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 방문 너머에 있는 사람을 향해 길을 터주었다. 여전히 해진 옷깃 사이사이에 바다 냄새를 머금고 나타난 그 정윤호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방 안을 밝히고 있는 것은 곳곳에 놓인 초가 전부인 데도, 정윤호의 하얗고 준수한 얼굴이 방 내부를 훤히 비추는 것만 같았다. 정윤호는 천천히 남자에게 다가가 천 주머니 하나를 건넸다. 남자는 여전히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정윤호를 올려다보았고, 당연하게도 그가 건넨 주머니는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몸을 벽에 바짝 붙였다.
“나를 어쩔 셈이야.”
“이 안에 든 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 것 같은데.”
정윤호는 여전히 천 주머니를 건넨 상태였다. 견고하고도 단단하게, 흔들림 없이. 남자는 조용히 정윤호의 얼굴을 살폈다. 아까 숲속에서 마주했던 울음기 가득한 얼굴이 아닌, 냉철하고 무뚝뚝한 표정이었다. 생김새가 비슷한 또 다른 누군가가 아닐지 착각이 들 정도로 분위기가 매우 달랐다. 남자는 마지못해 정윤호가 건넨 천 주머니를 받아 들고는 안에 내용물을 꺼내 살폈다. 주머니 안에 든 것은 다름아닌 선원복이었다. 남자는 당황어린 표정으로 정윤호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이 배의 최고 책임자인 정윤호 소령이다. 지금부터 난 널 이 <원더랜드 호>의 막내로 위장시킬 계힉이다. 이 계획은 미오와 치오, 그리고 레온에게만 공유된 사항이라 네 얼굴이 다른 이에게 더 노출되는 건 곤란해. 대강 짐작했겠지만 너는 돌아가신 선장님과 매우 닮았어. 닮은 수준이 아니라 살아 돌아왔다고 착각할 정도로. 네 모습이 이 해적선 안에 널리 퍼진다면 동요하는 사람이 생길 거고, 네가 죽었다고 생각한 이들에게 혼선을 줄 테니 얼굴을 반 정도는 가리고 다니도록 해. 그리고 네가 입고 있는 그 이상한 옷도 눈에 너무 띄니 당분간은 선원복을 입고 다니는 게 좋아.”
“얘기를 들어보니 난 혐의도 벗어난 것 같은데, 내가 왜 당신들과 함께 다녀야 하는 거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그 주머니 안에 든 종이를 꺼내봐.”
남자는 주머니 안에 손을 집어넣고 이리저리 휘젓다가 손끝에 걸린 무언가를 건들곤 그대로 종이를 꺼냈다.
“해적으로 위장해 바다 위를 다니는 동안, 우린 수도 없는 보물과 유물을 발견해왔다. 그 종이도 아마 유물서 한 권의 여러 면 중 일부였겠지만, 내가 발견한 건 거기에 적힌 내용이 전부다. 유물서는 고사하고 그 종이를 구성하는 면 한 장조차 확보하지 못했어. 처음엔 무슨 소리인지 잘 몰랐지만, 너를 보고 이 내용이 떠올랐다.”
남자는 천천히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었다. 상당 부분 찢겨나가 몇 줄 되지 않는 글에다가, 심지어 중요한 단어가 적힌 부분은 심하게 손상돼 유추해낼 수도 없었다..
… 공간을 자유롭게 누비는 자에게 내려지는 축복은 상당히 아름답다. 어느 곳이든, 어떤 세계이든, 어떤 우주이든 그대가 /////를 쥐고 눈을 감았다 뜨면 원하는 곳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
“영혼이 화음하고 공명하는 소리에 집중하라.”
속으로 유물서 일부를 천천히 읽던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마지막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삽시간에 방 안의 공기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정윤호가 남자에게 다가와 허리를 숙이며 속삭였다.
“네가 정말 전혀 다른 세계에서 온 거라면, 어떻게 넘어온 거지? 뭘 사용한 거야. 이 유물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나?”
“그건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나도 눈 떠보니 관 속이었고, 제일 먼저 마주친 사람이 당신이었어.”
“……. 그렇다면 이 유물을 하루라도 빨리 찾아야겠네. 어딘가로 ‘이동’했을 확률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나는 지금부터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내 사람을 찾을 거다. 네가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가려면 너도 그 연결점을 찾아야 할 테고. 이건 일종의 거래야. 서로 손해 볼 건 없을 거 같은데. 어때.”
“………………좋아. 협조할게. 대신 약속 꼭 지켜. 나는 원래 있던 데로 돌아가기 위해 무엇이든 찾을 거고, 당신은 어떻게든 날 도와.”
“그러지.”
정윤호는 모든 용무가 끝난 듯 몸을 돌아 세우다가, 뭔가 생각났는지 다시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아. 그러고 보니 네게도 바다 위에서의 이름이 있어야겠지.”
정윤호는 남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무언가 떠오른 듯 주머니에서 무언갈 꺼내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H’라는 글자가 새겨진 작은 보석이었다.
03.
해적선 <원더랜드 호>는 거침없이 항해를 이어 나갔다. 민간 어선을 위협하는 또 다른 해적 무리가 보이면 그 즉시 전담팀을 꾸려 생포 작전을 펼쳤고, 해적선에서 가장 아래층에 구비된 감옥에 해적들을 생포해 모두 가두었다. 특히 부대로 가는 길 중간에 잠시 정착한 육지에서 인근 마을에 해적 습격 사건이 발생하거나, 커다란 해적선을 보고 오히려 역으로 공격해오는 경우에도 정윤호는 냉철함을 잃지 않고 이성적인 작전 지시로 사상자 없이 현장을 수습했다.
최초의 해적 <크라켄>. 그들은 스스로 ‘괴물’이라 칭하며 현 제국과 군대의 학살을 부르짖으며 바다 위를 군림하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육지사람은 바다 위에서 수전을 모두 겪으며 살아온 바닷사람을 결코 이길 수 없었다. 시시각각 휘몰아치는 파도는 마치 제국과 해적을 저울질하는 듯하더니 이내 해적의 편을 들어주었다. 현 제국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다급히 해군을 꾸려 <크라켄> 세력을 위축시킬 전략을 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해전 경험이 적은 이들로 부대를 꾸리다 보니 금세 무너질 게 눈에 선연했다. 이때, 소령 중 한 사람이 해군 전력이 줄어들 것을 걱정할 필요 없이, <크라켄> 세력을 위축시킬 전략을 제안하고 그것이 내부에서 크게 화제를 모았는데 그것이 바로 <원더랜드> 작전이었다. 해수면 위 전투에 능한 해군을 선발하고, 그들을 해적으로 위장시켜 육지 부근이나 바다 위에서 악질적인 횡포를 부리는 해적들을 잡아들였다. 이는 아직 개선과 보충이 필요한 해군의 전력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도 또다른 적대자의 등장으로 <크라켄>을 교란시켜 해군에 집중되는 견제와 공격을 분산시키는 한편, 양쪽으로 압박을 가해 <크라켄>의 중심부를 척살하는 것이 주 핵심이었다. 해군으로서 바다를 나서게 되면, 어찌되었든 제국 차원에서 공식화되는 작전으로 공표되기에 작전이 밖으로 샐 우려가 있으며, <크라켄>이 미리 대비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문제점도 있었다.
<원더랜드> 작전의 효과는 굉장했다. 모두의 예상대로 <크라켄>은 또다른 해적 세력의 등장에 주춤하기 시작했고, 해변가 위주로 민가를 약탈하던 범행 빈도수 또한 점차 줄어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장 시급한 것은 <크라켄>의 중심부를 알아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해적 선원들을 생포해 심문하며 <크라켄>의 내부 세력이나 규모에 대해 알아내고자 했지만 모두 입을 꾹 다물 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원더랜드> 작전은 해전에 매우 능하다고 평을 받은 박성화 대령을 주축으로 진행되었지만, 모종의 이유로 사망하여 지금은 부선장인 ‘정윤호’가 그의 업을 대신 이어받았다.
H는 어색하지만 충실히 해적선에서의 막내 연기를 선보였다. 배에 있는 선원들은 모두 본업이 ‘해군’이지만, <원더랜드 호> 안에서는 모두 해적이므로 H를 수평적으로 대하려 노력했다. 심지어 정윤호는가 직접 H를 소개하길, 박성화 선장으로부터 목숨을 구제받고 그를 매우 선망해 육지에서 과감히 배에 올라탄 막내로 정갈하게 소개했다. 배에 있던 선원들은 모두 환호성을 질르며 H의 승선을 환영했다.
H는 정윤호의 권유로 눈 아래부터 천을 둘러 얼굴을 가렸다. 더러 천을 벗은 얼굴을 궁금해하는 선원도 있었으나, H는 보여주기 어려운 흉터가 있다며 여러 번 거절을 표했다. 해적선에서 가장 적응하기 힘든 것은 당연하게도 뱃멀미였다. 바다 너머 지평선을 향해 시선을 두면 좀 괜찮을까 싶다가도 선박 난간에 기대어 금세 하룻동안 먹은 음식을 전부 토해내니, 주변에선 이러다 막내 산송장 치르겠다며 혀를 끌끌 차며 H가 해야 할 몫의 일을 대신해주거나 간단한 일을 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뱃멀미 앞에 금세 무너졌으니 선원들은 H에게 아예 방에서 나오지 않는 게 낫겠다며 손을 휘휘 저었다. 맡은 바 일을 전부 수행해내기도 전에 토기가 올라와 바람을 쐬며 숨을 겨우 고르는데, 뒤에서 누군가 H를 불렀다.
“이봐.”
톡톡 쏘는 말투, 자신 외엔 아무도 관심 없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 짙은 이목구비 아래 왼쪽 뺨에 길다랗게 그어진 흉터, 머리를 단단히 두른 두건 밑으로 삐져나온 빨간색 머리카락. 미오였다.
“무슨 일…. 우욱!”
“너 이 녀석! 지금 내 얼굴 보고 토한 거지?!”
“그게 아니라…. 우웁!”
“…건방진 놈. 난 네가 정말 마음에 안 들어. 나는 아직도 네게 의심을 거두지 않았지만, 부선장님 명령이니 하는 수 없이 따르는 거야. 그 분 덕에 네가 지금 이 배에 멀쩡히 살아 숨쉬고 있는 줄 알라고.”
H가 토기에 괴로워하든 말든, 미오는 이리저리 자기 할 말만 늘어놓다가 이내 자신에게 부여된 명령을 떠올렸는지 목을 가다듬고 일갈했다.
“날 따라와.”
H는 한껏 게워낼 뻔한 속을 겨우 가다듬으며 미오의 뒤를 따랐다. <원더랜드 호>는 제법 규모가 있는 해적선인 지라 내부 구조 또한 넓으면서도 복잡했다. 정신 잡고 길을 외우지 않으면 아예 길을 잃을 수 있기 때문에 층마다, 그리고 공간 사용 용도마다 문패 색깔 등을 달리하는 등 구분지었다. 미오와 H가 도착한 곳은 초록색 문패가 달린 곳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한 눈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넓고 규모감 있는 공간이 드러났다.
“여긴 우리 선원들이 전투 훈련을 받는 곳이다. 자, 받아.”
미오는 한쪽 벽에 정갈하게 꽂힌 목검 중 하나를 뽑아 H에게 던지듯 건넸다. H는 목검을 받자마자 한 번에 실리는 무게감에 중심을 잃을 뻔했다. 무리일 것도 없는 것이, 현재 <원더랜드 호>는 항해 중이었으므로 흔들리는 선박 안에서 전투 훈련을 위해 끊임없이 중심을 잡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원래 부선장님은 배가 정박했을 때 네게 알려주라고 하셨지만. 바다 위 전투 현장에서 제 몫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겠지.”
“…. 전투 연습은 처음 들어보는데. 그리고 보통 이런 건 기초부터 알려주는 거 아냐?”
“짧은 시간 안에 검술과 총술을 익히려면 받아들여. 언제 기습이 들어올지 모르는데, 기초로만 상대방을 공격할 거야?”
정윤호는 물론 미오에게 기초부터 꼼꼼히 교육하라 일러두었을 터다. 하지만 미오는 누군가를 알려줄 심성은 되지 못했고, 여전히 H에 대한 경계심이 강한 상황에서 전술 교육을 명 받았으니 이를 빌미로 H에게 제대로 기선을 제압하려는 목적이 컸다. 미오는 목검을 한 손으로 높게 치켜 올렸다가 이내 천천히 H를 향해 검 끝을 겨누었다.
“우선 네가 할 수 있는 만큼 덤벼봐. 간단히 네 운동신경부터 점검해보려는 거니까.”
H는 입술을 꽉 물었다. 제 손 위에 여전히 묵직한 무게감을 자랑하는 목검을 하염없이 내려보다가, 이내 세게 검을 그러쥐고 미오를 향해 빠르게 돌진했다.
‘오, 속도는 좀 빠른데.’
하지만 숱한 해전을 겪은 미오에게 H의 움직임은 금방 읽힐 수밖에 없었다. 검의 무게가 무게가 무거우니 초심자는 두 손으로 칼을 쥐어 휘두르기 쉽고, 그러다 보면 휘두르는 궤적이 커져 허점이 바로 보이기 십상이었다. H는 힘겹게 목검을 들고 미오를 향해 휘둘렀다. 역시 미오의 예상을 그대로 적중한 움직임이었다.
‘역시. 얼굴 똑같다고 실력도 똑같을 리가 없지.’
미오는 더 지켜볼 필요 없다는 듯이 검을 들던 팔을 아래로 툭, 떨구듯 내렸다. 그런데 그때, 공기가 날카롭게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H의 목검이 미오를 향해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미오의 동공이 조여들었다. 분명 어떻게, 어디로 움직일지 뻔히 보이던 검의 궤적이 어느새 미오에게로 회전하며 날아든 것이다. 미오는 제 예상을 완전이 빗겨가 당황했지만 일순간 다시 정신을 집중하여 H의 목검을 그대로 맞받아쳤다. 검술에 익숙하지 않은 H의 몸은 그대로 목검을 놓아버렸고, 목검이 서로 맞부딪히며 찌르르 울린 진동 때문에 손목에 무리가 갔는지 다른 손으로 얼싸안으며 얕게 신음했다.
“너, 너….”
미오는 H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어디서 검술을 배운 적 있냐?”
“배운 적은 없지만….”
“…없지만?”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지 않고, 더 뛰어넘고 싶다는 생각을 했거든.”
“!”
미오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손에서 목검이 툭, 맥없이 떨어졌다. 귓가에, H의 말이 메아리치다 머릿속을 부유하던 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네가 할 수 있는 만큼보다 더 뛰어넘어봐, 미오야.’
미오는 어째서 H로부터 그의 호흡이 느껴지는지, 계속 곱씹어보지만 이렇다할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 너머의 현상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미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 눈 앞에 있는 사람은 선장이 아니며, 그저 우연히 뱉은 말이 겹쳐 들렸을 뿐이라며 단념했다. 미오가 다시 칼을 쥐기 위해 허리를 숙이던 그때, 체력단련실 문이 다급하게 열리며 치오가 나타났다.
“미오!!”
“아, 깜짝이야! 뭐야, 무슨 일…. 왜 그래. 누가 그랬어.”
미오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숨을 몰아쉬는 치오에게 다급히 달려가 그의 상태를 살폈다.
“어제 저녁에 근방 해적선 소탈 임무로 출동했던 제22 수색대 군함이 방금 발견됐어. …모두 전멸된 채로.”
“뭐?”
치오는 공허한 눈빛으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스물 여섯 번째 연쇄살인 사건이야.”
04.
<원더랜드 호>는 혼란에 빠졌다. 전일 저녁, 해적선 소탈을 위해 임무를 떠났던 제22 수색대가 오늘 모두 사망한 채 발견됐다. <원더랜드 호>의 항로에서 정박 상태인 군함이 보였고, 본래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군함이 아니었기에 내부에선 다급히 조사를 떠났으나, 그 안에서 발견된 건 차갑게 식은 선원들의 시체뿐이었다.
그것도 독살된 채로, 그리고 목덜미에 똑같이 나침반 문양의 상처가 난 상태로. 하지만 선원을 비롯한 부선장인 정윤호에게 분노를 안겨다 준 것은, 이미 사망한 선원의 혈로 각 시체 주변에 커다란 나침반 그림을 그린 흔적이 발견됐다는 것이다.
“…이상입니다. 이전 사건과 다른 점은, 원래 일반인 위주에 심지어 피해자들까지 서로 전혀 연관성이 없었습니다만…. 이번 스물 여섯 번째 사건은 <원더랜드 호>의 선원들, 그러니까 해군이 전사하게 된 사건이라는 점입니다.”
레온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차분하게 사건 정황을 정리했다. 기록서에 촘촘히 현장을 적어내리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H는 조용히 보고 있었다. 총 10명. 배에 있던 해군은 모두 10명이었다. 심지어 해전에 매우 능한 특전사였음에도 이들은 단 하루아침에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정윤호가 입술을 짓씹으며 분노를 억누른 채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전투 흔적은.”
“전혀요. 그래서 더욱 이상합니다. 10명이나 되는 특전사가 적 앞에서 전투도 저항도 없이 이리 쉽게 당했을 리 없습니다. 소름 끼칠 정도로 깔끔하고 명료한 독살, 정교하게 새긴 나침반 모양의 상처…. 그리고… 동료들의 피로 그린 나침반 그림까지….”
“부선장님! 이것 좀 봐주십시오!”
레온이 보고를 모두 마치기 전에, 미오가 다급히 정윤호를 향해 손짓했다. 그의 안색은 예상치 못한 걸 발견하기라도 한 듯이 안절부절한 모습이었다. 정윤호는 순식간에 미오에게로 달려가 그의 손에 쥐어진 낡은 종이 한 장을 받아 들었다. 정윤호의 동공이 삽시간에 조여 들었다. 종이를 들고 있는 손이 덜덜 떨려왔다. 정윤호는 천천히 몸을 돌려 H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H는 설마, 싶은 마음에 정윤호에게로 한걸음에 달려가 그가 건넨 종이의 내용을 살폈다. 그 종이는 책에서부터 찢겨 나온 듯한 면 한 장이었고, 우측 하단 부분에 묘하게 내용이 잘려져 있어 전문을 파악하기 어려웠으나, H는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정윤호가 보여줬었던 조각을 붙인다면 완벽히 한 면의 구성을 이룰, 공간 이동이 가능한 고대 유물의 특성과 생김새를 자세히 옮겨 넣은 종이였다.
그러나 이들이 놀란 이유는 또 있었다. 공간 이동이 가능한 고대 유물의 생김새가 그동안의 사건에서 시체 목덜미와 시체 주변에서 발견된 나침반 모양과 매우 똑같다는 것이다. 이때, 레온이 착잡한 표정으로 정윤호를 불렀다.
“부선장님…. 본부에서도 회신이 왔는데, 더 이상의 수사 진행은 멈추고 당장 본부로 복귀하라고 하십니다. 대장님의 명령입니다.”
“그건 안 됩니다, 부선장님! 이 사건은 저희가 마땅히 수사를 해야…!!”
“치오!”
미오가 치오의 어깨를 붙잡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챈 치오가 겨우 흥분을 가라앉히고 정윤호를 향해 고개를 꾸벅였다. 치오는 돌아서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일반인뿐만 아니라 동료들도 당했다. 우발적인 범행이 아닌 아주 치밀하고 계획적이다. 만약 이 사건이 <크라켄>의 주도에 들어간 거라면 우리의 정체를 완전히 파악했을 확률이 높아. 이 상태로 수사를 진행하는 건 오히려 그들이 펼친 함정에 걸려들 게 분명해. 우선 본부로 돌아가서 내부를 재정비하고 지원을 받아야겠어. 이건…. 어쩌면 녀석들이 우리에게 보내는 도발이자 경고이 게 분명하다.”
정윤호는 현 사태에서 필요한 명령을 모두 내린 후, <원더랜드 호>에 몸을 실었다. 전례없는 사상 최악의 사태로 <원더랜드 호>에 절망이 거대한 파도처럼 덮쳤다. 다들 상념에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짓씹으며 복수의 충동에서 이성을 찾으려는 동안, H는 평정을 찾은 정윤호의 얼굴 아래로 그가 주먹을 세게 그러쥐는 것을 보았다. 떨리는 손과, 손가락 사이로 핏물이 흐르는 것까지.
05.
“밤하늘 예쁘지?”
태양을 지나가고 칠흑으로 채워진 밤하늘을 보던 H에게로 치오가 다가왔다. 치오의 손에는 와인잔이 들려 있었다. 잔 안에는 검붉은 와인 한 두 방울 정도만 남아 있었고, 치오의 숨결에는 와인의 알싸한 향이 옅게 묻어 있었다. 미오에겐 비밀이야. 그의 눈가는 여전히 불그스름했고, 아침에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부어 있었다. 눈 쪽으로 고정된H의 시선을 알아챘는지 치오가 덤덤히 눈가를 매만지며 멋쩍게 웃었다.
“내 단점이야. 쉽게 우는 거.”
“나는 그게 단점이라고 생각 안 해.”
“…….”
“왜, 왜?”
“아, 아냐. 왠지 선장님이 내게 말씀해 주셨던 게 생각나서. 너랑 똑같이 위로해주셨거든.”
“그래? 우연이네.”
갑판 난간에 기대어 나란히 선 두 사람은 다시 한동안 말없이 밤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지평선을 향해 시선을 두고 천천히 바다 내 음을 들이마셨다.
“사실 H 널 처음 봤을 때, 선장님이 살아 돌아오신 줄 알고 너무 기뻤어. 물론 성격도 분위기도 달라서 나중엔 선장님이 아닌 아예 다른 사람인 걸 씁쓸하게 인정해야 했지만.”
“……. 그, 선장이라는 사람은 엄청 좋은 분이셨나봐. 다들 이렇게 오랫동안 그리워하는 걸 보면.”
“그럼. <원더랜드 호>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은 모두 선장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거든. 부선장님도, 나도, 미오도 그 분 덕에 <크라켄>으로부터 목숨을 구했고, 그분에게 이름을 부여받고 의로운 해적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중이지. 제법 재미있어. 그 분이 안 계셨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바다 위에서 이렇게 의미 있게 살지 못했을 거야.”
조용히 치오의 말을 듣던 H는 주머니에서 정윤호에게 받았던 보석을 꺼냈다. 은색빛의 보석 위에 인위적으로 새긴 것이 아닌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H’ 글자 모양이 새겨진 작고 아름다운 보석. 그런 H를 빤히 바라보던 치오는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 보석. 사실 부선장님이 네게 H라는 이름을 주실 줄은 몰랐어. H는 선장님이 본명을 감추기 위해 쓰신 활동명이었거든. 워낙에 유명하신 분이라 얼굴을 가리더라도 이름이 전투 중에 노출되면 금방 우리 정체가 들통날 수도 있어서 곤란하다고 새로 지으셨거든. 그런데 그 보석도 주실 줄은 몰랐어. 보석은 선장님이 부선장님께 주신 선물이었으니까…. 그 돌을 받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소중히 간직해 오신 것 같더라고.”
“……전혀 몰랐어.”
“네가 선장님과 너무 똑 닮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 아무튼 그 보석은 부선장님께 아주 소중한 거니까, 이 ‘계획’이 끝날 때까지 잃어버리지 말고 잘 갖고 있어야 해.”
H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매끈한 면에 그대로 달빛을 반사해 반짝이는 보석이 오랫동안 H의 눈망울에 기록되듯이 남았다. H는 보석을 제 손에 굳세게 그러쥐며 가슴 앞으로 갖다 댔다. 마치, 보석에서부터 심장박동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 대령이란 사람은 전투 중에 돌아가신 거야?”
“음? 아…. 비슷해. 그런데 정확히는 ‘소멸’되신 거긴 해.”
“소멸?”
“응. 시체가 없었거든. 정확히 2달 전에 해군대장님이 참전하실 정도로 큰 전투가 하나 있었는데, <크라켄>이 대규모 전력을 데리고 한 번 본부 근처 해안가를 습격한 사건이었어. 그런데 그때 전투 중에 대령님이 사라지셨대. 너무 황망하지? 해군대장님께서 말씀하시길, <크라켄>의 중심인물 중 한 명과 대적하다 갑자기 빛처럼 온몸이 분해되며 사라지셨다고…. 아마 고대 유물 중 하나에 당하신 것 같아. <크라켄>은 바다 위를 군림하는 해적이라 이상한 유물을 사용하며 종종 위협할 때가 있었거든.”
“……. 유감이네.”
씁쓸하게 미소짓던 치오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H는 그것이 눈물을 삼키기 위한 행동임을 눈치채고 바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곧 비가 오려나 봐. 난간에 기대던 몸을 곧바로 고쳐 잡은 치오가 저 멀리 밀려오는 먹구름 떼를 향해 입을 열었다. 고요하던 해수면은 금세 요동칠 것이고, 어쩌면 폭풍우가 몰아쳐 배를 거칠게 뒤흔들지도 몰랐다. 하지만 H의 시선은 어떠한 동요도 없이 굳건했다. 그의 눈빛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다짐을 엿보던 치오는 한동안 말없이 H를 바라보았다.
06.
똑똑,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수사 기록서를 살피던 정윤호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들어와. 정윤호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리고, 레온이 평소와 달리 불안한 낯빛으로 정윤호를 향해 경례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부선장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레온은 제 품에 담긴 서류 봉투를 정윤호에게 조심히 내밀었다.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여전히 동공에서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으므로 정윤호는 곧바로 봉투에서 서류를 꺼내 내용을 신속히 살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정윤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류에서 레온으로 시선을 옮겼다. 표정으로 그의 생각을 읽은 레온이 입술을 달싹이며 대답했다.
“저도 믿을 수 없어서 여러 번 검토하고 또 검토했습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정윤호의 손에서 툭, 떨어진 서류에는 지금까지 발생한 살인사건의 경위를 모두 연결해 레온이 분석한 보고 내용이 담겨 있었다. 스물여섯 번째 사건까지, 시체가 발견된 위치를 지도에 표시하고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각 위치를 연결했을 때 나오는 하나의 문자를.
H.
현재 사망처리 된 박성화 대령의 활동명.
“사건이 모두…. 선장님의 활동명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요. 그렇겠지요?! 선장님이 이 사건의 배후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정말 만에 하나 그 분이 살아 계시다면…. 그래서 지금 이 일을 꾸미고 계신 거라면. 그래서 지금 저흴 유인하고 있는 거라면.”
“레온. 입 조심해. 네 이름이 누구로부터 부여받은 것인지 잊지 마.”
“하지만 부선장님! 스물 여섯 번째 사건 동안, 무고한 시민과 동료들이 죽었습니다. 이건 선장님으로부터 입은 은혜와는 별개로, 이성적으로 사건을 살펴야 합니다.”
“나도 알아. 하지만 사건의 배후가 일부러 자신을 암시하는 신호를 대놓고 심었을 리 없잖아. 이건 분명 내부에 혼선을 일으키고 이간질을 시켜 내부 분열을 일으키려는 움직임일 수 있어. <원더랜드 호>는 선장님의 이상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타고 있으니, 내부에 분열이 일어나는 순간 <원더랜드 호>는 그대로 가라앉을 거다. 그걸 노리는 걸 테고. 그러니 일단 이성을 찾아, 레온.”
“네, 부선장님. 아! 안 그래도 마침 본부에서 추가로 회신이 왔습니다. <원더랜드 호>는 본부로 복귀하고, 지금까지 수집한 증거와 사건 자료를 모두 보고할 것. 그리고 해군대장님의 즉위 10주년 기념식이 있으니 해군병들 모두 필히 참석할 것을 명했습니다.”
“하…. 시기가 좋지 않네. 하필 이럴 때에.”
“추가로 발견되는 게 있다면 바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래. 수고해줘. 고생 많았다.”
레온은 정윤호를 향해 고개를 꾸벅인 뒤,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정윤호의 집무실엔 다시금 적막이 감돌았다. 정윤호의 호흡마저 삼킨 듯이 묵직하게 고요가 내려 앉았다. 정윤호는 책상 위에 올려진 서류들을 다시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몇 번을 검토해도 레온의 서류엔 이상이 없었다. 교묘하고 치밀하게 짜여진 계략이었고, 빈틈이 없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H’를 암시하는 신호가 겹겹이 쌓여왔던 것이다. 정윤호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면서 요동치는 심장박동을 원래 제 속도로 돌리기 위해 숨을 골랐다.
그때, 집무실 문에서 다시 한 번 노크소리가 들렸다. 들어와-라고 정윤호가 명을 건넸지만 문은 딱 두 번 두드려졌을 뿐 더 이상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정윤호는 이상함을 느끼곤 집무실 문을 열어 문 너머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문을 닫으려는 순간, 정윤호는 바닥에 놓인 무언가를 보고 일순간 모든 동작을 멈추었다.
박성화를 기리기 위해 관에 가득 채워 넣었던, 바로 그 꽃이었다. 전혀 시들지 않은, 여전히 물기와 생기를 머금은 꽃 한송이었다.
*
웃음소리가 섞인 무자비한 살상과 구원을 바라는 울부짖음이 해안 마을을 덮쳤다. 재산과 목숨을 약탈하는 해적의 야비한 행포가 이어졌고, 마을을 구성하는 집들이 하나둘씩 불타기 시작했다. 골목마다 시체가 쌓이기 시작했고, 목숨이라도 부지하기 위해 마을 앞에 있는 바다를 향해 달리던 사람들도 이미 바다를 점령하고 있던 해적의 손에 힘없이 쓰러졌다.
“이거 놔!!!!”
해적의 손에 머리채가 잡힌 한 청년이 소리를 지르며 저항했다. 하지만 청년의 저항은 해적에게 아무런 위협요소가 되지 못했고, 오히려 해적은 청년에게 무능력함을 일깨워주기 위해 폭력으로 짓눌렀다. 청년은 그대로 힘없이 모래밭 위를 뒹굴었다. 해적은 청년을 더 갖고 놀고 싶었는지 발로 그의 가슴팍을 누르며 야비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청년은 계속해서 저항했고, 비교적 자유로운 팔을 휘둘러 해적의 다리를 밀어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자신의 발치에 낑낑거리는 청년을 보며 희열감을 느끼던 해적은 금세 흥미를 잃었는지 청년의 목을 향해 칼 끝을 겨누었다. 청년은 마지막까지 저항했지만, 해적의 힘을 이길 수 없어 그대로 눈을 질끈 감았다. 이대로 죽는 걸까. 평생을 고아로 살아와 마을을 이리저리 떠돌며 겨우 먹고 살아야 했던 삶에서, 이름도 없이 이렇게 허망하게 굴욕을 맛보며 죽어야 한다니. 청년의 눈에 물줄기가 끊임없이 흘렀다. 자신의 마지막을 지켜줄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자, 청년은 팔에 힘을 풀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때, 칼을 크게 휘두르던 해적이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가슴팍을 짓누르던 무게가 어느새 사라지고, 누군가의 손이 청년을 번쩍 일으켰다.
“괜찮아?”
청년은 천천히 눈을 떠, 제 앞에서 자신의 상태를 살피는 따뜻한 눈길을 마주했다. 순간적으로, 천사가 제 앞에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이젠 걱정 마라. 내 옆에 꼭 붙어 있어. 알겠지?”
청년이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천사는 자신의 망토로 청년을 가리고 제 앞을 향해 돌진하는 해적 무리들을 하나둘씩 가볍게 쓰러트렸다. 첨예하게 급소를 단숨에 관통하는 칼의 궤적은 마치 천사의 날개짓 같았다. 저 멀리서 청년을 노리는 총구를 단번에 알아채 허리춤에 채워진 총으로 단박에 급소를 노렸다. 천사를 필두로,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해적들을 순식간에 제압했다. 마을은 더 이상 주민의 비명이 아닌, 해적의 고함소리와 살려달라는 간청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소령 박성화가 이끄는 해군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박성화 소령님! 전투 중 불가피하게 사망한 해적을 제외하곤 모두 생포 완료하였습니다. 하지만…. 마을과 주민의 피해가 너무 큽니다. 우선 부상자 및 생존자 수를 모두 의료진과 함께 파악하고 있는 중입니다.”
“하…. 바로 출동했는데도 너무 늦은 모양이네. 일단 알겠어. 수고해줘. …어? 내 옆에 남자애 한 명 못 봤어?”
“네? 아까부터 소령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는데요.”
“뭐?”
박성화는 그때, 모래밭 위에 찍힌 발자국을 발견했다. 발자국 곳곳엔 핏방울이 묻어 있었다. 청년이 흘린 피였다. 박성화는 급히 부하에게 현장 수습을 명령하고, 발자국을 따라 뛰었다. 그 발자국이 향하는 곳은, 조류가 심한 해안절벽 부근이기 때문이었다. 청년의 위험한 다짐을 알아챈 박성화는 쉬지 않고 내달렸다. 제발, 제발, 제발!
아니나 다를까 온몸에 상처를 입고 숨을 겨우 고르며 절벽 아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청년을 발견했다. 청년이 바다를 향해 발 한 쪽을 내밀려는 찰나, 박성화는 비명에 가까울 정도로 다급히 청년을 향해 외쳤다.
“자, 잠시만!!!”
박성화의 인기척을 전혀 눈치 못 챘는지 청년은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고 박성화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물과 핏물로 범벅인 얼굴이 몹시나 위태로워 보였다. 박성화는 청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청년은 오히려 그의 손길을 경계했다. 청년의 눈엔 더 이상 생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박성화는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감히 가늠할 수 없었지 않았지만, 어린 나이에 결코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왔을 거라 생각하니 제 몸이 먼저 떨어지더라도 어떻게든 아이를 받아 들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거긴 너무 추워. 위험하고.”
“…알아요.”
“거긴 네가 갈 곳이 아니야, 아이야. 정 갈 곳이 없다면, 나와 함께 가자. 그래! 넌 이름이 뭐야? 난 박성화 소령이라고 해. 보다시피 해군이고.”
“…없어요. 이름 그딴 거.”
“응? 없다고?”
“네. 없어요. 이름도 없이 어차피 이렇게 유령처럼 살 바에….”
“그러면 내가 네게 이름을 지어줄게!”
청년은 박성화의 대답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벙찐 얼굴로 박성화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말이었다.
“네 이름에 살아갈 의미와 앞으로 향해야 할 목표를 심어 줄게.”
“…….”
“다신 누가 널 해치지 못하도록 너 자신을 지키는 방법도 알려 줄게.”
“…….”
“네가 너로서 살아갈 수 있게, 내가 도와 줄게.”
“…….”
“그러니 내 손 잡아줄래?”
나 손 떨어질 것 같아, 응? 청년은 자신을 향해 해사하게 보내는 웃음 그 아래로 제 쪽을 향해 내밀고 있는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사람을 지켜온 손. 자신이 다치길 자처하면서까지 무리하게 칼과 총을 쥐고 정의와 구원을 쟁취해왔을 손. 그동안 청년이 어두운 지옥 끝에서 내밀어주길 바랐던 진정한 구원의 손이었다. 청년은 박성화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때, 절벽 부근을 강하게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 때문에 청년은 그대로 바다 쪽으로 몸이 갸우뚱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중심을 잃은 청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이렇게 바다에게 심판을 받겠구나. 나는 분명 지옥으로 가라앉을 거야. 나는 더이상 떠오르지 못할 거야. 나 자신을 담을 이름조차 없이, 그대로 바다에 잠기겠구나.
그러나 절벽 아래로 기울던 청년의 몸은 순식간에 누군가의 품으로 당겨졌다. 그 품에서 엄청나게 요동치는 심장박동이 청년의 귓가에 맴돌았다. 청년은 처음으로 사람의 품이 따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청년은 벙찐 얼굴로 자신을 끌어안은 채 쓰러진 이를 올려다보았다. 박성화는 청년을 잡아당기면서 그가 바닥에 부딪히지 않도록 몸을 돌려 등으로 모든 것을 받아냈다. 청년 앞으로 따뜻한 눈길이 쏟아져 내렸다.
“네 목숨은 파도 앞에 맥없이 부서질만큼, 그 정도로 약하지 않아.”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오르자, 청년은 몸에 힘을 주어 울음을 삼켰다. 어떻게 이 감정을 정리해야 할 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괜찮아. 다 토해내렴.”
박성화의 말 한 마디에 청년은 끅끅 울음을 삼키다 이내 목 놓아 울부짖었다. 박성화는 제 체온을 전부 청년에게 쏟아부으려는 것처럼, 오랫동안 청년을 품에 담았다. 청년이 가슴 안에 묵혀온 곪은 상처를 울음으로 모두 게워낼 때까지, 박성화는 말없이 그를 기다렸다.
*
08.
<원더랜드 호>의 항해는 일시 중단됐다. 배에서 내려 본부로 복귀하자마자 해적들은 모두 군인의 신분으로 돌아왔다. 정윤호 역시 바다의 짠 내 음을 머금은 옷을 벗어 군복으로 환복한 후, 중앙대책위원회에 현 사태를 상세히 보고하고 수사 방향을 정리하기 위해 회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해군대장부터 고위급 간부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원더랜드 호>의 수색 방향, 그리고 앞으로 행해야 할 작전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다. 정윤호는 레온과 함께 그간 수사를 통해 모아왔던 수사기록지를 바탕으로 시체를 통해 알 수 있는 연쇄사건의 공통점, 그리고 고대 유물과 사건의 관계성에 대해 설명했다. 그동안 고대 유물에 대한 기록서는 종종 항해 도중에 발견되기는 했어도, 대부분 고대유물의 실체는 발견되지 않았고 그저 과거에 어떻게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기록들이 전부였다.
증거가 부족한 것을 알지만, 정윤호는 수사 재개와 본부의 지원에 대해 다시금 목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간부들의 눈빛이 이상하리만큼 냉랭했다. 그들은 입을 모아 스물 여섯 번째 연쇄 살인이 일어날 동안 미리 다음 사고를 막지 못한 부선장 무능력함과 역량의 한계를 지적하기 시작했고, 인력 낭비뿐만 아니라 더러 인력 손실까지 일으켜 작전에 되레 걸림돌이 되었다는 비판을 서슴없이 쏟아냈다. 짧은 시간 내 연쇄적으로, 꽤나 계획적인 데다가 체계적인 범행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원더랜드 호> 한 척으로는 애초에 빠른 수사가 불가했다. 하지만 이들은 그걸 알고서도 모든 것을 정윤호에게 뒤집어 씌울 요량이었다. 이들의 진짜 ‘목적’을 눈치 챈 정윤호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애초에 이들은 수사 내용을 들을 생각이 없었던 거다. 박성화 대령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시점에서, 그를 중심으로 뭉친 <원더랜드 호>의 세력을 완전히 교체할 심산이었다. 정윤호는 분노를 삼켰다. 지금 이 상황에서 열을 낸다면, 되레 <원더랜드 호>의 해체를 빠르게 추진시킬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연유로 지금 저 간부라는 작자들은 정윤호의 신경을 긁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이 모든 논쟁을 지켜보던 해군대장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원더랜드> 작전은 여전히 우리 해군에게 필요한 작전이긴 하지만, 확실히 박성화 대령이 지금껏 구축해온 체계로는 한계가 있는 것 같군.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대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변 간부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소리 높여 동의를 외쳤다. 정윤호는 그들이 보지 못하게끔 주먹을 세게 그러쥐었다.
“박성화 대령의 자리가 빈 지금, 그를 대신해 부선장으로서 고생해준 건 알고 있네. 하지만…. 역시 자네들은 정이 너무 많아. 지금껏 해적들을 생포하면서 얻은 게 뭐지? <원더랜드 호>의 위상을 두텁게 만들었는가? 오히려 자비를 베풀기만 하고 <크라켄>에 실질적인 위협을 주지 못했지. 결국 무고한 국민들만 죽어 나가고, 결국 해군 인력까지 잃게 만들었어.”
“박성화 대령님의 지론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럼 자네가 한 번 증명해보게. 또 다른 해적 세력을 만들고,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약탈하는 해적을 잡아들여 <크라켄> 세력을 일시적으로 줄이는 데엔 성공했지만…. 그 후처리는 어떻게 했지? 생포한 놈들 중 반성한 기색이 보이는 놈들은 징역 후에 풀어주기까지 했지. 하지만 그놈들이 다시 본거지로 돌아가서 우리 해군 내부의 일을 낱낱이 보고했다면? <원더랜드 호>가 태어난 경위에 대해 빠짐없이 공유했다면?”
“그들은 다신 바다로 돌아가 생명을 앗아가는 일은 다신 하지 않겠다고 대령님과 약속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발생한 일에 대해서는 그대들이 책임을 지는 게 맞는 거겠지.”
“…………. 시정하겠습니다.”
“오늘부로 <원더랜드 호>의 적임자를 다시 찾아봐야겠군. 그동안 고생 많았네. 나가 봐.”
“대장님, 그건…!”
“정윤호 소령. 나가라 했네.”
정윤호의 팔이 힘없이 툭, 늘어뜨려졌다. 믿을 수 없었다. 능구렁이 같은 이들의 속내를 빠르게 파악했어야 했는데. 닫힌 회의실 문 너머로 간부들의 악랄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역시. 이래서 근본 없는 자를 군인으로 들이면 안 된다니까요.”
“제 말이 그 말입니다. 박성화 대령은 어쩌다 저런 애들을 부하로 데려와서는. 뭐, 그 정 많은 성격 때문에 제 앞으로 굴러온 복을 뻥 차버린 거겠지만요.”
“아무튼 <원더랜드> 작전이 저희 쪽으로 기울어지면, 제군의 축복을 잔뜩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쿠하하하!”
정윤호는 당장이라도 문을 다시 박차고 열어 그들의 멱살을 잡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자신에 대한 모욕은 얼마든지 해도 상관없었다. 다만 박성화 대령이 쌓아온 업적을 가벼이 여기는 혀놀림에 일순간 분노가 차올랐지만, 지금으로서는 참아야만 했다. 벽을 마주했다면 그 벽을 부술 방법을 찾으면 그만이었다. 부수지 못할 것 같으면 우회해서라도 새로운 길을 찾으면 되었다. 어떻게든 <원더랜드> 작전이 오염되지 않도록 정윤호는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하지만 눈앞이 깜깜한 듯 아무런 길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너무 무능한 탓에, 당신이 쌓아온 길을 이렇게 망치게 되는 걸까요.
본부 건물에서 나오니, 하늘에서 여전히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정윤호의 입술이 떨렸다. 당신이 부여한 삶을 충동적으로 끊으려 한 것에 대한 죗값일까요. 어쩌면, 정말 어쩌면 당신이 살아있을 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착각으로 인해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정윤호는 망망대해에 홀로 버려진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빗길 속을 하염없이 걷던 정윤호는 어느새 자신이 본부에서 멀리 떨어진 해안 절벽까지 다다랐다는 걸 깨달았다. 종종 산책을 나오던 길이라 자기도 모르게 발길이 끌리는 곳으로 왔구나, 하고 생각하던 찰나에 정윤호는 절벽 가까이 다가가 그 아래 바다로 시선을 옮겼다. 거칠게 절벽을 할퀴는 파도의 움직임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파도가 밀려올 때 그에 맞춰 숨을 들이쉬고, 다시 천천히 내쉬었다.
정윤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오늘따라 그의 품이 그리웠다. 절벽 아래로 떨어질 뻔한 몸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겨 체온을 나누어 주었던 그가 너무나도 그리웠다. 그렇게 한동안 사념에 잠겨 눈을 감고 비를 맞고 있는데, 어느 순간 정윤호의 머리 위로 쏟아지던 빗방울이 더 이상 쏟아지지 않았다. 그새 비가 그친 건가 싶어 눈을 뜨니, 제 머리 위로 우산 하나가 씌워져 있었다. 옆을 돌아보니, H가 군복을 입은 채 정윤호에게로 우산을 기울이고 있었다.
“군복이 제법 잘 어울리네.”
“…어색하기만 한데, 뭐.”
“여긴 아무도 모르는 덴데 어떻게 왔지?”
“홀로 비를 맞고 가길래…. 신경 쓰여서.”
“혼자 있고 싶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해본 건가.”
“……절벽 앞에서 그러고 있으면 누구나 걱정해.”
정윤호는 한 마디도 지지 않는 H의 대답에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네가 걱정 끼칠 만한 상황에 늘 서있는구나.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렇고.”
그러다 H의 어깨가 빗물에 잔뜩 젖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곤, 우산을 받아들곤 H를 제 쪽으로 가볍게 끌어당겼다.
“……미안하게 됐네.”
“뭐가?”
“처음에 했던 약속 말이야. 조금… 늦어질 거 같아서.”
“……….”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은 지켜. 군복을 내려놓는 일이 있어도.”
정윤호를 바라보던H가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이으려는 그때, 무언가 날쌔게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두 사람 옆으로 화살이 날아와 땅에 처박혔다. 정윤호는 황급히 화살이 날아든 쪽으로 몸을 돌렸고, H를 제 등 뒤로 바짝 붙였다.
“누구냐!”
어둑어둑한 날씨라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저만치 풀숲에서 어두운 인영이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는 것을 정윤호는 정확히 발견했다. 뒤따라가려는 찰나, H가 황급히 정윤호를 불러 세웠다. H가 땅에 박힌 화살촉을 뽑아 들고 화살기둥에 새겨진 문양을 가리켰다. 화살 기둥엔 작지만 ‘모래시계’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생김새는 마치, 나침반과 유사한 생김새였다.
“이건……. 설마 또다른 고대유물인가?”
“충분히 급소를 노릴 수 있었을 텐데도 일부러 땅 쪽으로 조준해 쏜 걸 보면…. 일부러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 더 맞겠네. 게다가 습격보단 유인에 가까워 보이고. 함정일 수도 있….”
“……….”
“………왜, 왜 그렇게 빤히 봐?”
“아니, 제법 해군 사이에서 막내 생활 좀 보냈다고 적응한 게 신기해서. 뭐, 지금은 끝났으니 그러지 않아도 돼.”
“……. 나는 아직 해적이야.”
정윤호는 뒷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아직 해적이야.’ H의 말이 귓가에 멤돌았다. 그래, 해적! 정윤호는 암암하던 길에 일순간 조명이 비춰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당장 우리 애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겠어. 가자.”
09.
해군대장의 즉위 10년 기념식이 개최됐다.
기념식은 표면상 해군의 위상을 다시금 굳건히 세우고, 해군의 미래를 새롭게 도모하는 화합의 장이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원더랜드 호> 세력 교체를 위해 간부들이 자신이 찍은 후보들을 해군대장 앞에서 자랑하는 시간이었다. 간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술잔을 기울이며 후보의 영웅담을 내세우기 바빴고, 새치혀를 내두르며 상대방을 까내리기에 급급했다. 정윤호는 그 사이에서 술에 취해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는 이들을 보며, 계속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참느라 제법 애를 먹고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다행이었다. 이 연회장은 현재 새로운 <원더랜드 호>의 주인과, 그 주인에게 줄 서기 위해 눈을 부릅 뜨고 지켜보는 이들로 넘쳐났으니. 세 네명 정도 빠져나간다고 해도 아무도 모를 것이 분명했다. 와인잔에 몰래 물을 채워 넣어 홀짝이던 정윤호는 출구 쪽으로 힐끗, 시선을 옮겼다가 다시 거두었다.
한편, 본부 건물 뒷편에 자리잡은 창고로 검은 인영들이 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주변을 살피며 신속하게 창고 안으로 들어갔고, 차례대로 망토를 벗었다.
“다 도착했지?”
“휴, 중간에 미오 때문에 들키는 줄 알고 얼마나 조마조마했던지.”
“아, 그건 치오 네가 발이 느려서 그런 거잖아!”
“아, 다들 조용히 해요. 이러다 들키겠어요.”
검은 인영의 정체는 몰래 연회장을 빠져나온 H와 레온, 그리고 미오와 치오였다.
“<원더랜드 호>의 전력 교체로 지금 현재 간부들은 우리에게 크게 관심이 없을 거고, 그 빈자리를 채울 세력으로 자기네들 인력을 끌어다 쓸 꾀를 궁리할 테니 지금이 기회예요.”
“그러니까 레온 네 말은 본부에 고대유물에 대한 단서가 더 있을 수도 있다, 이 말인 거지?”
미오가 망토 안에 챙겨온 무기들을 다시금 점검하면서 물었다.
“네. 어제 소령님과 H를 습격한 괴한이 남기고 간 화살촉에도 처음 보는 유물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공간 이동’에 대한 유물 단서도 있었죠. <원더랜드 호>는 제법 오래 전부터 시행해온 작전이니만큼 수사 중 발견된 유물서가 분명 본부 내에 보관하고 있을 겁니다. <크라켄>이 약탈한 물건은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지만, 주인 없는 물건은 그동안 수거해서 분류해왔으니까요. 그러니 지하실을 털면 고대 유물에 대해 알 수 있는 단서나 유물서를 발견할 수 이을 거라는 게 제 추측입니다.”
“그런데 정말 시공간 유물이 있을지도 모른다니, 정말 신기하네. 하긴 우리 부대도 유물의 힘을 빌려 무기를 만들고 있으니 정말 시공간을 이동할 수 있는 유물이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긴 해.”
“그러면……. 정말 소령님 추측대로 그 유물을 찾으면 대령님이 있는 곳을 알 수 있는 걸까? 이건 누가 봐도 함정이 분명한데.”
“치오. 그러니까 더더욱 그 함정에 응해줘야지. 우리가 모르는 권력이 움직이고 있는 거라면, 하루 빨리 밝혀내야 해. 우린 아직 해적이니까. 내 말이 맞지? H.”
잠자코 무기를 점검하던 H가 놀란 눈치로 미오를 쳐다보았다. 제게 반감을 갖고 있는 줄 알았으나 미오는 어느새 H에게 경계를 거둔 모습이었다. H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마, ‘난 아직 해적이야’라는 H의 말이 미오의 벽을 허무는 데 크게 일조한 모양이었다.
“기념식은 30분 뒤면 끝날 거예요. 우선 저와 치오가 한 팀, 미오와 H가 한 팀이 되어 흩어져서 단서를 찾아보죠. 보통 유물이나 물품 등은 본부 지하실에 유물서와 함께 보관하고 있으니 바로 그쪽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좋아, 가자!”
H와 미오는 순식간에 지하 6층에 다다랐다. 경비 인력이 최소화되기도 했거니와, 본부 구조를 알 수 있도록 레온이 지하도를 그려준 덕분에 손쉽게 경비 사각지대를 활용해 거뜬히 내려올 수 있었다. H와 미오가 아래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면, 중간부분에서 레온과 치오와 접선해 기념식이 끝나는 시간 전에 연회장에 복귀하는 것이 목표였다.
본부 지하는 의외로 층마다 전부 유물 보관소로 쓰이고 있었다. 물품 및 유물의 특성별로 분류되어 보관 중인 데다가 바로 옆에 유물을 연구하고 특성을 기록한 자료까지 놓여있었다. 하지만 이 넓은 공간, 이 많은 유물을 하나하나 살펴보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유물의 특성별로 분류되어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아주 희귀한 특성을 지닌 유물이 모인 곳을 먼저 찾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미오. 뭔가 이상하지 않아?”
“응? 뭐가?”
“너무…. 너무 조용해서. 아무리 기념식이 있다고는 하지만 경비인력을 모두 빼낼 리 없을 텐데.”
“그만큼 중요한 행사니까.”
“그래도…. 우리야 그렇다 치더라도 이렇게 되면 <크라켄>도 금세 침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에이, 야. 우리 부대의 경비력을 무시하지 마. 떠들 시간에 얼른 유물이나 찾아.”
그러나 유물서를 아무리 뒤져봐도 ‘시간’과 ‘공간’ 관련된 정보는 찾을 수 없었다. 화살촉과 유물서에 그려진 것과 비슷하게 생긴 물건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유물을 발견치 못한 것보다 더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H는 자꾸만 온몸을 쿡쿡 쑤시는 불안감에 호흡이 불규칙해지는 것을 느꼈다. 너무나도 고요하고, 이상하리만큼 차분하며 냉랭한 이곳. 마치 누군가가 짜놓은 판에 들어온 듯한 이질감. 일순간, H는 피가 차갑게 식는 듯한 감각에 유물을 찾는 걸 멈추고, 미오를 향해 돌아보았다.
“그런데 미오.”
“뭐야, 바빠 죽겠는데 왜 불러?”
미오가 짜증스럽게 툭툭 말을 내뱉으며 H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 왜 오른쪽 뺨에 흉터가 있어?”
표정이 일순간 싹 굳어진 그는 유물서를 내려놓고 제 오른쪽 뺨을 어루만졌다. 손 끝에 흉터가 만져지자, 한동안 멍하니 H와 시선을 교환하던 미오는 입가가 길게 찢어질 정도로 괴랄한 미소를 지었다.
“아, 이런. 실수했네.”
*
나는
해적을 증오한다. 해군을 혐오한다. 해적을 증오한다. 해군을 혐오한다. 해적을 증오한다. 해군을 혐오한다. 해적을 증오한다. 해군을 혐오한다. 해적을 증오한다. 해군을 혐오한다. 해적을 증오한다. 해군을 혐오한다. 해적을 증오한다. 해군을 혐오한다. 해적을 증오한다. 해군을 혐오한다. 해적을 증오한다. 해군을 혐오한다. 해적을 증오한다. 해군을 혐오한다. 해적을 증오한다. 해군을 혐오한다. 해적을 증오한다. 해군을 혐오한다.
눈앞에서 집이 불타버렸다. 해적들이 휘두르는 칼에, 마구잡이로 쏴 대는 총에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마을 전체가 피범벅이 되었다. 온 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 나는 그들에게 물었다. 대체 왜 이런 짓을 벌이시는 건가요?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나요? 그러나 해적으로부터 받은 답변은 하나였다.
그냥.
나는 유일한 생존자였다. 죽어가는 마을을 뒤로 한 채 홀로 도망쳤다. 해군은 오지 않았다. 분명 근처에 작은 부대가 있다고 들었는데. 신호탄을 쏘면 바로 달려온다고 했는데.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마을은 그렇게 한 줌의 재가 되어버렸다.
나는 홀로 작은 배를 타고, 하염없이 망망대해를 누볐다. 이렇게 바다 위에서 죽겠구나 싶은 순간에 겨우 작은 섬에 도착했다. 굶주린 배를 과일로 채워 겨우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하지만 먹은 것이 있으면 직후 게워냈다. 내 안에서 기생충이 자라는 것만 같았다. 그에게 영양분 따윈 주고 싶지 않았다. 내 안에 괴물이 자라고 있다. 나는 괴물이다.
타고 온 배는 결국 암초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나는 더 이상 이 섬 밖으로 벗어날 수 없게 됐다. 하지만 오히려 잘 됐다. 나는 살면 안 되었다. 가족과 친구들과 마을을 버려 두고 내가 어떻게.
그렇게 마지막 숨을 거둘 곳을 찾는데, 정말 신이 내린 선물처럼 동굴 안에 무언가 반짝이는 형체를 발견했다. 뭔가 싶어 다가가니 금으로 치장된 모래시계였다. 모래시계를 좌우로 가볍게 흔드니 금빛의 고운 모래가 부드럽게 쏟아졌다 모이길 반복했다. 아름다웠다. 소리가 마치 파도를 닮았다. 금빛 모래에 담긴 힘이 마치 내게로 밀려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죽음을 다짐한 내게 금은 그저 사치에 불과했다. 하지만 외롭게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모래시계가 마치 내 옆을 든든히 지켜주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다음날, 나는 죽지 않았다. 꿈을 꿨다. 내 집이, 나의 마을이 다시 행복한 일상을 되찾는 꿈을. 가족들과 함께 아침을 맞이하고, 친구들과 실컷 바닷속을 헤엄치며 놀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꿈을. 나는 힘없이 모래시계를 응시했다. 혹시, 정말로, 말도 안 되겠지만, 그럴 리는 없겠지만 모래시계를 돌린다면 내가 바라던 그때로 돌아갈 수 있을까? 모래시계 안에 담긴 저 금빛 모래가 과거로 나를 옮겨주지 않을까? 그렇게 나는 충동적으로 모래시계를 돌렸다.
그리고, 나는 그토록 바랐던 일상으로 돌아갔다.
*
10.
H는 머리를 찌르르 쑤시는 통증에 미간을 찌푸렸다가, 이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온몸이 딱딱하게 굳은 것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눈을 뜨고 천천히 제 상태를 둘러보니 의자에 단단히 밧줄로 포박돼 있었다. 그러다 제 앞에 등을 돌리고 서 있는 흰 인영을 마주했는데, H는 그가 미오인가 싶어 없는 힘을 짜내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뒤를 돌아본 건, 미오가 아니었다.
H, 자신이었다.
“또 보네. 100번째의 나.”
H는 제 앞에 있는 현상에 대해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저와 똑같은 얼굴을 한 사람이 마주보고 서 있을 수가 있는가? 목소리도, 한 쪽 입꼬리를 올려 짓는 조소도 모두 소름끼칠 정도로 똑같았다.
“자, 이번에도 어김없이 천칭에 올라온 소감이 어때.”
“역시 당신이었어.”
“이번엔 좀 재밌었어. 사실 중간에 일찍 끝낼 기회가 몇 번 있었는데, 네가 99번째 보다는 좀 더 성장했길 바라면서 인내하고 기다렸지.”
“레온은 어디 갔어. 미오는, 치오는!”
“걱정 마. 걔넨 안 건드렸으니까. 흠, 어디부터 설명을 해야 할까? 아! 그건 이따가 설명해줄게. 이번엔 특별한 손님을 좀 모셔봤어.”
또 다른 H가 어둠을 향해 손짓을 하자, 검은 망토를 두른 이들이 어느 한 남성을 거칠게 끌고 와 H 앞에 내던졌다. 정윤호였다. H가 애타게 이름을 불러보지만, 완전히 정신을 잃은 그는 겨우 숨만 몰아쉬고 있을 뿐이었다. H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의 입가에 희미하게 달콤한 냄새가 났다. H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시체에서 맡았던 달콤한 냄새와 똑같았다. H는 분노 서린 눈빛으로 또 다른 H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어떠한 타격도 없다는 듯이 그는 여유롭게 웃을 뿐이었다.
“시간이 얼마 없어. 네가 빨리 결정하지 않으면 정윤호 소령은 그대로 죽을 거야. 난 얼른 이 저울질의 결과를 알고 싶거든. 이번엔 부디 내 기대에 충족하길 바라.”
“……. 이 미친 반복은 언제까지 할 작정이야.”
“몇 번을 말해. 네 대답에 달렸다고. 그래도 내가 네게 질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너는 나와 같아. 네가 흥미로운 대답을 해줄 때까지, 나는 네가 몇번을 반복해도 다양한 시련을 줄 자신이 있거든.”
또 다른 H는 망토 속에서 모래시계를 꺼냈다. 금빛으로 치장된, 금빛 모래가 곱게 쏟아졌다가 다시 밀리길 반복하는, 아주 아름답고 고귀한 모래시계.
“항상 궁금했어. 나와 똑같은 처지로 살아온 네가, 왜 나와 다른 결정을 하는지. 왜 저주와 살의가 아닌 용서와 자비로 그들을 대하는지. 자, 이제 대답해 봐! 나와 함께 모든 인류를 말살하고, 우리만의 세계를 새로 짓는 거야. 그들을 모두 우리 아래에 두고, 우리만의 거대한 권력을 마음껏 누리는 거야! 어때? 이번엔 나와 복수할 마음이 생겼니?”
또 다른 H가 다가오자, H는 입 안에 침을 우글우글 모아 퉤! 뱉었다. 얼굴에 묻은 뜨끈한 점액에 또 다른 H의 미간이 선명하게 찌그러졌다.
“……하, 내게 또 실망을 안겨주다니. 너도 참 미련하다.”
“당신이 매번 무고한 시민과 내 동료들을 인질 삼아 날 시험하려 드는 건 알고 있었어. 시체와 그 주변에 나침반 문양을 새겨서 내게 경고를 보낸 것도 알고 있었고. 하지만 넌 선을 넘었어. 그들은 절대 건들지 말았어야지.”
에이스. 박성화의 말 끝에 거론된 제 이름이 제법 불쾌하게 들렸는지 또 다른 H, 그러니까 에이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낯에 웃음기를 싹 거두었다. 하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곤 조소를 머금은 채 H에게 가까이 다가가 비웃듯이 말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네가 뜻을 굽히지 않을 게 뻔한데. 네가 아무리 내 시간선으로부터 공간을 벗어나려고 해도, 너는 결국 내 앞에 돌아와 무릎을 꿇게 돼 있어. 성화야.”
*
모래시계의 힘은 고귀했고, 한계가 없었다. 원하는 만큼 과거로 돌아갈 수 있었고, 또 원하는 만큼 과거를 바꿀 수도 있었다. 과거로 돌아간 나는 미래를 꿰뚫어보는 신이 되었다. 권력도 얻기 쉬웠다. 처음엔 해적을 물리쳐 공을 세운 시민으로, 그 다음엔 해군만큼의 실력으로 해적을 제압해 순식간에 위상 있는 직급으로 진급했고, 또 그 다음엔 고위급 간부, 또 다음엔 해군대장까지 오를 수 있었다. 나는 내 가족과 친구와 마을을 지켜내고 이 세계를 거머쥘 수 있는 초월적인 권력도 획득했다. 나는 더 이상 잃을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다. 하지만 삶이 금세 무료해졌다. 해군대장으로 살면서 숱하게 많은 해전을 봐왔지만, 아주 볼품없기 짝이 없었다. 내가 인위로 만든 <크라켄>도 제대로 상대하지 못하면서, 무슨 마을과 제국을 지키겠다고 설쳐대는지. 헛웃음만 나왔다. 하지만 내 이 무료한 삶을 금세 흥미로 채워줄 이가 나타났다. 그의 이름은 박성화였다.
박성화는 수준 높은 실력으로 금세 소령까지 진급했다. 나는 그가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물론 실력과 그를 뒷받쳐 주는 인성도 더 할 나위없이 좋았지만, 나의 흥미를 자극했던 건 그의 과거 때문이었다. 박성화도 자신이 살던 고향을 해적으로부터 송두리째 빼앗겨 가족도, 집도 모두 잃고 정처없이 떠돌다가 해군이 되길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렇게 이 악물고 노력해온 끝에 해군 역사상 가장 빠른 진급을 이뤄내었던 것. 박성화는 내가 다루는 시간선 안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궁금했다.
박성화도 모래시계를 원할까?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내 예상보다 빠르게 들을 수 있었다. 형식적으로 개최한 중앙대책위원회에서 박성화는 내가 만든 <크라켄>의 세력을 위축시킬 작전으로 <원더랜드>라 칭하는 작전을 가져왔고, 그는 해적을 모두 생포하여 그에 맞는 죗값을 매긴 다음, 그에 따라 형벌을 내리자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그의 의견엔 ‘살’ 따윈 없었다. 그러니까, 살의나 학살 같은 것들. 나는 그에게 매우 실망했다. 생포? 자비? 그저 허울뿐인 말이다. 남을 함부로 해하려는 자들은 모두 죽어야 마땅하다. 내 삶을 송두리째 도려내어 나를 폐허로 내몬 자들을 어떻게 살려 보낼 수 있겠어. 분명 나와 똑 같은 아픔을 겪었음에도 박성화는 말 끝마다 자비와 용서를 달고 살았다. 속이 뒤틀릴 것만 같았다. 그러다 문득, 한동안 잊고 살았던 모래시계에 눈길이 갔다. 제 삶을 도려내는 무자비한 학살을 끊임없이 경험하고도, 너는 똑같은 선택을 할까? 계속 자비와 용서를 입에 달고 살까?
나는 박성화를 시험하기 위해 모래시계를 돌렸다.
*
11.
머릿속이 웅웅 울렸다. 속이 타들어갈 것만 같았다. 독의 부작용 때문에 정윤호는 귓속이 먹먹해 주변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체향이 여전히 주변에서 난다는 거였다. 정윤호는 다시 있는 힘껏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지만, 차가운 품을 따스한 체온으로 채워주었던 그를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언제든 눈을 떠 그를 마주하고 싶었다. 그리고 정윤호는 다시금 기적을 경험한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박성화. 이름 없이 바다로 뛰어내리려던 나를 붙잡고 내게 이름을 불러주던 박성화. 나의 은인, 나의 우주. 오늘 기필코 당신에게 자유를 드릴 수 있기를.
한편, 에이스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랐다. 여전히 뜻을 굽히지 않는 박성화의 태도에 그는 퍽 감정이 상해 평정심을 잃은 상태였다. 에이스는 박성화의 뒷머리채를 잡고 제 쪽으로 거칠게 휘둘렀다. 시간을 다루는 이의 위협은 가히 강압적이었다. 박성화는 에이스의 눈빛에서 전례 없는 살의를 읽었다. 숱하게 시간을 돌리고, 보내고, 또 시간을 돌리면서 에이스는 살상에 점점 무뎌진지 오래라 망설임이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박성화 본인도 알고 있었다. 마음에 드는 답을 들을 때까지 에이스는 박성화의 목숨을 빼앗고, 또 과거로 시간을 돌려 자신이 짜놓은 시험장에 그를 던져 놓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에이스는 바로 모래시계를 돌리지 않고, 박성화의 목에 칼날을 들이밀며 물었다.
“자, 이제 그 성가신 나침반은 어디에 있지?”
공간선을 관리하는 고대 유물, 나침반. 나침반은 박성화가 수많은 에이스의 시험을 거치다가 66번째로 시간이 되돌려지던 때에 우연히 발견한 고대 유물이었다. 박성화는 수많은 시간선의 반복으로 정신적으로 숱하게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는데, 이처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해 이미 몸으로 체감하고 있었으므로 나침반과 사용법 등을 기록한 유물서를 통해 시간선을 다루는 <모래시계>의 존재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침반을 갖고 있던 찰나, 며칠 뒤에 에이스의 시험에 다시 오르게 되었고, 66번째 똑같은 대답으로 실망한 에이스가 모래시계를 돌리려던 찰나에 박성화의 몸에 있던 나침반이 크게 동요하며 멋대로 작동해버리고 말았다.
시간선은 사용자가 원하는 만큼의 세월을 조정해 자유롭게 과거를 이동할 수 있다면, 공간선은 단순히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위치만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유물에 불과하다. 하지만 모래시계와 함께 쓰이게 된다면, 시공간을 더욱 자유롭게 조절 및 이동할 수 있는 기능이 생긴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예 다른 세계에서 사용자와 공명하는 영혼이 있다면 그 세계로 완전히 이동할 수 있고, 시간대도 자유자재로 조정할 수 있다. 하지만 사용자가 각자 다른 상황에서 두 유물이 동시에 사용된다면?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동일하게 시간선의 반복을 알아채거나 영향을 받지 않는 등 효과는 볼 수 있었지만, 불완전성 때문에 일부 오작동을 일으킨다는 단점이 있었다.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오더라도 이미 과거로 돌아가 다시 진행 중인 시간선 중에 아무 때에 불시착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하지만 박성화는 오히려 이를 기회로 삼았다. 원하는 시간대가 아닐 때에 불시착한다는 것은 그만큼 에이스가 시간을 돌려도 자신을 찾는 데 매우 애를 먹는다 것을 의미했으니까.
“넌 영영 못 찾을 거야. 이제 그 모래시계도 더는 사용 못할 거고.”
“자신감이 많이 늘었네. 하지만 무슨 근거로?”
“사실 추측에 불과했는데, 아까 네가 한 말로 확신했어. ‘일찍 끝낼 기회’. 내가 아는 당신은 지루하면 바로 끝내 버리는 성향이 강한데, 그런 기회가 있었음에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단 건…. 당신, 이제 모래시계가 말을 제대로 안 듣지? 안정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선 나침반이 필요한데, 내게 접근할 때마다 발견 못했으니까.”
“그럴 듯하지만 틀렸어. 나는 정말로 이번에 네 반응이 궁금해서 오래 지켜본 것뿐이다.”
“사실, 이번 시공간선에서 당신에게 일찍 내 존재를 들킬 줄은 몰랐어. 그때부터지? 스물다섯 번째 사건이 발생한 날, 레온의 모습으로 둔갑했을 때. 내가 기절해 있는 동안 옷이며 군데 군데 수색 했겠지만 나침반을 발견할 수 없었고, 기회를 엿보기 위해 그때부터 쭉 레온인 척 행세했지. 하지만 힘들었을 거야. 난 정말 나침반을 갖고 있지 않았으니까.”
“……….”
허를 제대로 찔렸는지 에이스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져만 갔다. 박성화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에이스를 도발했다. 그가 이성을 잃고 감정적으로 굴 때까지, 에이스의 뒤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는 정윤호의 존재를 완전히 잊을 때까지.
“제법이야. 뭐, 솔직히 인정할게. 네 나침반과 힘이 충돌한 뒤로, 모래시계도 영 상태가 좋지 않아. 하지만 작동에 큰 문제는 없어. 어차피 나침반은 너와 함께 돌아오니까. 가만 있어 보자…. 네가 잃어버렸을 리는 없고. 어디 든든한 조력자가 있나봐?”
에이스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단숨에 몸을 틀어 제 등 뒤를 공격하는 정윤호의 칼을 피했다. 한 번에 급소를 찌를 목적으로 내지른 터라 정윤호는 적잖이 당황했지만, 곧바로 박성화의 몸을 포박하고 있는 밧줄을 끊어냈다.
“단순히 유물 찾는 데에 쓰이다 버려지는 줄 알았더니, 반응을 보니까 이미 다 알고 있는 눈치 같네. 언제부터야? 정윤호 소령.”
“나침반이라는 고대 유물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 순간부터.”
“뭐?”
“당신이 대령님에게 경고하기 위해 짠 판들. 굳이 시체 위치를 지도에 찍어 H로 모양이 나오게끔 선을 이어 대령님이 모든 사건의 배후인 것처럼 모함하려던 것. 그리고 레온의 얼굴로, 레온의 이름으로 대령님을 불신하는 태도를 보이고 이간질하려던 것. 그리고 본부 지하실에 유인하기 위해 일부러 유물에 대한 정보를 흘린 것. 점차 확신을 갖기 시작했지. 내가 목숨 걸고 지키던 보석을 기꺼이 건넨 건, 틀린 게 아니었단 것을.”
정윤호는 말을 끝맺자마자 바로 검을 날카롭게 휘둘러 에이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에이스는 마치 그의 움직임을 미리 예측이라도 한 듯이 제 앞으로 휘둘러지는 검을 속속들이 피했다. 수십번을 되돌리고 이동하길 반복했던 시공간선에서 상대방의 소소한 습관부터 호흡까지 모두 외운 건 에이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정윤호의 검술 습관을 모조리 꿰고 있었다.
“윤호야, 그만…!”
박성화가 말리기도 전에 에이스는 빠르게 움직여 망토 안에 숨겨둔 단검을 꺼내 정윤호의 복부를 향해 찔러 넣었다. 다행히 불안정한 시공간선의 반복으로 영향을 받은 건 사용자 외에 주변인물들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정윤호도 본능적으로 에이스의 수법을 체득한 상태였으므로 재빨리 상체를 틀어 급소로 향하던 공격을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에이스가 연회장에서 먹인 독약의 부작용이 아직 해소되지 않아 눈앞이 핑 돌았고, 그 허점을 파고든 에이스가 정윤호의 복부를 걷어차 멀리 밀어냈다.
“하~. 성가셔. 정말 성가셔. 왜 이렇게 말을 안 듣지? 그냥 내 제안을 수락하면 될 텐데. 왜 항상 어려운 길을 선택하는 거지? 내 손을 잡으면 편하게 갈 수 있는 길이 넓게 트이는데.”
에이스는 명실상부 오랜 기간동안 해군대장 자리에서 굳건히 자리를 지켜온 사람이었다. 그에게 축적된 전투 역량은 가히 무시할 수 없었으므로, 정윤호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그의 급소를 강타할 수 있는 방법을 계속해서 모색했다. 그때, 박성화가 제 옷깃을 뜯어 정윤호의 상처 위에 덧댄 다음 매듭을 지어 지혈을 도왔다. 정윤호는 박성화의 눈빛에서 평온함을 읽었다. 적이 눈 앞에서 또다시 모래시계를 뒤흔들 수 있는 상황인데도, 오히려 그의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가 넘쳐났다.
“에이스. 이제 모든 걸 포기하고 네 죗값을 온전히 치뤄라. 그리고 모든 걸 원래 자리로 되돌려.”
“뭐? 아하하하하하하-! 아니? 난 포기 안 해, 성화. 네가 나와 함께 이 대륙을 휘어잡는 데 동참할 때까지 난 몇 번이고 모래시계를 돌려 너를 시험할 거고, 너를 사지에 내몰아 극한의 고통을 맛 보여줄 것이다. 기대해. 이번 101번째의 지옥을 말이야.”
“……그래. 기대할게.”
“대령님…! 안 됩니다!”
정윤호는 순간 박성화의 입모양을 읽었다. 괜찮아. 박성화는 씩 웃으며 정윤호에게 시선을 보내곤, 에이스를 향해 다가갔다. 에이스는 박성화가 평소와 달리 여유를 부리는 모습에 의아했지만, 이미 제 손에 들린 모래시계를 반 바퀴 돌린 뒤였다. 금빛의 고운 모래가, 일순간 뒤집어지며 중력에 의해 아래로 촘촘히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모래시계가 빛을 발산하며 순식간에 시간을 계산해 모든 것을 그에 맞추어 짜깁기 될 터였다.
………하지만 몇 분이 지나도 모래시계는 작동하지 않았다. 이쯤 되면 이미 작동을 완료하고 에이스가 떠올렸던 시간대에 도착해 있어야 하는 것이 맞는데,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에이스는 머릿속을 스치는 불안감에 박성화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박성화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그거 알아? 모래시계와 나침반의 ‘부작용’에 대한 유물서가 또 있다는 거.”
“………뭐…?”
“아까 너와 지하 6층에서 유물서를 뒤질 때, 정말 우연히 딱 그 내용이 쓰인 면이 다른 유물서에 끼워져 있는 걸 발견하게 됐거든.”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딴 게 있을 리 없잖아! 고대 유물의 유물서는 모래시계와 나침반의 기능만을 담고 있다. 부작용 같은 건 없…………….”
에이스는 삽시간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힘이 모두 빠져나가는 듯한 감각에 소름이 확 끼쳤다. 중심을 잃고 고꾸라지는 그 순간에도 에이스는 제 몸에 있는 모든 힘, 그리고 영양분까지 모조리 빠져나가는 듯 온몸이 조이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박성화는 아랑곳 않고 에이스의 귓가에 가까이 다가갔다.
“모래시계와 나침반은 본래 같이 사용되었어야 하는 게 마땅한 유물이지. 그런데 일방적으로 한 가지 유물만 미친듯이 사용했으니, 당연히 모래시계는 불균형을 채우기 위해 사용자를 영양분 삼아 부족한 힘을 채웠을 거야. 그리고 한계점에 이르게 되면, 고대 유물은 사용자의 ‘생명’을 담보로 힘을 완전히 충당한다-고 적혀 있었어.”
“ㄴ….너…! 무슨 짓….짓을….”
“난 그저 내 신념을 지켰을 뿐이야. 그래도 다행이야. 너는 네게 걸 맞는 죗값을 받고, 내 신념에 따라 널 용서할 테니까.”
“ㅇ..이..!! 죽…. 죽여 버릴…!”
“잘 가.”
박성화는 얼굴에 웃음기를 싹 거두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모든 세계에서 사라져가는 에이스의 살기 어린 충혈눈을 보며, 박성화는 속으로 불쌍하다- 같은 말을 떠올렸다. 모래시계가 완전히 아래로 내려가는 순간, 시간선 위에 군림하던 독재자는 결국 한줌의 재가 되어 완전히 사라졌다. 박성화는 모래 시계를 집어 들었다. 묵직했다. 숱하게 상실을 경험하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이 순간을 기다려왔기 때문이었다. 박성화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았다. 그동안 인위적으로 조작된 시공간선의 혼돈을 제자리로 두는 것이었다.
박성화는 모래시계를 품에 안은 채, 정윤호에게 다가갔다. 정윤호도 알았다. 박성화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그가 무엇을 결심했는지를. 당신을 오래도록 그리워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품에 가둬 놓고 곁에 두고 싶었다. 하지만 당신을 너무나도 사랑한 탓에 당신의 모든 결정마저 똑같이 사랑하게 될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 그 눈빛은 반칙인 것 같다-고 정윤호는 박성화를 따라 미소를 지으며 마음을 정리했다.
“윤호야. 나, 이번 시공간선에서 너를 처음 만났던 그곳으로 데려다 줄 수 있어?”
“응. 당연하죠. 어디든 함께 갈게요.”
“내가 좀…. 오래 잠들 수도 있어. 아니면 아예 어디 갔다 올 수도 있고. 그래도 나 기다려줄 수 있겠니.”
“나 기다리는 거 세상에서 제일 잘 하잖아요. 저 어디 안 가요. 대령님 곁에 쭉 있겠다고, 내 이름 걸고 맹세할게요.”
맹세의 방증으로 정윤호는 박성화의 손을 끌어다 그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의 따스한 손은 언젠가 돌아와 제 손 안으로 체온을 나누러 올 거라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리움에 비해 짧은 재회라 가슴이 아려 왔지만, 정윤호는 박성화의 다정 어린 눈빛과 미소를 삼켜 마음을 달랬다. 나의 우주를 정의한다면 바로 당신이 아닐까. 정윤호는 다시 한번 박성화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그 위로 뜨거운 눈물을 보냈다.
12.
당신에게 새 이름을 받은 순간부터, 당신의 시선과 호흡은 제게 있어서 망망대해 속 별자리처럼 선명한 나침반과도 같습니다. 나침반이 가리키는 곳으로 가면, 그 끝엔, 바로 당신이 있으니까요.
13.
박성화가 뒤섞인 시공간선을 재정비하기 위해 101번째의 항해를 떠난지 100일이 지났다. 정윤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가 돌아올 지도 모를 날을 고대하며 관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해안가에 발을 디딘 순간 정윤호는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숲에 있는 관으로 가기 위해선 반드시 해변가를 이루는 모래밭을 지나야만 했는데, 숲에서 모래밭으로 나온 방향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길을 이루며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정윤호는 발자국이 향하는 곳을 향해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그 끝에는 해안절벽이 있었다.
정윤호는 모래밭에 찍힌 발자국 그대로 천천히 겹쳐 걸었다. 발자국의 주인은 다소 설레는 마음으로 모래밭 위를 거닐었는지, 가볍고 산뜻한 발자국이었다. 모래밭을 지나 그대로 오르막길을 오르면, 드넓은 해안절벽이 절경을 이룬다. 구름 없이 푸른 하늘이 훤히 들여다보이니 마음이 트인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면이 오늘따라 선명했다.
정윤호는 해안절벽을 따라 계속해서 걸었다. 발자국의 주인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을 테다. 이윽고 해안절벽의 끝자락 즈음에 도착했을 때, 정윤호는 맞은편에 있는 이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정윤호의 품으로 따뜻한 체온이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