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V!

홍섷

by. 투티

WARNING

약간의 유혈 요소

최근 과학계에선 시간을 역행하는 유전자가 발견되며 큰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연구진은 해당 유전자가 양자역학의 일종으로, 시간의 흐름과 감각에 예외적인 반응을 보인다고 밝혔습니다...

타임머신과 뱀파이어가 있다고 생각하냐고 묻는다면, 대다수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뱀파이어 덕분에 타임머신이 움직인다면 믿겠는가. 역시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지 말라고 할 것이다.

 

VVV!

 

김홍중은 뱀파이어다. 이 대목에서 보통은, 진짜 이름이 율리우스 킴 에드워드 홍중 3세 쯤 될 거라고 짐작한다. 근데 김홍중은 그냥 김홍중이다. 그럼 마늘이랑 십자가를 싫어할 거라고 생각한다. 예상 밖이겠지만, 김홍중은 한국에서 삼백 년째 살고 있다. 심지어 귀에 십자가도 잘 하고 다닌다. 멋있잖아. 아, 병인박해 때는 안 꼽고 다녔다. 죽지는 않지만... 좀 그래서. 그렇다면 김홍중은 뱀파이어 호소인인가? 안타깝게도 이 세계관에서 뱀파이어는 햇빛을 싫어한다. 그렇다고 햇빛을 보면 죽는 것도 아니고, 인간이 햇빛에 타는 속도의 딱 백 배로 더 빨리 타들어 간다.

홍중은 이런 뱀파이어가 좋았다. 어차피 해 뜬 시간에 나와봤자 사람만 더럽게 많고. 어차피 오후 네 시에 일어나서 작업실에 처박혀 있다가 다음 날 새벽 네 시에 들어가는 삶을 사는 홍중에게는 최고의 종족이었다.

이런 홍중에게도 뱀파이어로 사는데 불편함이 딱 한 가지 있었다. 피를 구하기 힘들다는 거. 홍중이 뱀파이어가 아니었을 때에도 식욕이 강한 편이 아니었지만, 명색이 뱀파이어인데... 그래도 김홍중 체면에 피를 훔치기는 좀 그랬다. 그래서 한동안 피를 안 마신 적이 있다. 결국 석 달 넘어갈 때쯤 기절해서 병원에 실려 갔다. 아... 뱀파이어는 왜 안 죽나요. 홍중이 그날 선택한 자살 방법은 바로 모두에게 뱀파이어임을 알리고 돌 맞아 죽기였다. 그래서 의사한테 뱀파이어인데 피 안 먹어서 쓰러졌다고 했다. 그랬더니 대문자 INFP 인생 최초로 의사 양반과 친해졌다. 뭔 실험을 하고 싶다나. 대신 실험용 피 샘플을 주기적으로 주겠다고 했다. 시발... 그래도 감사해요. 불편함 해결! 그래서 지금 홍중의 집 냉장고를 열면 수십 개의 채혈 튜브가 있다. 그리고 냉장고 문을 닫으면...

"홍중아... 나 물어줘."

아... 뱀파이어로 살며 불편한 점이 한 가지 더 있다.

아무래도 동거인이 너무나 혈기 왕성한 인간인 건 문제가 있다. 당연히 뱀파이어도 삼대 욕구가 있으니. 수면욕, 식욕, 성욕. 아, 여기서 '문제'는 식욕이다. 앞서 말했듯 홍중은 식욕이 강한 편이 아니다. 근데 아무래도 3일째 공복인 사람 앞에서 걸어 다니는 된장찌개가 나를 먹어주세요, 하는 건 좀 문제지.

된장찌개는 박성화다. 닮았다는 말이 아니라, 근래 된장찌개 못 먹어 죽은 귀신이 씌었나 싶을 만큼 삼시세끼 된장찌개만 먹어서. 그리고 먹어달라는 말은-자꾸 자기 목 좀 물어 달랜다. 한 일 년 치 밥으로 먹으란다. 당연히 골때릴 노릇이었다. 성화야... 네 피로는 삼 개월 치도 안 되니까 제발.

이 동거의 시작 역시 기묘했다.

박성화는 원래 살던 집이 집주인 아들의 결혼 선물로 급매 되어서 쫓겨났다. 안타깝게도 그 얘기를 통보받은 날이 냉장고 바꾼 다음 날이었다. 몇 달만 더 있다 나가면 안 되냐고 물어봤지만... 급하게 잡힌 결혼이라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진짜 결혼을 해서 내쫓는 걸까 싶었지만, 행복해 보이시길래 입을 닫았다. 어차피 이사 가야 하긴 했어... 그렇게 부동산 앱을 48시간 내내 뒤져가며 나온 결론은, 사람 사는 집은 죄다 미친 가격이라는 거였다.

김홍중은 옆집 초등학생에게 뱀파이어인 걸 들켰다. 아니, 들키지는 않았는데.

 

"아저씨 혹시 뱀파이어예요? 왜 맨날 밤에만 다녀요?"

 

이번엔 꼭 햇빛 안 들고, 옆집이 없... 진 않더라도 혼자 사는 곳으로 간다. 근데 안타깝게도, 뭔가 마음에 드는 집이 있으면, 이웃에 꼭 신혼부부가 살았다. 그 말을 듣고 돌아선 게 여섯 번째였다. 도대체 이 미친 인간들은 결혼을 그렇게 많이 하는가. 그렇게 인류를 멸망시킬 뻔한 김홍중이 일곱 번째 집을 보러 갔을 때 얼떨결에 박성화를 만났다.

뭐 어차피 둘 다 1인실 비슷한 거 찾고 있는데 잘됐네. 같이 방 보죠. ... 그렇게 보여준 방 중 하나가 지금 집이다. 이쪽 분이 최대한 저렴한 쪽을 찾으신다고 하니... 여기는 셰어하우스로 쓰면 돼요. 사람들 나가면서 지금 두 방 다 공실이거든요. 가격에 눈을 반짝이는 박성화를 보니 누가 봐도 사회초년생 직장인이었다. 생활 패턴 안 겹칠 거 같고... 햇빛 안 들고. 애도 없고. 더 이상 집 알아보러 다니기도 귀찮았다. 그렇게 나란히 계약서를 썼다. 같은 주소, 같은 집, 다른 방.

김홍중은 네 시부터 네 시까지 작업실에 처박혀있는 뱀파이어였고, 박성화는 여섯 시에 출근해서 여섯 시에 퇴근했다. 진짜 생활패턴 안 맞네. 오히려 잘 됐다.

 

 

최고의 동거라고 생각했다.

초반 몇 주는 박성화가 친해지려고 했다. 또래처럼 보이는 잘생긴-성화에게는 매우 중요했다-남자애가 옆 방에서 혼자 산다니. 당연히 관심이 생기지. 물론 생활패턴이 안 겹친다는 게 김홍중에게는 다행이자 박성화에게는 불행이었다. 며칠 간격으로 포스트잇이랑 먹을걸 방문 앞에 뒀다. 안녕하세요. 성함이 뭐예요? 친해져요. 전 박성화고 스물 여덟에... 그렇게 포스트잇 공격이 계속될 쯤, 조금 일찍 퇴근한 박성화가 나가려던 김홍중과 딱 마주쳤다. 첫 번째. 김홍중은 옆집이랑 마주친 것에 트라우마가 있으며, 헐안녕하세요저희이사이후로거의처음뵙는거아닌가요말놓아주시면안돼요? 요즘많이바쁘신가봐요형이라고부를까요? 두 번째. 김홍중은 극성 I다. 대충 되는대로 그러세요 그럼을 시전한 홍중은 (형 소리는 정말 끔찍할만큼 듣고 싶지 않아서 동갑이라고 대충 둘러댔다) 도망치듯 방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그 후로 성화는 주기적으로 홍중에게 말을 걸었다. 질문은 출근하겠다, 잘 자라, 작업실 다녀왔냐. 이 세 가지의 연속이었고, 답은 언제나 문밖에서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그렇다 짧게 대답하는 게 대화 끝이었다. 저렇게까지 사람한테 선을 긋고 싶나… 그럴만한 일이 있었나. 박성화도 사람인지라 날이 갈수록 질문하는 날이 뜸해졌다. 김홍중에게는 행복이었다.

그런데 박성화가 퇴사를 했다.

세상에서 제일 말 많은 팀장과 영혼 없이 감자탕을 먹던 직장인에서, 그냥 실업자가 됐다. 이유는 간단했다. 돈을 줘야 다니든 말든 하지... 이럴 거면 떡볶이집 아르바이트 하는 게 낫겠다.

퇴사한 박성화는 집에 머무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늘었다. 그러다 보니 옆방 사람이 집에 있을 때 뭘 하는 지 알게 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친해져야지. 동갑이랬는데. 근데 매일같이 찍소리도 안 났다. 분명 같이 살기로 할 때 웬만하면 작업실에 있을 거라고 했던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집에 들어오긴 해야 할 거 아냐. 이젠 언제부터 언제까지 작업실에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시차가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 물론 김홍중이 박성화를 마주치기 싫어서 열심히 피해 다닌 거긴 했다 -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새벽 다섯 시쯤이면 자주 들리는, 아주 작고 빠른 소리. 정체불명의 도마질 소리인지, 빨대를 뜯는 소리인지, 아무튼 뭐랄까... 냉장고 문이 스르륵 열리고, 작은 병뚜껑 같은 걸 여는 소리도 가끔. 그러고는 끝이다. 딱 거기까지. 그다음은 아무 소리도 없다. 야식이라도 먹는 건가? 근데 그럼 냄새가 나야 할 거 아냐. 기름 냄새도 없어. 아무 냄새가 안 나. 그 사실이 오히려 더 불안했다.

그리고 김홍중이 시킨 택배를 박성화가 잘못 들고 온 날. 박성화는 아무래도 전해줘야 하니까, 라는 생각에 문을 두드렸고, 김홍중은 귀찮은 듯이 문을 열었고, 그 틈으로 방 안이, 아주 조금 보였다. 책상 옆에 있는 작은 냉장고. 낡았지만 깨끗했다. 문 위엔 아무 장식도 없고, 자석도 안 붙어 있었고, 딱 하나. 냉장고 옆면에 붙어있는 쪽지. 펜으로 눌러 쓴 글씨. O형 3개, A형 2개, AB형 0개…… 혈액형…? 혈액…? 엥...? 의사는 아닌데...? 생각할 틈도 없이 김홍중은 문을 닫았다.

결국 밤낮을 꼴딱 새서, 도어락 소리가 나자마자 몰래 김홍중 방에 들어갔다. 생각보다 사람 사는 방 같네… 진짜 더럽다. 대충 방을 쓱 훑어보고는 냉장고를 열었다. 잘못 본 게 아니었구나. 피. 혈액 팩. 실소가 났다. 진짜 뱀파이어였구나. 진짜. 와, 대박. …그러면, 나를 물 수도 있는 건가? 한참이나 그 생각이 이상하게 오래 머물렀다. 진짜라면, 진짜일수록… 그럼 어쩌면 진짜로, 언젠가. 옆 방에 뱀파이어가 산다는 게 그렇게 싫진 않았다. 사실 싫다기 보단, 좋은 쪽에 가까울지도. 싫어야 하는데. 무섭긴 했는데. 그리고... 내가 상관없다는데. 결국 박성화는 남자답게 면대면으로 묻기로 한다. 일단 김홍중 방문을 열고는,

"너 혹시 뱀파이어야?"

딱히 확답을 바라고 물어본 건 아니었다. 홍중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한참을 침묵했다. 어디선가 냉장고의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김홍중은... 움직이지도 않았다. 가만히, 아주 가만히 박성화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박성화는 그 침묵 덕에 확신이 생겼다. 좋은데?

아무래도 뱀파이어는 처음 보니까... 박성화는 김홍중에게 온갖 어그로를 끌기 시작했다. 홍중아 마실랭? 피야. 사실 뻥이야. 김홍중은 아무말 안 했는데 박성화 혼자 백 마디를 했다. 그 중 김홍중이 가장 긁히는 건, 피 빨아달라는 말이었다. 허구한 날 김홍중 방에 놀러가서 제 팔을 내밀었다. 먹을랭? 김홍중은 단 한번도 먹지 않았다.

박성화가 처음에 상상했던 뱀파이어는... 그래도 날렵하고, 피 냄새에 예민하고, 사냥 같은 걸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근데 김홍중은 달랐다. 체력이 너무 없었다. 이렇게까지 안 좋나 싶을 정도로 쥐 죽은 듯 아무 소리도 안 나는 날이 생각보다 종종 있었다. 문틈으로는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안에서는 무언가 아주 느리게, 기어 다니는 것 같은 인기척만 겨우 들릴 뿐. 원래는 그냥 집이 좋은 사람인가 보다 했지만... 뱀파이어인 걸 알고 나니까 뭔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새벽에도 조용하니까. 알아서 잘 살겠지 싶다가도, 박성화는 그런 방을 그냥 두고 볼 위인이 아니었다. … 설마 죽었나? 물론 그 생각이 들자마자 바로 말이 안 된다고 쳐냈다. 뱀파이어가 죽으면… 시체가 남나? 그럼, 갑자기 가루가 되어버린다거나? …그건 드라큘라 영화였나? 쥐 죽은 듯한 날이 이어지자 결국 사흘 넘어갈 때 쯤 눈을 꾹 감은 채 문을 열었다. 혹시 열었는데 피 냄새가 확 풍긴다든가, 시체가… 아니, 시체 같은 게 널브러져 있다든가, 이불 밑에서 손만 나온다든가…

"홍중아아…… 살아있어?"

박성화가 온갖 공포에 휩싸여 눈을 뜰 때 처음 본 풍경은, 그냥 며칠 밤낮 꼴딱 새고 얼굴 끝까지 이불 덮고 잘 자고 있던 김홍중이었다. 그래도... 숨 쉬는 거 맞나. 그럼 이번 기회에 해 봐야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근처에 굴러다니던 바늘을 집어 들었다. 손끝을 콕 찔러 피를 내곤, 조심스레 핏방울을 코끝에 가져다 댔다. 손끝에서 아직 따뜻한 피가 미세하게 떨리며 홍중의 피부 위에 맺혀 있었다. 이불 속으로 파묻힌 김홍중은 여전히 미동 하나 없었다. 코끝도, 속눈썹도, 가슴도 들썩이지 않았다. 그 조그만 방 안에선 냉장고 소리만 돌고 있을 뿐. 그 모든걸 지켜본 박성화가 손을 떼려던 찰나, 본능인건지 분명 무의식의 흐름일텐데, 차가운 입술이 손 끝에 닿았다. 생전 처음 당하는 흡혈이... 의외로 짜릿했다. 그래서 그 뒤로 김홍중이 질색해도 계속 먹어달라고 했다. 느낌도 좋고... 흡혈하는 홍중이 표정이...

"홍중아... 나 물어줘."

안 먹는다고. 네 피 맛 없다고 고래고래 화를 내도 들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인간이 어떻게 흡혈 중독이 될 수 있지? 너랑 같이 뱀파이어 하고 싶어. 아니면 죽어도 좋은데... 박성화 입 닫아.

그러던 박성화가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

김홍중은 한동안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

김홍중이 알지 못하는- 그러니까, 다른 세계의 박성화는 생각보다 '정상적이라' 칭할 수 있는 부류에 속했다. 넥타이를 만지작대며, 출근길 열차 밖 선로를 보며, 회사 옥상에 올라 몇 번이고 뛰어내리고 싶다는 충동을 속으로 삼켰다. 책상 위 먼지 한 톨도 용납할 수 없는 박성화에겐 이 거대한 먼짓덩어리 행성이 정말 버거웠다. 그렇다고 훅 사라지자니... 안타깝게도 박성화는 기억되고 싶다는 욕망도 있었다. 그래도... 좀 좋은 사람으로 오래 기억됐으면 좋겠어. 그래서 자신이 사라지더라도 이름 세 글자는 기억될 수 있게 살았다. 괜찮다는 말은 입에 붙은 지 오래. 제가 하겠다는 말은 껍데기가 아니라 매번 진심이었다.

그때쯤 시간을 역행하는 유전자가 나타났다. 양자역학의 변형이라고 했다. 이들은 시간의 흐름과 감각에 예외를 보였고, '지금'이라는 시공간에 갇히지 않는다고 했다. 동시에 과거와 미래 두 곳에 존재할 수 있는 사람.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 로비에 그 유전자를 이용한 피실험자 모집 공고가 붙었다. 정식 명칭은 시간 역행 의식 낙하 및 회수 실험. 단순하게 보면 몸에 심는 타임머신 같은 거였지만, 어느 방향으로 떨어질지, 어느 지점에 닿을지, 어떤 기억을 보존할지, 애초에 언제 되돌아올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대체 누가 해. 몇 억 준다고 해도 안 하겠다. 공고문을 읽은 옆 사원이 중얼댔다. 박성화는 그 종이를 오래, 아주 오래 바라봤다. 그렇다고 해서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그저 자기가 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밤을 새우는 사람, 아무도 모르게 데이터 정리를 끝내는 사람, 마지막 남은 업무까지 끝내는 사람. 그래서 그날 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천천히 지원서를 썼다. 비상 연락망은 비워 두었고, 위급 시 연락처 칸에는 또박또박 없다고 적었다.

낙하할 때 충격과 시공간의 충돌을 막기 위해 기존 기억을 일시적으로 억제시킨다.
적은 확률로 일부 실험자들의 기억은 아주아주 천천히 돌아오게 되는데, 기억이 완전히 돌아오게 된다면 시공간의 충돌로 인해 다시 원래 존재했던 곳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지금. 박성화는 다시 사무실 책상 위다. 모든 기억을 가진 채로. 박성화의 공백이 있었다고 해도, 과거로 돌아가서 뱀파이어와 동거를 했다고 하면 다들 미친 사람으로 볼 것이다. 단순히 흡혈을 못 당해서 아쉬운 줄 알았는데. 기억이란 게 무게가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됐다. 책상 위로 고개를 떨군 박성화는 깨달았다. 좆됐다. 보고서 쓸 수도 없다. 말할 사람도 없다. 말해봤자 미친 사람 취급 할 게 뻔해서 그냥 일했다. 원래 하던 일. 문서 작성, 기획안 정리, 점심 시간 되면 조용히 나가서 김밥 세 줄. 적당히 살아 있는 티 내면서 버텼다. 전과 같은 업무였는데 무게가 느껴졌다. 파일을 정리하고, 회사 메신저 로그인을 끄고, 노트북을 닫았다. 옆 자리 동기가 간만에 일찍 퇴근하는 것 같다는 질문에 대답은 하지 않았다. 모두에게 기억되지 않아도 됐다. 이 시간선으로 홍중을 데려오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