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을 받아라

윤섷

by. 슝슝

윤호는 제 손에 있는 야구공을 한참 만지작 거렸다. 피치클락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한숨을 후 뱉어내곤 와인드업, 온 힘을 다한 투구. 심판의 스트라이크 콜이 선언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마운드를 내려간다. 덕아웃에서 자신을 맞이해주는 선수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윤호는 마음 속 가득한 잡생각을 휘휘 날려버리기로 했다.

"헛스윙 삼진아웃! 정중앙을 정확하게 꿰뚫는 직구로 10번째 스트라이크를 가져갑니다! 이 투수는 레드 블레이즈의 2번째 선발 투수, 정윤호입니다!"

격양된 목소리의 캐스터 콜을 듣던 성화는 마른 세수를 하며 시끄러운 티비를 꺼버렸다. 경기는 순탄히 흘러가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성화만 착잡해질 뿐이었다. 손목에 감긴 붕대를 마냥 바라보다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윤호와 성화는 초중고 야구부 동기, 심지어 프로 입단도 같은 구단으로 하게 됐다. 그만큼 서로가 서로의 인생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사이기도 했다. 어릴때부터 빡빡이 청소년 시절을 지나 같은 길을 걸어가는 인생의 동반자이자 소울메이트. 심지어 이번 국제대회에도 같이 국가대표 엔트리에 나란히 이름을 올릴 예정이었다. 지난 주 경기에서 성화가 다치기 직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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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이 3루수 옆으로 빠져 나갑니다. 유격수, 유격수!!! 유격수가 펜스에 부딪히면서 공을 흘리고 마네요. 지금 박성화 선수 일어나지 못하는데요, 급히 선수들과 스탭들이 상태를 확인하러 달려가네요. 상태 확인이 필요해 보입니다."

끔찍했다. 타이트한 점수 차에 2사 1, 3루. 꼭 막아야만 하는 공이었다. 날아가는 공을 따라가던 시선이 공을 향해 달려드는 성화에게 다다르자 멈췄다. 공이 글러브에 들어가는 동시에 성화가 벽에 부딪히며 쓰러졌다. 눈 앞이 새까맣게 암전. 그라운드로 들어오는 앰뷸런스에 고개를 두어번 흔들자 이제서야 모여있는 사람들이 눈에 보였다.

'레드 블레이즈의 선수 교체입니다. 유격수 김OO'

그라운드를 빠져나가는 앰뷸런스에서 시선을 떼기가 어려웠지만 경기를 이어가야 했다. 가까스로 흔들리는 멘탈을 부여잡은 채 이닝을 마무리했다. 정말 다행히도 이번 경기에서 윤호가 소화해야 할 마지막 이닝이었다. 잠시 숨 돌릴 틈도 없이 코치가 윤호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경기에 대한 피드백이었다. 대강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오늘 제 공을 받아준 포수와도 수고했다는 인사를 나눈 뒤 덕아웃에 털썩 주저앉았다. 머리가 멍했다. 성화는 바로 병원으로 간 건지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행히 경기는 이겼고, 그라운드에서 객석에 인사한 이후 정신없이 라커룸에 들어가 핸드폰부터 찾아들었다.

아직 메디컬 리포트도, 기사도 나온 게 없다. 그라운드에서 바로 병원으로 향했을 터라 성화의 핸드폰도 여전히 라커룸 안에. 성화의 소식을 알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기다려야만 했다. 윤호는 대강 가방을 챙겨 라커룸을 나섰다. 경기에서 이겼어도 마음 한 켠이 여전히 무거웠다. 다행히 내일은 휴식일이었고 오늘 집에 도착하면 내일까지는 걱정 없이 푹 쉴 수 있었다. 집까지 어떻게 도착했는지 모르겠다. 정적을 깨보려 티비를 켜도 온통 그 얘기 뿐이라 오히려 더 착잡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신경질적으로 핸드폰 화면 스크롤만 내리다 떠오른 팝업 알림에 메세지를 확인했다. 성화였다.

 

[나 이제 폰 받았어]

[걱정했지]

[엑스레이 찍었고 뼈는 괜찮대] 오후 8:38

[뼈는 괜찮으면, 다른 데는]

오후 8:39 [놀랐지 그래도 큰 부상 아니라 다행이다]

[근데 인대 파열이래]

[당분간 경기 못 뛸 것 같다는데]

[치료 받고 재활해야 된대]

[손목이라 치료 오래 걸릴 거래] 오후 8:40

[아 계속 치료 다녀야겠네 그러면]

오후 8:40 [고생하겠다 그래도 치료 빼먹지 말고 잘 다녀]

 

아, 크게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다. 인대 부상은 흔한 부상이긴 했지만 그만큼 회복이 더뎠고, 자주 쓰는 부위일수록 다시 다칠 확률이 높았다.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2군으로 내려가는 성화를 당분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윤호의 어깨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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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 돌아왔다, 4월 3일이. 4월 3일이 무슨 날이냐 하면 성화의 생일이자 윤호의 시간이 뒤로 흘러가는 날, 매번 뒤로 돌아가는 시간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성화가 다치거나 성화에게 무슨일이 생기면 4월 3일을 기점으로 다시 1년여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곤 했다. 제일 처음 시간을 되돌아갔던 건 중학교 2학년의 여름, 그때 성화는 파울 타구에 맞아 정강이가 부러졌었다. 야구를 그만둬야 되나 고민할 정도로 큰 부상이었다. 야구 그만두기 싫다고 울면서 말하던 성화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다음 날 멀쩡히 나타난 성화를 보고 윤호만 당황했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신기하게도 윤호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과거로 돌아간다. 기억을 가지고 있는 윤호만 두 배의 일 년을 살아가게 되는 셈이다. 몇 번 반복되고 나서는 윤호도 태연히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성화를 대할 수 있었다.

시간이 되돌아가는 조건은 딱 두 가지. 성화의 생일인 4월 3일 전이어야 하고, 그 전에 성화가 크게 다치거나 아픈 경우 시간이 되돌아간다. 생일이 지나서 다친 경우에는 이듬해 생일 전까지 더 다치지 않는 이상 시간은 정상적으로 흘러간다. 올해는 조용히 넘어갈까 싶었는데 하필 성화의 생일 전날 다쳐버렸다. 그렇게 윤호의 시간은 남들보다 더디게 흘러가는 중이었다. 그래도 자고 일어나면 다시 건강한 성화를 마주할 수 있다는 걸 좋아해야할지, 다시 또 다칠까 전전긍긍하는 1년을 보내는 걸 걱정해야할지. 머릿속에 생각이 가득 들어차 어지러웠다.

무엇보다도 이번에 1년의 시간을 되돌아가면 윤호는 다시 또 고백을 해야 했다. 15년의 시간을 건너 겨우 제 마음을 전했건만, 이런 식으로 다시 되돌아가야 하다니. 친구 이상의 관계로 나아간지 두 달이 막 지난 시점이었다. 다행히 마음의 방향이 같았고, 새로운 시작이었다. 하지만 오늘 밤이 지나면 다시 친구로 돌아간다. 조금 더 일찍 마음을 고백했다면, 달라졌을까? 괜시리 손 안의 야구공만 괴롭히다가 머리맡에 내려두었다. 이러나 저러나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출근 같이 해]

[2시까지 갈게] 오전 11:02

[ㅇㅇ]

오전 11:08 [도착하면 연락해]

 

눈을 뜨니 야속하게도 시간은 1년 전 4월 3일로 돌아가 있었다. 오늘은 경기가 있는 날이었고, 어김없이 출근 같이 하자는 성화의 메세지도 평소와 다름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올해 안에 다시 성화에게 고백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아올랐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이 정말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정윤호의 고백 대작전이 시작됐다.

서로 지겨울 정도로 붙어다니는 사이에 무슨 고백이 그렇게 어렵겠냐만은, 오히려 떨어지는 시간이 없기에 뭔가를 준비할 수도, 숨길 수도 없는 윤호였다. 게다가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편인지라 성화 옆에 계속 있으면 고백도 전에 어색해질 수도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투수조와 야수조 훈련 스케줄이 다르다는 것, 경기 중에는 붙어있는 시간이 많이 없다는 것 정도? 물론 경기 중에 다른 생각 할 겨를이 없겠지만 윤호는 일단 시도라도 해 볼 생각이었다.

아직 시즌 초, 남은 경기는 100여 경기. 자칫했다간 성화의 컨디션까지 흐트러질 수 있기에 조심스러웠다. 먼저 하고싶은 말을 차곡차곡 정리해보는 게 우선이었다. 저번에 무슨 말로 고백을 했었더라... 애석하게도 지난 번 고백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윤호는 펜과 종이를 찾아 들고는 생각나는대로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좋아해. 이건 너무 진부한데... 오래 전부터 이날만을 기다렸어. 이건 너무 올드해. 마음을 전하는 말이 이렇게나 다양할 줄이야. 윤호는 아직 잠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제 머리를 부여잡고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아, 평소에 책 좀 많이 읽을 걸. 이렇게 말을 못하는 사람이었다고 내가?

인터뷰는 곧잘 해왔기에 독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윤호였다. 하지만 막상 코앞에 닥쳐온 사랑고백이라는 난관에 과거의 제 모습을 후회하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누구한테 물어보지. 물어볼 사람도 없다. 선배들은 다 일찍 결혼해서 토끼같은 아이들도 있었고, 후배들 중에도 결혼한 사람이 꽤 있지만 여자한테 고백하는 거랑 남자한테 고백하는 건 또 다르잖아. 심지어 윤호는 성화와 꼬맹이 시절부터 같이 붙어다니던 사이라 다른 사람들이 고백하는 것처럼 하면 분위기만 얼어 붙을 게 뻔했다. 볼 꼴 못 볼 꼴 다 본 사이에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어떻게 해. 으으... 괜히 소름돋는 기분에 윤호는 몸을 떨었다. 그때 윤호의 머릿속을 번뜩 스치고 지나가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윤호의 기억이 맞다면 올해 윤호는 데뷔 통산 50승을 달성할 수 있는 해였다. 50승 달성하는 경기의 마지막 공을 성화에게 주면서 마음도 같이 전하면 좋지 않을까? 서로의 인생에 있어 물론 서로가 제일 소중했지만 그만큼 야구도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어쩌면 야구를 같이 해왔기에 둘이 지금까지 함께할 수 있었던 거라고 볼 수도 있다. 그만큼 성화와 윤호 모두에게 의미가 깊은 날 제 마음을 전하고 싶은 윤호였다. 꽤나 좋은 생각인데? 윤호는 종이에 50승이라고 크게 적고는 동그라미를 여러번 그렸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가 제일 열심히 전력으로 경기에 임해야 했다. 승부사 기질을 가진 윤호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동기부여가 되는 계획이었다. 기가 막힌 아이디어에 기분이 좋아진 윤호는 콧노래를 부르며 욕실로 향했다. 기분 좋은 하루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