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OnArE
홍섷by. 청아
Parallax
“아, 진짜 좆됐다…….”
쿵.
책상에 머리를 박은 홍중이 긴 한숨을 내뱉었다. 한창 학기 중인 5월의 평일 오전 도서관이라 할 수 있는 민폐. 사람이 있었어도 똑같이 머리 박기는 했겠지만. 홍중은 고개를 반쯤 돌려 텅 빈 도서관을 하릴없이 바라만 본다. 하도 모니터와 학술지만 들여다봤더니 이젠 허공을 보는데도 검은 글자가 둥둥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 뭐, 진짜라고 해도 이건 별문제도 아니지. 눈알 빠지도록 굴렀는데 건진 게 하나도 없다는 게 진짜 문제였다. 진짜 빠져버렸으면 좋겠다. 그럼 논문 안 써도 되지 않나? 오로지 별, 우주가 좋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천문학 박사 과정 밟고 있는 건 스스로의 의지라 자업자득이지만. 그래서 더 막막했다. 남 눈치 하나는 기깔나게 보는 홍중이 민폐되는 짓인 걸 알면서도 책상에 머리를 박을 정도로.
3년차에 논문제출자격시험 합격한 것까진 좋았다. 심지어 단번에 통과했다. 석사 졸업 논문과 박사 1년 차에 쓴 논문이 JKAS(Journal of the Korean Astronomical Society, 한국천문학회지)에도 실려서, 아무리 관측과 연구가 오래 걸린다 한들 졸업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도교수도 그렇게 생각했댔다. 그러니까 혼자 김칫국 마신 건 아니라고. 그런데.
누가 6년 차 될 때까지 주제도 못 잡을 거라고 생각을 했겠냐.
“선배들은 도대체…… 어떻게 졸업한 거지.”
보통 박사 논문은 자기가 쓴 석사 논문을 더 깊게 파고들어 발전시키거나, 교수가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하위 주제를 끌고 간다. 그래, 안다. 다들 일단 눈앞에 닥친 문제부터 해결하고 본다는 걸. 홍중이 도로 책상에 이마를 기댔다. 그나마 편하게 할 거면 기존 논문을 다시 꺼내는 게 최선인 걸 누가 몰라서 이러나. JKAS에 실은 논문 두 편은 홍중 본인이 썼지마는 도무지 정이 안 갔다.
하나는 케플러 3차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변광성의 광도 곡선.
이건 정리만 했다. 틀 안에 숫자만 넣으면 되는 거라.
다른 하나는 은하 중심부 H α 플럭스 주기성.
이건 비교만 했다. 남의 데이터로 퍼즐 맞추면서.
사실상 둘 다 정해진 틀에 숫자만 집어넣은 수준의 논문이란 소리다. 사실이잖아. 관측이며 주기며 뭐며……. 원래 천문학은 연구 하나 하려면 다른 이공계에 비해 더럽게 오래 걸리고 돈도 많이 든다. 때문에 대부분의 천문학 졸업 논문은 다 이 수준이었다. 그나마 이론이나 시뮬레이션 관련 연구는 금방 끝난다고는 하지만. 그런 만큼 이미 나와 있는 논문이 많아서 안 겹치는 주제 찾기가 더 오래 걸린다. 그래도 교수는 좋아라 했다. 데이터 잘 다뤘고, 결과도 예쁘게 나와서. 이 정도면 학술지에 실려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는 된다 했다. 실제로도 무난히 잘 실렸다. 근데, 그게 문제였다.
이걸 진짜 내 거라고 해도 되나. 누가 봐도 괜찮다고 평할 내용인데, 정작 홍중은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어쩌면 조금 실망한 걸지도 모르겠다. 내가 제대로 관측한 내용을 가지고 연구를 하고 싶었는데 그걸 허락하는 환경이 안 됐다. 돈도, 시간도.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이. 보고 배우고 기록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건데, 정작 그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홍중은 3년 차에 자격시험 붙고 나서 주제 몇 개를 내 보기는 했다. 하나는 유성우 스펙트럼 시프트 연구. 이렇게만 보면 단순하기 그지없지만, 메인은 그 안에 있던 질문이었다. 유성이 떨어질 때, 그 빛이 관측자의 눈에 들어오기까지의 시간이 미묘하게 달라지는 이유가 뭘까. 그러니까 대기권으로 진입하는 유성의 빛을 분석해서 그 파장이 어떻게 변하는지 추적해보자는 말이었다. 계절별로, 지구의 회전 주기와 비교하여 정리하면 되는 일이었는데.
교수는 관측 시간이 너무 짧고, 분석할 만한 표본도 부족하다며 잘라냈다. 홍중은 유의미한 표본 수집에 몇 년이 걸리더라도 할 수만 있다면 자기가 할 생각이었는데 그 말 꺼내기도 전에 반려당한 거다.
"과학은 우연이 아니야. 반복과 누적으로 말해야 해."
그 말인즉슨, 언제나 같은 조건을 만들 수 없다면 연구도 하지 말란 소리였다. 틀린 말은 아닌데, 짜증이 났다. 그럼 누가 새로운 걸 연구하려 드냐고. 관측 때마다 이 지구가, 우주가 멈춰주는 것도 아니고. 관측 기회가 적고 불규칙한 것도 맞다. 그래도 시작은 해 봐야 하는 거 아닌가? 확실하지 않다는 이유로 가능성마저 막혀버리는 건 답답했다. 그래도 어쩌겠어. 지도교수가 그러라면 끝이지. 좁아터진 바닥에선 교수 말이 법이니까.
두 번째로 낸 주제는 구형 성운의 분자운 분포에서 광도 오차 비교였다. 별이 죽으며 남긴 가스 구름. 그 안에 든 분자들의 분포와 밝기 차이를 분석하는 연구. 이건 며칠 밤을 새워 가며 고생해서 데이터까지 다 정리했었다. 그런데 주제 내미니까 돌아오는 말이,
"그 주제는 이미 많이 다뤄졌고, 새로운 것도 없어."
이거더라.
사실 내면서도 걱정은 했다. 전 세계에 박사 과정 밟는 인간만 수백, 수천이다. 내가 생각한 주제를 타인이 생각하지 않으리라는 장담이 없다. 그래서 더 빨리 던졌는데 대답도 더 빨리 돌아왔다. 의지가 푹푹 꺾였다. 열심히 모은 데이터도, 밤새 노력한 것도 다 물거품이 됐다.
홍중은 두 번째 주제 반려당한 후로 일 년 넘게 새 주제를 내놓지 않았다. 성에 차는 게 없었던 탓이다. 남들이 던져 놓은 관측 데이터나 고만고만한 이론 끌어다가 분석하는 일을 억지로 쥐고 있기가 싫었다. 고작 박사 졸업 논문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직접 본 것, 직접 기록한 것을 바탕으로 내 이름을 내걸고 싶었다. 그렇게 허비한 시간이 일 년이었다. 홍중은 그 시간 동안 천문대에 틀어박혀 살았다. 별 보고, 분석하고. 다시 별을 보고, 또 별을 봤다. 그렇게 애써 현실을 외면하며 버티는 것도 지쳐갈 즈음.
이상하게 톡 튀어 자꾸만 눈에 걸리던 별 하나가 생겼다.
적경 17h 24m 50.0초, 적위 -03° 11′ 12″. 남쪽 하늘. 땅꾼자리의 남쪽 가장자리, 전갈자리로 넘어가기 직전의 위치. 성도에도 없고, 데이터베이스에도 존재하지 않는 희미한 점 하나.
새로 발견된 별. 보통 이럴 때에는 신성이나 초신성을 의심한다. 평소에는 관측할 수 없던 어두운 별이, 폭발로 인해 갑자기 밝아졌을 가능성이 유력하니까. 홍중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더 이상하기만 했다. 폭발적인 광도 상승도, 주변에 퍼져 있을 가스 껍질도 보이지를 않았다. 더군다나 12.4의 광도. 어둡지는 않지만, 밝다고 하기에도 모호한 수치. 거기다 스펙트럼 분석까지 텅 비어 있었다. 초신성이라면 수소 방출선이나 중원소선이, 신성이라면 방출선이 뚜렷한 피크를 보여야 하는데.
별의 폭발은 이렇게 조용하지 않다. 그렇다면 두 가설 모두 말이 안 된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저 별은, 전부터 그 자리에 존재했으나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라는 소리. 그 사실이 홍중의 마음을 이끌었다.
그래서, 매일같이 그 별을 관측하기 시작했다.
밤이면 남쪽 하늘을 향해 돔을 열고, 변덕스러운 날씨에 욕을 퍼붓기도 하면서 하늘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동일 좌표의 별. 같은 패턴으로.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나. 희한한 기분이 들어 관측 기록을 다시 확인하니 광도가 변하고 있더라. 느리지만 분명하게 흔들리는 빛. 아주 미세한 파동. 처음에는 빛 간섭 때문인가 싶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날이 지나고 장비를 바꾸어도 변화는 일관되게 드러났다.
이름 없는 별이, 소리 없이 주기를 가지고 흔들리고 있었다. 홍중은 이 주 동안 쌓인 데이터를 급하게 긁어모아 광도 곡선을 그렸다. 한껏 숙였던 허리를 펴자 매끄럽게 이어지는 파형이 눈앞에 펼쳐졌다.
"……. 변광성이다."
장장 이 주일 동안이나 더 밤을 새고서야 주기까지 알아낼 수 있었다. 28.93일. 약간은 긴 편이었다. 홍중은 아주 오랜만에 설레는 마음으로 다음 번 주기의 최대 광도 도달 시각에 대한 예측값을 내고는 다음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아무도 밟지 않은 미지의 땅을 개척하는 이의 마음이 이러했을까. 오랫동안 무심하게 흘려보내던 시간이, 오랜만에 기다려졌다. 어쩌면 처음으로 현실을 잊을 만큼. 처음 망원경을 통해 밤하늘을 보았던 때로 돌아간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두 번째 피크가 오던 밤.
홍중은 관측값을 몇 번이고 다시 들여다 보아야만 했다. 광도 최대점이 예측보다 아주 미세한 차이로 늦게 도착한 탓이었다. 0.007초. 인간의 눈으로는 구분할 수 없는 차이지만 기계는 아니다. 나사에 비할 바까진 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정밀하기로는 장난 없는 게 우리 학교 장비들인데. 관측값을 입력하고, 프로그램을 새로 짜고. 표준 시간 신호까지 기준 삼았다. 그래도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단순한 대기 간섭, 혹은 기상 문제. 그도 아니라면 일시적인 기기 오류일지도 모른다. 관측 데이터가 많고 기간이 긴 천체의 경우에는 이 정도 오차는 단순한 오차로 치부하고 넘기기도 하니까. 비록 이건 데이터도 부족하고 시간도 짧지만. 그런 경우겠거니 생각하고 말았다.
그러나 세 번째 피크에서도 지연은 계속되었다.
아니, 더 늦어졌다. 0.018초. 홍중은 그 숫자를 앞에 두고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만약 첫 관측 때 주기를 잘못 계산한 것이라면, 두 번째 지연 값과 오늘의 지연 값이 같아야 했다. 두 번째가 일시적 오차였다면 이번에는 첫 관측과 같은 값이 나와야 했다. 하지만 보란 듯이 이루어진 지연은 이번에도 홍중의 가설을 모조리 무너뜨렸다.
머릿속이 뻑뻑하게 굳는다. 진짜 주기가 길어지는 거라면, 이건 뭐지. 단순한 변광성이라면 이럴 리 없다. 변하는 것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이루어지지도 않고. 거기다 광도와 파장, 모든 스펙트럼 데이터까지 이전 관측과 동일했다. 시간만이 자꾸 어긋난다.
그 순간, 머릿속 어딘가가 쿵 하고 울렸다.
‘실은, 우리가 같은 시간이라 생각하는 순간도 어쩌면 조금씩 어긋나 있을지도 모른다.’
홍중이 손끝을 말아쥐며 짧게 침을 삼켰다. 귀 안에서 맥박 뛰는 소리가 울렸다.
별빛은 인간의 시간으로 수백, 수천 년을 달려와 지구에 닿는다. 언제나 일정하게 뻗어나오는 빛은 어떠한 방해에도 흔들림이 없다. 그런데 지구 대기의 간섭이나 관측 기기의 오류라고 보기에도 어려운, 불균일하나 지속적인 지연이 벌어진다? 행해진 모든 관측에서 관측자도, 장비도, 위치도 동일하다. 변한 것이라고는 오직 시간뿐. 그렇다면, 그 시간 자체가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닐까?
[관측 데이터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주기성 시간 오차.]
주제로는 충분했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현상. 기록도, 이름도. 그 무엇도 없는 이 별은 누구도 알지 못하며, 이러한 현상을 목격한 이도 아직까지 없다. 발견하고 관측하여 기록한 것은 오로지 나 하나. 처음 내밀었던 주제와 크게 다를 것은 없으나, 이 별은 좌표도 고정되어 있으며 관측 조건도 동일하게 맞출 수 있었다. 그럼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홍중은 당장에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를 지르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누르며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키보드에 얹은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새벽 내내 간단한 개요와 관측 데이터를 정리해서 교수에게 메일을 전송했다. 어느덧 밝아진 창문 너머 새 우는 소리가 들려오나, 고양된 기분이 가라앉지를 않아 피곤한 줄도 몰랐다. 의자의 등받이를 한계까지 젖히고 설레는 한숨을 뱉은 홍중은 그리 오래지 않아 다시 허리를 세워 앉았다. 답신이 온 탓이다. 홍중은 잔뜩 들뜬 마음으로 'Re:' 라고 적힌 제목을 클릭했다.
'홍중아. 이런 건 학술지에 못 싣는다.'
물론 쓰면서도 보수적인 꼰대 교수한테 욕먹을 것 같기는 했다. 그래도 내고 싶었다. 남들이 이해 못 하고, 쓸데없는 짓이라고 해도 하고 싶었다. 남들 보라고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었으니까. 절대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돌아오는 말이 그게 끝이라니.
새벽 내내 두근대던 심장 위로 찬물이 훅 끼얹어지는 느낌이었다. 아니, 이번엔 다른 방향으로 두근거렸다. 울렁울렁, 불쾌하기 짝이 없게.
논리적이지 않다는 말도, 과학적인 근거가 부족하다는 말도 아니라. 학계에선 이런 이야기를 다루어주지 않는다는 짧고 간결한 한 마디. 그게 더 아팠다. 그동안은 잽으로 맞으면서 어찌저찌 버틴 것이었다면 이번엔 어퍼컷 제대로 맞고 K.O. 당한 느낌. 차라리 말도 안 된다고 조목조목 반박이라도 당했으면 깔끔하게 포기했을 텐데. 가타부타 덧붙이는 것도 없이 그런 건 안 받아준다 그러니까, 납득이 안 가서.
질린다는 생각도 조금, 시간 간섭보다 매력적인 주제를 찾지 못한 것도 조금. 그 뒤로 낭비한 시간이 자그마치 2년이다. 자격시험 한 번에 붙어놓고 박사 과정 6년 차가 말인가? 직장이랑 병행하지도 않는데 10년 채우게 생겼네. 이제는 정말 올해 안에 주제 못 잡으면, 등록을 연장하든가 포기하든가. 둘 중 하나는 해야 했다. 눈 빠지라고 논문 시스템 들여다보고, 전국 도서관 순회공연 돌면서 학술지 뒤지는 짓을 몇 년 더 한다고 마음에 차는 주제를 찾을 수 있을까? 될 리가. 괜찮은 주제 찾았나 싶으면 후배들이 이미 논문 써 놓았을 가능성도 농후했다. 그럼 또 연장, 연장…….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학사 빼고도 장장 팔 년이다. 죽도 밥도 아닌 애매한 성과로 돌아서기엔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이 자꾸만 발목을 붙잡아서 도망칠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홍중은 여전히 제 전공을 사랑했다. 죽더라도 끝까지 별을 보다가 죽고 싶었다. 그럼 죽기보다 싫어도 다시 주제를 찾는 수밖에 없었다.
"이젠 이 화면도 지겹다……."
부스스 몸 일으킨 홍중이 오늘로만 열 번째, 같은 창을 다시 열었다. 논문 검색 시스템은 더는 새로운 걸 줄 수 없다는 듯, 열 번째로 똑같은 화면을 보여주었다. 매번 검색어는 조금씩 달랐지만 돌아오는 목록은 비슷비슷했다. 열두 개 정도는 반가운 제목이고, 새로운 건 두세 개밖에 없는. 그래도 이번엔 좀 많았다. 무려 열일곱 편의 논문이 떴으니까. 물론 그중에 다섯 개는 삼 년 전에도 읽은 내용. 여섯 개는 아는 선배나 동기의 석사 졸업 논문. 두 편은 두 페이지도 안 되는 내용이라 읽는 척만 했고 나머지는 초록만 읽고 닫았다.
이젠 머리가 아픈 수준이 아니라 속부터 꾹꾹 짓눌리듯 지끈거렸다. 두개골 안에서 뇌 대신 돌덩이가 흔들리는 것처럼. 홍중밖에 없는 것처럼 굴던 교수도 새 대학원생 들어오니 온 관심을 그쪽에 투자하는 탓에, 누구도 압박하지 않는 환경이 됐다. 그런데도 홍중은 조급했다.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는데 올해가 지나면 정말 다 끝일 것 같아서. 한숨을 푹 쉰 홍중이 노트북을 덮지도 못하고 손끝만 까딱까딱 움직였다. 마우스 커서는 창을 닫았다가, 열었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창밖을 봤다. 도서관 내부에 켜져 있는 형광등이 다 묻혀버릴 정도로 쨍한 햇빛이 책상 즐비한 열람실 로비를 밝힌다. 날씨 한 번 더럽게 좋네. 이렇게 멀쩡한 날, 나는 왜 여기에 이따위로 처박혀 있는 걸까. 왜긴 왜야. 논문 주제 못 잡은 버러지 대학원생이니까 그렇지. 아, 자혐 올라와…….
한참을 그렇게 있던 홍중은 마른 세수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라도 더 찾아야지. 이미 쥐 잡듯이 다 들쑤셔 본 것들이지만 이거 말고는 더 기댈 구석이 없었다. 그렇게 학술지가 빼곡하게 꽂힌 서가 주변만 빙빙 돌던 홍중이 문득 시선이 닿은 구석의 책 한 권을 꺼내어 들었다.
"처음 보는 책인데. 뺑뺑이만 스무 바퀴 돌고도, 왜 이걸 못 봤지?"
표지에는 먼지가 수북했다. 웬만한 사람은 찾지 않는 총류 서가. 그 안에서도 오래도록 손을 타지 않은 낡은 책.
우주시정(宇宙視正) 창간호
철심으로 엮인 양장본과 수기로 적힌 내용. 제본 상태가 양호치 않은 것은 둘째로 치고, 그 방식까지도 기존의 것과는 많이 다른 모양새. 홍중이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그런데 천문학 학술지가 왜 500번대의 천문학 서가가 아니라 000번 총류 서가에 꽂혀있는 거지? 의문이 몽글몽글 피어오르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가볍게 입바람을 불어 먼지를 날리자, 제목보다는 가느다란 금색 활자로 적힌 ㅡ 1970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에는 정식 아카이브에 실리지 못한, 누군가의 오랜 시간들이 기술되어 있었다.
낡을 대로 낡았겠지만, 어쩌면 도움이 될지도 몰라. 마음에 드는 게 없다면 그저 환기 한 번 했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대로 그다지 유의미한 내용이 있지는 않았다. 물론 쓴 사람은 엄청난 노력을 들였겠지만, 관측 기술이 발달한 현대에 와서 부정당하거나 제대로 확인이 된 내용들만 수두룩했다. 그럼 그렇지, 뭐. 그래도 과거의 시선에서 보는 우주가 흥미로워서 하나씩 읽어나갔다. 어쩌면 지금의 김홍중은 볼 수 없을 우주를 상상하면서. 그렇게 몇 편의 논문을 읽었을까.
[관측되지 않는 별의 파동에 대하여. (1966)]
책장을 넘기던 손끝이 멎었다. 누렇게 바랜 종이 위, 의아한 한 줄의 문장. 논문보다는 시나 소설에 더욱 어울릴 법한 제목이 눈에 들었다. 학계에서 낸 게 아니라 쓸 수 있는 제목이었겠지. 그냥, 그 정도의 감상이 전부였다.
별은 모든 순간을 빛으로 남긴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그 빛을 이해하지 못한다.
_관측되지 않은 빛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놓친 시간에 머무르는 것뿐이다.
…….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과학보다는 문학에 가까운 글귀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초록이라 하기에도, 서론이라고 하기에도 모호한 문장. 어쩌면 소설의 서문이 더 어울리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홍중은 숨을 삼키며 논문이란 이름을 단 소설을 다시 읽어내려갔다.
기록의 시작은 단순했다.
1963년 4월 22일, 관측 스케줄이 비어 있던 밤. 정렬용 별을 따라 망원경의 정렬을 맞추던 중이었다. Vega, Altair, Deneb. 평소처럼 성도를 참고하며 돔을 회전시키던 중, 성도에 없는 광점 하나가 걸렸다.
적경 17h 24m 50.0초, 적위 -03° 11′ 12″. 눈에 띄는 밝기는 아니었고, 좌표도 특별할 것 없는 위치였다. 그러나 천문대 내에 있는 관측 기록과 별자리 도표, 카탈로그. 모든 곳을 찾아봐도 이 별을 식별할 수 있는 정보는 없었다.
이 별은 광도 12.4에서 17.9까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일정한 주기를 보이는 변광성이다. 셰페이드 변광성의 특징을 보이고 있었으며 여섯 번의 관측 모두, 예측한 최댓값 도달 시간과 실제 광도 최댓값 도달 시간이 오차 없이 일치했다. 나는 이 별의 주기를 28.93일로 계산했다.
익숙한 좌표와 주기. 심장이 가볍게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삼 년 전. 몇 달 동안 자신의 손가락 끝이, 시선이 고집스레 따라가던 별 하나. 홍중은 그때를 떠올렸다. 처음 그 별의 기묘한 지연을 마주했던 밤을. 그런데 여섯 번이나 관측하면서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고? 어쩐지 가슴이 떨려왔다. 자신이 관측해 분석했던 것이 틀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이 사람은 그 별을 보고 어떤 것을 경험했을지에 대한 호기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일곱 번째 주기 관측에서 이상 징후가 발견되었다. 광도 피크가 예측 시각보다 미세하게 늦어진 것이다. 0.009초. 물론 이때에는 그저 단순한 오차로 판단했다. 조금의 오차도 없던 앞선 여섯 번의 관측이 운이 좋았던 것으로 판단하고 넘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아래로 날짜별 광도 최댓값 도달 시간과 지연 값이 보기 좋게 정리되어 있었다. 0.009초, 0.017초, 0.029초……. 시간 자체가 파도처럼 밀려오듯, 별다른 규칙성 없이 점차 늘어날 뿐인 수치. 그리고 이 기록은 누적된 지연이 0.109초를 넘긴 이후 끊겨 있었다.
그러나 Δt¹는 주기가 반복될 때마다 미세하게 증가했고, 누적된 지연이 0.109초에 이르자 그 별은 마치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다음 날부터 관측되지 않았다. 아무리 좌표를 맞춰 보아도 스펙트럼 감지 값은 0으로 떨어졌으며, CCD² 이미지에도 아무런 신호가 남지 않았다. 장비에도 별다른 이상이 없어 다른 별들은 정상적으로 관측되었다.
¹ Δ t: 광도 최댓값 도달 시간의 지연 값.
² CCD: Charge-Coupled Device. 광신호를 전기 신호로 변환하는 고감도 이미지 센서.
문장 하나하나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기록은 감정도, 이론도 아닌 이상한 온도를 가지고 있었다. 논문보다는 관측 일지에 가까운 서술. 그러나 기술된 측정과 관측값은 아무런 보조 도구가 없는 지금에도 정확하고 구체적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세밀했다. 기록 하나하나가 머릿속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마치 숫자와 숫자 사이에, 지금 당장은 알 수 없는 비밀을 숨겨놓은 것처럼. 홍중은 내내 서 있던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그 자리에 계속해서 서 있었다. 눈으로는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곱씹으며.
실종은 3일간 지속되었고, 나흘째 되는 날. 동일 좌표에서 다시 관측되었다. 가장 어두웠던 12.4에서 출발해 이전과 동일한 주기로 광도 피크에 도달했다. 그것은 처음과 다를 것 하나 없었으나, 보란 듯이 다음 주기부터 다시 지연이 시작되었다. Δ t는 이번에도 매 주기 증가했고 그 값이 0.1초를 넘어섰을 때, 마찬가지로 실종되었다.
1965년 1월 5일, 피크 도달 시각 03:12:30.041. 1966년 3월 30일, 지연 0.107초. 이 논문에 명시된 마지막 기록.
나는 이 현상을 '파동의 시간역 이탈 (Time-phase displacement)'라 명명한다.
별빛은 언제나 일정한 속도로 지구에 도달한다. 하나 이 별은 그렇지 않다. 광도 변화의 주기, 동일한 스펙트럼. 고유의 리듬을 가지고 있으나, 오로지 시간만이 관측자와 어긋난다. 관측자의 시간을 뒤흔드는 별.
나는 이 별을 틈이라 부르기로 한다.
파동은 계속해서 진동한다. 관측 이전의 별은 다중의 시간에 걸쳐 존재하며, 우리가 행하는 관측은 그 파동을 한 시점에 고정하는 행위다. 나는 그것이 우리가 이해하는 '존재'라는 개념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문장은 특이하게 자간이 넓었고, 필압이 고르지 않았다. 긴장감 속에서 써 내려간 흔적처럼. 그 뒤를 잇는 말은 더욱 선명했다. '관측 이전의 별은 언제나 다중의 시간에 걸쳐 존재한다.' 중첩. 그 단어가 머릿속을 때렸다. 관측 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상태가, 관측의 순간에만 현실에 고정된다. 양자역학의 기본 개념. 그는 그 개념을 별빛에 대입하고 있었다. 천체는 우리가 보는 그 순간에만 ‘지금 여기’로 존재하며, 그 외의 시간에는 존재 가능성으로만 남는다고.
해서 나는 이 기록을 남긴다. 틈과 나의 파동이 완전히 어긋나 더는 관측할 수 없게 되더라도, 언젠가 다시 틈의 파동을 목격한 이가 나타난다고 믿으며.
틈이 완전히 지구의 시간을 벗어난다 하더라도,
나는 분명히 그것을 보았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나를 먼저 본 것일지도 모른다.
읽는 내내 다물지 못한 입안이 텁텁하게 마르기나 했다. 모르는 새에 손에 힘이라도 들어갔는지, 낱장 모서리가 아주 살짝 구겨져 있었다. 낯선 학술지에 나열된 수기, 그것을 사이에 두고 누군가가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홍중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것은 망상도, 착각도 아니었다. 누군가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시간을, 지금 이곳에서 다시 보고 있었던 것이다. 틈. 존재의 간극. 시간과 시간 사이를 스쳐 지나가며, 아주 짧은 순간에만 현실과 접속할 수 있는 천체. 그리고 그 존재는, 지금 이 논문을 읽고 있는 자신에게,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Resonantia
누군가의 고백을 엿본 기분이라. 홍중이 서둘러 책을 덮으려던 때, 시야 끝에 희미한 글씨가 걸렸다. 00천문대 천체관측실 세미나룸. 틈을 관측한 이가 머무르던 곳. 이름을 몇 번 중얼거리던 홍중이 다시 노트북 앞으로 향했다. 지도를 열어 천문대를 검색하자, 위치는 떴다. 대한민국 가장 동쪽, 강원도 끝자락 바닷가에 자리한 천문대. 거기까지만이었다. 그 외의 정보는 전무. 당황스러움에 검색을 더 해 보니, 이전하지 않고 2014년에 그대로 폐관. 현재는 사용하지 않으며 제한된 인원만이 허가를 받고 출입할 수 있다고 쓰여 있었다.
"갑자기 휴학은 왜. 너 재학연한 얼마 안 남은 거 알고 있잖아. 졸업 논문 주제도 못 잡아놓고 휴학해서 어쩌게?"
"주제 정하려고 휴학하는 거예요."
그 길로 교수에게 달려가 장장 일 년의 휴학을 신청하자 교수도 퍽 당황스럽단 눈빛이었다. 그냥 황당한 건가. 이 좁쌀만 한 땅, 서울에서 강원도를 가나, 제주도를 가나. 볼 수 있는 밤하늘은 어차피 거기서 거기일 텐데. 꾸역꾸역 거기 죽치고 있겠다고 휴학을 하는 미친놈이 어디 있겠어. 홍중도 알았다, 그걸. 하지만 그래도 가야 했다.
주제를 정하고자 휴학하는 것이란 말은 변명이나 도피가 아닌 진심이었으니까.
내 눈으로 봐야겠어. 그게 무엇이든.
이론이 태어난 자리. 누군가 그 별을 처음으로 바라보았던 곳. 거기엔 뭔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미친 사람처럼 구체적이진 않지만 강한 감각. 때로는 논문이나 데이터보다 더 절박하고 확실한 것이 있는 법이다.
교수에게 휴학 승인을 받고 나니 그 후는 일사천리였다. 의외로 고난일 것이라 생각했던 방문 허가가 쉽게 떨어진 덕분이었다. 천문학과 박사과정 대학원생. 신분이 권력이기는 한가보다. 덕분에 홍중은 주절주절 몇 번이고 연습했던 애원 멘트는 고이 넣어두고 서류 한 장 덜렁 받아 나오는 데에 성공했다. 홍중에게 서류를 건네주던 공무원이 정말 괜찮겠느냐 묻기는 했다. 시에서도 폐쇄 이후 수시로 보수는 해 전기 연결은 문제가 안 되겠지만, 장비까지 멀쩡할지는 알 수 없다며. 홍중은 그 말에도 괜찮다는 답으로 일관했다.
처음부터 굳이 여기까지 올 필요는 없었다. 관측 장비는 학교에 있는 것들이 더 좋고, 환경도 훨씬 안정적이니까. 망원경과 노트북, 필터 몇 개를 트렁크에 싣고 이 먼 길을 달리는 데에만도 세 시간이 넘게 들었다. 어둡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지나, 전기도 제대로 안 들어오는 폐 천문대까지 찾아오며 홍중은 수십 번쯤 굳이? 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런데도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리면, 이대로 이 직감을 외면해 버리면. 많은 것을 놓치고 후회하게 될 것 같아서.
학교에서 장비 챙기고, 집에서 짐까지 싸고 출발했더니 천문대에 도착했을 때는 자정 즈음이 다 되어 있었다. 오히려 좋지. 관측하긴 훨씬 쉬우니까. 망설임도 없이 가장 위층에 있을 관측실로 향했다. 반쯤 열린 문틈을 비집고 들어가 장비를 설치하고 노트북을 연결한 다음, 관측 프로그램을 실행해 좌표도 입력했다. 적경 17h 24m 50.0초, 적위 -03° 11′ 12″. 마우스를 조정하고, 조심스럽게 망원경을 근삿값까지 움직였다. 그러자 자연히 화면이 열리고, 프로그램이 스스로 초점을 맞추는 동안 홍중은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한참 뒤. 초점이 맞은 화면 속에. 그 별은 없었다. 홍중이 직접 두 눈으로 확인을 했던 적도 있고, 과거 누군가의 기록 속에서도 반짝이던 그 별은, 오늘 이 하늘에 없었다.
일반적인 관측, 혹은 유성우를 겨냥한 방문이었다면 실망하고도 남을 결과였으나, 텅 비어 새까맣기만 할 뿐인 화면을 보며 홍중은 벅차올랐다. 웃으며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 별이 사라졌다는 건, 그가 본 것과 논문의 작성자가 남긴 기록이 일치한다는 뜻이었다. 기존의 연구와 기록을 바탕으로 하자면 충분히 이상이라 치부될 현상이겠지만. 이 순간을 위해 이곳까지 찾아온 홍중에게는 달가운 호재에 불과했다. 홍중은 손끝이 가볍게 떨리는 것을 느끼며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다, 서서히 낮아지던 망원경의 각도가 기어이 건물 벽을 볼 지경이 되고서야 비로소 몸을 눕힐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지켜보았지만, 별은 끝내 나타나지 않기도 했고. 더 지켜본다 한들, 좌표가 갑자기 머리 위로 뿅 솟아오를 일도 없으니, 이젠 멈추어도 될 것 같아서. 내일 해야 할 게 많기도 했고. 홍중은 사부작거리며 침낭을 꺼내 망원경 옆 바닥에 아무렇게나 펼쳤다. 그 사이에 몸을 끼워 자리에 눕자, 단단하고 차가운 바닥의 감촉이 있으나 마나인 침낭 뚫고 척추까지 타고 오른다. 불편한 바닥, 어둠 속에선 끝도 없이 높아 보이는 천장, 먼지가 일어 퀘퀘한 묵은 공기. 불편하고 불친절한 환경에 자의로 덩그러니 떨어진 꼴인데도 마음 하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편안했다. 나 외에, 그 별을 본 유일했던 사람의 공간. 그 별거 아닌 사실이 홍중을 외롭지 않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다음날을 위해 일찍 잠에 들겠다는 마음을 먹고서도 잠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장거리 운전에 장비를 지고 계단을 오르기까지 해서 몸은 피로에 절었는데도, 눈꺼풀은 얌전히 감겨있지를 못하고 계속해서 들썩였다. 시야에 펼쳐진 고요하고 반짝이는 밤하늘. 그 별을 처음 관측했던 순간과, 유일하게 그 별을 관측해 기록했던 사람의 마음은 일치했을까. 간질간질한 기분에 심장이 두근거려서. 도통 미련을 버리지 못하던 몸이 뇌의 성화에 못 이겨 스르르 잠에 들었던 것도 같다. 온전히 눈 붙인 지 얼마나 지났을까. 뺨 스치는 서늘한 공기에 놀라 화들짝 깬 홍중은 그제야 열어 두었던 돔을 제대로 닫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 대신 흐물흐물 손을 뻗어 침낭을 더욱 끌어올리는 것을 택했다. 졸려…….
"아으, 허리야……."
날이 밝고, 홍중은 뚜껑 틈으로 해사하게 쏟아지는 햇빛에 겨우 눈을 떴다. 노숙은 영 적응이 안 됐다. 학부생 시절에도 야외 관측만 나갔다 하면 잔병 얻어 며칠 동안 앓기를 반복했으니 당연한 말이다. 그나마 나름의 실내라고 이만한 게 다행이지. 어스름이 해 밝아올 즈음에 눈 감던 일상에는 너무 과한 자연의 미라클 모닝. 한참을 더 뭉그적대던 홍중이 머리에 얹은 까치집을 손가락으로 벅벅 빗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된 거, 그냥 조금 일찍 움직이는 것도 나쁘진 않을 테다. 졸리다며 미루었던 돔 폐쇄를 마저 하고, 침낭도 적당히 개어 장비 옆에 가지런히 두었다.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밤새 굳어버린 몸도 쭉쭉 늘리고서, 가지고 온 에너지바 하나를 입에 물고 관측실을 나섰다.
어디부터 봐야 하는지 계획이 전무한 건 당연한 말씀. 내부 구조도 제대로 모르는 채인지라. 그리 넓지 않은 복도를 따라 걷기만 하다 문득, 이름 없는 문패 하나가 시선을 붙들었다. 페인트가 벗겨지고 금이 간 나무 문짝. 자세히 들여다보니 희미하게 세미나실, 이라고 적혀 있더라. 처음 그 논문 말미에서 보았던 그 장소. 이 문을 밀면, 어쩌면 그가 사용했던 책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품은 채 조심스레 손잡이를 돌렸다.
끼익ㅡ
열린 문 너머로 먼지가 내려앉은 공간이 펼쳐졌다. 예닐곱 명은 앉을 수 있을 만한 기다란 탁자, 퇴색된 커튼, 삐뚤어진 의자들, 그리고 오래된 칠판. 화이트보드도 아닌, 중학교 때에나 보던 초록색의 칠판 위로 지워지다 만 수식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홍중은 멍하니 나열된 수식을 응시했다. 오래전 누군가가 여기에 앉아 똑같이 그 별을, 그 시간의 흔적을 바라보았다는 사실이. 이상할 정도로 현실처럼 느껴졌다.
"그 사람은 언제까지 여기에 있었을까."
논문이 발표된 건 1966년. 그때 아무리 적어도 스무 살은 넘겼을 텐데. 그 이후로도 여기에 있었을까? 보이지 않는 별을 찾고, 다시 다가올 그 틈을 기다리며.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렀을까. 괜히 싱숭생숭해진 홍중이 테이블에 쌓인 먼지를 손가락으로 훑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그 끝, 세미나룸의 가장 구석진 자리에 놓인 오래된 책상이 보였다. 슬쩍 보더라도 아주 오래도록 그 자리에 있었을 것만 같은, 낡은 목재 책상. 조용히 다가가 녹슨 손잡이를 당겨 서랍을 열었다.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는데, 다 삭아 널브러진 종이 위로 가죽으로 덮인 노트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손때와 세월에 찌들어 너덜너덜한 낡은 수첩.
혹시라도 흐트러질까, 조심히 그것을 집어 든 홍중이 표지를 넘겼다. 묵은 먼지 냄새와 함께 종이가 기척 없이 흔들렸다. 가장 앞 페이지에는 가지런한 필체로 이름 석 자만이 쓰여 있었다.
박성화
박성화, 박성화……. 이름은 낯선데, 다른 게 익숙했다. 아, 그러니까. 글씨체가. 도서관에서 보았던 수기 논문 속 그것과 똑 닮아 있었다. 물론 그보다 조금 더 삐침이 심하긴 했으나, 이게 편할 때 나오는 진짜 필체라 생각하면 의아할 것도 없었다.
일기, 같은 건가. 이건 왜 안 가지고 간 거지?
내가 봐도 되나. 곧장 페이지 넘기지 않은 것은 마지막 양심이었다. 그 사람의 논문 골조로 삼아 멋대로 재관측 시도하는 것도, 그걸 하자고 폐쇄된 지 오래인 이 천문대까지 찾아온 것도 그렇고. 멋대로 들쑤시고 다니다가 노트까지 발견했는데. 이 안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 줄 알고, 마음대로 들추겠는가. 굉장히 사적인 이야기라도 적혀있다면 뻘쭘할지도 모르잖아. 물론 논문이 쓰인 시간을 생각하면 만날 일조차 없겠지만, 기분이라는 게.
"……."
그러나 호기심을 얌전히 억누를 재주가 있었다면 애당초 천문학과를, 그것도 대학원까지 갈 일이 없었겠지. 본능에게 처참히 패배한 홍중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사과를 연신 중얼거리며 내려놓았던 노트를 다시 집어들었다. 딱 첫 페이지만 보고. 연구 일지 같은 게 아니라면 다시 덮으면 될 거야.
1964년 2월 7일, 새벽 2시 28분.
짧은 문장이, 홍중을 속절없이 짓눌렀다. 아니, 어쩌면. 시간의 너머에서, 얼굴도 모르는 존재가 자신을 부르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처음이었다. 그 별이 나를 바라보았다고 느낀 건.
종일 하늘이 흐렸다. 무기력하고 희멀건 한 빛이 하늘을 덮어버린 날. 낮 내내 흐리멍덩한 구름은 마르지 않은 옷처럼 하늘 위로 자글자글 펼쳐져 있었다. 해가 저물 때까지 이 구름이 다 걷힐까. 성화는 전전긍긍하는 마음을 도통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몇 번씩 들여다본다고 해서 저 구름이 걷히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활짝 열린 창문 앞을 몇 번씩 오갔는지 모르겠다.
오늘이 미친놈이 예정일만 아니었다면 이토록 불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측 상, 한 번의 주기 내에서 이 별이 가장 밝아지는 밤. 이미 세 번의 지연이 확인된 이상, 매 관측 한 번이 소중할 수밖에 없는데.
"후……."
겨우 창문 앞에서 맴맴 돌던 걸음을 멈추고 의자에 걸터앉은 성화가 두 손을 모아 얼굴을 크게 쓸어내렸다. 이 별이 모든 순간 같은 좌표에 머무르며 같은 광도로 깜빡이는 변광성이었다면, 한 번 정도는 누락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 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별, 심지어는 이전에 관측된 기록조차 존재하지 않는 별이라면 한 번의 누락도 큰 문제가 될 것은 뻔하다.
그래서 더 걱정이 되었다. 손끝에 감긴 불안이 기어이 저 하늘을 잡아먹을 것 같아서.
아니나 다를까. 해가 완전히 저물고 달빛이 밤을 물들일 시간이 될 때까지도 하늘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검푸르게 물들어야 할 창공은 장막처럼 뿌옇게 얼어붙은 채였다. 대기까지도 탁하게 가라앉아 별은 고사하고 달마저 그 모습 선명히 드러내지 못했다. 그간의 열렬한 열정과 의지가 자연 앞에선 이토록 쉽게 무너지고 만다는 사실이, 못내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성화는 그늘 짙게 드리운 표정을 하고서도 돔을 열었다. 아직 피크 시간까지는 남아 있으니까.
적경 17h 24m 50.0초, 적위 -03° 11′ 12″. 이제는 눈을 감고도 맞출 수 있을 것처럼 익숙한 좌표로 망원경의 방향을 맞춘다. 성도 내에는 어떠한 반짝임도 없는 곳. 그 어디에도 별이 있다 기록되지 않은 위치. 그러나 성화는 태연히 접안렌즈를 교체하고, 조리개를 조금 더 조일 뿐이었다. 정밀하게 좌표를 고정한 뒤 천천히 초점을 조절한다. 별이 보일 거란 확신도 없을뿐더러, 이런 날씨에서의 관측은 유의미한 값 남기지 못함을 알면서도. 간절한 바람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희망을 품고자 했다.
그런데.
빛이 잡혔다. 그 별이 자리한 곳. 그 부분만이 깨끗하게 열려 있었다. 흐릿한 하늘 위, 유일한 광원. 모든 구름이 그 별만을 피해 갔고, 대기의 결이 그 한 점을 비워 길을 터 놓고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고, 살을 찌르는 듯 투명한 빛. 성화는 접안렌즈에서 눈을 떼지도 못하고, 소리 없이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 한구석이 환희로 저릿하게 아려왔다.
광도 17.9. 예측한 일자와는 일치했으나, 시간은 이번에도 지연 발생. 변광성의 스펙트럼 변화는 이전과 유사한 형태를 보임. 날씨는 여전히 구름 가득한 흐린 날씨, 대기 상태 불량, 해당 좌표 외의 항성은 가시성 미달로 유의미한 관측 불가.
관측 내용을 일목요연 정리해 나가던 성화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당시에는 그저, 크게 기대치 않았던 상황 마주함에 신이 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하나씩 나열해 놓고 보니 기이한 현상이었다. 분명 그 크고 밝은 달마저 얼룩 하나 제대로 보여주지 않을 정도의 구름이었다. 암만 틈이 걷혀 색이 연하다고 해도, 그리 밝지 않은 항성 하나 관찰하기에는 턱없이 두텁고 짙었을 게 뻔한데도. 이상할 정도로 선명하게 보이던 그 별…….
그 순간, 기이한 감각이 성화를 뒤흔들었다. 지금까지는 자신이 그 별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낯선 광원, 설명할 수 없는 패턴.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미지의 현상을 자신만이 목격하고 있다고. 그런데 지금 이것은 꼭, 저 별이 나를 바라보는 것 같지 않은가. 힘이 풀린 손끝에서 벗어난 펜이 툭 떨어지며 종이 위로 작은 점을 남기었다.
누구에게도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자신을 처음 제대로 보아준 이에게 제 본래의 모습을 보이는 것처럼 구는 별이라니. 마치 자신을 관측 대상으로 여기며 지켜본 것처럼. 성화는 허겁지겁 망원경의 방향을 다시 맞추어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아직까지도 희뿌연 하늘 아래, 자그마한 틈 사이로 얼굴을 비추고 있다. 성화는 그것을 마주 보며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망원경을 잡은 손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고, 오늘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망원경 너머에서 똑같은 강도로 반사되어 오는 시선을 맞는 감각. 착각이라기엔 너무나도 선명하고, 그렇다고 현실 삼기엔 너무나도 비이성적인 직감.
그래. 저 별은 처음부터 이 자리에 존재하고 있었다. 다만 누구에게도 그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뿐. 오늘 처음으로, 성화는 자신이 그 별을 마주했다고 정의할 수 있었다.
해서 나는 이 별을 틈이라 부르기로 했다. 존재와 부재의 틈, 그리고 시간과 시간 사이의 미세한 균열. 내가 관측을 멈추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그 틈 너머를 건너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탁.
명쾌한 소리에 홍중은 정신을 차렸다. 놀란 눈을 하고 고개를 숙이자, 어느샌가 닫혀 다시 가죽 표지 보이는 노트가 손에 들려 있다. 방금 그 소리가 이거 닫는 소리였나. 언제 닫았지. 뻐근한 고개 들어 주변 둘러보자 여전히 세미나실 안이었다. 희뿌연 창과 눅눅한 공기, 지저분한 칠판과 먼지 쌓인 낡은 책상까지도. 모든 게 다 그대로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는데도, 팔의 털이 전부 곤두서 있었다. 암만 실내라고 한들 공기가 차가운 것도 아닌데.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기묘한 감각이 전신을 휘감았다.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기분이 이상하다, 정도의 흐리멍덩한 어휘로는 표현할 수 없는 느낌. 단지 기분 탓으로 치부하기는 어려운, 훨씬 더 구체적이고 신체적인 감각이었다. 달리기를 한 것처럼 두근거리는 심장과 고요 속에서도 쿵쿵 울리는 고막.
그러니까 꼭, 마치…….
성화가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에 직접 서 있었던 것만 같은 기분. 그가 망원경을 조정하고, 숨을 죽이며 별을 올려다보던 그 순간. 그 구름의 결, 공기의 밀도, 별빛의 각도 같은 것이 어렴풋한 체온처럼 살갗에 머무르는 것만 같았다. 한 것이라고는 단지 글을 읽은 것뿐인데. 마치 그것을 제 손으로 적어낸 양, 그 기억이 손가락 끝에서 되살아나는 듯했다.
그리고 엇비슷하게, 홍중은 이 천문대 안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자기 혼자뿐이라는 확신이 이상하리만치 느슨하게 흔들리는 기분을 느꼈다. 홍중은 입고 있는 자켓의 안주머니에 노트를 고이 넣고는 서랍을 닫았다. 눅눅한 공기를 가르며 도로 관측실로 향하는 발걸음마다 낯선 이의 기척이 묻어나는 것만 같았다. 가느다란 감정이 거미줄처럼 그 끝을 제게 붙여놓고, 홍중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뒤로 제 흔적을 길게 남겨놓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달라진 건 나올 적보다 시간이 더 흘렀다는 점밖에 없는데, 뭐 이렇게 싱숭생숭하지. 정말로,
"방금 막 꿈에서 깬 것 같단 말이야……."
관측실로 돌아올 때까지도 이러한 몽롱함은 가실 줄을 몰랐다. 멋대로 흩뿌려놓은 짐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침낭을 끌어 햇볕 잘 드는 창가에 가져다 두는 행동도 잠이 덜 깬 사람처럼 굼떴다. 이대로 그냥 잘까, 하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지만. 아직 정오도 안 지난 시간이라 그건 너무 낭비라는 생각이 들어 기각했다. 세미나실 한 번 보고 왔더니, 굳이 다른 곳을 더 둘러보아야 할까 싶은 생각에 더 돌아다닐 의지는 사라졌고. 음. 밥이나 먹고 들어올까.
대강 찾아보니, 근처에 식당 같은 건 없었고. 제일 가까운 편의점도 걸어서 가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면 어쨌든 차를 끌고 나간다는 소리인데. 그렇게 편의점을 갈 바엔 차라리 조금 아래의 마을까지 향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쪽에 예약해 놓은 숙소에 자잘한 짐도 좀 두고 올 겸. 홍중은 차 키와 작은 물병 하나만 챙겨 들고 곧장 차로 향했다. 그새 햇빛에 데워진 따끈한 차내에 몸을 실은 뒤, 시동을 걸고 부드럽게 도로로 진입했다. 그다지 넓지는 않지만 텅 빈 도로를 달리자, 아스팔트 위로 길게 드리워진 가로수의 그림자와 쨍한 하늘이 홍중을 반겨주었다. 날씨는 진짜 좋네. 괜히 창문을 내리고 하늘을 한 번 올려다 본 홍중은, 무심코 핸들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밝다. 별은 모습도 드러내지 못하게 밝다. 지금쯤 그 별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존재할까. 그런 생각이 문득 스치고 지나간 탓에.
"안녕하세요. 뼈 해장국 하나만 주세요."
숙소 입실까지는 시간이 조금 떠서. 그냥 주차장 보이는 식당 아무 데나 들어가 앉았다. 번화가로 보기에도 조금 민망한 읍내인지라 선택지가 그렇게 많지가 않아서, 술도 안 마셨건만 첫 끼로 해장국을 고르게 되었다. 음식 나오기를 기다리며 테이블에 턱 괴고 있던 홍중은 작은 화면에서 열심히 대본을 읊는 아나운서를 가만 응시하다, 이내 휴대폰을 꺼내 별자리 앱을 열었다. 1724500-031112. 익숙한 숫자 토독, 톡 눌러보나 여전히 그 자리는 비어만 있다. 성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별. 자신이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그의 논문을 찾아내어 이 자리에 당도하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의 기억에만 남고 영영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존재.
"뼈 해장국 나왔습니다. 뜨거우니까 조심하세요."
"아, 감사합니다."
호롭. 몇 번 불지 않아 여전히 뜨거운 국물의 맛은 기억에도 남지 않았다. 김 펄펄 나는 해장국 조심조심 떠먹으면서도 홍중의 시선은 여전히 새까만 핸드폰 화면 위였다. 기이한 동질감이 들었다. 내가 이 별을 처음 본 사람은 아닐지 몰라도, 이렇게 타인의 관측 기록을 바탕을 별을 좇는 첫 사람일 것이란 생각. 어쩌면 이게 더 중요한 건지도 모르잖아.
처음이었다. 그 별이 나를 바라보았다고 느낀 건.
자신을 끌어당겼던 그 첫 문장을 떠올리자, 뜨거운 국물이 목울대를 타고 넘어가는 게 괜히 선명하게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아뜨뜨. 그제야 국물 온도 기억해 낸 홍중이 차가운 물 다급하게 들이켰다. 양껏 달아올랐다가 훅 식는 감각. 불현듯 이러한 기분이 정말로 저 혼자만의 것일까, 하는 궁금증도 들었다. 그는 나랑 비슷했을까. 정말 그 별을 아는 건 자신밖에 없다는 생각에 외롭지는 않았을까. 그런 게.
허름하지만 그래도 깔끔한 변두리 민박. 한 달 치 방세 내고, 자잘한 옷 같은 것들 꺼내어 차곡차곡 정리한 후. 하루 미룬 샤워까지 꼼꼼하게 마친 홍중이 다시 천문대로 향한 것은, 하늘이 오렌지빛으로 물들 때쯤이었다. 낮부터 이어지는 구름 한 점 없던 맑은 날씨가 절로 콧노래를 이끌었다. 바로 옆이 바다인 덕인지. 짭조름한 습기 섞인 공기 만끽하며 해안 도로 달려 도착한 홍중이 차에서 내리며 습관적으로 시계를 확인했다. 해가 저물고 별이 드러날 시간까지는 아직 한참 남아 있었다. 그럼 이제 미루어 두었던 장비 점검이나 할까.
눈에 보이는 건 죄 한 번씩 건드려 봤는데, 아무래도 꽤 값이 나가거나 중요한 것들은 들고 나간 지 오래라 제대로 돌아가는 게 별로 없었다. 뭐, 정비를 했다 한들 얼마나 했겠어. 제 기능을 하는지까진 확인 안 했겠지. 있는 장비로도 관측에 문제는 없으니 상관은 없지만. 있는 거나 더 잘 쓰지 뭐. 홍중은 대강 걷어 놓은 장비를 다시 세팅하고, 케이블을 연결하고. 필터를 하나하나 분리해 상태를 체크하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애진작 관측천문학 전공 삼아, 한때는 이게 일상일 적도 있었지. 이만치 했으면 지겹다 느껴질 법도 한데. 홍중은 익숙함 속에서 가장 큰 평화를 느꼈다. 그 사람도 이렇게, 매일 저녁마다 별 하나만을 위해 움직였을까. 날씨를 확인하고, 장비를 손질하고. 밤이 올 때까지 아무도 없는 천문대의 정적을 벗 삼아 시간을 보냈으려나. 그렇게 생각하니 필터 어루만지는 손가락 끝이 간질간질했다. 누군가가 앞서 걸어간 시간을, 그 뒤에서 따라 다시 밟고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낭만적인지. 원래 천문학자란 낭만을 먹고 사는 족속들이다.
별은 아직 뜨지 않았고, 어둠도 완전히 내려앉지 않았지만 홍중은 벌써부터 옷깃을 여미고 장비 옆에 앉아 있었다. 검푸른 어스름이 살금살금 기어가 수평선을 적시고, 바람이 조금씩 온도를 낮추는 순간들. 그리고 마침내, 밤하늘이 그 형태를 천천히 드러내기 시작했을 때, 홍중은 고개를 들었다. 어제와 크게 다를 것 없는 하늘이지만, 어째 지금이 더 벅차고 설레기만 했다. 마음 한켠에 지닌 기대감의 무게 때문인가.
그 별이 오늘 밤에는 다시 모습을 드러낼까, 하는. 나타난다면, 그건 단순한 변덕 따위가 아니라, 어떠한 응답일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직감. 정말 과학적이지 못한 답이라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연결까지 해 놓은 노트북의 화면은 시야 반대편으로 돌려버린 지도 오래다. 이건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서. 있을지, 없을지.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는 존재지마는 이렇게 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는 직감에 벌인 짓이었다. 눈을 감고, 믿는 것도 없으면서 손까지 모은 채 기도하던 홍중이 천천히 접안렌즈에 제 눈을 가져다 대었다.
"……."
아.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비어 있던 하늘에 별 하나가 반짝이고 있었다.
놀라움보다 먼저 찾아온 것은 벅참이었다. 이 기묘한 경험을 정말로 직접 겪었다는 사실. 기도에 응답이라도 하듯 모습을 보여준 별을 향한 기쁨. 그리고 그 순간, 마치 누군가가 별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은, 설명되지 않는 시선이 느껴져서. 그래, 그러니까. 홍중도 그 말을 곱씹게 될 수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그 별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노라고. 홍중은 접안렌즈에서 시선을 온전히 떼지도 못하고 손을 움직였다. 허겁지겁 노트북을 끌어 와 관측값을 저장했다. 체크할 수 있는 수치는 모조리 체크하고 별을 추적했다. 수도 없이 했던 일이라고, 움직임이 굼뜨지는 않았지만. 쿵쾅대는 심장 탓에 울렁울렁, 토할 것 같은 속을 달래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금도 같은 시간과 하늘 아래를 공유하며 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는 것이라고는 별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의 집념 아래 탄생한 이론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그의 시간에 닿았다는 감각에. 홍중은 겨우 고개를 떼어내고 맨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 당신도, 그 하늘 아래에서 이걸 보고 있었던 건가."
Congiunzione
밤은 변하지 않는다. 매일 보아오던 밤하늘과 그 속에 들어찬 별들은 언제나 제자리를 지키고, 자신 외의 사람은 오래 머무르지도 않는 관측실은 늘 들려오던 기계 돌아가는 소리만이 전부. 삐걱거리는 바닥의 결, 냉기 머무는 콘솔의 금속 버튼과 스위치. 그리고 손끝으로 그어보는 좌표의 궤도까지도.
적경이며 적위 같은 것들은 이미 외운 지 오래이긴 하나. 굳이 노력하여 떠올리지 않아도 손가락이 먼저 기억을 해낸다. 렌즈를 닦고 케이블을 꽂는 일련의 모든 행위가, 성화는 꼭 제의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나의 틈에게 바치기 위하여 준비하는.
어둠이 본격적으로 시야 안에 녹아들면 성화는 늘 마음 한켠을 꾹 누르는 저릿함을 느꼈다. 틈이 깜빡 제 시야에서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 이번엔 끝내 닿지 못하게 될까 봐. 그래도 틈은 계속해서 그 자리에 머물렀다. 희끄무레한 구름이 종종 하늘을 덮을 때도, 기록지를 앞에 펼쳐둔 채로 스르륵 눈을 감아 버리는 날도 있었지만 한 번도 보지 못한 적은 없었다. 하늘이 열리고, 별이 남중할 때엔 유난히 머리가 밝았으니까. 설명할 수 없는 힘이 길을 터 주는 건지, 아니면 단순한 우연일지. 아무리 생각해도 정답을 도출할 수 없는 물음은 오래도록 성화에게 머물렀다.
관측을 마칠 때면 자연히 숨을 참게 되었다. 우주 안에서는 티끌과도 같은 자신과, 수천 광년의 거리를 두고 떨어진 거대한 항성. 그러나 어김없이 파동의 흔들림이 일치하는 순간 서로를 바라보게 된다. 이는, 성화가 하루를 지속할 수 있게 하는 단 하나의 이유이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성화는 그 별을 기록하지 않고 바라보기만 했다. 지연을 제외하고는 큰 변화가 없으니, 자연스레 기록을 미루게 된 것이다. 아니, 이건 어쩌면 핑계. 온전히 독대하고 싶은 욕심인지도 모르겠다. 텅 빈 밤하늘 한 귀퉁이서 자신을 향해 열려 있는 틈. 성화는 열린 돔 너머 손을 뻗어 조심히 손아귀를 오므려 보았다. 조심스레 그것을 감싸 쥐려는 것처럼. 이래도 쥘 수 없는 것이니 별이 낭만적인 것이다. 성화는 오늘도 별을 기다린다. 틈이 열리기를. 그 시간을 기다리는 것은 자신 혼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기분 좋은 예감을 만끽하며.
딱 하루 침낭에서 잠든 후, 뚝 떨어진 컨디션이 통 오를 생각을 하지 않아서. 홍중은 매일 천문대와 숙소를 오가는 생활을 했다. 숙소와 천문대 사이의 거리는 차로 이십 분 남짓. 생각보다 가깝기는 했으나 오갈 적이면 어쩐지 멀게만 느껴지는 길이다. 어쩐지, 별을 관측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처럼 느껴져서. 말을 아끼고 생각이 깊어지며, 예보와 다르게 구는 날씨에 괜히 마음이 흔들리는 것까지, 전부.
홍중은 라디오도 켜지 않고 달리는 내내 창 너머만 바라보았다. 매일 지나치는 가로수, 같은 위치에서 빛을 반사하는 가게의 유리창. 열린 차창을 타고 들어오는 고요한 마을의 공기. 종종, 돌아가는 길이면. 새벽의 도로가 너무 조용해 자신이 우주의 공허를 미끄러지듯 지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너 아직도 거기서 지내니?"
"네, 아직 관측 마무리가 안 돼서요. 얼마 안 남았어요. 다음 학기에는 복학할게요."
서울에 다녀와야 할 때면 늘 아침 일찍 출발했다. 장비를 반납하고 다시 대여하거나, 교수와의 면담이 잡힐 때가 보통 그러한 날이었다. 언제나, 해가 지기 전에는 다시 그 바닷가에 있어야만 마음이 편했으니까. 별이 나를 바라보는 순간에, 내가 그 자리에 없다면 견딜 수 없게 괴로울 테니까. 홍중은 피크 예상일을 기준으로 앞뒤 하루 정도씩은 아무런 일정도 잡으려 하지 않았다. 그 날 즈음이 되면 눈에 띄게 예민해지는 자신을 알고 있어서. 하늘에 작은 구름이라도 생기면 괜히 창문 앞을 서성거리고, 장비의 설정을 몇 번이고 들여다보고는 했다. 새벽까지 구름이 걷히질 않아 애먼 하늘에 대고 부채질을 할 때도 있었고, 또 어느 날엔 뜻밖에도 틈이 벌어져 그 잠깐의 기회를 노려 숨조차 아껴가며 망원경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아침 일찍 장비를 싣고 나가 반납을 하고. 새 장비를 싣고 막 해가 저물기 시작할 즈음 천문대에 도착했다. 망원경을 다시 설치하고, 노트북을 켜고, 좌표를 입력하고 초점을 맞추는 모든 과정은 이제 기계적인 일이 아니었다. 하나의 일상처럼 자리한 무언가. 홍중은 이제 점점 그 별보다도, 그 별을 바라보던 사람을 더 많이 생각하고 있었다. 책상 서랍에 넣어 둔 낡은 노트. 펼칠 때마다 묵은 먼지와 함께 손끝을 파고드는 필체. 이상할 정도로 그 손글씨를 닮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같은 방식으로 글을 쓰고, 같은 방식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같은 방식으로 시간을 읽고 싶다고.
다달이 지연 값은 늘어나고 있었다. 0.062, 0.07, 0.79……. 큰 규칙성 없이 늘어나는 숫자는 어느덧 그의 논문에 쓰여 있던 0.1이라는 임계치에 가까워졌고, 이제 언제 그 문턱을 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불안하게 다가오진 않았다. 오히려 홍중은 오늘도, 내일도. 그 별이 어딘가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거라는 기분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도 없는 관측실에서 별 하나를 마주하고 있다는 감각은 이제 그에게 외로움이 아니었다. 단지, 그가 붙잡은 하나의 시간. 누군가의 시간과 겹쳐지는 감정의 밀도만이 이곳에 남아 있었다. 시간과 시간 사이의 미세한 균열. 노트의 한 구절을 마음속으로 반복하며.
그는, 매일 틈을 기다리며 이곳에 있었겠지. 그리고 지금은 자신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언젠가 이 시간이 겹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무 근거 없는 직감조차도. 홍중은 부정하지 않았다.
해가 떠 있는 시간의 성화는 늘 조용했다. 다만 해가 지기 전까지는 관측실을 그렇게 자주 찾는 편은 아니었다. 천문대 곳곳을 종종 돌아다니며 먼지를 털거나 바닥을 쓸고는 했다. 이렇게 한다고 더 찾아오는 이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일종의 버릇처럼. 흐트러지지 않은 책상과 의자를 다시 정리하기도 하고, 전날 써 놓은 수첩을 다시 펼쳐 보며 찍찍 선을 긋고 내용을 고치기도 했다. 그러니까 꼭, 손님을 맞이할 것처럼 말이다.
점심 무렵에는 미리 챙겨 온 도시락을 해치우고는 바닷가로 나가기도 했다. 성화가 자주 걷는 길이 있었다. 천문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작은 오솔길을 거닐어, 햇살이 수면 위를 긁어내리는 바다로 향했다. 바람이 어깨를 넘고, 짠내가 입술을 스친다. 해가 머리 위로 올랐을 때엔 큼지막한 돌에 걸터앉아 물결의 방향을 이리저리 가늠하기도 했다. 퍽 외진 곳이라, 날이 더워도 사람은 보이지 않는 곳. 오가는 말 한마디 존재치 않는 정적. 그러나 성화는 그것에서 편안을 느꼈다. 아무도 무언가를 묻지 않고, 그리하여 본인도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이 순간이. 하루의 한때를 그렇게 보내고서야 성화는 천문대로 돌아갔다. 어느샌가 고요의 산책은 날씨가 영 엉망이 아니라면, 관측만큼 꾸준하고 중요한 일처럼 여겨지는 루틴이 되었다.
"밥은 잘 먹고 있지?"
"아침마다 도시락 챙겨 나가는 거 알면서 그래."
"아휴, 그거 가지고 되나- 싶은 거지. 혹시 몰라서 주먹밥 조금 가지고 왔어. 허하면 꼭 먹어."
가끔은 가족이 찾아왔다. 그렇게 긴 말을 나누지는 않았다. 가벼운 걱정과 달래는 말.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안부 인사 같은 것. 성화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머니가 내민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어머니는 그 뒤로도 몇 개의 염려를 성화의 앞에 더 내려 두었다. 성화는 여전히 밝은 낯으로 그 염려를 차곡차곡 받아 제 어깨 위에 얹었다. 돌아가는 어머니를 향해 손을 흔드는 것도 잊지 않고. 동생들이 찾아올 때도 있었다. 성화는 머리 하나는 더 작은 동생들은 재잘재잘 이야기를 늘어놓고서는 내일도 학교에 가야 한다며 손을 흔들고 떠나갔다. 성화는 이 순간들도 무척이나 좋아했다. 제 우주가 되어주는 이들이 성화를 별처럼 만들어 주어서.
성화는 조리개를 조정하며 렌즈를 바라보다, 문득 가슴 한편이 뻐근해지는 걸 느꼈다. 관측은 잘 진행되고 있는데도. 파형은 여전히 일정했고, 지연도 차곡차곡 늘어나고 있었다. 단지, 이 리듬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 성화는 이 별이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인간을 꺼리지 않고, 그 시선을 피해 달아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오늘도 그 별은 망원경의 한가운데에 떠 있었다. 그것을 보며 성화는 자꾸만 손끝을 움켜쥐었다.
반면 기록은 점점 간결해지고 있었다. 처음엔 말이 많았다. 색인처럼 정리된 문장들, 참고 좌표와 장비 설정, 대기 질에 대한 소견까지. 그러나 요즘의 성화에게는 한 줄, 많아야 두 줄이면 충분했다. 손을 멈춘 채로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이 훨씬 길었으니까. 그렇게 고개를 들고 있을 때면, 스스로가 연구자가 아니라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수치를 얻기 위해 별을 보는 게 아니라, 별이 자신을 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록지에 남긴 메모는 단 세 단어였다.
오늘도, 있었다.
그 외엔 아무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데이터가 아니라, 존재를 확인했다는 사실. 자신은 분명 오늘의 틈을 기억할 수 있으리란 믿음. 이젠 그것이 곧 관측이었다.
종일 말을 하지 않은 것 같다. 휴대폰도 열지 않았고, 시간을 죽일 때면 으레 켜 놓던 유튜브는 당연히 들어가지 않았다. 책상에 놓아 두었던 커피의 얼음은 녹은 지 오래. 간간이 노트북이 돌아가는 소리만이 조용한 방 안을 가로질렀다. 앉은 자리에서 반경 십 센치 밖으로는 움직이지 않던 홍중은, 하루 온종일을 노트의 문장을 반추하는 데에 쓰고 있었다.
'오늘도 있었다.'
짧은 문장이 종일 홍중의 사고를 따라다니는 통에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점차 간결해지는 문장. 그래서 더 무겁게 느껴졌다. 말이 적을수록 그 속내가 무겁게 가라앉는다는 것을, 이제는 아니까.
요즘의 홍중은 별을 보는 일보다 기록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더 길었다. 관측은 언제나 동일한 좌표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피크 일자가 아니면 큰 변화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일지는 아니다. 평탄히 이루어지는 관측과는 다른 흐름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그보다 더 큰 흔들림. 별의 진동보다도 더 세심한 감정의 떨림이 읽힌다. 멀리 떨어진 이가 작성한, 오래된 시간의 기록. 읽고 또 읽는다 하여도 달라질 것 없는 과거임을 알면서도, 홍중은 자꾸만 그 감정의 뒤를 따라 좇고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이번에도 출입 허가 연장이실까요?"
"두 달 정도 더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매번 죄송합니다."
"에이. 놀던 건물인데요. 이렇게라도 쓰이면 좋은 거죠. 서류 금방 준비해서 드릴게요."
"네에, 언제나 감사해요."
오랜만에 오래된 동사무소에 방문했다. 출입 허가는 길어야 석 달밖에 안 나와서, 마지막 연장을 하기 위해서였다. 자주 대화를 나누던 공무원과는 어느샌가 친해져 있었다. 살가운 상대의 태도 덕분이겠지만. 공무원은 홍중에게 따끈따끈한 서류 몇 장을 건네며 다시금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연장 끝나기 전, 한 번쯤 방문해도 되겠냐는 물음이었다. 홍중은 흔쾌히 긍정의 답을 돌려주었다. 정식 운영하는 천문대에 비하면 장비는 한참 부족하지만, 옆에서 설명을 덧붙인다면 취미 정도의 관측은 무리가 없을 테니까. 인사를 나누고 동사무소를 나와서는 자주 들르던 카페에 가 음료 한 잔을 주문했다. 카페 사장이 요즈음 얼굴을 왜 이리 안 비추느냐며 너스레를 떨자, 홍중은 멋쩍게 웃으며 일이 많았다고 둘러대었다. 실상은 가만히 앉아 일지를 읽는 시간이 더 길었지마는. 곧이곧대로 답하기엔 조금 부끄러워서. 이젠 하나의 일상이 되어버린 것들. 홍중은 그 조용하고 따뜻한 일상에 괜히 속이 울렁거렸다.
한바탕 대화를 나누고 다시 천문대로 돌아오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 시간이었다. 하늘과 바다가 오렌지빛으로 물드는 시간. 홍중은 곧장 관측실로 향하는 것 대신 바닷가로 나서길 택했다. 노을에 달아 훈기 품은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홍중은 더 걷는 대신, 모래사장에 털썩 주저앉아 노을 부서지는 수면을 멍하니 바라만 봤다. 어딘가 기운이 빠진 사람처럼. 더 정확하게는, 너무 오래 기다려 마음이 무감해진 사람처럼.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마주한 마지막 날, 어떤 기분으로 그 별을 바라보았을까. 제게만 모습을 보이던 그 별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감이나 했을까.
혼자서는 결코 알 수 없는 질문을 몇 번씩 곱씹던 홍중은 태양이 수평선 아래로 모습을 감추고서야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오늘은 피크다. 일찍이 준비를 해 둬야지. 조용히 천문대 안으로 들어가 자연스럽게 노트북을 열었다. 어느 날엔 피곤이, 어느 날엔 설렘이 찾아들기는 했지만. 오늘은 어딘가 다른 기분이었다. 예감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것이. 서서히, 그러나 선명하게 하나의 결말을 향해 수렴하는 직감이다.
지연 값은 어느새 0.089초를 넘었다. 불규칙한 증가 값. 홍중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대로 숨도 죽인 채 바라보다가, 기록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낮게 중얼였다.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네."
그의 논문에 따르면, 틈은 0.1초의 지연 값을 넘으면 그 다음 날부터 모습을 감춘다. 이제 남은 피크 관측은 두 번, 아니. 어쩌면 단 한 번. 그의 시선은 별을 향하고 있었지만, 생각은 기록의 주인을 향하고 있었다. 마치 그가 말없이 곁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바라보는 방향도, 마음이 닿은 곳도 같았기에.
밤은 언제부터 이토록 말이 없었을까. 아니, 별이란 것은 처음부터 말이 없었지. 소리도, 무엇도 없이. 그저 보여지는 모습 하나로만 모든 것을 전해주었지. 그 고요가 어쩌다 이토록 커져 버린 것뿐일지도 모르겠다. 성화는 망원경을 앞에 두고 긴 숨을 내쉬었다. 저번 피크의 지연 값, 0.094초. 오늘은 필히 0.1초를 넘어갈 테다. 오류라 칭할 수 없을, 명백한 오차. 희미한 불안이 다시금 손끝을 적신다. 정리된 기록 위를 배회하는 펜촉은 어느 때보다 오래 맴돌았고, 무언가를 쓰고자 했지만 한참을 망설이기만 했다.
성화는 여전히 자신이 혼자가 아니란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누군가 들었다 난 빈자리가 생긴 것처럼, 마음이 어수선했다. 오늘은 가족들이 다녀가지도, 읍내에 나가지도 않았는데 타인의 잔향이 이 공간에 남은 느낌. 어깨에 닿는 온기와 등 뒤로 퍼지는 울림.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 숨결처럼 성화의 곁을 맴도는 것만 같았다. 무섭지는 않았다. 어디선가 나와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질문에 대한 답 같았으니까. 무서울 리 없었다. 이게 설령 위안일 뿐이더라도, 오늘은 믿고 싶었으니까.
성화는 아직 절정에 달하기엔 이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가족보다도 더 가깝게 느껴지는 별이 제각기 빛을 발하며 성화의 곁에 머무르고 있었다. 눈을 몇 번 끔뻑이던 성화가 다시 펜을 들어 수첩의 아래, 빈 공간에 몇 글자를 남겼다.
어쩐지 오늘은, 정말로 마주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게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만날 상대가, 마주칠 존재가 무엇인지는. 그저 오늘은 정말로 틈의 리듬에 자신을 끼워 맞출 수 있을 것 같다는 직감만이 남았다. 그것이 결국 오만으로 남아, 틈이 제게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된다 하더라도. 성화는 이 밤을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마지막이라고 해도. 이는 곧 처음이자, 끝. 어쩌면 모든 순간이었던 시간이 될 테다.
오랜만에 푹 잠들었다. 마지막 자료 정리를 위해 동이 틀 때쯤 눈을 감은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깨고 보니 이미 늦은 오후더라.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노을이 바다 위로 스며드는 시간. 날이 선선해서 다행이지. 홍중이 어제 사 두었다가 남은 김밥을 입에 밀어 넣으며 가벼이 스트레칭을 했다. 산책이나 좀 하고 올까. 논문 속 마지막 기록을 따라간다면, 오늘은 마지막이 될 테니까.
어느덧 낯익은 것이 된 오솔길 따라 걷던 홍중이 말없이 멈추어 섰다. 이렇게 가만히 서 있는 게 얼마나 평온한 일인지, 이곳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 오늘따라 서글프기도 했고. 무언가를 떠나보낸다는 것은 언제나 반갑지 않은 일이니까. 홍중은 오래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무사히 졸업을 한다면……. 이 천문대를 다시 찾아올까. 장비를 다시 채우기 위해선 돈을 많이 벌어야 하겠지만. 이런 곳에서 별을 보여주고 또 연구를 할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것 같은데. 어쩌면 그의 마음을 이해하는 순간이 찾아올지도 모르지. 그토록 좇던 감정의 종착점이 될지도.
"……. 어?"
한 바퀴를 빙 돌아 다시 천문대 입구에 다다랐을 즈음, 홍중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오솔길에서와는 다른 기분으로. 어쩐지 낯설게 느껴지는 분위기 탓이다. 조심히 문을 밀자, 경첩보다 홍중의 손이 더 삐걱거렸다. 내부를 채운 공기도, 벽에 부딪혀 돌아오는 바람도, 계단을 타고 올라갈 때마다 울리는 바닥의 진동도. 낯설기 그지없으나 어쩐지 익숙한 듯 오감을 두드렸다. 마지막이라 서운한 마음 품었다고 해서 이런 빅 이벤트는 안 줘도 되는데…….
관측실에 점차 가까워질수록, 이상한 직감은 점차 분명해진다. 나긋한 라디오 소리, 그리고 분명한 인기척. 먼 시간의 것처럼 아스라이 번지나, 선명하게 피부를 찌르는 음성. 계단 손잡이에 얹은 손을 타고 미세한 전율이 스쳤다.
분명히, 누군가가 있다.
마침내 관측실의 문 앞에 선 홍중은 다시 한 번 멈추어 섰다. 희미하게 이어지는 호흡이 어째서인지 가쁘게만 느껴진다. 장장 일 년이 되어 가도록 자신 말고는 누구도 찾지 않던 낡은 천문대. 그러나 자리를 비운 사이 그 안을 채운 타인의 기척. 분명히 두려워야 맞는 순간인데, 알 수 없는 설렘이 그보다 먼저 뇌를 지배한다. 추측도, 착각도 아닌 확신.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진동이자 공명.
손잡이를 잡은 손이 땀에 젖어, 홍중은 닦아내기 위해 천천히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그 순간,
문이 안쪽에서부터 열렸다.
스르륵, 소음 없이 부드럽게 열리는 문.
그 너머에 선 한 사람.
낯선 얼굴.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인데,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 같았다. 손끝으로 더듬은 모든 문장과 필체, 별을 향한 곧은 열정의 마음. 그 모든 흔적이 모여 만든 하나의 존재. 머리는 여전히 낯설다 외치지만, 심장은 그를 알고 있다고 소리친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오가는 것은 눈빛밖에 없고, 긴 시간이 흘러 정적이 쌓였다. 어색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 고요를 채우는 것은 벅차고 위태로운 감정이다. 이것이 실재인지 허상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요동.
먼저 입술을 뗀 것은 홍중이나, 소리가 나오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 박, 성화?"
기어이 내뱉은 순간, 홍중이 더 놀랐다. 들은 적도 없이 혼자 읊조릴 뿐이던 이름을, 조금의 주저도 없이 불렀다니. 그러나 눈앞에 선ㅡ 박성화는 놀라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부드러운 미소로 답변을 돌려줄 뿐이었다.
그 순간,
틈은 두 사람을 향해 빛나기 시작했다.
Toccata
“저, 아. 죄송해요. 초면인데 이름부터 막, 불러버려서. 김홍중이에요, 저는.”
“잠깐 놀라긴 했지만……. 괜찮아요. 내가 당신의 이름을 알았다면, 내가 먼저 불렀을 거예요.”
“네?”
“누군가, 나와 함께 틈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언제나 받았거든요. 그리고 언젠가는……. 그 상대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틈…….”
“……. 어떻게 봤어요? 대학에 다닐 때 함께하던 동료들에게 물어도, 아무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 별이었는데. 아, 차 마셔요? 커피를 안 좋아해서 마실 게 이것밖에 없네요.”
1964년, 노트 안에 갇혀 있던 시간 속의 박성화. 홍중은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워 전전긍긍인데, 성화는 태연히 무어라도 마시겠느냐 물어오는 탓에. 홍중은 무릎 위에 얹힌 손을 비비적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하지. 나는 당신이 믿지도 못할 아주 먼 미래에서 왔으며, 당신의 논문을 통해 이 별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다고. 평범한 사람들에게 말한다면 당장이라도 홍중을 병원으로 끌고 가고도 남을 만한 소리인데. 홍중이 흘깃 시선을 들어 찻잔에 뜨거운 물을 붓는 성화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믿어주지 않을까. 과학적으로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이 별의 존재를 믿고, 또 지켜본 사람이라면. 어떤 말이라도 믿어주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홍중이 찻잔 조심히 받아들며 운을 떼었다.
“……. 처음은, 우연이었어요.”
졸업 논문의 주제를 정하고자 닥치는 대로 관측을 하던 때. 기록에 없던 별을 발견한 것부터, 당신의 논문을 발견하고 다시금 열의가 타올라 폐쇄된 이곳까지 찾아와 일 년을 거주한 것. 지연 값이 0.1초가 넘으면 별은 모습을 감추고, 마지막 관측을 하려던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다고. 그걸 위해 천문대로 돌아왔다가 시간을 거슬러 이 자리까지 도달했노라고. 성화는 아무런 말 없이 그것들을 모조리 들어 주었다. 어쩐지 입이 마르는 탓에. 뜨거운 차를 조심이 마시던 홍중이 대답을 가만 기다렸다.
“당신이 사는 시간은 언제예요?”
“……. 2025년이에요.”
“우와. 지금은 1964년인데. 진짜 먼 미래네요……. 그쯤이면 전 몇 살일까요? 그때까지 살 수는 있으려나.”
“그런 말은 말고요…….”
나이는 엇비슷해 보이는데, 어쩜 이렇게 어려 보이는 건지. 정말로 자신보다 한참 뒤의 미래에서 와서 그런 걸까. 허무맹랑한 소리에 가깝기는 했지만, 성화는 모든 것을 믿었다. 온전한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틈. 이러한 순간마저 저 틈이 이끌어 마련한 것이라면, 그 어떤 일이라도 벌어지지 못할 것은 아니니까.
“흐하, 농담이에요. 그나저나 그걸로 논문까지 쓰게 되는구나…….”
“그때의 과학으로도 다 설명할 수 없지만, 정말 잘 쓴 논문이었어요. 덕분에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고.”
“그럼……. 당신의 논문에도 내 이름이 남을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제 스승이나 다름이 없는데.”
결의까지 찬 듯한 음성에 결국 성화가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름이 남지 않더라도, 저 별을 기억해준다면 아무래도 상관은 없을 텐데. 그런 마음 말로 전하는 것 대신, 성화는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열린 돔 너머로 전갈자리가 보인다. 이제 틈이 가장 높이 오를 시간이다. 성화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메인 콘솔 앞으로 다가간다. 홍중은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성화의 뒤를 따랐다.
“그럼 같이 볼래요? 내가, 그리고 당신이 처음으로 목격할 이 별의 마지막.”
아, 도무지 거절할 수 없는 나긋한 물음이다. 홍중은 삐걱삐걱, 고개 끄덕이며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 이거 그대로 있네요.”
“폐쇄되었다고 했죠? 그럼 아마, 다른 천문대로 간 걸지도 모르겠네요.”
“……. 그래도 돔은 열리더라고요. 기껏 열어서 휴대용 망원경으로 봤다니까요.”
“아하하. 이건 그 자리에 그대로 두라고 말이라도 하고 이곳을 떠났어야 했나.”
“뭐……. 오랜만에 야외 관측을 하는 기분도 들고 좋았어요.”
대화를 나누며 렌즈를 닦는 홍중의 손이 가볍게 떨렸다. 손끝에서 퍼지는 열기와 등 뒤에서 느껴지는 고요한 체온. 멀지 않은 곳에서는 성화가 장비의 초점을 맞추려는 듯 홍중을 기다리고 있었다. 렌즈를 마저 닦아내고 돌아오자, 성화는 익숙한 손길로 버튼을 몇 개 눌렀다.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가 관측실 안을 울린다. 가벼운 진동이 둘을 감싸고, 둘 모두 목격하지 못한 미지를 마주할 순간을 고대한다. 천천히 이동하는 망원경을 바라보던 홍중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누군가와 함께, 이 별을 보는 건 처음이에요.”
“나는 항상, 누군가와 함께 보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 누군가가 홍중 씨라는 건, 이제서야 알게 되었지만.”
“저는, ……. 함께라는 생각은 못 했어요. 그저 성화 씨가 먼저 걸어간 길을 늘 좇는다고만 생각했었지.”
“우리는 같은 별을 봤어요.”
“틈이 우리에게 모습을 보여주었죠.”
“그리고 같은 감정을 공유했고.”
“…….”
“결국 같은 길을 걸어 이렇게 마주했죠.”
“저도 모르는 사이에 틈 너머로 성화 씨를 보고 있었던 거네요.”
잠시의 침묵. 그러나 고요 속에서도 마음은 오간다. 서로 모르는 사이에 맺은 짙은 유대감, 그리고 함께한 시간. 누군가는 우연이라고, 누군가는 환상이라고 치부할 그 오랜 시간이, 둘 사이에 많은 것을 쌓아올리고 있었다.
마침내 망원경이 움직임을 멈추고. 성화가 손을 뻗어 앞에 놓인 모니터의 전원을 켰다. 새까만 화면 한가운데, 선명히 자리한, 틈. 어느 때보다도 밝고 선명한 빛을 내며 둘의 사이를 밝힌다.
“……. 그간 보았던 것 중에서, 가장 밝아요.”
“어쩌면 이 순간을 축복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고요.”
성화는 아주 조용히 웃었다. 홍중은 그 소리를 들으며 부드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온전히 기쁘지만은 않지만, 그렇다고 슬픔이 깃든 것도 아닌 웃음. 기록은 프로그램의 몫이 될 테니, 자신이 할 것은 이 순간을 만끽하는 것이 전부겠지. 주변을 슬 둘러보던 홍중이 긴 의자 하나를 죽 끌어왔다. 성화는 어떠한 물음도 던지지 않고 의자 위로 앉았다.
“참 이상하죠.”
나긋한 목소리에 홍중이 돌아보았다.
“그다지 많은 말을 나누지 않은 것 같은데…….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 같아요.”
“……. 함께, 오래도록 별을 봤으니까요.”
조심스레 손을 뻗은 홍중이 제 무릎 위에 얹힌 성화의 손을 맞잡았다. 성화는 잠시 홍중의 손을 바라보다, 손가락 사이를 천천히 맞물렸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감정이, 이토록 명확하게 닿는 일이라는 걸. 정의하지 않아도 전해진다. 함께 별을 바라보던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대화보다도 더 많은 것을 나눈 사이가 되었으니까.
“이게,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틈은 다시 열리지 않겠죠.”
둘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지막 관측, 마지막 피크. 이제 더 이상 관측될 수 없는 별. 홍중이 온 시간도, 성화가 머문 자리도, 오늘을 기준으로 무너지듯 어긋나기 시작할 것이다.
“돌아가면……. 당신이 남긴 기록을 끝까지 다 읽으려고요.”
“그리고요?”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겠죠.”
“……. 내게도 당신을 기억할 무언가가 있다면 좋았을 텐데.”
대화는 길지 않았다. 되려 짧고 조용했다. 아무리 붙잡고 싶어도 머물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오래 붙들어야 하는 말은 되려 꺼내지 않는다. 그래서 말보다 손의 열기, 눈동자의 떨림, 그리고 같은 별을 바라보는 정적이 두 사람을 감싸고 있었다. 빛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화면 안의 별은 더 이상 뚜렷하지 않았고, 파형은 점점 더 미세한 진동만을 남긴 채 지워졌다. 성화가 아주 작은 숨을 들이켰다.
“홍중 씨.”
“네.”
“나는 언젠가, 결국 당신을 잊게 될까요?”
홍중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 이 모든 감정과 시간이 허상이 아니라는 것을 믿기 위해. 그리고 다시 떴을 때, 성화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기억할 거예요. 내 모든 곳에 당신의 흔적을 새겨서.”
창밖의 하늘은 고요했고, 밤은 별이 사라진 자리를 조심스럽게 덮고 있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시선을 기억하면, 이 모든 시간을 붙잡을 수 있을 것처럼. 한참의 정적 끝, 성화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홍중도 함께 따라 일어났다. 둘은 다시 화면을 바라보았다. 틈은 이제 사라졌다. 어딘가 다른 시간 속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며, 존재했던 흔적만을 조용히 남겼다. 한동안 말없이 서 있던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시선을 맞췄다. 눈동자에 별빛이 반사되듯, 둘의 감정도 서로를 비추고 있었다.
“잘 가요.”
“응, 안녕.”
그 말을 끝으로, 홍중은 돌아섰다. 한 번 더 돌아보고 싶었지만, 보지 않기로 했다. 이 감정은 이름 없이 남는 편이 더 오래 기억되니까.
문이 열리는 소리. 고요하고 낡은 관측실. 차가운 콘솔. 새까만 렌즈.
문이 닫히는 소리. 그리고 다시 시작된 고요. 돌아가는 장비. 별이 반짝이는 렌즈.
홍중은 무릎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낡은 가죽 노트를 펼쳤다.
성화는 천천히 돌아와, 펼쳐진 수첩 위로 펜을 눌렀다.
손끝이 파르르 떨린다.
오늘도, 있었다.
나의 시간에, 그대가 있었다.
Epilogue
그 밤에서 빠져나온 뒤, 하루 간 더 머무르며 틈의 실종을 목격했다. 적경 17h 24m 50.0초, 적위 -03° 11′ 12″. 남쪽 하늘. 땅꾼자리의 남쪽 가장자리, 전갈자리로 넘어가기 직전의 위치. 성도에도 없고, 데이터베이스에도 존재하지 않는 희미한 점 하나. 그 자리는 다시 공허로 남았다. 가장 과학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내게 진정한 진실을 알려주었던 별은. 그리고 나를 이끌어 무사히 나아가게 해 준 그와의 추억은. 그렇게 어디에도 남지 못하고 환영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모서리가 헤진 가죽 수첩 하나, 그리고 《우주시정》 창간호에 실린 한 편의 수필. 오로지 그것뿐.
나는 그날의 기록을, 그 사람을, 잊지 않기 위해 쓰기 시작했다. 시작은 그저 졸업을 위한 연구였을지 모르나, 그 끝은 결국 한 사람과 그의 기록이 이 세상에 남았음을 증명하기 위한 하나의 투쟁과도 같은 것이었다.
다만, 그가 주장했던 기존의 ‘시간의 파동역이탈’로는 이 경험을, 내가 겪은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없었다. 지연값은 관측 가능하지만, 그에 수반된 감정의 변조와 주파수의 동조 현상은 이론으로 정리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Suonare 간섭 현상이라 명명했다.
《Suonare 간섭 현상 – 시간대 간 감정 공명에 대하여》
: 감정이 시간 너머로 동조되는 순간, 그 공명은 실제 신호로서 작용할 수 있다.
특정 조건 아래에서 감정은 파동처럼 공간을 통과하며, 서로 다른 시간대에 위치한 두 인격 사이에 ‘주파수의 일치’를 발생시킨다.
그 일치점은 틈이라 불리는 불규칙한 별빛의 진동 속에서 나타나며, 이를 통해 두 시간대 간의 실시간 공명이 발생한다.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사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진실임을 안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살아 남은 감정, 어긋난 시간 사이에 유일하게 존재한 하나의 목소리. 그것이 내게 응답했기 때문이다.
논문 말미, 나는 짧은 문장을 각주로 남겼다.
to remember your sound: suonare
네가 울렸던 그 순간을, 나는 다시 울려서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한 줄의 주파수 메시지로 이 논문을 끝맺는다.
이 신호가 언젠가 닿는다면, 내 목소리를 들은 사람은 ‘우리’라는 주파수에 함께 머물러 준 사람이겠지. 그래서 나는 믿는다.
우린 단 한 순간도 어긋나지 않았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