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 및 폭행의 묘사가 일부 있습니다.
하드 록 혹은 메탈을 연주하는 밴드에 들어간 건 순전히 권형석 때문이었다. 술을 좋아하는 녀석과 고깃집에서 거하게 마시다 술값을 지불해야하는 순간이 왔을 때야 나는 내가 자취방에서 지갑을 안 들고 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자 녀석은 내가 다 낼테니 한 가지 부탁만 들어주라고 했고, 나는 그게 뭔지도 모른 채 상황만 해결되면 장땡이라는 마인드로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의 카드가 인식되면서 결제완료를 알리는 짤막한 신호음이 들렸을 때 녀석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내게 말했다. 너 고등학교 때까지 기타 배웠다며. 아무리 시간이 지났다지만 기본기는 남아있겠지. 녀석의 장난같은 말을 듣자마자 나는 머리가 띵해지는 것을 느꼈다. 기타리스트 있다며. 권형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간 지 한-참 됐어.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자 남아 있는 술 기운이 확 달아나버렸다. 홧김에 기타를 배운 적이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하지만 저물어가는 해를 억지로 끌어낼 수 없듯, 나는 그 어떤 핑계로도 술값과 안주값을 계산해준 녀석과의 약속을 무를 순 없었다. 한두 푼도 아니고 자그마치 여섯 자리 숫자를 계산해 주었으니 말이다. 저 새끼랑 앞으로 술 먹으면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다짐하며 나는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놓았다. 얼마나 잡아둘진 모르겠는데 내가 딱 너네 다음 공연 끝날 때까지만 있는다. 형석이 놈은 아주 가소로운 반항아를 보는 것처럼 여유로운 웃음만 지었다. 뭐, 그건 나중에 가서 얘기할 일이고 일단 내일부터 나와. 연습실 어딘지 가르쳐줄테니까.
정확히는 딱, 고등학교 1학년 겨울까지 일렉기타를 들었었다. 지금도 기억난다. 12월 26일. 크리스마스 선물이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받지 못한 채 허무히 찾아온 평일날 오전, 아버지는 내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 원장 선생님에게 연락해 음악학원에 윤호가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내 동의조차 구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나는 아버지가 뭔데요 같은 소리는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평소에도 내가 취미로만 음악을 하길 원했지 입시에 방해가 될 정도로 거기에 심취하는 걸 원치는 않았다. 그래서 나와 고등학교 입학 전에 약속을 했다. 네가 기타를 연주할 수 있는 건 1학년 겨울까지라고. 거기다 밴드부에 들지 않고, 최소 전교 이십 등 이내를 유지해야 1년동안 음악학원을 다닐 수 있다는 조건까지 덧붙였다. 공부머리도 나쁘지 않았던 나는 줄곧 아버지가 내세운 조건들을 충족하며 무난히 학교를 다녔지만 결국 이 학기 기말고사 때, 마치 예견된 불행인 것 마냥 오십 등 밖으로 주르르 미끄러져 버렸다. 신기했던 건, 아버지의 권유 같은 강요로 일렉기타를 내려놓았을 시점에는 더 이상 그것을 열심히 연주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초등학교 육 학년때부터 죽어라 연주했던 기타의 화려한 소리에 시들해지는 시기가 찾아왔던 모양이다. 끝내주는 기타 커버 영상을 보아도 큰 감흥을 받지 못하는 그런 권태기 같은 시기 말이다. 게다가 내 롤모델인 기타리스트들을 따라잡으려면 더 오랜 세월동안 연습을 해야하지만, 아버지가 내게 원하는 바가 있었으므로 몇 년 단위의 연습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 일렉기타를 아버지의 방에 놓고는 삼 년간 쭉 공부만 했다. 물론 그렇다고 엄청 열심히 공부를 한 것도 아니었기에 내 입시 결과는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명문대 경영학과가 목표였던 아버지는 재수를 하라고 했지만 스무살을 공부에 바치기 싫었던 나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결국 이런저런 갈등을 겪은 끝에 대학 졸업 후 아버지가 일하는 공기업에 입사하겠다는 약속을 하며 나는 원래 합격했던 지방 국립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권형석은 '대중 음악의 역사'라는 교양 과목에서 만난 나보다 한 살 많은 실음과생이었다. 조별과제 초반, 주제를 정하지 못한 채 침묵을 지키던 조원들에게 그는 '한국 록의 역사'를 발표하자고 제안했다. 그 바람에 조장까지 맡게 된 녀석이었지만 딱히 불평의 기색 같은 건 없었다. 오히려 그의 표정에서는 명백한 화색마저 보일 지경이었다. 그 표정에서 알 수 있듯, 그저 민폐를 끼치지 않는 정도로만 제 역할을 수행했던 조원들에 비해 권형석은 상당히 열정적이었다. 블로그나 위키의 정보들을 단순히 복사 및 붙여넣어 짜깁은 자료들에 살을 붙여 수정하고, 허술하게 만들어진 PPT의 디자인과 내용을 세세한 부분까지 전부 고쳤다. 마치 록이라는 장르에 누가 되지 않을 만큼의 훌륭한 조별과제를 완성하는 게 그의 사명인 것만 같았다. 그는 나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했는데 그것은 내가 자료를 검토하면서 고등학교 때 배웠던 록 아티스트들이나 그들의 인생, 일렉기타 연주법 같은 것들을 조원들에게 말할 때가 간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는 척을 한다기보다는, 어설프게 알고 있는 조원의 입에서 '그러니까 그 가수 이름이 뭐였죠?' 와 같은 질문이 나오면 우물쭈물해하는 조원들 대신 나와 권형석이 동시에 대답을 할 때가 종종 있었던 것이다. 나와 록이라는 공유점이 있다는 걸 안 그는 언제부턴가 나를 술자리에 불러내기 시작했다. 다소 유쾌하면서도 수다스러운 성격인 그와 어울리는 건 꽤 재밌는 일이었기에 나는 그가 부르는대로 술집에 나갔다. 물론 이전에 기타를 연주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는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특히 첫 술자리에서 그가 밴드를 조직 중이다는 말을 들은 후부터는 더더욱 '지식만 잘 알고 있는 록 매니아'의 입장을 고수했다. 아버지의 방에 일렉기타를 둔 순간부터 기타 연주를 접어버린 입장에서 남들과 함께 공연을 한답시고 다시 기타를 잡고 싶진 않았다. 아버지와의 약속을 다해야한다는 아들로서의 본분이라는 것도 있었지만, 한때 지루하게 여겨지던 연주음을 다시 들으면 예전처럼 또 공부는 뒷전인 채 록에 불이 붙을 것 같다는, 무섭도록 강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홧김에 기타를 쳐본 적이 있다 얘기해버린 건, 어쩌면 내 안에 내재되어있던 록을 하고 싶다는 충동과 욕망이 나를 운명이자 필연 속으로 이끈 건지도 몰랐다. 행운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일은 저질러졌고, 마침 기타리스트가 필요했던 권형석은 취한 와중에도 나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 못한 채 몇 번이고 연습실에 나오라는 소리를 반복했다.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녀석의 고집에 나는 결국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는 알았다고, 꼭 그러겠다고 기계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
연습실은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해묵은 건물 지하에 위치해 있었다. 언제인지는 몰라도 분명 우리 부모님이 젊었을 적에나 세워졌을 건물 지상층에는 폐쇄된 지 오래되어 황량한 노래방과 간판만이 남은 태권도장, 이름도 모르는 화장품 판매 회사의 빛바랜 이름만이 남아 있었다. 말 그대로 건물만이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는 곳에 연습실을 마련한 권형석은 먼 친척이 이 건물을 소유한 덕에 지하에라도 연주실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얘기했다.
이미 와 있던 권형석이 열어놓은 건지 문은 그 안의 허름하고 빈곤한 풍경을 드러내고 있었다. 싯누런 벽지가 군데군데 뜯겨져 시커먼 콘크리트 벽이 드러나는 건 물론이거나와 그나마 쉴 수 있는 공간이라곤 왼편에 있는 먼지 쌓인 소파 하나뿐이었다. 식사 같은 경우에는 연습실 밖에서 하거나 아니면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 위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컵라면과 편의점 김치를 갖다놓고 먹는 모양이었다. 여름이 다가온 가운데 그들의 더위를 식혀줄 수 있는 것도 두 대의 선풍기뿐이었다. 절로 한숨이 나왔지만 배고픈 장르를 하는 입장에서 이런 곳을 마련한 것만해도 어디냐 싶었다. 방의 중앙보다 약간 치우친 곳에 드럼을 비롯한 악기들과 앰프, 스피커 등이 놓여 있었는데 왼편 스탠드에 고정된 일렉기타를 보니 범용적으로 많이 쓰이는 저렴한 국내 브랜드의 기타였다. 기타의 앞으로 다가간 내가 갈색의 넥을 가볍게 쥐자 권형석은 한 번 테스트나 해보라고 권했다. 기타 녀석이 나가고 두 달 가까이 안 썼어. 멀쩡하기야 하겠다만 혹시나 케이블 불량 같은 게 있을 수 있으니 잘 점검해봐. 그의 말을 듣던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근데 그 사람은 왜 나갔냐? 권형석은 날 보다가도 이내 고개를 떨어뜨리더니 약간의 뜸을 들였다. 그, 음, 내가 너한테도 말했다는 걸 애들한테 비밀로 한다면야 말해줄 수는 있는데…….
지상에서부터 이 곳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거북이처럼 느릿한 보폭이었다. 발소리가 뚜벅뚜벅 들리자마자 권형석은 입을 다물었다. 내가 들어오면서 무심코 닫았던 지하실의 철문이 고막을 내리긁는 듯한 끼익, 소리를 내면서 열리자 큰 키의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장발의 머리에 흰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남자는 문을 반쯤 열어놓고서는 안으로 들어올지말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나, 들어와도 돼? 형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못 들어올 게 뭐 있어. 윤지헌도 없는데. 들어와.
남자가 어둑한 빛의 중심으로 들어오는 동안 나는 그를, 정말이지 말 그대로 빤히 쳐다보았다. 얼굴이 입체적이라고 생각할만큼 이목구비가 선명하였지만 전체적인 인상 자체는 예쁘고 고왔으며 얼굴형 또한 구슬처럼 동글동글했다. 가장 눈에 들어온 것은 토끼처럼 까맣고 큰 눈과 서양 여배우들의 그것처럼 통통하게 살이 오른 입술이었다. 저렇게 탐스러운 사과처럼 생긴 사람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넋이 나가다도 한편으로는 아까 들었던 '윤지헌'이라는 이름이 머릿속에서 유령처럼 되살아났다. 윤지헌이 누굴까. 누구길래 이 사람이 연습실에 들어오는 걸 망설이게 만드는 걸까. 나는 그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마디 끝마다 밴드가 붙여져 있었다. 꼭 인형 같은 공예품을 서투르게 만들다가 다친 손 같기도 했다. 왜 저렇게 다쳤을까 하고 궁금해하던 중에 남자가 나를 보며 물었다. 저, 누구세요? 둔탁하지만 어쩐지 여린 성정이 느껴지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나는 상대방의 눈을 바라본 채 정윤호 세 글자를 말하는 일이 그렇게나 가슴이 턱 막히는 일인 줄 몰랐다. 아마 그의 커다랗고 영롱한 눈동자가 내 숨을 막히게 만든 것이리라.
정윤호라고 합니다. 기타를 치러 왔어요.
어쩐지 레슨을 받으러 온 초보자 같은 어색한 말투에 남자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형석이가 구했다던 새 기타리스트이시구나. 전 박성화예요. 여기서 뭘 맡는 건 아니고 가끔 연습 보러 오는 사람이예요. 나 또한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연습 구경을 하면서도 동시에 밴드 멤버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거나 그들과 함께 술을 마시러 오는 사람인 듯했다. 어색한 공기를 마시는 우리 사이로 형석이 끼어들었다. 이 쪽도 록 듣는 걸 되게 좋아해. 우리한테는 소중한 관객이자 친구지. 관찰력도 좋아서 뭔가 이상한 점이 있거나 실수하는 게 있으면 바로 지적해주고. 나는 또 한 번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꼭 술에 취한 어젯밤처럼 고개만 끄덕이는 기계가 된 기분이었다. 머릿속에서는 윤지헌과 박성화라는 이름이 번갈아 떠올랐다. 윤지헌, 박성화, 윤지헌, 박성화. 그러다가 봄의 햇살이 겨울의 기운을 지워버리는 것처럼 어느새 박성화의 이름만 내 머릿속에 남게 되었다. 나는 그 이름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만 같았고 그 예감 때문에 내 명치와 뒤통수가 뜨끈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반가워요.
박성화가 먼저 손을 내밀자 나 또한 밴드가 덕지덕지 붙은 그 손을 잡았다. 반갑습니다. 테두리가 다 헐어버린 밴드의 끈적끈적하면서도 까끌까끌한 단면의 질감이 손 사이로 스며들어왔다. 마치 잘 모르는 길 위에라도 뚝 떨어진 것처럼 그의 손을 잡는 일은 대단히 낯설면서도 기묘했다.
――――――――――――
다음 공연 때까지만 있다가 가겠다는 사람치고 나는 꽤 성실하게 연습에 참여했다. 분명한 땜빵이라는 걸 알아도 내가 내 역할을 못한다면 공연이고 나발이고 다 끝장이었으니 말이다. 보컬이 사람의 폐라면 기타는 심장이었다. 심장이 없으면 암만 다른 멤버들이 날고 기어도 밴드를 밴드답다고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방에서 일렉기타를 가져온답시고 본가로 내려갈 순 없었기에 나는 연습실에 있는 기타로 연습을 했다. 이름을 뭘로 지을지 몰라 일단 임시로 '권형석과 친구들'이라는 촌스러운 이름을 붙인 밴드는 구월 중순에 H대 부근 라이브 클럽에서 무대를 하게 되어 있었다. 그들이 연주하는 곡은 자작곡도 있었지만 커버곡도 있었다. 다른 곡들보다 특히 힘든 건 무려 칠 분 삼십 사 초에 이르는 '포트리스(Fortress)'였다. 패턴이 어려운 건 아니었지만 원곡자의 핑거피킹을 보니 상당한 고난이도의 스킬을 요구하는 데다가 곡이 긴 만큼 체력적으로도 소모가 컸다. 나는 이제 막 일렉기타를 다시금 손에 익히기 시작한 사람이 어떻게 이걸 연주하냐며 엄청난 불평을 했지만 권형석은 이걸 뺄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이게 그나마 쉬우면서도 기타 솔로 파트의 임팩트가 있잖아. 네 자작곡을 그렇게 쓰면 안 되겠냐고 볼멘 소리를 내긴 했지만 권형석은 그럴 능력이 있었으면 우리가 이미 대한민국을 정복하는 밴드가 되었을 거라며 되받아쳤다. 뭐가 되었든 간에 넌 내가 내준 술값만큼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거 잊지 마. 권형석의 입에서 '술값'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채 혀 안에서 구르는 욕을 짓씹어 삼켰다. 개새끼가 진짜.
곡을 익히느라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던 와중에 그나마 나를 설레게 만든 건 박성화의 존재였다. 주에 다섯 번 정도 연습실에 오면 세 번을 만나는 게 박성화였다. 그가 말한 ‘가끔’보다는 자주 만나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박성화를 좀 더 만나고 싶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해서 사적으로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첫 만남의 기억 중에서 가장 잊히지 않는 건 바로 그의 오른손이었다. 밴드가 마디 끝마다 붙여진 그 가여운 손을 잡자마자 나는 그 손이 매우 거칠기보다는 그의 얼굴처럼 곱고 아름다운 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손이 어떻게 하면 그렇게 다칠 수 있는 건지, 그 다치게 한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할 때면 왠지 모르게 불쾌한 감정이 포말처럼 일었다. 원인이 무엇이건 그가 아픔을 겪었다는 사실 자체가 피부 표면을 덮고 있는 투명한 껍질을 벗기는 것마냥 내 안쪽을 쓰라리게 만들었다. 공연곡을 연주하면서 손가락에 물집이 생겨 스트링에 지문이 스칠 때마다 찌릿찌릿한 따가움을 느끼는데도, 그마저도 박성화의 숨겨진 아픔을 생각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다친 손뿐만 아니라 그의 눈동자 또한 평소 창백하고 아픈 빛을 띠고 있어 꼭 무엇인가를 털어놓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다. 말하자면 신체적인 아픔이 아닌 어떤 상처나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아픔의 빛이라고 할까. 그것을 보기가 너무 안타까웠던 나는 단 한 번, 멤버들에게 박성화의 손에 대해 물었다. 왜 저렇게 다쳐 있냐고. 하지만 내가 들은 것은 백지같은 잠깐의 고요뿐 아무도 그것에 대해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내게 여지를 준 권형석 또한 그런 사정이 있다는 둥 말을 아끼는 걸 봐서는 나만 모르는 비밀이 그들 사이에 있는 듯했다.
일요일 오전 중에는 사람이 없었다. 당연했다. 방학을 맞아 모두가 올빼미족들로 변해버렸으니까. 솔로로라도 포트리스를 연습해보기 위해 기타를 맨 채 악보대 앞에 선 나는 넥 위에 손가락을 올리자마자 특유의 느릿한 발소리가 지하 연습실로 내려오는 걸 들을 수 있었다. 계단을 내려와 일부러 열어놓은 철문 너머로 박성화가 들어올 때까지 나는 다소 숨을 죽이면서 그가 이 곳으로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단 둘만 있을 땐 어떤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을까, 하고.
연습하고 있었어요? 들어오자마자 건네어진 한 마디에 나는 막 이제 하려던 참이라고 대답했다. 기타를 쥐는 손가락 끝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말을 하기 위해 열리는 입에서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저, 아직 멤버들 오려면 좀 기다려야할 것 같은데. 박성화는 내 맞은편에 있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냥 이 공간에 와야한다고 생각했어요. 상냥하지만 다소 가라앉아있는 목소리에 등골이 약간 서늘해졌다. 나름대로 밝은 분위기에서 얘기하고 싶은데 그게 될 수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그걸 파악하기라도 하는지 박성화는 선뜻 웃으면서 연습 많이 어렵죠, 라며 다정하게 물어왔다. 인사치레 같은 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좋았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얼빠진 바보같이 웃어보였다. 형석이가 말 안 해주던가요? 저 예전에 오 년 정도 쳤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그만두긴 했었지만요. 아버지가 음악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하셨거든요. 특히 록을 한다고 하면 지금도 진저리를 치세요. 인기도 없는 그런 음악해서 뭐하냐고, 그냥 무사히 졸업해서 좋은 기업이나 입사해야지 굶는 일이 없다고 그러세요. 물론 전 이걸 하더라도 어떻게든 먹고 살 방법이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요. 쉴 새 없이 주절주절 늘어놓는 내 말을 가만히 듣던 박성화가 맞아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밴드에 온 사람들, 다 그런 생각해요. 배고파도 컵라면과 김치, 삼각김밥만 있으면 되는 거고, 이런 인기 없는 장르를 하다 성공한 사례들도 있는 거니까 희망을 버리지 말자고요. 록이란 게 요즘 시류에 맞지 않긴 하지만 시류란 건 언젠가 변화하게 되어 있으니까 우린 그 때를 노리면 된다고, 그러더라고요. 조용조용하게 말을 이어 나가던 박성화는 한 템포 쉬어가듯 한 번의 깊은 숨을 내쉬었다. 형석이가 그런 말을 하던가요? 내가 묻자 박성화는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난 걔가 좋아요. 우직하게 록만 보면서 살다보니 부모님하고도 사이가 안 좋고, 돈도 못 받아서 알바를 엄청 많이 하는데도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잖아요. 누군가는 무식하게 밀고 나가기만 한다고 조롱하겠지만 전 그런 무식한 고집이 좋아요. 그런 고집 있는 사람이 있어야 여기에도 희망이 있는 거니까요.
나는 농담 반 진심 반으로 물었다. 형석이 좋아하나요?
박성화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그의 붉은 입술 사이로 중저음의 웃음이 하핫, 하고 터져나왔다. 제가 형석이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나요?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창피함이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라왔다.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나의 귓가로 박성화의 산들바람같은 웃음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형석이랑은 연애 안 해요. 아니, 그냥 여기 멤버들하고는 연애할 생각 없어요. 다 이성애자들이니까요. 괜한 질문을 했다는 후회가 귀 끝까지 벌겋게 물들이는 걸 느끼며 나는 저도 모르게 기타의 넥을 다시 잡았다. 저, 그, 연습 좀……. 연습할 생각도 없으면서 연습이라는 말을 꺼낸 것 자체가 우습다고 생각한 가운데, 터져나오던 웃음을 가까스로 멈춘 박성화가 천천히 말했다. 포트리스 연주하실 때 힘이 많이 빠지는 게 느껴져요. 앞곡들은 그나마 시간이 짧고 어렵진 않으니까 그…체력을 배분하시면서 연주하는 걸 연습하셔야할 것 같아요. 그 말을 듣자마자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남이 듣기에도 힘이 빠지는 게 느껴지다니. 나는 진심을 다해 꼭 그러겠다고 힘주어 다짐했다. 좀 더 노력해볼게요. 감사합니다. 나를 보는 박성화의 입꼬리가 더 올라가더니 고른 치열이 드러났다. 계속 생각하던 거였지만 웃는 게 너무나 예뻤다. 저 예쁜 미소를 나만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저, 혹시…….
네.
만나는 사람…있나요?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네었는데도 박성화의 미소는 떨어지는 낙엽처럼 그 힘을 잃어버렸다. 일그러지는 표정을 보자마자 또 한 번 괜한 질문을 했다는 생각이 을씨년스럽게 척추를 타고 지나갔다. 이제 박성화는 나에게서 시선을 돌려버렸다. 벽지가 뜯긴 우중충하고 더러운 벽만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모습이 꼭 그 곳에 남은 망령이라도 보는 것 같아 조금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곧 그의 눈에서 보이는 아픔의 빛을 목격한 순간 한 조각의 말 못할 연민과 슬픔이 되었다. 왜 그렇게 슬프게 무언가를 보고 있나요. 왜 그럴 수밖에 없나요. 나는 박성화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톱 주변을 동여매고 있는 얇은 밴드는 새것인지 빳빳해보였다. 교차되지 않는 시선들과 침묵만이 남아있는 방 안에서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박성화였다.
이제는 아무하고도 안 만나려고요.
…….
조금 힘들어서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극도의 피로감이 짙게 깔린 얼굴이 조용히 호소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묻지 말라고.
――――――――――――
박성화가 남긴 묵직한 말마디를 곱씹을수록 슬픔과 동시에 화가 치밀어올랐다. 가슴의 한켠만을 적시던 불쾌한 감정이 이제는 피부 표면까지 뜨겁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부터도 인정하고 있었지만 그 때 이후로 나는 더더욱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박성화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하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밴드를 동여맨 그의 오른손이었다. 밴드 테두리가 헐어버린다 싶으면 새것으로 바꾸어 짧은 손톱 주변을 숨기고 있던 그 손. 차가워보이면서도 막상 잡으면 따스한 온도가 전해지던 손. 그 손을 다치게 한 건 대체 무엇이었는가. 방향성을 잃은 분노의 저변에는 피딱지처럼 응어리진 증오가 있었다. 단순한 화라고 치부했던 것이 증오의 시발점이었던 것이다. 록을 하고자하는 욕심보다 분노와 증오가 앞서자 내 연주에서는 거친 짐승의 야성 같은 것이 터져나왔다. 자제력을 잃은 자의 감정이 연주에 전이된 게 그다지 좋지만은 않았을 텐데도 멤버들은 급작스럽게 강렬해진 나의 연주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나 포트리스의 기타 솔로 파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격렬한 연주를 보여주자 권형석은 이대로만 공연에서 보여주면 된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나를 칭찬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정말 잘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런 것과 별개로 나는 나를 보는 박성화의 시선을, 내게 건네는 박성화의 미소를 견디기가 힘들어졌다. 깊은 슬픔을 억지로 뒤로 하는 듯한, 어떤 모조품의 공들인 세밀함과 허무한 영롱함을 닮아있는 그 시선과 미소가 나를 더 깊은 지하로 밀어넣고 있었다. 나는 토로하고 싶었다. 빌고 싶었다. 뭘 말해도 좋으니 아직 풀어지지 않은 슬픔들이 당신에게 남아있다면 나에게 풀어달라고. 나에게 기댄 채 나의 어깨와 등을 잡으며 실컷 울어달라고. 혈관 속에서 끓어오르는 복잡한 감정들을 끌어안은 채, 나는 간간이 박성화에게 서늘한 시선을 건네었다. 그것은 그의 호의에 대한 나만의 열정 어린 답변이었다. 나는 몹시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으며, 당신을 지킬 수 있는 증오와 분노를 가진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남들에게 말하지 않은 뜨거운 마음이 절정에 달할 때면 나는 권형석이 내게 준 하나의 여지를 떠올렸다. 나한테도 말한 걸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면 말해줄 수 있다는 그 말이 아직도 유효한지 궁금했다. 그래서 나는 얇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팔월 첫째주 금요일 저녁에 권형석을 불러내었다. 대학가 골목마다 고소한 고기 냄새가 풀풀 풍겨오는 가운데 나는 식욕보다 애욕을 더 크게 느끼고 있었다. 알고자 하는 진실에 다가서서 박성화를 거기서 끌어낸 다음 내 품에 안고자 하는 애욕이.
무슨 바람이 불어 날 먼저 부르냐며 권형석은 너스레를 떨었지만 녀석은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내가 녀석의 잔에 술을 따르자마자 녀석은 나의 의도를 간파했다고 농담같은 한 마디를 던졌다. 기타 녀석이 왜 나갔는지 궁금해서 부른 거 다 알아, 인마. 그리고…….
그리고?
박성화에 대해서도 궁금하잖아, 너.
권형석에게 주려고 따른 잔이었건만 그걸 마시는 건 오히려 나였다. 혀를 아리게 만드는 시원함과 동시에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것 같은 화끈함이 느껴졌다. 그 화끈함마저도 마음 저편에 있는 증오의 불꽃에 불을 붙이는 걸 느끼며 나는 주저없이 말했다. 지금부터 네가 뭘 얘기하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까 네가 아는 걸 다 말해봐. 다 말하지 않으면 싸움이라도 걸 것 같은 위압적인 나의 말투에 권형석은 얄팍하게 꾸민 웃음을 거두더니 진한 한숨과 함께 담배 한 개비를 꺼내었다. 사람이 있는데서 할 얘기는 아니니까 나가서 한 대 피고 오자. 나는 말없이 동의하면서 그와 함께 일어섰다.
밖으로 나가니 비가 잠시 그쳐 있었다. 우리는 고깃집 옆에 있는 좁은 샛길에 나란히 선 채 담배를 피웠다. 담배 연기 사이로 쓰레기에서 나는 악취가 섞여왔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권형석이 운을 뗄 때까지 그 자리를 뜨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 나의 고집스러움을 알고 있던 권형석은 그러니까, 라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차마 꺼내기가 곤란한 이야기를 하듯, 매우 천천히. 우리 전 기타리스트 윤지헌은…제발로 나갈 짓을 저질렀기 때문에 나간 거야. 사실 경찰에 신고했어야했지만…녀석이 제발 그러지는 말라고, 두 번 다시 눈앞에 나타나지 않겠다며 우리 앞에서 죽어라 빌고 비니까…차마 그러진 못했어.
무슨 죄를 지었는데.
감금 및 폭행.
누구를?
…누구겠냐.
한순간 온 세상이 얼어붙은 것 같았다. 시간마저도, 우리 사이를 흐르는 공기마저도 얼어붙어 내 피부와 심장을 잔혹하게 에이는 것 같았다. 나는 담배를 채 다 피우지도 않은 채 꽁초를 바닥 위로 툭 떨어뜨렸다. 저도 모르게 한 일이었다. 왜 그랬는데?
나의 물음에는 서슬퍼런 다급함이 서려 있었다. 그럼에도 권형석은 한 모금의 담배 연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내쉬고 나서야 말을 이어갔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그 새끼, 그 날따라 다른 데서 시비 붙을 일이 있었나봐. 기분도 좆같은데 애인이 자기 기타를 만지고 있으니까 화가 난 거지. 그 놈은 자기 물건에 대한 애착이 심각할 정도로 강해서 자기 빼고는 아무도 기타에 손 못 대게 했거든. 만지면 기분 더럽다면서. 난 녀석이 그런 놈인 줄도 모르고 우리 밴드에 영입했다가 피를 본 거지만…내가 당한 것쯤이야 박성화가 당한 거에 비할 바가 되냐. 기타 한 번 만졌다고 손을 밟은 것도 모자라서 그 새끼, 박성화한테 그런 말도 했다더라고. 너 요즘 다른 놈한테 꼬리치고 다니는 거 안다, 누구랑 잤는지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입을 찢어버릴거라고. 근데 박성화가 어디 그럴 사람이어야지. 걘 아무리 애인이라는 놈이 좆같아도 다른 사람에게 눈 한 번 안 돌리는 바보야. 그러니 털어봤자 나올 게 하나도 없는 거지. 아니다 한 번도 그런 적 없다 때리지 말라고 빌고 빌어도 그 새끼는 박성화의 배를 발로 찼어. 그렇게 차이면 사람이 제대로 일어날 리가 없잖아. 바닥을 뒹굴면서 제발 살려달라고 하는데…그 망할 새끼는 그냥 연습실 문을 잠그어버리고 나가더라고. 반성이나 하라면서. 너도 알겠지만 우리 연습실 문은 밖에서 잠기어야 제대로 잠기잖아. 그래서 멤버 한 명당 열쇠를 하나씩 갖고 다니도록 했는데…그게 그렇게 쓰일 줄은 몰랐지.
우리가 박성화를 발견한 건 다음날 아침이었어. 베이스 녀석이 먼저 연습실에 들어왔다가 기절해 있는 박성화를 발견한 거지. 보자마자 녀석이 애를 들쳐업고 급하게 병원에 갔는데 다행히 장기에는 이상이 없었어. 대신 정신적인 충격이 너무 커서 한동안은 밖에 나가는 것조차 힘들어했지. 그 때문에 아예 휴학서를 내야만 했고. 그런데도 우리한테는 그런 일을 당했다는 걸 엄청 담담하게 말하더라. 하지만 사람이 얘기를 할 때는 얼굴을 보잖아. 낯 자체가 이미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어둡고 피로해보이고 그렇더라고. 말하자면 그냥…앞으로도 쭉 즐거움이나 기쁨 같은 걸 느낄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의 무표정이었어. 마음이 막, 섬찟섬찟하면서도 슬펐지. 무슨 죄가 있어서 저 착하고 여린 사람이 그런 일을 겪게 만들었나 싶기도 하고. 난 트라우마 때문에라도 당분간 연습실에 나오지 말라고 얘기했는데 그래도 한 번씩 나오더라. 공간은 잘못이 없다고. 잘못이 있다면 그건 윤지헌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게 얼마나 힘든지 가늠도 안 돼. 트라우마란 건, 그런 의식적인 생각만으로 누를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그건 끝까지 박성화를 괴롭힐 거야. 누군가가 그 트라우마를 감싸주지 않는 이상 박성화는 혼자서…그걸 견뎌내려고 할 거야. 그래서 묻는 말인데…….
…….
넌 얼마만큼 박성화를 감싸줄 수 있는 거냐?
…….
사람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이 또 다시 사람한테 손을 내뻗는 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닌데…넌 얼마만큼 할 수 있는 거냐?
나는 대답대신 또 한 개비의 담배를 꺼냈다. 더운 기운이 감도는 골목은 담배 피기에 적절한 곳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영원히 그 자리에 남아 담배를 펴야만 할 것 같았다. 폐가 꺼멓게 되도록 피워 까끌까끌한 턱 끝까지 올라온 분노와 증오를 식혀야 그나마 좀 괜찮을 것 같았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안 권형석은 짧아진 꽁초를 젖은 바닥에 버렸다. 물이 흥건한 보도블럭에 닿자마자 꽁초의 불은 금방 꺼졌다. 씨발, 이라고 욕한 건 나였다.
――――――――――――
팔월의 더위가 빠른 기타 연주처럼 질주했다. 구월이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시간이 갈수록 내 연주는 처음과 달리 원숙한 완성도를 갖추어내고 있었다. 연주에 전이된 증오가 세공된 원석처럼 다듬어졌다는 의미였다. 기타 솔로가 묵직하게 공기를 때리고 권형석이 육중한 보컬이 그것을 내리누르는 포트리스가 끝나면 모두의 이마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관객으로서 우리를 지켜본 박성화는 너무 멋지다며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매니아들이 오면 정말 좋아서 기절할 수준이야. 그런 식의 칭찬을 하고 나면 박성화는 으레 그래야한다는 듯 멤버 개개인과 하이파이브를 하거나 포옹을 나누곤 했다. 내가 자기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기라도 하는 건지 나하고는 포옹 대신 하이파이브만을 나누었다. 헐어버린 밴드의 까끌까끌한 질감이 순식간에 내 손가락과 맞부딪쳤다 사라졌다. 나는 또 한 번 내 목구멍까지 올라온 욕지거리를 짓씹어 삼키며, 나를 피해버리는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연주할 때의 분노가 사라지고 마음을 시리게 만드는 슬픔이 심장을 베일처럼 덮었다. 이전에 그가 그랬듯 나 또한 고요히 호소했다. 나는 언제든 당신에게 진심을 다할 수가 있어요. 그러니 제발 알려줘요.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당신이 내게 마음을 열 수 있는지를. 하지만 내가 뭘 생각하는지 모르는 박성화가 내게 대답을 들려줄 리는 만무했다.
방학이 일주일 정도 남았을 때 계절의 짧은 한철 같은 소낙비가 왔다.
굵고 거센 빗줄기를 모조리 맞고 들어온 연습실에는 누구도 없는 대신, 박성화만이 소파에 누워 자고 있었다. 걸을 때마다 운동화의 밑면이 바닥과 마찰하며 삑삑 소리를 내는데도 아주 깊이 잠든 건지 박성화는 눈을 뜨지 않았다. 어슴푸레하게 지하의 방을 비추는 조명 아래, 소파의 앞까지 조심스럽게 다가온 나는 그 자리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지하 특유의 습함을 머금은 바닥의 차가움이 엉덩이를 타고 등골까지 올라오는 걸 느끼며 나는 소파 밑으로 축 늘어진 그의 오른팔을, 그리고 그 밑에 있는 오른손을 보았다. 비밀을 숨긴 채 헐어버린 밴드들. 나는 한 손으로 그의 오른손을 받쳐올린 뒤 너무 많이 헐어 가장자리가 까맣게 변한 검지의 반창고를 조심조심 벗겨내었다.
물기를 과하게 머금어 쪼글쪼글해지고 하얗게 질린 피부 가운데에는, 마치 채 다 바르지 못한 매니큐어처럼 손톱을 물들인 시커먼 피멍이 있었다.
저절로 아랫입술이 깨물어졌다. 동시에 어떤 욕구가 심장을 쿵쿵 두드렸다. 그럴 생각이 없었음에도 나는 그래야만 한다는 듯, 손톱에 맺힌 피멍 위로 입을 맞추었다. 몇 초가 지났는지도 모를만큼 길게 키스하는 동안 뜨겁고 말랑한 것이 손 끝에 닿은 게 느껴진 건지 박성화가 흐응, 하고 잠꼬대같은 신음을 뱉었다. 혹시라도 일어나는 게 아닌가 싶어 나는 다급히 손을 내려놓았지만 박성화는 몸만 살짝 소파 뒤로 기울였을 뿐 잠에서 깨진 않았다. 당황스러움에 살짝 들렸던 내 엉덩이가 다시 바닥에 붙었다. 순간적으로 엄청나게 속도가 빨라진 심장의 고동을 감당하지 못한 내 얼굴이 열로 화끈거리고 있었다. 분명 귀 끝까지 벌개졌겠지. 그럼에도 나는 이왕 이런 짓까지 했으니 할 말을 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정말로 키스한 것처럼 박성화의 손톱과 내 입술이 마주했던 그 찰나의 감각을 떠올리며 나는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나지막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해요, 형. 진짜로 많이 좋아해요. 내가 형의 아픔을 다 헤아릴 순 없어도…무조건 형을 그 아픔으로부터 지켜내려고 노력할 거예요. 아무도 형한테 상처 입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 네가 뭘 할 수 있냐고 물어도 괜찮아요. 천천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보여줄 거니까…날 한 번 믿고 형이 나한테 기댔으면 좋겠어요.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냥 딱 한 번만…나와 눈을 마주하면서 진심을 얘기했으면 좋겠어요. 형이 뭘 생각하든 뭘 두려워하든 난 다 괜찮으니까, 다 받아들일 자신이 있으니까, 그냥 단 한 마디만이라도…….
말을 하다보니 눈물이 차올랐다. 바보같이. 자는 사람을 두고 혼잣말처럼 고백을 한 것보다 울음이 터졌다는 게 부끄러워 나는 벌떡 일어섰다. 이미 빗물로 축축하게 젖은 상태였지만 더 젖는다고 죽는 건 아니었으니 상관없었다. 박성화를 뒤로 한 채 빠른 걸음으로 연습실을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윤호야.
심장을 덜컹 가라앉게 만드는 부름 때문에 발걸음이 멈췄다. 뒤이어 이불이 사각사각 걷어지더니 박성화가 움직일 때마다 소파가 끼익끼익, 음산한 소리를 냈다. 슬리퍼를 신은 발이 내게로 다가올 때까지도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니, 누군가가 나를 그 자리에 붙들어 놓기라도 한 것처럼 아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뒷목 위로 식은땀이 나는 사이, 혹시라도 내가 가 버릴까봐 염려한 건지 박성화가 그 여느 때보다 빠른 걸음으로 내 등 뒤까지 바싹 다가왔다. 그리고는 얇고 마른 두 팔을 뻗어 나를 끌어안았다. 내가 물었다. 자고 있었던 거…맞죠? 내 넓은 등에 고개를 파묻은 박성화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언제부터…깨어 있었어요? 박성화가 대답했다. 손가락 끝에서 뭔가가 느껴졌을 때부터. 아주 뜨겁고 부드러운 무언가가…내 손가락에 닿는 게 느껴졌을 때부터. 그 때부터……. 젖은 몸의 물기가 자신의 셔츠에 번져갈 텐데도 박성화는 나를 끌어안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빗소리가 점점 더 강렬해진다 싶더니 시야가 번쩍였다. 곧바로 분노한 누군가의 부르짖음 같은 천둥 소리가 지상을 크게 뒤흔들었다. 그 순간에 나는 결심했다. 정체도 모르는 어떤 욕심과 욕구에 맹세를 했다. 나를 안고 있는 이 사람을 절대로 다치지 않게 하겠다고. 그런 순간이 다시 한번 찾아온다면 죽을 힘을 다해 이 사람을 지키겠다고.
나는 그의 팔을 푼 다음 바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상체를 약간 숙여 그와 눈을 마주한 뒤, 망설이지 않고 그의 살이 오른 통통한 입술에 키스했다. 머리칼과 이마에서부터 뚝뚝 흐르는 빗물이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들어왔다. 키스를 받아들이는 박성화가 으응, 하고 얇게 신음하면서 나의 목에 두 팔을 감았다. 정신이 아찔해지면서도 혈관을 스쳐지나가는 소름에 온 몸의 털이 곤두섰다. 마치 끝도 모르는 구덩이 속으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지옥에서 황홀경을 느낄 수 있다면 바로 이런 기분이 아닐까. 명치가 뜨겁게 끓어오르는 걸 느끼며 나는 박성화의 입 안을 끈질기게 탐했다. 저항없이 날 받아들이던 박성화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
공연 준비를 위해 도착한 라이브 클럽은 이제 막 문을 연 상태라 안이 텅 비어 있었다. 아마 오늘 오는 손님들 수가 좀 많을 거라며 주인이 말했다.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어도 메탈 하나 제대로 끝내주게 하는 놈들이라고 하니 이 근방 매니아들이 꼭 오겠다고 약속하더라니까. 대신 오늘 제대로 안 보여주면 너흰 진짜 국물도 없을 거다. 못해도 메탈리카보다 다섯 수 아래 정도라고 얘기했으니까. 권형석은 어떻게 그런 과장을 하냐며 책망하듯이 말했지만 주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만큼 잘한다는 소리를 했으면 된 거 아니냐면서. 기타를 앰프에 연결하며 나는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릴만큼 내 안의 심적 부담감이 커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티를 내면 안 되었다. 밴드의 폐라고 할 수 있는 보컬도 긴장하고 있는데 밴드의 심장까지 긴장해버리면 모두가 제 실력도 못 보여주고 굳어버릴 수 있으니까.
모두가 만반의 준비를 하듯 악기의 소리를 테스트하고 합을 맞춰보는 가운데, 나는 어떤 남자가 라이브 클럽 안으로 들어오는 걸 볼 수 있었다. 아아, 하고 굵직한 목소리를 내며 목을 풀던 권형석이 문가를 보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누구냐고 묻기도 전에 밴드 멤버들 또한 일제히 문 쪽을 보더니 표정을 심각하게 굳혔다. 심지어 평소 서글서글하게 웃는 모습이 장점인 베이스마저도 전에 본 적 없는 차갑고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 나는 왠지 남자가 누구인지 알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은…….
얘들아, 하고 우리를 부르는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의 뒤에서 등장한 건 박성화였다. AC/DC의 로고가 새겨진 검은 반팔티에 무릎이 찢어진 스카이 블루색의 청바지를 입은 그는 앞서 들어온 남자가 자신을 향해 돌아보자마자 입가의 미소를 싹 지워버렸다. 아니, 미소가 남자의 존재 때문에 꺼진 불처럼 사그라졌다고 보는 게 맞았다. 권형석의 입술에서 세 글자가 흘러나왔다. 윤지헌.
윤지헌이 박성화에게 다가가는 것과, 내가 어깨에 매고 있던 기타를 벗어 던진 건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내가 외쳤다. 개새꺄! 박성화 손대지 마! 윤지헌이 놀란 낯을 한 채 나를 돌아보던 순간 나는 그대로 놈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야, 정윤호! 권형석이 나를 말리기 위해 다급히 외치며 앞으로 달려갔으나 이미 타이밍은 늦어 있었다. 내 주먹이 바로 놈의 얼굴에 정확히 꽂혔고 놈은 저항조차도 못한 채 클럽의 매끄럽고 차가운 바닥 위로 나뒹굴었다. 잠시 직원실에 들어가 있던 주인이 요란한 소음에 문을 벌컥 열더니 무슨 일이냐며 헐레벌떡 뛰어왔다. 윤지헌이 일어서려던 순간 나는 놈의 몸 위로 달려들어 또 한 번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 처음 보는 사람이 폭력을 휘두르는데도 윤지헌은 반항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미 돌아버린 사람처럼 실실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결국 권형석과 주인의 손에 의해 양 팔이 붙잡힌 내가 뒤로 끌려 나갔고 윤지헌은 간신히 상체를 일으킬 수 있었다. 뒤에서 서 있기만 하던 박성화는 어느 새 눈물을 줄줄 흘리며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이를 본 드럼이 다가가더니 박성화의 어깨를 재빨리 붙잡았다. 성화야, 괜찮아? 어? 나는 나를 붙잡고 있던 손들을 모조리 뿌리치며 박성화에게 달려갔다. 그리고는 드럼의 품에서부터 박성화를 빼앗다시피 하며 그의 둥근 어깨를 그러쥐었다. 비틀비틀 일어선 윤지헌이 코피를 흘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초점이 흐려진 시선 앞에서 내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박성화 손대지 마. 여기서 꺼져. 빨리. 뭐가 우스운지 놈은 자꾸만 킬킬 웃더니 손등으로 흐르는 코피를 닦아내었다. 그래, 새 애인이구나. 내가 굳이 잘 있는지 안 보러 와도 되는 거였네. 아직도 내가 반길 만한 존재가 아니란 걸 알았으니 난 그냥 갈게. 뒤에서 망연히 서 있던 권형석이 두 주먹을 꽉 쥐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박성화한테 그딴 짓을 하고도 살려달라 빈 놈을, 우리가 두 팔 벌리고 환영할 것 같아? 착각하지 마. 네가 백 번을 찾아와도 우린 너한테 백 번의 주먹을 갈길 거야. 알겠어? 윤지헌은 권형석을 향해 슥 돌아보다가도 이내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생각보다 엄청 약한 녀석이니까 잘 지켜줘라, 알았지?
꼭 오래 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처럼, 놈은 내 한쪽 어깨를 가볍게 탁탁 치더니 클럽의 계단 위로 발을 옮겼다. 세게 얻어맞은 사람답지 않게 발걸음이 매우 차분했다. 나는 내가 끌어안고 있는 박성화의 어깨가 심하게 떨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권형석을 형석이 형, 이라고 불렀다. 잠깐만, 정말 잠깐만, 박성화랑 나만 있게 해줘.
주인은 직원실로 우리를 데려갔다. 사무실용 의자만이 있는 직원실에 등받이가 없는 간이 의자를 놓은 주인은 사람이 좀 진정되면 부르라며 문을 닫았다. 사무실용 의자에 박성화를 앉힌 나는 그 맞은편에 간이 의자를 놓고 앉았다. 그는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눈물과 콧물을 삼켜가면서 우는 모양새가 몹시도 처량해 나는 그를 꼭 끌어안아주었다. 바퀴가 있는 의자가 내 쪽으로 스윽 밀려왔고 박성화의 몸 또한 내 품 속으로 파도처럼 밀려왔다. 괜찮아요, 형. 진짜, 진짜 괜찮아요. 박성화가 끅, 하고 딸꾹질을 하면서 더듬더듬 말했다. 무, 무서, 웠, 어…또, 생각나서…무서웠어……. 나는 박성화의 어깨와 팔뚝을 쥐고 있는 양손에 힘을 주었다. 지켜줄게요. 그 새끼가 다시 오면, 꼭 지켜줄게요. 그러니까 나한테 기대요, 형. 난 내 몸이 부서져도 형을 지킬 거예요. 절대로…아무도…형을 다치지 못하게 할 거예요…….
내 말에 감정적으로 자극된 건지 간신히 울음을 삼켜내던 박성화의 흐느낌이 기어이 커졌다. 아무 말도 못한 채 힘껏 소리 내어 울고만 있는 그를 내 품 안에 가두듯이 껴안으며, 나는 그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 달뜬 숨과 함께 부드러운 입술이 닿자 박성화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소낙비가 콘크리트 지대를 사정없이 두드렸던 그 날처럼 우리는 또 한 번 서로를 잡아먹을 것 같은 키스를 나누었다. 혀를 섞느라 숨을 멈추었음에도 박성화는 키스를 하는 동안 한두 번 딸꾹질을 했다. 그의 입 안에서 혀를 빼낸 내가 볼을 타고 흐르는 그의 눈물을 핥아 올렸다. 장발의 머리칼이 그의 볼과 이마 위에 달라붙었다. 누군가의 눈에는 초라해 보일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아름답다 여겨지는 건 분명히 사랑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박성화의 입술에 또 한 번 가볍게 입맞춤했다. 쪽, 쪽, 소리가 작은 직원실을 울리는 동안 바깥은 언제 그런 소동이 있었던 것 마냥 조용해졌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를 끌어안을 것처럼 양 팔을 풀지 않은 채 잦아들기 시작한 그의 울음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가냘프고도 예쁜 소리였다. 그렇기에 나는 더더욱 내 안의 연민과 슬픔이 증오와 분노가 되어 용암처럼 들끓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 모든 걸 연주에 쏟아부으리라 결심한 나의 눈동자 속에서 날카로운 유리조각 같은 게 빛나는 것 같았다. 그것은 아마 깨져버린 나의 마지막 이성이리라.
――――――――――――
포트리스의 순서가 왔다. 곡은 기타 솔로로 조용히 시작했지만 공기를 쾅 내려치는 드럼이, 권형석의 손 끝에서 울리는 리듬 기타가 이 곡이 메탈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려주었다. 이어 그의 육중한 철심 같은 보컬이 주변의 분위기를 묵직하게 만들더니 후렴에 이른 순간 모든 음들이 웅장한 규모를 구현해 나가며 불꽃처럼 폭발했다. 그렇게 사 분 동안 일정하게 이어진 강력한 힘이 갑작스럽게 사그라진다 싶다가도 나와 권형석의 기타 연주가 두번째 페이즈를 시작하며 격렬하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손등 위로 파랗게 올라온 혈관은 터질 것처럼 맥박쳤고 목 위로 핏대가 굵게 섰으며, 스트링을 치는 하얀 손가락은 점점 붉어졌고, 연주에 힘과 스피드를 줄수록 오른팔의 전완근은 더욱 깊게 패였다. 이마를 넘어 눈까지 살짝 가릴만큼 길게 뻗친 머리가 가볍게 헤드뱅잉을 할 때마다 탁탁 흔들렸고, 미간을 찌푸린 채 연주에 집중하는 나를 보던 관객들은 휴대폰을 든 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혼신의 힘을 다한 화려한 연주가 끝난 순간 세번째 페이즈가 시작되며 권형석이 보컬이 또다시 잔잔하게, 하지만 무게감 있게 들뜬 공기를 억눌렀다. 그러다 다시 후렴구에서 악기의 음들과 보컬이 폭발했고, 권형석의 마지막 고음과 함께 우리는 마치 땅을 내리치는 듯한 굵고 짧은 연주와 함께 곡을 마쳤다. 곧바로 기다렸다는 듯 우레와 같은 박수들과 환호가 쏟아져 나왔다. 우리는 연습 때 그랬듯 모두 이마에서 땀을 줄줄 흘리며 서로를 번갈아 보았다. 몇 시간 전과는 달리 상당히 환해진 표정들로부터 나름의 자신감과 성취감이 엿보였다. 나는 멤버들을 보다가도 저만치서 나를 휴대폰으로 찍고 있는 박성화를 바라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휴대폰을 내린 그가 나에게 손키스를 날렸다. 나 또한 박성화를 바라보며 양손으로 키스를 날렸다. 권형석은 연신 감사하다며 고마움의 인사를 전했고 멤버들 또한 이런 반응을 얻는 게 처음인 모양인지 계속해서 고개를 꾸벅꾸벅 숙였다.
우리가 무대에서 내려왔을 때 한 여성팬이 나에게 사인을 부탁했다. 여성팬이 주는 태블릿 기기를 받아 들었을 때 그녀가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기타를 연주할 수 있었어요? 나는 마치 아무렇게나 한 낙서처럼 사인을 한 다음 이렇게 대답했다.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녀의 얼굴에서 약간의 실망감이 보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의 뒤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서 있었으니까. 기기를 건네주고 난 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격렬한 키스라도 한 것처럼 박성화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게 보였다. 또다시 애욕이 일었다. 조금 더 그의 안에 닿아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싶다는 애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