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 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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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영은 그저 아픈 게 싫었다. 그래서 최대한 피해가고자 했을 뿐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똑똑한 티가 났다. 그래서일까 소년을 보는 어른들은 모두 이상한 눈을 하고 있었다. 분명 무서워했다. 두려워했다. 소년의 모습 위에 귀신이라도 겹쳐 보는 듯. 소년은 점차 자랐고 세상의 쓴맛을 알게 되었다. 쉽지 않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 무게는 소년이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웠다. 우영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절대 지지 말자. 그렇게 나약한 놈 아니잖아. 처음엔 손에 집히는 대로 책을 읽었다. 기록된 모든 지식들을 머릿속에 욱여넣었다. 그다음엔 눈을 감고 명상하듯이 생각을 정리했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장면을 포착해 머릿속에 나름의 규칙대로 분류했다. 하나의 요소에 대해 그 요소가 존재할 때와 존재하지 않을 때, 우영은 그렇게 모든 경우의 수를 헤아렸다. 고려해야 할 요소가 많아질수록 경우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우영은 그 모든 것을 헤아리고자 했다. 참 지긋지긋하고 괴로운 훈련이었다. 그렇게 우영은 강해졌다. 그가 머릿속으로 주사위를 굴리면 무작위의 어떤 우주로 이동한다. 결어긋난 세계들은 진짜와 가짜가 없이 확률에 의존해 묶여 있다. 완전히 나뉘지 못하고 중첩된 상태로 말이다. 오직 우영만이 그 허상의 우주에 다녀올 수 있다. 스무 살의 우영은 그렇게 성장통을 피해가고자 했다.
데드 셋
둘의 첫만남은 우영이 미성년자였을 때였다. 원래 머리 좋은 놈들이 더 잘 논다고, 우영은 딱 그런 애였다. 타고난 성깔 때문에 어른들 말씀 고분고분하게 듣지 못했다. 넌 똑똑한 애가 왜 그러고 사니. 선생이든 보호자든 초면 아닌 경찰관이든 다 똑같은 말만 했다. 그럼 우영도 똑같은 대답을 해줬다. 죄송합니다. 뒷말 잘라버리기에 제격인 말이었지만 중의적인 표현이기도 했다. 이렇게 살아서 죄송합니다. 어른 말 듣고 변할 마음 없어서 죄송합니다. 사실 하나도 안 죄송해서 죄송합니다. 학생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쨍한 빨간 머리, 턱에는 일회용 마스크 걸쳐놓고 경찰서 앞에서 땡땡이 치는 주제에 교복은 넥타이, 조끼까지 다 갖춰 입은 고딩 정우영 싸가지가 그 정도였다. 어두운 하늘 탓에 잘 안 보이는 컨버스 하이가 방금 떨군 담배를 지져 껐다.
우영은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대신 다시 시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10분 정도만 걸으면 아까 놀던 곳에 도착할 것이다. 우영은 이 지역에서 유명한 애였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만큼 그를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다. 시내에서 담배만 물었다 하면 금연구역에서 고딩이 담배 피운다고 바로 신고가 들어갔다. 우영은 의도치 않게 경찰 아저씨들을 괴롭히는 골칫덩어리가 되었다.
큰길 횡단보도를 건너고 시내에 들어서자 익숙한 포장마차들이 보였다. 가장 구석진 골목 한쪽에는 노상 분식집들이, 맞은편에는 가방 가게나 옷가게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그곳에서 가장 유명한 떡볶이집. 원래 자리가 없어서 못 먹고 아쉽게 쳐다보다 가는 그런 가게인데 이상하게 오늘은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왜 손님이 없지. 그냥 단순한 호기심에 멀찍이 서서 빈자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우영의 오른쪽 손목을 낚아채고 그 가게로 들어섰다. 우영의 몸이 저항없이 그 이끎을 따라갔다. 이건 뭐지? 교복 셔츠 위에 올려진 낯선 이의 손이 마냥 고왔다. 시선을 더 위로 향하니 검은 후드 모자를 눌러 쓴 인영이 보였다. 곧 완전히 자리를 잡고 앉은 낯선이가 그제야 후드 모자를 젖혔다. 부스스해진 검은 머리칼 아래로 보이는 얼굴이 예뻤다. 우영이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누구세요."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러자 남자의 사슴 같은 눈망울이 우영에게 향했다. 두 시선이 잠시 허공에서 얽혔다. 곧 남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
"돈 없어서 서있던 거 아니야? 형이 밥 사줄게. 나도 배고팠거든."
초면에 반말 까고 자신을 형이라 칭하는 꼰대 같은 태도가 거슬렸다. 예쁘게 생겨서 말은 안 예쁘게 하네. 하지만 본인이 교복 차림이었으므로 그냥 속으로만 생각하고 말았다. 뭐, 저 사람은 성인인가 보지. 저녁 챙길 생각이 없었던 우영은 얼떨결에 처음 보는 남자와 겸상하게 되었다. 뒤로 비치는 하늘빛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주인 할아버지가 전구 불을 켰다. 주변이 환해졌다.
남자는 떡볶이, 순대, 튀김, 잡채와 어묵 국물이 올려진 상 위에 소주병을 올렸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혼자 술을 따랐다. 그 모습이 검은 후드 속 살색과 겹쳐 처량해 보였다.
"저 주세요."
"고딩한테 술 받으라고? 됐어."
남자의 목소리는 조금 장난스러웠다. 그는 종이컵의 반 정도를 소주로 채웠다. 오늘 무슨 일 있었나? 하긴 처음 보는 고딩한테 밥 사준다고 포장마차 끌고 들어온 것부터 말이 안 됐다. 무슨 일이 없다고 하는 게 더 이상할 거다. 하지만 차마 직설적으로 물어보진 못하고 그저 젓가락을 깨작거렸다. 떡볶이로 젓가락을 가져가는 사이 남자가 종이컵 반 잔을 원샷하고 탁 내려놨다. 눈을 찡그리고 앓는 소리를 내는 걸 보니 술이 센 편은 아닌 게 분명했다. 우영은 저 사람보다 내가 잘 마실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남으면 내가 마셔줘야지. 괜히 쓸데없는 상상을 했다.
물도 없이 들이킨 소주는 빠르게 취기를 일으켰다. 남자의 긴 속눈썹이 파들파들 떨렸다. 어깨도 곧고 몸은 좋아 보였는데 가녀리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자꾸 몸 어딘가가 맥락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추워서 저러나? 소주 덕분에 좀 열이 올랐을 텐데도 아까보다 상태가 나아지는 것 같지 않았다. 어디 아픈 건 아닌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저녁 챙겨 먹나 했는데 오늘도 굶게 생겼다. 우영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는 잘 먹고 있긴 했으나……
"왜 자꾸 떨어. 어디 아파요?"
우영이 인상을 썼다. 얼떨결에 혼내는 듯한 말투로 쏘아버리고 말았다. 그만큼 거슬렸다는 뜻이다. 혼자 술 따르고 마시고 튀김 주워먹던 남자의 눈이 놀라서 잔뜩 커졌다. 오물거리는 볼이 점점 느려지고 입술은 앙다물어졌다. 튀김 먹을 때 묻은 기름 때문에 입술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우영의 시선이 자꾸 노골적으로 변했다. 그는 그런 우영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쿨한 척을 했다.
"감기 걸렸나 봐. 집이 원래 후지긴 했는데 최근에는 보일러까지 고장났는지 찬물밖에 안 나와. 집주인은 연락 안 되고 내가 고칠 돈은 없고."
"아."
"......"
"고쳐 줘요?"
개수작이다. 말해놓고는 본인이 더 놀랐다. 나 방금 뭐라고 했냐. 검은 마음이 필터링 없이 뱉어졌다. 우영이 어지럽게 제 머리를 흩트렸다. 그런데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는 엄청 감동받았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잘못 걸렸다. 정우영 19년 인생 처음으로 약점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우영은 어른들 머리 꼭대기 위에서 놀았다. 그가 보낸 편지 한 장에 사람 몇십 명이 사유 불명으로 해고됐다. 고위 간부가 아니면 알 수 없는 기업 정보가 털리면 임원들도 물갈이됐다. 세상에 이름 좀 알린 유명 기업들은 그를 두려워했다. 동시에 자기 편으로 섭외하려고 안달을 냈다. 우영은 그 줄다리기가 격해질수록 더 두터운 돈다발을 손에 쥐었다. 사실 세상은 우영을 잘 몰랐다. 그의 이름은 물론 나이나 외모 같은 기본적인 신상 정보, 그가 한 명인지 아니면 여러 명이 조직적으로 활동하는 팀인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모두 그의 능력 덕분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우영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정보는 없고 그저 소문만 무성했다. 확실한 건 사건 의뢰용으로 사용되는 추척 불가한 이메일 주소 뿐이었다. 업계 사람들끼리는 인삿말처럼 사냥개 조심하라고들 했다.
일에 발 들인 초기에는 영업 비밀이나 신기술 훔쳐서 다른 회사에 팔아넘기는 산업스파이 짓만 하다가 곧 엄청 큰 사건을 맡게 되었다. 배경은 IT 계열 대기업과 정부의 유착 관계. 나라는 기업의 탈세를 눈감아주는 대신 기업은 민간 사찰 기술을 개발하기로 한 뒷거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삼권분립 국가였던 탓에 검찰은 이 불순한 관계를 청산하려 움직이기 시작했고 기업 측은 최근 그 움직임을 감지했다. 기업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 사실을 정부에서 알면 기업이 버려질 것이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기엔 숨통을 조여오는 검찰이 두려웠다. 그래서 기업은 우영을 찾아왔다.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의 거금을 걸고 제발 우리를 도와달라 빌었다. 인정이 많은 사냥개는 그들이 내민 손을 잡아주었다. 우영이 맡은 구체적 임무는 검찰에서 이 사건 수사 담당이 누군지 알아내기. 아직 기소된 사건이 아니라서 서류상으로 담당자를 알아내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에 임무를 수행하려면 우영의 능력이 필요했다. 무려 검찰 잠입. 우영이 침을 꿀꺽 삼켰다. 스무 살부터 감방 인생 사는 건 싫으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고.
날을 잡았다. 수트 빼입고 구두까지 제대로 갖춰 신었다. 대충 검찰청 사람들 안에 섞여 있어도 티 나지 않을 차림처럼 보였다. 출입증 위조나 잠입 경로 같은 걸 고려할 필요는 없다. 방법은 간단하다.
먼저 눈을 감고 머릿속에서 주사위를 굴린다. 주사위 형상을 떠올린 후 주사위가 도르륵 굴러가는 상상을 하면 된다. 그럼 멈춘 주사위 윗면에 찍힌 점들이 보이는 대신 눈이 저절로 떠지면서 어딘가 이상한 세계가 보이기 시작한다. 방금 내가 있었던 곳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세계. 진짜 내가 살고 있는 시공간이 아닌 결어긋난 세계 어딘가로 이동한 것이다. 순간이동과 같은 개념은 절대 아니다. 그저 평소의 내가 살던 세계에 겹쳐 있을 뿐. 다중우주? 아니다. 하나의 우주가 그렇게 생겨먹은 거다. 세상에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있다면 우영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영은 그런 사람은 아마 저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한국에는 없음이 확실했다. 우영은 수많은 책을 읽기 위해 여러 언어들을 배워야 했다. 하지만 우영 본인도 이에 대해 정확한 개념이나 방법을 설명하는 건 불가능하다. 감히 인간이라는 존재가 미시세계를 엿보려 하는 건 신의 권리를 갖겠다는 거나 다름없으니. 오직 우영만이 상상할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이룰 수 있는 마법 같은 일이었다.
가고 싶은 시공간에 도달할 때까지 생각을 정비하고 반복해서 주사위를 굴린다. 그곳에서 우영은 무적의 상태다. 내가 사는 진짜 세상이 아니라는 생각에 자꾸만 대담해졌다. 뭔가 일이 잘못되면 원래 세상으로 돌아오거나 다시 눈을 감고 주사위를 굴려서 또 다른 나에게로 옮겨가면 된다. 위조한 출입증을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 다른 세상에 있는 어떤 내가 이미 출입증을 위조한 후 그곳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그럼 나는 주사위를 굴려서 그 상태의 내가 되면 된다.
그렇게 우영은 번듯한 수트 차림을 하고 손쉽게 대검찰청 내부로 들어섰다. 생각했던 것만큼 중압적인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건물 크기 자체가 꽤 컸다. 일을 빨리 처리하기 위해 사전 조사를 꼼꼼히 하지 않고 바로 들어온 탓이 컸다. 뭘 쫄아. 보안 철저한 회사들도 다 털었잖아.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걸으면서 생각해 보니 기소 영장이 없다고 해도 건물 내부에는 문서 형식으로 남겨진 자료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단 문서들을 보관해두는 자료실로 향하기로 했다. 엘리베이터 옆에 붙여져 있는 안내판에 의하면 자료실은 2층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무작정 종이들을 뒤져볼 생각에 벌써 귀찮음이 몰려왔지만 통장에 찍힌 금액을 떠올렸다. 지금까지는 임무 제대로 못 해냈다고 환불해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아직 신상이 털리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신상 털리는 것보다는 맡은 일을 못 해냈다는 것 자체가 꽤나 존심 상하는 일이었고, 업계에 사냥개 실력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해져서 일 못 하게 되는 건 시간 문제였다.
숨을 가다듬고 자료실에 들어갔다. 다른 시공간의 우영들도 자료실 보안을 뚫는 게 힘들었는지 주사위를 여러 번 굴려야 했다. 시간은 좀 걸렸지만 자료실 안에 무사히 들어오는 건 성공했다. 이제 노가다 뛸 차례였다. 허술한 철제 책장에 수없이 세워져 있는 파일들과 무자비하게 섞여 있는 종이 뭉치들이 보였다. 이거 종이 재활용하는 쓰레기장 아니야? 갓 발령난 신입 사원이 관리하고 있는 건지 서투른 손길의 흔적들이 선명했다. 진짜 골때리게 하네. 어쨌든 좀도둑 귀찮게 하는 건 성공했으니 유능한 직원일지도 모르겠다. 일단 가장 최근에 쌓아둔 것처럼 보이는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책장에 꽂힌 파일들부터 꺼내보기 시작했다. 종이는 바랜 곳 없이 새 것이 맞는데 하필 도박 같은 흥미 없는 사건들만 모아둔 파일이 걸렸다. 진짜 재미없다. 파일을 대충 닫고 다른 파일을 꺼내 읽었다. 이번엔 눈이 문제였다. 너무 안 보이는데……. 눈이 침침한 건지 어두워서 그러는 건지 글씨가 잘 읽히지 않았다. 이렇게 범행 장소에서 책 읽는 건 처음이라 손전등이 필요할 거란 생각은 미처 못 했다. 불 켜면 위험해질 텐데.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에 불을 켜려고 파일을 덮으며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방금 들어온 건지 문을 살포시 닫고 있는 어떤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아, 망했다. 제대로 걸렸구나. 얼른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에 눈을 감으려는데 살풋 보이는 인영이 익숙했다. 흑발은 갈색 머리로 바뀌어 있었지만 여리면서도 곧은 몸은 그대로였다. 물기 있는 입과 위태롭게 흔들리는 속눈썹도 여전했다.
작년까지 지방에서 고시 공부하던 성화 형은 대검찰청 소속사람이 되어 있었다.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은 바로 사라졌다. 우영은 들뜬 마음을 숨기고 성화의 바로 앞까지 걸어갔다. 도둑 주제에 참 대담한 행동이었다. 성화는 반응하지 않으려 했지만 커진 눈이 그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성훈은 우물쭈물거리던 입을 천천히 뗐다.
"누구세요?"
나 보고 누구냐고 물었다. 저 진짜 기억 안 나세요? 미쳤어요? 그날 기억이 전 아직도 생생한데요. 또 의도치 않게 형을 혼낼 뻔했다. 그래도 아직 이성이 우세한 건지 입이 제멋대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차라리 날 기억 못 하는 게 다행일 수도 있지. 나는 지금 침입자 신분인데. 아니... 그래도 좀 억울한데. 머리를 쓰면 지금 이 상황도 기회가 된다. 꾀를 부렸다.
"못 보고 가는 줄 알았어요. 제가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찾고 다녔는지 아세요?"
"네?"
"다시 찾아올 테니까 형도 저 기다리고 있어요."
눈을 감았다.
주사위가 굴러갔다.
눈을 뜨니 검찰청 밖이었다. 내가 출발했던 세상으로 돌아왔다.
*
그날부터 우영은 박성화 생각만 했다. 하필 적진에서 내 첫사랑을 찾다니. 다급한 마음에 일단 미끼를 던져보겠다고 기다려 달라 이래라 저래라 말하고 튄 것부터 후회가 막심했고. 만약 성화를 다시 찾아가게 된다면 어떤 정당한 사유를 들고 가야 할지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생각하느라 머리가 복잡했다. 똑똑한 머리도 첫사랑 앞에서는 철저히 쓸모없었다. 다행인 건 이 세상(출발한 세상)에서 저지른 일이 아니라는 거? 그래도 꿈처럼 완전 리셋되는 그런 가벼운 일이 아니다. 어쨌든 현실은 현실이다. 분명 그 사건이 이곳저곳에 영향을 미쳐 꽤 높은 확률로 성화는 그날 사건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 얼마나 많이 알고 있나 주사위 굴려 볼까? 아니, 그럴 용기가 없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그러니까 왜 그 사람을 사랑해서. 약점 없이 세상에서 제일 강한 자일 수 있었는데 왜 유일한 약점을 만들어서. 그건 과거의 나도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랑하고 싶다고 사랑하나... 과거의 정우영은 죄가 없다는 깨달음을 얻은 후에야 진정이 좀 됐다.
며칠 후. 이번엔 좀 편한 옷차림을 했다. 작년에 한창 신던 컨버스를 꺼내 신었다. 이건 일종의 도박이라 할 수 있는데, 성화가 절 기억해내면 상황이 꼬일 걸 알면서도 기억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히 들끓었다.
우영은 성화 때문에 처음 느껴본 감정이 많았다. 일단 누굴 좋아한다는 감정이 처음이었고. 그 마음이 발전해서 사랑이 됐고. 사랑도 처음이었고. 성화를 갖고 싶었고 나중엔 보고 싶었고 성화를 떠올리며 후회했고 간절하게 재회를 빌었다. 세상에 신이 존재한다면 분명 나일 텐데도 제발 성화에게 닿을 수 있게 해달라며 손을 모았다. 어쩌면 그 간절함이 우영에게 능력을 주신 걸지도. 우영은 성화 때문에 새로운 우주 속으로 들어갔다.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우주. 사는 재미가 있는 우주. 쉬워서 따분했고 지루했던 삶이 박성화라는 불씨 때문에 타오르기 시작했다. 우영은 살면서 처음으로 살고 싶어했다.
또 검찰청 앞으로 찾아갔다. 일부러 점심 시간에 맞춰서 갔다. 제일 막내 직급으로 추정되는 성화는 사람들이 꽤 많이 지나간 후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주사위 굴릴까?
됐다. 그냥 기다리자.
그렇게 건물 벽에 기대서 나오고 들어가는 사람들을 맥없이 쳐다보길 몇 분째, 단정히 셔츠 넣어입은 성화가 회전문 사이로 터덜터덜한 발걸음으로 빠져나왔다. 왜 저 형은 항상 아파 보여서 사람 신경 쓰이게 하지.
"박성화."
"어? 네?"
성화는 파드득 놀라며 주위를 둘러보더니 우영을 발견했다. 성화의 눈에 보이는 우영은... 어리다. 많이 쳐줘야 대학생 정도. 우영은 성화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이 형은 날 기억하는 박성화일까. 곧 성화는 한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기억났네. 그런데 좋은 반응이 아니다.
"너, 딱 걸렸어. 우리 구면이죠?"
성화가 자신의 갈색 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 넘기며 우영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날처럼 마주보고 서게 되었다. 우영의 시선이 살짝 위로 향했다. 깜빡 깜빡 움직이는 눈꺼풀에 시선이 머물렀다. 그리고 떠날 줄을 몰랐다. 꽤 긴 정적과 함께 이어진 감상이었다. 참다 못한 성화가 입을 떼려는 순간 우영이 먼저 선수를 쳤다.
"구면이죠. 형이 나한테 어떤 존잰데."
"뭐라고요? 진짜 어이가 없으시네요. 전 그쪽 때문에 시말서를 몇 장이나 썼어요. 팀장님이 경찰에 신고하려는 거 제가 말리느라 얼마나 애썼는지 아시냐고요. 저 공무원 된 지 일 년도 안 됐는데. 일단은 없어진 자료가 없어서 신고는 보류했고요. 아니, 그날은 도대체 어떻게 빠져나가신 거예요? 보안카메라 사각지대에서 놀랍게도 사라지셨던데. 거긴 나갈 길이 없거든요."
항상 느긋하던 성화가 웬일로 빠르게 말을 했다.
"알고 싶어요?"
성화는 허리에 손을 얹고 동시에 우영을 응시하며 인상을 썼다.
"끌고 가기 전에 솔직하게 불어. 어리다고 안 봐줘."
"그럼 번호 좀 알려주세요."
그날은 제가 정신이 팔렸는지 번호도 안 물어보고 보냈더라고요. 그래서 많이 후회했어요. 뒷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삼켰다. 성화는 선뜻 번호를 주지 못하고 열심히 고민했다. 갈 곳 잃고 흔들리는 동공이 성화의 복잡한 머릿속을 그대로 보여줬다. 순수한 건 여전하네. 곱게 뻗은 손이 움직이며 우영에게 휴대폰을 건냈다.
"번호 찍어."
그렇게 둘은 번호를 주고받았다. 마음 아프지만 일방적으로 통성명도 했고. 우영의 꼬심으로 같이 밥도 먹으러 갔다.
예상대로 성화는 서울에서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고 발령나서 상경한 지 얼마 안 됐다고 했다. 우영은 그가 지방에서 공부하다 올라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입 꾹 닫고 듣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아무튼 그렇게 검찰 수사관이 됐고 그동안 행정 업무만 하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수사팀에 들어갔다고 했다. 성화의 직속 상사인 검사님은 성화랑 나이도 비슷한데 정말 똑똑하고 일도 잘하고 심지어 키 크고 잘생겼다고 줄줄이 칭찬을 늘어놓았다. 태어나서 이렇게 엘리트 같은 사람 처음 본댄다. 뭘 처음 봐요. 그 사람보다 내가 더 똑똑할 텐데. 우영은 괜히 짜증이 났다.
"그 완벽한 팀장님 이름은 뭔데요?"
"정윤호. 이름도 멋있지."
그리고 본인은 원래 먹는 걸 정말 좋아하는데 팀장님을 포함한 팀원들이 다같이 점심을 먹으러 가면 잘 안 넘어가고 너무 불편해서 요즘은 밥 먹으러 갈 때 온갖 핑계를 대어서 빠지고 있다고 했다. 오늘 우영을 안 만났으면 과자 같은 거로 대충 때웠을 거라고 고맙다고까지 했다. 어쨌든 검찰청에는 친한 형이랑 잠깐 같이 들어간 거고 혼자 걷다가 길을 잃어서 그랬다고 우영은 그날 일을 얼렁뚱땅 넘기려 했다. 진짜 말이 전혀 안 되는 핑계였는데 성화는 일을 키울 생각이 없는 건지 이번엔 넘어가주겠다고, 그래도 너는 외부인이니까 다시는 들어오지 말라고 따끔하게 충고했다. 그렇게 그날은 굶을 뻔했던 점심도 챙겨 주고 기분 좋게 넘어가는 듯했다.
회사 앞에서 둘이 밥을 먹은 게 화근이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갈 때쯤 들어온 정 팀장님이 옥상으로 성화를 불러냈다. 성화는 그의 냉기에 덜덜 떨며 뒤를 따라갔다. 옥상에서 마주한 윤호의 눈빛이 차가웠다.
"그 꼬맹이랑 밥 먹더라?"
설마 그냥 봐줄 생각은 아니지. 이번에 우리가 캐고 있는 사건 때문에 그쪽에서 보냈을 수도 있잖아. 좀 친해진 거 같던데 성화야, 네가 걔 좀 털어와 봐.
"박성화 수사관 첫 임무야."
그렇게 이상한 잠입 수사가 시작되었다.
*
윤호는 그날따라 일에 집중을 못 했다. 책상 위에 올려둔 손만 의미없이 까딱거렸다. 톡톡 소리가 규칙적으로 났다. 발령난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신입 수사관한테 충동적으로 일을 맡겼다. 잠입 수사는 수사관한테 독단적으로 시킬 만큼 쉬운 일이 아닌데도. 모든 상황이 윤호의 신경을 긁고 있었다. 자료실에 허가 받지 않은 누군가가 침입한 건 심각한 일이다. 그래서 며칠 동안 보안팀을 오가며 모을 수 있는 자료들은 모두 모았다. 보안카메라에는 침입자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그런데 정말 말도 안 되게도 그 모습이 생겼다 사라졌다 했다. 사각지대를 지나 다른 카메라로 넘어가면 분명 전 구역에서 보였던 모습이 이어져야 했다. 없다. 여기도 없다. 경로 파악이 불가능했다. 동선이 제대로 이어지는 녹화 화면이 없었다. 물리적으로 전혀 설명이 되지 않는 상황이 윤호에게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리고 더 흥미로운 건 그 아이를 감싸고 도는 성화의 태도였다.
"그…… 경찰에 신고까지 할 필요 있을까요? 뭐 없어진 것도 없는데."
"물증이 안 남은 거지 아무것도 안 털렸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털린 게 있는지 여부만 따질 게 아니라 침입자가 있었다는 것 자체가 문제고. 그 사람 신원 특정도 못 했는데."
"신원 특정은 필요 없어요."
말끝을 흐렸다. 그게 왜 필요 없지.
왜냐면 성화는 우영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떻게 몇 년만에 어린 티를 벗은 건지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지만 같은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어두운 공간 아래 흔들리던 두 눈빛은 같은 주파수였다.
윤호의 머릿속에서도 둘이 원래 아는 사이라는 결론이 도출됐다. 그럼 성화는 그 사람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정상적인 일처리를 벗어난 행동이었다. 그걸 성화가 모를 리 없다. 알면서도 저렇게 떼를 썼다. 괘씸하게. 검사한테 검찰 수사관이 제대로 개기고 있었다.
"그럼 경위서 작성하세요."
성화는 바로 경위서를 작성해 왔다. 육하원칙에 의해 쓰인 제대로 된 내용으로. 그래도 사건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핑계로 써오는 족족 돌려보냈다. 다시. 그럼 성화는 입술을 짓이기더니 윤호에게 고개를 한 번 숙이고 얌전히 자리로 돌아갔다. 또 다시 내밀어진 종잇장들이 윤호의 책상 한 편에 쌓여갔다. 그걸 받아든 윤호는 화가 식기는 커녕 더 열이 났다. 왜 다 보안 허술하게 관리한 자기 탓이라고 하지. 이 사건의 책임을 보안 시스템에 떠넘긴다면 성화는 보안팀 직원이 아니므로 잘못한 게 일절 없다. 그런데 모두 자기가 잘못해서 벌어진 일이고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듯이 성실한 내용만 적어온다. 이 내용들이 아무리 논리정연하다고 해도 그 사람을 윤호 앞에서 어떻게든 감싸주겠다는 발버둥 그 이상이 되지 못했다. 성화가 설마 그걸 모를까? 아니. 일부러 이러고 있다. 사람 신경을 일관적으로 긁는다. 성화는 윤호가 바라는 대로 움직여줄 생각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벌을 준 게 며칠 전인데 오늘은 그 둘이 같이 밥 먹는 장면을 목격했다. 퍽 친해 보였다. 그냥 아는 사이 아니네. 친한 사이, 아니면 그 이상? 윤호에겐 저 관계가 기회였다. 무엇을 위한 기회인지는 모르겠으나.
덕분에 성화는 오전에 팀 전체 회의에서 이리저리 치이고 오후에는 윤호에게 따로 불려가서 휘둘리게 되었다. 내가 이런 취급 받자고 서울까지 올라와서 공부했나. 이제 좀 수사관다운 일도 맡고 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 인재로 인정받나 생각했는데 성화의 삶에는 모래바람이 일었다. 따갑고 괴로워서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윤호는 그런 성화를 봐주지 않고 계속 굴렸다. IT기업과 정부의 유착 관계를 파는 사건에 모든 팀원들이 전념할 때 윤호와 성화는 몰래 빠져나와 우영을 잡기 위한 덫을 놓았다. 성화도 나름대로 머리를 굴렸지만 윤호는 성화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그가 취할 수 있는 행동과 복잡한 생각들까지. 윤호는 성화가 우영을 빼내지 못하도록 성화의 모든 연락망과 동선을 감시했다. 섣부르게 행동하면 걔가 더 다쳐. 내가 잘해야 해. 성화는 마음에 솔직하지 못하고 우영을 잡기 위해 덫을 놓는 윤호에게 철저히 동조해야만 했다.
먼저 연락해서 만나라고 한 것도 윤호의 지시였다. 주말에 뭐 하냐는 성화의 물음에 우영의 마음은 붕 떴다. 이 형이 나 기억하나? 설마 나 좋아해? 저번 일은 성화가 넘어가주는 것 같았는데 굳이 다시 저를 보려고 하는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아니 날 알면 아는 티를 냈겠지. 그리고 둘의 첫만남은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별거 없었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는 게 더 이상했다. 그날의 기억을 아직까지도 끌고 오는 내가 진짜 미친놈이지. 괜히 의미 부여하지 말자.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고 성화에게 답장을 했다. 뭐 없는데요. 왜요?
왜냐는 물음에 성화는 그냥 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약속을 잡았다. 금요일까지 직장에서 엄청나게 갈궈진 상태로 토요일까지 연장 근무를 하게 된 셈이다. 윤호는 초 단위로 본인에게 관찰 사항을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초 단위로 연락하면 너무 수상하지 않나요. 저 공무원인데 주말까지 일해야 하는 건가요. 입술만 조금 움찔거리다 결국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다. 우리 팀장님 멋있다는 생각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밉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도둑질로 먹고 살다 보니 밤낮 바뀐 게 익숙했던 우영인데 토요일에는 알람도 없이 일찍 기상했다. 심지어 눈 뜰 때까지만 해도 점심 다 지나서 일어난 줄 알고 헐레벌떡 휴대폰부터 찾았다. 씨발. 나 늦은 것 같다. 미친놈 진짜 알람을 왜 안 맞춰서. 손 덜덜 떨면서 잠금화면 켜 보니까 일곱 시였다. 진짜 제대로 미쳤구나. 왜 이 시간에 눈 떠졌는지 잘 알아서 창피했다. 애꿎은 이마만 퍽퍽 쳤다. 입 꾹 닫고 숨기려 해도 들뜬 마음이 온몸으로 표출됐다.
준비하려고 옷장 열다 말고 주사위 굴렸다. 양심 팔아먹은 스토커짓을 하더라도 성화한테는 어떻게든 잘 보이고 싶었다. 성화가 다시는 오지 말라고 한 곳을 성화 때문에 다시 들어갔다. 주말이라 사람 한 명 남아있지 않은 성화가 속해 있는 부서 사무실이었다. 반부패부 수사지원과 2팀. 창가쪽 구석에 위치해 있는 성화의 자리가 보였다. 가서 수첩이든 메모장이든 뒤져보면 뭐든 나오겠지. 업무용 컴퓨터 열면 점심시간 남을 때 잠깐씩 구경했던 쇼핑 기록 남아 있을 거고. SNS나 메신저 PC버전 접속하면 친한 친구들이랑 한 대화도…… 미친. 순간적으로 돋아오는 소름에 눈 감고 바로 옷장 앞으로 돌아왔다. 좋게 말하면 직업병, 나쁘게 말하면 싸이코였다. 좋아하는 사람 상대로 할 짓이 아니다. 능력 써서 이것저것 털고 다니는 일을 밥 먹듯이 하다 보니 사리 분별을 못 했다. 아무리 이 짓이 익숙해도 박성화한테는 하지 말자. 형 앞에서는 주사위 굴리지 말자고. 인생 쉽게만 살아오다가 팔자에도 없는 도덕 챙기려니 꽤 인내심이 필요했다.
회색 후드티 위에 라이더 자켓 걸치고 아래는 바닥에 끌릴 것 같은 흑청바지. 신발은 무난하게 올드스쿨. 조금 부스스한 검정머리는 단정하게 누르고 앞머리만 조금 띄웠다. 이렇게 평범하게 입을 거면 왜 옷장을 한 시간이나 뒤졌는지 모르겠지만. 둘이 만나기로 한 곳은 사람 우글거리는 번화가는 아니지만 디저트 카페 때문에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리였다. 우영은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에어팟 꽂고 성화를 기다렸다. 두 귀로 들리는 음악이 잔잔하면서도 웅장했다. 그 이질감을 느끼다 멀리 서 있는 성화를 발견했다. 성화를 검은 블레이저 안에 검은 목티를 입고 있었다. 뒤에 가득 펼쳐진 봄꽃 풍경보다 그 위에 스며든 무채색이 더 눈에 띄는 게 이상했다. 같이 꽃구경 가는 건 안 되겠네. 박성화만 보이잖아. 우영은 뚜렷한 성화의 모습을 두 눈 가득히 담았다. 곧 성화가 그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우영에게 가까이 걸어왔다.
"나 보이면 부르지 그랬어. 기다리게 해서 미안."
"별로 안 기다렸어요."
점심 먹을 시간에 맞춰서 만난 거였는데 우영이 이끈 곳은 카페였다. 응? 나 밥 먹고 싶은데? 슬슬 뒷걸음질치던 성화는 우영에게 손이 잡힌 채로 끌려 들어왔다. 걷기 싫은 듯한 무거운 발걸음으로 카페 구석진 자리에 앉혀진 성화의 입꼬리가 눈에 띄게 내려가 있었다. 하나도 안 무서워 보이긴 했지만 어쨌든 우영을 째려보고 있었다. 우영은 그런 성화를 무시하고 다시 일어나서 혼자 주문까지 마치고 왔다. 어이없어. 마음대로 끌고 들어와서 마음대로 주문까지 해?
"너 뭐 하는 놈이야."
"뭐가 문젠데요."
반면 우영은 당당했다. 진짜 뭘 잘못했냐는 듯한 표정, 제가 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성화는 혀를 차면서도 피식 웃었다. 하는 짓이 귀엽네. 성화가 다 알면서 연기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혼자 데이트라고 생각하고 있을 우영의 속이 귀여웠다. 연기하는 것뿐이면 다행이지 상사 지시로 얘 탈탈 털러 온 악역인데 성화 앞에 앉아 있는 우영은 너무 태연했다. 그리고…… 해맑아 보였다. 순수한 애처럼.
곧 앞에 차려진 디저트와 음료들은 방금 전까지 우영이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성화의 입장을 완전 뒤집어 놓았다. 너 진짜 뭐 하는 놈이야? 성화의 얼굴에 어이없음이 번져갔다. 보통은 둘이 와서 한 조각 시킬까 말까 한 케이크인데 참 많이도 주문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케이크와 타르트들을 잘 맞춰 놓으면 한 판은 그냥 될 것 같았다. 배 터져 죽으라는 건지 하필 음료도 딸기 스무디다. 와중에 본인 거는 단 거 먹다가 물리지 말라는 뜻인지 아이스 아메리카노였고.
"이거 무슨 의미야? 싸우자고?"
성화의 표정이 꽤 진지했다. 이게 엿먹이는 거 아니면 뭔데.
"무슨 뜻일까요."
우영의 표정도 성화만큼 가라앉아 있었다. 우영에겐 저번에 컨버스 하이를 신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나 좀 기억해달라는 뜻. 직접 말했다가 형이 전혀 기억 못 하면 비참해질 것 같으니까 형이 생각해내든가 말든가 알아서 하라고. 유치한 행동 안에 담긴 뜻은 꽤 절절했다. 우영의 첫사랑이 이렇게 절절했다.
*
형은 소주를 귀엽게 홀짝거리면서도 멈추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내가아 여기에 혼자 있고 싶어서 있냐아? 뭐하러 이 아랫지방에서 혼자 살겠냐구 원래 집에서 공부하면 친구들이 자꾸 불러내고오. 그 동네에 딸기 스무디 맛있는 카페 있었는데. 먹구 싶다. 아 근데 거기는 학원 선택지도 몇 개 없는데 학원비 겁나 비싸서 별로야. 엉? 야 고딩…… 내 말 좀 들어바. 공부하면서 알바도 하고 가족 사정까지 다 들어주니까 진짜 죽을 거 같드라. 그래서 여기로 도망 온 거야. 난 여기서 논 적도 없고 항상 혼자였고 좋은 기억이 하나두 없다? 근데 내가 왜 굳이 여기서 공부하냐면. 용기가 없어. 걔네가 놀자고 불러내는 거 뺄 생각 없고. 올해 안에 시험 붙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우. 나 사실 도망 온 거 아니야. 쫓겨난 거야. 여긴 내 유배지야 난 여기가 너무 싫은데도 못 나가…….
"형."
"엉. 왜 불러."
"형 이름 뭐예요."
"박성화."
술주정을 한참 들어주고 나서야 형의 이름을 알아냈다.
"성화야."
"……."
"어디든 재밌는 건 있어. 잘 찾아 봐."
내 대답을 들은 형은 계속 조잘댔던 입을 꾹 다물었다. 허락 안 받고 뱉은 반말에 기분 상해서 저러는 거라 짐작했다. 내리깔아서 잘 보이지 않는 얼굴이 꽤 어두웠으므로.
혼자서 심지어 술 따라주는 상대도 없이 자작으로 소주 한 병을 다 들이켜버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남기면 아깝다는 핑계를 대며 소주병을 챙기려고 했는데 확인해 보니 바닥에 뭍어 있는 몇 방울 빼고 죄다 형이 마셔버린 뒤였다. 완전 말렸다.
고쳐 줘요? 그 말에 형은 꽤 감동받은 건지 나를 집까지 끌고 가려고 했다. 고딩한테 밥 사겠다고 잘난 척하던 어른은 어디 가고 돈 굳을 생각에 신난 개 한마리가 되어 있었다. 다 술 때문이었다. 붉게 상기된 볼을 하고 얼른 자기 집으로 가자며 손목을 잡아 끄는 형은 위험했다. 형이 위험한 게 아니고, 내가 위험했다. 제 삶에 들어오지 마세요. 있는 힘껏 형을 밀어내고 싶었다. 저는 이 삶에 미련을 두고 싶지 않아요. 원할 때 언제든 떠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여긴 너무 시시하고 제 감정은 항상 무미건조했거든요. 근데 형이 자꾸 이러면 이 삶에 미련이 생길 것 같아요. 돌아보고 싶을 거 같아요. 어떤 한 번을 더 갈망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요. 제발 저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저는 소중한 걸 갖는단 거 지키고 싶은 게 생긴다는 게 뭔지 몰라요. 그런데요. 형이 자꾸 이러시면 제가.
볼에 뜨거운 뭔가가 툭 닿는 느낌이 들었다. 손 들어서 만져 보니 젖어 있었다. 눈물이네.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을 제외하면 다른 사람 앞에서 우는 건 처음이다. 그때는 이 눈물의 등장이 신기하다고만 여겼다. 내가 눈물을 흘려? 신기하고 기이했지만 별 의미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뭔가…… 신선한 자극 탓일 거라 짐작할 뿐이었다. 차라리 그때 자각했으면.
눈물은 성장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럼 성장은 뭔데? 우영은 열병을 앓듯 아프기 시작했다. 눈을 뜨면 처음 본 성화의 모습을 생각했고 눈을 감을 때는 성화의 마지막 뒷모습을 생각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게 성장통인가. 아픈 건 싫은데. 아픈 게 싫다는 핑계를 대며 강해지려고 했다. 사실은 형을 잊고 싶었다. 거대한 바다에 뛰어들면 이런 아픔 따위는 그냥 잊혀질 거라 생각했다. 난 형을 지워낼 거야. 이 목표 하나만 보고 시작한 수련이었다. 그러나 우영의 무의식이 성화를 붙들고 있었다. 우영의 첫사랑은 그랬다. 신에게 성화를 잊을 수 있는 힘을 달라고 빌면서도 진심은 그렇지 못했다. 우영의 능력은 간절함으로 얻어낸 게 아니었다. 그 기만에 노하신 조물주가 우영을 더 강하게 만들어줬다. 어쩌면 벌의 일종으로 성화에게 다시 닿을 수밖에 없는 능력을 하사하셨기에. 그렇게 벌을 받은 우영은 다시 빌기 시작했다.
저 이제 신 같은 거 안 믿을래요.
불경을 고했으니 더한 벌도 달게 받겠다는 뜻.
"나 너 알아."
"네?"
"처음부터 알았으니까 그렇게 굴지 마. 신경 쓰여."
"무슨 소리예요."
성화는 우영의 말을 무시하고 앞에 놓인 딸기 스무디나 쪽쪽 빨았다. 우영은 딸기 스무디 컵을 앙증맞게 쥐고 있는 성화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 올렸다. 갑자기 맞닿아버린 두 손에 놀란 성화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우영을 쳐다봤다.
"무슨 소리냐고. 대답해요."
"넌 왜 그렇게 당당해?"
넌 왜 그렇게 당당하냐고. 형은 진짜 모르겠어. 너는 그동안 내 생각 많이 했나 봐? 있잖아, 우영아. 난 네 이름도 다시 만난 그날에야 알았어. 진짜 너무한 건 내가 아니라 너야. 나한테 억울한 티 내지 마. 그날 나 꼬셔 놓고 이름도 안 알려주고 도망간 거 너잖아.
"……안 꼬셨어요."
"뭘 안 꼬셔. 내가 혼자 헤롱헤롱 했어도 대충 다 기억하거든? 그날 내가 신세한탄 하는 거 네가 다 들어주면서 그랬구나 힘들었겠다 이런 말 계속 해줬잖아. 그리고 네가 찾아보라던 재밌는 거. 난 진짜 찾았거든."
"뭐였는데요."
"너."
"네?"
"너였다고. 근데 네가 택시 태워서 날 보내버렸어. 몸에 힘도 안 들어가고 너를 세게 붙잡을 수도 없었는데. 네 이름도 모르는 채로. 그래서 재미고 뭐고 다 던져버리고 바로 상경했다? 서울에서 매일 코피 터져가면서 독하게 공부했어. 내 일년이랑 바꿔서 얻은 거야, 이거."
우영의 눈 앞에 들이밀어진 카드형 목걸이. 성화의 수사관증이었다. 받은 지 몇 달 되지 않아 아직은 깨끗한 케이스 앞면에 성화의 미소 걸린 얼굴이 가득 차있었다. 그 밑에 박혀 있는 글씨는 대검찰청 박성화.
"이제 이거 버리려고."
너 덕분에 얻은 거니까. 널 위해 버릴 수도 있어.
그렇게 둘은 사라졌다. 성화는 우영과 자신의 모든 것을 맞바꿨다. 우영은 곧 잡힐 게 뻔했다. 흐릿하게라도 모습이 노출됐으니 흘러간 돈의 경로나 연락 수단도 금방 털릴 것이고. 모든 사고회로가 우영은 위험하다는 의견을 도출해냈다. 억지로라도 이렇게 해야만 했다. 이렇게라도 우영을 곁에 붙잡아 두고자 했다. 현금을 챙겼다. 차를 훔쳐 탔다. 달리는 도중에 휴대폰을 도로로 내던졌다. 우영은 눈을 몇 번이나 감았다 뜨면서 최대한 안전한 경로를 찾고자 했다. 성화는 운전석에 그대로 있는 동안 우영은 긴 시간을 들여 여러 우주를 뒤져 보며 도주로를 찾았다. 그렇게 주인 없이 버려진 집에 도착했다. 시골이라고 할 수도 없는 산속 깊은 곳. 누가 지어놨는지도 모르는 곳에 맨몸으로 들어갔다. 누군가 아주 가끔 오가는 펜션인지 다행히 뭔가 있긴 했다. 그래서 최대한 버틸 심정으로 눌러 앉았다.
몇 분은 몇 시간이 되고 며칠이 되고 몇 주가 됐다. 그곳엔 시계가 없었다. 바깥 세상에서 흘러가는 시간은 알 수 없었다. 온전히 둘의 시간을 만끽했다. 눈부신 햇빛 때문에 눈을 찌푸리며 일어나면 대충 아침이구나 짐작했고 밖에서는 새들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일으킨 우영 때문에 이불이 들춰지면 옆에 누워 있는 성화가 끄응 소리를 내면서 몸을 말았다. 우영은 굳이 형을 깨우지 않고 다시 이불을 덮어줬다. 찬장에 이미 놓여 있던 간편식품이나 조미료 그리고 산 아래 허름한 슈퍼에서 장을 봐온 재료들로 요리를 시작했다. 국 끓여지는 냄새가 집 안을 가득 채우면 머리에 까치집을 지은 성화가 눈을 비비면서 거실로 나왔다. 으응 우영아 맛있는 냄새 난다. 빨리 와서 앉아, 거의 다 됐어.
그렇게 밥을 먹고 나면 쇼파에 나란히 앉아 티비를 봤다. 빵빵 터지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기도 하고 잔잔한 여행 프로그램을 보기도 했다. 성화는 항상 우영한테 기대 앉았다. 어떨 때는 쇼파 위에 다리를 모아 안고 등을 기대기도 했고 어떨 때는 다리를 힘없이 뻗고 우영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묻은 얼굴을 좌우로 움직이면 우영이 반대쪽 팔을 올려 성화의 머리를 만져줬다. 제발 가만히 좀 있어. 간지러워.
"싫은데?"
성화는 장난기 가득 담긴 말투로 대답하고는 더 세게 얼굴을 파묻었다. 그럼 우영은 굳이 피하지 않았다. 조금 간지러웠지만 참았다. 성화가 지쳐서 다시 조용해질 때쯤 우영이 고개를 돌려 성화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성화는 굳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냥 크게 웃었다. 얼굴을 마주보지 않아도 성화의 행복한 얼굴이 우영의 눈앞에 그려졌다. 우영은 티비 화면에 눈을 둔 채로 소리내어 웃었다.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 탓에 나뭇잎들이 스치는 소리가 들리면 오후가 됐다는 뜻이었다. 항상 그때쯤엔 해가 반대 방향으로 넘어가 있었다. 둘은 점심을 거를 때가 많았다. 지금이 몇 시인지 모르니까 그랬다. 그래서 나뭇가지들이 세차게 흔들리는 오후쯤에야 간식을 챙겨 먹었다. 펜션에는 운이 좋게도 오븐이 있었다. 둘은 예전에 서투르게나마 해봤던 경험을 떠올리며 베이킹에 도전했다. 처참히 실패해도 둘은 마주보고 웃었다. 어느 날은 티비에서 마카롱 만드는 방법을 알려줬다. 우영은 종이와 펜을 찾아내어 꼼꼼히 받아 적었다. 준비물. 아 이거 없던데. 사야겠다. 만드는 방법. 되게 복잡하네. 할 수 있을까. 속세를 벗어난 둘에게는 남는 게 시간이었다. 꼬박 며칠을 마카롱에 투자한 결과 제법 그럴듯한 마카롱이 만들어졌다. 성화가 마카롱을 한입 베어 물고는 팔아도 되겠다며 우영을 칭찬했다.
"우리 이거 팔아서 돈 벌까?"
"근처에 사줄 사람이 누가 있는데요. 아예 사람이 없잖아요."
"아. 그러네. 그냥 우리끼리 실컷 만들어 먹자."
해가 질 때까지 둘은 소박하게 놀았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달이 뜨면 성화는 우영의 아래에서 밤새 울었다. 성화는 숨이 넘어갈 듯이 헐떡이면서도 우영의 목을 얽어맨 두 손을 풀지 않았다. 커튼으로 가린 창문은 밤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려주지 못했다. 몇 시간이 흘러도 그저 어둡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자야 할 시간이 넘었는지, 애초에 언제 자야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둘의 독립된 시간은 자꾸 흘러갔다. 같은 하루의 패턴일지라도 매일이 색다르게 느껴졌고 매순간이 행복했다. 그 세계엔 서로가 전부였기에.
어느 날은 성화가 우영의 어깨를 붙잡고는 꽤 진지한 표정으로 말 걸었다.
"나 너 보통 사람 아닌 거 알거든.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 봐."
그래서 진짜 솔직하게 알려줬다. 사실은 그러려고 했는데 완전히 솔직하지는 못했다. 제가 형을 너무 좋아해서 이렇게 돼버렸어요. 그 말은 죽어도 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서 굴러가는 주사위, 확률로 겹쳐 있는 우주들. 말도 안 되는 공상적인 이야기들을 성화는 가만히 듣고 있기만 했다. 어쨌든 대충 둘러대긴 했는데 형이라면 분명 알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요 형.
"저 여기 오고 나서는 주사위 굴린 적 없어요."
그러니까 둘이 같이 살기 시작한 날부터는 계속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뜻이다. 모든 기억을 함께 공유하고 있으니 괜히 서운해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했고. 뒤늦게 그 뜻을 알아차린 성화가 작게 웃음을 지어 보이자 깜찍한 입꼬리가 생겨났다. 우영은 거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형 완전 토끼 같,"
토끼 소리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내 업무용 이메일. 우영의 이메일은 암호화 프로그램에서 임의로 정해 준 문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대충 골뱅이 앞까지 미친 토끼 비슷한 철자였다. 그러니까 우영은 몸을 숨기기에 바빠 비대면 사건 의뢰함은 정리하지 못했던 것이다. 순식간에 우영의 얼굴이 창백하게 썩어들어갔다. 이건, 진짜, 어떡하지...
"갑자기 왜 그래?"
우리 형 어떡하지.
우영의 얼굴이 사색이 되던 그 짧은 순간 떠올린 최악의 상황. 티비 근처 서랍에 방전된 채로 처박혀 있던 구식 노트북을 급하게 꺼내들고 전원을 연결하는 우영의 손이 잘게 떨렸다. 우영이 조악하게 보안 프로그램을 세팅하고 이메일에 접속한 순간 제발 그것만은 아니길 빌었던 최악의 상황이 현실로 성큼 다가왔다. 우영에게 설명 한 줄도 듣지 못했지만 좋지 못한 상황이라는 걸 느낀 성화는 멍한 표정으로 우영의 반응을 살필 뿐이었다.
최근 도착한 메일부터 위에서 아래로 메일함이 터질 듯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의뢰인 정보까지 넘길 거냐고 묻는 무례한 연락들, 검찰의 조사 출석 요구, 기업들의 비밀유지 조항 확인을 가장한 협박, 위약금 요구 등 다양한 발신자들과 가지각색의 편지 제목들이 우영의 시야에 들어왔다. 사실 그런 것들은 우영의 관심 외였다. 우영이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사냥개 사냥건이 순조롭게 진행되던 그 주 토요일. 프로젝트를 이끄는 윤호와 성화가 함께 사무실에서 나왔고, 건물 밖으로 나갔고,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함께 이동했다. 누군가와 접선한 작전자 박성화가 그 이후 종적을 감추고 사라졌다. 윤호는 손을 잡고 사라지는 둘의 뒷모습을 보았다. 항상 성화의 목에 항상 걸려 있던 공무원증 목걸이가 길바닥에 내던져져 있었다. 윤호가 그 카드형 목걸이를 주워들고 성화의 반명함판 사진을 오랫동안 쳐다봤디.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단순히 궁금해서. 우영이 여태 숨어왔던 공간 속에 너를 숨긴다면 다시는 찾을 수 없지 않을까. 윤호가 손바닥 안에서 거슬리는 목걸이 끈을 세게 움켜쥐며 비릿하게 웃었다.
성화가 사라지고 사냥개를 쫓던 윤호의 팀 내부에서부터 대법원 전체에, 기자들에게, 산업스파이 구설수에 관심이 많은 변호사 업계에, 사냥개의 고객일지도 모르는 기업에게, 포털사이트 카페에, 가쉽을 다루는 유튜버에게, 인터넷 뉴스에, 그러니까 꽤 많은 사람들에게 사냥개 이야기가 퍼졌다. 신통한 기술로 온오프라인에 있는 사업 관련 극비 자료들을 빼내 사업을 엎어버리거나 직접 회사에 연락해 내부 사람들을 조종하듯 마음대로 움직이거나. 그런데 빼돌린 정보로 직접 돈을 요구한 적은 없어 의뢰비가 상당할 것으로 추측되며 호화로운 삶을 누리고 있을 거라는 등 온갖 소문들이 끝을 모르고 퍼져갔다. 암튼 떠드는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사냥개를 쫓는 움직임도 윤호의 팀을 떠나 형사기소를 위해 경찰이 직접 수사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여기서 피고인은 누구일까. 흐릿한 씨씨티비 화면 속에 한 번 잡힌 게 끝인 그 범인이 우영이라고 특정할 수 있었을까.
우영이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메일햠 속 발신자들이 나오라고 외치는 것은 박성화였다.
*
우영은 거칠게 닫은 노트북을 꽉 끌어안은 채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슨 일이냐고 점점 다그쳐 오는 성화와 눈조차 맞출 수 없었다. 내가 형을 사랑해서 얻은 능력으로 형을 망치다니, 너무하잖아. 이런 운명은 가혹하잖아. 차라리 내가 죽어야 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했다면 고민 없이 죽었을 텐데 내 삶은 어떻게 되든 상관 없는데 왜 성화 형이 미래에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우영은 성화의 미래가 온전히.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작은 가능성 하나를 떠올렸다. 해본 적도 없고 순순히 현실이 되기에는 너무 어려운 일이지만 이미 엎어진 물을 주워담으려면 어려운 방법밖에 돌파구가 없었다.
"미안. 별일 없어. 근데 나랑 하나만 약속해."
"응."
"이 노트북 일주일만 내가 쓸게. 그동안 형 혼자 놀고 있어. 나 잠깐 공부할 게 있어서."
어안이 벙벙해보이는 성화를 우영이 꽈악 안고 머리를 몇 번이나 쓰다듬었다. 내 부탁 한번만 들어주라, 응? 성화는 옆으로 내려온 머리칼을 우영의 어깨에 부비며 우영의 품을 더 파고들었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나 가만히 있을 테니까. 성화는 결국 아무것도 모른 채 우영이 굳게 닫아버린 방문 밖에 남겨졌다.
우영은 첫사랑의 열병을 앓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는 단순히 형을 원한다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형이 밉고 앞으로 다시 보지 못하더라도 형이 보고 싶다는 마음이 강렬했다. 그럼 지금 이 마음은 뭘까. 형의 일상이 이전처럼 평범하기를. 어떤 사건에도 휘말리지 않고 행복하기를. 그 행복 속에 내가 없어도 되니까 제발 형을 되돌려놓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그 방법은 어디 쓰여 있지도 않고 누구에게 배울 수도 없는, 우영에게 창조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시간 또한 차원의 한 종류. 우주 넘나드는 것도 되는데 시간선 비트는 건 불가능할까. 우영은 다시 책을 펼쳤다. 낮에는 거의 방 밖으로 나가지 않고 우영만이 알아볼 수 있는 낙서만 늘어갔다. 해가 지고 몇 시간이 지나 우영이 거실에 나와보면 거실 쇼파에 누워 이불을 덮고 자고 있는 성화가 있었다. 우영은 쇼파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성화의 얼굴을 한참 응시하다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성화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보는 사람은 없었지만 성화는 이불 속으로 얼굴을 숨겼다. 성화는 우영이 왠지 저를 떠나버릴 것 같은 불운함을 느꼈다.
성화와의 도피 후 줄곧 시간을 흘려보내며 살아왔다. 지금이 몇 신지 확인하지 않았고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우영은 이제 흘러간 시간들을 도로 쓸어담으려 한다. 무한히 많은 수의 갈래로 가지를 뻗치던 다중우주들의 선을 한 손에 움켜잡고 구부려놓을 것이다. 우영은 스케치북을 연습장처럼 쓰며 시간선이 구겨질 모양을 설정했다. 통째로 쥐고 작게 한 바퀴를 돌려 다시 정방향으로 놓아둔다면? 우영은 돌아가는 시간선을 온전히 따라가며 기억할 거고 우영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미래로 흐르는 시간만을 겪을 것이다. 그러니까 중간에 꼬인 시간선은 그대로 삭제되고, 다시 정방향에 놓인 시점부터 사람들도 다시 움직이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 형도 인생 꼬이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우영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바로 앞에 성화가 축축한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우영의 심장이 크게 내려앉았다.
"왜 여기 서 있어. 기다렸어?"
"으응, 얼굴 못 본 지 며칠 됐으니까......"
"노크를 하든가 앞에 있다고 말하지."
"너 방해하기 싫어서."
"그래. 고마워."
"우영아, 나 부탁 있어."
"응. 말해."
"말없이 나 떠나지 마. 인사라도 하고 가."
문장이 끝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성화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쏟아졌다. 성화는 우영의 어깨에 손을 얹고 상체를 겹쳐 왔다. 우영은 성화의 허리를 약하게 쓰다듬었다. 우영의 어깨가 흠뻑 젖어갈 때쯤 우영은 성화의 뒤통수를 끌어당겨 자신에게 완전히 파묻히게 했다.
"형은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
"다시는 울 일 없게 해줄게."
여전히 불규칙적으로 헐떡거리는 성화의 몸이 느껴졌다. 우영은 눈을 감았다. 까만 배경 속에서 주사위가 움직였다. 그동안 멀리 굴러가기만 하던 주사위가 우영을 향해 굴러오고 있었다. 우영은 면 위에서 변하는 점의 개수를 세며 작은 소원을 빌었다. 성화 형이랑 잠깐이라도 스칠 수 있었으면. 멀리서라도 형을 볼 수 았다면. 내가 찾아준 성화 형의 행복을 확인하기만 할 수 있다면. 우영이 쥐고 있는 세상들의 역재생이 느껴졌다. 수많은 우주의 수많은 순간들이 뒤로감기됐다. 모든 사람들의 행복했던 순간과 끔찍했던 순간들이 모두 증발하고 없었던 일이 된다. 성화가 흐려지는 감각에 우영의 미간이 찌푸러졌다. 형과 멀어지는 선택을 한 게 나라니. 사랑을 최악의 끝으로 처박고 있는 건 우영 자신이었다. 너무 싫어.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았어. 우영의 머리가 터질 듯이 과열된다.
그리고 우영이 살며시 눈을 떴다.
벌어지는 눈 틈새로 들어오는 따가운 햇빛, 그와 대비되는 차가운 바람은 우영의 머리카락을 흩뜨렸다. 우영은 바스락거리는 빵빵한 검정 패딩과 노란빛의 통 넓은 청바지를 입고 밑창 두꺼운 스니커즈를 신고 있었다. 나는 지금 어느 지점에 있을까. 주머니에서 꺼내든 핸드폰은 한참 전 우영이 썼던 홈버튼이 있는 진한 회색의 아이폰이었다. 우영은 고물 휴대폰을 보고 한 번, 켜진 배경화면에 써진 날짜를 보고 또 놀랐다. 막 스무살이 된 그해 1월에 우영이 도착해 있었다. 그때의 우영은 성장통을 앓기 전의 우영이다. 다시 말해 당분간은, 어쩌면 계속 우영은 능력을 사용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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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젊어진 우영은 예전의 추억을 회상하며 그때보다 더 여유로운 태도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돈이 없어도 큰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서점 파트타임으로 주 6일을 출근하던 우영은 기어이 집 근처 카페 알바를 끼워넣어 휴일 없는 일주일을 만들어냈다. 어릴 때는 돈 문제에 항상 쫓기도 일하는 것도 싫었는데 다시 살아보니 평범한 스무살들처럼 출근하는 일상도 소소한 재미로 느껴졌다. 예전엔 싫어했던 뿔테 안경도 챙겨 쓰고 서점으로 향했다. 출근해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대청소였다.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질도 하고, 먼지털이로 책장을 포함한 매장 곳곳을 청소했다. 30분 정도 계속되는 혼자만의 대청소를 하다 보면 온갖 사색이 떠올랐다. 오늘 하루 손님들은 누굴지, 다음주에 나오는 신간들은 얼마나 잘 팔릴지, 사실 시덥잖은 것들은 가식이 만들어낸 것들이고 우영은 이 세상의 성화가 고딩 정우영을 만난 성화일까 미칠 듯이 궁금했다. 일단 다른 우주의 대부분도 우영이 능력을 얻기 전으로 돌아갔을 테지만 어떤 우주에서는 우영이 또 미친 사냥개짓을 하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제 우영은 그러한 가능성들에 대해 확인할 수 없다. 우영은 평범한 일반인이 되었다. 성화도 아마 범죄자의 누명을 쓰는 일 없이 평범하게 살아갈 가능성이 높았다. 예전엔 궁금한 게 있으면 다 확인할 수 있었는데 갑자기 손발이 묶인 우영은 그저 속이 터질 듯한 갑갑함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우영은 청소를 마치고 모든 조명을 환하게 켜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오전의 방문객으로는 주로 여유롭게 책을 읽는 시간이 좋아서 자주 와주시는 단골손님들이 많았다. 우영은 안경 너머 그들의 행동을 무심하게 살피고, 들어오고 나가는 그들과 짧게 이야기를 나눴다. 다음에 또 오세요. 마음에 드는 책을 사들고 가는 분께는 예쁘게 인쇄한 서점만의 책갈피나 신간 홍보용 엽서를 함께 드리고 웃으며 배웅해드렸다. 사람들은 앳된 서점 청년에게 왜 이렇게 싹싹하고 철들었냐며 기특하게 바라봐줬다. 그 얘기는 예전에도 많이 들었었지만. 감사합니다. 지금은 2회차라서.
마감 후 퇴근길의 우영은 마트에 가서 소소하게 장을 봤다. 처음 스무살 때는 편의점에서 밥을 사먹는 게 흔했지만 지금은 나름 요리도 할 줄 알고 직접 해먹는 게 더 편했다. 펜션에서 쓰러질 듯한 슈퍼로 장을 보러 갔을 때 식재료를 왕창 담아와 냉장고 가득 욱여넣던 순간이 기억나는 거 빼고. 마트에서 나올 때마다 둘이 같이 샀던 것들에 비해 너무나도 소박해진 손 안의 물건들을 보면 또 성화 생각에 이를 꽉 깨물었다.
퇴근 후 늦은 시각 우영은 집의 조명을 간신히 앞이 보일 정도로만 어둡게 켜두고 살았다. 성화가 사라진 집에서 굳이 밝게 지낼 필요가 없었다. 눈에 잠깐 담고 싶은 존재도, 오랫동안 관찰하고 싶은 것도 사라진 공간은 그저 어둠으로 채워버리고 싶은 불필요한 곳이었다. 우영은 대충 밥을 먹고, 구깃구깃 빨래를 개고, 정돈되지 않은 이불 속에 누워 잠을 청했다. 서점에서 나른해질 때마다 들이킨 아메리카노 덕에 매일 잠에 드는 데에만 한참이 걸렸다. 어둠 속에서 잠들기만을 기다리다 보면 결국 우영의 머릿속엔 성화가 가득 채워졌다. 난 이제 아무것도 못해. 더 이상 어른들 골칫거리도 아니고 남들은 모르는 비밀 훔쳐보는 짓도 못 하고 형한테 달려갈 수도 없어. 형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 그나마 형과 스치기 전으로 완전히 돌아간 건 아니라 다행이야. 내 이름 기억 못 해도 되니까 그냥 연이 닿았었다는 것만으로도... 우영은 축축한 속눈썹을 억지로 붙이고 잠에 들었다.
다음날 우영은 대충 씻고 카페 출근 준비를 했다. 이상하게 아침부터 햇빛이 쨍쨍해서 평소보다 더 멀끔한 꼴로 나가고 싶었다. 우영은 조금 만진 머리에 뿔테 안경을 쓰고 면 재질의 파란색 셔츠와 검정 슬랙스를 갖춰 입고 패딩을 챙겨 집을 나섰다. 물기 하나 없이 청명한 하늘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날씨 참 좋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처음 스무살일 때와 두 번째 스무살을 맞는 우영에게 차이가 있다면 우영은 이제 노래를 잘 듣지 않았다. 사랑을 시작하고 끝내는 온갖 노래들을 이어폰을 통해 듣던 우영은 길거리에서 주저앉곤 했다. 대낮에도 한참을 길바닥에 쪼그려 고개 처박고 있던 우영은 이제 노래도 못 듣겠네 싶었다. 우영은 외출할 때마다 주머니에 쑤셔넣던 줄이어폰을 더 이상 챙기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떠들고 빵빵거리고 굴러다니는 온갖 소리들에도 우영은 평온한 얼굴로 걸어다녔다. 더러워도 다 소중한 일상이야.
오픈조로 카페에 출근한 우영은 서점에서처럼 똑같이 물류를 정리하고 가볍게 청소를 했다. 우영은 카페에 출근한 날은 우영이 맞는 첫 손님이 그날의 일진을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주말 아침부터 커피 사러 오는 사람이 보통 평범하진 않으니까. 저저번주 첫 손님은 남자 알바생인 우영한테 추근덕대는 미친 할아버지, 저번주 첫 손님은 잠옷 입고 나와서 우영 얼굴을 보자마자 급하게 옷매무새 다듬는 귀여운 여학생이었다. 오늘은 또 어떤 기억에 남는 손님이 찾아올지 우영은 내심 기대했다. 그런데 오픈 시간이 십 분이나 지나도록 카페로 들어오는 손님은 없었다. 우영은 괜히 앞치마를 다시 매고 셔츠 소매도 다시 걷어봤다. 고개를 숙인 채 머신 앞을 서성거릴 때 문이 열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어서 오세요."
빠르게 대답 먼저 하고 고개를 든 우영 앞에는 마지막 기억보다 훨씬 앳된 모습을 하고 있는 성화가 서 있었다. 얼굴은 더 어려 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성숙함을 내뿜는 검은 머리칼이 살랑살랑거리는 말캉한 얼굴로.
"안녕?"
마치 다 알고 왔다는 듯이, 나를 찾아 왔다는 듯이 말을 거는 성화의 모습에 우영의 오른팔이 잘게 떨렸다. 이를 악물고 아무말도 하지 못하는 우영의 모습에 스물한 살의 성화가 밝게 웃었다.
"왜? 형이 너 보러 올지 몰랐어?"
단순히 올지 몰랐다는 것에 놀랐을까. 내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형과 영영 이별했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가다듬는 중이었는데 눈앞에 형이 나타난 이 상황에서 고작 그만큼 놀랐을까. 우영이 어이없음에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자 성화가 예쁜 미소를 지어보이며 깨끗한 향수 향을 발산했다. 그 향이 들어오는 짧은 순간 동안 우영은 생각했다. 어쩌면 세상을 통째로 뒤로 감은 것은 형과의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그때의 내가 형과 헤어진다는 결단을 어떻게 내렸고 갑자기 리셋된 스물한 살의 성화 형이 나를 왜 찾아왔을까. 둘 사이엔 끊어지지도 늘어나지도 않는 선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붙였다 뗐다 접고 비틀었던 시간선 말고 더 단단하고 굵게 존재하는 선이 있는 것만 같았다.
운명이 뭔지 뼈저리게 깨닫는 날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