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정윤호! 담요 내놔아아아악!"
"싫어!"
정우영이 정윤호에게 달려들었다. 이동수업을 가느라 복도엔 학생들이 밀집해있었지만, 정우영과 정윤호는 그들을 무시한 채로 복도에서 추격전을 하고 있다.
"아, 미친아. 빨리 내놔- 나 추워."
"뭐가 추워. 3월이야."
"그럼 니는 왜 덮고 있는데. 됐고, 빨리 내놔."
"안 돼! 이거 성화 형 거란 말야."
정우영이 멈칫했다. 아~ 그런 거란 말이지~ 그러면 더 뺏어줘야지. 장난기가 발동한 정우영은 노선을 틀어 정윤호가 덮고 있는 박성화의 담요를 뺏어 본인이 두른 뒤에 박성화에게 가서 정윤호 저 새끼가 형 담요 나한테 버렸다고 할 예정이었다. 담요를 잡아채려는 순간, 뒤에서 박성화가 갑작스럽게 나타나 정우영의 등을 아프지 않게 때렸다. 야, 윤호 담요 뺏지 마라.
"아니, 형, 저거 형 거라면서."
"웅. 근데 지금은 윤호 거."
"뭔 그런 게 다 있어."
정우영은 툴툴거리며 교실로 돌아갔다. 아, 근데 형은 2학년 층에 웬일로? 2학년 교무실에서 뭐 챙겨갈 게 있어서. 아 그러면 온 김에 담요 돌려줄게요. 아냐, 괜찮아, 너 계속 써도 돼. 박성화는 제 손에 건네진 담요를 다시 정윤호의 어깨에 둘러주며 말했다. 빠이! 종례 마치고 보자! 저를 향해 환하게 웃는 박성화를 보며 정윤호는 그런 형이 조금은 귀엽다고 생각했다.
먹짱 둘답게 오후 자습을 하기 전에 당 보충을 든든히 해놔야 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정윤호와 박성화는 학교 앞 편의점에서 신상 빵과 달달한 음료를 골라 다시 학교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확실히 편의점은 매점이랑 퀄리티가 달라, 그치? 웅, 편의점이 더 비싸긴 한데 비싼 값을 하네요. 둘은 종례를 마치고 오자 시작 전까지 있는 15분을 항상 알차게 썼다. 박성화와 헤어지고 나서 교실로 들어간 정윤호는 이유 없이 심심했다. 원래 오자가 그런 거지 뭐, 싶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후 자습을 시작한 지 한 시간 만에 충동적으로 3학년 층으로 올라가 7반을 찾았다. 어, 성화 형만 있네? 복도 창문으로 한참 박성화를 바라보던 정윤호는 반 문을 조금 열고 작은 목소리로 형, 나 들어가도 돼요? 라고 물었다. 박성화는 조금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여기 왜 왔어? 아, 너무 심심해서...,근데 나 여기 들어와도 돼요? 음.. 아마 괜찮을 듯? 오늘 오자 나만 하기도 하고 차피 우리반 쌤 감독 안 돌아서. 박성화의 말이 끝나자마자 바로 앞 의자에 앉은 정윤호는 턱을 괴고 박성화를 빤히 바라보았다. 뭐야, 왜 이래, 하며 박성화는 외우던 단어장을 다시 봤다. 정윤호는 박성화의 손에 들린 단어장을 옆으로 치우곤 혀엉... 나 형 보러 여기까지 왔는데... 나랑 놀아주라... ...이렇게 말하는데 어떻게 안 놀아줄 수가 있겠니. 단어장을 책상 위에 두고 그래그래, 뭐 하고 놀까? 하며 정윤호의 장단을 맞춰주었다.
"아, 맞다. 날씨 봤는데 오늘 밤에 은근 춥대요. 야자 할 때 담요 덮고 해요. 이거 원래 형 거잖아요."
정윤호가 반듯하게 접힌 담요를 돌려주며 말했다.
"아... 안 줘도 되는데... 고마워, 다시 필요할 때 말해."
6시가 조금 넘어서니 창밖에 노을이 비췄다. 창가 자리에 앉은 터라 창밖 풍경이 더 잘 보였다. 정윤호는 시선을 천천히 옮겼다. 넓은 운동장, 곳곳에 놓인 벤치, 주황빛으로 물든 하늘, 책상에 놓인 이프로 캔, 그리고 그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박성화. 노을빛에 비친 박성화의 머리카락은 간간히 반짝였고 바람 때문에 일렁여져 정윤호는 흡사히 붉은 빛 파도를 보는 것 같았다. 밖을 바라보는 박성화의 눈은 반짝였다. 그리고 정윤호를 바라봤을 때도 박성화의 눈은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창문 너머 햇빛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일까. 바람에 일렁여 헝클어진 머리를 정윤호가 정리해주었다. 배시시 웃는 박성화의 모습을 두 눈에 빼곡히 담았다. 갑자기 바람이 강하게 불더니 바로 옆에 있던 커튼이 정윤호를 집어삼켰다. 커튼에 갇힌 정윤호는 어, 어 하며 허둥지둥 손을 뻗었다. 박성화는 그런 정윤호의 귀여운 모습이 너무 좋았다. 박성화는 커튼을 걷고 정전기 때문에 엉망이 되어버린 정윤호의 머리칼을 하나하나 만져주며 자신의 심장이 평소보다 심하게 뜀을 느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해봐도 심장이 너무 뛰는 걸 어떡해. 이 정도면 정윤호한테도 들리는 거 아니야? 라고 생각하는 순간 정윤호가 눈꼬리를 휘며 환하게 웃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아, 망했다. 이대로면 나 정말 들킬 것 같아. 아, 아 나 화장실 좀... 불꽃이 튀는 듯한 마음을 식히기 위해 박성화는 허둥지둥 화장실로 향했다. 정신 차려, 정신 차려 박성화. 고삼이 되더니 미쳐버렸나, 내가 진짜 왜 이러는 거야. 근데 내가 얘한테 이런 감정을 느껴도 되나? 얘는 고작 날 친한 형으로 알 텐데. 손에 있던 물기를 탈탈 털며 박성화가 교실에 돌아오자마자 오후 자습 마침 종이 쳤다. 다행히 정윤호는 석식을 친구들과 같이 먹으러 다시 2학년 층으로 내려갔다. 박성화는 석식을 먹고난 후 야자 시간에 오직 정윤호 생각만으로 가득 차 있어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박성화가 정윤호를 좋아하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한 5개월 정도? 작년 10월, 정윤호와 친해지고 얼마 되지 않아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는 정윤호를 보고 한 순간에 그 상황을 이루던 모든 것이 멈춘 듯했다. 이게 단순한 감정이 아님을 부정하지 않게 된 건 고작 한 달 전이다. 난 이렇게나 얘를 좋아하는데 과연 들키지 않을 수 있을까? 박성화는 본인이 정윤호를 좋아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내가 좋아할 수 있기만 하면 돼. 윤호가 무슨 생각을 갖고 있든 윤호가 날 좋아하지 않아도 되니까, 내가 좋아하기만 하면 돼. 사실 정윤호의 사랑이 고픈 박성화였지만 본인의 감정과 상황에 만족했다. 만족해야 한다고 스스로 세뇌시킨다고 하는 편이 맞을지도 모른다. 창문을 조금 열어놓은 탓에 교실 안에 서서히 한기가 돌았다. 박성화는 아까 정윤호가 돌려주고 간 자신의 담요를 어깨에 둘렀다. 아, 정윤호 냄새. 여름의 바닷가처럼 시원한 향이 나는 것 같으면서도 포근했다. 박성화의 담요에선 항상 정윤호 냄새가 났다.
3월의 마지막 날, 박성화에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정윤호에게 고백을 해버렸다. 박성화는 정윤호가 너무 좋아서 미칠 지경이었다. 정윤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정윤호에게 전달하지 않으면 자신이 어떻게 될 것만 같았다. 이 감정을 표출하고 싶었다. 연애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본인과 사귀어달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라, 그저 좋아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좋아한다고 말해야지 가슴 속 응어리진 감정이 조금이나마 풀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정윤호의 대답은,
“아…,형 아무래도 난… 아직 준비가,”
박성화가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미안해. 내가, 내가 다 정리할게.”
“형… 우리 평소처럼 지내면 안 될까요?”
“어, 어 그래. 당연하지. 미안해, 윤호야. 잊어줘… 내가 다 정리하고 평소처럼 대할게.”
”응… 고마워요.“
”고맙긴 뭐가 고마워… 아, 종쳤다. 나 갈게.“
점심시간 마침 종이 친 후 박성화는 최대한 걸음을 빨리하여 3학년 층으로 올라갔다. 정윤호는 지금 어떤 표정일까? 나에 대한 경멸? 혐오? 고개를 숙이고 있어 정윤호의 표정도 보지 못한 채로 그 어색하고 불편한 자리를 떠나기에 바빴다. 지금 정윤호는 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 고백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기나 할까? 수업에 집중이 하나도 되지 않았다. 수특 미적분을 펼쳐놓고 샤프를 툭툭 건드려가며 문제를 정말 말 그대로 읽기만 했다. 차인 와중에 심장이 뛰는 이유는 뭘까? 내가 아직도 정윤호 걔를 좋아해서? 차인 것에 대한 당혹감 때문에? 쪽팔려서? 더 이상 정윤호를 좋아해서는 안 된다고 결론을 내린 박성화는 수업 시간 내내 정윤호 안 좋아하는 방법을 생각했다. 하지만 50분 동안 찾지 못했다. 7교시까지 생각하는 걸 연장하기로 했다. 그마저도 찾지 못했다. 박성화의 교실에선 하교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다 보였다. 오후 자습을 하기 위해 교실에 남겨진 박성화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정윤호다. 박성화는 정윤호 뒤통수만 봐도 알아본다. 아 짜증 나. 내가 무슨 정윤호 팬이야 뭐야. 정윤호 옆엔 자그마한 여학생이 한 명 있었고 정윤호는 활짝 웃고 있었다. 쟨 나랑 있을 때 저렇게 웃었던 적이 있었을까? 내 고백은 신경도 안 쓰는 거겠지? …하…… 깊은 한숨과 함께 울컥하는 마음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울고 싶지는 않았는데. 진짜… 진짜 울기 싫은데… 나 이렇게 잘 우는 사람이 아닌데... 첫사랑을 잃어버린 박성화는 오후 자습 내내 책상에 엎어져서 정윤호 생각만 했다.
고백하고 난 다음 날, 박성화는 평소처럼 지내자는 정윤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어이- 정윤호!”
앞에서 다가오는 정윤호를 보며 박성화는 반갑게 인사했지만, 정윤호는 박성화를 못 본 건지, 아니면 봐놓고 못 본 척을 한 건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뭐야, 못 본 건가? 점심시간에 둘은 또 마주쳤다. 정윤호가 뒤를 돌아본 순간 박성화가 손을 살며시 올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윤호는 적잖게 당황한 티를 내며 바로 앞을 봤다. 뭐야? 쟤 지금 나 무시한 거야? 어처구니가 없어진 박성화는 직접 정윤호를 보기로 했다. 한 손엔 정윤호에게 줄 엔요를 하나 들고선 정윤호가 있을 3층으로 갔다. 정윤호는 복도 사물함에서 책을 꺼내고 있었다. 박성화는 정윤호의 뒤통수에 대고 정윤호 이름 석 자를 불렀다. 야, 정윤호! 정윤호는 목소리로 박성화임을 알아채고 안 그래도 고백때문에 복잡한데 계속 마주쳐서 저도 모르게 짜증 내는 어투로 말했다. 아, 형. 쫌!
되레 자신에게 큰소리치는 정윤호의 태도에 박성화는 아까부터 연습해오던 정윤호에게 할 말을 다 까먹어버렸다. 머리가 하얘졌다. 뭐? 너 방금 나한테 화낸 거야? 정윤호도 박성화에게 화낸 본인의 태도에 놀란 것 같았다.
“아… 그게 아니라,”
“야. 너… 너 내가 우스워?”
”형…“
박성화는 모질게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감정을 조절하며 말을 해보려고 애써도 박성화가 내뱉는 문장 하나하나에서 울분이 녹아들어 있었다.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오늘 네가 나 볼 때마다 무시하는 거? 티가 안 나게 행동을 하던가. 아니지, 네가 애초에 나보고 평소대로 하자며.“
”…“
”네가 원하는 그 평소처럼은 이거야? 이런 거야? 네가 나 무시하고, 네가 나한테 화 내고. 너 정말… 날 뭘로 보는 거야?“
”그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봐.”
“…아 ……”
“거 봐, 말할 기회를 줘도 안 해. 네가 정말 원하는 게 이런 거라면 원하는 대로 해.“
박성화는 그 말을 끝으로 교실로 올라갔다. 박성화가 가고 난 자리엔 마음속이 텅 비어버린 정윤호가 남아있었다.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박성화는 죄책감에 빠졌다. 그저 음료수를 하나 쥐여주고 불편한 일 있거나 아예 내가 보기 싫다면 예전처럼 돌아가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화를 내버렸다. 정윤호가 저의 고백을 받아주지 않아서, 저에게보다 더 환한 웃음을 지어주는 사람이 있어서, 크게 덩어리진 서운한 감정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울분을 터뜨리고 만 것이다. 박성화는 한 손에 정윤호에게 줄 것이었던 엔요를 꽉 쥐고 터덜터덜 교실로 돌아가는 와중에 정우영이 눈치 없이 엔요를 확 낚아챘다. 평소 같았으면 내놓으라고 쌩지랄을 떨었을 박성화가 아무런 대꾸도 안 하고 그저 가던 길을 가는 걸 보니 정우영은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하지만 그 느낌은 정우영이 엔요를 한 입 빨자마자 사라졌다. 음- 존맛.
박성화는 사랑이 고픈 사람이다. 사랑 없이 못 살고, 그래서 사람 없이 못 산다. 박성화는 사랑을 받고 싶을 때 사랑을 준다. 사랑이 고플 때 누군가를 좋아하기 시작한다. 내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주면 그 사람도 내게 사랑을 줄 수도 있겠다는 그 좆같은 희망 때문에. 박성화는 사랑받고 싶어 했다. 애정결핍이라고 하면 그렇다고 인정하겠다. 외롭다. 그러니까 좋아한다. 하지만 그 좆같은 희망이 다 사라졌다. 여기서 제일 좆같은 건 그렇게 정윤호에게 몇 번이나 거절을 당해도 정윤호에 대한 마음을 접을 수 없는 박성화 본인이다.
4월 3일, 박성화의 생일날, 아침에 학교를 가려고 샤워를 하다가 박성화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허리에 [정윤호] 라고 새겨진 네임때문에. 시발 뭐야 나 노네임 아니었어? 19년 동안 없다가 이제서야? 근데 하필 정윤호다. 아… 하필 내 운명의 상대가 정윤호란다. 저기요, 신들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그것도 하필 왜 제 생일에 줘요. 박성화는 19년 인생 살면서 제일 개같은 생일 선물을 받았다. 그것도 심지어 자신이 제일 믿는 운명이라는 것으로부터. 정윤호가 내 운명... 장난치는 거 맞죠? 하늘에 대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정말 크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 건 베개에 콩콩 주먹을 날리며 음소거 아우성을 내지르는 것뿐이었다. 네임 위치는 남에게 잘 보이지 않는 허리 부근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학교에 가서도 다행히 정윤호와 부딪힐 일은 없었고 잠깐 마주친다고 해도 박성화는 정윤호를 무시했고 그 정윤호의 시선 끝엔 박성화가 있었다. 생일이고 뭐고 중요하지가 않았다. 이미 망쳐버린 3월 모의고사를 회생시키기 위해 4월 모의고사를 열심히 준비해야 했다. 하, 시발. 나 왜 고삼이야? 모의고사 달마다 늘어난 게 제일 빡쳐... 박성화는 생일날에 부모님과 그 흔한 레스토랑에 가지도 못하고 10시까지 수학학원에 있어야 했다. 생각이 많아진 탓에 복잡한 머리를 조금이라도 식히고 싶어 집까지 30분 동안 걸어갔다. 이 상황이 말이 안 됐다. 생일날에 저녁으로 삼각김밥을 먹은 것도 속상한데 평생 노네임일 줄 알았던 자신에게 네임이 생겼다. 하필 정윤호다. 본인이 그렇게 좋아했던 정윤호. 그리고... 아직도 좋아하는 정윤호. 와, 진짜 개좆같다. 걘 날 좋아하지도 않는데, 아니 아예 남자한테 마음이 없는 것 같던데, 걔가 내 운명의 상대라고... 오천만명 대한민국 인구 중에 하필. 정윤호가. 내. 운명.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던 박성화는 자신의 허리에 있던 네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너도 나 좀 좋아해주면 안 되냐?
일주일 뒤, 볼일을 보러 2학년 층에 가자마자 복도에서 정윤호가 나타나더니 인사를 했다. 저번에 정윤호에게 화를 낸 게 그에게 꽤나 큰 충격이어서 태도가 바뀐 게 아닐까 생각했다. 정윤호는 다시 친한 척을 하기 시작했다. 박성화는 그런 정윤호가 의아했지만, 아무 이유 없이 처음처럼 다시 돌아간 정윤호가 좋았다. 저번에 그렇게 화를 냈어도 아무렴 어때, 정윤호가 좋은 걸. 하지만 좋은 티를 팍팍 내기엔 가오가 살지 않으니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30분 뒤, 생각이 바뀌었다. 그냥 좋아하는 티를 조금씩이라도 내기로 했다. 이렇게라도 하면 저에게 관심을 주고 혹시라도 본인에게 약간의 호감이 생기지 않을까 라는 개같은 희망 때문에. 박성화가 알던 박성화만의 정윤호는 며칠 만에 다시 돌아온 것 같았다.
사실 박성화에게 네임이 나타난 후로부터 이틀 뒤, 정윤호에게도 네임이 생겼다. 손목 부근에 [박성화]라고 적힌 걸 보자마자 정윤호는 정말 최악이라고 생각했다. 박성화가 최악인 것은 절대 절대 아니다. 그치만 하필 왜 이 타이밍에. 안 그래도 본인 때문에 어색한데 이 분위기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 것이며... 네임은 어떻게 된 것이고, 내가 성화형을 좋아해야 하는 게 맞는 건가? 좋아해야 하나?
그래서 정윤호는 처음엔 박성화를 일부러라도 좋아하려고 애썼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어색해도 인사를 한 것이고 그걸 박성화가 좋게 받아준 것이었는데, 박성화는 눈치가 빨랐다. 그리고 생각이 많아서 감도 좋았다. 나한테 정윤호 네임이 있으니까 정윤호한테도 내 네임이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그간 정윤호의 태도가 스쳐 지나갔다. 아- 얜 나랑 정말로 다시 친해지고 싶은 게 아니구나. 박성화는 정말 자신이 끝이 없는 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정윤호가 다시 저와 친해지고 싶은 줄 알았던 박성화는 자신이 정말 비참하고 바보 같았다. 박성화는 일부러 3학년 층 자습실 앞으로 정윤호를 불렀다. 정윤호가 박성화의 앞에 서자마자 정윤호가 인사를 하기도 전에 박성화가 정윤호에게 물었다. 야. 너한테 내 네임 있지? 서로가 서로의 운명이라서 마음을 담아 좋아하는 게 아니라 고작 네임을 믿어서 좋아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정윤호는 박성화의 물음에 쉽사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어... 어떻게, 알, 았..
"야, 야 너 설마 ... 네임때문에 나랑 다시 친하게 지내려고 한 거야?"
“아...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
. . .
'박성화' 라고 적힌 네임이 나타난 직후, 정윤호는 생각이 많아졌다. 네임... 박성화... 형이 나랑 운명? 그리고 형이 나한테 좋아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을 줄은 상상도... 아, 형한테는 내 네임이 있을까? 그래서 날 좋아한다고 한 걸까? 그럼 형은 나를 왜, 왜 좋아하지? 자신에게 특별히 잘 대해준다는 건 언젠가부터 인지를 하고 있었다. 그런 박성화의 모습을 차근차근 머릿속으로 느리게 되짚어보던 정윤호는 자신이 살며시 웃고 있다는 걸 알아버렸다. 나... 나 지금 형 생각하니까 웃은 거야? 얼굴이 순식간에 화악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갑자기 주변 온도가 높아진 것 같은 느낌에 머리가 새하얘졌다. 나 어떡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내가 좋다는 사람을, 내가 거절한 거야? 정윤호는 자신이 박성화를 좋아하고 있음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편견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본인이 남자도 좋아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정윤호는 조급해졌다. 아, 성화 형이 날 피하면 어떡하지? 더 이상 나에게 말을 걸어주지 않는다면, 나를 향해 웃어주지 않는다면? 정윤호는 생각이 많아졌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질문들이 정윤호의 머릿속을 뒤엉키게 헤집어놨다. 설마 이 감정이 그저 스쳐 지나가는 감정이라면? 예상치 못한 고백 때문에 잠깐 흔들린 거라면? 혹시 내가 마음이 없는데 형을 좋아하는 걸로 착각하고, 내가 평소처럼 다가간다면 내가 형에게 여지를 주는 게 아닐까? 내가 형에게 상처를 주는 거라면... ...형에게 다신 상처 주기 싫어. 정윤호는 박성화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간단한 인사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어 눈이 마주친다면 손 한번은 흔들어주고 싶었는데 머리가 거부했다. 정윤호는 비겁하게 숨었다. 그치만 더 이상 이렇게 지내면 안 될 것 같았다. 갑작스럽게 느껴지겠지만 정윤호는 박성화에게 인사를 건넸다. 정윤호 본인도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먼저 피했으면서, 형한테 한 소리 들었으면서 갑자기 친한 척이라니... 내가 너무 싫다. 하지만 박성화는 정윤호의 인사를 받아주었고 정윤호는 또다시 그런 박성화에게 녹아내릴 수밖에 없었다.
. . .
"너가 나한테 온다고해서 내가 좋다고 너한테 다시 쪼르르 달려가서 안길 거라고 생각해?"
"난, 난 정말 형 없으면..."
".......윤호야, 사람 마음이 쉬워? 막 안 좋았다가, 좋았다가 해? 근데 그게 무엇보다 사랑에 대해서라면... 너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야."
"..."
"너, 사람의 사랑을 쉽게 봐서는 안 돼."
"...그게... 나도, 형.. 형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박성화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미 두 눈엔 눈물이 일렁였다. 입술을 한 번 깨물고 숨을 고른 뒤 정윤호의 검은 두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윤호야, 내가 너한테서 느끼는 감정, 그거 넌 나한테서 못 느끼잖아."
정윤호는 심장이 멎는 느낌이었다. 충분히 박성화를 잘 알고 그를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도대체 박성화는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 걸까? 날 보는 시선은 어떨까?
"윤호야, 정말 다신 보지 말자."
박성화는 걷잡을 수 없는 서운함을 느꼈다. 박성화는 저 말을 하고 나서 내가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정윤호가 너무 괘씸했다. 박성화는 정윤호의 진실한 마음을 모른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교실로 돌아갔다. 박성화는 2학년 층조차도 오지 않았다. 강여상은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일주일에 4번은 정윤호가 박성화를 보러 올라가거나 그 반대의 경우로 내려오거나 둘 중 하나는 해야 하는데 요샌 정윤호도, 박성화도 교실에 가만히 있기 바빴다. 강여상이 일부러 눈치 없는 척 "성화 형 보러 가자" 라고 했지만, 정윤호는 화학 수행평가 준비를 해야 한다는 핑계를 댔다. 근데 윤호야, 이번 수행 그 파트 아니야. 어쩔 수 없이 강여상은 정우영을 데리고 3학년 층으로 올라갔다. 4월 모의고사가 끝난 고삼의 복도는 이렇구나... 엄청 시끄럽네, 우리보다 더 한 것 같아. 그니까, 선배들이 고삼 되자마자 다들 미쳤어.
"우영아, 우리도 곧 저렇게 되겠지?"
"끔찍한 소리 하지 마, 미친. 우리 아직 1학기 중간고사도 안 쳤어."
7반으로 가자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박성화가 눈앞에 보였다. 두 쌍의 눈동자가 뚫어져라 쳐다보니 박성화는 뭔가 쎄한 느낌에 옆을 봤더니 강여상과 정우영이 있었다. 어, 여상아! 무슨 일이야?
"아, 혀엉! 난 안 보여?? 우영이 안 보이냐고!"
"저번에 내 엔요 뺏어 먹은 벌이다. 근데 여긴 왜?"
강여상이 정우영과 한 번 눈을 마주치고 박성화의 눈치를 봤다. 박성화가 그냥 말해도 된다고 하자 강여상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형... 혹시 정윤호랑...
"아, 미안... 걔 얘기면 그냥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정윤호' 이름을 듣자마자 심장이 멈춰버리는 것만 같았다. 여전히 강여상은 눈치를 살폈고 정우영은 아~ 역시 좀 그렇지? 걘 버려 걍. 형 우리 갈게- 하며 상황을 무마시켰다. 박성화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 쟤네한테까지 신경 안 쓰이게 하려고 했는데... 강여상은 곧바로 정윤호에게 달려가 상황을 얘기했다. 야윤호야너랑성화형이랑요새뭔가분위기가안좋은것같길래내가형한테가서,
"야 미친 숨 쉬면서 말해. 그러다가 숨넘어가겠어."
"하... 그래, 암튼 너 이름 그냥 꺼냈는데 너 이름 나오자마자 얘기 안 하는 게 좋겠다고... 그러더라."
"아..."
"싸운 거야?"
"......비슷해."
"아, 요새 둘이 좀 분위기 안 좋아 보이긴 하더라. 암튼 힘내고. 형이 널 그렇게 아끼는데 바로 확 틀어질 사람은 아니잖아."
"어. 그건 맞음. 암튼 형이 그렇게 화 나 있는 거면 정윤호 네가 먼저 잘못한 거야. 미친아, 사고 치지 말고 다녀."
"우영아 미안한데 네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다."
"이 미친... 강여상 죽을래??"
"하하- 아니."
정윤호는 이제 본인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박성화와 얘기는 해 보고 싶었다. 분명 오해가 있는 것 같았다. 그 오해를 최대한 빨리 풀고 싶었지만, 박성화는 그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박성화는 정윤호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그런 박성화의 태도에 정윤호는 약간의 서운함을 느꼈지만, 그저 정윤호는... 박성화가 너무 보고 싶었다. 정윤호는 10시에 학원이 끝나자마자 박성화의 집 앞 놀이터로 뛰어갔다. 10시 15분. 다행히 박성화가 집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오후 10:16 1 [나 지금 형 집 아파트 놀이터예요]
오후 10:16 1 [나랑 얘기 좀 해줘요]
오후 10:18 1 [나 좀 만나줘]
학교에서 박성화네 집까지 버스로 10분이 걸렸다. 평소처럼 버스를 타고 집에 오는 거였으면 10시 30분엔 놀이터까지 도착했을 것이다. 하지만 11시가 되어도 박성화는 나타나지 않았다. 정윤호는 애가 탔다. 혹시 오늘 야자 안 했나? 집에 들어갔나? 혹시나 집에 오다가 다쳐서 늦는 거라면? 근데... 내가 이런 걱정을 할 자격이 있을까. 정윤호는 놀이터 중앙에 있는 작은 미끄럼틀 끝에 앉아 허공만 바라볼 뿐이었다. 12시 30분이 돼서야 가방을 무겁게 멘 박성화가 정윤호의 시선에 가득 들어찼다. 정윤호는 박성화에게 달려갔다. 형, 형! 집에 왜 이렇게 늦게 들어와요. 박성화는 정윤호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무슨 일이야, 어서 집에 가. 박성화는 저만치 아래의 바닥을 보며 얘기했다. 나, 나 형이랑 얘기하고 싶어, 얘기를 좀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정윤호는 박성화의 손을 잡으며 간절히 얘기했다. 하지만 박성화는 정윤호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여전히 시선은 아래를 향한 채로. 나 너랑 할 얘기 없는 것 같다. 어서 집에 가. 늦었어. 정윤호는 공동현관으로 들어가는 박성화의 모습을 쓸쓸히 바라볼 수만 있었다. 카톡 창을 열어보니 아직까지 1이 사라져있지 않았다.
정윤호는 성격이 좀 끈질겼다. 하나에 빠져들게 되면 계속 파고들었다. 그리고 안 되는 게 있으면 최대한이라도, 정말로 안 되는 거라면 비슷하게라도 되게 했다. 공부에 대한 정윤호의 근성이 사랑에게도 도움이 되는 날이 온 것 같다. 정윤호는 그날 이후로 계속 날마다 박성화의 집 앞 놀이터 미끄럼틀 끝에 앉아있었다. 상대방이 읽지 않는 카톡도 계속 보냈다. [나 형 보고 싶어 마주 보고 얘기하자] [나 오늘도 놀이터에 있어요] [형 언제 와요?] 사실상 독백이었지만 혹시라도 폰 잠금화면에 본인의 카톡이 뜨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면서 보냈다. 박성화가 12시에 들어오든 새벽 2시에 들어오든 정윤호는 계속해서 박성화를 찾아갔다. 그럴 때마다 박성화는 정윤호를 무시했다. 하지만 늦은 시간이니까 얼른 집에 들어가라는 정윤호를 향한 말에는 저도 모르게 따뜻함이 묻어났다. 집 앞까지 찾아와서 시간이 몇 시가 됐든 자신이 집에 도착할 때까지 가만히 아무 말 없이 항상 똑같은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는 정윤호를 무시하는 일은 정말로 박성화에게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박성화는 정말로 울면서 정윤호에게 뛰어가 물어보고 싶었다. 왜 자꾸 늦은 시간까지 나 기다리냐고. 너 정말 나 좋아하는 거냐고.
정윤호는 거의 2주째 놀이터에서 박성화를 기다렸다. 이날따라 박성화는 야자를 하기 싫었다. 그래서 수학 학원 보충이 있다는 핑계로 야자를 째고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잠깐 단어를 외우다가 국어 모의고사를 풀고 있었는데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지나고 밤 10시가 되자마자 거짓말처럼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헐... 봄비네... 이정도면 벚꽃 다 떨어지겠는데? 하며 다시 비문학 지문을 풀기 시작했다. 11시가 조금 넘어 박성화는 잠시 일어나서 기지개를 켰다. 자연스럽게 폰을 들어 오늘도 정윤호에게 카톡이 온 게 있나 싶어 확인했다. 이상하게도 오늘은 정윤호에게서 카톡이 오지 않았다. 그래, 비가 오는데 여기까지 와서 기다리는 게 이상하지... 하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소리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창문을 조금 열어 밖을 확인해보려던 박성화는 틈 사이로 비만 조금 맞고 아무런 것도 얻지 못했다. 박성화는 이유 모를 불안감이 들어 큰 우산을 하나 챙겨 1층으로 내려갔다. 공동 현관을 나서서 놀이터로 들어서자마자 시야가 정윤호로 가득 찼다. 똑같은 장소에서 비를 맞고 있어 흠뻑 젖어버린 정윤호. 박성화는 우산도 펼치지 못하고 빗속으로 달려들었다.
"야... 너 지금 뭐 해?"
"어, 형..."
"너 지금 비 계속 맞아가면서 나 기다린 거야?"
"아... 네..."
"비 피할 수 있는 곳 많은데 왜 계속 여기에만 있어...?"
"나 다른 곳에 있으면... 형이 못 찾을까봐..."
"너 진짜 미쳤어? 바보야?"
"..."
"...카톡 계속 보내더니 왜 오늘은 안 보냈어?"
"아... 폰 배터리가 다 나가서..."
박성화가 한숨을 내쉬는 사이, 정윤호의 시야에 박성화의 손에 꼭 쥐어진 우산이 보였다.
"형은 우산도 있으면서 왜 안 써요, 형 감기 걸릴라. 얼른 써요."
본인은 30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빗속에서 흠뻑 젖었으면서 고작 1분 비를 맞은 자신을 걱정하는 정윤호가 미련하다고 박성화는 생각했다. 그 와중에 정윤호는 박성화의 손에 들린 우산을 펼쳐 박성화에게만 씌워줬다. 형 몸살감기 걸리면 심하게 오래가잖아.
넌... 이와중에도 왜 내 걱정을 하는 거야.
"... 우산 같이 써."
박성화는 정윤호를 끌어당겨 둘 사이를 가깝게 만들었다. 우산 하나에 두 명이 들어오고도 공간이 조금 남을 정도로 가까웠다. 정윤호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박성화는 정윤호의 가슴팍에 손을 대 정윤호의 심장박동을 느꼈다. 아, 형.. 형. 정윤호는 당황한 듯 안절부절 못했지만 떨리는 심장을 가라앉게 할 순 없었다. ...윤호야, 너 지금 심장 되게 빨리 뛰어. 정윤호가 박성화의 손을 겹쳐 잡으며 말했다.
"... 형 좋아하니까요."
"정말이야?"
"네임때문이 아니라, 난 형을 엄청 좋아해서..."
"근데 너 처음엔... 분명 아니라고..."
"그땐 자각하지 못했어요. 내가 형을 좋아한다는 걸... 형한테 상처를 주고 나서야 알았어요. 미안해요... 이제와서..."
박성화는 고개를 들어 정윤호의 눈을 바라보았다. 정윤호는 박성화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정윤호의 눈가는 붉어져 있었고 서서히 눈물이 고였다.
"형이 별이면... 난 우주가 될게요. 우주가 돼서 형을 반짝이게 해줄게요. 우주에서 별이 제일 반짝이는 것처럼, 형이 제 옆에 있을 때 가장… 가장 빛나게 해줄게요, 제가. 그러니까... 절 다시 좋아해 줄 수..."
"윤호야."
"어, 네...?"
"난 너 안 좋아한 적 없어."
정윤호는 그 말을 듣자마자 일순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았다. 지금도 좋아해. 박성화가 뒤에 덧붙인 말도 희미하게 들릴 뿐이었다. 우산을 건드리던 빗소리도, 요동을 치던 자신의 심장도, 자신을 애틋하게 바라보던 박성화도, 이 상황을 이루고 있는 모든 요소들이 멈춘 것 같았다. 박성화가 정윤호의 손을 깍지 끼며 잡아 오자 정윤호는 그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아주 잠깐 숨을 헐떡이는 소리를 낸 정윤호는 박성화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갔다. 이미 더 다가갈 수 없을 정도로 가까웠던 둘 사이이지만 정윤호는 박성화에게 어떻게든 더 다가가 가까워지고 싶었다. 정윤호는 박성화를 바라보고 눈동자를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의지할 수 있는 빛은 놀이터 바로 옆 등불뿐이었지만 본인의 바로 앞에 있는 박성화의 시야에 자신이 가득 차 있을 거란 생각에 정윤호는 박성화의 어깨에 자신의 머리를 올려 품 속에 파고들었다. 박성화는 정윤호의 비에 홀딱 젖어버린 뒷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축축이 젖어가는 자신의 후드티는 아무렴 괜찮았다. 박성화의 따스한 손길에 정윤호는 다시 한번 이 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아니, 그냥 이 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윤호가 그 상태로 뭐라고 웅얼거렸다. 박성화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터라 정확하게 들리진 않았지만, 자신을 부르는 말과 '아직도' 라는 단어를 들은 박성화는 대충 예상했다. 박성화는 두 손으로 정윤호의 두 볼을 감싸 어깨에서 얼굴을 떼고 두 눈을 바라봤다. 잘 못 들었어. 다시 말해줘, 윤호야.
"성화 형... 그러면, 아직도 저 좋아해요?"
정윤호의 단어 하나하나에 울음이 섞여 들어갔다.
"응, 좋아해."
"...... 저두 좋아해요... 그것도 엄청... 엄청 좋아해요, 형..."
정윤호의 입꼬리와 눈꼬리가 서서히 내려가면서 결국 응어리진 울음이 터져 나왔다. 한 손으론 우산을 잡고 있는 터라 한 손으로만 눈물을 훔치느라 손이 바빴다. 박성화는 그런 정윤호를 보고 살풋 웃음을 지으며 정윤호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눈물을 닦는 정윤호의 손목에 보이는 '박성화' 라고 적힌 네임이 이 상황을 믿지 못하는 박성화에게 꿈이 아님을 확신시켜주었다. 내가 너 좋아한다는데 왜 울어..., 슬픈 일 아니잖아, 응? 정윤호는 눈물을 삼키다가 눈썹을 축 처지게 한 채로 박성화에게 물었다. 박성화는 정윤호의 말을 듣고 소리 내어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나 형 지금 안아도 돼요...? 박성화는 대답 대신에 정윤호를 있는 힘껏 안아주었다.
다음 날, 정윤호는 감기에 걸린 채로 학교에 왔다. 머리가 띵하게 아프고 기침을 하는 채로 싱글벙글 웃고 있자 옆에서 송민기가 미쳤냐고 한 소리 했다. 2교시 쉬는 시간에 박성화가 숨을 헐떡이며 정윤호의 반에 찾아왔다. 정윤호는 박성화의 담요를 덮은 채로 엎드려있다가 박성화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몸을 일으켰다. 박성화는 교실 맨 끝자리에 있는 정윤호에게로 달려가 안부를 살폈다. 정윤호는 앉은 채로, 서 있는 박성화의 허리를 끌어안아 박성화의 품에 파고들었다. 우응... 성화형... 박성화가 얼굴을 붉히고 정윤호를 밀어내려고 할수록 정윤호는 박성화의 품에 더 파고들었다. 박성화는 포기하고 정윤호의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사이로 느끼며 물었다. 윤호야, 진짜 괜찮은 거 맞지? 정윤호는 파고들었던 얼굴을 다시 들어 박성화를 바라보고 눈이 휘어지도록 사르르 웃었다.
교실에 다시 돌아온 박성화는 자신을 껴안아 오는 정윤호를 잊지 못해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김홍중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좋냐? 좋냐고."
"웅."
"고삼이 감~히 연~애를 해?"
"죽을래?"
시비를 거는 김홍중을 무시하고 박성화는 창가 자리에 앉아 책상에 샤프로 '정윤호' 이름을 끄적였다. 좋아하는 이의 이름이 자신의 몸에 적혀있다는 걸 확신한 순간, 이제 헷갈릴 이유도, 망설일 이유도 없었다. 서로가 서로의 행복을 책임지는 건 이제 일상이 되고 그 일상이 모여 영원이 된다. 이름이 운명에게 부여되었으니 이제 정윤호와 박성화는 동일성을 갖게 되고 서로의 정체성이 되어간다. 박성화가 있음으로써 정윤호는 존재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동일하다. 창문으로 조금씩 들어오는 살랑이는 봄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정윤호를 떠올렸다. 따스한 바람처럼 나에게 설렘을 주는 아이. 다시 한번 운명이 있음을 확신시켜주었고 그런 나의 운명을 공히 바칠 수 있을 것 같은 아이. 박성화의 모든 행복의 끝은 정윤호일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