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지움 투약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은 날 밤, 나는 이웃들의 눈을 피해 거리로 나섰어. 지상에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심장이 더 빠르게 요동쳤지. 두려움이라기보다는 기대라는 이름이 어울린다고 생각했어.
알고 싶었거든. 이 균형을 깨부순다면, 한평생을 봐 왔던 잿빛 거리를 눈에 담기만 해도 눈물이 고이는 걸까? 난생처음 느껴보는 충격이 내 몸을 뒤흔들어, 딱딱한 비늘이 전부 떨어져 나가 영혼이라는 여린 살갗을 드러나는 걸까?
이제부터는 감정이라는 것이, 나의 몸을 지배하게 되는 걸까?
하지만 통금을 훨씬 넘긴 시각의 텅 빈 거리에 홀로 섰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이랄 만한 감정은 허무함과 가벼운 혼란이 고작이었어. 거리는 어둑한 고요에 잠긴 그대로였고, 그로부터 나는 그 어떠한 내면의 동요도 느낄 수 없었지.
언제라도 순찰 중인 그라마톤 클레릭에게 검문을 당할 수 있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거리를 헤맸어. 이게 정말 전부인가? 고작 이런 걸 얻기 위해서, 그 많은 사람들이 감정 유발자라는 죄목 하에 소각로에서 태워지고 있는 건가?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차라리 그들과 함께 불타고 싶었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매일 같이 주삿바늘을 찔러넣느니, 차라리 흔적도 없이 죽고 싶었어.
감정이란 게 그렇게 스위치 켜듯이 들어오겠냐?
그날 밤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너는 그렇게 코웃음을 치면서 내 눈썹뼈를 엄지로 연신 쓸어주었지. 네 지문 밑에서 눈썹 한 올 한 올이 한쪽으로 길이 드는 것만 같았어. 네 코끝에서 흘러나온 웃음이 내 입술 위로 스몄고, 나는 간지러움을 참을 수 없어졌지.
……너는 그렇게 해 주잖아.
뭐라고?
너는, 스위치 켜는 것처럼 느끼게 해 주잖아.
내 말에 네 귓가가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던 걸 기억해. 너는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이내 과일의 씨앗처럼 중얼거림을 뱉었지.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내 눈썹을 몇 번이고 덧그리는 찬찬하고도 다정한 손길은 멈추지 않고서.
지금도 눈만 감으면 너를 떠올릴 수 있어, 우영아.
귓가에 끼쳐오던 미미한 숨결, 목덜미에 와 닿던 촉촉한 입술, 세포 하나하나를 깨우던 손끝. 몸뚱어리를 꿰뚫어 영혼마저 쪼개놓을 것 같던 격통. 그렇게 아, 영혼이라는 건 역시 있구나, 하고 깨달을 때쯤 찾아오던 새하얀 절정. 가슴 한가득 일렁이던 파도를 어떻게든 이해해보려 애쓰던 내 위로, 툭 떨어지던 네 메마른 말의 마디들.
그러지 마, 그냥 느껴.
네 그 말에 나는 눈을 감고 느꼈어. 어디론가 먼 곳으로 속절없이 떠내려가는 듯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내 안의 작은 한 지점으로 한없이 가라앉는 듯한 그 느낌을.
그때부터 나는 더 이상 내 안에 있는 감정이라는 생물이 껍데기를 깨고 나오기를 기다리지 않게 되었어. 왜냐하면 나는 이미 집어삼켜진 채였으니까.
너라는 세계 안에서라면 감정이라는 것에 실체가 있든 없든 상관이 없었고, 기어코 그 답을 찾지 못한 채로 타 죽게 된다 해도 좋았으니까.
그런 말들은 너한테밖에 할 수 없었다는 걸, 우영이 너는 알고 있었니?
타 죽는다니, 그런 소리 하지 마요.
내가 말하면 윤호는 미간을 가볍게 찡그리고는 중얼거리곤 했어.
습관적인 다정함을 두르려 애썼지만 어쩔 수 없이 고통이 묻어나는 목소리였지. 간신히 입꼬리를 끌어올려 보이기는 했지만 어딘가 방어적이고도 배타적인 미소였어. 언젠가 겪었던 아픔을 오롯이 끌어안고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나는 그래서 타 죽어버려도 좋다느니, 감정의 실체가 어떻다느니 하는 말들은 윤호에게 하지 않게 되었어. 대신 그날 지상의 날씨에 대해, 언젠가 네게 들었던 호수의 아름다움에 관해 이야기하게 되었지. 그제야 윤호는 환하게 웃어 보이면서 약속했어.
이번 작전이 끝나고 나면 꼭 데려가 줄게요.
걔는 원래 그래. 존나 팔자 좋은 새끼.
그 두 가지 정도가 네가 윤호에 대해 종종 내리곤 하던 평가였지. 네가 왜 그런 말을 하게 되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있었어.
하지만 우영아, 프로지움을 투여 당하기 전에 구출되어 줄곧 지하 세계에서 자라온 윤호가, 당연히 우리보다 더 능숙하게 감정을 다룰 수 있지 않았겠니? 성인이 되어서야 프로지움을 끊어낸 나나 사춘기의 문턱에서 반강제로 땅 밑으로 끌려온 너보다는, 단 한 번도 감정을 빼앗겨 본 적이 없어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윤호가. 당연하기에 그 감정을 감추기로 선택할 수도 있는 윤호가.
그런 윤호가 나는 무척 부러웠어. 사실은 너도 그렇지 않았니? 그렇지 않았더라면, 내가 윤호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내 살갗에 더 깊은 자국을 남길 리 없었을 테니.
네가 해 줬던 많은 이야기 중에서도 네가 처음 리브리아를 떠났을 때의 이야기를 가장 또렷하게 기억해. 중앙에서 통제하던 보육시설이 마구잡이로 피격당했을 때, 너는 무너진 건물의 잔해 사이에서 구출됐다고 했지. 낯선 남자의 손에 이끌려 지하로 오게 되고서는 갑작스러운 충격으로 반년 가까이 말을 잃었다면서.
뭐가 그렇게 충격이었는지 모르겠다니까.
그로부터 십 년이 넘게 흐른 뒤, 그렇게 혀를 내두르며 발갛게 빛나는 수면을 향해 조약돌을 휘두르던 네 옆모습을 기억해. 너는 그렇게 네 그림자까지 함께 던져서 가라앉혀 버렸지만, 나는 네가 느꼈던 충격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어.
나 역시 그곳 보육 시설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으니까. 가족이라는 개념이 없는 우리에게 그곳에서 함께 자라난 아이들은 가족에 그나마 가장 가까운 존재들이었고, 그 가족이 무차별적으로 죽어 나가는 광경은 어린 네게는 차마 견딜 수 없는 현실이었을 테니까. 너를 그곳에서 구해 이름까지 붙여준 은인이, 그가 속한 반정부 단체가, 사실은 그 테러 공격의 주범이었다는 사실까지, 전부.
비록 혈관에는 프로지움이 흘렀을지언정, 감정을 잠시 덮어둔다고 해서 알던 세상이 무너지는 일에 무감할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비로소 프로지움이 전부 말라붙고 붉은 피만이 몸속에 휘몰아치게 되었을 때, 그 모든 것이 한층 더 무겁게 다가왔을 테니까.
그러니까, 나는 알 것 같았어. 느낄 수 있었어. 내가 그 해 질 녘 호숫가에서 내 품 안에 너를 끌어당겨 네 수그린 정수리에 입맞췄을 때 입술 위로 느껴지던 단단함처럼, 너의 충격을 그렇게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어.
너와 윤호를 비롯해 리브리아의 셀 수 없이 많은 아이들을 지하로 데려온 그 남자를, 너는 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증오했지. 너는 그 사실을 끝끝내 부정했지만, 나는 알 수 있었어. 아이들을 해방시킨다는 명목하에 보육시설을 중점적으로 작전을 감행하던 그가 어느 날 돌아오지 못했을 때 네가 느꼈을 허망함을. 네 윤호를 향한 날 선 태도까지도, 사실은 그 남자를 향한 흉포한 애증이 갈 곳을 잃어서라는 것도.
그러면 너는, 차라리 리브리아에 남아 있고 싶었니? 할 수만 있다면, 노란 액체를 네 피와 섞어가며 무표정하게 매일을 흘려보내기를 선택하겠니? 지하 세계의 모든 음악이며 책, 그림을 모른 채로 살아가기를, 아버지를, 윤호를, 나를 만나지 못한 채로 살아가기를 선택하겠니?
그 모두가 잔인한 질문이라는 걸 알기에, 나는 그저 너를 더 깊이 안아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어. 긍정하고 싶어도 서로의 눈빛을 마주하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서로를 더 세게 붙들고 버티는 것 외에 뭘 할 수 있었겠니? 오직 서로를 위해 후회를 묻고 또 묻는 너와 내가.
하지만 알아. 자신의 의지로 프로지움을 끊고서 지상에 내려오기로 선택한 나조차도, 이따금 그날 밤 윤호가 나를 발견해 지하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그냥 그대로 죽게 내버려 두었더라면 차라리 나았을 거라고 생각할 때가 있었으니까.
이름이 없던 내게 성화라는 이름을 붙여준 건 윤호였지만, 그 이름을 더 자주 불러준 건 너였어.
호수에 데려가 주기로 약속한 건 윤호였지만, 결국 나를 석양 아래 반짝이던 그 붉은 원반에 데려다준 건 너였듯이.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건 윤호였지만, 결국 마지막까지 내 곁에 남아 나를 안아주었던 건 너였듯이.
그러니까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나까지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 줘.
중죄를 저지른 감정 유발자들은 화형 당하기 전 테트라그라마톤 위원회 건물 지하에 구금되어 강도 높은 심문을 받게 돼. 그러니까 오늘 밤 떠난다면 아직 윤호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기 위해서 위원회 입구를 통과하려면 프로지움을 다시 주사해야만 하겠지.
두려워. 네가 내게 느끼게 해 준 것들을 모두 잊게 될까 봐. 하지만 영영 잊게 되어도 어쩔 수 없을 거야. 내 삶의 가장 찬란했던 것들을 전부 빼앗기게 되더라도 말없이 너를 떠나온 잘못은 물론이고 그 많은 사람들을 불태워 죽인 죄를 다 용서받을 수는 없을 테니까.
나는 네게 나의 거의 모든 것을 꺼내어 보여줬지만, 내가 사실 그라마톤 클레릭이었다는 말만은, 네 아버지와 형제자매들을 불태워 죽였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어.
모든 것을 잊게 된다면, 그 사실까지 함께 스러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네가 내게 사랑한다고 속삭여주었던 기억만큼은 잃고 싶지 않다면, 그건 너무 이기적인 바람일까.
아름다운 것들에 모두 이름이 붙어 있지 않다는 걸 네가 알려줬기에, 다시 이름 없는 일련번호로 돌아가는 것은 두렵지 않아.
그저, 이 끝에 우리 셋이 함께이기를.
네 분노와 증오를 내가 오롯이 받아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