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lleyverse

홍섷/웡섷

by. 파토

WARNING

사망 소재 주의. 대형 규모의 참사 트리거를 유발할 수 있습니다.

*

-과거의 이야기, 하나

"좋아해요 선배."

예상치 못한 고백에 성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앞에 선 우영을 바라봤다. 꿈벅꿈벅 몇번이나 눈을 깜박였지만 고백하는 이 특유의 수줍은 붉은기는 짙은 피부색 아래 가려졌는지 우영의 낯빛은 퍽 당당했다.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입술을 늘여 미소짓는 우영을 향해 성화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미안해. 나 지금 만나는 사람이 있어."

"알아요. 홍중선배잖아요."

그걸 어떻게 알았어? 놀란 성화의 질문쯤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여 흘려넘긴 우영이 성화의 코앞에 척 검지를 들이댔다. 우영의 기에 눌린 성화는 후배에게 삿대질을 당해도 잠자코 그가 할 말을 기다렸다.

"아무튼 제가 번호표 뽑은거예요. 그 선배랑 헤어지면 바로 저한테로 환승해요."

"뭐어, 번호표? 환승?"

"기다리고 있을거라고요!"

그렇게 말하며 우영은 자리를 떴다. 혼자 남겨진 성화는 얼빠진 채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쟤는 뭘 믿고 저렇게 당당한거람?

-과거의 이야기, 둘

춤을 추고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걸 좋아하는 성화는 아이돌 지망생 홍중과 닮은 점이 많았다. 처음엔 성화 스스로도 동경이라고만 생각했던 감정이었지만 그것에 애정의 빛깔이 번지는 건 금방이었다.

저를 바라보는 시선을 알아채고 표정이 묘해지던 그날의 홍중을 성화는 아직도 기억했다. 이후 줄곧 그 묘한 얼굴로 저를 지켜보던 홍중에게 먼저 고백하지 못했던 것은 성화가 두고두고 후회하는 것 중 하나이기도 했다.

홍중이 그를 아끼는 것 못지않게 성화도 홍중을 아끼고 사랑했지만, 연습생에게까지 연애 금지 조항이 걸려있는 소속사에 오디션을 보러 간다는 홍중 앞에서 성화는 진심어린 응원을 건네주지 못했다.

"사랑해 홍중아."

홍중을 꼭 껴안은 채 그에게 부담만을 안겨줄 제 이기적인 고백만 남겼을 뿐이다.

-그리고 현재

홍중에게 보여주고자 준비했던 무대였다. 할 줄 아는 거라곤 춤밖에 없지만 그런 저도 너와 같은 꿈을 꾸어도 되는건지. 성화는 제 솔로무대를 통해 홍중에게 물음과 동시에 인정받고 싶었다.

체육관 무대에 홀로 선 성화가 그 너머 빼곡하게 들어찬 관객들을 훑어보며 숨을 고른다. 벅찬 함성과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무대. 하지만 이곳에 홍중이, 그만이 없다.

지금쯤 이름표를 단 채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까, 잘 해냈을까, 제가 했던 말 때문에 오디션을 망치진 않았을까, 무대가 시작되고 춤을 추는 와중에도 성화는 홍중의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다.

-기차가 달린다.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가는 성화의 무대와 함께 음악소리가 커지고 스피커가 눈에 보일 만큼 진동한다. 수백 수천번을 연습한 동작들은 성화가 의식하지 않아도 제알아서 뻗어나왔다. 무대에 한껏 몰입한 성화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제동기능을 상실한 기차가 선로를 향해 매섭게 달려온다.

그래서 성화는 무언가 큰 소리가 나도 동요하지 않고 퍼포먼스를 이어나갔던 것 같다. 연출되지 않은 붕괴음이 점점 커지다 결국에 하나의 묵직한 파편을 떨어뜨렸을 때. 그 바로 아래에서 성화는 여전히 춤추고 있었다.

-제어해줄 이 없는 기차는 그대로 선로 위의 사람들을 치었다.

'학예회 도중 벌어진 붕괴사고... 부실공사 원인'

'관련자 전원 사망'

'생존자는 행사에 불참한 학생 1명뿐'

무슨 정신으로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오디션은 어떻게 됐는지, 홍중에겐 알 의지도 필요도 없었다. 제 방에 들어와 방문을 잠근 홍중은 분노를 이기지 못해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옷장에 차곡차곡 쌓아둔 옷들을 와르르 쏟아버렸다.

헉, 헉, 콜록. 흩날리는 먼지 속에서 작게 기침한 홍중은 옷장 맨 구석 소중하게 보관해놓았던 골동품을 조심스럽게 꺼내들었다. 먼지 하나 쌓이지 않아 깨끗한 모래시계는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홍중에게 맡긴 것이었다. 긴장했는지 홍중은 꼴딱 마른침을 삼켰다.

살면서 단 한번,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그 기회는 지금 써야 마땅했다.

"성화야, 내가 갈게."

Trolley Dilemma + Universe = ?

 

Trolleyverse

w. 파토

 

 

*

"아으으... 머리야."

언제 잠에 들었는지도 모르게 의식이 끊겨있다 부스스 일어난 우영은 찡그려 뜬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온통 뿌옇고 하얀 시야가 이상해 눈을 비비던 우영은 이윽고 자신이 정말로 온통 하얀 세상에 떨어졌음을 알게 된다.

"뭐야. 거기 누구 없어요?!"

크게 소리쳤으나 메아리조차 돌아오지 않는다. 우영의 본능이 이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경고했다. 끝없이 펼쳐진 여백 속에서 우영은 털썩 주저앉았다. 이 무슨, 이렇게나 비현실적인 일이. 아직도 욱신대는 뒤통수를 한손으로 짚은 채 우영은 멍하게 입을 벌렸다. 그러고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뚜벅, 작지만 선명한 구두소리가 우영의 귓바퀴를 쫑긋 움직이게 했다. 본능적으로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우영은 저 멀리서 다가오는 검은 인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누구든 나타나주길 바랐던 우영이었지만, 검은 인영을 마주한 지금의 우영은 뱀을 마주한 개구리마냥 얼어붙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바보같이 벌어져 있던 입만 조용히 다물려 마른침을 삼킬 뿐이었다.

뚜벅, 뚜벅. 느리게. 그러나 꾸준히 구둣발이 다가온다. 우영의 시야 속에서 그의 모습이 점점 커지고 선명해진다. 끝없는 여백 속에서 저 혼자 모든 어둠을 집어삼킨 듯 반사광조차 없는 검은 수트, 페도라, 마스크, 그리고 그 사이로 보이는 검게 침잠한 눈동자.

"홍중선배?"

"..."

타고나길 사람 기억하는 일에 있어 귀신같은 우영이 짐작가는 이름을 불렀다. 조용히 깜박이는 두 눈만 보이는 차림새였지만 저 눈은 분명히 홍중이었다. 성화의 곁에서 알게 모르게 은근히 휘어지던 저 눈. 그래, 그 박성화 옆의 김홍중.

"그 꼴은 뭐예요? 오디션 보러 간다더니. 거기서 바로 데뷔하자고 컨셉 잡아주기라도 했어요?"

"떠올려봐."

"네? 뭐를요?"

"네가 뭘 하고 있었는지."

홍중의 목소리에 우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째 기억을 더듬을수록 슬슬 잊을만 했던 뒤통수의 통증이 심해졌다. 뭐였더라. 내가 뭘 하고 있었지? 아 머리 아파. 나 뭐에 맞기라도 했나?

콰직-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태어나 처음 듣는 불쾌한 파열음이 우영의 머릿속을 다시한번 파고들었다. 마냥 희던 시야가 핏빛으로 물들고, 이윽고 검게 암전된다. 소리없이 숨을 들이킨 우영이 당장에라도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은 제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렴, 제 머리가 부서지는 소리는 살면서 단 한번만 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너는 죽었어."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가 위에서부터 내려와 우영을 무겁게 짓눌렀다. 죽음의 무게였다.

우영을 데리러 온 검은 차림의 저승사자는 홍중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제일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로 찾아온다더니... 순 뻥이었어."

"누가?"

"저승사자 말이에요. 저한테 왜 선배가 찾아와요? 제가 선배를 요만큼이라도 사랑했으면 몰라."

"미워하면 미워했겠지."

"쳇."

"질투했을테고."

이거 김홍중 맞네. 우영은 이때 확신했다. 앞의 사람 불쾌할 정도로 사람 속 훤히 꿰뚫어보는 것은 홍중의 특기이자 단점이었으니. 성화선배도 참. 대체 이 양반 어디가 좋다고 그렇게-

헐. 우영은 한 가지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퍼뜩 고개를 쳐든 우영이 홍중에게 물었다.

"성화선배. 선배는 어떻게 됐어요?"

그리고 잠자코 저만을 바라보는 홍중의 무반응에서 우영은 스스로 정답을 도출해낼 수 있었다.

우영이 죽던 그 순간은 성화의 무대가 한창 이어지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우영은 제가 죽기 직전 성화가 추락한 조명에 깔려 진득한 피웅덩이를 남기는 모습을 봤다.

"씨발, 씨발! 아아악!!"

"이제와서 할 수 있는 건 없어."

"알아요! 하, 씨... 아는데!"

"딱 한 가지를 제외하면."

"하아. 네?"

분명히 빈손이었는데. 홍중은 어디서 꺼내왔을지 모를 금색 모래시계를 우영에게로 내밀었다. 유리관 바닥부터 말끔하게 쌓여있는 모래는 예쁜 하얀색이었다. 족히 30분짜리는 되겠다. 크기만큼이나 묵직한 모래시계를 받아든 우영이 이해가 덜 된 얼굴로 홍중을 바라봤다.

"시간을 돌리고 싶어?"

"다, 당연하죠! 조금만이라도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네가 죽은 시간으로부터 30분 전으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할 거야?"

"바로 무대 뒤로 들어가서 성화선배를 끌고 밖으로 나갈 거예요."

"그러면 나머지 천여명은 똑같이 죽게 될 거야."

한명이 한명 구했으면 대충 1인분 한 거 아닌가. 내가 선생님도 아니고, 축제가 한창일 때 어떻게 학생들을 대피시킬 수 있겠어? 내게 주어진 기회니까 내 마음대로 쓰는 거지.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반박의 문장은 한가득이었으나 어째서인지 우영은 한 마디도 밖으로 꺼내질 못했다. 살면서 딱히 체감하지 못했던 양심이 우영의 내면을 콕 콕 찔렀다.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비죽이는 우영을 향해 홍중이 입을 열었다.

"우영아. 만약에 말이지, 한 명의 희생으로 그곳의 모두를 구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래?"

"어... 사람이 천 명이 넘는데, 한 명이 희생해야겠죠...?"

"그 한 명이 너라면?"

"저, 저라고요? 음. 어어..."

"분명히 고민될거야."

우영은 홍중이 이렇게 잔혹한 예시를 들고, 굳이 제게서 대답을 쥐어짜내는 저의를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눈까지 질끈 감아가며 고민하던 우영이 문득 고개를 쳐들고 볼멘소리로 따졌다.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어차피 일어날 일도 아니면서!"

"대답해."

"힉,"

차갑고 날선 홍중의 태도에 가오에 죽고사는 정우영 나 쫄았어요 광고하는 소리까지 내버렸지만 여전히 저를 노려보는 홍중의 기에 눌려 억지로 머리를 굴렸다. 겨우 대답해냈지만 솔직히 정말 그럴 수 있을지 자신은 없었다.

"제가 희생할게요. 어차피 한 번 죽은 몸인데."

"그래. 멋지네."

"...그게 다예요?"

"아니. 내가 결국 묻고 싶었던 건 이거야. 만약에-"

성화 한 명만 희생해서 모두가 살 수 있다면. 너는 성화가 죽도록 관여하고 방관할 수 있어?

트롤리 딜레마. 우영은 학교 다목적실에서 들었던 특별 강연을 떠올렸다. 둘 중 하나의 선로를 반드시 지나야 하는 기차와 두 선로에 묶인 각각의 사람들. 그리고 둘 중 어느 선로로 기차가 지나갈지 결정할 수 있는 당신.

상상만 해도 머리 빠개질것만 같은 밸런스게임에 지난날의 우영은 일찍이 생각하기를 포기했었다. 그런데 이걸 지금 하라고? 그걸 내 목숨도 아닌 박성화 목숨을 걸고서?

"성화를 죽인 대형 조명은 관리가 미비해서, 언제든 떨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어. 그래서 체육관이 붕괴될 때 가장 먼저 떨어졌지. 지금 네가 겪은 과거에서는 유의미한 시간차가 없었지만,"

"그런데요?"

"먼저 그 조명을 떨어뜨려 성화를 죽인다면 체육관이 붕괴하기 전에 빠르게 모든 인원을 대피시킬 수 있어."

"네에? 아니, 꼭 성화선배가 죽어야만 해요? 그냥 무대 바닥에 떨어져도 충분히 위험한 사고고. 사람들이 대피할 수 있잖아요."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100퍼센트는 아냐. 너에게 주어진 기회이니 네 의지로 도박을 하겠다면 말리지는 않을게. 다만 내가 아는 100퍼센트의 미래는 성화를 죽여야 나머지 모두가 산다는 거야."

 

"에? 아니, 아 진짜! 와, 뭐 이딴 게 다 있어?"

"그러게..."

성질내는 우영에게 작게 동조하며 빙글 돌아선 홍중의 표정을 우영은 볼 수 없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내딛는 발걸음에서, 과장되게 건들대는 그의 뒷모습에서 비어져 나오는 감정을 느꼈다. 그걸 뭐라고 부르더라. 우영이 가늘게 뜬 눈을 깜박였다.

후회라기엔 조금 더 심오하고. 한탄이라기엔 미련이 남은 그것은,

...회한?

마침내 결심한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우영을 향해 홍중이 고개를 돌렸다. 홍중의 눈이 조금 커졌다. 왜 저렇게 화가 났는지, 짐승이 이빨을 드러내 위협하듯 거진 그르렁대고 있는 우영이 특유의 심통난 투로 말했다.

"선배 사실 악마죠. 그래, 그럴 수밖에 없어."

"악마?"

"이딴 거래를 제안하는 게 악마 아니면 뭔데요? 아무리 성화선배가 물러 터졌대도 지 남친 목숨을 저울에 다는 악마새끼를 몰라뵈고 사귈 리가 없어."

저도 모르게 이마와 목에 핏대까지 세우는 우영을 향해 홍중은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 모습이 또 얄미워 혀로 볼사탕을 만드는 우영이었지만, 경계를 거두지 않은 태세 그대로 우영은 눈썹을 좁혔다. 마음을 정한 그의 습관이었다.

"됐어요. 내 앞에 있는 게 김홍중이든 악마든 상관없다고요. 나는 과거로 갈 거고, 미래를 바꿀 테야."

"그럼 그 모래시계를 뒤집어."

"그래요. 잘 있어요 이 악마새끼야."

그래서 눈앞에 서있는 게 홍중이라는 건지 악마라는 건지. 괴상한 반존대로 저주를 퍼붓고 사라진 우영의 자리엔 좁아진 유리관의 틈으로 막 모래를 떨구고 있는 모래시계만이 남았다.

모래시계를 집어든 홍중은 아무도 들을 이 없는 공간에서 비로소 속을 터놓을 수 있었다.

"김홍중이든 악마든 상관없다는 말...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네."

*

"야, 정우영! 너 자냐?"

"...으엉?"

"지금 가장 신날 땐데 졸면 어떡해! 엉아가 공연 즐길 동안 너는 영상이라도 찍어 놔라. 알았지?"

재촉하듯 제 뺨을 콕콕 찌르는 카메라의 모퉁이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안개 속을 헤치듯 희뿌옇게 뭉그러지던 감각도, 오싹할 지경이던 적막도 없다. 그저 머릿속까지 쿵쿵 울리는 음악소리와 환호성, 제 옆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마냥 해맑게 웃고 있는 친구가 있을 뿐이었다.

"진짜. 진짜 돌아왔어!"

"돌아와? 뭐라는거야 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른 우영이 제 주머니를 더듬어 핸드폰 화면을 켰다. 5시 36분. 성화의 무대는 6시에 시작되니, 정확히 30분 전으로 돌아온 셈이다.

그걸 확인하고 나니 악마에게 영혼을 판 것이래도 아무렴 상관없다고 우영은 생각했다. 실제로 저는 이승으로. 그것도 죽기 30분 전으로 돌아왔지 않은가. 지금의 감격적인 상황이 도저히 믿겨지지 않아 우영은 화면에 뜬 시간과 공연 예정표를 번갈아보기 바빴다.

"어? 야, 야 산아. 잠깐만 여기 봐봐."

"아 뭔데? 지금 한창 중요할 때인데."

"이거. 다음 솔로 공연에 왜 홍중선배 이름이 있어?"

"왜냐니. 그 선배가 댄스 동아리 부장이니까 그렇지."

"뭐?"

"왜?"

그게 뭐가 문제냐는 듯 멀뚱이는 산의 어깨라도 쥐어 짤짤 흔들며 우영은 다시한번 묻고싶었다.

그러니까 왜, 딜레당트 박성화는 어디다 두고 방송부 김홍중이 댄스부 부장이 돼 있는 건데?

*

질끈 눈을 감고 모래시계를 뒤집은 홍중을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맞이했다. 홍중이 서있는 바닥만이 존재하는 새하얀 무(無)의 공간에서 유일하게 나타난 것은 모래시계를 건네준 홍중의 할아버지. 절박한 눈을 한 홍중에게 할아버지는 물었다.

"내 생각보다 많이 어린 모습으로 찾아왔구나, 홍중아. 너는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을텐데. 지금이 단 한번의 기회를 써야 할 때니?"

"네. 반드시 써야 해요. 제가 없는 사이에 학교에서 사고가 났대요. 친구들도, 선생님도. 모두... 제가 구해야 해요! 저는 도저히 혼자서 살아갈 자신이 없단 말이에요."

"네 뜻이 그렇다면 말리지 않으마. 마음을 정했다면 이 모래시계를 돌리렴. 그럼 과거로 돌아갈 게다."

"어... 얼마나 과거로 가게 되는거죠?"

깎아지른 절벽 끝에서 두려워 떨고 있는 제 아기새에게 노인은 그저 미소지어보일 뿐이었다. 하늘을 나는 법은 스스로 깨달아야 함을 알기에. 그는 파도를 코앞에 둔 소년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리웠던 목소리가 다시금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홍중은 눈을 감았다.

글쎄, 아마도...

너를 필요로 하는 모든 곳으로.

*

신입생 여러분 환영합니다- 촌스러운 글씨체의 현수막 아래에서 홍중은 눈을 떴다. 입고있는 교복은 기억보다 빳빳해 새것 같았고 손에 들린 핸드폰은 진작 바꿨던 예전 기종이었다. 1년 하고도 조금을 더 거슬러 온 홍중은 제 고등학교 입학식에 와 있었다.

기억하던 모습 그대로 축하해주는 엄마, 아빠. 이름이 뭐냐며 조심스레 인사를 건네는 낯익은 친구들. 그 틈에서 최대한 자연스럽고 조심스레 행동한 홍중은 어느새 짧은 입학식을 마치고 오전의 하교길에 올라 있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먼 과거로 온 거지. 이때부터 내가 준비해야할 뭔가가 있다는 걸까? 범생이마냥 가방끈을 양손에 틀어쥔 홍중은 고개를 푹 숙이고 제 신발코만 보며 걸었다. 워낙 깊은 생각에 빠진 탓에 제 어깨를 건드리는 가벼운 손길을 홍중은 알아채지 못했다.

"저기이..."

"으악!"

"아, 미안해. 놀래키려던 건 아니었는데."

안녕. 나 기억해? 깎은 지 얼마 안돼 동글동글 짧은 흑발을 한 성화가 살갑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 성화다. 방금까지 하고 있던 생각이 무색하게, 홍중은 눈썹을 늘어뜨려 속내를 흘리고 말았다.

"성화야..."

"와. 기억하는구나! 나 지금 명찰도 안 보일텐데. 앞에 잠깐 나와서 자기소개했던 거 기억하는 거야?"

"어? 아, 으응. 맞아."

홍중이-그가 시간여행자인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저를 기억한다는 사실에 순수하게 기뻐하며 제 교복셔츠 앞주머니를 살피는 성화 앞에서 홍중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특별히 티가 안 나게 대답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단 한번뿐인 타임슬립에서 치명적인 오류를 범할 뻔했다.

하지만. 하지만하지만 저 얼굴을 마주하고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겠어. 조금은 조심스럽고 수줍은 태도로 말을 잇는 성화에게 적당히 대꾸하며 간간이 시선을 맞추면서도 홍중은 자꾸만 마음이 요동쳤다. 아랫입술을 아프게 깨물어 정신을 붙들으려 해도 자꾸만 감정이 새어나왔다.

그도 그럴것이, 미래에서 온 홍중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견디다 못한 홍중이 두 손바닥을 모아 얼굴을 가렸다. 걱정스럽게 처진 눈썹으로 울망울망 저를 바라보는 성화의 시선이 홍중은 더욱 견디기 어려웠다.

"왜그래 홍중아, 어디 아파?"

"아니, 코가 간지러워서. 올해 봄은 일찍 오나봐."

저를 본 첫눈에 반했다던 성화의 고백은 한 치의 거짓 없는 진실이었다.

-

지난 2주간 고등학교 1학년 학교생활을 다시한번 보내며 홍중은 많은 것을 알아냈다. 첫 번째로, 원인이 과거에 있는 사건은 흐름대로 어떻게든 일어난다는 것.

원래 과거대로 홍중이 먼저 말을 걸지 않아도 그에게 반한 성화는 알아서 다가와 손을 내밀었고, 그 손에 이끌린 홍중은 별 노력 없이도 성화와 원만한 친구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그리고 부실공사가 원인이었다던 체육관 붕괴사건도... 언제가 되었든 어느 순간에는 일어날 게 분명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김홍중! 1학년 김홍중 선배 어디있어요?!"

"푸흡-"

"으악! 홍중아 괜찮아?"

이런 미친. 홍중은 아직 제가 여행하는 시간에 대해 한참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많은 것을 알아냈다는 말. 취소, 취소.

세월아 네월아 밥알을 세어가며 급식을 깨작이던 홍중은 저희 반 앞에까지 쳐들어온 우영의 목소리에 한 술 뜨던 된장국을 시원하게 뿜어버리고 말았다. 휴지를 뽑아 제 턱이며 손을 닦아주는 성화를 사이에 두고서 우영과 눈이 마주친 홍중은 씨익 웃는 그 얼굴에서 인생 최대의 공포를 느꼈다.

[시간여행자 홍중이 알아낸 것 첫 번째: 원인이 과거에 있는 사건은 흐름대로 어떻게든 일어난다.]

[두 번째: 시간을 거슬러온 특별한 여행자는 너 혼자가 아니다.]

"점심시간에 다른학교까지 와도 되는거야? 그것도 중학생이."

"지금 그딴 게 중요해요? 하하호호 학교놀이가 그렇게 즐거우면 원래 미래로 썩 꺼지시든가요."

"이게 선배한테 말하는 꼬라지가... 그리고 그 학교 다 무너졌거든?"

"알면 제 질문에나 대답하세요."

어린이 둘이 사이좋게 시소 타듯. 하지만 주고받는 눈빛은 전혀 그렇지 않은 홍중과 우영은 등받이 없는 기다란 벤치 하나에 가로로 다리 벌리고 앉아 눈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성화를 옆에 낀 저를 아니꼬와하는 마음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어도 겉으로는 깍듯하게 굴던 우영이 예상보다 더 싹바가지 없게 나와 홍중도 심기가 불편해 찌푸린 눈썹을 까닥이던 중이었다. 매섭게 눈매의 날을 세운 우영이 따지듯 물었다.

"박성화 사랑해요?"

"뭐?"

"대답해요. 박성화 사랑하냐고요."

단도직입적인 우영의 질문에 당황한 것도 잠시 홍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도대체 얼마나요?"

"만약 우리 학교가 물에 풍덩 빠진다면, 난 성화를 제일 먼저 구할거야."

"박성화 한명만 포기하면 남은 모두를 살릴 수 있다 해도 그럴 수 있어요?"

"...너 무슨 꿈 꿨니?"

앞선 홍중의 비유보다 곱절은 극단적으로 치닫는 우영의 가정을 들은 홍중이 우영을 향한 일말의 적대심마저 내려놓고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 하하. 고개를 숙여 정수리를 드러낸 우영이 어깨를 들썩이며, 하지만 한탄하듯 차게 웃었다.

"그래요. 아주 지독한 악몽이었죠. 그런데,"

"그런데?"

"이게 우리의 미래잖아요. 둘 중 하나를 죽여야만 한다고요."

"그게 무슨 소리야."

"에에?"

멀뚱하게 눈을 꿈벅이는 홍중을 향해 당신이야말로 도대체가 무슨 소리냐는 듯 우영이 눈깔은 희번덕하게 뜬 채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찔리는 것도 없는 김홍중 그 광기에 살짝 쫄았다. 특유의 정우영 억울할 때 나오는 목소리가 따발따발 홍중의 면전에 쏟아졌다.

"선배가 알려줘놓고 뭔 소리예요 지금? 나보고 박성화냐 그 나머지냐 선택하라는 듯이 압박했잖아요. 그래놓고서, 이렇게나 먼 과거로 보낸 이유는 또 뭐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널 과거로 보내? 내가 무슨 힘이 있다ㄱ..."

우영 못지 않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발하던 홍중이 짚이는 게 있는 듯 흠칫 말을 멈췄다. 홍중을 이 과거로 보내준 그의 할아버지 또한 생전에 특별할 것 없던 일반인이지 않은가.

잠깐의 침묵을 놓치지 않은 우영이 확신에 찬 눈을 번뜩였다. 더 발뺌 안할거면 이제 진짜 솔직히 말해요.

"선배는. 박성화에요 다른 나머지에요?"

"지금 방향키를 잡은 건 너일 거 아냐. 왜 내 의견을 묻는데?"

"대답해요!"

그전의 홍중에게 복수하듯 우영이 일갈했다. 우영을 향해 두 눈을 부릅떴지만 어째서인지 공포라는 감정은 느껴지지 않는 얼굴의 홍중은 잠시간의 침묵 후 입을 열었다.

"나는. 선로에 묶인 성화를 구할 거야."

"족히 천 명은 되는 사람들을 포기하겠다는 거예요?"

"아니."

그럼 뭐 어쩌겠다는건데. 머릿속의 생각을 표정 그대로 투명하게 내비치는 우영 앞에서 홍중은 미미하게 미소지어보였다. 홍중의 이어지는 문장을 이해한 우영의 눈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성화를 구하고. 내가 대신 선로에 들어갈거야."

"네?"

"그럼 네가 선택하기 한결 쉬워지겠지. 안그래?"

*

"홍중선배!"

"아, 마침 잘 왔어. 우영이 너가 얘 좀 데려가."

"홍중아 나는-"

"나 마지막으로 무대 점검 좀 하게. 응?"

체육관이 무너지기 30분 전. 이 상황에서 성화를 먼저 찾아가야 하나, 아니면 홍중을 먼저 찾아가야 하나 하는 우영의 고민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그 둘은 함께 있었다.

성화는 뭔가 홍중에게 더 하고싶은 말이 있는 눈치였으나 홍중은 연신 성화를 밀어내고 우영에게 떠넘기려 했다. 그를 받는 우영이 박성화를 다 주저할 정도로 살살 밀려나는 성화의 걸음마다 서글픔이 뚝 뚝 떨어졌다.

"그럼 진짜. 진짜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할게!"

"하아. 알겠어. 뭔데?"

대놓고 피곤한 기색을 드러내는 홍중 앞에서 입술을 오물대던 성화가 와락 홍중을 끌어안았다. 성화의 어깨 너머로 우영과 시선이 마주친 채 홍중은 당황한 눈을 깜박, 깜박. 너무 가까운 나머지 홍중은 성화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죄송해요 선배. 대신해서 소리없이 벙긋이는 우영의 도톰한 입술을 읽어냈다. 그리고 의문을 품을 새 없이 귓가를 간질이는 소리.

"사랑해 홍중아."

"뭐야아."

맥빠지는 웃음을 흘린 홍중이 성화의 등을 토닥이다 부드럽게 그를 떼어냈다. 성화도 더 이상 홍중에게 매달리지 않았다. 우영이 강하지 않은 손힘으로 성화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아무렇지 않게 웃어보이며 손을 흔드는 홍중을 뒤로하고 우영과 성화는 체육관을 빠져나왔다.

"안녕하세요오."

예약해둔 기사님께 예의바르게 인사하며 택시에 오른 우영이 탕 경쾌하게 차문을 닫았다. 그의 옆엔 이미 자리를 차지한 성화가 다소곳하게 앉아있었다. 성화는 이상하리만치 아무 말도 없었다.

아무리 축제날이라고 해도 냅다 학교 째고 도망가는건데. 왜 아무것도 안 묻지. 우영이 그런 궁금증을 품던 찰나였다.

"여기로 가 주세요, 기사님."

영화 추격씬 주인공마냥 ~최대한 여기서 멀리 가주세요~ 따위의 대사 한번쯤은 쳐보고 싶었는데. 라고 우영이 불만을 품을 시간도 촉박했다. 성화가 내민 핸드폰 화면 안에서 우영이 홍중이라는 이름을 읽어냈기 때문이다.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선배?"

"홍중이네 집."

"거긴 왜요?"

"가보면 너도 알 거야."

"???"

도통 뜻을 알 수 없다는 얼굴의 우영에게서 시선을 뗀 성화는 멍하니 창밖 풍경만 바라봤다. 계속해서 저를 쳐다보는 우영의 시선이 간지럽지도 않은지 고요하게 잠겨있는 성화의 표정은 창밖 풍경이 완전히 멈춰설 때까지 흔들림이 없었다.

집안에 계시던 홍중의 어머니께서 우영과 성화를 홍중의 방으로 안내해주셨다. 양말 신은 발바닥도 함부로 붙이길 주저하는 우영 앞에서 성화는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로 홍중의 서랍장을 아예 들어낸 뒤 내용물을 방바닥에 와르르 쏟아냈다.

"악, 선배!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우영의 말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홍중의 방을 뒤지던 성화는 옷장 구석에 자리를 차지한 이질적인 물건을 발견하고 그것을 꺼내들었다. 새하얀 모래를 담은 노란 금속. 시간을 거스르며 보았던 모래시계를 알아본 우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우영의 시야 안에 얼굴을 들이민 성화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거야?"

"뭐... 뭐가요? 하, 하."

"김홍중이 시간을 거스른 방법."

"..."

"나도 과거로 갈래. 이거 어떻게 써?"

"!"

이번에야말로 표정관리 대차게 실패한 우영이었다. 머릿속이 그때의 흰 여백처럼 새하얗게 증발해버린 우영이었지만 본능적 판단으로 몸을 날려 그대로 모래시계를 뒤집으려 드는 성화에게 달려들었다.

갑자기 달려든 우영 탓에 휘청이던 성화는 모래시계를 든 채 구겨진 이불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홍중의 침대에 주저앉았다. 그런 제 상체를 찍어누르며 거진 위로 올라타려 하는 우영에 성화는 여러 의미로 기겁했지만 이악물고 달려든 우영은 성화의 손안에서 모래시계를 빼앗고서 바로 물러났다.

"손 떼요. 성화선배 위해서 이러는 거니까. 네?"

"날 위한 거라고 말할 수 있어?"

"아, 당연하죠! 선배 구하겠다고 저나 그 양반이나-"

"이렇게 아픈데. 이게 어떻게 날 위한거야!"

왁 소리지르며 울음을 터뜨리는 성화 앞에서 우영이 괴롭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뜨거운 눈물방울로 점점이 젖어가는 성화의 교복바지를 잠시간 내려다보던 우영이 모래시계는 잠시 방구석으로 밀어놓고서 성화를 끌어안았다. 말없이 외간남자 품에 기대는 걸 보니 성화도 이런 것 분간할 정신 없이 고통스러운 것이 분명했다.

"그 나쁜놈, 잊어버려요 선배."

"흑. 김홍중 이 나쁜새끼..."

"제발. 선배 위해서라도. 응?"

억. 어억. 홍중을 대신해서 성화의 야무진 주먹을 맞는 우영은 참을성있게 성화가 울다 지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대충 진정되어 얌전히 코를 쿨쩍이는 성화 앞에 우영이 구부정하게 등을 굽히고 섰다.

"그렇게 과거로 가고 싶어요?"

"아무것도 안 건드릴게. 홍중이 한 번만 보고싶어. 이대로 헤어지긴 싫단말야..."

 

"하아."

한숨만 쉴 뿐 대답없이 성화를 제 무릎 사이에 끼워 옭아매고 있던 우영이 번뜩 눈빛을 바꿨다. 구석에서 모래시계를 가져온 우영이 무작정 뻗어지는 성화의 손을 잡아다 치워내고 조건을 걸었다.

"그럼 저랑 키스 한번만 해줘요."

"..."

"싫음 말고."

"참나..."

"?억-"

그대로 뒷목 휘어잡힌 우영은 최고 짜릿한 첫키스를 인생이란 역사에 새기게 되었다.

*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새하얀 여백. 그 한가운데서 눈을 뜬 자신. 천천히 되감아보는 흐릿한 기억과 핏빛으로 점철된 마지막 필름 한 장.

홍중은 이번에야말로 확신할 수 있었다. 나 죽었구나.

"계획대로 잘 된건데... 씁쓸한 건 어쩔 수 없네."

멋들어진 할아버지의 중절모와 양복 차림은 홍중에게로 옮겨와 있었다. 맞춤옷처럼 홍중의 몸에 착 달라붙는 복장은 그의 취향에 딱 맞춰진 새까맣고 은색 광택이 찰랑이는 수트와 페도라 차림이었다.

그리고 그런 홍중의 옆에 당연하다는 듯 놓여있는 모래시계. 작게 탄식한 홍중이 모래시계를 집어들었다. 홍중은 제가 죽어서 할아버지의 역할을 계승하게 되었음을 자연스럽게 추론할 수 있었다.

홍중의 손이 닿자 반응하는건지 모래시계가 약하게 진동했다. 그 진동을 가만히 느껴보던 홍중은 얼마가지 않아 제가 바라보는 방향과 이동하는 거리에 따라 진동의 세기가 변한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해 모래시계가 가장 강하게 반응하는 장소로 찾아왔다.

소리없이 작게 숨을 들이킨 홍중은 우뚝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성화야."

"안녕, 홍중아."

예쁜 손을 가볍게 살랑인 성화가 옅게 미소지었다. 순발력 좋고 머리회전 빨라 당황하는 일이 적은 홍중은 죽은 뒤에야 머리부터 온몸까지 얼어붙는듯한 막막함을 느꼈다. 성화야, 도대체 내가 너에게 무엇부터 말해야 하고. 감히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안심해. 난 네가 바꾼 역사를 또다시 뒤집으려 온 게 아니니까."

"...역시 다 알게 됐구나."

"오히려 한 바퀴 꼬인 고리의 끝을 다시 시작과 맺어주러 왔지."

벌 받는 아이처럼 성화 앞에서 푹 고개를 숙이고 있던 홍중이 힐긋 눈을 들어 성화를 봤다. 아이를 달래는 선생님처럼 성화는 다정하고 차분한 어조로 홍중에게 일러주었다.

"여기. 모든 과정과 결말의 우주가 겹쳐진 곳이지? 그렇다면 여기서 사고에 휘말려 죽은 우영이를 찾아줘. 그 우영이를 과거로 보내면 과거의 너에게 알아서 잘 전해줄거야. 너는 이미 예전에 만나본 그 녀석이니까, 알지?"

성화의 말에 홍중은 열일곱 먹은 제게 찾아와 성질을 냈던 시간여행자 우영을 떠올렸다.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들만 쏟아낸 녀석이었지만 어째서 그날의 제가 직감적으로 우영의 말을 이해했는지, 그리고 그 과거를 만들기 위해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 홍중은 알 수 있었다.

절대 만날 수 없다고만 생각했던 시작과 끝이 접합되며 무한을 그리는 뫼비우스의 띠를 만들었다. 이제서야 숲을 볼 수 있게 된 홍중은 이제 영원한 젊음으로 존재하게 될 자신 또한 그 숲속의 나무 하나였음을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이미 겪은 과거를 무로 돌리지 않으려면...

"응. 이해했어."

고개를 끄덕이는 홍중 앞에서 배시시 웃어보이는 성화의 얼굴이 조금씩 조금씩 울상으로 바뀌어갔다. 홍중이 다급하게 다가가 성화의 어깨를 감쌌지만, 성화의 눈물은 그치기는커녕 더 굵어지기만 했다.

"벌써 헤어지려니까 너무 아쉽다. 홍중이 너도 그렇지?"

"미안해. 이것밖에 해줄 수 없어서 너무 미안해. 성화야."

"미안해하지 마. 나도 결국엔 너에게 복수해버렸는걸."

"복수...?"

"넌 이미 당했겠지. 그러니 난 하러 갈 거야. 영원이 될지도 모르는 이곳에서 내 절반만큼이라도 아파하길 바라, 김홍중 이 나쁜 놈아."

복수를 담는 성화의 입이었지만 그곳에서 분노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다 못해 뺨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와중에도 말을 마친 성화는 억지로 웃어보였다. 그의 모습이 희미하게 흩어진다.

안돼, 가지 마! 홍중은 점점 흐려지는 성화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잠시 머뭇대었던 찰나의 차이로 둘은 닿지 못한 채 영영 이별하게 되었다. 모든 걸 잃은 이의 얼굴을 한 홍중이 끝내 성화에게 닿지 못한 손을 움켜쥐었다.

"마지막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러 갈거니까."

"사랑해 홍중아."

성화에겐 앞으로 펼쳐질 미래지만, 제게는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

그는 한번 더 속삭일 수 있겠지만 저는 두번다시 확인받을 수 없는 어린날의 풋사랑.

성화가 남기고 간 마지막 문장을 곱씹는 홍중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오열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