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 신입.”
“신입 아닌데요.”
“그래, 인턴. 너 얼굴에 불만이 가득하다?”
“누가 자꾸 신입이라고 해서요.”
“어차피 인턴 끝나면 정규직 신입이지, 뭐.”
우영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쭉 들이켜며 종호의 책상에 걸터앉아 말을 했다. 눈앞에 가까워진 우영의 엉덩이에 무표정이던 종호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대답도 없이 얼굴만 구기고 있던 종호가 우당탕탕 멀어지는 엉덩이와 큰 목소리에 표정이 풀어졌다.
“뭐야? 너 천계로 튈 거야?!”
“...천계로 이직 가능합니까?”
진지한 종호의 목소리에 우영이 왁왁 소리치며 온 사무실을 뛰어다녔다.
최종호 천계로 튈 거래!!! 이럴 순 없어!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가르쳐놨더니 어떻게 튈 생각을 해?! 이건 배신이야! 배신마 최종호!!!!!
덕분에 마계에는 온갖 소문이 가득해졌다. 거래1팀에서 신입 교육이랍시고 최 인턴한테 온갖 잡일을 시켰다더라. 일 시켜놓고는 그렇게 뭐라고 했다더라. 저를 안쓰럽게 보는 시선과 떠도는 소문들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명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종호는, 박 팀장이 최 인턴을 그렇게 괴롭혔다더라- 하는 수군거림에 굳이 해명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생각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서.
그렇다면 박성화 팀장은 최종호 인턴을 어떻게 괴롭혔는가. 출근 시간 전부터 불러내서 같이 저녁 먹기. 박 팀장 때문에 밥 든든하게 먹고 출근하는 길에 카페에서 커피 얻어 마시기. 사무실에서 죽어가는 정 대리 보면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수혈하기. 서류 보다가 경악하는 박 팀장을 보고 송 과장, 정 대리 거래명세서 다시 확인하기. *됐음을 감지한 서류 얼른 찢어버리고 수정해서 박 팀장한테 전달하기. 안광 사라진 박 팀장한테 끌려서 이른 야식 먹기. 그렇게 박 팀장과 3시간의 야식 시간 가지면서 2시간은 송 과장이랑 정 대리가 왜 그럴까, 열변을 토하는 박 팀장 목소리 흘려듣기. 사무실로 복귀해서 다음 거래 상대 추리고 있으면 정 대리 재롱에 기분 좋아진 박 팀장이 회식하자고 해서 퇴근하기. 법카로 청구할 예정이니 와인에 그 비싸다는 성실납세자 영혼 0.1g 곁들이기.
악마들의 말마따나 박 팀장이 괴롭혔다는 하루를 나열하던 최종호는 생각했다. 이게 과연 박 팀장이 괴롭힌 게 맞는가. 노을 바라보다 지각하기 일쑤였던 최종호는 박 팀장 덕분에 지각을 면했고, 귀찮음에 끼니를 자주 거르던 최종호는 박 팀장 덕분에 하루 최소 2끼는 챙겨 먹게 되었다. 최종호도 안다. 박 팀장이 괴롭힌 적은 없다는걸. 단지 마음을 좀 힘들게 했을 뿐...
인간 음식 먹고 맛있다고 예쁜(아님) 표정 하기. 마계에는 딸기가 자라지 않아 슬프다고 마왕 몰래 딸기 들여오고 귀엽게(아님) 헤헤 웃기. 무화과 스무디보다 훨씬 달고 맛있다고 잘생긴(이건 맞음) 얼굴로 먹어보라고 하기.
결국, 소악마들이 달콤한 향기에 홀린다는 홍과원도 그냥 지나치던 최종호가 딸기스무디를 먹었다. 달콤함에 구겨지던 종호의 얼굴은 기대감에 빛나는 박 팀장의 눈방울과 마주하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묘한 표정으로, 맛있네요- 답했다. 종호의 답에 신이 난 박 팀장은 다음엔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먹을 수 있게 해주겠다 약속했고, 생크림이 뭔지 모르던 최종호는 감사 인사를 전할 수밖에 없었다.
*
갑작스레 잡힌 야근에 한숨을 내쉬며 붉어지는 창밖을 보던 종호는 창문에 비친 사무실로 들어오던 검은 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했다. 사무실로 들어오던 고양이는 낯선 존재의 뒷모습을 보고 어정쩡하게 한쪽 발을 든 상태로 움직임을 멈추고 눈만 끔뻑였다. 제 존재를 확인하려 몸을 돌린 종호의 얼굴을 확인하고 긴장이 풀린 듯 기지개를 켰다. 눈을 끔뻑일 때마다 붉은빛을 받은 눈동자는 호박색과 녹색으로 번갈아 가며 영롱하게 빛났다. 한참을 고양이와 마주하던 종호는 눈동자의 영롱함에 홀린 듯 멍하니 다가갔다.
검은 고양이는 다가오는 종호를 보며 얌전히 꼬리만 살랑거렸다. 종호는 쪼그려 앉아 고양이와 시선을 맞추었다. 도망갈 생각도 없이 끔뻑거리며 눈을 맞춰오는 고양이에 종호는 천천히 손을 뻗어 풍성한 털을 쓰다듬었다. 종호의 손길을 느끼던 고양이는 먀아- 종호의 귓가에만 들릴 정도로 낮고 조그마한 목소리로 울었다. 덩치에 비해 조그마한 울음소리에 종호는 저도 모르게 허허 웃어버렸다. 순간 멈칫, 웃는 종호의 얼굴을 본 고양이는 제 머리통을 종호의 손에 들이밀었다. 이제는 철퍼덕 땅바닥에 주저앉은 종호가 두 손으로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잠깐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고 친밀감이 생긴 종호는 평소라면 속으로만 생각하고 넘길 말부터 아무에게도 하지 못할 말까지 하고 있었다.
야옹아, 너 되게 예쁘게 생겼다.
먀욹-
너도 이미 알고 있구나.
냨-
이렇게 보니까 팀장님 닮았네.
먀아옭-
걱정하지 마. 우리 팀장님 진짜 잘생겼어.
종호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는 듯 쫑알거리던 고양이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종호만 바라봤다. 딱히 대답을 바라고 했던 말은 아닌지라 종호는 고양이의 머리부터 등허리를 쓰다듬으며 주절거렸다.
있지... 요즘 나 때문에 팀장님이 안 들어도 될 말을 듣고 있는 거 같은데... 해명해야겠지...? 그래도 팀장님은 계속 나 챙겨주시는데. 뭐, 가끔은 힘들게 해도.
먀앍-
아냐, 그래도 일하는 걸로는 안 힘들게 해주셔. ...아마도?
곰곰 생각에 빠져 말이 없는 종호에 고양이도 쫑알거리기 시작했다. 바라는 답이라도 있는 듯 쉬지 않고 쫑알거리던 고양이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말하는 종호의 힘없는 목소리에 충격을 받은 듯 눈만 끔뻑였다.
“...진짜 천계라도 가면 좀 괜찮아지려나...”
*
최종호가 지각을 했다.
알람이 울리기 10분 전부터 박 팀장에게 연락이 왔어야 했는데,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박 팀장의 연락을 받고 10분 뒤 울릴 알림을 기다리며 겉잠에 들었어야 했다. 왠지 상쾌한 기분에 눈을 뜬 종호는 캄캄한 주변에 헐레벌떡 몸을 일으켰다. 급하게 준비하고 나서며 확인한 휴대폰에는 또 지각이냐며 약 올리는 우영의 연락과 어디 아프냐며 종호를 걱정하는 성화의 연락이 있었다.
종호는 쉽게 사무실로 들어가지 못하고 한숨만 폭폭 내쉬고 있었다. 전엔 지각을 하고서도 어찌 그리 뻔뻔하게 행동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박 팀장과 지는 해를 바라보며 저녁을 너무 많이 먹었나 생각했다. 평소라면 멀리서도 알아챘을 어두운 기운이 가까워지는 것도 모를 정도로.
온갖 어두운 기운을 잔뜩 몰고 온 민기는 사무실 문을 막고 있는 종호를 툭 건드렸다. 놀란 종호가 움찔하다 사무실 문이 열렸고 안에서 바라보는 성화와 눈이 마주쳤다. 도륵 눈을 굴리던 종호가 꾸벅 인사하곤 작은 목소리로 죄송합니다- 했다. 어디 아픈 거 아니면 괜찮다는 성화와 겨우 지각한 걸로 뭘 그러냐며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는 민기를 따라 제자리로 향했다. 저를 보며 깔깔 웃는 우영을 애써 모른 척하며 쌓인 서류만 뒤적였다.
회식한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또 회식 타령인 박 팀장에게 이런저런 핑계로 벗어난 우영이 남아있는 민기와 종호에게 윙크를 하며 사무실을 떠났다. 셋이서 회식을 하게 되려나 한숨을 내쉬던 종호는 나도 집에 갈래. 형 나 가요- 하며 사무실을 떠난 민기의 뒷모습만 허망하게 바라봤다. 박 팀장이랑 둘이 밥을 먹으라고? 아니, 못 먹을 건 없지만, 그래도, 지금은 안 되는데. 박 팀장의 눈치를 슬슬 보고 있으니 성화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 맞다. 나 천계 다녀와야 하는데. 깜빡했네. 하하. 종호야, 수고했고 내일 보자.”
“...네. 고생하셨어요.”
빠르게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종호가 중얼거렸다.
팀장님 지금 나 피하는 거야?
박 팀장이 저를 왜 피하는지, 제가 피해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하며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에 놀라 바라보면 전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던 검은 고양이가 있었다. 종호를 발견하곤 어제와 똑같은 자세로 멈칫- 눈만 끔뻑이는 고양이에 하하- 웃어버리자 어제와 같이 기지개를 켜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야옹아, 또 보네. 안녕-
...냙.
이 시간에만 다니는 거야? 밥은 먹었어? 아, 내가 줄 수 있는 게 없네... 근데 신기하다. 해가 떴는데도 잘 다니네? 인간계 고양이인가... 여기 함부로 들어오면 위험해~
먀옼.
근데 야옹아. 네가 생각해도 내가 바보 같지.
먀욹.
어떻게 바로 지각을 하냐. 팀장님이 뭐라고 생각할까. 대리님 말대로 인턴 기간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깊은 한숨을 쉬는 종호를 바라보던 고양이는 위로하는 듯 앞발을 종호의 어깨에 턱 얹었다. 온기가 느껴져 발등에 손가락을 톡 올려도 얌전한 고양이에 은근슬쩍 발 볼록 살을 쭈물거렸다. 고양이는 제 앞발을 내주고도 얌전히 종호를 바라보기만 했다. 탱글탱글한 젤리의 촉감에 팔렸던 정신을 다잡으며 종호가 몸을 일으켰다.
미안한데 내일도 지각할 수는 없어서 먼저 가볼게. 아무리 고양이여도 마계는 위험하니까 얼른 인간계로 돌아가구~
머리부터 등허리를 쓰다듬으며 하는 말에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먀욹- 대답한 고양이는 사무실을 벗어나는 종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시야에서 종호가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한 검은 고양이는 늘어지게 하품하며 기지개를 켜고는 순식간에 성화로 변했다.
“어떡하지...”
*
최 인턴이 지각을 한지 일주일이 지났고 최종호는 다시 뻔뻔하게 사무실로 들어섰다. 우영의 타박에도 미소만 짓던 종호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렸다. 주기적으로 열리는 이계 회동에 함께 참여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계 회동을 이론으로만 배우고 참석한 적 없는 종호는 비정규직인 나도 갈 수 있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뿐이었다. 우영이 자기는 절대 가지 않을 거라며 발악하기 전까진...
이계 회동은 인간계보다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마계와 더 느리게 흐르는 천계가 인간들의 기준으로 6개월에 한 번씩 이루어지는데, 천계와 마계가 인간계에 관여한 사건 및 거래 결산(이라고 쓰고 주로 천사와 악마들이 사고 친 거 수습이라고 읽는 것)이다. 이번 회동의 주요 안건은 천사와 거래 중이던 인간과 악마와 거래 중이던 인간의 영혼이 반대로 반환된 사건이었다. 제 할 일은 빠지지 않던 우영이 가기 싫다고 발악한 사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월급쟁이가 하기 싫다고 안 할 수 있나, 별수 없지. 죽상을 한 우영과 그런 우영을 보며 깔깔 웃고 있는 민기, 그리고 잔뜩 긴장한 종호가 성화의 뒤를 따랐다. 카페 안으로 들어서자 먼저 도착해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고 있는 홍중이 있었다. 좋게 말해 웃고 있는 얼굴이지, 한 마디로 썩소였다. 성화는 홍중에게 손 인사를 하고선 주머니에서 법카를 꺼냈다. 짜라란- 유치한 효과음을 내며. 그런 성화를 보며 홍중의 광대가 살짝 올라갔던 건, 꾸벅 인사하고 민기 뒤에 숨어 홍중의 눈치만 보고 있던 우영만 알아차렸다. 저 형들 아직도 저러네- 생각하다 홍중과 눈이 마주쳐 괜히 종호에게 시비를 걸긴 했지만.
“어이, 신입. 천계 거래팀 팀장님께 인사가 약하다? 90도로 박아야지.”
정 대리님이 왜 이럴까. 이미 꾸벅 인사했던 종호가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다가 홍중을 바라봤다. 우영의 말을 들음과 동시에 얼굴이 구겨지던 홍중이 종호의 눈빛을 읽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장난을 치는 사람의 얼굴이라곤 볼 수 없었지만 홍중에게는 장난이었다.
“정 대리님? 제가 조폭은 아닙니다만?”
“하하. 박 팀장님~ 우리 케이크도 먹어도 되나~?”
점점 매서워지는 홍중의 시선을 피한 우영이 성화에게 다가갔다. 케이크 소리에 민기까지 쫓아가자 홀로 남은 종호만 멋쩍게 웃으며 성화의 뒷모습만 바라볼 뿐이었다. 조각상처럼 굳어있던 종호는 음료 4잔과 샌드위치 5개를 받아 가는 산과 윤호와 마주하며 풀렸다.
“어?! 네가 그 인턴? 근데 왜 그러고 서 있어? 아, 아직 주문 안 했지? 성화형 케이크 고르느라 정신없던데.”
낯선 얼굴에 다시 긴장한 종호가 꾸벅 인사하고는 성화에게로 향했다. 계산을 끝낸 성화가 아이스 아메리카노 맞지? 물으며 히히 웃었다. 종호는 네- 감사합니다- 인사했지만, 성화가 아무것도 마시지 말라 하더라도 웃는 얼굴에 감사하다고 할 판이었다.
마주 앉은 천사 셋과 악마 셋은 근황 이야기를 하는 데 집중했다. 김홍중과 최종호 둘만 빼고. 우영의 얼굴을 보자마자 화를 낼 것 같았던 홍중은 무표정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정우영을? 아니, 박성화를. 샌드위치 한 입, 딸기 케이크도 한 입, 딸기스무디까지 야무지게 먹고 있는 성화를 보며 입만 꾹 다물고 있었다. 다들 익숙하게 수다를 떠는 와중에 종호만 눈치 보기 바빴다.
이계 회동이라며 이건 그냥 동창 모임 아닌가- 생각할 때쯤 샌드위치 세 개를 다 먹은 성화가 자연스럽게 홍중의 카모마일 티를 홀짝거리고 홍중은 그제야 팔짱을 풀며 파묻혔던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깊은 한숨을 쉼과 동시에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술을 감쳐물었다. 종호만 성화와 홍중을 번갈아보며 생각에 잠겼다. 교육생 시절부터 친구라고는 들었지만, 서로의 행동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게 묘하게 거슬렸다.
다들 둘의 행동을 못 본 건지 보고도 모른 척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긴장한 채 계속 홍중을 보던 종호는 모를 수가 없었다. 성화의 입가에 샌드위치 소스가 묻으면 냅킨을 건네주고 샌드위치를 다 먹어갈 때쯤 자신의 카모마일 티를 성화의 앞쪽으로 슬쩍 밀어주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홍중은 우영을, 성화는 여상을 바라보느라 종호가 다른 생각에 빠진 걸 모른 채 입을 열기 시작했다. 뭐, 지금 종호가 중요한 건 아니라서 알면서도 모른척했을 것이다. 들어도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생각하기를 포기했던 종호는 자초지종을 들은 홍중과 성화의 표정이 심각해 다시 집중했다. 오랜만에 진지한 성화의 얼굴도 집중하는 데에 한몫했다.
이야기는 열심히 흘려들으며 성화의 얼굴을 바라보다 성화의 뒤로 지나가는 인간들에게 시선이 옮겨졌다. 음료를 한 잔씩 손에 들고 나가는 인간들은 교복을 입은 학생이었다. 학생을 처음 본 건 아니었지만 교복을 입은, 거기다 하하 호호 무리 지어 다니는 학생들은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저런 애들은 악마와 거래 따윈 하지 않겠지. 멀어지는 학생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갑작스레 돌아보는 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너무 열심히 봤나 민망해져 얼른 시선을 옮겼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최종호? 잘못 봤나... 중얼거리는 학생은 보지 못했다.
*
인간계에서 특별하게 한 것도 없이 마계로 돌아왔고 종호는 이계 회동에 제가 갔어야 하나- 의문이었다. 박 팀장의 눈치를 보다 정 대리에게 슬쩍 물어봤지만, 우영은 크게 놀라 말을 더듬으며 원하는 답을 해주지 않았다. 일개 대리인 제가 이유를 어찌 알겠냐는데 누가 봐도 이유를 아는 것 같았다. 아무리 궁금해도 말해줄 생각이 없다면 더 캐물을 생각도 없었다. 대리님이 말 못 할 이유라면 팀장님은 말해주시겠지.
“팀장님, 저 여쭤볼 게 있는데요.”
“...진짜 천계로 가려고?”
울먹이는 듯한 얼굴에 제가 하려던 말도 잊은 채 그거 진짜 헛소문이라며 제가 팀장님을 얼마나 존경하는지 아시냐며 성화를 달랬다. 왜 그런 소문이 돌았는지, 왜 해명은 하지 않았는지 설명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제가 팀장님을 좋아한다 고백하고 있었다. 제가 더 놀라 입을 틀어막자 놀란 듯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있던 성화가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그럼 천계는 안 가는 거지? 그거면 됐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난 천계 간다는 줄 알고 심장 떨어질 뻔했잖아- 주절거리는 성화에 종호의 표정이 굳어갔다. 종호의 표정이 변하는 것도 모르고 신나서 종알거리는 성화였다. 종호 너 없으면 우리 팀이 안 굴러가잖아- 좋아한다고 했는데 그거면 됐다는 게 말이야 방구야. 그냥 거절하면 되지. 거절도 성의 있게 하시네. 진짜 천계로 가야 하나. 한편으론 다행이었다. 최종호는 왜 굳이 자신이 이계 회동에 참여했어야 했는가 이유를 물어보려던 걸 잊어버렸다.
인간계의 한편엔 발길이 쉽게 닿지 않을 호텔이 존재했다. 해사하게 꾸며진 외부에 비해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는데 천계로 이어지는 문과 마계로 이어지는 문이 존재하는 곳으로 천사와 악마들이 조금이나마 쉽게 거래하고자 만든 장소였다. 대천사와 마왕이 복지랍시고 이계 구내식당도 만들어 더 음산해졌다. 거래팀이 많이 이용하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인간계 외근이 많아서-라기 보다는 박성화가 인간 음식을 매우 많이 좋아했다. 덕분에 마계 거래 1팀은 하루 한 끼는 꼭 구내식당에서 해결했고 천계 거래팀은 달에 한 번 볼까 했다.
이계 회동 이후로 오랜 시간이 지나진 않았지만, 구내식당에서는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에 성화는 팀장의 권한으로 메뉴 2개를 더 주문했다. 네가 먹고 싶은 걸 고르라면서도 홍중은 불만이 많아 보였다. 뚱한 표정으로 음식을 대충 헤집어 놓으면서도 성화가 입가에 양념을 묻히면 티슈를 쥐여주고 볼이 터져라 음식을 밀어 넣으면 천천히 먹으라며 물을 놔주기도 했다. 밥 한 공기를 싹 비우고 주위를 둘러보는 성화의 앞에 새 밥공기가 놓이고 자연스럽게 홍중이 건넨 밥공기를 가져가며 해맑게 웃는 성화와 그 둘을 바라보던 종호는 기시감이 느껴져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쉬지 않고 음식을 씹으면서도 오늘 고기 상태가 좋으니 한 판 더 먹자는 성화와 좋은 생각이라며 주문하고 오겠다는 윤호에 홍중은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난 진짜 배 터질 거 같아서 산책 좀 하고 있을게. 제대로 듣긴 했는지 어엉- 대답하면서 감자튀김을 한입 가득 욱여넣는 성화였다. 둘의 관계에 의문이 생긴 종호는 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성화를 대신한다는 핑계로 홍중을 따라나섰다. 멀찍이 따라가자 멈춰 선 홍중이 몸을 돌려 종호를 바라봤다.
“궁금한 게 많아 보이는데 그냥 같이 걷지?”
김 팀장과의 독대는 처음이라 어버버하며 바보처럼 홍중의 옆으로 향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종호한테는 궁금증 하나라도 풀 수 있다면 감사했기에. 정작 예상치 못한 얘기를 듣고 본인이 궁금했던 건 다 잊어버렸지만.
“천계로 이직하고 싶어한다며?”
“...아닌데요?”
“내가 잘못 들었나... 다들 그러던데...”
어쩌다 김 팀장까지 알게 되었는지 대체 그 헛소문이 어디까지 퍼졌는지 아득해진 와중에도 궁금하긴 했다. 진짜 천계로 이직 가능한지. 근데 전 교육생부터 수습 기간까지 마계에만 있었고, 기억은 없지만 아무튼 인간계 출신이라던데... 인간계 출신도 천계에서 일을 할 수 있는지. 진지한 종호에 경청하던 홍중만 의아해졌다. 며칠 전 성화한테 들었을 때도 이직 생각 없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리고 생각했다. 이 아이가 인간계에 미련이 없는 건지, 마계에 애정이 생긴 건지 알 수 없다고.
홍중과의 대화에서 딱히 얻은 건 없었다. 아, 딱 하나. 원칙적으론 불가능할지 몰라도 홍중의 힘을 써서 천계로 이직 가능하다는 소식.
*
전날 저녁부터 찌뿌둥했던 몸이 한숨 자고 일어나도 풀리지가 않았다. 몸을 일으킬 수도 없어 겨우 출근을 못 하겠다는 소식을 전하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종호는 잠결에 성화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지만 눈을 뜰 힘도 없어 아득하게 들리는 말소리를 흘려들었다.
우리 실수로 데려온 거니까 잡으면 안 되겠지. 욕심 안 부릴게. 대신 나중에 언젠가라도 기억해줘. 아주 조금만, 조금만 욕심내서 찾아가면 아는 척은 해주라.
*
종호가 눈을 떴다. 상쾌한 기분에 몸을 일으키려다 온갖 장치들에 그대로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눈만 굴려 주변을 둘러보니 사방이 하얀 병실이었다. 하룻밤 푹 자고 일어난 거 같은데 어째서 몸에 이렇게 많은 관이 꽂혀있고 산소호흡기를 끼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멍하니 숨만 쉬며 눈을 깜빡이고 있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종호와 눈이 마주치고 놀라 울음을 터뜨리는 엄마에 왜 우냐고 말을 하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속으로만 삼키며 눈만 깜빡였다.
의사는 종호의 상태를 확인하곤 3개월 만에 깨어난 것도 기적인데 회복도 빨라 일반병실로 옮겨 지켜보다가 퇴원하면 될 것 같다고 했다. 산소호흡기도 떼고 이런저런 관들을 떼고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당시의 기억이 없다는 종호에 입시 스트레스일 가능성이 높다며 애써 기억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등교하던 길에 이유도 없이 쓰러져 그대로 혼수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종호는 자면서 긴 꿈을 꾼 것 같았는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언젠가 기억해야 될 때면 생각나겠지.
종호는 빠르게 회복했다. 굳이 옆에 있겠다는 엄마를 집에 보내고 30분 정도는 산책하는 것이 좋다는 말에 2시간씩 산책을 하기도 했다. 담당 간호사는 많이 회복했어도 조심하는 게 좋으니 적당히 1시간 정도만 다녀오라 했지만, 따지면 종호도 딱 1시간만 산책했다. 나머지 시간은 노을 질 때쯤 찾아오는 검은 고양이와 놀기 바빴다.
고양이는 경계심도 없이 머리를 쓰다듬으면 고로롱거렸고 간식이라도 주면 종호의 손에, 팔에 이리저리 머리를 부딪히며 애교부리기 바빴다.
너 이렇게 경계심 없이 길냥이 생활 어떻게 할래. 그렇다고 형이 데려가 줄 순 없어. 이 형이 또 고3이란다. 수능 보기 전날 쓰러져서 학교를 또 다녀야 된대... 하아... 뭐야. 왜 그렇게 봐. 너도 내가 바보 같아?
먀옭-
어라, 대답하는 타이밍이 이상하다? 어휴. 어쩔 수 없지. 뭐. 해야지. 어쩌겠어.
검은 고양이는 열심히 종알거리는 종호의 말에 맞장구를 치기도 애교를 부리기도 하다가 정해진 시간이라도 있는 듯 1시간이 지나면 종호의 눈을 빤히 바라보다 후다닥 뛰어갔다. 남은 종호는 검은 고양이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며 중얼거리곤 병실로 돌아왔다.
야, 형 말 안 끝났는데 가는 게 어딨어. 형 내일 퇴원한단 말이야... 우리 이제 못 만난다구.
*
어느새 쌀쌀해진 날씨에 코를 훌쩍이며 가디건을 여미고 있었다. 뒤에서 느껴지는 낯선 기척에 뒤를 돌아봐야 하나 도망쳐야 하나 고민하던 와중에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천천히 돌아봤다. 처음 보는 얼굴이 저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제 이름을 알 정도면 친했던 사이인가? 전혀 기억이 안 나는데 누구냐고 물어봐도 되나. 실례이려나. 어떡하지. 고민하는 종호의 눈빛을 읽었는지 남자는 하하 웃으며 말했다.
“언젠가 기억해달라니까 기억 안 해주는 것 봐.”
“...죄송한데 누구세요?”
“음, 너랑 거래하러 온 무언가.”
“...무언가요?”
“아무래도 그치... 사람은 아니니까?”
“저 죽어요?”
“음. 그것까진 생각 안 해봤는데... 에이씨, 홍중이한테 또 혼나겠네.”
생긴 것과는 달리 허술한 모습에 경계심이 풀린 종호가 슬며시 미소 지었다.
“아, 근데 너 20살 생일은 지났어?”
“오늘이 20살 생일인데요.”
“헐, 진짜? 잠깐만.”
어두운 수풀로 향하던 남자가 급하게 종호를 보며 소리치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디 가지 말고 거기 있어!!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요즘 이상한 사람 많다더니 이렇게 만나보네. 허탈하게 웃으며 가던 길로 향했다. 순간 눈앞에 나타난 남자가 숨을 몰아쉬며 종호에게 딸기스무디를 쥐여주었다.
“하여튼 최종호. 말 안 들어. 어디 가지 말라니까. 바로 가는 거 봐.”
“어... 근데 저 딸기스무디 안 좋아하는데.”
“...뭐?”
순식간에 배신감으로 가득해진 눈이 촉촉해졌다. 왜...? 딸기스무디 그렇게 맛있다고 했잖아... 입맛이 바뀌는 것도 아닌데... 한 번 더 거절하면 진짜 울 것 같은 얼굴에 얼른 딸기스무디를 마셨다. 달콜함에 일그러지는 제 얼굴을 안간힘을 다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 달달하네. 남자의 눈치를 보며 얼른 말을 덧붙였다.
“아니, 아직 딸기가 맛있는 시즌이 아니잖아요...”
“근데 그건 선물 아니야. 진짜 내 생일 선물은, 너 나랑 거래할래?”
“맞다. 아까부터 자꾸 무슨 거래라는 거예요?”
“너에게 또 다른 세상을 보여주려고. 물론 넌 이미 경험했지만, 안타깝게도 기억을 못 하는 거 같아서. 내가 아는 최종호라면, 사랑을 선택할 거야.”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알 수 없는 남자의 말에 종호가 제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인상을 구겼다. 종호에게 한 발짝 다가온 남자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맞으면 아플 거 같은데... 욕은 해도 되는데 때리지만 말아주라... 방법이 이거밖에 없어... 미안. 여전히 이해되지 않아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종호의 눈을 빤히 바라보던 남자는 순식간에 제 입술을 종호의 입술에 부딪혔다. 왠지 익숙한 눈빛에 밀어내지 못하던 종호는 긴 꿈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다면, 넌 무엇을 받고 싶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