쾅!
홍중이 거칠게 의자에 묶인 남자를 벽으로 밀쳤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의자의 다리 하나가 부서졌지만 홍중이 상관할 일이 아녔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남자는 잔잔한 호수같던 얼굴에 고통이 생겼지만 금세 지워졌다. 이 상황이 불안한 것은 묶인 남자가 아닌 홍중과 바깥 상황을 보는 성화같았다. 불안한 듯 홍중이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만졌지만 얼굴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빨리 말해. 발사 코드 알고 있잖아.”
“그냥 죽여. 어차피 여기서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데?”
말과 동시에 밖에서 폭군들이 화약을 터뜨렸다. 화약 터지는 굉음보다 더 큰 소란을 내며 폭군들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홍중이 남자의 뒷덜미를 잡고 바닥으로 던졌다. 그리고 옆문이 열리며 산이 한 아이를 데리고 나타났다. 그제야 얼굴의 평온이 깨졌다. 홍중이 망설임 없이 슬라이드를 당기며 총을 아이에게 겨눴다. 이 방법까지는 안 쓰려고 했지만 그의 여유를 풀려면 어쩔 수 없었다.
“말할게!! 코드 말한다고!”
탕! 초점을 빗겨 나간 총알은 아이의 발 바로 옆에 박혔다. 남자가 거의 울다시피 묶인 발로 기어와 홍중의 발목을 잡았다. 아이도 울고 남자도 울고 밖은 총알이 울고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산은 귀찮다는 듯 귀를 팠고 여전히 성화는 바깥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느새 폭군들은 바리게이트를 넘어 100m 안으로 들어오고 익숙한 음악이 방안에 흘렀다.
“말해.”
Freude, schöner Götterfunken
Tochter aus Elysium
“381...”
탕-
갑작스러운 총격에 산이 그대로 쓰러지고 총을 쏜 장본인이 연기가 나는 총구를 들고 있었다. 여자의 얼굴을 본 성화가 잇살을 세게 깨물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초대받지 않은 투사체는 곤란했다.
Wir betreten feuertrunken
그럼에도 홍중은 남자의 머리채를 휘어잡으며 코드의 전체를 물었다. 하지만 그 소리는 다시 장전하는 총에 묻히고 결국 홍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게 여자의 목적이었는지 총을 살짝 내렸다. 그리곤 여자는 고개를 살짝 까닥였다. 이리로 오라는 제스쳐였다. 그녀의 말에 응하듯 홍중이 발을 천천히 들었고 그들이 있는 집이 강하게 흔들렸다.
Himmlische, dein Heiligtum!
여자가 중심을 잃고 총을 떨어뜨리자 홍중은 곧바로 창문에 서 있던 성화에게 달려가 그를 안았다. 그와 동시에 벽이 부서지며 세찬 파도가 그들을 삼켰다.
입과 코에 들어간 물을 뱉어내며 욕조에 빠진 홍중이 빠져나오고 앞에 있던 양동이를 거칠게 발로 찼다. 그의 분노가 임무의 성공 유무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 뒤로 일어난 성화가 조용히 욕조에 앉아 있었고 이미 일어난 산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화를 내기도 잠시 홍중은 철제 책상에 있던 물건을 서둘러 호드올에 담았다. 어느새 다가온 종호가 성화에게 손을 건넸고 그 손을 잡아 욕조에서 빠져나왔다.
“실패야? 설마?”
“맨날 총 맞는 건 나지. 내가 뭐 캡틴한테 잘못한 거 있어?”
우영이 가져온 수건을 받아들며 산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항상 총을 맞는 건 홍중도, 성화도 아닌 산이었다. 산이 짜증을 내는 사이 성화도 수건을 받아 머리를 털었지만 여전히 홍중은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태로 짐을 챙겼다.
“381까지 들었으니까 의뢰금의 반은 받을 수 있는 거 아냐? 뒤에는 알아서 알아내라지.”
“되겠냐.”
“그럼 네가 알아봐. 넌 맨날 노트북만 두드리면서 안 되냐.”
노트북으로 코드를 두드리던 여상이 퉁명스럽게 대답했고 곧이어 산도 맞받아쳤다. 둘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짐을 다 싼 홍중이 홀드올의 지퍼를 닫고 가방을 들었다. 그리고 모두에게 시선을 잠시 뒀지만 단 한 사람, 성화에겐 일초도 허용하지 않았다. 돌아진 등에 성화는 작게 욕을 씹었다.
“각자 숨어. 다시 연락할게.”
그렇게 홍중은 홀드올 하나만 들고 작업실을 나섰다.
-
천리향
-
프로펠러가 시끄럽게 돌아가다 도착점에 다리가 닿자 천천히 멈췄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바람에 홍중이 손으로 눈을 가리며 헬기에 다가가고 들어오라는 듯 헬기의 문이 열렸다. 익숙하게 홍중이 올라타고 헬기의 문이 닫혔다.
“6개월 전은 너무 실망스러웠어.”
“그래도 반은 알아내지 않았습니까.”
산의 불평이 이렇게 요긴하게 쓰였다. 남자는 실망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홍중에게 종이봉투를 건넸다. 홍중의 빈 약지에 시선이 갔지만 아닌 척 남자는 바로 고개를 들어 홍중을 마주했다.
“보면서 듣게.”
종이봉투를 열고 그 안에서 여러 종이 뭉치를 꺼냈다. 가장 맨 앞에 사진이 클립으로 꽂혀 있었고 그 뒤로 그 남자에 대한 정보가 수두룩 적혀있었다. 하나하나 중요할 거 같은 정보를 머릿속에 입력하다 보니 벌써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설계를 그만둔지 오래됐지만 습관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대부분 남자의 말을 무시하다 그림 속에 그려지면 안 되는 한 남자가 그려지자 설계를 찢어버렸다. 그리고 그제야 남자의 말에 집중했다.
“어렵지는 않을 거야. 그냥 정윤호 사장이 불법 자금을 어디에 숨기고 어떻게 숨겼는지.”
“그게 꿈속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정확해. 그리고 인셉션으로 다른 사람의 돈까지 끌어모으는 듯 해.”
슬슬 애들을 다시 불러 모을 때가 됐다. 가만히 남자를 응시하는 홍중에게서 대답을 들었는지 남자는 헬기의 문을 손수 열어주었다. 꺼냈던 종이를 다시 봉투에 넣고 헬기에서 내렸다. 핸드폰을 꺼내 연락하려는 도중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너도 다시 가정을 꾸려야 하지 않겠는가? 이번 일만 잘 끝내면 경찰도, 나도 널 찾는 일이 없을걸세.”
홍중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약점을 알고 있는 상대가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적대감을 느끼지도 못한 헬기는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
바쁘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과 테라스에 앉아서 떠드는 사람들로 거리는 가득 찼다. 그 사이 홍중은 가만히 앉아서 물이 송골송골 맺힌 딸기스무디를 한 입 빨았다. 따뜻한 햇빛의 열기와 시원한 스무디의 한기는 홍중의 몸을 적당한 온도로 맞춰주기 충분했다. 그리고 햇빛이 반지를 반짝이자 반사된 빛으로 홍중이 살짝 눈을 찡그렸다. 그와 동시에 건너편 꽃집에서 딸랑 소리가 나며 화분을 든 한 사람이 나왔다.
그가 든 꽃만큼이나 화려한 외모의 남자는 시선을 뺏기 충분했다. 홍중 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들도 그를 훔쳐보기 바빴고 아는 체하는 사람도 몇 있었다. 친분을 드러내던 중 남자는 시선이 느껴졌는지 주위를 둘러보다 홍중과 마주쳤다. 그리고 홍중을 향해 웃었다. 그저 단순히 미소를 지은 거였지만 마치 마법을 건 듯 주위의 모든 것이 멈췄다. 서류를 들고 뛰어가는 사람도, 옆 사람과 팔짱 끼고 마주 보는 연인도, 남자에게 말을 걸던 할머니도, 마치 사진처럼 굳었다.
그런 사람들 사이로 홍중이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에게 다가갔다. 남자는 꽃집 근처에 화분을 내려놓고 그를 마중하기 위해 손을 털었다. 그리고 홍중이 다가왔을 때 남자는 햇살처럼 녹아버릴 듯한 미소로 홍중을 꽉 안았다. 키스를 받은 공주가 눈을 뜨듯 그 순간 멈췄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서류를 든 회사원은 아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뛰어갔고 연인은 전보다 더한 사랑으로 서로를 마주 봤고 할머니 또한 우리를 보고 아름다웠던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했다. 그런 소란스러움 속, 그의 귀에 하고 싶었던 말을 속삭였고 알아들은 남자가 가볍게 홍중의 볼에 뽀뽀했다.
“보고 싶었어. 성화야.”
울리는 알람 소리에 홍중이 눈을 무겁게 떴다. 그리고 습관처럼 협탁 위에 있는 나침반을 열었다. 화살표가 빙글빙글 돌다 늘 그랬듯 북쪽을 향해 멈췄다. 현실로 돌아와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이렇게 하지 못한다는 괴리감이 동시에 나를 파고들었다. 하지만 현실과 다른 이 괴리감에서 생겨나는 죄책감이 나를 짓누를지라도 나는 기꺼이 이 꿈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 홍중은 생각했다. 성화를, 그를 지키는 방법이며 동시에 사랑하는 방법이었다.
***
“안녕히 가세요~”
성화는 나가는 손님께 인사하고 더러워진 작업대의 가시와 잎을 정리했다. 6개월 전, 의뢰에 실패하고 각자 대외적인 직업으로 돌아갔다. 우영은 작은 개인 음식점으로, 산은 태권도 관장으로, 종호는 이름 없는 가수로, 여상은 사이버 수사대로, 성화는 꽃집 주인으로 다시 시작했다. 모두의 연락을 받아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있었지만 유일하게 홍중은 연락이 없었다. 연락했어도 받아줄 성격이 아니라 굳이 하지도 않았다. 알아서 잘 살겠지 뭐, 뜬금없이 청첩장을 준 날처럼. 괜스레 기분만 나빠졌다.
그렇게 가시를 정리하던 중 도어벨이 울렸다. 손님이 온 줄 알고 급하게 걸레를 놓고 손을 털었다.
“어서 오세.. 웬일이야?”
도어벨을 울린 것은 꽃을 사러 온 손님이 아닌 주인에게 관심이 있어 온, 그리고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종호였다. 반가운 얼굴에 성화는 가식적인 웃음이 아닌 진짜 웃음을 지으며 종호를 안았다. 너무나 다정한 스킨쉽에 종호가 표정을 찌푸렸지만 밀어내지는 않았다. 성화의 애정을 알아서였다.
“형이랑 꽃이 참 잘 어울려.”
“알아. 홍중이도 그렇게 말했어.”
“캡틴 이야기 꺼내면 내가 뭐라 할 거 같아?”
“음.. 미련하다고?”
성화가 웃었다. 그 웃음이 어색하지 않게 종호도 따라 미소를 지었지만 어색함이 사라지진 않았다. 마실 거라도 줄까? 성화가 허리를 숙여 냉장고를 열었고 종호도 작업대 근처 의자에 앉았다. 작업대 위 꽃과 관련되지 않은 물건 하나가 시선을 빼앗았지만 다시 고개를 드는 성화에 시선을 훔쳤다.
“먹을 게 과일 주스뿐이네.”
“괜찮아. 그렇게 흩어지고 캡틴한테 연락 온 적 없어?”
“지금도 너한테 자기 대신 나 찾아오라고 한 거면 왔을 리가.”
애써 씁쓸함을 얼굴에서 지웠다. 아무 연락도 없이, 그것도 종호가 찾아온 거라면 이유가 아주 잘 드러났다. 새 의뢰를 받은 거겠지. 그리고 나에게 오지 않은 홍중의 연락도. 실망이 성화의 얼굴에 너무 쉽게 녹아있었다. 괜히 종호가 그 실망을 없애기 위해 말 한마디 거들었다.
“나도 어제 처음 받았어.”
“그렇게 위로 안 해줘도 돼.”
어린 동생한테 짐을 주기 싫었는지 성화가 의젓하게 대화를 이었다. 하지만 눈치가 빠른 종호에게는 티가 쉽게 났다. 성화가 준 사과주스를 보다 한입 물었다.
“아직도 마음이 똑같아?”
마음이라, 성화는 피식 웃었다. 홍중에 대한 마음이 변한 적이 없었다. 처음 설계 동아리에서 만났을 때부터 연락이 없는 지금까지.
“짐 챙겨 내려올게.”
성화가 자리를 피했다. 종호는 그런 성화의 뒷모습을 보다 작업대 위 사진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무나 다정한 둘의 모습에 종호는 거칠게 액자를 덮었다. 액자에서 흘러나오는 슬픈 불편함이 종호는 너무 갑갑했다. 누가 미련한 건지, 누가 나쁜 건지 답은 정해져 있었지만 굳이 정의하지 않았다. 그저 덮어진 액자가 그의 마음을 접는 것에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었다.
“관음증이냐?”
눈에 띄게 빈정거림이 보였지만 홍중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태도가 이미 예상됐는지 우영은 그냥 옆 의자를 빼서 앉았다. 성화의 꽃집이 잘 보이는 곳이었다. 설마 하던 생각이 확신이 서자 우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 캡틴이 다른 범죄로 쫓기는 것 같다.
“이건 좀 아니지 않아?”
“커피 받은 거 뱉어내고 싶어?”
“우리한테는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으면서 이 카페는 무료 쿠폰까지 받을 정도로 왔다?”
“사장님이 손님의 사생활 보호에 관심이 없네.”
우영의 표정에서 어이없음이 보였지만 홍중은 무시했다. 무시해도 이미 눈치챘겠지만 굳이 입 밖으로 답을 내고 싶지 않았다. 모카를 한 입 마신 우영이 불편한 질문을 꺼내지 않을 법했지만 꿋꿋했다.
“아직도 정리가 안 돼?”
“정리됐으면 저기 종호가 아닌 내가 들어갔겠지.”
“이제 떠나보낼 때도 됐어. 살아있는 사람을 위해 살아야지, 죽은 사람이 대수야?”
그렇지, 입 밖으로 내보내지 못한 대답이 목구멍에서 맴돌았다. 그렇게 쉽게 잊힐 사건이었으면 이렇게 돌아오지도 않았다. 홍중에게서 읽어내지 못한 생각을 파헤치려다 우영은 포기했다. 어른인 만큼 둘의 사이는 알아서 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건너편 꽃집에서 종호와 성화가 함께 나오자 우영은 모카를 들고 홍중은 조금 남은 스무디를 두고 일어섰다.
***
폐공장이자 작업실인 공간에 들어오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이미 편하게 해킹할 수 있도록 자리를 차지한 여상부터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한 산까지, 모든 것이 준비됐지만 단 하나 준비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캡틴은? 여상의 질문에 성화가 어깨를 으쓱했다. 오래 만난 팀인 만큼 간단한 행동에도 답을 유추해낼 수 있었다. 곧 온다는 거구나. 대답을 들은 여상은 다시 키보드를 두드렸다.
자기를 향한 관심이 사라지자 성화도 자기 자리에서 준비하기 시작했다. 꿈에 들어가기 위해 마련된 자리에 앉아 꿈과 현실을 구별할 토템을 확인했다. 메리골드를 갈아 넣은 작은 유리병. 습관처럼 살짝 흔들어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확인했다. 노란 가루가 바닥에 가라앉을 때 우영이 산의 위에 몸을 던지고 윽 소리를 내며 산이 일어났다. 뒤에 물 한 바구니를 들고 온 종호의 표정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꿈에서 돼지 한 마리가 내 몸 위에 올라왔어..”
꿈이 너무 현실적이었던 건지, 압박감이 너무 현실적이었는지 자신의 토템인 깃털 달린 공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현실이란 것을 잘 알려주듯 깃털이 공의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하강했다. 산이 얼굴을 비비며 정신을 차리던 중 여상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여기 작업실 열쇠 성화형만 가진 거 아냐? 6개월 동안 안 온 거치곤 먼지가 안 쌓였던데?”
“그러니까. 그래서 나 오자마자 소파에서 잤잖아.”
다들 동시에 성화를 쳐다봤다. 8개의 눈동자가 의심을 한가득 품고 쳐다보자 성화의 등줄기가 서늘했다. 몰래 했던 설계 탓에 자주 들락날락했고 설마 이 바보들이 눈치를 챌 거라 생각을 못 했다. 대답을 지체할수록 의심이 더 커질 때 홍중이 문을 열고 나타났다.
“내가 가끔 왔어. 난 알다시피 도망자잖아?”
홍중의 대답에 모두가 수긍했다. 리더인 만큼 모든 죄를 홍중이 뒤집어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꿈을 추출하는 자체는 불법이 아녔지만 오직 의뢰인의 돈만 받고 몰래 하는 추출은 불법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일이 후자였다. 알맞은 대답을 얻은 사람들은 다시 하던 것을 했고 홍중은 자연스럽게 빈 책상으로 걸어가 가져갔던 가방을 올렸다. 문에서부터 책상까지 걸어갈 때까지 성화에게 시선을 단 한 번도 두지 않았다.
가방에서 사진을 꺼낸 홍중이 칠판의 가장 위쪽에 이번 목표인 정윤호의 사진을 걸었다. 브리핑 시작을 알리는 사진에 다들 자세를 편안했던 자세를 고쳐 잡았다. 서서 자리를 잃은 성화도 근처 먼지가 쌓이지 않은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이번 목표야. AT 회사 사장인 건 모두 알고 있겠지? 작았던 회사가 갑자기 커진 것도.”
원래 작았던 회사가 커지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AT 회사는 그 정도를 넘어섰었다. 어떤 방법을 쓴 건지 어제의 적이 AT 회사의 계열사로 들어가 있고 눈 감았다 뜨면 주식이 수직 상승할 정도였으니. 이미 정평이 나 있는 탓에 모두가 홍중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의뢰인이 정윤호 사장이 인셉션을 사용한다는 소문을 들었대.”
“인셉션이 가능한 거였어?”
놀란 우영이 되물었다. 다른 이의 꿈에 들어가 원하는 사상, 또는 생각을 주입하는 인셉션은 꿈을 추출하는 자들에게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였다. 우영뿐만 아니라 산과 여상도 놀란 표정이었다. 불가능이 가능이라고 공표되는 순간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종호와 성화는 놀란 기색이 없었다.
“불가능은 아니야. 심층으로 들어가면 어느 정도 가능한 걸로 알아.”
“그래서 정윤호 저 사람이 인셉션 사용하는 것만 알아내면 돼?”
“그리고 불법 자금 목록을 어디에 숨겨놓은 지도.”
그러니까 심증을 확증으로 바꾸라는 거네. 질문했던 여상이 중얼거리며 키보드를 눌렀다. 생각보다 높은 난이도에 다들 성공에 대한 기대가 떨어졌다. 축 가라앉은 분위기에 홍중이 손뼉을 쳤다.
“하지만 우린 성공할 거야. 팀이잖아?”
짧은 문장이었지만 힘이 되는 말이었다. 홍중의 말이 끝나자 우영도 까짓거 해보자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산도 일어나 실패하면 니 약물 탓이라며 장난을 걸었다. 하지만 금세 헤드록이 걸리는 바람에 소란스러워졌고 둘의 장난에 다들 피식 웃었다. 홍중은 가식적인 웃음이 아닌 흘러나오는 미소를 짓는 성화를 바라보다 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우영아, 약물은 언제까지 준비할 수 있어?”
“아마 일주일이면 재료 다 구할 수 있고.. 넉넉히 이주일?”
“10일 안에 다섯 개만 우선 만들어. 이 주일 뒤에 간단한 인셉션 할 거야. 자금을 들킬 수도 있다는 걱정을 심어주는 거지. 배경은 그의 사무실.”
“그럼 증거는 언제 잡게?”
산의 질문에 여상이 대답했다.
“송민기 비서 말로는 한 달 뒤, LA에서 한국 오는 비행기를 탄대. 그때 하겠지. 맞지 캡틴?”
“역시 여상이는 머리가 잘 돌아가네. 갈 때는 의뢰인의 개인 여객기 타고 올 때는 꿈에 들어갈 나랑 산, 그리고 성화만 빼고 모두 일등석이야.”
“아니, 왜 나는 이코노미야? 정우영 약 오르네.”
“쯧쯧, 그럼 약물 만드는 공부하지 그랬어 산아.”
여상이 고개를 끄덕이고 산이 우영의 뒷목을 살짝 쳤다. 하지만 곧바로 손목이 우영에게 잡히고 등 뒤로 꺾여 탭을 치고 나서야 그의 팔을 놔줬다. 저 새끼, 분명 프라이팬 말고 다른 것도 잡았을 거야. 산이 작게 불평했고 옆에서 들은 성화가 피식 웃으며 산의 팔을 살짝 주물렀다.
“비행기 안에서 물로 하는 킥은 안 되겠네.”
킥 담당인 종호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아무래도 약물에 잠든 사람을 깨우는 것은 물에 빠뜨리는 방법이 가장 쉬웠다. 물 대신 다른 킥 찾아봐. 종호에게 명령하고 다음 타깃은 설계자인 성화였다. 하지만 눈이 마주친 홍중이 말문이 막히고 어색한 정적이 찾아왔다. 애들 분위기 참 좋아지겠네, 속으로 생각한 성화가 입을 대신 열었다.
“알아서 설계할게. 어차피 꽃집 근처라 한 번 가서 둘러보기도 좋고.”
“...산은 함께 들어가야 하니까 몸 관리하고 여상이는 혹시 모를 상태를 대비해 비행기에서도 쓸 수 있는 드림 머신도 알아봐.”
같은 섬나신을 사용하면 굳이 드림 머신을 사용할 필요 없었지만 혹시 림보나 만약의 상태를 대비해 드림 머신을 항상 구비해야 했다. 비행기에 들고 타기엔 가진 드림 머신은 너무 컸고 휴대용으로 만들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겠지만 여상이 잘 해낼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홍중의 생각은 적중했다. 하루면 가능해. 여상이 호기롭게 엄지를 들며 대답했다.
“이번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어. 그러니까 다들.. 잘해보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
봄의 아오모리는 분홍빛으로 가득 물들었다. 어디를 가든 활짝 개화한 벚꽃은 그냥 지나가지 못하도록 사람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것은 홍중 또한 마찬가지였다. 길을 걸어가다 맑은 파란 하늘과 연한 분홍 벚꽃의 조화는 홍중을 멈춰 서게 했다. 신나서 사진 찍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가만히 벚꽃을 바라보다 다른 가지들과 달리 조금 낮게 내려온 가지에 손을 뻗었다. 얇은 가지는 쉽게 톡 부러졌고 가지에 붙은 꽃들은 작은 향을 모아 홍중에게 날아왔다. 달큰한 꽃내음이 코에 가득 퍼지고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입꼬리 정도만 올라가던 미소가 달가운 목소리가 들리자 눈까지 접어졌다.
“홍중아!”
어느새 유카타로 갈아입은 성화가 홍중의 등을 꽉 껴안았다. 벚꽃보다 더 단 살 내음이 느껴졌다. 홍중은 몸을 돌려 살짝 흐트러진 성화의 머리를 정돈해주고 귀 옆에 꺾은 벚꽃을 올렸다. 홍중의 반지에 걸린 꽃잎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둘은 개의치 않았다. 오랜만에 유카타를 입고 벚꽃을 꽂은 성화를 쳐다보다 풀릴 듯 말 듯 한 허리띠로 시선이 닿았다.
“허리띠 좀 묶어줘. 자꾸 풀려.”
허리띠를 받아 홍중이 성화의 뒤에 섰다. 허리띠를 매주며 보이는 허리선에 홍중은 다른 감정보다 속상함이 먼저였다. 밥을 잘 못 챙겨 먹은 건지 전보다 얇아진 느낌이었다. 풀리지 않게 단단히 묶자 성화가 돌아 다시 홍중을 안았다. 꼭 어디 못 도망가게 잡는 사람처럼 꽉 껴안는 성화였다.
“밥 잘 먹어야지. 허리가 더 얇아졌어.”
“다른 사람들은 나 세 끼만 먹으라던데?”
“안돼. 다섯 끼는 꼭 먹어.”
“나 밥 챙겨주는 건 역시 홍중이뿐이네.”
성화가 밝게 웃었다. 그 순간 바람이 불고 귀에 꽂힌 벚꽃이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게 꼭 소중한 물건인 것처럼 떨어지자 성화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겨우 벚꽃 하나인데, 왜 그렇게 속상한 걸까. 문득 홍중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말 대신 성화의 볼을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가 벚꽃보다 더 붉은 입술에 도장을 꾹 찍었다. 성화의 볼이 벚꽃처럼 물들었다.
그렇게 슬퍼하지 마. 이렇게 힘없이 떨어진 열 장의 벚꽃잎들보다 너의 한 방울 눈물이 더 아까워. 그러니까 웃어줘. 홍중의 바람이 닿았는지 성화가 붉어진 볼로 입술에 행복을 한가득 담았다. 그리고 홍중을 꽉 끌어안았다. 이런 공개적인 곳에서의 스킨쉽은 퍽 불편했지만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에 불편함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좋아해 홍중아.”
번쩍 눈이 띄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몸을 빠르게 일으켜 옆을 확인했고 다행히 성화는 아직 눈을 감은 상태였다. 그제야 드는 안도감에 깊은숨을 내뱉었다. 아무리 꿈에 있어도 헷갈릴 수 있는 깊은 감정은 위험했다. 그래도 깨지 않은 성화에 안심하며 침대에서 내려와 곤히 자는 성화에게 다가갔다. 아직 섬나신이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성화의 볼에 천천히 손을 갖다 댔다. 하지만 거리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손을 급하게 치웠다. 볼을 만지는 대신 아무것도 없는 손을 쥐었다 폈다.
“미안해. 나는 겁쟁이라서 꿈에서밖에 널 못 만져.”
꿈속에서도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성화의 눈썹이 살짝 움찔했다. 아마 갑자기 사라진 저에 당황한 것 같았다. 하지만 능숙하게 투사체를 만들어내는 게 성화였다. 그 사이 저의 예상과 맞았는지 성화의 얼굴이 금방 편안해졌다. 남의 설계를 훔쳐보는 것은 실례였지만 이렇게라도 성화를 느끼고 싶었다. 남들이 비겁하다고 손가락질할 행동이었지만 홍중에게는 이것이 최선이었다. 더불어 꿈이 아닌 현실에서 해줄 수 있는 건 손이 더 차가워지지 않도록 이불을 잘 덮어주는 것뿐이었다.
가만히 몇 분을 성화의 얼굴을 바라봤다. 성화가 깨어 있을 적엔 이렇게 제대로 그를 볼 수 없었다. 요즘 꽃집 일에 또 다른 설계까지 하느라 얼굴이 많이 상해 보였다. 내일은 떡튀순 먹자고 할까, 제 마음을 눈치채고 거부하진 않을까. 그의 얼굴을 두고 다양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제 욕심을 부리던 중 섬나신이 얼마 안 남은 것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처음부터 성화 혼자였던 것처럼 침대를 정리하고 사용했던 빈 약통을 들고 작업실을 나섰다. 이 이기적인 도망이 언제까지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신이 당당해질 수 있을 때까지는 들키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
설계를 위해 찾은 AT 회사는 생각 외로 사람이 붐볐다. 자유롭게 일하는 것을 추구하는 회사인지 1층 로비에 사원증을 단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회사를 구경 온 척 신기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니 성화에게 관심을 두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소파 하나부터 건물을 지지하고 있는 기둥의 재질까지 모두 설계에 집어넣었다. 이런 하나하나가 임무에 성공하는 데 보탬이 됐다. 한창 설계하다 보니 달달한 음료가 당겼고 사원들과 손님들을 위해 마련된 카페로 향했다. 주문하기 위해 줄을 기다리던 중 누군가 성화의 어깨를 톡톡 쳤다. 혹시 홍중일까 고개를 빠르게 돌렸지만 아는 체한 사람은 홍중이 아닌 사진 속 장본인이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이 앞에 꽃집 운영하지 않으세요?”
“아. 맞아요. 근데 누구신지..?”
“자주 꽃을 사러 가서 기억해요. 여기는 웬일이에요?”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정윤호가 왔다면 기억할 법도 한데.. 요즘 설계 때문에 기억력이 안 좋아졌다고 생각하곤 넘겼다.
“자주 오시는 직원분들이 여기 음료가 맛있다고 해서요.”
“제 방에는 더 맛있는 음료가 있는데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하는 건 어떠세요? 마침 시간도 있고.”
전형적인 플러팅이었다. 상냥한 어투가 조금 꺼림칙했지만 설계하는 데 직접 본 것은 많은 도움이 됐기에 성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윤호는 제가 뭐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고, 그저 꽃집 주인이라고만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경계가 많이 풀렸다.
하지만 그 경계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장실에 도착하는 순간 급하게 쌓였다. 비서와 직원 그 누구도 없이 정윤호 혼자였다. 아니면 설마 내가 그의 꿈속에 들어온 건가? 윤호가 달달한 차를 타는 사이 성화는 몰래 유리병을 흔들어 가루를 확인했다. 다행히 가루는 모두 바닥에 가라앉았다. 그리고 다가오는 윤호에 유리병을 주머니에 숨겼다. 딸기 티에요. 콧속으로 들어오는 딸기 내음이 달큰했지만 이상하게 입이 가진 않았다. 향만 맡고 다시 잔을 책상 위에 올렸다.
“차 어때요?”
“좋네요. 향기롭고 깔끔해요.”
“성화 씨가 좋아할 거 같았어요.”
그 순간 등에 소름이 끼쳤다. 단 한 번도 손님들한테 제 이름을 알려준 적이 없었다. 놀라지 않은 척 주위를 둘러봤지만 도망갈 곳은 윤호가 앉아있는 소파 너머 엘리베이터와 비상구뿐이었다. 불안감이 온몸을 휘감아 올라왔지만 성화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이야기 화제를 돌려 긴장을 늦출 생각이었다.
“이 차 이름이 뭐예요?”
“인셉션이요.”
윤호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제야 그 미소가 거부감이 들기 시작했다. 시간을 보려는 척 핸드폰을 꺼냈고 급하게 배경 화면 속 긴급 연락처를 눌렀다. 하지만 윤호가 눈치 빠르게 성화에게 달려들었고 몸을 옆으로 살짝 굴러 그를 피했다. 팽팽한 긴장감 속 성화가 다른 곳으로 피할 새도 없이 윤호가 그에게 다시 붙었고 ‘여보세요’가 들리는 핸드폰을 놓쳐버렸다. 손목이 붙잡혔지만, 발로 윤호의 배를 차고 그가 고통에 밀려난 사이 엘리베이터 옆 비상계단으로 뛰었지만 손잡이에 손이 닿기도 전에 왼손이 잡혀 등 뒤로 꺾였다. 그리고 윤호는 성화를 벽으로 밀쳐 더 이상 반항하지 못하도록 꾹 눌렀다.
“설마 인셉션을 알아들을 줄은 몰랐는데.”
“아윽. 너.. 뭐야. 뭔데..”
“정윤호인 건 이미 알고 있잖아. 박성화 씨?”
뒤에서 장난스러운 웃음이 들려왔다. 플러팅은 개뿔, 호랑이굴에 제 발로 들어온 꼴이란. 제 형편없는 촉에 감탄하는 사이 몸이 돌려지고 등을 누르던 손은 언제라도 숨을 끊을 수 있도록 성화의 목을 잡았다. 목숨이 위태한 상황에서 성화가 할 수 있는 건 자신의 생명줄을 잡고 있는 손목을 붙잡고 제발 급하게 전화가 끊긴 이 상황을 그가 알아주기만 바랄 뿐이었다.
“설계 잘한다고 이 바닥에서 유명하던데 맞아?”
“아니. 잘못 들은 거 같은.. 캑.”
“잘한다고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널 여기까지 데려오려고 알아본 그동안의 노력이 헛수고가 되잖아?”
“씨발. 잘해. 그럼 어쩔 거냐고.”
“으음 으음. 아니지. 말은 예쁘게 해야지. 여기서 너 죽으면 시체도 못 찾을 텐데?”
머리를 쓰다듬는 손에 살기가 가득했다.
“내부 사람 중 한 명이 내 돈을 의심하는 모양이야. 멍청한 놈들이라 내가 설계해도 빈틈없었는데 아예 전문 사냥꾼을 의뢰한 모양이더라고.”
다행히 의뢰받은 사냥꾼이 우리인지는 모르는 것 같았다.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
“날 위해 설계 하나만 해.”
“싫다면?”
“김.. 홍중이던가?”
나오면 안 되는 이름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김홍중까지 아는 이상 성화는 재갈을 찬 개였다. 아까와 달리 살기 가득한 눈빛을 보자 윤호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김홍중이 인셉션을 한다더군. 불법인 그 일을.”
“... 아니야.”
“아니어도 증거는 이미 있어. 만약 네가 설계해주면 그 증거는 없애줄게. 그렇게 되면 김홍중은 자유의 몸이 되겠지?”
홍중이 경찰에 쫓긴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집이 없는 것도, 몰래 뒷골목을 전전긍긍하는 것도. 근데 그런 그의 죄를 없애준다니, 성화 입장에서 그리 나쁜 제안은 아녔다. 오히려 일석이조였다. 홍중의 자유를 만들어주는 것과 정윤호의 불법을 잡아내는 것. 조금 눈빛이 누그러지자 윤호가 짓누르는 힘이 약해졌다.
“어때, 네 재능을 한 번 쓰고 그가 자유를 만지게 해줄래, 아니면 낭떠러지에 네가 직접 세울래?”
윤호의 제안은 사랑을 원하는 성화에게 너무나 달콤했다.
여상의 말처럼 윤호가 설계를 원하는 날은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날이었다. 대답과 핸드폰 번호까지 뺏기고서야 성화는 겨우 그 방에서 나올 수 있었다. 유리 속 빨간 제 목을 보니 과연 제가 산이나 종호처럼 힘이 셌더라면,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정윤호 한 명쯤은 때려눕히고 도망쳐 나왔겠지. 그런 쓸데없는 자괴감이 들 때 저 멀리 이 계약 조건이 뛰어왔다. 뛰는 거 싫어하면서, 땀 흘리는 거 싫어하면서 이 따뜻한 날에 땀을 잔뜩 흘리고 성화를 끌어안았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오직 이 한마디만 반복하면서. 성화의 어깨를 잡고 이리저리 몸을 살피던 중 목 부근이 살짝 붉은 것을 보고 걱정했던 마음이 화로 바뀌었다.
“너 여기가 어디라고 혼자 가!! 내가 아무나 데려가라고!! 내가 아니라도 종호나 산이를 데려가라고 했잖아..”
말끝을 흐리는 게 퍽 그답지 않았다. 얼마나 나를 걱정했다고.. 성화는 그런 홍중의 걱정이 달갑지 않았다. 그래서 꽉 안은 그를 밀었다. 하지만 그 행동에 홍중은 상처받기보다 당연히 할 행동이었다고 생각했는지 서운한 기색이 없었다. 그게 오히려 성화의 마음을 자극했다.
“내가 혼자 가든, 누굴 데려가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그럼 그런 전화를 나한테 하지 말았어야지.”
문득 생각났다. 성화의 비상 연락망은 홍중이었다는 것을. 스스로 좀먹는 짝사랑이었다. 어느 짝사랑이 마냥 달콤하기만 하겠느냐마는 성화의 짝사랑은 독이었다. 몸에 안 좋은 것을 알면서도 끊을 수 없는 그런 독에 중독된. 상대는 나에게 뭘 주는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것이 독인 줄도 알면서도 삼켰다.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독을 마시고 중독된 성화는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홍중은 그런 성화를 끌어안았다. 홍중은 성화의 고개에 약했다.
“그래도 네가 괜찮아서 다행이야.”
독이라도 괜찮았다. 그냥 네가 주는 거라면. 성화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몸속 구석구석 퍼지는 독을 그렇게 즐겼다.
***
설계자가 한 번 공간을 다녀온 만큼 설계는 완벽했다. 윤호의 비서, 송민기가 한 편인 만큼 더 일이 수월했다. LA로 떠나는 비행기 속 잠든 윤호에게 우영이 만든 섬나신을 주입하고 동시에 꿈을 여행할 홍중, 성화, 산에게 동일한 섬나신을 주입했다. 점점 몰려오는 잠에 홍중은 옆에 성화를 확인하고 눈을 감았다.
눈을 뜨자 성화가 알려준 사원의 모습을 하고 회사의 로비에 서 있었다. 회사의 로비는 바빴고 홍중은 그 사이에서 어색하지 않도록 태블릿을 손대며 바쁜 모습을 표현했다. 산은 로비 카페 직원으로 들어와 있고 성화는 카페에 앉아 일하는 직원으로 변신해있었다. 자연스러운 교차를 위해 카페 쪽으로 향하고 마침 빈 성화의 옆자리에 홍중이 앉았다.
각자 할 일이 있는 척 자리를 잡고 있으니 입구에서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윤호와 민기가 등장했다. 민기가 먼저 홍중을 확인하고 윤호에게 속삭였다. 무슨 내용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대략 불법 자금이 위험하다는 경고일 거라 예상했다. 민기의 말을 들은 윤호의 표정이 안 좋아지고 사무실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를 쫓아 걷던 민기가 홍중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신호를 줬다.
아마 십 분 뒤에 윤호는 불법 자금을 숨기기 위해 사무실에서 고위 경찰계 직급에게 인셉션을 시도할 것이다. 손목시계의 분침이 정확히 2를 가리키고 있었고 성화와 산에게 홍중이 손가락을 네 개 펼쳐 보였다. 반지가 끼워진 약지를 포함에 손가락을 확인한 산이 하던 일을 옆 사람에게 맡기기 시작했고 성화 또한 두드리던 노트북을 덮었다.
똑딱. 똑딱.
셋에게 분침 소리가 크게 울렸다. 분침이 4를 향해 나아가던 중 예상치 못한 투사체가 카페에 등장했다. 윤호의 투사체일리는 없고 설계자인 성화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것 같았다. 본능적으로 산은 바지 뒤에 넣어놓은 총으로 손이 향했고 성화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등장에 몸이 굳었다. 그녀가 성화에게 걸어오다 막힌 장애물에 걸음을 멈췄다.
“가.”
“왜 그래 자기야. 내가 설마 자기를 해치겠어?”
억울한 듯 짓는 표정이 홍중의 마음을 약하게 하는 것까지 알고 있는 완벽한 투사체였다. 그녀는 홍중의 약지를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엮었다. 같은 반지가 끼워졌으니 적이 아니라는 인식을 그에게 주려 했지만 홍죽이 거칠게 자기 손을 빼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이 닿지 않을 거리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똑딱. 분침이 4를 한 칸 남겨둔 시간이었다.
“성화 씨한테 한마디만 할게. 설계사한테 중요한 말이야.”
애초에 홍중의 동의는 구하지 않는 듯 그녀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그를 지나쳐 성화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아무도 들리지 않게, 오직 성화만 들을 수 있게 그의 귀에 입을 갖다 댔다.
“김홍중이 반지를 끼고 있는 이상, 현실에서도, 꿈에서도 너의 것이 되지 못해. 그게 네가 반지 없는 김홍중을 만들지 못하는 증거야.”
그 순간 그녀가 사라지고 건물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홍중과 산이 중심을 잡기 위해 주변 테이블을 잡았고 동시에 성화를 쳐다봤다. 가장 정신이 단단해야 하는 설계사가 날카로운 진실에 무력화되고 설계가 무너지고 있었다. 하지만 위기는 성화뿐만이 아녔다. 모든 투사체가 셋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꿈의 주인인 윤호가 이상함을 느끼고, 자기보호를 위해 투사체들이 적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셋 모두 공격당해 꿈이 억지로 깨지거나 잠에서 깨지 못하면 깊은 무의식의 세계로 빠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홍중이 겨우 중심을 잡아 성화의 볼을 잡아 시선을 자기한테 고정했다.
“성화야. 나야.”
하지만 홍중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화의 눈동자는 빛을 잃고 도리어 투사체들이 조금씩 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화야. 너 이렇게 약한 사람 아니잖아. 내가 옆에 있는데 왜 두려워해.”
“....홍중아..”
“그래. 나 김홍중이야. 내가 너 항상 지켜주잖아.”
탁했던 눈동자가 조금 빛이 돌아오고 투사체의 걸음이 멈춰졌다. 하지만 여전히 시선이 셋을 향한 것은 그대로였다. 산이 총을 꺼내 투사체들에 겨누며 천천히 둘에게로 걸어왔다. 여차하면 총을 쏴서 킥 담당인 종호에게 신호를 보낼 생각이었다.
“난 항상 네 옆에 있었어.”
이미 깊게 박힌 패배감은 쉽게 빠지지 않았고 몇몇 투사체들은 다시 원래대로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다른 몇몇 투사체는 셋에게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투사체에 죽는 느낌을 아는 산이 겁먹은 얼굴로 총알을 장전하고 홍중이 성화의 뒷머리를 살짝 잡았다.
“이래도 안 되면 총 쏴.”
“뭐하ㄹ....”
홍중은 주저 없이 성화의 입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성화의 뒷목을 살살 문지르자 입이 벌어지고 그사이까지 홍중이 들어갔다. 초대되지 않은 방문자는 집주인의 허락도 없이 구석구석을 훑었다. 달다. 홍중이 가장 처음 맛본 달콤함이었다. 이렇게 단 것을 그동안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이 후회될 정도였다. 하지만 주인을 닮은 말랑한 살에 닿자 성화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그리고 이 행위의 상대가 홍중인 것을 보고 놀란 듯 눈이 커졌다.
정신이 돌아온 성화가 홍중을 세게 밀었다. 그의 눈에 눈물이 맺힌 것도 같았다. 하지만 잔인하게도 홍중은 그저 사람 살리려고 하는 심폐소생술을 한 것처럼 담담했다. 오히려 놀란 것은 둘의 키스를 본 산이었다. 산도 당황해서 무슨 말을 뱉어야 할지 모르는 듯 어버버했다. 이런 둘 사이에서 홍중은 주위를 둘러보며 투사체를 확인했다.
“시선 돌렸어. 네 마음이 진정됐나 본..”
“너 진짜 뭐하냐?”
성화가 세게 홍중의 뺨을 치고 그의 고개가 속절없이 돌아갔다. 살짝 붉게 올라왔지만 홍중은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성화를 마주 봤다. 마치 제가 뭘 잘못했냐는 듯, 홍중의 표정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 모습에 성화의 호흡이 불규칙하게 씩씩댔다.
“너 진정시키려고 한 거잖아.”
“그러니까! 그걸 왜!”
“임무 성공해야 하잖아. 너 실패하고 싶어?”
“넌 진짜..”
“형들.. 이런 상황에 좀 그렇지만 정윤호 나왔어.”
동시에 로비로 시선을 돌리고 급한 걸음으로 나오는 윤호의 모습이 보였다. 명백한 임무 실패였다.
Freude, schöner Götterfunken
Tochter aus Elysium
Wir betreten feuertrunken
Himmlische, dein Heiligtum!
킥 시간이 다가왔는지 노랫소리가 들렸다. 뭘 해보기도 전에 저 멀리서 쓰나미처럼 물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물은 빠른 속도로 로비를 채우고 세 사람을 집어삼켰다.
물 맞은 셋이 동시에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성화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산의 주머니에 있던 총을 꺼내 장전하고 홍중에게 겨눴다. 산은 손으로 착잡한 얼굴을 쓸어내리고 놀란 우영과 종호가 성화를 말리려 다가갔다. 그들의 만류에도 성화의 총구는 초점을 잃지 않았다.
“쏴. 쏠 수 있으면.”
“캡틴!!”
“너 사람 갖고 놀면 재밌어? 내가 네 키스 받으면 좋아할 줄 알았어?”
키스라는 말에 성화를 잡고 있던 둘의 손이 떨어졌다. 어우 쉣. 여상이 작게 욕을 읊조렸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터지면 안 되는 것이 결국 터져버렸다.
“임무 성공을 위한 방법이었어.”
“방법? 너 말 잘했다. 그럼 매일 같이 꽃집 찾아온 것도 그 방법 중 하나냐?”
홍중의 눈빛이 흔들렸다. 흔들림에 성화는 주먹을 더 꽉 쥐었다. 카페 주인이 어떤 남자가 계속 한 자리에 앉아서 꽃집을 본다고 말했을 때는 설마 했었다. 하지만 손님이 물건을 놓고 가서 가져다주기 위해 꽃집에서 뛰어나왔을 때 익숙한 얼굴을 보고 조금의 기대를 품었었다. 나를 보러 온 거면 나에게 말도 걸까, 혹시 그 여자를 다 잊은 걸까.
하지만 기대가 무색하게도 그는 현실에서 다가오지 않았다. 일말의 기대는 좌절로 바뀌었고 꿈속에 투사체가 아닌 김홍중이 나타났을 때 울었다. 현실에서는 할 수 없는 사랑을 꿈속에서 하는 게 꼭 저와 같아서, 그가 꿈에서 사라질 때마다 울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건 꿈도 아니고 농락이었다.
“네가 매번 내 꿈에 나타나도, 매번 카페에 앉아있어도 너한테 단 한 번도 아는 척 안했어.”
“...”
“그럼 너도.. 적어도 너는.. 내 사랑을 모른 척해줬어야 하는 거 아니냐?”
결국 맺혔던 눈물이 성화의 볼을 타고 흘렀다. 이미 젖은 얼굴에서 모를 법도 했지만 홍중은 잘 알 수 있었다. 박성화니까. 그 누구도 아니고 그렇게 많이 본 박성화의 얼굴이니까 모를 수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손을 뻗기에 거리가 너무 멀어졌다. 대신 주먹을 꽉 쥐었다.
“난 널 지켜주려고 했어. 내 옆에 있으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서 그래??”
도리어 홍중은 화를 냈다. 얼굴과 행동은 정당한 화를 내고 있었지만 홍중의 눈은 동시에 슬픔을 담고 있었다. 그제야 총구가 초점을 잃었다.
“최주현, 걔가 어떻게 됐는데 널 어떻게 내 세상에 끌어들이냐고.”
“... 넌 진짜 겁쟁이야.”
성화가 들고 있던 총을 바닥으로 던졌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작업실을 나갔다. 나가는 그를 종호가 급하게 따라 나가고 산은 혀를 찼다.
“우리 캡틴이 이렇게 바보 같은 줄 몰랐네.”
그러게나 말이다. 홍중이 내뱉지 못하고 침과 함께 목구멍으로 삼켰다.
***
사각사각. 조용한 작업실에 종이에 연필이 움직이는 소리만 울렸다. 첫 번째 꿈이 보기 좋게 실패하고 홍중이 혼자 설계도를 그리다가 근처 의자에 앉았다. 앉으니 시선이 자연스레 성화가 누워있던 침대로 향했다. 잠시 설계를 확인하려 성화와 함께 꿈에 들어갔을 때 둘의 모습을 본 게 이 사태의 화근이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곳에는 키스하는 성화와 홍중이 있었고 당연히 그게 성화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생각한 결말과 다르게 흘러간 결과에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성화형이 불쌍해.”
어느새 작업실로 들어온 종호가 말했다. 오늘은 아무 생각 말고 집에 가서 쉬라고 했건만 걱정 많은 막내가 다시 돌아왔다. 종호는 의자 하나를 끌어와 홍중의 건너편에 앉았다. 슬쩍 설계도를 보며 물었다.
“아직도 그 여자를 형이 죽였다고 생각해?”
주현은 성화만큼이나 웃음이 예쁘고 설계에 능숙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성화와 달리 마음이 매우 불안정했던 사람이었고 그 결과 인셉션을 당해 이렇게 투사체로만 남은 사람이었다. 성화와 종호는 그때 함께 있었던 탓에 인셉션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었다.
“내 탓이 있긴 하지.”
“꿈에 들어가기 전 뭘 했는데?”
종호의 질문으로 그날의 모습이 떠올랐다. 변함없이 추출을 위해 방안에 준비 중인 사람들, 그리고 그때도 손이 찼던 성화, 성화가 먼저 잠에 들고 손이 더 차가워지지 않도록 또 다른 담요를 덮어주는 홍중을 본 주현. 오직 그것만으로도 주현에게 불안감을 심어주기 충분했는데 하필 흐트러진 성화의 머리를 정리해주는 모습에 결국 그녀는 인셉션을 그대로 당해버렸다.
“성화형은 그렇게 약하지 않은 거 알잖아.”
“알지. 근데 아직은 안돼.”
“애들한테도 다 들킨 마당에 뭐가 안되는데.”
“..아직 내가 무죄가 아니잖아. 당당히 성화 옆에 설 수 있을 때 갈 거야.”
“쯧쯧. 지금도 성화형 위태로워 보여.”
단순한 추출보다 더 섬세하게 설계해야 하는 인셉션에 잦은 설계에 성화가 지칠 법도 했다. 그래서 더더욱 지금은 성화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혹시나 나타난 자신의 투사체가 성화의 약점을 파고들 수도 있기에, 그를 지키기 위해선 아직은 안됐다. 홍중의 표정에서 긍정적인 답변을 찾지 못한 종호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도 힘든 둘인데 얼마나 더 돌아가려는 건지. 홍중과 함께 찍은 어릴 적 사진을 여전히 갖고 있는 성화나 설계도에 다정한 둘의 모습을 습관처럼 그리는 홍중이나 종호의 눈엔 둘 다 미련했다.
***
LA로 비행기가 출국하는 날, 다행히 성화가 함께였다. 비록 홍중에게 시선을 두지 않았지만. 홍중을 모른 체 하는 성화를 홍중도 굳이 터치하지 않았다. 어색한 분위기 속 비행기는 이륙했다.
LA 도착해서도 둘은 일적인 이야기 뿐 그 외에는 마주치지도 않았다. 정확히는 홍중이 성화를 계속 쳐다봤지만 성화는 그에게 등만 보여줄 뿐이었다. 홍중에게 미리 설계를 보여줄 때도 필요한 설명 외에는 입을 열지 않아 옆에 있는 산만 식은땀을 흘렸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마지막 희망인 날이 돌아왔다.
“나는 따로 갈게.”
“응? 왜?”
“그게..”
성화가 곤란한 듯 홍중 쪽을 보다 다시 우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는 정윤호랑 타야해.”
“...뭐? 형 무슨 꿍꿍이인거야?”
“그냥 보내줘.”
홍중이 미련 없이 택시에 올라타고 캡틴의 말이니 다들 의아하면서도 택시에 짐을 올렸다. 짐이 오가는 중에 성화가 택시 타려는 산을 급하게 붙잡았다. 왜?
“이따 비행기 탈 때 너랑 홍중이 제일 마지막에 타. 정윤호가 너희를 보지 못하도록.”
“굳이? 걔 우리 얼굴 모르잖아.”
“그 사람 김홍중 알아.”
“그걸 홍중이형은 알아?”
“모를 거야. 그러니까 부탁 좀 할게.”
간곡한 성화의 부탁에 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캡틴이 뭐가 좋다고 이렇게까지 그를 보호하려는지, 좀 그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랑이 저런 건가 싶어 수긍했다. 그렇게 성화를 둔 택시가 떠나고 그 자리에 서 있는 성화를 홍중이 사이드미러로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응시했다.
공항에 도착해 미리 섭외한 가드에 의해 짐 확인 없이 편하게 검색대를 지날 수 있었다. 비행기에 올라타서 승무원이 마련한 공간에서 여상과 종호가 혹시 모를 상태를 대비해 장비를 조립하고, 승무원으로 변장한 우영이 정윤호가 타는 것을 확인하고, 이륙만 하면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비행기에 타러 가는 도중 산이 급한 볼일이 있다며 홍중을 붙잡았다. 혼자 가라고 야유가 나왔지만 홍중은 혹시 모른다며 다행히 산을 따라나서 줬다. 이 모욕을 꼭 성화한테 되돌려주겠다며 산은 아프지 않은 배와 홍중의 팔뚝을 꾹 잡았다.
모든 승객이 비행기에 탑승하고 마지막으로 윤호와 민기, 그리고 성화까지 등장했다. 이미 비즈니스석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성화를 모르는 척 각자 자기 할 일만 했다. 신호를 알아챈 성화 또한 티 내지 않고 윤호의 옆에 앉았다. 종호에게서 윤호가 탔다는 문자를 받고 산과 홍중도 급하게 비행기에 올라타고 비행기는 연착 없이 하늘로 올라갔다.
조용한 기내로 승무원이 걸어 다니며 음료를 손님들에게 권했다. 윤호에게도 걸어와 음료를 물었고 윤호는 물을 부탁했다. 승무원이 지나가고 윤호가 민기를 불렀다. 신호를 받은 성화 또한 좌석에 커튼을 쳐 주변의 시야를 가렸다. 그리고 민기가 섬나신을 주사기에 주입하는 사이 성화가 윤호에게 물었다.
“인셉션은 벌써 한 거야?”
“아니 아직. 내가 한 거는 불안정해서 네가 해야 해. 꿈에 들어가면 그 경찰 쪽 사람네 집으로 들어갈 거야.”
생각과 조금 다른 장소에 의아했지만 성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플랜 B까지 설계해놓은 상태여서 다행히도 큰 문제는 없었다. 그의 대답을 본 윤호가 먼저 섬나신을 몸속에 주입했고 그가 잠들자 산과 홍중이 나타났다. 그리고 윤호와 가까운 좌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몸을 눕혔다.
“준비됐죠?”
묻는 민기의 말을 마지막으로 모두 눈을 감았다.
동시에 눈을 떴을 때 한 가정집 앞이었다. 거리는 홍중이 설계해서 익숙했지만 집은 낯설었다. 하지만 아무리 꿈속이 처음 보는 풍경일지라도 윤호보다 베테랑인 우리가 유리했다. 어느새 장전한 총을 뒷주머니에 넣으며 성화가 말했다.
“정윤호가 바로 날 찾을 거야. 그럼 너희는 십 분 뒤에 방 안으로 들어오면 돼.”
“우리가 들어온 거 정윤호가 알아?”
“아마 모르겠지. 그냥 투사체라고만 생각할 거야.”
할 말을 끝낸 성화가 먼저 집으로 들어가려 몸을 돌렸고 홍중이 급하게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의 약지에 보이는 반지가 성화의 마음을 착잡하게 했다.
“이거 끝나고 이야기 좀 해.”
“너랑 할 이야기 없어.”
“듣기만이라도 해줘.”
애써 홍중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마주친 그의 얼굴에 성화는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서 얼굴을 보면 안 됐는데, 강하게 마음을 먹었지만 약해지는 게 결국 사랑이었다. 대답을 받아낸 홍중이 그의 팔을 놔주고 성화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정확히 성화가 말한 십 분이 지나고 홍중과 산이 집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집 안은 무방비였고 그의 아내와 딸이 항복한 상태로 구석에 있었다. 이미 겁먹은 그들을 두고 정윤호와 성화가 있을 안방을 열었다. 하지만 문이 열리자마자 그들을 맞이한 것은 장전된 총구였다.
“네가 설계하는 데 내가 빠질 수 없지?”
그녀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녀에게 총구를 겨눈 산과 이미 예상했다는 표정을 지은 홍중이 두 손을 들었다. 제가 설계를 했으면 안 됐는데 역시나였다.
“어디까지 나타날 셈이야.”
“난 네가 설계해도 나타날 거고 박성화가 설계해도 나타날 거야.”
하. 홍중이 실소를 지었다. 제가 설계를 하지 않아도 왜 그녀가 나타나는지 의문이었는데 이렇게 풀렸다. 홍중의 죄책감이자 성화의 걸림돌이었던 그녀는 어디서든지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네가 김홍중이구나?”
그녀의 뒤에서 윤호가 나타났다. 자기 이름을 아는 윤호에 홍중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제 이름을 아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성화가 더 중요했다.
“박성화 어디 있어.”
“어디 있긴, 침실에 있겠지?”
홍중의 심기를 대놓고 건드리는 말이었지만 홍중은 오히려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감정에 그제야 안방 모습이 보이고 그 옆에 또 다른 곳으로 향하는 문이 보였다. 시선이 문으로 향하는 걸 눈치챈 윤호가 그의 앞에 서서 시야를 가렸다. 그리고 턱짓으로 구석을 가리켰다. 성화를 찾으려면 그의 말을 고분고분하게 들어야 했다. 그가 하라는 대로 구석에 가 섰고 윤호가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짓고 그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가 들어가고 얼마 안 있어 뒤통수로 손을 들고 있는 산이 조심스럽게 홍중의 옆으로 섰다.
“어떻게 할 거야 캡틴. 아마 성화형이 저 안에서 인셉션을 시도하고 있을 텐데.”
산이 굳이 되짚어주지 않아도 문 닫힌 저 방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홍중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꿈속이 아무리 저희에게 유리해도 상상으로 만들어진 꿈에서 어떻게 일이 만들어질지 모른 거였기 때문에 홍중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어느 행동을 감히 할 수도 없을 때 그녀가 다가왔다.
“안에서 둘이 무슨 일 하는지 궁금하지 않아?”
명백한 자극이었다. 하지만 홍중은 그에 연연하지 않는 듯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녀 또한 그의 행동에 자극받지 않았다.
“나 같으면 저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가겠어.”
“...네가 뭘 알아.”
“너는 박성화가 너랑 달리 쟤랑 깊은 관계일까봐 두려운 거잖아. 그래서 박성화가 따로 떠난다고 했을 때도 불안했잖아.”
그녀가 기분 나쁘게 높은 소리로 웃었다. 하지만 그녀의 조롱에도 오히려 홍중은 미소를 지었다.
“이거 박성화 꿈이구나. 정윤호가 아니고.”
정곡에 콕 찔린 그녀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갔다. 성화와 자기만의 일을 투사체가 알고 있다면 이 꿈이 정윤호의 꿈일 수가 없었다. 그러면 감히 그녀가, 성화가 만들어낸 투사체는 홍중을 공격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에서 확증을 얻어낸 홍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당황해하며 급하게 총을 들었지만 홍중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넌 나 못 쏴. 박성화가 나 다치게 그냥 둘 것 같아?”
“난 너의 죄책감이야. 그래서 반지도 못 빼고 있잖아. 네가 날 죽일 수 있어?”
“아니. 넌 나의 두려움이지. 박성화를 위해서라면 그까짓 두려움, 이겨내 줄게.”
탕! 홍중의 말을 끝으로 뒤에서 준비하던 산이 그녀에게 총을 쏘고 그녀는 한 줌의 가루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시야를 막던 장애물이 사라지자 성화가 있을 방문이 보였고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한 발의 총소리가 날카롭게 귀를 찔렀다.
잠시 윤호가 나간 사이 목표물에게 인셉션을 시도하던 성화가 눈치를 흘깃 보고 주입하던 섬나신을 끊었다. 그러자 목표물이 의아한 표정으로 성화를 쳐다봤다.
“난 정윤호를 잡으러 온 사람입니다. 그러려면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지금 제 아내와 딸이 인질로 잡혀 있는데 어떻게..”
“이건 제 꿈이고 그것은 당신을 인셉션 하기 위해 만든 가짜입니다.”
“아아. 그 사람이 인셉션을 한다는 게 찌라시가 아녔군요.”
남자는 그제야 왜 이 상황이 됐는지 이해를 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번쩍 들어 성화와 마주 봤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당신을 정윤호의 꿈으로 보낼 겁니다. 그곳에는 불법 자금이 들어있는 통장이 있을 거고 그 통장 계좌를 외워서 세상에 공개하면 됩니다. 당신이 인셉션 당할 뻔한 것까지. 그리고 몸속에는 섬나신 성분이 들어 있으니 바로 피 검사하시고.”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끊었던 섬나신을 다시 주입하기 위해 링거줄을 조절하던 성화가 행동을 멈췄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 고민할 필요도 없이 오직 김홍중, 한 명 때문이었다. 다시금 떠오르는 그의 얼굴에 애써 꾹꾹 눌렀다. 안 그래도 잦은 설계에 정신이 많이 쇠약해진 상태였다. 또 다른 이벤트가 생기기 전에 빨리 끝내야 했다. 말없이 그가 편히 누울 수 있도록 자리를 정돈해주고 다시 섬나신을 주입했다.
“미련한 제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남자는 눈을 감고 그와 동시에 윤호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잠든 남자를 확인하곤 편하게 근처 소파에 앉았다. 홍중과 산이 들어오기로 한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 반응 없는 밖과 만족스러운 표정의 윤호를 보니 이 남자가 성공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잘했지?”
“응. 이제 깨면 다 끝날 거야.”
가만히 시계를 보던 윤호가 소파에 일어나 성화 옆으로 다가왔다. 똑딱똑딱 소리 내며 가는 시곗바늘이 마치 제 심장 소리 같았다. 설마 눈치채진 못했겠지, 살짝 불안감도 들었다.
“김홍중이랑 같이 살고 싶지?”
또 무슨 말로 자기를 현혹하려는 걸까, 묘한 거부감이 들자 그에게서 살짝 멀어졌지만 윤호는 그 틈을 허용하지 않았다.
“여기서는 가능해.”
“꿈을 현실처럼 설계하기 시작하면 헤어 나올 수 없어.”
“왜 못해. 넌 할 수 있잖아?”
뭘 원하는 건지 악마의 속삭임처럼 자꾸 속삭였다. 언제든 떨쳐낼 수 있도록 그가 모르게 장전해놓은 총 쪽으로 왼손을 옮겼다.
“네가 만든 곳에선 그가 거부하지도 않고 행복하기만 할 수 있어.”
결혼식장에 그녀 대신 내가 들어가는 꿈, 신혼집을 함께 꾸미는 꿈, 꽃집으로 그가 데리러 오는 꿈, 아오모리에서 벚꽃을 함께 보던 꿈.
“꿈은 현실보다 더 달콤해.”
인셉션이었다. 무슨 꿍꿍이인 건지 자신에게까지 인셉션을 시도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알면서도 그의 속삭임처럼 자꾸 머릿속에 달콤한 모습이 그려졌다. 괴리감으로 인해 생긴 두통은 오른손에 쥐고 있던 토템을 떨어뜨리게 했다. 다른 사람에게 토템을 함부로 보여줘선 안 됐지만 아득해지는 정신에 관자놀이를 손바닥으로 꾹 누를 뿐이었다.
그런 성화에게서 떨어진 유리병에 윤호가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밖에서 총소리가 들리고 남자가 꿈에서 깨어났다. 총소리에 아득했던 정신이 환해지고 머릿속 그림이 한 번에 사라졌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토템을 윤호가 갖지 못하도록 발로 차 저 멀리 보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알아냈습니까?”
“네.”
“그럼 제가 말한 대로 꼭 하세요.”
탕! 장전됐던 총은 정확히 남자의 가슴에 박히며 남자가 쓰러지고 상황을 파악한 윤호가 성화의 거리를 벌리고 입가에 조소를 머금었다.
“약해빠진 놈. 나 같으면 그 능력을 걔 지키는 게 아닌 자기 욕심을 위해 쓰겠어.”
“네가 뭘 알아. 그리고 꿈은 현실보다 달콤하면 안 돼.”
그리고 문이 열리며 홍중과 산이 등장했다. 내 이 행동의 답, 내 모든 것의 방향성. 하지만 그와 동시에 긴장을 늦췄고 그 틈을 타 윤호가 총을 쐈다. 동시에 두 발의 탄환이 발사됐다. 산의 총구에서 연기가 나고 가만히 서 있던 윤호가 피를 토하며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쓰러진 것은 성화였다. 앞으로 고꾸라져 넘어지고 홍중이 그에게 달려갔다. 그의 심장 쪽에서 빨갛게 피가 번졌다. 그나마 어깨에 맞아서 윤호는 치명상을 피했지만 성화는 얼굴이 창백해진 것부터 잘못된 것 같았다.
“성화야.. 성화야..”
“이야.. 김홍중이.. 내 이름을.. 다.. 불러주네.”
“말하지마. 말하면 피 더 나와.”
“좋다.. 너한테.. 안겨 있으니까..”
“정신차려. 아직 아니야. 좀만.. 30분만 버티면 돼. 응?”
하지만 홍중의 바램과 달리 성화의 손은 전보다 더 차가워져 갔다. 윤호의 손목에 수갑을 건 산이 둘에게 다가왔지만 심각한 성화의 상태에 말을 잃었다. 아직 킥 시간까지 현실 세계에선 3분, 이곳에선 30분이 남아있었다. 불안한 그의 숨소리에서 자꾸 끝이 보이는 듯했다. 홍중이 다급하게 그의 손을 주무르며 따뜻하게 해주려 했지만 노력이 무색하게 손은 더 빠르게 차가워져 갔다.
“경찰이.. 다 알아냈으니까.. 넌 성공할거야..”
“지금 그게 중요해? 제발.. 박성화.. 응?”
“홍중아..”
성화가 손을 뻗어 홍중의 볼에 갖다 댔다. 홍중의 고인 눈물을 닦아주려는 듯 정확히는 그의 눈가로 손을 움직였다.
“홍중아.. 홍...”
홍중이 급하게 그의 손을 붙잡았지만 다른 손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거친 숨소리라도 내뱉던 입은 조용해졌고 홍중이 잡은 손 또한 온도가 사라졌다. 그제야 고이기만 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소리 내 울지도 못 했다. 성화는 영원한 고통으로 사라졌는데 어찌 저가 감히 아픔을 밖으로 내뱉을 수가 있을까. 차마 그런 홍중을 산도 달래지 못했다. 두 번이나 사람을 잃은 슬픔을 가히 짐작해볼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음악이 시작됐다.
“..캡틴. 시간이 얼마 없어.”
Freude, schöner Götterfunken
어느새 시간이 지나서 5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 홍중의 시야에 아직 남은 섬나신과 드림 머신이 보였다. 홍중의 시선을 따라간 산이 급하게 그를 막아섰다. 불안정한 상태에서 2단계 꿈은 위험했다.
“아니야. 림보 속에 빠진 사람 어떻게 구하려고 그래?”
“..할 수 있어.”
“형!!”
“지금 해야 해. 더 지체되면 성화 더 이상 못 봐.”
간절했다. 그의 눈빛과 성화의 손을 꽉 잡은 그의 손이. 결국 산은 드림 머신을 작동시켰다. 홍중의 말대로 지금 잠에서 깨면 성화 또한 최주현처럼 되는 것이기에 그를 막지 못 했다. 홍중은 빠르게 주사를 성화의 팔뚝에 꽂고 또한 같은 섬나신을 자신에게 주입했다. 그리고 그와 드림 머신을 함께 연결했다.
“산아, 노래가 끝나고 우리 둘 다 일어나지 않으면 넌 일어나.”
“... 돌아와야 해.”
“둘이 함께 갈게.”
Tochter aus Elysium
그렇게 홍중이 눈을 감았다.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이미 져서 죽어버린 아오모리의 벚꽃 나무 밑이었다. 지난번 꿨을 때와 달리 분홍빛을 띠던 꽃잎들은 온데간데없고 온통 검은 잎만 휘날렸다. 성화를 찾기 위해 그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무리 봐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성화가 옷을 갈아입고 나온 집이 떠올랐고 그곳으로 뛰었다. 아마 성화는 그곳에서 홍중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홍중이 생각한 집의 위치는 그리 멀지 않았다. 단독 주택의 2층 형태였다. 하지만 저 멀리 생성된 폭풍우가 눈에 들어왔다. 시간이 얼마 없다는 뜻이었다. 홍중은 서둘러 집으로 들어갔다. 그 안은 무서울 만큼 홍중이 알고 있는 둘의 신혼집과 같았다.
노래를 좋아하는 성화에 피아노가 놓인 것과 대학교 때 함께 찍은 둘의 사진. 그리고 무엇보다 둘의 자식까지 함께 찍은 액자까지 모든 것이 홍중이 아는 것과 다른 것이 없었다. 1층에 그가 없다면 있을 곳은 집에서 단 한 곳이었다. 망설임 없이 홍중은 2층으로 올라섰고 역시나 성화는 그곳에 있었다.
창문이 활짝 열린 안방에 성화가 있었다. 하지만 위태롭게 그는 창틀에 앉아 있었다.
“성화야, 가야지.”
“여기가 현실이야. 너와 내 아이들이 있는 곳.”
윤호의 인셉션이 정확히 그에게 박혔다. 설계를 자주 한 탓에 조심했어야 하는데 홍중의 입장에서 또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 셈이었다. 일단 그를 달래려 한 걸음 내디뎠고 바닥에서 무언가 짓밟혔다. 홍중의 발걸음을 붙잡는 물건을 확인하고 홍중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바닥에 잔뜩 흩뿌려진 것은 깨진 유리병 조각과 노란 메리골드 가루였다.
“너 설마 토템을 깬 거야?”
“여기가 현실인데 저게 왜 필요해?”
이를 잘근 씹었다. 이미 성화는 이곳을 현실이라 착각하고 있었다. 토템이 없으면 인셉션을 깨우기도 더 어려웠다. 하지만 홍중은 멈추지 않고 그에게 걸어갔다. 멈추지 않는 그가 이상한 듯 성화는 풀린 눈으로 응시했다. 성화의 바로 앞에 선 홍중이 그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그의 손이 어색했다.
“이곳은 너랑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 우리는 여기서 행복해질 수 없어.”
“무슨 소리야. 여기 너도 있고 나도 있고 우리 애도 있잖아.”
단호한 홍중의 말에 성화가 그의 손에서 자기 손을 빼냈다. 세게 빼내며 홍중의 반지에 긁힌 손가락에서 선홍색 피가 맺혔다.
“너 여기 김홍중이 아니구나.”
성화가 꾸며낸 투사체 김홍중과 다른 것을 안 성화의 표정이 날카롭게 변했다. 성화의 어깨 너머로 꿈의 주인을 지키기 위해 다양한 투사체들이 이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투사체들이 오기 전에 그를 데리고 나가야 했다. 홍중은 1단계 꿈에서 가져온 물건을 만지며 성화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갔다. 물러서지 않는 홍중이 두려운 듯 성화가 방어 태세를 취했다.
“성화야, 항상 네게 말했잖아.”
Freude, schöner Götterfunken
그때 홍중의 주변으로 노래가 들리기 시작했다. 킥 시간이 다다랐다.
“꿈은..”
Tochter aus Elysium
가져온 물건을 성화의 손 위에 올렸다. 손을 펼쳐 물건을 확인한 성화의 눈동자에 생기가 살아났다.
“현실보다 잔인해야 해.”
Wir betreten feuertrunken
노란 메리골드가 유리병 속에 가라앉지 못하고 이리저리 부유했다.
“그래야 꿈에서 깨고 싶어지니까.”
Himmlische....
홍중이 성화에게 약지를 내밀었다. 이제는 나의 죄책감을 내려놓고 두려움을 딛고 일어설 단계였다.
노래의 끝부분에 다다랐지만 아직 반응 없는 둘에 산은 답답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에라이 모르겠다. 산은 주변에 있던 전선으로 그 둘의 몸을 묶었다. 그리고 집 밖으로 휘몰아치는 폭풍우에 윤호를 먼저 밀치고 자신 또한 폭풍우 속으로 몸을 던졌다..
dein Heiligtum!
***
바쁘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과 테라스에 앉아서 떠드는 사람들로 거리는 가득 찼다. 그 사이 홍중은 가만히 앉아서 물이 송골송골 맺힌 딸기 스무디를 한 입 빨았다. 따뜻한 햇빛의 열기와 시원한 스무디의 한기는 홍중의 몸을 적당한 온도로 맞춰주기 충분했다. 그리고 햇빛이 테이블 위 나침반을 반짝이자 반사된 빛으로 홍중이 살짝 눈을 찡그렸다. 그와 동시에 건너편 꽃집에서 딸랑 소리가 나며 화분을 든 한 사람이 나왔다.
그가 든 꽃만큼이나 화려한 외모의 남자는 시선을 뺏기 충분했다. 홍중 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들도 그를 훔쳐보기 바빴고 아는 체하는 사람도 몇 있었다. 친분을 드러내던 중 남자는 시선이 느껴졌는지 주위를 둘러보다 홍중과 마주쳤다. 그리고 홍중을 향해 웃었다. 그저 단순히 미소를 지은 거였지만 마치 마법을 건 듯 주위의 모든 것이 멈췄다. 서류를 들고 뛰어가는 사람도, 옆 사람과 팔짱 끼고 마주 보는 연인도, 남자에게 말을 걸던 할머니도, 마치 사진처럼 굳었다.
그런 사람들 사이로 홍중이 나침반을 열어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에게 다가갔다. 남자는 꽃집 근처에 화분을 내려놓고 그를 마중하기 위해 손을 털었다. 그리고 홍중이 다가왔을 때 남자는 햇살처럼 녹아버릴 듯한 미소로 홍중을 꽉 안았다. 키스를 받은 공주가 눈을 뜨듯 그 순간 멈췄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서류를 든 회사원은 아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뛰어갔고 연인은 전보다 더한 사랑으로 서로를 마주 봤고 할머니 또한 우리를 보고 아름다웠던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했다. 그런 소란스러움 속, 그의 귀에 하고 싶었던 말을 속삭였고 알아들은 남자가 가볍게 홍중의 볼에 뽀뽀했다.
“보고 싶었어. 성화야.”
테이블 위 나침반 속 화살표가 빙글빙글 돌다 한 자리에 멈췄다.
그리고 그의 바래지지 않은 약지가 그의 손을 맞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