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해서 이렇게 사랑할 수는 없다.
욕정 아래 한없이 짓눌리며, 쏟아져 내리는 절박함을 가까스로 받아내며, 성화는 생각한다.
—
촌스러운 붉은빛 스포트라이트. 싸구려 레자 재킷. 가볍게 얽은 미간. 삐딱하게 짚은 다리. 종잡을 수 없는 후렴구. 어딘가 어설프면서도 구슬픈 기타 리프. 공연이 끝난 뒤, 앰프 선을 잡아 뽑는 거친 손길. 건물 뒤편에서 연신 오르던 담배 연기. 가로등 빛에 번들거리던, 젖은 두 눈.
그중 하나라도 없었더라면, 이렇듯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
눈을 뜨니 무언가 타는 냄새가 성화를 맞는다. 어쩌면 그 냄새가 눈을 뜨이게 한 걸지도 모른다. 간신히 상체를 일으키니 접시 하나가 눈앞에 내밀어진다.
자.
가라앉은 목소리가 외마디만을 뱉는다. 간밤에 제 가슴팍 위로 흩어지던 낮은 신음이 떠올라 문득 몸이 흠칫 떨린다.
잔기스가 잔뜩 난 미백색 접시 위에 토스트가 덩그러니 얹혀 있다. 토스터기의 격자무늬가 찍힌 식빵 사이에 달걀 프라이가 삐죽 튀어나와 있다. 빵을 한 입 베어 물자 그 사이로 케첩과 마요네즈가 흘러내려 접시 위로 뚝뚝 떨어진다.
잠기운이 미처 가시지 않은 머리로도 알고 있다. 서툰 솜씨로 준비해 준 아침 식사가, 제 정수리에 내려앉는 불안한 시선이 꺼내려는 말이 무엇인지. 한참을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이 또다시 외마디를 내어놓는다.
형.
응, 윤호야.
그렇게 마음먹은 것도 아닌데 부름에 대답하는 제 목소리가 다정하다. 마치 떼를 쓰는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찬찬히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지듯이.
나 돈이 더 필요해.
윤호의 음절들이 뒤섞인 케첩과 마요네즈처럼 접시 위에 떨어진다. 성화는 얼룩덜룩한 접시 위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왜, 뭐에 쓰려고? 그렇게 묻지는 않는다. 이미 알고 있으니까.
시선을 바닥에 떨군 채로 일어나 욱신거리는 몸을 끌고 부엌으로 향한다. 냉장고 문을 열자마자 케첩 통 아래에 깔린 두툼한 봉투가 눈에 들어온다. 그 안에 든 일 달러짜리 지폐 다발을 어림해 보다가는 그만둔다. 거실 겸 침실로 돌아온 성화는 봉투째로 그것을 내민다.
이거 다음 달 월세야, 라고도 하지 않는다. 윤호가 이미 알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마찬가지로 말없이 봉투를 받아 든 윤호가 그 안에서 일 달러짜리 지폐 다발을 꺼내 어림해 보다가는 그만둔다. 그러곤 봉투를 소중하리만치 한 손에 쥔 채, 다른 손으로 제 몫의 토스트를 입으로 가져간다. 그 사이에서 케첩과 마요네즈가 뒤섞여 뚝뚝 떨어지는 광경을, 성화는 그만 질식할 것 같은 기분으로 바라본다.
—
그만하라고 해야 되지 않겠냐?
스피커에서 지직거리며 흘러나오는 기타 솔로 사이를 비집고 들려온 질문이 가슴께에 무겁게 가라앉는다. 성화는 비어버린 지 오래인 잔을 두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말을 고른다.
수용 인원이 오십 명 남짓이나 될까 말까 하는 언더그라운드 바 겸 공연장의 객석을 채우고 있는 건 그들 말고는 이미 만취한 커플과 나이 지긋한 노인 한 명뿐이다. 그들이 어떤 경위로 그곳에 앉아 있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음악을 감상하러 온 것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성화가 처음 이 도시에 왔을 때부터 그를 알아 온 바의 주인이 덧붙인다.
응? 너를 위해서라도.
성화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무대로 향한다. 촌스러운 붉은빛 스포트라이트, 그 아래 싸구려 레자 재킷을 걸친 그의 연인이 기타를 연주하고 있다. 아는 음악이라곤 여느 라디오 채널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뿐인 성화에게 윤호의 연주는 불가해하다.
들어도 들어도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상상이 성화를 슬프게 한 적은 없다. 이해하고 싶어서 그 슬픔과 고통에 찬 눈동자를 마주 바라봤던 것이 아니다. 그저 그를 안아주고 싶었다. 그러지 않으면 그는 영원히 저 무대 위에서 홀로 외로운 연주를 계속할 테니까. 출연료를 받기는커녕 무대를 빌리기 위해 하룻밤에 오십 달러씩 써 가며. 성화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그러나 낮게 잠긴 목소리로 답한다.
이게 절 위한 거예요.
—
버스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잡힌 손이 거칠게 끌어당겨진다. 빠른 발걸음으로 앞서나가는 윤호의 뒤를 성화는 바지런히 쫓는다. 조금이라도 주저했다가는 거꾸러질지도 모른다. 제가 거꾸러지면 윤호도 거꾸러진다. 그렇다고 믿는다.
현관문이 등 뒤로 닫히는 것보다 윤호의 입술이 제 입술을 먹어 치우듯 빨아당기는 게 더 빠르다. 침대까지는 고작 네 발짝, 아니, 세 발짝 반이지만 윤호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옷 속 여린 살갗을 쥐어오는 손길이 우악스럽다. 성화는 체념하듯 눈을 내리감는다.
허름한 클럽 공연장 뒤편, 느리게 깜박거리는 가로등 아래서 윤호와 처음 입을 맞췄던 순간부터 각오했던 일이다. 언제든 그가 원할 때 그를 받아주는 것. 그럴 준비가 되어 있는 것.
오늘도 집을 나서기 전에 아랫배에 똬리를 트는 불쾌한 감각을 견디며 관장을 했고, 바에서도 진 토닉 외에는 입에 대지 않았다. 때로는 제가 매번 너무 철저하게 그의 절망을 받아줄 준비가 되어 있는 탓에 윤호가 또다시 실패하는 게 아닐까, 실패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매번 단 한 치의 주저도 없이 저를 매트리스 위로 쓰러뜨리곤 제 허벅지를 잡아 벌리는 윤호도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성화를 슬프게 하는 상상은 그런 종류의 상상이다. 윤호가 지금보다 더 심연으로 가라앉을지도 모른다는 상상.
제 몸에 들어차는 것들, 꼭 그 양만큼의 비명이 터져 나온다. 윤호의 낙담, 분노, 후회, 열망, 간절함 같은 것들이 마구 뒤엉켜 성화를 유린한다. 원체 가벼운 그의 마음은 그런 감정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청인다. 갈망하는 것이 없는 삶에서 성화가 원하는 게 있다면 그런 것들이다. 조금이라도 더 강해지는 것. 윤호의 어둠까지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바람과는 달리 그가 감당하기에 윤호의 욕정과 절박함은 너무나 크고 무겁다. 더는 견디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도 그렇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다. 윤호의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을 들을 수는 없다. 그런 식으로 그 죄책감의 무게마저 질 수는 없다.
그래서 성화는 참고 견디고 눌러 담는다. 아픔, 쾌감, 공허함 같은, 온전히 제 것이라 감히 윤호에게 꺼내어 보여줄 수 없는 것들을.
—
형?
나직한 외마디에 눈꺼풀이 서서히 뜨인다. 블라인드가 온전히 가려주지 못하는 대도시의 불빛이 쏟아져 들어와 방 안을 묽게 밝힌다. 흐리멍덩한 어둠 속, 침대에 걸터앉은 채 등을 잔뜩 웅크린 윤호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가 왼쪽 귀에 갖다 댄 핸드폰 화면이 불안하게 깜박인다.
오래 살다 보니 네가 먼저 전화하는 일도 다 있네.
고요 속에서는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도 아스라이 들려온다. 그제야 성화는 윤호의 부름이 저를 향한 것이 아니었음을 안다. 윤호의 구부정한 등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나, 돈 좀 빌려줘.
이불을 눈 밑까지 끌어당겨 덮고 있는데도 갑작스러운 한기가 성화를 덮친다. 어금니를 악물어봐도 어깨가 절로 덜덜 떨린다.
...갚아야 해서 그래.
윤호의 목소리는 비굴하고, 그만큼 성화의 심장은 작게 오그라든다. 전화 너머에서 한숨이 미어져 나온다.
그럼 돌아오겠다고 약속해.
윤호의 등이 움찔 떨리고, 이윽고 고개가 서서히 돌아온다. 성화는 재빠르게 눈을 꾹 감는다. 눈을 감은 채로도 제 얼굴 위에 내려앉는 윤호의 시선이 느껴진다.
이제 음악이니 꿈이니 뭐니 하는 어린애 같은 소리 그만하고, 돌아오라고. 어머니가 걱정하셔.
아득했던 목소리가 더 멀어져간다. 성화는 필사적으로 잠에 든 척한다. 이 이상 윤호를 비참하게 만들 수는 없다. 윤호가 비참해지면 저도 비참해진다. 그렇다는 것을 안다.
—
집을 나선 윤호가 다시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현관문이 조용히 닫히고 나서도 한동안 잠이 오지 않아 눈을 깜박이고 있다, 더는 안 되겠다 싶어 몸을 일으켜 앉았다. 밤보다는 새벽에 가까운 시간을 헤아리기를 얼마나 했을까, 문이 도로 열리고 윤호가 들어왔다.
형.
이번에야말로 저를 향한 부름. 애틋하고, 불안하고, 간절한 외마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성화는 양팔을 벌려 보인다. 할 수 있는 힘껏 크게. 제 최선이 윤호의 최악에는 미치지 못하리라도.
...미안해.
그 품에 온전히 저를 맡긴 윤호가 낮게 중얼거린다. 무겁다, 고 성화는 생각한다. 하지만 차마 그의 등 뒤로, 어깨 너머로 두른 팔을 풀어낼 수는 없다.
미안... 미안해...... 미안해...
윤호의 사과는 기도처럼 반복되고, 그 숨결에서는 독한 타르 냄새가 난다. 비록 그의 몸은 여기에 있고 계절도 한 바퀴를 돌아왔지만, 윤호가 여전히 그날의 가로등 밑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음을 성화는 안다. 계속해서 그 곁을 지켜왔으니 그 누구보다도 더 잘.
내가 사랑하는 건, 다른 이들이 비난하고 외면하고 이해해 주지 못하는 너니까. 바로 그런 것들이 내 사랑을 더 견고하게 하니까.
그런 말들을 하는 대신 성화는 윤호의 목을 더 가까이 끌어안고 젖은 눈가에 입을 맞춘다. 그러는 그의 눈에서도 눈물이 방울져 떨어져 다만 자국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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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계속해서 이렇게 사랑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