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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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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호 mayday 덴 라디 로라 멍데 뻔 석류 야미 저당 파토 하백 호수 외 익명 4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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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중아, 우리 이제 졸업하면 학교 갈 일도 없는데 현장체험학습 신청 그만하고 학교 가서 놀면 안돼?”
“학교에 간다고 뭐 놀 게 뚝딱 생기냐?”
수능이 끝난 성화는 홍중의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다가 헤드셋을 끼고 곡 작업을 하는 홍중의 헤드셋을 당기며 꺼낸 말은 학교에 가자는 것이었다.
“아니 음악실 가서 피아노라도 쳐 줘. 나 너 피아노 치는 거 초딩 때 이후로 본 적 없잖아.”
홍중은 헤드셋을 잡은 성화의 손을 살살 떼어내고 헤드셋을 벗어 목에 걸었다.
“피아노는 왜? 굳이 학교까지 가서?”
“뭐… 낭만? 고딩 시절 낭만이지 뭐.”
성화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만사가 귀찮아 보이는 그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결국 홍중이 본인의 눈빛에 못 이겨 저와 함께 내일 학교로 등교할 것이라는 걸 알았다.
“알겠으니까 그만 쳐다봐.”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랜만에 교복까지 입을래?”
“하… 교복까지 입어야 해?”
“1, 2학년 때처럼 넥타이랑 마이까지 깔끔하게 입어주라.”
“너는 내 꺼 입을 거야? 셔츠랑 바지 두 개씩 있는데.”
“네 꺼는 입기에 짧지 않을까.”
“어, 그러네. 저녁에 집 가서 가져와라.”
성화는 그 특유의 묘한 명령조와 헤드셋을 낀 동그란 뒤통수가 귀엽다고 생각하며 그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홍중아~ 홍중아~” 불러도 그는 대답이 없었다.
“김홍중~”
“…”
“나 좀만 잘게. 저녁때 깨워줘야 해~”
“어. 잘 자.”
.
.
.
“우리 막 입학했을 때 같다. 맞제!”
신났는지 잘 안 쓰는 경상도 사투리가 툭툭 튀어나오는 성화를 보며 홍중은 웃었다. 수능이 끝나자마자 파란색으로 물들인 머리가 등교하는 학생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 민망한 와중 옆에 이상할 정도로 등교를 즐기는 듯한 애까지 있으니 더 눈에 띄었지만, 이것 또한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성화에게 짜증 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막상 홍중도 학교에 오니 기분이 새롭고 신났다.
“음악쌤한테 음악실 써도 되냐고 물어보자. 쌤 우리 좋아하시니까 바로 허락해 주실 것 같아. 어차피 다른 학년 곧 기말고사니까 음악 시간에도 반에서 자습할 거 아니야, 잘하면 하루 종일도 있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 그러네? 잘됐다.”
그날 홍중과 성화는 본인들의 바람대로 하루 종일 음악실을 쓸 수 있었다. 음악실에 온다고 딱히 일과가 다르지는 않았다. 챙겨온 아이패드로 넷플릭스 보고, 선생님들 몰래 떡볶이 시켜 먹고, 책상 이어 붙여서 낮잠 좀 자고,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예비 대학생의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좀 특별한 이벤트라면 홍중이 비싸고 좋아 보이지만, 오래돼서 건반 몇 개가 눌리지 않는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있다는 것이었다.
“야이씨… 사람 민망하게… 카메라는 좀 치우지? 진짜 부끄럽거든?”
“너 옛날에는 카메라 몇 대가 너 찍고 있어도 잘만 쳤잖아.”
“아 그때는 그때고… 애초에 클래식 안 친지 오래돼서 내 맘대로 칠 거라고.”
“어, 알아서 해.”
“아! 카메라 치워주라 성화야. 제발. 뭐 하러 찍는데.”
“뭐… 낭만? 네가 언제 또 고등학교 교복 입고 그랜드 피아노를 쳐보겠냐? 이게 우리나라 하이틴 낭만이다. 자, 시작해. 베토벤으로.”
“…얼굴로 들이대지만 마.”
홍중은 그리 계획적인 사람은 아니었으나, 좋아하는 것에는 고민이 많았다. 성화도 그런 그를 이해하기에 고민하는 얼굴이나 감상하고 있었다. 겨울이라 아직 석식 시간이 되려면 꽤 남았는데도 창문으로는 해가 지고 있었고, 그 노란 빛 앞에 앉아있는 홍중의 파란 머리칼이 빛났다. ‘홍중이는 역시 화려한 게 잘 어울리네.’라고 생각했다.
홍중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며 손을 피아노 위로 올린 순간, 귀를 찢을 듯한 사이렌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겹쳐서 들리기 시작했다.
“xx동 주민 여러분께 알립니다. 현재 xx구에서 이름 모를 바이러스 감염자들에 의한 피해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바이러스가 퍼지게 된 경위와 원인을 조사 중이며 밝혀지는 대로 안내해 드릴 예정입니다. 주민 여러분께서는 사태가 잦아들 때까지 최대한 실내에 머물러 주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알립니다…”
항상 웅웅 울려 잘 들리지 않던 방송이 오늘따라 귀에 쏙쏙 박혔다. 성화는 급하게 카메라를 끄고 인터넷 검색창을 틀었지만, 당최 어떻게 검색을 해야 될지 감이 오지 않아 그저 핸드폰 화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저 사람들 뭐야?”
떨리는 목소리로 창문 가까이에 다가간 홍중을 따라 성화도 창문에 가까이 붙었다. 몸이 불편한 듯 쩔뚝거리며 걷는 사람 3명이 학교 정문 쪽을 서성였다. 학교 경비 아저씨가 그들을 막았고, 그들은 금세 아저씨에게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꽤 먼 거리인데도 그들 사이에 피가 튀기는 것이 보였다. 홍중과 성화는 본능적으로 저 세 사람이 방금 방송에서 들은 바이러스 감염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성화가 먼저 입을 뗐다.
“저거 좀비야?”
“…우리 지금이라도 후문으로 나갈까?”
“아까 실내에 있으라고 했는데?”
“근데 우리 어차피 석식 전에는 돌아가려고 했고…”
성화는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는 대개 홍중의 판단이 맞는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평소처럼 그의 말에 수긍하며 뒤를 돌아 책상으로 가서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교내에 있는 학생들은 현재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이 퍼지고 있으므로 각자의 교실에…”
학교 방송은 각 교실, 운동장에 모두 틀어 놓은 건지 소리가 큰 소리로 메아리처럼 울렸다. 홍중에게 그 방송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방송이 시작하는 순간에 정문에 있던 감염자들이 확 일어나 빠르게 학교 건물로 달려왔고, 그 모습을 본 홍중은 밖에 나가는 건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성화야, 좀만 기다려 봐.”
“응?”
곧 아래층에서 여러 명의 비명이 들려왔다.
“야, 뒷문 잠가!”
홍중은 비명을 듣자마자 앞문으로 빠르게 갔다. 몇 보폭 안 되는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둘은 각자 앞문, 뒷문에서 말없이 숨만 쉬고 있었다. 뭔가 계단 위아래로 왔다 갔다 하는 소리가 점차 커지자, 둘의 손을 점점 떨려왔다. 어느새 밖은 완전히 해가 져 어두워져 있었다.
.
.
.
유튜브에서 미국 정부가 좀비 사태에 대비한 행동 수칙을 정리해 놨다는 음모론에 관한 영상을 본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 정부는 아무래도 이 사태를 예상하지 못했는지 어떠한 정보도 내놓지 못했다. 살아갈 방법을 알려주지 못한 건 둘째 치고 온갖 통신과 전기 사용이 막혀버린 것은 왜 그런 건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 영화와는 다르게 길바닥에서 라디오를 줍는다고 해도 어떠한 정보도 얻을 수 없는 그런 상황이다.
좀비들의 행동 패턴도 우리가 직접 관찰해서 알아낼 수밖에 없었다. 해가 떠 있는 시간에는 귀가 들리지 않는 듯했고, 석양이 지기 시작하면 시각을 잃고 청각에 의존한다. 우리는 대개 낮에 활동했다. 차라리 숨는 것이 숨소리도 내지 않도록 애쓰는 것보다 쉬웠다.
성화와 나는 생각보다 생존 능력이 좋았다. 사태가 일어나고 며칠이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살기 위해서 꽤 많은 좀비를 죽여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수가 늘어나고, 겁 없이 달려드는 좀비들에게 가만히 물리고 있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성화는 여전히 이 행동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학교에서 빗자루를 휘두를 때부터 철물점에서 가져온 공구를 가지고 다니는 지금까지, 좀비를 죽이는 그 순간에는 냉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그 이후에 안전해지면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런 성화 곁에서 우는 데에 힘 다 쓴다고 잔소리하면서 등을 토닥였다. 유독 감성적이고 공감을 잘 하는 성화 옆에 있으면 나는 억지로라도 이성적으로 행동하려 했다. 마음은 아팠지만, 같이 울지는 않았다.
“성화야, 자리 옮기자.”
“응.”
“비율이 어느 정도 되는 것 같아?”
“뭔 비율?”
“사람이랑 좀비랑.”
“음… 사람 40, 좀비 60?”
“사람이 많은 것보다 좀비가 많은 게 낫나?”
“아니, 사람이 많은 게 나아.”
“그래도 좀비가 뭐 훔쳐 가지는 않잖아.”
“한 마디를 안 지네 진짜.”
“그래도 좋지?”
“뭐가. 네가?”
“응.”
“싫어할 수는 없잖아.”
“이잉!”
아무리 말랐어도 거의 180이 되는 덩치로 어깨를 흔들며 되지도 않는 앙탈을 부리는 그를 보면서 입꼬리를 축 늘어트리며 경악했더니 성화는 내 반응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신나게 하하거리며 웃었다. 가끔 성화랑 대화를 하고 있으면 지금 좀비들 틈에 있는 상황이고 매일 안전한 위치를 찾아다녀야 하는 상황인 것을 잠시 잊었다. 삶은 단순히 반복됐다. 먹고 지낼 곳, 물건들 좀 찾아다니면서 좀비들 좀 죽이고, 성화랑 장난도 치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하던 말은 뚝 끊고 숨소리만 내는 체로 멍 좀 때리다가 잠들었다. 딱히 엄청 절망적이지도, 그렇다고 희망적이지도 않은 삶이었다. 옆에 성화도 있고, 점점 익숙해지니까 딱,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정도였다.
어느 날 성화가 사라졌다.
아, 며칠 전에 성화가 사라졌다.
정확히 삼 일 전에 자고 일어났더니 내 옆에 성화가 없었다.
자고 일어나니 성화가 사라졌었다. 참치캔을 따서 먹고, 물로 목을 축이고, 덜어 놓은 샴푸로 머리를 감고 앉아서 기다리는데도 성화가 돌아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등교했던 그날 이후부터 성화랑 떨어져서 지내본 적은 없다. 잠에서 깰 때부터 다시 잠들 때까지 항상 함께 있었다. 아니, 그날 전에도 이미 며칠을 우리 집에서 함께 지냈으니 엄청 긴 시간 같이 있었다. 나는 평소에는 성화 못지않은 울보인데 좀비들이 나타난 이후로는 울어본 적이 없었다. 딱히 눈물이 나는 일도 없었고, 좀 힘들어도 한숨 좀 내쉬고 고개 들면 의외로 살만했다. 성화가 우는 날은 마음이 정말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억지로 눈물을 참으면 참아질 정도였다. 오늘 처음으로 주저앉아서 울었다.
성화가 대체 어디로 간 건지 궁금했다. 좀 더 배부르게 살고 있는 건지, 원하는 대로 따뜻한 물로 씻을 수 있는 곳으로 간 건지. 성화가 원래 먹는 양만큼 많이 못 먹은 지가 오래됐고, 항상 찝찝하다고 했으니까. 성화가 하고 싶은 일을 끝내고 다시 여기로 돌아올 것만 같아서 이틀 동안 오랜만에 밖에 아예 나가지 않고 가만히 며칠 전 자리 잡았던 창고에서 성화를 기다렸다. 이렇게 잠깐 나간다고 뭔 일이 나는 세상인 걸 알았다면 하고 싶은 말 미리 다 할 걸 싶었다. 돌아오면 성화를 앉혀 놓고 하고 싶은 말들이 많으니 제발 돌아오길 바랐다. 희망적인 삶까지는 바란 적도 없었는데, 왜 이렇게까지 날 절망하게 하는지.
삼 일 째가 되니 성화가 아무런 말 없이 이렇게 나갔다가 오랜 시간 돌아오지 않을 사람은 아니라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오늘은 밖에 나가서 성화를 찾아보기로 했다. 창고 문을 살짝 열자, 밖에 빛이 들어왔다. 해의 위치를 봤을 때 오전이었으니, 활동을 시작해도 괜찮았다. 창고가 있는 건물 2층에 올라가서 밑을 봤다. 오늘따라 유독 우리 학교 교복을 입은 좀비들이 많았다. 처음 학교에서 나올 때 금방 좀비화가 된 교복 입은 학생들을 몇 죽였는데 오랜만에 그들을 보니 같은 학교 학생들을 죽였다는 죄책감이 몰려왔다. 고개를 떨군 체 눈을 꾹꾹 누르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좀비들의 동태를 살폈는데 교복 입은 좀비들은 다 같이 비슷한 방향에서 오는 것 같았다. 저쪽은 이제 덜 위험할 것이다.
성화는 멀리 있지 않았다. 잠깐 쉬려고 올라간 어떤 건물 옥상에 있었다. 진작에 찾으러 나왔으면, 이렇게 성화의 눈빛이 공허해지기 전에는 그를 만날 수 있었을까 생각했다. 보고 싶었는데, 물어볼 것도 많은데, 성화는 대답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가방에 있던 청 테이프로 본인의 입을 막을 수는 있었어도 입 크기에 맞춰 자를 정신은 없었는지 테이프 한쪽이 길게 늘어져 흔들리고 있었다. 스스로 묶은 건지 몸에 밧줄이 엉성하게 묶여 있었는데, 지금의 성화로서는 풀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좀비가 괴로워 보인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고통은 느끼는 건지, 배가 고파서 그렇게 사람을 씹어대는 건지 당연히 관심 없었다. 입을 막고 바닥에 박혀 있는 기둥에 몸을 묶여 정말 살짝만 움직이는 성화가 혹시 어디 아픈 걸까, 지금 배가 고프지는 않을까 봐 신경 쓰였다.
“박성화.”
“…”
“말은 하고 나갔어야지.”
“…”
“왜 나갔어? 배고팠어? 깨우지 그랬어. 그리고 우리 밤에는 안 나가기로 했잖아. 내가 마음대로 그렇게 정해 놔서 혼자 나간 거야?”
“…”
“나 두고 혼자 어디 가려던 건 아니지?”
“…”
“뭐라 하는 거 아니니까 말 좀 해주라…”
좀비가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피하기만 하면 딱히 큰일이 생기지 않았으니, 이제는 무섭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는데, 오늘따라 좀비가 무서웠다.
기둥에 묶인 매듭을 칼로 잘라냈다. 이 끈을 끊으면 나에게 달려드나 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본인의 몸이 묶여 있고, 입도 막혀 있는 걸 알고 있어서 그러나? 좀비가 돼서도 얌전히 기다리는 성격이 남아 있나? 앉아서 바닥을 보며 가만히 있길래 줄을 살짝 당기자, 그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자마자 몸을 버둥댔다. 흠칫 놀랐지만, 위협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거친 밧줄 끝을 보니 자칫 잘못 잡고 다니면 내 손에 상처라도 날 것 같았다. 문득 본 성화의 손도 여기저기가 베여 있었다. 마디가 얇아서 유독 길어 보이는 손가락들이 까져 있는 걸 보니 마음이 아팠다. 입을 꾹 다물며 밧줄 끝을 꽉 쥐고 말했다.
“성화야, 학교로 가자.”
그날 무슨 곡을 쳐야 좋아할까 고민할 시간에 그냥 한 곡 쳐주는 게 가장 좋았을 거라는 생각, 늦더라도 꼭 한 번은 쳐줘야겠다는 생각은 꾸준히 했지만 그게 오늘이 될 줄은 몰랐는데.
오랜만에 온 학교에는 좀비가 몇 없었다. 그냥 적당히 도망치거나 좀 때리면 앞으로 걸어가는 데에 문제가 하나도 없었다. 3학년 교실이 있는 층에 올라가 복도에 앉았다. 자물쇠로 잠겨 있는 교실 문까지 굳이 열어서 들어갈 필요는 없었으니.
“뭐 이렇게 쉽냐? 우리가 나올 때만 해도 진짜 미치게 힘들었는데.”
신발장 위에 있는 창문으로 석양이 지며 노란빛이 성화에게 비췄다. 성화의 새까맣게 윤기 나던 머리, 건강했던 피부가 너무 푸석해져 있었다. 주변에 떠다니는 먼지가 맨눈으로도 보이는 이런 곳에서, 고작 이런 모습인데도, 참 잘생긴 얼굴이구나 생각했다.
어차피 학교 내에서 이동하는 거니까 음악실이 그리 멀지는 않았는데, 성화를 끌고 가려니 시간이 꽤 걸렸다. 해의 높이가 점점 낮아지는 것이 창문으로 보였다. 겨울이 지나가면서 길어지던 낮이 오늘따라 유독 짧았다.
음악실에 들어가 운동장 쪽 창문, 복도 쪽 창문, 앞문, 뒷문을 다 열었다. 성화를 옆에 세우고 잠시 생각하다가 밧줄을 내 허리에 묶고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끈이 그리 길지 않아서 성화가 가까이 와 있었다.
“영상 찍어도 되는데…”
내가 뚜껑을 열어놓은 채로 그냥 나와버려서 건반에는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먼지까지 털 필요는 딱히 없었다. 영혼이 하나도 없는 성화를 바라봤다.
“어차피 다 치고 나면 제목 뭐냐고 물어볼 거지?”
이 곡을 끝까지 칠 수는 없겠지. 내 말소리를 분명히 몇몇 좀비들이 들었겠지. 피아노를 치면 당연히 이쪽에 다들 몰릴 것이다. 그때는 성화도 나를 물려고 할까? 좀비들의 입질 소리가 점점 커지고,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성화는 아무런 반응 안 할 게 분명한데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언제부터 네가 좋았던 것 같은지, 왜 너한테 그렇게 티나게 굴었으면서 여태 말도 못했는지, 구구절절 말하고 싶었으나 용기가 없었으니, 고작 이게 내 고백이다.
“아델라이데… 칠 거야. 네가 말한 그 베토벤의 아델라이데. 잘 들어.”
아까 전보다 훨씬 연해진 석양빛을 바라보며, 연주를 시작했다.
[그대의 연인은 고독히 봄날의 정원을 배회합니다.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마법의 빛에 둘러싸이고,
그 빛은 꽃 핀 가지마다 흔들며 전율시키죠.
아델라이데!
거울처럼 빛나는 강물 속에서도,
알프스의 눈 속에서도,
쏟아져 내리는 금빛 구름 속에서도,
별들 가득한 들판에서도 그대의 모습이 일렁입니다.
아델라이데!
나뭇잎 사이에서 저녁 바람이 속삭여주고,
봄날의 은방울꽃이 잔디밭에서 바스락대고,
파도는 포효하며 외치고 나이팅게일은 피리를 불죠.
아델라이데!
언젠가, 오 기적처럼! 꽃이 피리라, 나의 무덤 위로,
재가 된 나의 마음에서는 한 송이 꽃이 자라고,
또렷하게 빛나리라 보라색 잎사귀마다,
아델라이데!]
뱀파이어 사냥꾼이 사라진 지 600년, 혁신을 꿈꾸던 뱀파이어는 인간과 공생하는 법을 찾았다. 인간의 피가 필요하다지만 살생까지 할 이유가 없었고, 인간보다 우월한 신체 능력은 인간을 도울 수 있었다. 야생 동물과 주변 적국으로부터의 안전을 원하는 인간을 돕다 보니 뱀파이어는 새 나라의 권력이 되어 있었다.
살생과 사냥이 이루어지지 않고 평화가 찾아온 세상에선 뱀파이어와 인간은 종에 상관없이 사랑하고 혼인하여 자손을 낳아 새로운 종을 만들었다. 뱀파이어와 인간의 혼혈인 담피르는 뱀파이어처럼 신체 능력이 뛰어났고 인간처럼 햇빛을 볼 수 있었다. 햇빛을 피해야만 했던 뱀파이어를 위해 주로 밤에 이루어지던 대부분의 활동은 시간과 관계없이 종일 이루어졌고 활발한 경제활동은 더 풍족한 나라로 만들어 주었다. 물론, 더 발전된 요즘은 해가 떠 있는 동안에도 뱀파이어는 햇빛을 피해 활동이 가능해졌다.
이런 평화 속에서도 새로운 세상을, 권력을 원하는 무리는 존재했다. 인간들이 만들든 태평성대를 바라든 그들은 담피르의 존재를 기회라고 생각했다. 햇빛을 쐬면서 뱀파이어와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담피르는 아무도 모르게 그들의 손에 뱀파이어 사냥꾼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다만, 담피르는 뱀파이어처럼 영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인간도, 뱀파이어도 아닌 담피르로 태어난 민기는 모든 것이 불만이었다. 민기도 영생을 원한 건 아니지만, 인간보다 신체가 우월하다는 이유로 힘든 훈련을 받아 결국엔 사냥꾼의 운명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뱀파이어 잡는 만큼 돈 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사냥꾼, 멋있기는 했다. 훈련이 너무 힘들어서 더 싫어졌지. 망한 수강 신청으로 월, 수, 금 3일을 1교시부터 시작한 민기는 진지하게 고민해 보려 했다. 자퇴와 잠수 중 어떤 것이 미래의 나에게 잘한 짓일까. 고민이라고 하기에도 뭐 했다. 자퇴면 목숨을 붙어있겠지만 잠수타는 순간 언제 목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체력 안 좋고 운동 싫어하는 송민기가 어쩌다 힘든 훈련을 받게 되었는지, 2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하고 싶은 건 없고요. 신검이나 받아보겠습니다.’ 같은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성별과 종, 나이를 떠나 고등교육을 받은 성인이라면 입대를 위한 신체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적국을 대비하여 선택적으로 군인이 될 수 있었고, 대내적으로는 담피르를 골라내기 위한 작업이었다. 20살의 패기 넘치던 민기는 2년 가까이 피 터지는 훈련을 받으며 사라졌고. 대학을, 그것도 뱀파이어 사냥꾼과는 거리가 먼 모델과로 간 것은 순간의 객기였다.
‘법적으로 뱀파이어 사냥이 금지인데 저도 숨을 곳 하나는 있어야죠.’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 아무도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지, 다들 위장직업 하나쯤은 갖고 있지. 그리고 민기는 후회했다. 걷는 게 이렇게 힘들다고 왜 아무도 말 안 해줬지. 모델과인데 왜 벌크업을 해야 하지. 운동하기 싫어서 왔는데 왜 운동을 더 하고 있지.
침까지 튀기며 열변을 토하는 지도교수의 얼굴만 뚫어져라 보며 역시 자퇴가 답이다- 확신한 민기는 어느샌가 지도교수와 상담하고 있었다. 저, 자ㅌ,
“자네, 혹시 연기에도 관심 있나.”
“예?”
그러니까, 송민기가 왜 연기과 연습실에 앉아있냐고.
유독 여학생의 비율이 높은 이번 연기과 신입생들을 둘러보던 민기는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멋쩍게 웃기만 하는 남자를 발견했다. 준수한 외모에 한 명 한 명 눈을 마주치며 대답해 주는 친절함까지, 무의식중에 너무 바라봤는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반짝이는 눈동자를 홀린 듯 보고 있자 남자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그 옆얼굴과 뒤통수에서도 시선을 떼지 못하던 민기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여기 모델과 친구는 제가 특별히 데려왔어요.”
꾸벅 인사를 하고 자기소개를 함과 동시에 제 이름이 적힌 대본을 받은 민기가 어리둥절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남자를 제외한 모두가 이미 알고 있던 듯 환호했고 민기는 민망함에 큰 몸을 있는 대로 구겼다. 구겨도 숨겨지지 않는 모양새에 다양한 웃음소리가 섞여 들렸다. 유난히 낮고 조용한 웃음소리에 킁킁 심장 뛰는 소리가 이 공간을 가득 채우는 느낌이었다. 근데 왜, 나만 아무것도 모르는 거지. 남의 말을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싶은 대로 듣는 민기가 아는 게 더 이상했지만.
연출을 맡았다는 인간의 설명을 들으며 대본을 훑어본 민기는 당장이라도 울면서 도망가고 싶었다. 혹시 나 뱀파이어 사냥꾼인 거 들켰나? 시발. 왜 뱀파이어 사냥꾼 역인데... 뱀파이어 역을 맡은 남자를 흘깃거리지만 남자는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뱀파이어 사냥꾼이 존재하던 시절, 여러 종의 이기심으로 숱하게 벌어졌던 전쟁에 관한 희곡이었다. 대부분 잘 쓰인 희곡이라고만 배웠을 것이다. 그 시절을 살아온 자들이라면 이것도 충분히 미화된 것이라고 말할 테지만. 강제로 뱀파이어 사냥꾼의 역사를 배웠던 민기는 대사 한 마디마다 고개를 저었다.
운이 좋아 지배층이 된 뱀파이어, 요즘은 좀비라고 불리며 진즉 격리된 구울, 전쟁이 사라진 지금은 전설이 된 강시, 전쟁에서 패배자가 되어 생사를 알 수 없는 늑대인간과 이들을 사냥하던 사냥꾼까지. 모두가 각자의 이기심 때문에 어떤 짓까지 했는데. 사냥꾼이 왜 뱀파이어 사냥꾼으로만 불리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뭐, 그렇다고 아는 척하며 일일이 수정할 생각은 없었다. 연극 연습을 핑계로 훈련에 빠질 수도 있었고, 귀찮으니까.
연습은 무난히 진행됐고, 민기는 그 시간이 좋았다. 훈련 시간은 절반으로 줄었고 늘 하던 돌발상황에 대처하는 훈련이 아닌 등장부터 퇴장까지 동선과 대사, 심지어는 숨 쉬는 부분까지 짜여 있는 연극이 재밌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뱀파이어 역을 맡은 남자도 흥미로웠다.
신입생이래서 반말하고, 얼굴을 봐도 동생 같아서 편하게 대했다. 저보다 살짝 작은 키와 덩치는 편하게 팔을 올려놓기 좋았고, 제가 다가가 어깨동무하면 움찔 긴장하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야, 성화야-하고 부르면 눈을 도륵 굴리면서도 네, 선배님- 답했다. 형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 그리고 하나 더. 뾰족한 송곳니가, 유난히 붉은 입술이, 유독 까만 눈동자가, 뱀파이어 사냥꾼 눈에는 너무 뱀파이어였다. 모르는 척, 아닌 척 정체를 숨기려는 뱀파이어가 뱀파이어 역을 맡았다니.
조금 늦어진 시파티였다. 술도 못 마시면서 거절도 못 하던 성화는 취한 듯 뽀얗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고 아무 생각 없이 술만 홀짝이는 민기를 힐끗거리는 눈은 이미 풀려 느릿느릿 민기의 움직임을 좇았다. 끈질긴 시선에 눈을 맞추자 놀란 성화가 딸꾹질하며 시선을 피했다. 싱거움에 시선을 돌리면 끈질기게 바라보고 시선을 맞추면 눈을 피하기를 여러 번 반복하자 답답해진 민기가 성화를 밖으로 이끌었다. 얘 너무 취한 거 같아서 데리고 나갔다 올게. 다른 이들은 민기가 비틀거리는 성화를 부축하든 말든 관심 없고 자기들끼리 얘기하느라 바빴다.
“나한테 할 말 있어?”
“선밴님..!”
제 딴엔 단호하게 말하고 싶었는지 휘청거리던 몸을 꼿꼿이 세우고 두 눈은 똑바로 뜨려고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차마 혀까지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는지 다 뭉개진 발음으로 민기를 불러놓고는 휘청이다 민기에게 안기는 꼴이 되었다.
“그.. 제가요.. 이겅 말씀드려야 될 거 가타서요오...”
“뭐? 너 뱀파이어인 거?”
“네에...엑??”
“누구한테 말할 생각 없어.”
당황한 성화가 부축해 주던 민기의 손을 밀치면서 똥그랗게 커진 눈으로 민기를 바라봤다. 여전히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는 민기는 몸을 돌려 가게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순식간에 눈앞에 나타난 성화를 안는 꼴이 되었지만.
“예상했는데. 진짜 뱀파이어구나.”
“어띀.. 어뜨케 알아써여?”
달라진 움직임과는 달리 여전히 뭉개지는 발음이 성화가 취했음을 알려주었다. 아닌가, 그냥 발음이 안 좋은가.
“그냥. 티가 나던데.”
“긍데, 그러면, 내가 형이라는 생각은.. 앙 해?!”
아, 할 말이 이거였구나.
“아니, 신입생이라길래.”
“너 인마, 그거 편견이야.! 나이, 어? 많아도 신입생일 수 있거등?”
“아. 딱히 그런 생각을 안 해봐서. 인간 나이 몇 살로 살고 계시는데요.”
“어..? 23살...”
“형이라고 부를게요. 됐죠?”
순순히 태도를 바꾼 민기에 당황한 건 성화였다. 응... 눈을 도르륵 굴리며 고개를 떨구던 성화는 민기에게 얼굴이 잡혀 민기와 눈을 마주했다. 영문을 몰라 찌부된 볼과 툭 튀어나온 입술로 웅얼거렸다. 잠깐만- 성화의 눈동자를 한 번, 캄캄한 하늘을 한 번 번갈아 보던 민기가 성화의 눈을 가렸다. 모하늨,데에- 민기에게서 벗어나려 아등바등하다 꿈쩍도 하지 않는 민기를 때려버린다.
“아니, 눈 빨개졌다구요.”
얼마나 눈을 깜빡이는지 눈을 가린 손바닥에 스치는 속눈썹이 간지러워 손을 떼면 훨씬 붉어진 눈이 민기를 바라봤다. 다 들키려는 거야 뭐야- 투덜거리는 민기의 목소리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늘을 바라보니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떠 있었다. 아이씨... 낮게 읊조리는 성화의 송곳니가 더 뾰족해 보였다.
“원래 조절을 잘 못해?...요?”
“아니이... 술 마셨잖아...”
“마시지도 못하면서 무슨 술을...”
저를 흘겨보는 붉은 눈에 민기가 말을 멈추고 딴청을 부렸다. 한숨을 내쉰 성화가 제 눈을 가렸고 민기는 다시 까맣게 돌아온 눈을 마주했다. 달빛을 머금은 까만 눈동자가 더욱 까맣게 보였다. 그렇게 민기는 한동안 성화의 눈을 바라봤다. 밝은 달빛에 홀린 건지, 뱀파이어에게 홀린 건지.
술김에 꺼낸 말이 맞았는지, 성화는 열심히 민기를 피해 다녔다. 성화를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하려는 민기를 못 본 척 지나치고, 점심에 같이 해장하자고 했으면서 연락도 없다. 사실 민기는 성화가 열심히 피해 다니는 걸 전혀 몰랐다. 혼자 밥 못 먹는 송민기는 아아메나 쪽쪽 빨면서, 얘 숙취로 기절했나 봐- 무슨 뱀파이어가 술을 이렇게 못 마셔- 하는 쓸데없는 생각만 했다. 누가 봐도 나 지금 너 피하고 있어요-라는 얼굴로 부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민기에게서 멀어지기 전까진.
뭐야? 지금 나 피한 거야? 왜? 나 어제 뭐 실수했나? 헉, 설마 뱀파이어인 걸 알아차려서? 라고 하기엔... 그게 걱정이면 내 기억을 지우면 되잖아. 기억 지워진 척할 수 있는데. 도저히 풀리지 않는 궁금증에 성화를 찾아 나섰다. 그새 소문이 났는지, 보는 이마다 민기에게 성화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하지만 민기는 성화를 만날 수가 없었다. 이놈의 뱀파이어가 냄새 맡고 도망을 가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 연습실로 향하다 깨달았다. 아, 굳이 안 찾아 다녀도 어차피 만날 거였는데.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열심히 피해 다니던 성화도 연습실로 들어오며 민기의 얼굴을 보곤 눈에 띄게 놀랐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성화의 앞을 가로막은 민기가 입을 열었다.
“왜 나 피해요?”
“안 피했는데...”
“거짓말. 같이 밥 먹기로 했으면서.”
“아, 그게...”
“나 혼자 밥 못 먹는데, 지금 쫄쫄 굶었는데.”
“...미안.”
민기의 궁금증은 해결해 주지 않으면서 뭘 그렇게 걱정하는지, 별생각 없이 꺼낸 말에도 성화는 민기의 눈치를 살폈다. 미세하게 토라진 얼굴로 자리에 앉는 몸을, 워낙 두꺼운 입술이 부루퉁해지는 얼굴을, 남들이 보기에 화난 것 같지만, 서운함이 가득한 눈을.
“자꾸 왜 봐요.”
“...밥 먹으러 갈래?”
“지금? 연습은요.”
눈을 도르륵 굴리며 주변을 살핀 성화가 히히 웃으며 귓속말했다. 화장실 가는 척하면 되징- 생긴 것과 다르게 땡땡이쳐 본 적 없는 송민기는 망설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렇게 보면 다 들켜; 조용히 얼른 다녀오자- 소리도 없이 연습실을 벗어나는 성화를 보며 입술만 짓이기던 민기는 울상을 지으며 따라갔다.
“나 땡땡이 처음인데.”
“뭐?!?”
“그렇게 놀랄 일이에요?”
“어어,, 아니..”
생긴 걸로 별의별 오해 다 받아본 송민기는 여전히 상처받았다. 아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토라진 민기가 몸을 돌렸고 빠르게 민기의 앞을 가로막은 성화였다. 제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능력이 축지법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아니..! 나도 땡땡이 안 쳐봤어..”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순순히 따라오는 민기에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후문 떡볶이 먹어봤어? 핫도그랑 같이 먹으면 진짜 맛있어. 아, 거기 주먹밥도 맛있는데.”
“무슨 뱀파이어가 음식을 그렇게 좋아해.”
“그럴 수도 있징... 편견으로 가득한 놈...”
아, 같이 가- 들릴 듯 말 듯 꿍얼거리며 빠르게 걸어가는 성화를 쫓으며 소리치자 민기의 걸음걸이에 맞춰 속도를 줄이는 성화였다.
하나둘 피어나던 꽃들이 만개하고 초록빛으로 물든 세상이 빨갛고 노랗게 변하는 동안 성화와 민기는 연애 비슷한 걸 했다. 왜 연애가 아니고 비슷-이냐면. 보통의 연인이라고 칭하는 관계에서 하는 행동은 다 했다. 일어나면 연락하고 잠들기 전까지 밤새도록 통화했다. 시간이 생기면 함께 영화를 보고 카페에 가거나, 성화의 자취방에서 영화를 보거나 뒹굴뒹굴하다 가벼운 스킨십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왜 연애가 아니냐고?
박성화는 연애라고 생각했다. 할 건 다 했으니까. 하지만 송민기는 아니었다. 고백을 안 했잖아. 저 형도, 나도. 민기도 여러 번 고백하려고 했었다. 타이밍이 안 맞아 고백의 ㄱ자도 못 해서 문제였다. 안타깝지만 이번에도...
보름달이 뜨는 동짓날이었다. 보름달이 언제 뜨는지 관심 없는 송민기는 고백할 준비를 했지만, 너무 어설퍼서 박성화한테 다 들켰다. 문제는 은근 허당인 박성화가 보름달 뜨는 날 계산을 잘못했다는 것. 아침부터 컨디션이 안 좋다고 했다. 점심 먹으면서 저녁 메뉴 생각하는 성화가 메뉴는커녕 밥을 깨작거렸다. 더불어 점점 붉어지는 눈에 심각성을 느낀 민기가 성화를 들여보냈다. 고백이 웬 말이야, 어디 아픈 건지 걱정돼 죽겠는데.
집으로 가는 길에도 미안해하던 성화는 빨간 눈으로 잠이 들었다. 오늘도 시도하지 못한 고백에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는 민기가 이상함을 느낀 건, 유난히 크고 밝은 보름달이 긴 어둠 속을 밝힐 때였다. 피비린내가 풍기고 무언가에 홀린 듯 돌아다니는 사람들. 아니, 뱀파이어들. 뭘 그렇게 찾는 건지 파악하기도 전에 달려드는 뱀파이어를 막으며 허리춤에 달린 단도를 깊숙이 밀어 넣었다. 아직, 사냥은 안 된다.
마주치는 뱀파이어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만 쓰러트린 민기가 다시 성화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곤히 잠들어 있던 성화는 캄캄한 방 안에서 붉은 눈만 형형하게 빛내고 있었다. 왜 그러고 있어- 물어도 돌아오는 답이 없었고 민기가 눈을 맞춰도 초점이 불분명했다. 걱정스럽지만 성화가 집을 벗어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민기는 상황 파악을 했다.
뱀파이어의 약점과 강점에 대해 훈련하던 날, 궁금증에 성화에게 물었던 적이 있었다. 책에서 본 듯이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그렇게 강해지냐고. 평소에 힘 못 쓰는 박성화가 보름달이 뜨면 인간은 제압 가능하다고 했다. 대신 동물적인 감각들이 강해지는 만큼 약점이 된다고도 했지.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동짓날, 가장 밝은 보름달이 떴고 가까워진 달과 지구의 거리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인간의 피를 찾는 뱀파이어가 살생을 저지르기 시작했고, 인간과 뱀파이어의 공생은 끝이 났다.
인간은 뱀파이어를 색출해 내기 시작했고 정체를 숨기지 않던 뱀파이어도 정체를 숨기던 뱀파이어와 같이 숨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만을 기다려 온 그들은 여론을 형성했다. 뱀파이어 사냥꾼을 부활시켜야 한다고. 우리는 군대를 보유하고 있으니 그들을 훈련하면 금방 가능할 것이라고. 두려움에 떨던 인간들은 동요했고 그들은 그들의 세상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단기간에 훈련이 가능하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는 듯 동짓날 살생을 저질렀거나 시도했던 뱀파이어들을 본보기로 잡아 사냥했다. 두려움에 떠는 인간들이 마음 편히 지내며 지원자가 생기도록. 그렇게 그들은 원하던 권력을 손에 쥐는 데에 한 발짝 가까워졌다.
민기는 울고 싶었다. 어쩌다 뱀파이어 사냥꾼이 되어 훈련은 받았지만, 살생과 사냥이 금지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진짜 생명의 목숨을 끊기엔 너무 무서웠으니까. 그리고 이제는 뱀파이어를 좋아하니까. 제 손으로 영면시키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고 다른 사냥꾼의 손에 영면을 맞이하는 건 상상도 하기 싫었다. 아무리 정체를 숨기고 다녔어도 사냥꾼의 눈까지 속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가둬둘 수도 없고.
그리고 송민기가 간과한 것 한 가지. 인생은 늘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 없던 뱀파이어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수혈통이 더 강하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순혈이 중요하지 않아 실제로 존재하는지 모를 뿐. 사냥이 시작됐다는 건 전쟁이나 다름없었고 이들은 순혈 뱀파이어를 보존해야만 했다. 수면기에 들기로 한 것이었다.
인간이 되고 싶었던 뱀파이어 박성화는 다음 생에는 인간으로 태어나게 해달라는 소원을 늘 빌며 언제든 죽을 준비를 했다. 쉽게 끊어지지 않는 목숨이 끊어질 수 있다는 방법은 다 해봤다.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했다. 좋아하는 인간이 죽는 건 그만 보고 싶고 뱀파이어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시선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원하는 대로 되는 것도 없는데 무료한 일상에서 재미나 찾아보자 해서 가게 된 학교였다. 새로운 재미도 찾았고 또 좋아하고 소중한 인간이 생겼다. 이런 걸 원하진 않았는데. 나름 취향도 맞고 생각하는 게 달라 흥미로웠던 민기와는 계속 이렇게 투닥거리며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었다. 그러면 안 되지만, 민기를 뱀파이어로 만들어 버리면 평생 함께 지낼 수 있지 않을까 잠시 고민도 했었다.
세상이 혼란스러워진 지금, 성화는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민기를 뱀파이어로 만드는 것과 본인이 영면기에 드는 것 중에 선택해야 한다는. 그리고 성화는 두 가지 방법 다 시도해 보기로 했다. 500년 동안 뭐든 시도해 봤는데 지금이라고 못할 건 없으니까. 게다가 민기는 담피르이지 않나. 뱀파이어로 만들 수 있는 확률이 높았다. 이미 절반은 뱀파이어니까.
보름달이 뜨는 동짓날은 100년에 한 번씩 돌아왔다. 그날마다 성화는 참을 수 없는 욕구에 사고를 쳐왔다. 인간의 피를 원해 살생을 저지른 건 아니고 인간을 뱀파이어로 만들려다 실패한 것이었다. 결론은 같은 살생이어서, 근신 기간을 거치며 정체를 숨기기 시작했다. 저를 이해하던 민기의 행동에 마음이 열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00년 만에 보름달이 떴던 동짓날. 민기를 뱀파이어로 만들고 싶은 욕구에 휩싸인 성화는 모든 감각을 차단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민기는 어쩌면 오늘이 성화와의 마지막 만남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뱀파이어는 계속해서 사냥당하고 순혈 뱀파이어는 하나둘 자취를 감추었다. 성화가 사라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이 바뀌고 오랜만에 만난 성화는 붉은 눈과 뾰족한 송곳니를 숨기지 않았다. 무슨 얘기부터 해야 할지 말을 고르는 민기에게 대뜸 성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뱀파이어 할래?”
“뭔 소리야...”
“방법을 찾았어.”
성화의 말은 이랬다. 민기는 이미 담피르이니 사냥 대상이 아니며 뱀파이어로 바뀌어도 몸이 견딜 수 있을 테니 민기가 뱀파이어가 되고, 성화 본인은 수면기에 들겠다는 것이었다. 이 혼란이 잠잠해지면 민기가 성화를 깨우고. 이런 엉뚱한 상상을 한 성화에 웃음이 나왔지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성화를 바라보자 성화는 히히 웃으며 말했다.
“뱀파이어여도 뱀파이어 사냥꾼이었던 자들 몇 있어. 괜찮아~”
“...언제부터 알았어?”
“음... 내 눈이 붉어지기 시작하는 걸 알아차렸을 때? 대부분은 충혈된다고 얘기하던데.”
“아.”
긍정의 대답을 바라며 눈을 반짝 빛내는 성화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 난 성화는 세세한 계획을 설명했다. 마침 정월대보름이 다가오니, 빠르게 실행해야 했다. 성화는 민기의 피를 빨아먹고 미리 뽑아뒀던 자신의 혈액을 주입했다. 주기적으로 이 행위를 반복하자 일주일 만에 변화가 생겼다. 겨우 한쪽 눈만 붉어지거나 아예 붉어지지 않던 눈이 붉어지기 시작했고 송곳니가 조금 뾰족해졌다. 온몸이 불타는 것 같고 점점 햇빛을 보는 것도 힘들어져 걱정하는 민기와 다르게 성화는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걱정마, 정월대보름만 지나면 너는 해 볼 수 있을 거야-하는 성화의 목소리를 위안 삼으며.
성화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서늘해지는 몸과 창문을 통해 햇살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기약 없는 수면기에 들 성화는 겁도 안 나는지 해맑았다.
“내가 실패해서 수면기가 아니라 영면기에 빠져버리면 어떡해.”
“어어~ 괜찮아. 너라면 날 어떻게든 살릴 거 같아.”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치만 내가 영면에 빠지면 환생할 수 있게 기도해 주라.”
시간은 빠르게 흘러 정월대보름이 되었다.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도 명절은 꼬박꼬박 챙기는 인간들은 대체 뭘까 고민하는 민기는 온전한 뱀파이어가 되었다. 뱀파이어가 영면에 드는 방법만 배웠던지라 수면기에 드는 방법도 배우고 필요한 것도 챙겼다. 수면기에도 성수를 적신 십자가가 필요하다니 그냥 뱀파이어 죽이려는 거 아닌가? 쓸데없는 생각도 하고.
하늘이 어두워지고 커다란 보름달이 떠올랐다. 아직 인간 음식은 먹지 못하는 민기와 마지막 만찬을 즐긴 성화가 검은 관 앞에 자리했다.
“언제든지 달빛이 내리는 곳에 관을 두고 내 이름을 부르면 깨어날 거야. 보름달이면 더 좋고.”
성화도 긴장되는지 쉽게 몸을 뉘지 못하고 했던 설명을 여러 번 반복했다. 평소라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도 여러 번 반복하면 알아들었다고 말하던 민기도 별말이 없었다.
더는 지체할 수가 없었다. 하늘엔 조금씩 구름이 끼고 휘영청 빛나던 보름달이 구름에 가려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관뚜껑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던 성화가 민기를 바라보며 망설이다 민기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전과 다르게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입술에 용기를 얻은 듯 망설임 없이 관속으로 들어갔다.
“민기야. 관 뚜껑 열 때는 고백해라.”
서프라이즈니까 기대해- 스르르 닫히는 관뚜껑 위로 대답은 했지만 성화에게까지 전달이 되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달빛이 내리는 관 위에 성수를 묻힌 십자가를 올려놓은 민기가 입을 열었다.
“박성화를 길고 긴 잠에 들도록 명하노라. 저 달빛이 부를 때 깨어날 수 있음을.”
뭐, 연기가 나온다거나 관이 움직인다거나 별의별 상상을 했던 민기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일에 살짝 실망했다. 눈물이 좀 나는 거 같긴 햇다. 아니 이거 수면기 맞아? 박성화 장난치는 거 아냐? 의문이 든 민기가 관뚜껑을 열어본다. 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순간 외로워진 민기는 보름달을 바라보며 지금 깨우면 안 되나- 생각하며 밤을 지새웠다.
물속에서는 모두가 동등하다. 남들과 달라서 땅 위에서 차별받았던 것들이 물속으로 들어가면 모두 같아진다. 그래서 물은 공평하기도 하다.
-아 4번 레인 김홍중 선수. 가장 먼저 반환점을 찍었어요.
물속에서 승부를 내는 수영은 ‘다름’이 전혀 소용없게 된다. 귀가 들리지 않더라도 물속에서는 모두가 이명이 오고, 말을 하지 못하더라도 물속에서는 모두가 목소리를 잃는다.
-두 번째는 최정훈 선수가 02 차이로 먼저 반환점을 찍습니다!!
오직 물결, 물의 저항만이 힘을 쓰고 모두가 동일하게 그 힘에 집중한다. 남들을 이기기 위해 사용하던 언어 대신 요동을 만들어 저항을 이용한다.
-세 번째는 김홍중 선수가 03 차이로 앞섭니다!!
관중석에서 환호가 들리는 듯했지만, 물에 들어가면 오직 내 숨소리만 귓가에 울렸다. 그것이 나에게 가장 큰 환호였다.
-1분 47초 13으로 4번 레인 김홍중 선수가 1등으로 들어옵니다.
그것이 내가 수영을 사랑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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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베 아테누아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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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지고 락커룸으로 들어갔다. 김홍중 석 자가 정갈하게 적힌 사물함을 열어 오늘 경기에 사용했던 수경과 수모를 넣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선생님한테서 온 문자를 확인했다. 수영장 공사로 인해 한 달 사용 금지는 홍중에게 깜짝 휴가를 줬다. 마침 친선전도 1등으로 마무리했고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그 좋은 기분은 오래 가지 못했다.
“좋겠네~ 또 1등 해서. 아. 계속하던 거라 별 감흥이 없나?”
홍중은 비아냥거리는 말의 주인을 흘낏 봤다가 다시 제 사물함으로 시선을 돌렸다. 굳이 상종할 필요가 없는 무리였다. 누가 봐도 저를 무시하는 태도에 정훈은 제 이를 꽉 깨물었다.
“아아 미안. 네가 벙어리라는 걸 잊고 내가 또 대답을 기다렸네?”
그러자 주위 사람들이 깔깔 웃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중은 화내기는커녕 여전히 짐만 쌌다. 그저 만년 2등의 발악이라고밖에 보이지 않았다. 남을 깎아내릴 시간에 수영 연습이나 더 하지. 실력으로 이기지 못해 다른 것으로 누르려는 정훈의 모습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야. 내 말 안 들려? 이젠 귀도 먼 거야?”
선을 모르고 넘으려는 정훈에 홍중은 사물함을 쾅 닫았다. 분노가 느껴지는 소리였지만 잠깐 움찔할 뿐 정훈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홍중에게로 걸어왔다.
“네가 장애인인 것을 감사히 여겨. 안 그랬으면 너 봐주지도 않았어.”
“어우 시끄러워, 시끄러워. 락커룸에서 왜 이렇게 시끄러워.”
욕이라도 한 바가지 날려주려 했지만 뒤에서 나는 윤호의 목소리에 홍중은 올렸던 손을 내렸다. 같은 수영선수였지만 윤호는 다이빙 선수로 홍중과 달랐고 나름 이 학교에서 홍중과 친하게 지내는 무리 중 한 명이었다. 윤호는 방금 자고 일어났는지 비척비척하며 걸어와 홍중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수영 선수가 말 대신 실력으로 이겨야지 치사하게 약점으로 이기려 들면 되나?”
“야 넌 어디 후배가 선배한테 대들어?”
“선배가 선배다워야지. 추하게 늙지 맙시다 우리. 보는 사람도 많은데.”
정훈은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며 시선이 집중된 것을 확인했다. 그는 짜증스럽게 바닥에 침을 뱉곤 제 가방을 챙겨 나갔다. 그의 친구들도 따라 나가자 조용했던 락커룸이 제각각 다른 목소리로 채워졌다.
“형. 나 잘했지.”
‘잘했어. 근데 매번 이러지 않아도 돼.’
“근데 쟤는 너무 꼴 보기가 싫은걸. 나 연습 하러 가기 싫어서 여기서 몰래 자고 있었단 말이야.”
‘아까 코치님이 너 열심히 찾던데.’
“설마 여기 있는 건 모르겠지.”
귀엽게 윙크하는 윤호였지만 홍중은 징그럽다는 듯 표정을 찡그렸다. 몇 년을 봤지만 아직도 윤호의 애교는 익숙해지질 않았다. 밥이나 먹자. 수화로 말하니 윤호가 방긋 웃었다. 밥의 ㅂ만 말해도 세상이 다 가진 것처럼 웃는 게 윤호였다. 그렇게 오늘 저녁을 이야기하며 락커룸을 나오다 홍중이 물었다.
‘학교 수영장 연습할 만해?’
“뭐, 나쁘지 않아. 열두 시부터는 사용금지인데 열한 시부터는 사람이 없어.”
아무래도 후진 학교 수영장보다는 개인 연습장이 좋겠지. 윤호가 어깨를 으쓱이며 걸어갔다. 한 달 휴가도 좋지만 내년 하계 올림픽을 나가려면 몸이 굳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또한 수영은 홍중에게 생계 수단이면서도 스트레스 풀어주는 것이기에 하루라도 빠질 수 없었다. 오늘 한 번 가볼까.
“정윤호!!!”
“흐익. 형 내 식판 좀 대신 받아줘!!”
저 멀리서 호루라기를 불며 달려오는 코치에 윤호는 기겁하며 도망갔다. 오히려 물속보다 더 빠른 달리기에 홍중은 작게 놀라며 갑자기 일어난 추격전을 멍하니 쳐다봤다. 어느새 지친 코치를 몇 걸음 앞에서 싹싹 비는 윤호의 모습에 홍중은 혀를 차며 식당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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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호가 말한 대로 밤 11시의 학교 내 수영장은 조용했다. 가져온 수건을 근처 의자에 올리고 가볍게 몸을 푼 뒤 발부터 물에 넣었다. 적당한 온도감은 발을 감싸고 빠르게 올라와 제 심장께까지 닿아 안전함을 일러줬다. 닿은 온도를 확인한 심장은 준비됐음을 알려주듯 빠르게 뛰고 홍중은 그대로 물속으로 들어갔다. 주 영법은 자유형이었지만 홍중은 잠영을 가장 좋아했다. 고요한 물속으로 들어가면 홍중을 향해 날카롭게 던지던 말들이 물에 잠겨 사라지고 오롯이 숨을 조절하는 것, 그것에만 집중하게 하는 것이 잠영의 매력이었다. 그리고 잔잔한 물 위를 힘차게 올라와 참던 숨을 몰아 내쉬는 것은 짜릿함을 선사했다.
오직 잠영만으로 물을 즐겼을 때 어느새 시간은 11시 30분에 도착해 있었다. 샤워실에서 씻고 나가면 얼추 12시였고 홍중은 수영모를 벗어 대충 머리를 털며 샤워실로 향했다. 샤워기의 물을 틀고 물을 맞으며 오늘 경기를 되새겼다. 생각보다 스타트가 늦은 게 흠이었다. 스타트 연습을 더 해야 할까, 생각하던 중 문득 수영장 의자에 놓고 온 수건이 떠올랐다. 샤워실에 놓인 공용 수건을 써도 됐지만 홍중은 샤워기의 물을 껐다.
수영장으로 돌아오니 누군가 물속으로 첨벙 들어갔다. 이제 슬슬 수영장 문 닫을 시간인데 이제야 수영 연습을 하는 모습이 신경 쓰였지만 홍중은 오직 제 목적만 생각했다. 다행히 제자리에 있는 수건을 들고 다시 샤워실로 들어가려는 순간 이상한 점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사람이 어떻게 오랫동안 물속에 있지?
적어도 홍중이 수영장에 들어와 수건이 있는 의자로 걸어가고, 수건의 상태를 확인하고, 다시 입구까지 걸어오는 데 최소 2분은 지났지만 물속에 들어간 사람은 묵묵부답이었다. 설마 하는 생각에 홍중은 들고 있던 수건을 던지고 순식간에 물속으로 다이빙했다. 그리고 수영장 바닥에 가라앉은 그를 봤을 때 홍중은 제 눈을 비비며 그를 다시 확인했다.
분명 그는 상체는 홍중과 같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하체는 영락없는 물고기였다. 그것도 한쪽 꼬리가 없는.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녔다. 배에 끈 같은 무언가가 묶여있었고 그 끈은 물 위로 연결돼 있었다. 이상한 모습의 그는 홍중이 물에 들어온 것을 눈치챘는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고 홍중과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끈을 잡고 물 위로 올라갔다. 홍중 또한 따라 올라가고 그제야 제대로 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물을 잔뜩 머금은 탓에 착 가라앉아 귀를 가릴 정도로 긴 머릿결, 송골송골 맺힌 물방울이 보석처럼 빛나게 만드는 이마, 제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잔뜩 선 콧대, 방금까지 물에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분홍빛 입술,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눈에 띄는 바다를 담고 있는 그의 눈동자. 모든 것이 합쳐졌을 때 비로소 그의 전체 얼굴이 보이고 그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모든 것이 흠 하나 없이 조화롭게 섞인 그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부정적인 감정이 들어찼다.
“누구야 너.”
남자가 물었지만 한 손으로 난간을 붙잡고 있는 탓에 수화를 할 수 없었고 그것이 남자의 심기를 더 건든 듯했다. 남자는 질문하기 전보다 더 날카로운 인상으로 홍중에게 더 다가왔다. 당장이라도 베일 것 같은 그의 눈매에 홍중은 서둘러 몸을 난간으로 올렸다. 그것이 도망이라고 생각했는지 남자가 잡고 있던 레일을 놓고 홍중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뻗은 손은 아무 곳에 닿지 못하고 남자는 그대로 물속으로 들어가고 당황한 홍중이 난간에서 내려와 물속으로 남자를 따라 들어갔다. 남자는 어느새 수영장 바닥에 가라앉았고 홍중은 잠영으로 한 번에 바닥으로 내려가 그의 배를 잡아 안고 물 위로 올라왔다. 남자를 옆 난간에 기대게 하고 홍중도 난간을 붙잡았다. 그리곤 남자를 향해 주먹을 쥐고 새끼손가락만 펼친 채 턱에 갖다 댔다.
‘괜찮아?’
하지만 남자는 홍중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글씨 적을만한 필기구를 찾았지만 수영장에 그런 도구가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홍중은 남자의 손을 잡아 손바닥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남자의 표정에 의구심이 가득했다.
‘괜찮아?’
처음에는 손바닥에 적힌 글씨를 간지럽다는 듯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하더니 끝까지 적힌 말을 확인하고 홍중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눈동자에 또 다른 바다를 품고 있는 남자의 눈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한 번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눈썹에 의해 파도가 넘실거리며 반짝였다.
“응. 근데 너 말 못 해?”
홍중이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화를 모르는 그에게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큰 확답이었다.
“그렇구나.. 그럼 나에 대해서 소문낼 일 없겠네.”
그제야 남자는 안심한 듯 웃으며 난간 위로 올라섰다. 꼭 홍중이 본 것이 헛것인 것처럼 물고기 형태였던 반쪽은 어느새 보통 사람과 같은 다리로 변했다. 그 변화를 신기하게 홍중이 쳐다보고 그의 시선을 느낀 남자가 걸어와 홍중에게 손을 건넸다.
“나 여기 청소해야 하니까 이제 그만 나와줄래?”
그제야 수영장 시계가 보이고 마감 시간에 다다랐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남자의 뒤로 보이는 청소도구에 홍중은 그의 직업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일에 피해가 되지 않도록 홍중도 남자의 손을 잡고 물속에서 나왔다. 남자도 제 할 일을 하려는 듯 청소도구로 돌아가 밀대를 꺼내 바닥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태평하게 제 할 일을 하는 남자가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인어가 사람들 속에 섞여 사는 것은 엄연히 불법이었고 남자는 불법을 들켰음에도 평온했다. 홍중의 시선을 느낀 남자가 고개를 들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청소 도와줄 거 아니면 가고. 뭐 할 말이 더 있어?”
‘너 인어잖아. 나한테 들킨 거 아니야?’
“나 수화 못 해. 적어줘.”
남자가 아까와 같이 손바닥을 내밀고 홍중이 문장을 적었다.
“근데 나가서 네가 나 인어라고 소문낼 거 아니잖아.”
‘어떻게 알아 그걸?’
“넌 그럴 거 같아.”
하지만 홍중의 의문을 풀기에 충분한 대답이 아녔다. 대답을 해줬는데도 가만히 있는 홍중에 남자는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나 너 때문에 청소 늦었거든? 그러니까 방해하지 말고 가. 교장 선생님한테 이르기 전에.”
남자가 으름장을 놓자 그제야 홍중이 발걸음을 옮겼다. 얼굴에 힘주며 말하는 그의 얼굴이 마치 레서판다의 위협 같아서 한발 물러서야 할 것 같았다. 작게 흥얼거리며 밀대를 미는 모습을 뒤로하고 홍중은 수영장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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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중은 다음날 다시 교내 수영장을 찾았다. 처음 본 인어는 호기심을 일어냈고 홍중을 다시 수영장에 발을 들이게 했다. 하지만 아무리 수영장과 창고를 둘러보아도 그의 꽁무니도 볼 수가 없었다. 이름이라도 들었으면 학교 선생님에게 물을 수라도 있었겠지만 그에 대해 아는 거라곤 인어라는 사실 뿐이었다. 그 사실도 홍중만 아는 사실이라 함부로 내뱉을 수도 없었다. 결국 홍중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수영모와 수경을 챙겨 레인의 시작점에 섰다. 수영함으로써 그에 대한 호기심을 지울 요량이었다.
한 차례 숨을 내쉬며 스타트대 위로 올라서고, 한 차례 숨을 가다듬으며 출발 자세를 취하고, 한 차례 숨을 들이쉬며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저항이라곤 파동뿐인 물속에서 나와 물살을 가르며 반환점으로 향해 달렸다. 수영 선수 치곤 작은 키에 반환점을 찍는 거리가 멀었지만 홍중은 남들보다 빠르게 몸을 굴려 반환점을 찍는 것으로 극복했다. 반환점을 찍고 나서는 최고 스퍼트를 내기 위해 오로지 제 다리와 팔의 힘에만 집중했다. 그렇게 모든 집중을 나아가는 힘에만 총동원한다면 어느새 손가락은 끝점에 닿고 수경을 벗으며 화면에 뜬 1등을 보면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애플 워치에 평소와 비슷한 시간이 기록되고 홍중은 마침내 웃을 수 있었다. 오늘 했던 고민이 싹 파동에 쓸려 사라진 기분이었다. 이 기분을 가지고 난간에 올라서는 순간 누군가 홍중에게 수건을 내밀었다. 시야에 들어찬 수건에 홍중이 손을 따라 올려다보고 오늘 그렇게 찾아다니던 얼굴에 또 다른 미소를 지었다. 남자는 수건을 받지 않는 홍중이 개의치 않는 듯 그의 머리에 수건을 올리고 옆에 앉았다. 여전히 사람의 다리였다.
“수영 잘한다 너.”
‘너는 인어니까 더 잘하잖아.’
“나 수화 못 하니까 적어줄래?”
언제 가져온 건지 남자가 수첩과 볼펜을 홍중에게 건넸다. 수첩의 표지에서 헤엄치는 고래가 귀여웠다. 그리고 문득 남자는 이런 고래와 함께 헤엄도 쳐봤을까 궁금증이 생겼다.
“맨날 경쟁심에 수영하면 안 힘들어?”
‘그래도 좋아. 수영하면 내 약점이 사라지는 것 같아서.’
“너에겐 수영이 강점이구나.”
남자의 말을 끝으로 물속에서 꼬리가 살짝 일렁이었다. 투명한 물속에서 파란 한쪽 꼬리는 선명하게 보였다. 유하게 움직이는 그의 꼬리는 한쪽이 없을지라도 작은 파도를 일으키는데 부족함이 없었고 잔잔함이 그것대로 매력이었다. 홍중의 시선을 느낀 남자가 꼬리로 홍중의 발바닥을 간지럽히고 홍중이 바람 새는 소리를 내었다.
‘간지러워.’
“그러라고 한 거야. 왜 남의 꼬리를 그렇게 유심히 봐? 사람들 다리 보면 희롱이라면서 인어도 같거든?”
‘미안해.’
그의 유함에 홀려 실례를 범했다. 홍중은 곧바로 사과했고 남자는 사과를 받는 둥 마는 둥 입술만 삐쭉 튀어나와 있었다. 꽤 큰 상처를 준 듯 해 홍중은 수첩을 수건 위에 올리고 남자의 앞으로 다가갔다. 꼬리가 흔들거리며 홍중의 다리를 톡톡 쳤지만 여전히 남자의 시선은 홍중을 마주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홍중은 남자가 자기를 볼 때까지 기다렸다. 이윽고 남자의 시선이 홍중과 얽히자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만든 뒤 이마에 대고 손가락을 피며 아래로 내렸다.
“미안해?”
홍중이 고개를 세게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제야 남자의 입가에도 미소가 맴돌았다. 진심으로 전한 수화가 남자의 마음을 풀었는지 다행이란 생각과 동시에 얼굴에 물세례를 맞았다. 어느새 남자의 꼬리가 표면 위로 올라와 있었고 남자는 목까지 젖혀가며 웃기 시작했다. 한 방 크게 먹었다.
“너 재밌다.”
한 방 먹인 게 그렇게 재밌는지 남자는 눈물까지 고여가며 웃었다. 그렇게까지 웃길 일인가 생각이 들었지만 홍중은 심술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밝게 웃는 그의 미소에 한 번 더 물세례를 맞을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느 정도 웃음이 그친 남자가 홍중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는 박성화야.”
홍중은 그 손을 맞잡는 대신 손바닥에 천천히 제 이름을 썼다.
‘나는 김홍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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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로 홍중은 항상 밤마다 교내 수영장을 찾았다. 아홉 시쯤 기숙사에서 나와 수영 연습을 하고 있으면 출근한 성화가 물속으로 꼬리를 흔들며 인사하고 홍중도 그쪽으로 가 얼굴을 내밀고 손을 흔들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홍중은 수영 연습을 하고 성화는 밖에서 수영장 바닥을 청소했다. 오늘 할당량을 마친 홍중이 난간에 기대 그가 하는 행동을 구경했다.
‘도와줄까?’
“너 지난번에 도와준다고 해놓고 더 망친 거 기억하지.”
호기롭게 팔을 걷으며 홍중이 나섰지만 오히려 성화의 퇴근 시간만 늦어졌던 기억을 성화가 상기시켰다. 기억이 떠오른 홍중이 푸흐흐 웃으며 난간에 앉고 성화도 옆에 따라 앉았다. 아무런 자극 없는 물 위는 잔잔하게 흘렀다. 이따금 일렁이는 성화의 꼬리를 함께 감상하다 성화가 물었다.
“근데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나 왜 말 못 하냐고?’
어쩐지 성화가 계속 눈치를 보던 것이 언제쯤 물어볼까 궁금하기도 했다. 홍중은 가만히 고민하다 볼펜을 움직였다. 꽤 오래전 이야기였다.
‘아주 어릴 때였어. 이제 막 물이 좋아질 때였지.’
어릴 적, 이제 막 수영을 시작했을 때 가족들과 함께 해외로 여행을 갔었다. 이름도 익숙하지 않은 나라의 관광객도 없는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은 바다와 가까이 있으면서 마을 사이로 강이 흐르는 마치 베네치아 같은 곳이었다. 그리고 마을 근처에 있는 폭포는 많은 사람이 수영하기에 좋은 환경이었고 물을 좋아하는 홍중 또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홍중은 곧바로 수영복을 챙겨 폭포로 향했고 절벽에서 떨어지는 강한 물줄기는 홍중의 마음을 자극했다.
처음에는 잔잔한 곳에만 가볍게 헤엄을 쳤다. 물속은 너무 맑다 못해 투명했고 그 속에는 다양한 물고기와 식물이 제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 매력에 홀려 홍중은 자기도 모르게 더 안쪽으로 더 깊은 곳으로 헤엄쳐 갔고 더 이상 홍중의 헤엄이 아닌 수류로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위험을 감지했다. 하지만 이미 위험을 느꼈을 때는 늦었고 홍중은 그대로 빠른 물의 속도에 휘말려 강의 어느 곳으로 흘러가 버렸다.
빠른 물살에 주체할 수 없이 밀려나고 홍중이 살려달라고 크게 외쳤지만 주변에서 들려오는 답은 없었다. 그제야 두려움이 들고 홍중은 그대로 옆에 있던 바위에 머리를 맞고 기절했다. 그 이후로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누군가 해변에 저를 눕혀주고 물에 빠졌던 두려움에 목소리를 잃은 게 전부였다.
“그때 물에 빠져 죽을 뻔한 건데 물이 안 무서워?”
‘응. 트라우마가 있었지만 이겨냈어. 겨우 그거에 지고 싶지 않았거든.’
물에 대한 트라우마를 이기기 위해 했던 수많은 노력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그리고 이겨낸 결과가 제 수많은 트로피였다. 과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문득 홍중도 성화의 꼬리에 대해 궁금해졌다.
‘근데 너는 왜 꼬리가 한쪽밖에 없어?’
“잘렸어. 도망치다가.”
생각 외의 답변에 홍중은 놀라며 괜히 제 수첩을 꽉 잡았다. 저는 트라우마를 극복했지만 성화는 극복할 수 없는 상처에 이야기를 잘못 꺼낸 듯했다. 위로라도 건네려 수첩에 여러 단어를 적었다 지우기를 반복하고 그 모습을 보던 성화가 갑자기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
“뻥이야. 헤엄치다가 다쳤어.”
‘넌 무슨 그런 거짓말을 해.’
“너 바보냐? 근데 인어 꼬리 진짜 비싼 거 알아? 홍중아, 혹시 돈 없으면..”
‘나 돈 많아. 네 꼬리 팔 일 없어.’
“다행이다 내 한쪽 꼬리는 지킬 수 있어서.”
성화가 장난스럽게 제 꼬리를 안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그의 행동에 다행이라는 듯 홍중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 미소를 보자 성화는 잘린 흉터에서 아려오던 고통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상처가.. 안 아플 수도 있구나. 처음이었다. 물속에만 들어가면 저려오던 상처가 싹 아문 것 같았다. 기쁜 마음에 꼬리도 살랑이고 그 살랑임은 곧 홍중도 따라 웃게 했다.
‘간지러워.’
“원래 인어들 기분 좋으면 꼬리를 살랑여. 강아지 같지?”
‘너 강아지 안 닮았어.’
“비유 모르냐 비유?”
괜히 홍중이 얄미워 성화는 꼬리로 물을 살짝 떠 그대로 홍중에게 날렸다. 갑자기 날아온 물 폭탄에 홍중은 대비할 새도 없이 그대로 맞았다. 그 얼굴이 웃기는지 성화가 물장구까지 치며 웃었다. 지고만 있을 수 없던 홍중은 손을 모아 그릇을 만든 뒤 물을 가득 담아 성화에게 던졌다. 무방비했던 성화 또한 정통으로 맞고 손등으로 물기를 닦아내며 음흉하게 웃었다.
“한번 해보자는 거지?”
그 말을 시작으로 꼬리로 만들어 낸 거대한 파도가 홍중을 그대로 덮쳤다. 꼬리 한쪽밖에 없으면서 이 정도의 파도를 만들어 내는 게 맞아? 홍중은 큰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곧 다시 파도를 만들어 낼 기세에 홍중은 곧바로 손을 양손으로 들어 항복 표시를 했다. 바다 인간을 이겨낼 재량이 없었다. 일방적인 패배를 느끼고 홍중이 나가려는 순간 손이 미끄러진 성화가 그대로 물속으로 빠졌다.
주변에 연결된 끈이 없는 것을 발견하고 홍중도 성화를 따라 물속으로 다이빙했다. 부력으로 인해 몸이 뜨는 홍중과 달리 성화는 그대로 바닥까지 내려갔다. 그리고 바닥에 앉아 눈만 껌뻑일 뿐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배에 연결된 끈이 없어 혼자 팔이라도 움직였지만 아주 조금만 뜰 뿐 역부족이었다. 그제야 성화가 왜 끈을 항상 배에 묶고 있었는지, 끈이 없다면 물속에 들어가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홍중은 한 번 물 위로 숨을 크게 들이쉰 뒤 단번에 하강해 성화를 안아 올렸다.
‘괜찮아?’
“네가 모르나 본데 나 물속에서 숨 쉴 수 있어.. 물속에 24시간 있어도 죽지 않아.”
홍중의 의도를 눈치챘지만 성화는 되려 다른 말로 되받아쳤다. 농담으로 대답했지만 여전히 심각한 홍중의 미간을 성화가 손가락을 살짝 눌렀다.
“괜찮아. 끈 없어도 올라올 수는 있어. 시간이 걸리지만.”
‘그럼 수영을 아예 못 해?’
“응. 근데 괜찮아. 익숙해졌어. 이제 수영장 나가야겠다.”
성화가 먼저 물에서 나가고 홍중은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이미 체념한 듯 보였지만 항상 수영하는 홍중을 보는 성화의 눈을 알았다. 홍중은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부러움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시기와 질투, 부정적인 시선 혹은 가엽게 보는 시선뿐이었는데 성화는 오직 부러움, 단 하나였다. 그런 성화를 보며 마음속 한쪽이 아렸다. 그도 나처럼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홍중아, 나와. 다시금 저를 부르는 성화에 홍중도 난간을 잡고 일어섰다. 성화의 소원을 이뤄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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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만나던 레인이 있는 수영장이 아닌 다이빙 선수들이 사용하는 다이빙 풀로 성화를 불렀다. 점심에 윤호에게 무려 돈가스를 하나 주고 나서 겨우 받은 다이빙 풀 열쇠였다. 언제나처럼 수영복을 입고 물의 온도를 심장에 알려주며 성화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화 또한 가벼운 차림새로 풀장에 들어섰다. 홍중과 눈이 마주치자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물의 온도는 적당했는데 이상하게 심장이 더 빨리 뛰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여긴 왜? 학교에 이런 곳도 있구나.”
‘아는 동생한테 열쇠 빌렸어.’
성화의 미간이 살짝 주름졌다가 펴졌다. 그의 표정을 의아하게 쳐다보다가 홍중이 먼저 물속으로 들어가고 난간에서 조금 떨어졌다. 그리고 성화에게 양손을 내밀었다.
“손잡으라고?”
홍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바닥으로 가라앉을 텐데, 성화가 표면으로 보이는 풀장의 바닥을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망설이는 행동과 입 모양으로 파악한 홍중이 성화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주먹을 쥐고 새끼손가락을 턱에 갖다 댔다. 성화가 유일하게 아는 수화였다.
“괜찮다고?”
‘나 믿어.’
결국 손가락으로도 성화에게 믿음을 주고 나서야 성화가 조심스럽게 한 쪽씩 발을 풀장에 넣었다. 양쪽 발이 물에 들어오고 하체가 모두 물속에 닿자 없었던 비늘이 솟고 두 개였던 다리가 모아져 하나의 꼬리로 변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성화의 비늘 색은 마치 성화의 눈동자 색과 같은 파란색인데 퍽 성화랑 잘 어울렸다. 모든 인어가 그런가 싶어 검색도 해봤지만 성화의 경우가 특별해 보였다. 다른 생각을 하는 게 보였는지 성화가 홍중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나 지금 너한테 목숨 거는 거야. 알지?”
홍중이 피식 웃었다. 생각보다 긴장한 것 같았다. 홍중은 다시 난간에서 좀 떨어져 성화에게 양손을 내밀었다. 꼭 첫걸음마를 떼는 것처럼 성화는 입술을 꽉 깨물고 한 손을 먼저 떼 홍중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한 손 더 난간에서 떼는 순간 물속으로 떨어졌다.
아는 고통이 더 아프다. 항상 물속으로 처박힐 때 고통을 알면서도 언제나 그랬듯 아팠다. 무거운 물방울들이 제 몸을 잡고 바닥으로 끌고 내려가면 저항도 못 한 채 끝에 다다르고 올려다보는 물속은 높고 한없이 두려웠다. 이번에도 또한 같을 거라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 느끼기 위해 두 눈을 꽉 감았다. 하지만 이쯤에서 닿았을 바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다이빙 풀장이라 더 깊어서 밑바닥에 닿는 게 오래 걸리는가 싶어 눈을 천천히 뜨고 믿을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났다.
분명 바닥에 가라앉아서 좌절감을 맛보게 했던 물방울들이 저를 끌어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까이서 보이는 홍중의 얼굴에 두려움이 가득했던 눈은 어느새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홍중은 성화가 절망하지 않도록 두 손을 꽉 붙잡고 부유하게 만들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중간에 떠 있는 것만으로도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기적은 모든 생각 회로를 멈추게 했다. 그저 가라앉지 않았을 뿐인데, 겨우 그것 하나로도 성화는 기뻤다. 하지만 홍중이 성화의 한 손을 제 어깨에 올리고 빈손으로 성화의 허리를 잡고 움직였을 때 눈물을 흘렸다.
그토록 원하던 헤엄이었다.
그저 강보다도 작은, 바다보다 얕은 다이빙 풀이었지만 물속을 유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따사로운 햇볕이 아닌 인공적인 빛이 물속을 비췄지만 꼭 그 빛이 기적을 축하해 주는 것 같았다. 너는 못 올라와, 라고 말하던 무거운 빛이 뜻을 바꿨을 때 인공적이든 자연적이든 필요 없었다. 홍중의 헤엄대로 그 빛들을 뚫고 다녔고 아래로 내려갔다가 원하면 위로 살짝 올라갔다가 물속을 가로질렀다. 겨우 파란 타일들로 가득한 물속이었지만 황홀했다. 비로소 성화는 천천히 제 꼬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꼬리가 움직이며 반사되는 비늘은 드디어 제 색을 찾은 듯했다. 괜히 한 번 손을 뻗어 잡히지 않는 물을 잡아보기도 하고, 홍중의 코에서 나오는 공기 방울을 터뜨려 보기도 했다.
한참을 유영했다. 오랜만에 자유를 만끽하다 이 기분을 선사해 준 홍중을 쳐다봤다. 시선을 느낀 홍중도 성화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성화와 달리 한계가 온 듯한 손짓이었다. 위로 올라가려는 발짓에 성화는 손을 뻗어 홍중의 얼굴을 잡았다. 이런 선물을 해준 홍중에게 해줄 수 있는 성화의 가장 큰 선물이었다.
인어의 키스는 잠시 동안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도록 숨을 틔워줬다. 단순한 공기를 주는 행위지만 홍중은 제 앞에 눈을 감은 인어에 단순하게 머리가 굴러가지 않았다. 내려앉은 속눈썹이며 제 코와 맞닿은 그의 코, 말캉하게 닿은 그의 입술, 그리고 고의인지 우연인지 얽힌 그의 혀. 단순히 숨을 틔워주는 이 행동에 성화는 너무 아름다웠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성화는 살짝 입술을 떼곤 씩 웃었다.
“이제 너도 물속에서 나처럼 숨 쉴 수 있어.”
어느새 볼을 잡았던 손은 홍중의 허리를 잡고 있었다. 물 위에서 비추는 성화의 얼굴과 반짝 빛나는 그의 목걸이에 홍중은 홀린 듯 성화를 당겨 다시 입을 맞췄다. 성화 또한 피하지 않고 아까와 달리 감정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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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다이빙 풀장에서, 나머지는 모두 수영장에서 홍중은 성화를 만났다. 낮에도 만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낮에는 자야 한다는 성화의 거절에 하는 수 없이 책상에 앉아 무료하게 시간을 보냈다. 오늘도 수업이 끝나고 성화가 먹고 싶은 약과를 종류별로 사서 수영장으로 향했다. 조금 이른 시간에 아직 연습 중이던 학생들이 홍중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살짝 미소 지으며 그들을 지나고 관중석에 누워있는 성화를 발견하고 그곳으로 향했다. 인어는 잠이 많나, 고양이처럼 많이 자는 성화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용히 그의 옆에 앉아 수영하는 학생들을 구경했다.
수영장에 있던 인원이 열 명에서 다섯 명이 되자 그제야 기지개를 켜며 성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눈치를 보듯 주위를 둘러보다 재빠르게 홍중의 볼에 뽀뽀하곤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누가 보면 어떡하려고.’
“그래서 아무도 안 볼 때 했어. 언제 왔어. 나 깨우지.”
‘얼마 안 됐어.’
“이건 뭐야? 내꺼야?”
홍중의 옆자리에 놓인 비닐봉지를 발견한 성화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봉지를 받아 열었을 때 홍중을 본 것보다 더 환하게 웃었다. 살다 살다 약과에 질투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 약과 먹어보고 싶다고 한 거 기억하고 사 온 거야?”
‘여러 가지 사 왔어. 집 가서도 먹어.’
괜히 쑥스러워 말을 돌렸다. 하지만 말과 함께 돌린 고개는 성화의 강압으로 인해 얼굴을 마주하게 됐다. 성화는 약과를 본 얼굴처럼 홍중에게 웃었다. 사람을 홀리는 건 여우뿐만 아니라 인어도 포함이었다.
“고마워.”
그리고 성화는 오른손을 펴 제 가슴에 댄 뒤 코를 주먹 쥐듯 감쌌다. 수화를 할 줄 모른다던 성화가 내민 언어에 홍중은 멍하니 쳐다봤다.
“수화 배워왔어. 너랑 더 잘 대화하고 싶어서.”
말없이 쳐다보는 홍중에 성화는 혹시 수화를 잘못 했나 다시 천천히 되새겼다. 분명 이게 맞는데.. 수화를 되새기는 성화의 손을 홍중이 붙잡았다. 그리고 홍중이 제 오른손을 펼쳐 가슴에 두 번 톡톡 했다. 의미를 알아차린 성화가 파란 눈을 접어가며 웃었다.
“나 수화 정식으로 배워볼까 봐.”
한 바퀴 레이스를 끝내고 다가온 홍중에게 성화가 말했다. 그리고 성화가 건넨 수건으로 손을 대충 닦은 뒤 수건 위에 올려놓은 수첩을 펼쳐 펜을 움직였다.
‘나랑 대화하려면 적으면 되잖아.’
“그래도 뭔가 너랑 같은 말을 하면 좋을 거 같아서. 그리고 수화할 줄 알면 물속에서도 대화가 수월하지 않을까?”
확실히 물속에서는 수첩에 적을 수 없으니 수화로 대화하기가 더 수월했다. 입 모양으로 파악하는 것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다. 저랑 대화하기 위해 수화를 배운다는 성화가 갑자기 또 예뻤고 홍중은 성화의 손등에 짧게 뽀뽀했다. 의미를 확인한 성화가 살포시 웃더니 상체를 숙여 홍중과 입을 맞췄다.
‘근데 내일부터 여기서 연습 못 해. 원래 가던 연습장이 공사가 끝나서.’
“아쉽다. 그럼 우리 언제 봐.”
‘너 청소 끝날 때쯤은 훈련도 끝나니까 보러 올게.’
“좋아. 그리고 홍중아 선물 있어. 얼굴 좀만 더 빼봐.”
성화가 시키는 대로 홍중이 고개를 내밀고 성화는 제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를 빼 홍중의 목에 채웠다. 파란 가루가 동그란 유리에 들어가 파랗게 빛나는 장식이 달린 목걸이였다. 물속에 들어가서도 성화의 비늘처럼 빛나는 목걸이에 신기해했었는데 이것을 제게 주는 행동에 홍중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주는 거야? 이거 네 것이잖아.’
“이거 내 떨어진 꼬리를 갈아서 넣은 거야.”
생각보다 더 소중한 물건에 홍중은 제가 더 놀라 목걸이를 빼려 했다. 성화에게 가장 소중한 물건을 제가 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홍중을 성화가 말렸다.
“사실 인어의 비늘을 갖고 다니면 소원이 이뤄진대. 나도 인어긴 하지만 그 미신 믿거든.”
이 강에는 인어가 살아요, 그리고 그 인어는 간절하게 소원을 빌면 소원을 들어줘요. 문득 어릴 적 놀러 갔던 강가 마을에서 들었던 마을의 전설이 떠올랐다.
“근데 나 소원이 이뤄졌어. 네 덕분에.”
인어를 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요, 하지만 가끔 인어가 저를 잊지 말아 달라고 파란 비늘을 강가에 선물해 주고 가요. 기회가 된다면 강가에서 파란 비늘을 찾아보라던 마을 주민의 이야기 또한 따라 기억이 났다.
‘네 소원이 뭔데?’
“다시 옛날처럼 헤엄치는 거.”
그럼 인어의 소원은 누가 들어줘요? 홍중은 그렇게 주민에게 물었다. 그랬던 주민이 뭐라고 했더라.
“이제 네가 해. 그리고 소원을 간절하게 빌어봐. 이뤄질지 어떻게 알아.”
그럼 네가 인어의 소원을 한 번 들어봐, 그리고 이루게 해줘 봐, 그리고 알려줄래? 주민은 어린 홍중의 호기심을 자극했었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홍중은 대답할 수 있었다.
‘수영시켜 줄게. 함께 헤엄치자.’
“좋아.”
홍중은 수첩을 내려놓고 대신 성화의 하체를 안았다. 갑자기 푹 꺼지는 느낌을 두려워하는 성화를 위해 물속에 천천히 들어오게 하려는 홍중의 배려였다. 성화를 꽉 잡은 홍중이 먼저 물속으로 들어가고 곧이어 성화도 물속으로 들어갔다. 성화의 꼬리만 빛나던 것이 이젠 홍중의 목에서도 함께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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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했다. 성화의 성격상 이미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인데 수영장이 너무 조용했다. 늦잠이라도 잔 걸까, 아니면 어디 아픈 걸까, 걱정되기 시작하고 홍중은 핸드폰을 꺼내 성화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러는 사이 반갑지 않은 방문자가 수영장에 들어왔다. 혹시나 성화가 온 줄 알고 고개를 들었지만 얼굴을 보자마자 홍중은 다시 고개를 내렸다.
“잘 가지도 않는 학교 수영장을 왜 이렇게 찾나 했네.”
항상 하는 말이 하나같이 쓸데없었기에 홍중은 무시했다. 하지만 정훈에게서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학교 수영장과 최정훈, 교집합이 없었다. 정훈과 한 공간에 있는 것조차 싫었고 홍중은 그냥 그를 지나쳐 가려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정훈의 한 마디가 홍중의 발목을 잡았다.
“학교 수영장의 청소부 알려나.”
떠보는 거에 넘어가면 안 됐는데. 홍중은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가 후회했다. 건수를 잡은 정훈의 얼굴은 불쾌감을 일어냈다. 홍중이 그런 감정을 느끼거나 말거나 정훈의 얼굴은 여전히 미소가 가득했다. 뭐가 그렇게 즐겁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뒤이어 나오는 말에 홍중은 하던 수화를 멈췄다.
“그 청소부가 인어래.”
그제야 정훈은 즐거운 듯 깔깔 웃었다. 오늘 성화가 수영장에 오지 않은 것이, 나타나지도 않던 정훈이 나타난 것이, 그리고 인어라는 것까지. 모든 퍼즐의 조각이 맞춰졌다. 홍중은 곧바로 정훈의 멱살을 붙잡았다. 하지만 따질 수 없는 제 입에 홍중은 다시금 절망을 느꼈다.
“그 인어를 숨겨주고, 사랑한 사람은 어떻게 될까? 선수권을 박탈당할까?”
멱살을 잡은 홍중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어. 홍중의 안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 선수권을 박탈당하겠지만 성화는 달랐다. 쫓겨나거나 죽거나. 사실 후자가 가장 가능성이 컸다. 다른 나라들과 달리 인어에 대한 적대감이 심한 한국에서 인어는 괴물이었다. 지금 정훈의 말대로라면 성화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홍중은 급하게 그의 멱살을 놓고 성화를 찾으러 가려 했다.
“덕분에 내가 올림픽 선수로 뽑히겠어. 너도 떨어뜨리고, 인어도 죽이고.”
홍중은 더 이상 정훈의 도발을 참지 않았다. 나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정훈에게 향하고 웃고 있는 그의 얼굴에 곧바로 주먹을 날렸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정훈은 잠시 주춤하고 홍중은 그의 멱살을 다시 한번 잡았다. 하지만 정훈 또한 가만히 있지 않고 반격하려 홍중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렇게 엎치락뒤치락하는 사이 뒤에서 호통이 들렸다.
“지금 뭐 하는 건가!!”
서로를 향한 주먹이 멈추고 홍중과 정훈의 시선이 동시에 그곳으로 향했다. 많이 화난 듯한 교장 선생님과 그 뒤에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성화가 서 있었다.
약에 의한 따가움에 홍중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고 성화가 그의 미간을 꾹 눌렀다. 그리곤 다시 조심스럽게 터진 홍중의 입술에 약을 발랐다.
“왜 싸우고 그래.”
홍중은 입을 꾹 다물었다. 홍중에게 중요한 것은 싸운 이유가 아니라 성화의 목숨이었다. 성화는 꼼꼼히 홍중의 상처에 약을 다 바른 뒤 약상자를 정리했다. 정리하는 그의 손을 홍중이 붙잡았다. 그리고 그의 손등에 글을 썼다.
‘내일 나 올림픽 수영 선수 선발전이야.’
“알아. 네가 지난번에 나 보러 오라고 시간도 알려줬잖아.”
‘내일 보러 올 거지?’
성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훈의 말대로라면 홍중은 지금 말도 안 되는 생떼를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당장이라도 추방당할 사람에게 다시 수영장으로 들어오라니. 무모한 부탁이었다. 고개가 점점 숙어지는 성화의 볼을 잡아 다시 올리곤 짧게 입을 맞췄다. 성화의 대답을 재촉했다. 거절할 말을 생각할 틈을 주지 않으려 자꾸 입을 맞추고 시선을 맞췄다. 결국 성화가 먼저 홍중의 입술을 막았다.
“알겠어. 갈게. 그 대신 나 아는 척하면 안 돼. 알겠지?”
성화는 당부, 또 당부를 했다. 홍중에게 갈 피해를 알기에 초입부터 조심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온다는 말에 홍중은 미소를 지었다. 찢어진 입가에서 오는 고통에 홍중은 살짝 앓는 소리를 내고 성화가 오히려 웃었다.
“바보야. 왜 웃어. 그럼 상처 더 찢어진다.”
‘네가 좋아서.’
이미 지겹도록 건넨 수화에 오히려 성화가 막을 정도였다. 네 마음 다 알아. 대답하듯 성화가 홍중의 이마부터, 콧잔등, 그리고 마지막 입술까지 짧게 도장을 찍었다.
“내일 꼭 선발돼야 해. 응원할게.”
홍중은 다시 성화에게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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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0M 올림픽 대표 선수 선발전입니다.”
“3년 전 도쿄 올림픽 선발전 당시 김홍중 선수가 1등으로 선발되고 결국 은메달까지 땄죠?”
“첫 출전에 은메달이란 좋은 성적을 가진 김홍중 선수가 이번에는 얼마나 더 향상된 실력을 보여줄지 관심이 쏠립니다.”
홍중은 헤드셋을 끼고 제 몸을 풀었다. 헤드셋에서는 최근 알게 된 아이돌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파도를 넘어야 이기는 수영이기에 파도를 두려워 말라는 이 노래와 잘 어울렸다. 잔잔하게 몸을 풀고 있노라면 코치님이 다가왔다. 이제는 경기를 위해 수영장에 들어갈 시간이었다.
대기실을 나오자 많은 관객이 관중석을 채웠다. 기자들은 물론, 응원하러 온 사람들도, 이 경기를 보고 꿈을 꿀 학생들도 잔뜩 있었다. 그리고 그사이 홍중의 시선이 꽂힌 곳은 모자를 쓴 성화였다. 모자에 마스크를 썼지만 홍중은 그가 성화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제 목걸이가 파랗게 빛나고 있었으니까.
홍중은 제 레인의 앞에 서고 호루라기가 울리자 스타드대로 올라갔다. 여느 때와 같이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호루라기가 한 번 더 울리자 몸을 숙여 출발 자세를 취했다. 오늘 경기는 꼭 성화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큰 흠집이 있더라도 어디선가 도움이 될 것이라는. 항상 물속에 가라앉아 절망하는 그가 더 이상 절망하지 않도록.
탕!
경쾌한 총소리가 나고 동시다발적으로 선수들이 물속에 뛰어들었다. 이명이 온 듯 웅웅 울리는 물속을 빠르게 가로질러 물 위로 올라가면 오직 한 가지 소리만 귀에 울렸다.
‘사랑해.’
어제 성화의 고백이 계속 귀에 맴돌았다. 그 고백은 이별의 인사였을까, 아니면 그동안의 들어준 소원에 대한 감사 인사였을까. 차라리 단순한 사랑 고백이었다면 이렇게까지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단순한 그의 마음이길 바라기도 했다.
역시나 반환점을 가장 먼저 찍었다. 발로 벽을 밀어내며 추진력을 얻어 더 힘차게 물살을 가로질렀다. 마치 끝에 성화가 앉아있는 것처럼 생각했다. 그러자 도착지에서 물 아래로 파란 꼬리가 흔들거렸다. 그 꼬리를 향해 있는 힘껏 내달렸고 다른 선수들의 머리가 제 어깨쯤에서 헤엄치고 있을 때 가장 먼저 레이스를 마무리했다.
최종적으로 국가대표에 선발됐다고 전광판에 뜨자 홍중은 곧바로 성화가 앉아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성화는 그의 결과에 축하하고 있었다. 그러다 바다보다 깊은 파란 눈동자가 홍중과 마주치면, 눈동자가 안 보일 정도로 눈을 접어가며 웃었다. 그 미소를 당장이라도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곧바로 성화에게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수영장에서 나오자마자 몰려든 기자에 홍중은 이리저리 고개를 움직이며 성화를 찾았다. 이윽고 성화가 수영장에서 나오자 홍중은 그에게 다가가려 기자들을 피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이미 둘러싸인 탓에 홍중이 움직이는 대로 기자들이 움직이고 성화는 점점 홍중에게 멀어졌다.
그를 놓칠세라 홍중은 급하게 뒤에 있던 코치님에게 기자들을 맡기고 그사이를 뚫어 달렸다. 멀리 가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지만 성화의 모습은 학교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성화가 걸어간 길을 따라 달렸다. 물속에서와 달리 땅 위에서의 달리기가 너무 느려 답답해질 찰나에 그렇게 찾던 뒷모습이 보였다. 어디론가 떠나듯 성화는 큰 캐리어를 끌고 가고 있었다. 성화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이미 그를 찾느라 쏟은 체력에 다시 뛰기 어려웠다. 거친 숨을 고르며 겨우 한 걸음씩 내딛는데 성화의 앞에 한 택시가 멈췄다.
‘성화야.’
그 이름 하나를 부르면 성화가 뒤돌아볼 텐데, 박성화, 그 이름 하나면 나를 향해 몸을 돌릴 텐데. 야속하게도 홍중의 입에서는 그 쉬운 외침도 나오지 않았다. 있는 힘껏 성대를 자극했지만 나오는 건 겨우 숨소리였다. 성화가 트렁크에 짐을 싣자 홍중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답답한 가슴만 치고 목울대를 움직였다. 이렇게 제 단점이 끈질기게 발목을 붙잡은 것이 처음이었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자 홍중은 그저 제 목걸이를 붙잡았다. 마지막 소원을 빌었다. 제발 내게 돌아봐 줘.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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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200M 신기록을 세우면서 금메달을 따셨는데 기분이 어떠신가요?”
“메달 기대는 안 하고 올림픽 출전에만 의의를 뒀는데 이렇게 좋은 성적을 가지고 가게 돼서 영광입니다.”
“저희가 알기론 말씀을 못 하신다고 들었는데 말을 잘하시네요?”
“간절히 소원을 빌었어요. 이 파도를 극복할 수 있도록.”
-“손님 여러분, 잠시 후 우리 비행기는 스플리트 공항에 착륙하겠습니다. 좌석 등받이는..”
홍중은 듣고 있던 인터뷰 영상을 끄고 창문 여닫이를 올렸다. 밖으로 보이는 스플리트의 날씨는 화창했다.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홍중은 20살 첫 여행지를 크로아티아로 정했다. 파리와 가깝기도 했고 어릴 적에 갔던 마을을 다시 찾아가고 싶었다. 뭐랄까, 성화를 보지 못 해도 성화와 닮은 인어를 볼 수도 있을 것 같은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생각보다 스크라딘으로 향하는 길은 멀었다.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왔을 때는 차를 타고 이동해서 그렇게 멀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기차로만 가려니 점심에 공항에 도착했지만 저녁이 돼서야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홍중은 침대에 누웠다. 밥이야 기차에서 대충 먹은 끼니로 내일 아침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고 일어나서 뭘 먹기엔 너무 지쳤다. 그렇게 홍중은 눈을 감았다.
꿈속에서 성화와 함께 바다를 헤엄쳤다. 보이는 게 파란 타일뿐이던 수영장과 달리 바닷속은 화려했다. 타일만 깔려있던 바닥 대신 초록색의 미역과 해초들이 물결에 흔들려 춤을 추고 공기 방울만 가득했던 시야에 저마다 아름다운 지느러미를 가진 물고기들이 헤엄쳤다. 그리고 그사이에 성화가 한쪽뿐인 꼬리로 자유롭게 헤엄쳤다. 헤엄을 치지 못 해 배에 끈을 묶거나 몰래 수영장에 발을 담그지 않아도 됐다. 홍중의 도움도 없이 성화는 혼자서 꼬리를 움직이고 하체를 움직였다. 그러면 홍중이 도와줬던 것처럼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성화가 가고 싶은 어디든 갔다. 바다의 한 물결처럼 바다를 누비던 성화는 제게 다가와 항상 그랬듯 입을 맞췄다.
‘사랑해’
이제야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이별의 인사도, 감사 인사도 아녔다. 성화에겐 내가 꼬리였고, 나에겐 성화가 목소리였다. 잃어버린 소중한 것을 다시 찾게 해준 서로에게 사랑은 단순한 의미 그 이상이었다. 이제는 나도 성화를 만난다면 다시 말해줄 수 있었다. 내 목숨을 구해주며 희생한 당신을 그 무엇보다 사랑한다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다음 날 정오였다. 시차는 아무리 적응하려 해도 쉽사리 맞춰지지 않았다. 기지개를 켜고 오늘은 좀 마을을 둘러보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릴 때는 몰랐던 강의 주인을 만났던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때는 누구나 수영이 가능했는데 이제는 절대 들어가지 말라는 표지판으로 강은 막혀있었다. 충분히 위험한 곳이긴 했다. 당장 홍중만 봐도 죽을 뻔했으니.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성화가 진짜 강에 사는 인어였다면 꼬리를 다치고 아무도 구해주지 못했으니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얼마나 슬퍼했을까. 강가에 앉아 가만히 강을 바라보았다. 성화도 이 자리에 앉아서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는 강을 보며 슬퍼했을까, 아니면 싫어했을까. 여러 생각이 들었을 때 누군가 홍중의 옆으로 다가왔다.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그의 얼굴은 주름살 빼고 인자한 미소 그대로였다.
“어릴 때 여기 왔었지?”
“맞아요. 그때 저한테 할아버지가 이 강에 대한 소문도 말해줬잖아요.”
할아버지는 잠시 고민에 빠지더니 다시 미소를 지었다. 기억이 난 듯했다.
“그래서 파란 비늘은 찾았니?”
“비늘을 받았지만 소원은 이뤄지지 않았어요.”
홍중은 제 소원을 듣지 못한 채 택시에 올라 타버린 성화의 뒷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소문은 소문이었다.
“안타깝구나.”
“근데 인어도 같았어요.”
할아버지가 의아한 눈빛으로 홍중을 내려다보았다.
“인어도 자기의 소원을 들어줄 사람을 기다렸어요. 아마 평생 기다렸을 거예요.”
“인어의 소원은 이뤄졌니?”
“네. 그랬더니 인어는 다른 사람의 소원을 빌어준 채 떠났어요.”
홍중의 목에서는 여전히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색으로 조약돌 사이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그 빛을 확인한 홍중이 그것을 집어 할아버지에게 건넸다.
“또 어디선가 그는 소원을 들어주고 있을지 몰라요.”
인어의 소원은 더 이상 이뤄질 수 없지만 한 번 해본 것만으로도 인어는 행복해하며 떠났으니까요.
WARNING:
줄거리 상 혁명의 일환으로 독살에 대한 간접적 묘사와 살인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주의 바랍니다.
1.
어깨선을 한참 넘을 정도로 긴 머리를 한 남자는 본인을 김홍중이라고 소개했다.
굳이 할 필요 없는 소개였다. 남자는 김홍중과 똑같았고 동시에 전혀 달랐다. 눈앞 홍중의 귀에는 요란한 피어싱이 없었다. 그리고 홍중의 얼굴에서 새벽 작업, 아르바이트 2개, 학교 수업을 병행하며 생긴 만성적인 피로감도 읽어낼 수 없었다. 그래도 그는 의심의 여지 없이 홍중이었다.
고백하자면 성화는 홍중의 별난 자기소개만 아니었어도 처음에 그를 자기가 알던 김홍중인 줄 알았다. 야밤에 난데없이 자취방 문을 두드릴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밖에 없었기에. 검은 페도라와 정장을 입은 홍중을 본 순간 성화는 그가 나는 이제 작곡을 때려치우고 행위 예술의 길을 걷게 됐어, 라며 비장한 선포를 하러 왔나 싶었다.
“그래서 홍중 님. 길을 잃으셨다고요?”
“네.”
집에 돌아가려면 크로머가 필요한데 크로머를 잃어버렸어요. 쿠로마요? 구르마? 아니요 크로머라는게 있어요. 조금 난처해진 표정으로 홍중이 답하자 성화는 작게 한숨 쉬었다. 일단 들어오세요.
그렇게 박성화는 길 잃은 김홍중을 자취방으로 들여보냈다. 같은 시각 김홍중은 지하 작업실에서 정신없이 비트를 찍어대고 있었다.
2.
김홍중은 의자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손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던 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작업에 유의미한 진전이 있어 뿌듯했다. 작업 내내 전원을 껐던 폰을 다시 켜자 여러 알림이 화면 위를 스쳐 지나간다. 디엠, 카톡, 문자, 이메일…. 그리고 중 홍중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은 건 박성화의 연락이었다.
홍중아 2:13 am
만약에 세상에 네가 두 명이면 어떨 것 같아 2:20 am
얘가 술을 먹었나. 홍중은 바닥에 요가 매트를 깔고 누웠다. 그래도 홍중은 착했으니까 답장은 하고 잠이 들었다.
와 4:16 am
좆같을듯 4:17am
3.
성인 남자가 혼자 살기에 딱 맞는 크기의 자취방에 손님이 생기니 모든 공간이 확연히 좁게 느껴졌다. 성화의 싱글 침대 옆에 요와 이불이 깔렸다. 매일 껴안고 자는 토끼 인형은 당분간 홍중의 임시 베개가 됐다. 올블랙 의상을 맞춰 입고 온 손님은 분홍색 베개에 개의치 않았다. 자기가 아는 김홍중이라면 몇 번은 궁시렁 거렸을텐데 다른 세상에서 온 김홍중은 꽤 정중한 사람인 듯했다.
갑작스러운 임시 보호 겸 동거의 시작이었지만 성화는 이 상황이 딱히 불쾌하지도 당황스럽지도 않았다. 홍중에게 곁을 내주는 게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이었기에 가능했다. 크로머를 찾고 홍중이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같이 살기로 합의를 본 후 많은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홍중이 입고 온 검은 정장은 가지런히 접혀 옷장에 걸렸다. 핏이 애매해 잘 안 입게 된 티셔츠 몇 장 그리고 바지 몇 벌은 홍중의 입게 됐다. 이런 거 필요 없어요. 내심 미안했는지 처음에는 홍중이 손을 내저으며 거절했다. 아뇨 여기서는 이런 옷을 입으셔야 해요. 저 옷은 집 갈 때만 입기로 해요….
“알겠어요, 감사해요.”
“근데 홍중 씨. 우리 말 좀 놓을까요?”
“그럴래?”
“오키. 존댓말 하는 거 어색해 죽는 줄 알았네.”
사실은 아직도 어색하지만. 대화가 편해지자 막힌 속이 뚫리는 느낌이었다. 침대 위에 누워 웃으며 홍중을 올려다보았다. 홍중은 성화를 물끄러미 쳐다보곤 시선을 돌렸다.
-
김홍중은 다른 차원에서 왔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케이크처럼 여러 층으로 되어 있고 각 층의 세상에는 다른 사건이 벌어지고 시간의 속도도 조금씩 달랐기 때문에 각자의 시대를 살고 있다. 적어도 홍중의 설명에 의하면 그랬다.
홍중의 세상은 환경 파괴가 극심해 대부분 사람은 음식이 아닌 영양 캡슐과 가루를 먹으며 지낸다. 성화는 학식으로 나온 돈가스를 먹으며 이 세상은 축복받은 케이크 층, 아니 세계라는 걸 깨닫는다. 학생 식당에 같이 따라온 홍중은 ‘진짜’ 식사가 낯설었는지 나이프로 힘겹게 썬 고깃덩어리를 입에 대지도 않고 있었다. 거기 있는 한국인들은 지금도 김치를 먹고 있는지 성화가 질문하자 한국이라는 국가는 붕괴한 지 오래고 한국인 계열의 사람들이 김치맛 가루를 먹는다는 답이 돌아왔다.
다소 어수선한 학생 식당에서 홍중의 장엄한 설명이 이어졌다. 해수면 상승과 빈번한 홍수로 농작지가 황폐화됐지만 기술은 계속해서 비약적 발전을 이뤘고. 사람 같은 로봇이 늘어나고. 사람들이 스스로 기억과 인격을 데이터로 전환하여 로봇에 이식해 살아가는 경우도 생기고.
“홍중아 고기는 안 먹어도 되니까 밥이라도 먹지 그래.”
“알겠어.”
밥을 새 모이만큼 뜬 홍중이 숟가락을 입안으로 넣었다. 그리고 숟가락을 내려놓고는 다시 설명을 이어갔다. 박성화는 김홍중의 입을 돈가스로 막아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방금까지 싫어하는 교양 수업 듣고 왔는데 이게 뭐람. 누가 김 교수님 입 좀 다물게 해봐. 집중력이 바닥나며 성화의 생각은 여러 갈래로 새기 시작했다.
이제 인류는 죽음을 맞이하는 자 그리고 로봇으로서 살아가는 자로 나뉘게 됐어. 그런데 하필이면 독재자가 사후에도 로봇으로 살게 되면서 세상은 어둠 속으로 빠진 거지.
홍중아, 조금만 기다려. 금방 갔다 올게.
학식은 저렴한 가격이 장점이었지만 먹으면 2시간 내로 허기가 진다는 게 단점이었다. 오늘 중식 메뉴인 돈가스와 크림 수프를 먹었으니 이제 다른 메뉴인 야채 비빔밥과 튀김 만두를 먹을 차례였다. 학식을 한 입만 먹은 홍중을 두고 성화는 새 식판을 들고 돌아왔다.
“그래서 독재자가.”
“독재자를 끌어내려야 했어. 기계는 보수만 하면 거의 영구적이잖아. 기계를 파괴해봤자 데이터만 옮기면 그만이고. 게다가 독재자 경호 부대도 전부 로봇이라 힘들었어. 총으로 맞서 싸우면 사람만 피 흘리면서 죽으니까. 그래서 나는 동료들과 함께 데이터 센터를 전부 파괴하는 방식으로 독재자를 처단하기로 했어.”
비빔밥도 맛있네. 대식가인 성화에게 학식은 물가상승의 시대 속 한 줄기 빛이었다. 홍중의 말을 들으며 적당히 반응하던 중 홍중의 말을 누군가 드라마나 영화 대본으로 활용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결국 혁명에 성공했어?”
“응. 데이터 센터 파괴했어. 백업 데이터까지.”
“와.”
“독재자 가족도 전부 말끔하게 처단했어. 모든 일에는 마무리가 중요하니까.”
반찬을 집은 성화의 젓가락이 허공에 멈춘다. 처단의 의미를 물어볼까 고민하다 이내 질문하지 않기로 했다.
홍중은 돈가스를 아주 작게 썰어 입안에 넣었다.
A.
너를 처음 본 날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각종 기계, 로봇 수리합니다.
파란 바탕에 흰색 글씨로 적힌 낡은 간판이 달린 가게로 너는 들어왔다.
손님, 어떤 일로 오셨어요?
너는 내 질문에 답하지도 않고 가방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 카운터 위로 쏟았다.
절단된 새끼손가락, 핏자국이 튄 권총, 화면이 깨진 휴대폰과 신분증 하나. 나는 재빠르게 서랍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물건을 담아 넣었다.
맡겨주신 물건은 빠르면 이틀 뒤에 수리되거든요.
연락처 주시면 바로 알려드릴게요.
능숙하게 카운터 끝에 있던 철제 서류함에서 종이를 꺼냈다. 여기에 연락처 적으시고 반드시 진짜 이름 적으셔야 해요.
너는 볼펜을 들고 마지막 순간까지 깊은 고민을 하듯 이름을 적는 칸을 쳐다봤다. 실명 기재를 포기하고 가게를 나서려나 싶은 순간 너는 유언장을 쓰듯 아주 신중하게 펜촉을 꾹꾹 눌러가며 이름 석 자를 적었다.
4.
김홍중은 검은 페도라를 쓰던 버릇을 못 버리고 박성화의 상아색 볼캡을 빌려 쓰고 다녔다. 그리고 박성화가 마트에서 사준 검은색 KF94 마스크도 강박적으로 쓰고 다녔다. 홍중은 아무 이유 없이 수시로 주변을 살폈고 언성을 쉽게 높이는 법이 없었으며 인기척을 내지 않고 걸었다. 성화는 홍중을 보며 경계심이 유독 많은 길고양이를 떠올렸다.
홍중을 성화가 아는 홍중에게 소개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성화의 카톡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던 홍중은 또 다른 자신을 보곤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조금 더 극적인 만남을 기대했던 성화는 김이 빠졌다. 너는 이 상황이 신기하지도 않냐?
현실감이 너무 없어서 무섭지도 않고…. 그냥 꿈만 같아.
피어싱을 잔뜩 한 검은 머리 김홍중은 긴 머리를 뒤로 묶은 홍중을 보며 말했다. 사람은 평생 죽을 때까지 자신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꺼진 랩탑 화면에 비친 피곤한 얼굴, 미용실에서 염색할 때 한참을 쳐다보던 거울 속 본인 모습, 강의실 창가에 유령처럼 비친 모습만 보다가 자기 얼굴을 직접 마주하는 건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경험이었다.
“거기도 우리 형 있어?”
“죽었어.”
“어쩌다가.”
“안 아프게 빨리 죽었어.”
원하던 답이 아니었다. 홍중은 골이 아파져 오는 느낌에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야, 박성화. 너는 그래서 얘랑 같이 살 거냐?”
“크로머 찾을 때까지만?”
“그래? 근데 못 찾으면 어쩔 거야. 둘이서 평생 같이 살게?”
홍중은 기분이 쉽게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솔직한 사람인만큼 애써 절제해봤자 모든 몸짓과 표정 그리고 말투에서 티가 났다. 성화는 일부러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우리가 같이 노력하면 찾을 수 있어. 모래시계처럼 특이하게 생겼다니까 에타나 여기저기에 분실물 찾는다고 올릴 수도 있고. 아직 시도도 안 했는데 비관적으로 생각하진 말자.”
“...그래 알겠어. 나도 찾아볼게. 서로 연락하자.”
자취방을 나가며 홍중을 뒤를 돌아봤다. 성화는 팔을 꼬고 있는 갈색 머리 홍중에게 말하고 있었다. 성화의 옷을 빌려 입은 홍중, 성화가 아끼는 토끼 인형을 방석처럼 깔고 앉은 홍중이 성화의 온전한 관심과 시선을 받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을 빠져나오면서 무언가 뺏긴 느낌이 들었다. 참 우스운 감정이었다. 애초에 박성화를 가진 적도 없었는데 지가 뭐라고.
-
“야, 성화야.”
“왜.”
“크로머 찾는 건 나중에 하고. 나랑 놀자.”
성화의 캘린더에는 과제 마감 기한이 표시되어 있었지만, 중간고사도 끝난 직후였으니 아무래도 좋았다.
B.
떠돌이 생활을 하던 너는 혁명단에 가입한 후 나와 종호와 함께 가게의 2층에서 살게 됐다. 이미 있던 2개의 방에는 각자 주인이 있었기 때문에 너는 거실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작은 공간을 네 방으로 차지하게 됐다.
짐이 옷 몇 벌에 불과하던 너는 아주 매끄럽게 우리와 살림을 합쳤다. 그러나 가끔 너는 새벽에 집을 나가 아침에 동틀 때 돌아오곤 했다. 잠귀가 밝은 내 귀에는 모든 게 들렸다. 애써 조용히 집을 빠져나가고 들어오는 너의 발소리까지도.
크고 작은 작전 수행이 매번 순조롭게 진행된 걸 보면 실시간으로 유출되는 정보는 없었지만 나는 너의 비주기적이고 묘연한 행방이 거슬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너를 내 방으로 불러 다짜고짜 총구를 겨눴다. 밤마다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닙니까, 성화 씨?
총으로 협박당해서 곤혹스러웠는지, 아니면 비밀이 들켜서 놀란 거였는지 모르겠지만 너는 내 질문에 쩔쩔맸다. 너의 약점을 잡은 게 신이 나 총을 쏘는 흉내까지 냈다. 10초 준다. 빨리 불어.
10, 9, 8, 7, 6, 아니 진짜 쏜다니까? 5, 4, 3, 2,
총을 장전하자 너는 눈을 감고 악 소리를 냈다.
밤에 자러 돌아다녔어!
뭔 소리야. 잠은 집에서 자야지. 왜 돌아다녀.
네 얼굴이 조금씩 붉게 물들었다. 나도 그제야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아, 아무튼. 앞으로 밤에 외출 금지.
뭐?
네가 자러 다니는지 우리 정보 팔아먹고 다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의심스러우니까 넌 당분간 좀 참아라.
다른 사람들한테도 이래, 아니면 나한테만 이러는 거야?
좀 참아. 정 급하면 나한테 오던가. 어기면 강제 탈퇴야.
5.
학교 갈 때 입는 그런 가벼운 옷차림이 아닌 나 어디 놀러 가요, 하고 티 내는 옷을 오랜만에 꺼내 입었다. 김홍중은 어쩔 수 없이 평범한 옷을 입었지만 보다 다양한 패션 선택권을 가진 성화는 오늘 한껏 기분을 내고 싶었다. 외출을 위해서 머리도 좀 만지고 아끼는 신발도 꺼냈다.
학교 앞을 떠나 (자취하는 동기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요새 핫하다는 곳으로 향한다. 성화는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동안 지도 앱에 표시했던 음식점을 둘러보며 고민하는 사이 홍중은 세상 구경에 열중했다. 길거리에 다니는 교복 입은 학생들, 삼삼오오 모여 담배 피우고 침 뱉는 한량들, 그리고 지친 표정으로 어딘가로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다들 휴대폰 화면을 보거나 음악을 듣는데 열중하는 인파 사이 홍중 혼자서 지긋이 세상 구경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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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자기한 골목길 사이로 책방과 소품 가게 그리고 카페가 즐비했다. 어느 번화가를 가도 쉽게 볼 법한 풍경이었지만 홍중에게는 모든 게 생경하게 다가왔다. 어딜 가자고 말은 하지 않아도 홍중의 발걸음이 느려질 때 혹은 고개가 어느 방향으로 틀어질 때 성화는 홍중의 관심이 향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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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는 남들보다 많이 먹었다. 원래 성화의 가족은 보통 사람들보다 먹성이 좋았다. 남들보다 훨씬 식사량이 많아도 쉽게 배가 고팠다. 배에 구멍이 뚫려 있나 봐. 초등학생 때 진지하게 친구한테 했던 말이 성인이 되고 나서도 종종 떠오를 만큼 성화는 잘 먹었다. 그래서 홍중과 함께 시킨 음식을 대부분 자기 혼자서 먹고 있는 걸 발견했을 때 문득 민망해지곤 했다.
홍중은 그런 성화의 식성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김홍중은 언제나 성화의 유별난 부분을 아무렇지 않아 했다. 다 큰 사내자식이 아기자기한 파스텔톤 배경화면을 설정해도. 휴대폰 화면 위를 스쳐 지나가는 낯선 남자들로부터 받는 인스타 디엠도. 다른 사람들이라면 의문을 품을 그런 것들을 홍중은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성화는 자신을 포용하는 홍중의 그런 다정한 무관심이 좋았다. 어떤 부탁을 하면 온갖 싫은 소리를 다 내면서 결국에는 들어주는 점. 본인 자신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말과 일도 정확하게 기억하는 모습. 홍중의 거칠어도 부드러운 면을 성화는 참 좋아했다.
다른 세계에서 온 홍중은 조심스럽게 성화를 다뤘다. 마치 쉽게 깨지는 유리 제품을 다루듯. 낯선 세심함 속에 성화는 스파게티도 먹고 와인도 마시고 디저트도 먹었다. 내가 아는 김홍중이 조금 더 성숙해지면 이런 모습이 될까, 하는 실없는 상상을 하다 알코올로 절여진 성화의 뇌가 그래도 좀 더 막무가내인 김홍중이 더 재밌는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린다.
“홍중아.”
“왜.”
“재미없었지. 미안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성화는 돌연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너희 세상은 농사도 못 하는데 우리 세상은 잘살고 있잖아.
너는 혁명까지 한 사람인데 나 같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랑 만나면 재미없을 것 같아….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고작 한 잔이었는데. 자취방으로 향하는 골목길이 어두워서 다행이었다. 술은 사람의 진짜 모습을 드러낸다고 하지 않는가. 덕분에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다.
박성화는 피아노도 칠 줄 몰랐다. 학교에서 배운 건 리코더 연주뿐. 악보를 볼 줄도 몰라서 음악 교과서에 미리 계이름을 적어 다녔다. 아는 음악도 한정적이었다. 남들은 클래식, 재즈, 보사노바, 힙합 등 자신만의 음악 취향과 선호 장르가 있었지만, 성화는 그런 멋진 음악의 존재도 잘 모른다. 그런데 김홍중은 자신의 음악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
“왜 울고 그래.”
거칠어도 따뜻한 손끝이 뺨을 어루만진다. 눈가의 물기를 닦아내는 손길이 서투르다. 저쪽 세계의 김홍중도 위로는 잘 못 하는구나. 성화는 취기와 함께 몰려오는 졸음에 몸을 홍중에게 기대 걷는다. 집에 어떻게 도착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외출복을 입은 몸이 침대 위로 누어진다. 성화는 절로 감기는 눈꺼풀을 억지로 뜨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 동안 화장실에서 샤워하는 소리가 들린다. 어둠 속에서 화장실 문틈 사이로 주황색이 새어 나온다. 다 씻은 홍중은 머리 위에 수건을 얹고 잠옷 바지만 입은 채로 나왔다. 불을 끄려 몸을 비틀자 등 뒤의 타투가 성화의 눈에 띈다.
너 타투.
시작한 말을 끝내보지도 못한 채 성화는 잠이 들었다.
-
“홍중아, 이게 뭐야?”
김홍중은 산더미처럼 쌓인 옷을 정리하고 있었다. 옷가게 직원이 옷을 개듯 각을 맞춰 접는 게 아니라 성의 없이 옷을 접고 옆으로 던지고 있었다. 하늘에는 우중충한 먹구름이 가득했다. 홍중은 성화를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내가 죽인 사람들.”
홍중은 성화의 옷을 개고 있었다.
-
잠에서 깼을 때는 꿈에 대한 모든 기억이 사라지고 난 후였다.
C.
외출금지령을 내린 후 보름이 지나 너는 내 방으로 왔다.
진짜로 나한테 오라는 의미는 아니었는데. 나는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너는 아무렇지 않게 내 침대의 절반을 차지했다.
사실은 내 방으로 처음 온 날 속으로 많이 떨었다며 너는 먼 미래에 나에게 고백했다.
6.
홍중은 휴대폰 전원 버튼을 괜히 눌러봤다.
박성화에게서 새로 온 연락이 없었다.
근데 인스타 스토리로 보면 걔는 카페도 갔고, 얼씨구, 와인바도 갔다.
거기 나랑 가자고 했으면서. 물론 홍중이 작업 때문에 바쁘다고 거절했지만. 그리고 그 카페 내가 알려준 곳인데. 내가 알려줬는데 왜 또 다른 나한테 다시 알려줘?
야
너 크로머 찾았어? 1:19 am
나는 여기저기 찾긴 했는데 별로 얻은 건 없어 1:19 am
혹시 찾게 되면 나한테 바로 알려줘 1:22 am
하, 씨발. 석 달의 성공적인 금연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담배가 땡겼다. 홍중은 자일리톨을 꺼내 질겅질겅 씹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했다. 아니, 길을 잃었다면서 어떻게 박성화 집은 바로 찾아냈지? 우연 혹은 운이라고 보기엔 너무 절묘했다.
크로머에 박성화를 찾는 기능이라도 달려 있나? 아닌데. 크로머는 분실했다고 말하지 않았나? 그러면 크로머 없이 바로 한 번에 성화 집을 찾아낸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근데 나 지금 뭐 하는 거지. 홍중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본다. 밤은 깊어져 가는데 휴대폰만 붙잡고 있었다. A 기획사에 보낼 데모곡 마감이 일주일도 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
김홍중은 크로머를 찾을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적어도 박성화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살던 곳과 전혀 다른 세상으로 온 게 불편하지도 않는지, 그리고 원래 있던 곳에 두고 온 친구들이 보고 싶지도 않은지 김홍중은 참 태연하게 굴었다.
홍중의 알 수 없는 느긋함에 성화는 내심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그가 성화의 집에 눌러살아서 느끼는 불만이 아니라,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고집스럽게도 말을 하지 않는 김홍중의 그런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홍중아. 너 혁명 성공한 거 맞지?”
“응.”
“친구들은 어떻게 됐어? 네 세상의 박성화는 지금 뭐 해?”
“지금쯤 내 욕하고 있겠지.”
궁금했던 것 중 하나는 또 다른 저 자신이었다. 그쪽 박성화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의 저보다 더 당차고, 상처 입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또 홍중을 몰아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박성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정도 배짱이 있으니까 혁명에 가담했겠지.
홍중은 성화의 액세서리 보관함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저렴한 맛에 구매한 써지컬 스틸 소재의 목걸이부터 부모님이 대학 입학 선물로 사주신 백금 목걸이, 그리고 오래전 홍중이 선물로 사준 은목걸이 등 여러 액세서리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사실 나는 우리가 은퇴하고 쉴 곳을 찾기 위해 크로머를 쓴 거였어.”
보석함은 서랍 구조로 되어 있었다. 맨 위층의 서랍을 구경하고 두 번째 서랍으로 가 성화가 모아 놓은 초커 목걸이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구매 후 용기가 부족해 실제로 착용한 적 없는 검은색 레이스 초커를 만지며 홍중은 말을 이어갔다.
“독재자를 무너뜨리고 그에 대항하던 젊은 지도자가 주도권을 잡게 해줬거든. 지도자가 임기가 있는 체제를 복구시킨 거지. 근데 거기서 우리 일이 끝난 건 아니었어.”
레이스 초커에는 물방울 모양의 검은색 펜던트가 달려 있었다. 보석이 아닌 플라스틱으로 만든 펜던트였지만 홍중은 그게 신기했는지 손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우리는 혁명을 성공한 후 그곳을 다 같이 떠나기로 했어. 누군가 우리에게 경고하더라고. 독재자를 제거할 위력을 가진 조직을 새로운 지도부가 내버려 두겠냐고. 그래서 우리는 은퇴 겸 도피 계획도 미리 세웠지. 크로머로 여러 세계를 여행하며 휴양지 후보를 찾았어.”
“그러면 휴양 가다 길을 잃은 거야?”
홍중이 세 번째 서랍을 열었다. 그 서랍에는 목걸이가 없었다. 대신 얇은 반지 한 쌍이 그 안에 빛나고 있었다.
“아니, 휴양지로 진작 떠났지. 근데 거기서 너랑 좀 크게 싸웠어. 그래서 내가 너무 화가 나서 크로머로 도망친 거야.”
“...”
“지금쯤 박성화는 나 엄청나게 욕하고 있겠지.”
홍중이 환하게 웃으며 보석함을 닫았다.
“빨리 돌아가야겠다 너는….”
“그러게.”
D.
강여상의 크로머는 신의 선물과도 같았다. 인간의 발명품이 아닌 신의 손길로 빚어낸 물건이었기에 우리를 달콤한 낙원으로 인도했다. 나는 처음으로 검은색이 아닌 푸르고 투명한 바다를 목격했다. 바다의 시원하고 비릿한 짠 내가 낯설었다. 우리는 있는 힘껏 바다 내음을 들이마시며 온몸의 세포에 그 향을 새기고자 했다.
종호와 산은 이미 신발을 벗고 바닷속에서 놀고 있었고 아직 긴장감이 풀리지 않은 듯한 우영은 모래사장에 앉아서 그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란 하늘 아래 너는 처음으로 마음 놓고 웃었다. 아직 결전의 날까지 시간이 남아 나는 천국 속에서도 두려움에 가득 차 있었다. 작전이 과연 성공할지, 끝까지 혁명단 내에 배신자는 없을지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설령 모든 계획이 완벽하게 진행된다고 해도 현실은 언제나 계획과 다르게 굴러갔기 때문에 모든 게 수포가 될 확률도 높았다. 독재자를 끌어내리는 데 실패한 수많은 다른 조직처럼 꺾이고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체제에 흠을 내는 거로 끝낼 수는 없다. 죽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그 체제를 부숴야만 했다. 이 푸른 세상은 오로지 우리가 혁명에 성공하고 생존해야만 정착할 수 있는 낙원이었다.
햇빛이 눈 부셔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그러자 너는 웃으면서 내 미간을 꾹꾹 누르며 강제로 주름을 없앴다. 이곳이 마음에 드냐고 묻자 너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 뒷목을 붙잡고 입을 맞췄다. 나는 급하게 네 볼을 쓰다듬으며 더 깊게 입을 맞췄다. 우리가 입을 맞춘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7.
홍중은 학교 앞에 자취했지만 학교가 워낙에 크고 산 위에 있는 바람에 후문에 있는 수업을 듣기 위해서는 한참 등산을 해야 했다. 그래서 분명 학교 근처에 사는데도 불구하고 버스를 타고 수업을 들으러 가는 일이 잦았다. 버스는 험한 경사길을 올랐기 때문에 자리에 앉아서 가는 게 훨씬 수월했다. 오늘은 운이 좋아 버스에 사람이 별로 없어 앉아서 갈 수 있었다. 창밖에 스쳐 지나가는 푸른 나무를 보며 홍중은 많은 것들을 생각한다.
오늘 아침에 보낸 공모 파일, 오늘 저녁에 있을 작곡 친구들과의 회식, 취업 준비를 하는 친구들과 박성화. 사실 홍중에게 성화는 마음의 짐이었다. 그가 싫었지만 동시에 성화가 싫기보다는 본인이 성화에게 느끼는 감정이 달갑지 않다고 하는 게 더 정확했다. 성화를 만나게 된 건 우연이었다. 교양 수업에 같이 팀플레이를 하게 됐고 사진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다시 만나게 됐다. 동아리 부원들과 사진도 찍고, 전시회도 열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진 둘은 서로에 대해 꽤 자세하게 알게 됐다.
홍중이 가방에 달고 다니던 무지개 뱃지가 눈에 밟혔는지 성화는 가끔 자기의 ‘애인’ 얘기를 홍중에게 꺼내곤 했다.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 조금 있으면 입대한다고 말을 꺼내자 홍중은 그러면 헤어져야겠네, 라고 말했다. 홍중은 그런 성화에게 자신과 종종 잠자리를 갖지만 연인 관계를 맺기 싫어하는 짝녀에 대해서 말했다. 자는 건 되고 사귀는 건 싫은 건 도대체 무슨 마음일까. 비 내리던 날 홍중이 소주잔을 비우며 묻자 성화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게, 나라면 너 만날 텐데.
술김에 흘려들은 말에는 많은 함의가 있었다는 걸 홍중은 뒤늦게 깨달았다. 그야 홍중은 성화를 연애 상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취향이 아니기도 했고 상대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질 거라는 생각조차도 못했기 때문이다. 홍중은 보통 말을 잘 안 듣는 사람에게 끌렸다. 일단 본인이 반골 기질이라 그런 탓이었지만 상대가 자기 의지와 다르게 행동할 때 짜증과 성적 끌림을 동시에 느끼는 편이었다. 근데 성화는 고분고분했고 사람도 점토처럼 무른 편이었다. 홍중이 주무르는 대로 몸을 맡기는 편이라 딱히 흥미가 가지는 않았다.
근데 박성화는 계속 홍중의 주위를 알짱거렸다. 줄 생각도 없는 간식을 갈구하는 반려동물처럼 옆에서 자꾸 기웃거리니까 신경이 안 쓰일 리가 없었다. 아, 답답해. 나중에 홍중은 보다 직접적으로 성화에게 자기 마음을 표했다. 난 너한테 관심 없어. 이 시간에 차라리 다른 사람을 찾아라. 누가 들어도 기분 나쁠 말에 성화는 흐드러지게 웃었다. 나도 알아.
그렇게 관심도 없는 박성화랑 많은 시간을 보낸 김홍중은 입대 전 성화의 자취방에 놀러 가 술을 먹곤 성화를 침대로 밀어붙여 키스했다. 키도 멀대같이 큰 게 휘청거리면서 넘어가는 게 꽤 자극적이었다. 남자랑 하는 키스는 처음이었다. 남자와의 관계도 이성 간 관계와 큰 차이는 없다는 걸 깨달은 후 홍중은 성화에게 사과했다. 미안하다고, 어제 일은 실수였다고.
홍중의 사과에 성화는 한참을 말이 없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성화가 그렇게 나올 줄 알고 일부러 상처를 준 홍중은 속으로 안도했다. 서로의 몸은 알아도 만나지는 않겠다는 짝녀의 마음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 홍중은 그대로 성화와 연락이 끊겼고 얼마 있지 않아 입대했다. 박성화도 곧이어 입대했다고 이후 아는 동기한테 전해 들었다.
홍중이 제대하고 아직 개강하지 않았을 때,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에 학교 앞 카페에서 다시 박성화를 마주쳤다.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저 멀리서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는 박성화가 보였다. 코트를 입은 박성화는 두 볼이 추위에 빨갛게 상기된 상태에서도 여전히 근사했다. 아, 박성화다. 둘의 마지막 만남이 어땠는지도 순간 까먹고 홍중은 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성화는 그런 홍중과 눈이 마주쳤다.
자신을 향해 경멸을 쏟아낼 것으로 예상했던 두 눈동자는 의외로 고요했다. 성화의 검은색 눈을 바라보며 홍중은 카페에 두 명만 남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성화는 커피 향이 진한 바닐라 라떼를 시키고 홍중이 앉은 테이블로 왔다. 그리고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얘기했다.
그렇게 홍중의 마음속에 큰 짐이 생겼다.
-
크로머가 어디 있는지 알 것 같아.
너 집 주소 잘 알고 있으니까 걱정하지마.
꼭 돌아올게.
홍중이 두고 간 메모를 읽으며 성화는 하품했다. 안 돌아와도 딱히 상관은 없는데...
E.
입에 재갈이 물리고 온몸이 묶인 유진은 제대로 소리도 못 내고 숨죽이며 울고 있었다. Eugene. 우월한 출생을 의미하는 라틴어 eugenios에서 본뜬 이름. 그 우월한 유전자와 핏줄이 앞으로 일주일 내로 끊길 예정이었다. 유진의 체내로 주입된 독극물은 사람을 천천히 죽였다. 이 독극물은 주입 후 즉각적인 효과를 내지는 않았지만, 몸을 하나하나 망가뜨리는 성질을 가졌다. 겉으로 보기엔 말짱해 보여도 유진은 이제 곧 죽을 운명이었다. 이 치명적인 독의 해독제는 아직 개발되지 않은 상태였다.
독재자의 자식을 인질로 성공적으로 포획한 후 협상이 예상대로 순조롭게 진행됐다. 모든 데이터 센터의 전원을 1시간 끄면 유진을 산 상태로 돌려주겠다는 제안에 지도부가 승낙했다.
나는 CCTV로 창고에 있는 유진을 지켜보며 조직원들에게 할 브리핑을 준비하고 있었다. 데이터 센터가 다운되는 한 시간 동안 센터에 잠입한 사람들이 악성 바이러스를 심어 기계 인간들에게 치명적인 오류를 만들고 로봇 병사들의 운용을 영구 정지할 계획이었다.
“홍중아.”
“응.”
“준비는 잘 돼 가?”
데이터 센터 A, B, C의 지도를 보던 난 너에게 시선을 돌렸다.
“왜? 할 말 있어?”
“아니, 그건 아니고.”
“유진이 불쌍해?”
“....딱히.”
정곡이 찔렸는지 너의 답이 늦었다.
“태어나 보니 독재자 가문에 태어난 소년. 본인 잘못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혁명단에 붙잡혀 죽을 운명에 처한 불쌍한 유진. 대충 그런 거 아냐?”
“...”
“나도 걔 불쌍해. 걔도 이렇게 태어나고 싶진 않았을 거 아냐.”
근데 그게 중요하냐? 우리 형은 쟤보다 어린 나이에 죽었어. 다시 지도를 살펴보며 내가 답했다. 혁명은 마무리가 중요했다. 그 어떤 여지도 남겨둬서는 안 됐다. 독재자의 자식이 남아있다간 잔재 세력이 그를 중심으로 다시 모일 게 뻔했다.
“...독살이 아니라. 크로머로 걔만 다른 세상에 던져두고 올 수 있잖아.”
“그렇지.”
너는 최대한 감정을 숨기려 노력했지만 내 눈에는 모든 게 읽혔다. 너와 나는 어느새 서로에게서 숨기고 싶은 마음도 들키는 그런 사이가 됐다. 나는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권총을 들고 네 관자놀이에 꾹 눌렀다.
“설마 내가 걔를 살려줄 거라 기대한 건 아니지?”
“...”
“만약 그랬다면 실망이야. 날 착한 사람으로 본 건 아니지? 네가 그렇게 멍청할 리는 없는데.”
너는 그대로 방을 떠났다. 야 박성화! 뒤에서 고함을 쳤지만 너는 뒤 돌아보지 않았다.
8.
김홍중은 성화의 폰에 저장된 홍중의 작업실 주소를 찾아 떠났다.
가기 전에 할 말이 있었다.
F.
혁명은 성공한다. 두 명의 사상자 발생과 함께. 데이터 센터 B에 잠입한 너와 본부에서 싸우던 또 다른 전투원이 사망했다. 너는 총상으로 인한 과다 출혈로 생을 마감했다.
전원 사망까지 각오한 나에게 이 정도는 기뻐야 할 소식이었다.
같은 센터에 투입된 산이 창백한 얼굴로 너의 소식을 전달했을 때, 너를 화장하고 유골함을 건네받았을 때 주변에서 왜 그렇게 나를 걱정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G.
“지금 뭐 하는 거야?”
“여상아,”
창백하게 질린 여상의 얼굴을 감상하며 홍중은 실실 웃었다. 관자놀이 위로 묵직한 권총의 서슬 퍼런 냉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그렇게 나와도 소용없어. 난 이미 형의 죽음을 여러 번 봤거든.”
“확실해? 효과 있는 거 같은데.”
홍중은 눈을 감았다. 박성화가 죽은 이후로 조금씩 미쳐가는 기분이었다. 밤에 잠들 수가 없었다. 푸르고 깨끗한 바다를 봐도 즐겁지가 않았다. 박성화는 분명 저 유골함 안에 담겨 있는데 언제든지 저 멀리서 저를 부르며 걸어올 것만 같았다.
홍중아, 하고 자기를 부르던 목소리가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있는데, 그의 존재가 사라졌음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여상아. 너도 결국엔 소중한 사람들이 다 죽어서 우릴 찾으러 온 거잖아. 우리 구하려고.”
“...그건 달라. 난 형들한테 부탁 받고 이 세상의 우리를 구하러 온 거야. 그 유언을 지키기 위해 온 나랑, 성화 형이 보고 싶어서 크로머를 쓰려는 형이랑 같다고 봐?”
“보러 가야겠어.”
“크로머 사용법도 모르는 게...”
강여상의 조롱에 불구하고 홍중은 큰 소리로 웃었다.
“근데 여상아. 너는 우리를 다 구해주고도 왜 같이 남아있냐? 원래대로라면 너는 네 세상으로 진작에 돌아가서 크로머를 파괴해야 하는 거 아니었어?”
“지금 형한테 크로머 받고 나면 바로 돌아갈 거야.”
여상아. 홍중이 나지막이 부르며 총을 바닥으로 떨궜다. 그리고 이내 무릎을 꿇는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여상아... 제발. 제발 알려줘. 꼭 돌아와서 크로머 돌려줄게.”
두 손을 모으고 싹싹 빌기 시작했다. 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용서를 빌 듯 간절하게 빌었다. 빌면서도 스스로가 한심하고 우습게 느껴져서 웃음이 나려는데 오히려 나오는 건 눈물이었다. 용서를 받을 대상은 이미 사라졌는데도 불구하고 홍중은 죄의식에 계속 사과할 대상을 찾았다. 윤호랑 산이 서툴게 지은 텐트가 소나기 한 번 내렸다고 무너져도 구조물을 제대로 확인 안 한 내 잘못이라고 사과하고. 혹시 해당 지역에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있는지 다같이 탐색하고 본 기지로 돌아올 때 길 찾기 담당 민기가 길을 헤매 애를 먹어도 돌아가는 길을 기억 못 한 자기 잘못이라고 했다.
“...성화 형 찾아가서 뭐하게. 그래봤자 형이 아는 박성화가 아니야. 그 박성화는 이제 어느 세상에도 없어. 크로머를 백번 돌려도, 백 명의 박성화를 찾아도 형이 알고 있는 박성화는 이제 없다고.”
자기를 차갑게 보던 여상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고여 있었다.
“박성화가 아니라 김홍중을 찾아갈 거야.”
9.
홍중은 난감한 얼굴로 홍중을 바라봤다. 홍중은 검은색 정장과 페도라를 입고, 한 손에는 크로머로 보이는 모래시계 같은 사물을 들고 있었다. 스스로였지만 참 난해한 사람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홍중은 모니터를 향해 의자를 다시 돌린다.
“오늘 집으로 돌아갈 거야.”
“그래, 잘됐네. 너 꼴 보기 싫어 죽는 줄 알았어.”
홍중은 쾌재를 부르며 휘파람까지 불기 시작했다. 그러자 턱, 소리와 함께 홍중에 의해 붙잡힌 의자가 강제로 뒤로 돌려졌다.
“너는 박성화를 크게 실망하게 해.”
“...뭐?”
뒤통수를 후려 맞은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졌다.
“거기다 사과도 제대로 안 했지.”
“아니야. 그런 적 없어.”
“매일 박성화랑 대화는 하는데 막상 중요한 말. 해야 할 말은 둘 다 안 해.”
홍중의 심장 박동이 쿵쿵 빨라지기 시작한다.
“성화가 멀어지기 전에 빨리 붙잡아. 안 그러면 후회해.”
“붙잡아서 걔만 더 상처 입으면 어떡해.”
“걔가 상처받을 거란 보장 있어? 그리고 너 솔직히 말해. 박성화한테 상처 줄까 봐 무서운 게 아니라 네가 거절당할까 봐 무서운 거잖아.”
H.
사실대로 말하면 나는 너에게 화가 많이 났었다. 혁명가가 인권 운동가도 아니고 영웅도 아닌데 네가 지나치게 이상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나는 너 말고도 신경 쓸 게 많았다. 그래서 전투가 끝난 후에 너를 찾아가 다시 제대로 얘기하려 했다. 살인을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지금 이 세상에서 깨끗한 선택만을 하면서 살 수는 없다고. 내가 나의 가치를 고수했듯 너도 너만의 가치가 있음을 잘 알고 있다고. 그래서 나에 대한 네 실망도 내가 짊어지겠다고.
아,
얼마나 무의미한 상념이었는지.
가끔 너가 아닌 내가 죽는 상상을 한다. 네가 내 유골함을 들고 애들과 같이 휴양지로 떠나는 그런 상상.
네가 내 방을 떠난 후 우리는 제대로 된 대화를 한 적이 없다. 생사의 기로에서 너와 언성을 높여가며 싸우고 싶지 않았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차라리 너와 제대로 언쟁이라도 벌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도 종종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상상은 부질없다. 머릿속에서 아무리 시나리오를 돌려도 결국 너는 죽었다는 사실을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다른 세상을 찾아가기로 한다.
또 다른 너. 또 다른 나. 혁명할 필요가 없는 평화로운 세상의 우리가 보고 싶었다. 거기서라도 우리가 솔직해지길 원했다. 서로에게 마음껏 상처를 줘도, 소리를 지르며 싸워도 결국엔 다시 손을 맞잡는 그런 사이가 되길 원했다.
나는 너에게 고백을 하러 떠났다.
10.
“홍중아, 벌써 가?”
성화는 검은 정장과 페도라를 쓰고 한 손에 크로머를 든 홍중을 보며 말했다. 막상 보내려니까 묘하게 서운했다.
“응. 고마워, 덕분에 잘 지냈어.”
“이제 가는 거야? 좀 더 있다 가면 안 돼?”
“...안 돼. 우리 성화가 나 기다려.”
“그래. 조심히 가라.”
성화는 이상하게 홍중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잘 가, 홍중아. 가서 영양제는 잘 챙겨 먹어.”
김홍중을 안았더니 팔로 끌어안은 몸이 잔뜩 경직됐다. 홍중은 아주 느리게 성화의 등을 토닥였다.
“너도 잘 있어.”
11.
김홍중은 박성화를 만나러 갈 준비를 한다.
머리를 만지고, 가장 어울리는 옷을 입기 위해 몇 번이고 옷을 갈아입고, 평소에 잘 안 뿌리는 비싼 향수도 뿌린다. 박성화와 카페에서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 꽤 여유가 있었지만 벌써부터 긴장감이 엄습했다.
꽃다발을 살까 고민을 하다 남자가 꽃다발을 받으면 내키지 않을까 걱정하지만 동시에 주고 싶은 마음이 커 결정을 못 하고 있었다.
괴로웠다. 예전에는 하지 않던 생각이었기에. 그동안 박성화와는 별생각 없이 만나서 편하게 시간을 보내는 관계였는데 오늘부터는 그 관계 역학이 바뀔 예정이었다. 앞으로는 조금 불편한, 그리고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고 싶었다. 만약 박성화만 허락한다면.
홍중은 결국 꽃집에 들렀다.
I.
나는 너와 작별할 준비를 한다.
오늘따라 유난히 파도가 부드럽게 치고 있었다. 너를 반기기 위해 바다가 보다 다정한 모습을 한 게 분명했다. 유골함을 열자 옆에 서 있던 종호가 크게 움찔한다. 너를 바다의 품에 안겨주고 싶어했던 나와는 다르게 계속해서 너를 붙잡고 싶어 했던 아이였다. 이미 떠난 사람을 보내주기 싫어하는 그 어린 마음을 나도 어느 정도는 이해했다. 그래도 난 너의 자유를 바랬다.
저 깊은 바다 속에서 본 적도 없는 해양 생물을 마음껏 구경하길. 폭풍 치는 날이면 산처럼 높고 험한 파도도 타길. 생명의 기원인 바다로 돌아가 편히 잠들길 바라며. 진심 어린 기도와 함께 손에 쥔 너를 파도에게 넘긴다. 눈이 시릴 정도로 새파란 물결 속에 흩어지며 네가 떠난다.
12.
“지금쯤 둘이서 화해하고 있겠지?”
“음?”
성화는 하젤 장미 꽃다발의 향을 맡으며 넌지시 말했다. 시간이 늦었지만 서로 헤어지기 아쉬워서 주변 공원을 계속해서 빙빙 돌며 걷고 있었다. 홍중은 순간 누구를 말하나 싶어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검은 페도라 홍중이랑 성화. 홍중이가 오기 전에 둘이서 싸웠다는데?”
“...그래?”
이상하다. 홍중이 말해준 바에 의하면 그쪽 세상의 박성화는...
“맞아. 둘이서 잘 풀었겠지.”
“그렇겠지?”
홍중은 잡고 있던 성화의 손에 입을 맞춘다.
“어느 세상이든 박성화랑 김홍중은 둘이서 잘 지내고 있을 거야.”
"홍중아, 나 이상하게 너랑 있을 때만 행복해."
흘러가듯 말한 박성화의 진심이 김홍중에겐 가슴 깊이 푹 박혔다. 너무 깊게 박혀서 곱씹을수록 심장박동이 빨라져 울렁일 정도였다. 박성화의 고백 아닌 고백 이후, 김홍중은 박성화를 볼 때마다 자신의 상태가 평소와 상태가 다름을 느꼈다. 왜 쟤랑 있으면 내 심장 소리가 빨라지고... 나한테까지 들리는 느낌이지?
...
김홍중은 사심 없이 박성화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18살의 4월 3일, 박성화는 방과 후에 반 친구들과 축구를 하고 있었다. 김홍중은 반에서 오후 자습을 하며 그저 넓은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유독 또래보다 잘생기고 훤칠한 박성화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김홍중이 그때 느낀 감정은, 질투. 그와 동시에 안도감. 박성화는 어디에 있어도 인기가 많은 타입이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잘생기고 성격도 좋고 사교적이어서 딱히 대단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옆에 친구들이 붙었다. 그 부분이 일단 김홍중과 달랐다. 박성화가 노력하지 않아도 친구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는 면모를 보일 때마다 김홍중은 약간의 거리를 느꼈다. 쟤랑 나랑 성격 같은 게 정말 맞지는 않구나. 하지만 그럴 때마다 박성화는 김홍중의 마음을 알아챈 건지 김홍중에게 더 다가갔다. 그게 김홍중이 박성화를 진정한 친구로 생각하게 된 계기 중 하나다. 질투와 동시에 안도감을 느끼는 이유는 자신만큼 박성화를 잘 챙기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쟤네 중엔 성화가 오늘 생일인 거 아는 애들은 없겠지.'라며 곧 자신에게 깜짝 선물을 받을 박성화의 표정은 어떨지 상상했다. 자습을 끝내고 사물함에서 조심스럽게 케이크를 꺼냈다. 전날에 직접 학원 근처 빵집에서 미니 치즈케이크를 사서 그 위에 시중에 파는 싼 초코펜으로 정성스럽게 'HBD SH' 를 적었다. 그 옆엔 삐뚤빼뚤한 별 모양도 몇 개 그렸다.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매고 케이크를 든 채로 왜인지 모르게 설레는 발걸음으로 운동장 근처로 갔다. 박성화는 신발을 털며 김홍중을 환한 미소로 맞이했다.
"김홍중! 오늘도 오자 했어?"
"응, 그리고... 이거 선물..."
"헐. 미친. 이거 가 만들었어?"
"아니아니. 다 산 거긴 해. 케이크도 샀고..."
"근데 이거 위에 글씨는 가 한 거 아니야? 글씨 못생긴 게 딱 김홍중인데?"
"아, 진짜 이게 해줘도 난리."
"너무 좋다구..."
"...맘에 들어?"
"응. 진짜 맘에 들어. 울 것 같아."
"안 울 거잖아."
"어떻게 알았지?"
근데 이거 정말 내가 18년 인생 살면서 받은 생일선물 중에 제일 감동적이고 제일 좋아. 박성화는 케이크 위에 그려진 별을 보다가 김홍중과 눈을 맞췄다.
"아, 홍중아, 그러면 우리 이거 저어기 운동장 벤치에서 먹고 가자."
"뭐래. 네 건데 너 혼자 다 먹어. 얼른 집 가서."
"그래도 난 너랑 같이 먹고 싶은데."
"안 돼. 얼른 집 가서 너 혼자 먹어. 어차피 지금 포크도, 젓가락도 없어서 손으로 먹어야 해."
"...알겠어."
"나중에. 나중에 내가 케이크 또 사줄게."
"됐거든요."
김홍중과 박성화는 집 방향이 비슷해서 하교를 항상 같이하곤 했다. 김홍중과 헤어지고 난 후의 박성화는 무척이나 외로웠다. 박성화의 집은 항상 고요했다. 아무도 박성화를 반겨주지 않았다. 박성화는 집 앞 편의점에서 산 시판 미역국과 햇반을 돌려 초라한 밥상을 차렸다. 그리고 그 앞엔 김홍중이 준 케이크. 자그마한 초를 하나 꽂고 불을 붙여 마음속으로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밥을 다 먹고 난 후, 케이크가 먹기 아까워 사진을 여러 각도로 마구 찍어댔다. 이 작은 치즈 케이크에, 초코펜을 사서 힘 조절하며 글씨를 쓰고 별 모양 그림을 그렸을 김홍중을 상상하니 웃음이 자꾸만 새어 나왔다.
...
박성화의 부모님은 사라졌다. 이 세상에서 사라진 건 아니지만 적어도 박성화의 인생에서는 완전히 사라졌다고 봐야 한다. 그저 10살, 박성화가 어리고 어렸던 시절에, 이 무책임한 부모는 박성화를 벌써 독립시켰다. 순화해서 독립인 거지, 홀로 내버려 두고 외국으로 떠났다. 귀찮다는 이유 단 하나만으로. 박성화는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그때부터 외할머니에게서 배웠던 것이 있다. 먼저, 남들에게 집안 사정 및 부모님 얘기를 하지 않기. 외할머니 외의 사람에게 기대지 않기. 항상 밝게 웃고 다니기. '항상 밝게 웃고 다니기'를 특히 강조했다. 이래야 그나마 긍정적으로 생각이 된다나 뭐라나. 인생을 한참 빨리 배워버린 박성화는 항상 웃고 다녔다. 슬퍼도 웃었다. 처음엔 너무 힘들었다. 부모님이 자신의 곁에 없는 게 중학교 2학년 때까지만 해도 부모님이 아파서 그런 줄 알았다. 외할머니가 그랬다.
"너네 부모님이 너 어린 시절에 사고가 나서 계속 외국에 있을 거여. 걱정하지 말고. 이 얘기는 남들한테 하면 안되는 거여. 이 할미랑 약속. 우리 성화 착하지."
"근데 언제쯤 돌아와요, 할머니?"
외할머니는 대답하지 않고 슬며시 웃고 끌어안아 토닥여주기만 했다. 사실을 다 알고 나서 생각해 보면 그때 외할머니 눈가가 살짝 촉촉했던 것 같기도 하다. 한창 예민하던 15살, 박성화는 모든 것을 알고 방황했지만 금방 외할머니의 착한 손자로 돌아왔다. 외할머니가 인생의 전부이고 전부일 예정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도록. 그리고 이 의미 없는 방황 때문에 하나뿐인 외할머니조차 자신을 떠나면 그때 정말로 무너질 것 같아서.
고등학생이 된 지금, 외할머니는 몸 상태가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해 있다. 외할머니 병원비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진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꼬박꼬박 내준다고 한다. 아마도 박성화를 일찍이 버린 사람들이겠지. 그 사람들은 외할머니와는 연락을 가끔 하는 것 같았다. 사적인 얘기 말고 돈 문제 관련으로만. 이제 와서 박성화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걸까? 아니면 병원비를 내주는 행위로 그때의 잘못을 덮어씌우려는 걸까? 박성화는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충동적인 마음이 들어 깊이 생각하는 걸 빠르게 포기한다. 케이크를 맛보며 김홍중의 따뜻한 마음을 느낀다. 홍중이가 옆에 있었으면...
몇 주 후,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박성화는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았다. 무슨 상태로 장례식장까지 왔는지도 모르겠다. 그 장소엔 사진 속으로만 남아있는, 밝게 웃고 있는 외할머니와 검은 상복을 입은 박성화뿐이었다. 박성화는 소리 내어 울지도 못 했다. 초점 없이 저만치 아래의 바닥을 보고 느끼고 있었다. 눈을 천천히 감고 자신이 서서히 없어지는 상상을 했다. 힘이 빠지고 몸이 둥둥 떠 있는 느낌이었다. 눈을 뜨니 침대 위였다. 힘없이 눈을 반쯤 뜨고 옆을 바라보니 김홍중이 있었다. 손이 따뜻했다. 여긴 병원인가? 김홍중이 여기에 왜 있지? 꿈인가? 지금 보고 있는 게 실제 상황인가 싶어 한껏 마른 목소리로 김홍중의 이름을 작게 불렀다. 김홍중은 눈을 크게 뜨고 눈물을 왈칵 흘렸다. 숨이 가빠졌다. 곧이어 박성화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나와 베개를 적셨다. 충격이 큰 탓에 과호흡으로 잠깐 쓰러진 것이고 지나가던 사람이 쓰러진 박성화를 발견해 장례식장 재단 병원 응급실로 이동했던 것이다.
김홍중은 박성화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박성화가 말했다, 홍중아. 김홍중은 대답 없이 그저 박성화와 눈을 맞췄다. 나 아까 무슨 생각했냐면, 눈 뜨자마자 네가 있길래 환상인가 싶었어. 드디어 헛것이 보이는구나. 내가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바로 보여서 신기했거든. 장례식장에서는 널 부를까 생각했어. 근데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해서 못 부르겠더라. 근데 이렇게 바닥인 내 모습을 보이네.
김홍중은 말없이 박성화를 꼭 안아주었다. 성화야, 나에게 말해도 괜찮아. 우리는 친구잖아. 친구니까 다 말할 수 있어. 부담 가지지 않아도 돼. 나에게는 아무 생각 하지 않고 행동해도 되니까, 다 괜찮아.
이 말에 김홍중의 어깨가 박성화의 눈물로 젖어 들어갔다. 홍중아... 난 왜 너랑 있으면 편안해질까. 나 커서 남에게 눈물 보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넌 진짜 나에게 무슨 존재일까. 친구 이상일까? 홍중아, 내 친구야... 박성화는 김홍중의 품에서 말없이 엉엉 울었다. 박성화는 자신의 사정과 왜 그렇게 외할머니의 말을 따랐는지, 모든 것을 말해줬다. 김홍중은 그렇게 미안해했다. 몇 주 전 박성화의 생일 때 케이크를 같이 먹어 주지 않은 것에 대해 정말로 미안해했다. 왜 그렇게 박성화가 같이 먹자고 했는지 이제서야 알게 됐다. 김홍중도 울음을 터뜨렸다. 넌 도대체 왜 우냐며 박성화는 당황했지만, 김홍중은 서운함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지금이라도 자신의 사정을 거짓 없이 말해준 거에 대해 고맙다고 진심을 꾹꾹 담아 말해주었다.
박성화는 며칠간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잠시 쉬고 싶다고 했다. 무단이 그일 박성화의 생기부가 조금은 걱정됐지만 제일 걱정되는 건 박성화의 멘탈 상태였기 때문에 지지해 줄 수밖에 없었다. 박성화가 학교에 나오지 않을 동안 김홍중에게는 새로운 루틴이 생겼다. 집 가는 길에 박성화의 집이 있어서 항상 박성화의 집이 있는 아파트 단지로 가 박성화를 베란다로 부른 후, 고개를 높이 들어 박성화의 눈에 잘 보이도록 손을 크게 흔들어 준다. 박성화는 그걸 또 영상으로 남기고 오늘은 좀 영상이 많이 흔들렸다며 카톡으로 추억을 남긴다.
박성화가 학교로 복귀하고 나서는 박성화도 김홍중과 같이 오후 자습을 한다. 김홍중과 같이 있으면 뭔가 편안해지는 느낌이 있어서 외롭지 않았다. 자리가 붙어있지 않아도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박성화를 행복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오후 자습이 끝나고 집으로 걸어가면서 항상 뭘 사 먹었다. 학교 앞 무인 라면집에 가 라면을 끓여 먹기도 하고 주변을 산책하면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먹기도 했다.
"홍중아, 우리 크면 나랑 같이 살래?"
"갑자기?"
"꼭 같이는 아니더라도... 성인이 되어도 지금처럼 근처에 살거나 같이 붙어있으면 좋을 것 같아."
박성화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홍중아, 나 너랑 친구가 되고 나서 처음 해본 게 많아. 내 가족 얘기도 처음 해봤고 우리 외할머니 외에 소리 내서 운 것도 너 앞에서가 처음이야. 너랑 있을 때 가장 행복한데 너는 그럴지 모르겠다.
"그래, 좋아. 나도 너랑 붙어있으면 재밌을 거 같기도?"
"근데 맨날 싸우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근데 원래 싸우면서 크는 거래."
"...홍중아."
나 너를 좋아하는 것 같아.
"응, 왜?"
"나 정말 네가 옆에 있으니까 행복해."
김홍중이 낯간지럽다는 듯이 손사래를 치며 걸음을 빨리했다.
김홍중의 얼굴이 빨개진 건 기분 탓일까?
1
실패다. 홍중은 직감했다.
선체에 이상은 없다. 궤도 정상, 연료도 충분하다. 미사일을 얼마나 차곡차곡 실었던지, 그렇게나 폭격을 퍼부었는데도 퍼부은 만큼의 미사일이 아직 더 남아있었다. 지구와의 통신도 여전히 완벽하고, 부상자도 없고, 지금까지 상대가 보인 전력으로 추측건대 대단히 크리티컬한 반격이 남아있을 것 같지도 않다.
오늘을 위해 얼마나 많은 훈련을 거쳤던가. 맹세컨대, 홍중의 꿈은 군인이 아니었다. 홍중은 그저 위에 있고 싶었다. 키가 컸으면 쉬웠겠지만, 겨우 남들 정수리 편하게 볼 정도의 위를 원한 건 아니었다. 고개를 바짝 들고 발끝으로 온 몸무게를 지탱해야 겨우 보일 수 있을 정도의 위에, 어쩌면 그보다 더 위에, 아무도 넘볼 수 없도록 압도적으로 위에 존재하고 싶었다. 열일곱. 이미 제 할 일을 다 한듯한 성장판이 홍중을 갑작스레 2m 거구로 만들어줄 리는 없었다. 키로 해결되지 않는 욕구라면 날아야겠다. 없던 날개가 생길 리는 없으니 인간의 훌륭한 기술을 이용하자. 비행기. 그래, 비행기를 타면 높이 날 수 있잖아. 그러나 비행기는 혼자 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비행기의 방향을 결정하는 사람이 되자. 어떻게 하면 조종사라 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인터넷에 ‘조종사 되는 법’,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어요’ 따위를 검색하다가 우주비행사라는 단어와 눈이 마주쳤다. 우주비행사? 그래, 기왕 나는 거 하늘이 아니라 우주면 더 좋지. 우주가 제일 위에 있잖아. 그래서 도전했다, 우주비행사.
아시아 구석의 작은 반도 고등학생이 우주비행사의 꿈을 키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인터넷 세상의 태양신이 말하기를, 우주비행사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공학 계열 학사 학위를 따야 한댔다. 그러면 먼저 대학을 들어가고, 졸업도 해야겠네. 홍중은 10대의 마지막 3년을 기꺼이 책상에서 보냈다. 국어는 원래 잘했으니까 열심히, 수학은 별로 안 좋아하니까 조금 더 열심히, 영어는 대학 졸업하고 NASA에 취직하려면 필수니까 더 열심히, 물리는 만점 받아야 등급이 잘 나오니까 좀 더 열심히, 지구과학은 좋아하니까 그냥 열심히. 가뿐하게 원하던 대학의 항공우주공학과에 입학했다. 자, 그럼 이제 열심히 공부해서 멋지게 졸업해볼까!
첫 번째 고비는 여기서 발생했다. 첫 중간고사 이후 홍중의 당찬 포부를 들은 교수님은 그럼 기본적으로 석사 학위까지는 따야 할 텐데, 라며 홍중의 성적표를 꺼냈다. 당찬 포부만큼이나 알차게 받아낸 성적표를 바라보던 교수님은 “석사 학위를 가장 빨리 얻는 방법은 3학년 1학기에 학석사 공동이수를 신청하는 건데…….”하며 홍중의 반응을 살폈다. 맹세컨대, 그때 열심히 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던 홍중은 그것이 지옥의 대학원생이 되는 길이라는 것을 조금도 몰랐다.
석사 논문을 준비하며 담임 교수 수업의 조교 일까지 병행하고 있던 때, 학부생들이 제출한 과제를 채점하던 홍중은 문득 열일곱의 자신이 원하던 ‘위’가 계급이나 지위를 의미하는 것인지 물리적 높이를 의미하는 것인지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두 번째 고비였다. 석사 학위를 얻고 박사 과정에 들어가 박사 학위를 얻은 뒤 번듯한 교수직을 하나 차지하고 앉아서 이 분야의 권위자가 된다면 그거야말로 계급이나 지위에서의 ‘위’가 될 터였다. 몇 년이나 걸릴까? 박사 학위를 따기가 오래 걸리겠지? 박사를 딴 선배들이 전부 교수가 되지는 못하는 걸 보면 교수직에 오르기까지도 오래 걸릴지 몰라. 그렇지만 돈은 무진장 잘 벌 것이다. 교수님들이 버는 금액을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아마 충분히 넉넉한 돈일 것이다. 어느 정도냐면……, 대충 원할 때 비행기 원하는 좌석에 탈 수 있는 정도는 되지 않을까? 퍼스트클래스는 비행기 창으로 보이는 풍경도 좀 다를까? 그래도 비행기는 하나인데 보이는 건 비슷하고 기분만 다른 게 아닐까? 와, 빨리 비행기 타고 싶다. 버스가 아주 조그맣게 지나가는 걸 보다가 아예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날아오르는 기분을 느끼고 싶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비행기로 결론이 나는 것을 보며 홍중은 깨달았다. 아, 나는 권위자가 되어 돈을 많이 벌고 싶은 게 아니다. 정말로, 정말 말 그대로 위에 가고 싶은 것이다.
이후로 NASA의 ‘ㄴ’만 들려도 몸을 움찔거렸다. 동창이나 동기들과의 모임은 날짜를 기억하지 못해 빼먹기 일쑤였지만, 우주비행사와 비슷한 분야에 몸담은 선배들의 소식만큼은 귀신같이 알아냈다. 오매불망 NASA 소식만 기다리던 홍중에게 10년 전 졸업해 민간우주항공회사에 소속된 선배가 우주비행사 선발 시험 지원이 곧 시작될 모양이더라, 하는 정보를 넌지시 넘겼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지원서를 제출하고 조금 눈물 흘렸다는 것은 선배에게 말하지 않았다. 시험 합격 통보까지의 과정은 꽤 순탄했다. 중간에 교수님께서 홍중이 학교에 남기를 은근히 바라시던 것이 세 번째 고비이기는 했지만, 앞의 두 고비와 비교하자면 이건 문제 축에도 끼지 못했다.
훈련은 지독하게 어려웠다. 제 몸무게의 두 배쯤 되는 잠수복을 입고 물속에서 장시간 실험하는 우주 유영 훈련이나 우주선이 대기권을 벗어날 때 받게 될 중력가속도를 버티기 위한 훈련인 중력가속도 내성 훈련은 그 이름부터 무시무시했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원심분리기에 들어가 몸에 가해지는 강력한 중력을 견디고 있자면 제 몸뚱어리가 종잇장보다도 못한 존재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니, 정정한다. 그 안에서는 그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뇌로 전달되는 혈액의 양이 줄어 기절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다 끝나고 나와서 후들거리는 다리를 짚으며 ‘내 몸이 이렇게나 하찮다니!’ 생각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쯤부터 홍중은 이게 몇 번째 고비인지 세어보지 않았다. 셀 수가 없었다. 하루에도 서너 번씩 고비가 찾아왔다. 조종 훈련을 받다가 레버를 뽑아버리기도 했고, 해양훈련을 받다가 잠수복에 문제가 생겨 다른 대원들과의 연결이 끊어졌을 때도 있었다. 우주식량에 뜨거운 물을 받다가 구멍을 잘못 맞추어 물방울들이 선체 내부를 둥둥 떠다녔을 때도, 며칠 밤을 새운 채로 원심분리기에 들어갔다가 기절했을 때도, 감자가 너무 맛이 없어 뱉었는데 민기가 키운 것이었을 때도 고비였다. 민기는 홍중과 모든 훈련을 함께 한 동료 대원으로, 사회에서 식물학을 전공했다. 그러니까 홍중은 지구가 아닌 곳에서 작물을 얻어낼 수 있을 유일한 동료인 민기의 감자를 보고 맛이 없다고…….
그리고 그즈음에, 인간에게는 행성이 필요했다. 우주는 알고 싶은 곳이 아니라 개척해야 하는 곳이 되었다. 열일곱의 홍중은 자신의 첫 비행이 전쟁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지만, 어느덧 이십 대를 다 지나가는 시점에서의 홍중도 몰랐다면 거짓이다. 훈련이 자꾸 추가되었다. 조작해야 하는 계기판이 바뀌었다. 위협적으로 생긴 빨간 버튼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홍중은 대원들을 생각했다.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다. 위에 있고 싶었던 어릴 적의 꿈 때문이기도 빌어먹을 계약 때문이기도 했지만, 세계 최고의 정보를 가진 이 기관이 우리를 그냥 두지 않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홍중은 지켜야 했다, 자신의 대원들을. 그래서 더 독하게 훈련에 임했다. 터무니없는 시나리오에 대한 훈련이어도 누구보다 성실하게 임했다. 어떤 돌발 상황이 발생해도 침착하게, 절대 흔들리지 않겠다고, 그래서 꼭 우리 애들을 지켜내겠다고 홍중은 다짐했었다.
그러나 실패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는 훈련해본 적이 없다.
저기 저 남자가, 우주선은커녕 우주복조차 입지 않은 채로 눈을 번뜩이며 홍중을 향해 날아오고 있으니까.
2
입기도 힘들 것 같은 딱 붙는 검정 가죽바지에 마찬가지로 복잡하게 생긴 가죽 자켓과 가죽 장갑. 짙은 눈썹에 눈을 살짝 덮는 길이에서 찰랑이는 머리칼, 왼쪽 귀에서만 반짝이는 드롭 이어링, 오른쪽 귀에는 무전용으로 보이는 이어폰. 날 때부터 제복이 어울렸을 것 같은 직선으로 가득한 얼굴.
“우주정보원 보안 1팀입니다.”
차분한 목소리로 악수를 청한 그 얼굴 뒤에서 이상한 불꽃놀이가 펼쳐졌다. 으레 불꽃놀이라면 작은 불꽃이 휘잉, 하고 하늘로 치솟아서 펑 터지며 까맣던 밤하늘을 색색으로 물들이는 것일 텐데, 우선 저건 밤하늘이 아니다. 홍중이 인상을 찌푸렸다. 뒤늦은 두통이 몰려온다. 홍중이 두리번거리자 여전히 어색하게 오른손을 내밀고 있던 남자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동료분들은 모두 무사합니다.”
믿으라고 하는 말인가.
“어딨습니까, 동료들.”
“그건….”
말끝을 흐린다. 그제야 내밀어져 있는 오른손이 보인다.
“전쟁포로와 악수도 합니까.”
굳이 만져보지 않아도 무게로 알 수 있다. 허리춤에 있어야 할 총이 없어졌다. 품속의 단도 역시 없어졌다. 동료들이 무사하다면서 어디에 있는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목숨은 붙여놓고 정신을 잃은 사이 모든 무기를 빼앗았다. 붙잡히면 빨리 자결하는 것이 가장 덜 괴로운 일이라고 수도 없이 배워왔는데.
“네? 아니, 아니, 그런 게 아니고…!”
그런데 저 남자, 왜 저렇게 당황하지.
“이게, 이렇게 하는 게 인간들의 인사라고 해서….”
눈썹은 팔八자에 커다란 눈망울은 그새 촉촉하다. 외계인은 어떤 고문을 하려나, 인간이랑은 아주 다르겠지, 같은 생각이나 하던 홍중의 머리가 순간 새하얘진다. 분명 직선뿐인 얼굴이었는데 어디서 저 많은 곡선이 튀어나온 건지. 이쯤이면 악수를 청한 손을 거둘 법도 한데 울망거리는 얼굴로 오른손만 꼿꼿하게 내밀고 있으니 홍중은 혹시 제가 잘못을 했나 싶다.
“동료분들은 아직 잠들어 있습니다.”
사실 홍중이 잘못을 한 것도 맞긴 했다. 홍중이야 명령 때문이었다고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저들로선 무작정 미사일부터 쏘아댄 침략자가 아닌가. 그런데도 해명의 말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남자에게서 나온다. 처음의 차분한 음성보다 한 톤 정도는 높아진 목소리로.
“최대한 조심히 데려오려고 했는데, 인간들의 몸은 워낙 약해서, 아니 그렇다고 인간의 탓이라는 건 아니고요…!”
“캡틴!”
윤호다. 그 옆에 쿠당탕대는 건 아마도 민기. 아직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는데 그새를 못 참고 형 괜찮아? 하며 달려오는 건 우영. 그리고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는 종호. 모두 무사하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구나. 그럼 됐다. 그렇게나 차곡차곡 실어온 미사일들이 우리의 선체를 산산조각내는 불꽃놀이에 쓰이고 있더라도.
홍중이 맞잡을 때까지 손을 내밀고 있을 기세더니, 다른 이들이 다가오자 스르르 내려간다.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이다가 겨우 그럼, 한 마디를 뱉고는 뒤돌아 걸어간다. 우주정보원이라고 했지. 국정원 같은 기관인가. 우주복도 없이 우주를 유영하는 신체 능력에 국가를 넘어 우주 정보기관을 갖춘 문명. 그러나 홍중에게 내려진 작전의 목적지는 이곳이 아니었다. 목적지로 향하던 중 이상한 생체신호를 발견했고, 훈련받은 우선순위대로 미사일을 발사했었다. 목적지보다 더 가까이에 이 정도의 문명이 있었다면, 지구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이유가 뭐지? 남자가 서 있던 자리를 멍하니 보고 있었더니 윤호가 바로 뒤에 와 선다.
“형.”
다들 괜찮냐고 묻기도 전에 윤호가 속삭인다.
“뜯어왔어요.”
“뭐?”
“연료실에 있던 비상 통신기. 나랑 민기랑.”
“…연결은?”
“그게 문제예요. 우리가 신호를 보내자마자 저쪽에서 알아채면 말짱 도루묵이라 아직 시도하지는 못했어요. 우리 선체 부서진 건 알고 있을 거고, 지금 여상이가 최대한 모든 신호 다 받고 있을 거니까 저쪽에서 잡지 못하는 채널을 알아내야 해요.”
윤호보다 조금 작은 키, 판판한 몸, 날카로운 인상, 그러나 홍중이 무슨 말만 하면 당황하며 동그래지는 눈….
“우선 알았어. 고생했어.”
홍중은 알아내야 한다. 이곳이 어디인지, 약점이 무엇인지, 지구에는 어떻게 연락할 것인지, 그리고, 그는 누구인지.
3
“김홍중입니다.”
환경은 지구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지금의 지구보다는 옛날의 지구와. 흙 많고 풀 많은. 멀쩡히 숨 쉴 수 있는 것으로 보아 대기 성분도 비슷한 듯하고. 중력도 날씨도 지구의 그것과 다를 바 없으니 집에 돌아온 기분까지도 들었다. 잔뜩 경계했던 홍중과 대원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 누구도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주지 않았다. 외계인들 –우리와 닮게 생긴 이곳의 존재들을 부를 말이 따로 없어 편의상 외계인이라 부르기로 했다.- 이 우리를 힐끔힐끔 쳐다보기는 했지만, 잠깐이 전부였다. 하나 걱정이라면 음식이었는데, 민기와 우영이 얼렁뚱땅 해결해냈다.
“근데 형, 여기 외계인들은 말을 못 하던데?”
“아니 너는 말을 그렇게 하면 어떡하냐! 말은 하는데 우리랑 안 통하는 거겠지!”
“아 그거나 그거나! 아무튼 형, 그때 그 외계인이랑 얘기하고 있던 거 아니었어요? 형도 그냥 외계인 세워놓고 바디랭귀지 했어?”
문제는 이상한 곳에 있었다. 말을 못 한다고?
“나도 그게 이상하긴 했었어요.”
가만히 우영과 민기의 말을 듣던 윤호도 거든다.
“외계인들 여럿이 모여있는데도 조용하더라고요. 말을 안 하는 건 아니고 아예 방식이 다른 것 같은데, 형은 그때 얘기하고 있는 분위기였던 것 같아서.”
“잘… 하던데.”
홍중이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니 종호는 그럼 뭐 잘됐네, 하고 말을 얹었다. 그 외계인이라도 우리랑 말이 통하는 게 어디에요. 지난번에 보니까 우선은 적대적인 것 같지도 않고. 형이 그 외계인 찾아서 얘기 좀 더 해봐요.
그래서 찾아왔다. 그 남자. 막무가내로 악수를 청하며.
“김홍중, 이라고요.”
홍중의 손을 빤히 보더니 슬쩍 손을 올린다.
“그쪽 이름은….”
미처 닿지 못한 두 손이 허공에 멈춘다.
“아, 그, 인간의 이름은 없는데….”
이름이 없으면 악수도 못 하나. 잡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아서 손을 내렸더니 또 그때처럼 남자의 손만 덩그러니 남는다.
“인간 말은 잘하네요.”
“인간이 왔던 게 처음은 아니거든요.”
이건 또 무슨 소리지. 한국인이 여기까지 왔었다면 우리가 몰랐을 수가 없는데. 거짓말도 참 다채롭게 한다.
“왔었던 인간들은 어떻게 했는데요?”
“어…, 돌려보냈죠.”
“돌아왔으면 내가 알았을 텐데.”
입술을 달싹이기만 하고 답이 없다.
“말도 배웠을 정도면 인간들이 여기 오래 있었나 봐요.”
“아뇨, 그렇게 길지는 않았어요. 엔지니어들 작업만 끝나면 돌려보내는 게 우리 일이니까.”
“엔지니어들 작업은 뭔데요?”
“아, 그게….”
또, 답이 없다.
“…우리 좀 걸을까요?”
홍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남자가 앞장선다. 이곳의 건물들은 온통 나무색이다. 흔히 우드톤이라 부르는 나무 기둥 색보다는 이파리 색에 가깝다. 녹음이 진 숲의 색깔. 좀 걷자는 말이 정말 말 그대로 걷자는 뜻이었는지 남자는 입을 열 기미가 없다.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만 내며 건물들 사이를 익숙하게 지난다. 드문드문 외계인들이 남자와 눈인사를 나누었지만, 대화도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혹시 또 모르지. 지금 저 인간을 죽이러 가는 길이야, 같은 이야기를 했을지도.
건물도 더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이 들어오자 축축한 기운이 홍중을 압도한다. 어쩐지 질퍽한 바닥. 바위마다 다닥다닥 붙은 이끼. 잎사귀가 거대한 나무들. 쏟아지는 햇빛. 그리고 그 햇빛을 전부 반사하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호수.
“처음 충돌한 우주선이 만든 호수예요.”
홍중이 놀라 걸음을 멈춘다.
“지나간 항로를 보나 속도를 보나 이곳에 오려던 건 아니었고…. 잘못 충돌한 것 같았어요. 아, 무인선이었어요.”
놀란 홍중을 돌아보는 남자는 웃고 있다. 입꼬리만 조금 올려서.
“그때 많이 잃었어요. 친구들도, 가족들도. 무인선이 보낸 데이터 때문인지 인간들이 자꾸자꾸 찾아왔고, 그래서 내 일은 돌려보내는 게 됐어요. 나도 친구를 잃지 않고, 우주 어딘가에 있을 다른 인간들도 친구를 잃지 않도록 안전하게.”
눈은 다 울고 있으면서.
“그쪽도 그렇게 안전하게 돌려보낼 거예요.”
솔직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홍중은 생각했다. 그건 인간이 사고하는 방식이 아니니까. 상처를 준 존재들이 다시 찾아왔을 때, 그들의 친구와 가족을 위해서 안전히 돌려보내 준다.
“…미안합니다.”
그러나 거짓으로 경계를 풀어놓으려는 거라고, 끝까지 긴장을 풀지 않아야 한다고, 그렇게 되뇌는 것은 의미가 없다. 처음 내게 오른손을 내밀었던 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눈은 늘 진심이었으므로.
홍중이 오른손을 내민다. 홍중을 가만 바라보던 남자가 홍중을 따라 오른손을 내민다. 두 손이 맞닿는다. 웃는다. 웃는 얼굴은 처음이다. 인간들을 다시 돌려보내는 것이 이들의 추모라면, 서로 손을 맞잡는 것이 인간의 인사라면, 나의 불시착이 당신의 일이라면, 이 예고 없던 만남은 나에게 무엇일까.
4
호수에서 만나길 약속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약속한 적 없는 루틴이 되었을 뿐이다. 호수에 있으면 그가 왔고, 호수에 가면 그가 있다. 어떤 날은 잔뜩 울상으로 호수를 바라봤고, 어떤 날은 다람쥐의 콧잔등을 건드리고 있었으며, 또 어떤 날은 그저 홍중을 기다렸다는 듯 온 얼굴로 웃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불러야 해요?”
그건 정확히 열 번째 만남 때.
“전에 그 인간은 뭐라고 불렀어요?”
“제이라고 부르긴 했는데….”
“했는데?”
“그게 진짜 이름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어요. 아마 그렇게 부르는 것도 아니었을 거예요.”
남자는 신발 끝으로 돌을 툭, 툭, 건드렸다.
“홍중이라고 불러요.”
발장난이 멈춘다.
“김홍중에서 김은 가족끼리 공유하는 성씨고, 홍중이 내 이름.”
홍중, 홍중, 홍중. 남자가 몇 번이고 곱씹는다. 또, 웃는다.
홍중! 어디 있었어요? 홍중! 이것 좀 봐봐요. 홍중! 이건 내가 좋아하는 꽃인데요, 홍중! 홍중! 홍중! 홍중! 근데 그렇게 부르라는 건 아니었는데. 우주선을 향해 날아올 때는 뱀 같았다. 말 한마디에 안절부절못할 때는 토끼 같았다. 그런데 대체 어디서 저런 강아지가 튀어나왔지?
“형! 여기 있었어?”
우영이 문을 벌컥 열고 나온다. 밥 다 했어. 들어와서 밥 먹어요. 근데 민기 어디 갔는지 알아? 어딨는지 알면 좀 데려와 주고요. 어 그리고 그쪽은…, 같이 들어오실래요? 뭐, 근데, 드실 수 있나? 산이 한 번 먹여볼 걸 그랬나.
“산이?”
“그, 전에 도와준 친구요. 이름 지어줬어요. 산이라고.”
“친구했어?”
“둘도 친구 아니에요? 뭐 아무튼, 빨리 들어와요. 다 식어.”
우영이 다시 문을 쾅, 닫고 들어가니 남자와 홍중 사이에는 다시 정적만 남는다. 이름을 지어줬다고? 친구?
“우영…이 말하는 건 조금 다르네요.”
“아, 나이 많은 사람한테 부르는 호칭이에요.”
근데 민기는 어떻게 찾지, 하며 머리를 뒤젓는 홍중의 손을 남자가 막는다. 바로 데려오라고 할게. 댕강 잘라먹은 문장 뒤로 쑥스러운 웃음이 뒤따른다. 형이라는 호칭이 아니라 반말이 신경 쓰였던 거다. 그게 친밀함의 표시라는 걸 그 짧은 새에 알아채고는. 홍중은 이제 인정해야 했다. 당신을 웃게 하고 싶다고. 당신과 함께 웃고 싶다고. 이 예고 없던 만남은 나의 원점이라고.
몇몇에게 잡혀 영문도 모르는 채로 민기가 돌아왔다. 그 어리둥절한 얼굴을 보며 홍중은 웃었고, 우영은 밥 다 식는다니까! 하며 홍중을 재촉했다. 남자는 어색하게 한 자리를 차지했고, 그의 앞에는 푸짐한 밥공기가 놓였다. 근데 이거 먹어도 되나…? 걱정스러운 우영을 안심이라도 시켜주려는 듯 남자는 크게 숟갈을 들었다. 윤호야, 우영아, 하며 부르는 소리를 가만 듣더니 무언가 깨달았는지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홍중아!
내가 아주 만약에, 아주아주 만약에 말이다. 위에 있고 싶다는 꿈을 가지지 않았다면, 미사일을 가득 실은 우주선 같은 건 조종하지 않아도 됐을 테다. 내 대원들을 살리겠다고 앞에 있는 다른 이를 죽이는 훈련 같은 건 내 생에 없었을 거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밥 한 끼 함께하고 술잔을 기울이고 가끔은 누군가에게 옆자리를 내어주기도 하면서 그렇게 살았겠지. 행복했을 거다.
너무나 후회했었는데, 이제 후회가 들지 않는다.
“할 말이 있어요, 형.”
남자가 돌아가고 뒷정리도 다 마친 식탁에 앉아있었더니 종호가 다가와 앉는다. 퍽 심각한 종호의 표정에 홍중도 덩달아 심각해진다. 형들도 다 와봐요.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설거지하던 우영까지 식탁에 다 모이고도 종호가 머뭇거린다.
“… 찾은 것 같아요.”
너무나 후회했었는데,
“저쪽에서 못 찾는 채널이요. 찾은 것 같아요.”
이제 더는, 후회가 들지 않는다.
5
“홍중아.”
누운채로 응, 하고 답한다. 이곳에는 나무보다 높은 건물이 없다. 빼곡하게 선 나무들 아래로 낮은 집들이 숨어있으니 지구로 치면 늘 숲속에 있는 셈이다. 그러니 호수는 탁 트인 하늘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소라고 봐도 무방했다. 낮에는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던 곳에 밤이 되니 보랏빛 밤하늘에서 별빛이 쏟아진다. 저 별 중 하나는 내가 잘 아는 별이다. 내가 살던 곳, 태양.
“…홍중아.”
내가 살던 곳에 신호를 보내기 위해서는 탁 트인 곳이 필요하다.
“성화라고 부를래.”
“응?”
“네 이름.”
홍중의 손 아래로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닿는다. 신호 출력을 최대로 올린다. 알고 왔을까. 확신할 수 없다. 나지막하게 채널을 알려주던 종호의 목소리 뒤에 붙었던 윤호의 말이 떠오른다. 기억이에요. 저들이 우리를 경계하지도 않고 우리에게 모든 걸 말해주는 이유 말이에요. 저들은 기억을 지울 수 있어요. 우리의 기억을 다 지울 거니까, 모든 걸 알아도 상관이 없는 거였어요. 우리 선체를 폭발시킨 게 아니에요. 우리 선체에 담긴 데이터를 지운 거예요. 우리를 돌려보낸다면…. 저들 판단에 모든 기억을 지웠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겠죠.
“다시 말해줘.”
신호가 지구까지 닿을 수 있을까. 그것도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전파가 우주 어딘가를 떠돌 수 있다면, 고작 그 정도를 기억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성화.”
성화, 성화…. 홍중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처럼 몇 번이나 곱씹더니 예쁘다, 하고 웃는다.
“무슨 뜻인지는 안 물어봐?”
“뜻이 있어?”
“한국인들이 이름으로 쓰는 문자에는 문자마다 뜻이 있어. 뜻을 가진 문자들을 조합해서 뜻이 있는 이름을 만드는 거야.”
성화가 음, 하며 고민한다.
“네가 만들었으니까, 예쁜 뜻일 거야.”
고민 끝에 맥없는 답을 내놓는다. 그 평온을 오래 담아두고 싶어서 홍중은 눈을 감았다.
6
“형 되게….”
홍중이 비상 통신기를 가리고 있던 손을 치운다. 같이 돌아가자는 성화에게 조금만 더 누워있겠다고 말하고도 꽤 시간이 지나고서야 윤호와 민기가 다가왔다. 성화가 자리를 뜬 것은 진즉 알았을 거다. 들키지 않으려고 조심하기도 했겠지만, 홍중에게 시간을 준 것이기도 했겠지. 민기가 먼저 돌아가겠다며 장비를 챙겼고, 윤호는 홍중 옆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는다.
“말랑말랑한 사람이었네요.”
홍중이 픽, 하고 웃었다. 여전히 홍중은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인다.
“형 처음 봤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제일 처음에요. 동양인이라고는 나랑 형밖에 없었을 때. 그때는 형 꿈도 말해주고 그랬잖아요. 그때 우리가 상상했던 것과는 상황이 너무 많이 달라져서 형도 변하는 게 당연했겠지만….”
호수에서 불어오는 축축한 바람이 홍중의 머리칼을 흔든다.
“형 근데요, 여기서 보니까 지구가 위에 있더라고요.”
홍중의 시야를 가득 채우던 밤하늘이 홍중에게로 쏟아진다. 차원이 일그러지고, 어디선가 폭발이 일어난다. 쏟아져 내리는 우주를 홍중은 또렷하게 노려본다. 저 모든 질량을 흡수해서 팽창하고 싶다. 여기서부터 저 멀리,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까지 닿을 수 있도록.
“형 여기 남으라고는 나 절대 말 못 해요. 같이 여기에 머무르자고도 못 하고요. 그냥…, 우리는 돌아가야 하니까, 그런데 그게 형한테 너무 괴로운 일이라면, 이곳을 기준으로 지구가 위라는 실없는 소리라도 형한테 위로가 되었으면 해서.”
“신호 말이야. 지구에는 안 닿았겠지?”
“아마도요. 선체로 전파를 증폭시켜야 했는데 그러지도 못했고.”
“다행이네.”
무엇이 다행인지도 모르는 채로.
7
“형.”
윤호가 홍중을 흔들어 깨운다.
“밖에 손님이 오셔서….”
올 손님이라고는 성화뿐이다. 부스스하게 뜬 머리를 대충 쓸어넘기며 문을 연다. 선선한 바람이 분다. 성화가 웃는다. 성화 뒤로 몇몇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엔지니어들이다. 엔지니어들이 돌아왔다. 분명히 미사일 불꽃놀이에 산산조각으로 박살이 났던 우리의 선체를 멀쩡하게 되돌려서, 돌아왔다.
“우리 좀 걸을까?”
성화가 손을 내민다. 성화의 오른손을 홍중이 왼손으로 잡는다.
성화의 손은 차갑다. 이 행성의 모든 개체가 그러한지는 알 방도가 없다. 다른 이의 손을 잡아본 적이 없으니까. 성화의 키는 윤호보다 조금 작은 수준인데, 이것이 평균이라는 건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성화는…. 성화는 늘 가죽 유니폼을 입는다. 처음 만났던 날의 그것과 같은 유니폼. 홍중이 챙겨놓은 펜을 꺼낸다. 우영을 통해 산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지구에서 쓰던 것으로 따지자면 하얀 젤 펜 같은. 앞서가는 성화를 멈춰 세운다. 왜, 하고 물으려는 성화의 뒤에서 허리를 숙인다. 잠시만. 나름의 양해의 말과 동시에 성화의 가죽 자켓을 살짝 들춘다. 놀라 숨을 들이키면서도 움직이지는 않는다. 가만히 서 있으면 가죽 자켓에 가려지는 허리 벨트의 뒷부분. 홍중이 비뚤게 별을 그린다. 느리게 느리게 별을 채운다.
“나 안 보내면 안 돼?”
성화가 느리게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했다.
“안 되는 거 알고 물어보는 거잖아, 너도.”
입꼬리를 씩 올려 웃는데도 어쩐지 우는 얼굴이다. 나는 또 네가 잃은 이가 될까. 홍중은 성화를 처음 보았을 때와 비슷한 확신을 느꼈다. 그때도 나는 네 눈빛만으로 우리의 작전이 실패했다는 것을 알았지. 지금도 나는 네 눈빛만으로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임을 직감한다. 홍중이 성화의 팔을 붙잡는다.
“갈게, 갈 테니까, 내 기억은 지우지 마.”
“우리가 어떻게든 전송을 막으려고는 했지만, 너희 우주선은 우주에서 우리를 발견한 순간부터 지구로 기록을 보내고 있었어. 이곳의 공기 구성은 어떤지, 흙은 어떤지, 어떤 생명체가 사는지, 위치는 어딘지, 다 계산했을 거야. 그리고…, 이제는 이곳을 정복하기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확인했겠지.”
성화는 홍중을 떼어놓는 대신 그의 머리를 가만가만 쓸어넘기길 택했다. 그건 자장가였다.
“일찍 선체를 파괴한 덕에 중요한 정보들은 제거됐을 거야. 그렇지만 여기 다다랐었다는 정보 자체를 지울 수는 없어. 오랫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으니 너희가 우리와 접촉했다는 것도 알겠지.”
“여길 걱정하는 거라면 내가 절대, 절대로…….”
“널 걱정하는 거야.”
홍중이 눈을 질끈 감았다. 온통 칠흑 같은 어둠. 눈을 뜨면 다시 온통 칠흑 같은 우주겠지. 나는 이 드넓은 우주에 행성을 찾으러 나섰다가 당신을 만났으나 끝내 당신에게 착륙할 수는 없으니 그대는 행성보다는 항성임이 분명하다.
“네 기억을 이용할 거야. 네 의지와는 상관이 없을 거야. 네 기억을 밖으로 끌어낼 거고, 그럼 너는 괴로울 거고, 결국 인간들이 여기를 찾아냈을 때, 너는 또 네 탓을 할 거잖아.”
다시 행성으로 돌아가야 하는 나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을 테니 내가 그대의 주변을 맴돌 수만이라도 있게 해달라고, 내가 살아온 중력을 모두 박살 내고 그대는 나의 항성이 되어달라고.
“너를 걱정해서 지우는 거야, 네 기억.”
나에게 비록 그대가 보이지 않을지라도, 내가 그대의 빛이 닿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한 멀리에 있더라고, 그렇게 혹여 내가 그대의 존재마저 잊을지라도.
“대신 내가, 내가 오래 가지고 있을게. 널 오래 기억할게. 잊지 않을게. 네가 나를 기억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만큼 내가 더 기억하고 내가 더 보듬고 내가 더 잘, 많이…….”
꼭 어딘가에서 반짝이며 나의 중심이 되어달라고.
“내가 더 사랑할게.”
그래서 별 성에 될 화. 성화.
“그러니까, 그러니까 괜찮아.”
그건 마치 자신에게 하는 말 같기도 했으나 물어볼 수는 없었다. 성화는 자신을 끌어안은 홍중의 뒤통수를 쓰다듬다 기억제거기를 작동시켰고, 홍중은 그대로 성화의 품 안에서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으니.
8
고단한 조사였다. 홍중이 녹초가 된 몸으로 소파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다. 나사는 실패한 우주비행사를 퇴출하지 않는다. 그들은 홍중에게 의사를 물었다. 남아서 연구를 계속해보지 않겠느냐고. 기회가 된다면 다시 우주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주 운이 좋으면, 다음 비행은 전쟁이 아닐 수도 있다는 달콤한 유혹도 있었다. 그럼 홍중, 네 꿈을 이룰 수 있잖아. 그러나 홍중은 거절했다. 자신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이미 꿈을 이룬 기분이었다. 윤호, 민기, 종호는 남기로 했다. 우영은 민기가 키운 감자 말고 더 맛있는 재료로 요리라고 싶다는 농담을 던졌다. 민기는 울상이었지만, 모두 웃었다.
“퇴사 선물이에요.”
여상이 조용하게 넘겨준 것은 usb였다. 그 차가운 금속의 감촉에 흠칫 놀라 무엇인지 물었지만, 여상은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노트북이 어디에 있더라. 딱 하나 들어있는 파일을 열어본다. 음성 파일이다.
“…네가 만들었으니까, 예쁜 뜻일 거야.”
모르는 목소리다. 홍중은 흐르는 눈물의 이유도 알 수 없었다.
WARNING: 자살, 폭력 요소
윤호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해낸다고 믿는 그런 아이였다. 그래서 댄스동아리에서 1학년 중 리더로 활동하며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윤호는 요즘 춤추는 게 즐겁지 않았다. 뭐 다 그렇듯 잠깐 오는 슬럼프? 번아웃? 정도로 생각했지만 그게 한 달 3개월 점점 목을 조여오는 불안감에 이제는 잠도 못 자게 됐을 정도로 심해졌다. 처음 춤이 자신의 마음대로 잘 춰지지 않았을 때는 오늘은 조금 컨디션이 안 좋은가 보내 하고 넘겼던 일들이 이제는 춤을 추는 일이 나에게 맞지 않은 걸까라고 까지 느껴지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렇게 한 학기 동안 그냥 방황했다. 중간중간 새로 마음을 다잡고 노력하려 해도 내 맘대로 몸이 움직이질 않으니, 이제는 모두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제 진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혼자 연습실에 남아 노래를 틀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노래의 처음 훅도 나오지 못한 채 윤호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연습실 천장을 보며 한 학기 동안 그 슬럼프를 이겨내려고 했던 자신이 너무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윤호는 처음으로 자신의 믿음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노래가 끝날 때까지 그 어두운 생각에 잠겨있었다. 노래가 끝난 후 갑자기 연습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윤호는 놀라 문을 바라보았고 거기에는 처음 보는 얼굴의 학생이 서 있었다.
“뭐야 너? 이 시간에 사람 있는 건 처음 보는데?”
“저.. 여기 댄스부만 쓸 수 있는 곳이에요.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돼요.”
“허… 나 댄스부인데 몰라?”
윤호가 댄스부 부원을 모를 리 없었다. 왜냐하면 처음 댄스부에 들어온 후 잘 보이기 위해 모든 부원의 이름을 외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호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당황하던 찰나 그 학생이 윤호에게 다가와 핸드폰을 던져주었다.
“음.. 못 믿는 거 같으니까 보여줄게. 여기서 아무거나 틀어.”
그 학생은 이렇게 말하며 휴대폰을 던져주었다. 윤호는 당황했지만, 핸드폰을 받고 노래들을 살펴보았다. 모두 춤으로 유명한 노래들이었고 윤호는 그 중 눈에 들어오는 노래를 찾았다. 바로 그건 윤호가 처음 댄스부 오디션 때 추었던 노래였다. 그 학생은 윤호가 찾은 걸 알았는지 몸을 풀고 있던 걸 멈추고 시작하라는 눈빛을 주었다.
“…”
윤호의 입에서는 감탄 밖에 나오지 않았다. 처음 핸드폰을 던져주었을 때 얼마나 잘하길래 그러는지 이런 의문도 들었다. 하지만 처음 노래가 시작할 때부터 끝까지 윤호는 그 학생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노래가 끝나고 그 학생 흘리는 땀을 닦으며 윤호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어땠어? 라고 말하며 윤호를 쳐다보았다. 윤호는 눈을 반짝이며 신나게 춤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윤호는 정말 신이 났는지 춤 하나하나를 짚어 가며 칭찬했고 그 학생은 그런 칭찬이 어색한지 얼굴을 돌렸고 그만하라며 소리쳤다.
“야..그만하고 다음은 너! 해봐, 너도 댄스부인지 내가 알아야 할 거 아냐.”
“네? 저 댄스부 맞아요!”
“아니 아무튼 빨리 몸이나 풀어봐. 노래는 아무거나 틀거니까 알아서 하고~”
그 학생은 윤호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다는 듯 윤호를 밀며 핸드폰의 노래를 뒤적거렸다. 그리고 윤호가 준비하기도 전에 노래를 시작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윤호는 춤을 추지 못하였고, 그 학생은 윤호가 지금 춤을 추지 못하는 상황인 걸 아는지 갑자기 일어나 윤호의 손을 잡고 노래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까 내 춤 얘기할 때는 완전히 신나 보이더니 너 춤추는 건 싫어해?”
“아..아니요 그건 아닌데..”
“그럼 그냥 나 따라서 춰봐 ”
그 학생은 윤호의 손을 꽉 쥐며 환하게 웃었다.
윤호는 그렇게 처음 보는 학생의 손에 이끌려 리듬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고, 처음엔 그렇게 어색해하고 어려워하던 윤호는 어디 갔는지 찾아볼 수도 없이 어느샌가 그 학생과 함께 그냥 그 노래를, 그 상황을, 그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그렇게 신나던 노래도 끝나고 윤호와 그 학생의 춤도 막을 내렸다. 둘의 숨은 목까지 차올랐고 둘의 손은 노래가 끝나도 계속 맞잡고 있었다.
윤호는 가쁘게 쉬어 오는 숨이 버겁기도 했지만, 자신이 춤을 추었다는 생각에 가득차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야!!! 지금 몇 시인지는 알아?!
하…너 때문에 오늘 연습은 다 한물갔다..
오늘은 그만하고 내일 해야되겠네..”
라고 하며 손을 놓으려고 하는 순간 윤호가 그 학생의 손을 다시 꽉 잡으며
“이름!…..이름이 뭐예요..?”
그 학생은 잠시 고민하더니 윤호를 쳐다보며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박성화”
그리고 성화는 자신의 가방을 들고 연습실을 나갔다.
그 후 윤호는 슬럼프를 극복하였고, 그 성화라는 이름의 학생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윤호는 점심시간 댄스부 선배에게 성화에 대해 물어보았다.
“형, 혹시 저희 댄스부에 성화라는 학생이 있어요?”
“어? 네가 걜 어떻게 알아? ”
“아 그..저번에 한번 연습실에 늦게까지 있었는데 그분이랑 마주쳤어요.”
“아….그게..”
선배는 윤호에게 성화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다.
성화는 2학년이고 처음부터 춤을 정말 잘 추고 리더십도 있어서 2학년이 되자마자 부장이 되었지만 무슨 이유인지 다른 사람에게 부장을 넘겨주었다. 그러고는 질 나쁜 애들과 어울려 성화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도 물어보고 그랬지만 이제는 학교까지 잘 나오지 않아 그냥 놔두고 있다고 한다. 이야기가 다 끝난 후 선배는 윤호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면서 어깨를 토닥이고 갔다.
윤호는 그렇게 춤을 좋아해 보이던 사람이 왜..? 라는 의문을 품고 다시 반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후 윤호의 머릿속은 성화의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래서 윤호는 오늘도 댄스부 연습이 끝난 후에도 연습실에 남아서 성화를 기다렸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해가 질 무렵 어김없이 성화는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반가운 문소리에 윤호는 일어나 성화를 반겼다.
“형!!”
“뭐…? 형..? 아니 내가 왜 네 형이야!”
“형 2학년이잖아요. 전 1학년이니까 형 맞죠.”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저, 형이랑 춤추고 싶어서 기다렸어요.”
“내가 언제 같이 춰준대?”
성화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하며 구석에 자기 가방을 던지고 몸을 풀었다. 윤호는 예상했다는 듯 몸을 풀고 있는 성화에게 다가갔다.
“ 형 저 춤 가르쳐주세요. ”
성화는 당황한 얼굴로 윤호를 바라보았다.
“아니..너 1학년 리더잖아. 춤 못 춰?”
“제가 1학년 리더인 건 어떻게 알았어요?”
“아…뭐 그냥 댄스부에 춤 잘 추는 애 들어왔다고만 들었어.
근데 왜 나한테 배우고 싶어해..? 다른 애들 있잖아.”
“제가 본 사람 중에 형이 춤을 제일 잘 춰서요.”
성화는 윤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리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리고 다시 윤호에게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너 그냥 나랑 춤추고 싶어서 거짓말하는 거지?”
“음…반은 맞아요.”
“뭐?”
“형이랑 같이 춤추고 싶다는 것도 진심이고 아까 말한 것도 거짓말 아니에요. 그게 거짓말이면 제가 왜 형이랑 같이 춤추고 싶어 하겠어요.”
성화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윤호를 쳐다보다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래서 내가 뭘 하면 되는데.”
윤호는 씨익 웃으며 성화에게 이번에 있는 공연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그 공연은 윤호가 처음으로 하는 단독 무대라 이번 무대의 안무를 봐달라고 말했다.
“그럼, 노래는 정했어?”
“아..아뇨 아직이요.”
“?”
“형은 저한테 무슨 노래가 잘 어울릴 거 같아요?”
“음…너 춤추는 영상 있어?”
“네? 연습 영상 같은 거요?”
“응.”
“네, 있어요.”
“그것 좀 나한테 보내봐.”
성화는 영상을 몇 개 보더니 윤호에게 이런저런 노래들을 추천했다. 윤호는 마음에 들어 보이는 모양이었고 그렇게 얘기하다 보니 해가 지며 노을이 보이고 있었다. 시계를 보기 전에는 그냥 6시 정도인 줄 알았는데 여름이라 해가 느리게 져 그렇게 보일 뿐이었고, 시간은 거의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윤호와 성화는 급하게 가방을 챙겨서 학교를 나왔다. 그리고 학교 정문에서 성화는 집에 가려고 방향을 틀었는데 윤호가 성화를 불러세웠다.
“형 저 번호 알려주시면 안 돼요?”
“뭐..?”
“번호요. 그냥 연습 같이해야 하니까.
뭐 연습 못 할 때나 이럴 때 연락해야 하니까요.”
“음….”
성화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윤호를 쳐다보다가 자신의 핸드폰을 건넸다. 그렇게 윤호가 핸드폰을 받고 신나서 번호를 누르는 걸 보고 성화는 신난 강아지 같네.. 라고 생각하며 뚫어져라 쳐다보던 윤호의 눈이 핸드폰이 아닌 자신을 쳐다보았을 때 자신도 모르는 이상한 기분에 바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핸드폰을 빼앗아 다시 뒤돌아 집으로 향했다. 윤호는 뒤돌아 가는 성화를 빤히 보다가 성화의 뒷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윤호는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다음 날 아침 성화는 핸드폰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10시’
그리고 아래에 떠 있는 알람을 확인하고 성화는 한숨을 쉬었다. 그 알람은 윤호가 보낸 톡이었다.
윤호 - 형 왜 학교 안 왔어요? 9시 10분
오늘 연습 안 해요? 9시 30분
아직 자고 있나? 9시 40분
윤호 - 어? 1 사라졌다.
일어났어요?
성화는 핸드폰을 뒤집어 놨다. 그리고 몇초 지났나 갑자기 울려오는 진동에 놀라 핸드폰을 다시 뒤집었다. 화면에는 윤호라는 두 글자로 전화가 오고 있었다. 성화는 몇초 고민하다가 전화를 받았다.
“형 왜 봤는데 답장 안 해요?”
“야 지금 일어나서 눈도 안 떠지는데 답장을 어떻게 하냐…”
“형 지금 일어났어요? 학교는요? 올 거예요?”
“아..몰라 밥이나 먹어야지 끊어. ”
성화는 윤호의 전화를 끊고 부엌으로 나가 라면을 끓여 먹고 아무 의미 없는 하루를 보내다 5시가 넘어가는 시간을 보고 가방을 챙겨 학교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걸어 연습실로 갔다. 그리고 연습실 문을 열었을 때는 연습실 바닥에 앉아 자신을 반기는 윤호가 보였다. 그리고 쉴 새 없이 다시 시작된 일방적인 물음에 지친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만하고 연습이나 하지..? 라며 윤호를 째려보며 가져온 가방을 놓았다. 그리고 윤호와 함께 공연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해가 지고 둘은 정문에서 헤어져 각자의 집으로 갔다.
다음 날 아침 성화의 핸드폰에는 또 윤호에게 카톡 알람이 와있었다. 시간은 당연히 10시가 넘어 점심이 되어가고 있었고 톡에 1이 사라진 걸 본 윤호는 또 전화를 걸어 시답잖은 이야기로 성화는 하루를 시작했다.
그렇게 이런 생활패턴이 2주 정도 지속되었을 때 이제는 성화도 매일 아침오는 윤호의 카톡과 전화에 익숙해져 있었고 늦은 시간 학교 연습실의 문을 열면 자신을 향해 웃으며 인사하는 윤호가 익숙해질 때쯤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그날도 윤호는 학교에 가서 조회를 듣고 성화에게 카톡을 보냈다.
윤호 - 형 오늘 날씨 완전 좋아요!
이거 봐요.
라며 하늘 사진을 함께 보냈다. 당연히 윤호는 성화의 답장 따위 기대하지 않았고 핸드폰을 뒤집으려던 그때 윤호의 핸드폰에선 알람이 울렸다. 윤호는 바로 다시 핸드폰을 뒤집어 알람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알람은 성화였다.
성화 - 이쁘네.
한마디에 윤호는 바로 복도로 나가 성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뭐예요 오늘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요?”
“뭐 나는 일찍 일어나면 안 되냐..?”
“아니…그게 아니라…. 그럼, 형 오늘 학교 왔어요?”
“어. 근데 수업 재미없어서 그냥 째고 보건실 왔어.”
성화의 말과 함께 1교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수업 잘 들어라. 끊을게.”
그리고 끊긴 전화, 성화는 다시 아무도 없는 보건실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보다가 갑자기 열리는 문소리에 놀라 문을 쳐다보았을 때는 뛰어왔는지 헉헉거리며 자신을 보고 웃는 윤호가 보였다.
“야, 너 뭐야? 1교시 시작했는데 교실 안 가?”
“괜찮아요.”
“뭐가 괜찮은데…?”
성화가 하는 질문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윤호는 성화의 침대에 앉았다.
“형 그럼 오늘 저랑 같이 밥 먹어요!”
“싫어.”
“어…왜요..?”
“오늘 급식 맛없던데 보니까.”
“음…그럼, 뭐 먹게요?”
“매점 가서 그냥 빵이나 먹지 뭐…”
“그래요.”
“근데 너 안가?”
“음…저도 마침 좀 머리가 아파서 쉬어야 할 게 같아요.”
“와…눈 깜짝 안 하고 거짓말하는 거 봐…무섭다 무서워.”
윤호는 침대 옆에 있던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성화는 졸리다며 누워 잠을 청했다. 그리고 성화는 거의 점심시간이 끝나갈 때쯤 일어나 옆을 보았을 때 옆에는 곤히 자는 윤호가 보였다. 자는 윤호를 뒤로 하고 성화는 일어나려 이불을 꼼지락대는 도중 윤호가 일어났다.
“어디가요.”
“야 빨리 일어나 지금 점심시간 다 지나가.”
윤호를 일으켜 세워 매점으로 가 남은 빵들을 보던 성화는 자신의 주머니 속을 확인하고 제일 싼 빵 하나를 골랐다. 윤호는 성화를 힐끔 보더니 옆에 남아있던 빵들을 다 가져왔고 초코우유 2개를 샀다. 그리고 매점을 나와 학교 옥상으로 가며 성화는 윤호에게 말했다.
“야 너 이거 다 먹을 수 있어..?”
“형 먹으라고 산 건데요.”
“뭐?”
“아니 이 초코빵, 생크림 빵이 더 맛있어 보였는데 형이 제일 맛없어 보이는 그 빵 골랐잖아요. 아까 배고프다고 해놓고서는.”
“필요 없거든.”
성화는 윤호를 앞질러 옥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옥상에 올라가 성화와 윤호는 앉아 가져온 빵을 먹었고 윤호는 성화에게 아까 산 초코우유를 건네며 이거랑 같이 먹어요. 목 막히잖아요. 라고 말했다. 성화는 윤호와 초코우유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진짜..먹어도 돼? 윤호는 싱그럽게 웃으며 당연하죠. 라도 말했다. 그렇게 성화는 윤호가 사 온 빵 자신이 사 온 빵 모두 먹고 하..! 잘먹었다. 라면 누웠다. 윤호는 성화를 따라 누웠다.
“성화형 오늘 시간 있어요?”
“왜.”
“오늘 댄스부 연습 없어서 저희 일찍부터 해도 되는데 형 시간 되시면 일찍 하고 싶어서요.”
라며 윤호는 성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성화는 윤호를 쳐다보며 그래 라며 조금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둘은 일방적이지만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다 그런 대화에 지친 성화가 연습하자며 일어나 연습실로 향했다.
그렇게 또 몇 시간이 지나 성화는 힘든 연습에 지쳐 쓰러지듯 앉아 숨을 골랐다. 그러곤 자신의 앞에서 아직 열심히 춤을 추고 있는 윤호를 보며 말했다.
“야..너 진짜 대단하다..”
“네?”
윤호는 성화의 말에 뒤를 돌아 성화의 옆자리에 앉았다.
“넌 안힘들냐.”
“전 아직 괜찮은데요.”
“와…”
성화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연습실 바닥에 누웠다. 윤호는 누워있는 성화에게 처음 자신들이 만난 날에 대해 이야기 했다.
“형 근데요. 저 형 만나기 전에 슬럼프 왔었어요.”
“알아.”
“네..?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음..나도 한번 그런 적 있었거든. 그때 너 얼굴이 내가 슬럼프일 때 얼굴이랑 똑같았어.”
“형도 슬럼프가 왔었다고요?”
“왜.”
“아니 전 형 처음 봤을때.. 춤추려고 태어난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근데 형도 그런 시기가 있었다니….”
“허…뭐래.”
성화는 부끄러운 듯 연습이나 하자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근데 그때 아까 춤을 추다가 흘린 땀인지 성화의 손을 물기 때문에 성화는 미끄러졌고 성화는 그 순간 무서운 감정에 눈을 감았다. 당연히 바닥에 부딪힐 줄 알았던 성화의 몸은 폭신한 곳에 닿았고 성화가 조심스레 눈을 떴을 때 성화의 몸은 윤호의 품 안에 안겨있었다. 윤호의 손은 성화의 몸을 감싸고 있었고 성화와 윤호의 몸은 서로의 심장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 붙어있었다. 그리고 둘의 얼굴은 숨결마저 닿을 듯한 거리였다. 둘의 눈이 마주쳤을 때 오묘한 분위기는 윤호도 성화도 느꼈을 것이다. 그 오묘한 분위기를 먼저 깬 건 윤호였다.
“형 괜찮아요?”
“어..? 아, 응.”
성화는 몸을 일으키려 빠르게 다시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그리고 성화는 오늘 연습은 여기까지만 하자며 가방을 들고 나갔다. 연습실에 혼자 남겨진 윤호는 아까 성화의 몸을 잡았던 손을 보더니 머리를 한번 넘기고 일어나 연습실을 나갔다.
다음날 윤호는 아침 조회 시간이 끝나고 성화에게 연락을 남겼다. 그리고 점심시간 때쯤 다시 톡을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윤호는 성화가 나중에 연락이 오겠지. 라는 생각으로 기다렸지만, 점심시간이 끝나고 7교시가 끝날 때까지 아무런 연락은 오지 않았다. 윤호는 바로 몇 통의 전화를 걸었지만, 성화는 받지 않았다. 그렇게 댄스부의 연습까지 끝나고 성화에게 기다리겠다고 연락을 남기고 윤호는 8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까지 성화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드르륵.
연습실의 문이 열렸고 거기에는 성화가 서 있었다. 성화는 윤호를 보고 조금 놀란 듯 했다. 윤호는 아까까지 시무룩해 있던 모습은 어디 가고 지금은 성화를 향해 환한 웃음을 지으며 성화를 반겼다.
“형. 왜 이제와요!”
“뭐야…너 왜 아직도 여기 있어.”
“형 기다렸죠.”
“뭐?”
“제가 형한테 톡했잖아요. 기다리겠다고.”
“하아…..”
“야.. 너 내가 톡도 안 보고 전화도 안 받는데, 내가 안 왔으면 어떻게 할뻔했어.”
“근데 왔잖아요. 그럼 된 거 아니에요?”
“야!..너 진짜..“
“전 형 올 거 알고 있었는데.”
성화는 윤호를 힐끗 보더니 자기 가방을 던지고 연습하자고 말했다. 그리고 둘은 늦게 연습을 시작한 만큼 더 늦게까지 연습했다. 이제 해가 거의 다 지고 어두워질 때쯤 둘의 연습이 끝났다. 윤호는 밖을 보며 말했다.
“형, 지금 너무 늦었는데 데려다줄까요?”
“뭐라는 거냐…? 내가 무슨 여자애야?”
“위험하잖아요.”
“아니…필요 없어.”
성화는 가방을 빠르게 챙겼다. 그리고 윤호를 놓고 연습실을 떠났다. 윤호는 그걸 보고 빠르게 가방을 챙겨 연습실 문을 열었는데 .
“형? 뭐해요?”
“어? 아, 그..”
그 앞은 깜깜한 복도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형 혹시 무서워요?”
“뭐래, 아니거든…”
“그럼 저 먼저 갈게요?”
윤호는 그 어두운 복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턱, 윤호는 자신을 잡는 손길에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거기에는 성화가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있었다.
‘가, 같이 가..’
성화는 윤호의 손목을 잡았다. 성화는 많이 무서워 했고 윤호는 그런 성화를 진정시키기 위해 핸드폰으로 후레쉬를 켜 복도를 밝혀주었고 같이 걸으며 학교를 나갔다. 학교를 나와 운동장이 보였을 때도 성화는 아까와 같은 자세로 윤호의 뒤에 서 있었다. 성화는 윤호의 발걸음이 멈춘 걸 알고 고개를 들었을다. 그때 성화는 자신을 보고 있는 윤호와 눈이 마주쳤다.
“다, 다 왔어?”
“네, 형 다 왔어요.”
성화는 윤호와 눈이 마주쳤고 윤호는 급히 손을 놓았다. 그리곤 다시 뒤를 돌았다. 성화가 본 윤호의 뒷모습에선 빨개진 귀가 보였다. 정문에 도착해 성화는 자신의 집 방향으로 몸을 틀어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뒷따라오는 발걸음에 뒤를 돌아봤을 때는 윤호가 눈을 꿈벅거리고 있었다. 성화는 윤호를 째려보며 말했다.
“나 진짜 필요 없다고, 너 집이나 가…제발 시간 늦었어…”
“싫어요.”
“아니..! 내가 무슨 어린애야?”
윤호는 눈을 돌리며 성화의 짜증을 무시했다. 성화의 말에 윤호는 지쳐서 말했다.
“그럼, 집 도착하면 연락 해주기에요. 꼭.”
성화는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았지만 이게 아니면 진짜 윤호는 따라올 기세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약속했다.
성화가 거의 집에 다 도착했을 때 전화가 걸려 왔다.
“형 집이에요?”
“아니 근데 거의 다 왔어.”
“그래요?ㅎㅎ”
“근데 왜 전화했어. 집 오면 내가 연락하는 거 아니었나?”
“그런데 갑자기 형이 잊고 자면 어떻게요…”
“허..ㅋㅋㅋ 그래. 지금 집이야.”
“아 잘 도착했어요?”
“응. 피곤하다…”
“아, 그럼 빨리 자요. 끊을게요. 잘 자요.”
“아, 아! 잠깐만!”
“네?”
“아, 그.. 너도 잘 자라고…”
성화의 마지막 말 후에는 조금 긴 침묵이 찾아왔다. 다음 뚝 전화가 끊기는 소리와 함께 성화는 침대에 누웠고, 눈을 감았다.
잘 풀린 줄만 알았지만 어째서인지 다음 날 성화는 전날과 같이 전화, 연락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전날과 딱 하나 바뀐 게 있었다. 박성화가 오늘 연습실을 오지 않았다는 것. 윤호는 전날처럼 그냥 늦게 오나보다 하는 생각으로 연습실에 남아있었다. 하지만 해가 지고 이제는 어두운 길에 켜져있는 가로등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어둠이 윤호를 덮칠 때까지 윤호는 연습실을 떠나지 않았지만, 학교 경비원분으로 인해 억지로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오늘의 일을 모두 성화에게 이야기했다. 당연히 성화는 보지 않았지만.
윤호는 내가 무언가를 잘못했나, 아님 어디가 아픈가 라는 의문들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또다시 다음날도 똑같은 패턴이 반복되었다. 늦게까지 기다린 연습실에서는 적막한 공기만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성화의 연락이 끊긴 지 3일째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심정으로 윤호는 성화를 아는 선배를 찾아가 집 주소를 물어보았고, 윤호는 학교의 수업 1교시 종이 치기도 전 교실에서 핸드폰만 들고 학교를 나가 곧장 성화의 집으로 갔다.
윤호가 성화의 집을 찾아가는 길은 점점 부서져 가는 주택들로 가득 차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거지동네. 윤호는 가던 도중 주소를 몇 번이나 재확인하였다. 하지만 그 주소는 여기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게 그 주소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창문 몇 개는 깨져 신문지로 막아두었고, 문 주변에는 술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윤호는 경직된 손으로 그 문을 두드렸다.
똑똑.
바로 열리는 문에 당황한 윤호는 조금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문에서 나온 얼굴을 보았고 윤호는 이 상황을 부정했다.
윤호의 바로 앞에 보인 얼굴의 한쪽 눈은 시퍼런 멍에 부어 거의 눈을 뜨지 못했고 입술은 위아래 할 것 없이 뜯어져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윤호는 분간이 안 갔다. 왜냐하면 이런 얼굴을 한 건 다름 아닌 박성화였기 때문이다. 정윤호는 성화의 상태를 보자마자 표정이 뒤바뀌었다. 하지만 그건 정윤호만이 아니었다. 박성화의 처음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지만, 윤호를 보고 성화의 표정은 적잖이 당황한 표정이었다. 무거운 공기 속에서 성화가 먼저 말을 시작했다.
“뭐야…니가 왜 여기 있어?”
“…”
윤호는 성화의 말은 무시한 채 성화에게 다가가 상처 난 얼굴을 만졌다. 윤호의 손길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리고 성화가 윤호의 눈을 바라보았을 때 윤호의 눈은 조금 있으면 눈물이 흘릴 거 같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화는 거기서 의문이 생겼다.
‘얘는 내가 뭔데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난 아무런 가치도 없는데..
왜, 도대체 왜지.’
성화가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성화는 정신을 차렸고 고개를 돌리며 윤호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심하게 다친 부분을 가리며 말했다.
“뭐야, 너 여기 어떻게 알고 왔어..”
“선생님한테 물어봤어요. 근데 학교도 안 왔으니까 걱정돼서 보고 오라고 주셨나 봐요.”
“하아, 그래서 왜 온 건데.”
“형 걱정돼서 왔어요. 3일 동안 제 연락 하나도 안 받고, 학교도 안 오고, 연습실도 안 오고.”
“그럼? 어떻게 이 얼굴로 학교에 가고 연습실에 가서 너를 봐”
“그래도 저한테는 얘기해주셨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저 3일 동안 진짜 연습실에서 형만 기다렸어요.
올지도 모르니까 근데.. 어떻게 그렇게 말해요….?”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 너가 나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
내 다치든 말든 니가 그걸 뭔 상관인데.”
성화는 갑자기 언성을 높이며 화난 표정으로 윤호를 바라보았다. 윤호는 당황한 듯 보였고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성화는 윤호가 상처받았다는 걸 알았지만 더 차갑게 굴었다. 윤호를 귀찮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가라고 말했다.
“저.. 가라고요?
형 저 형이 오늘도 학교 안 왔다는 거 알고 바로 달려왔어요. 걱정..돼서요.
근데 지금 저보고 하시는 말이 그냥 가라는거에요..?
형이 어떻게 그럴 수가있어요..?”
윤호는 조금 있으면 울 거 같은 목소리를 한 채로 떨고 있었다. 성화는 윤호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뒤를 돌았고 빨리 가라는 말만 한 채 문을 닫았다.
윤호는 성화가 자신에게 하는 행동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고 윤호는 이런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더 걱정되는 건 성화의 상태였다는 것이다. 윤호는 돌아오는 길에서부터 집에서까지 단 한 번도 성화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왜 다쳤는지, 그동안 왜 연락을 못 했는지, 자신이 생각하는 성화와의 관계를 성화는 다르게 생각하는지 머릿속에는 성화의 생각으로만 가득 찼다.
성화는 윤호가 간 후 집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다. 쟤가 왜 여길 왔는지 아까 한 말은 무슨 의미였는지 너무 많은 생각들이 들었지만, 성화는 지금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성화는 이불은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로 억지로 잠에 들려고 애썼다.
쿵, 쿠궁.. 끼익
성화는 이불 밖에서 들려오는 큰 소리들에 잠에서 깨었다. 그리고 이불을 걷고 보니 앞에는 술에 취해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자신의 아버지가 보였다. 성화는 이를 꽉 깨물며 그를 쳐다보았다.
“야, 너 뭔데 눈을 그렇게 떠?!”
그는 성화에게 다가와 주먹을 날렸다. 그리고는 무차별적인 폭력이 시작되었다. 입으로는 남에게도 듣지 않을 그런 심한 말들을 하고 손과 발로는 자신을 때리고 있었다. 성화는 이 무식한 폭력을 맞으면서 생각했다.
‘내가…내가 왜 이러고 있지. 이럴 거면 그냥 죽는 게 좋지 않을까. 진짜 내가 뭘 잘못했길래 이런 걸 당하고 있지.’
이런 생각 어두운 생각들에 묻혀 성화는 점점 눈을 감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윤호와 그동안 연습실에서 같이 춤을 추고 학교 수업을 땡땡이치고 둘이 놀고 한 일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윤호가 아까 가기 전 자신을 바라보던 걱정스러운 눈빛이 생각나며 윤호가 보고 싶어졌다.
성화는 자신에게 남아있던 힘으로 그를 밀어내고 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얼마나 뛰었을까 뒤를 보기는 무서워 앞만 보고 달리던 찰나 성화는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온몸이 떨려왔다. 자신의 뒤에 그가 있을까 봐 자신을 따라왔을까 봐. 성화는 덜덜 떨며 고개를 올렸다. 거기에는 가로등이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성화는 이제야 안심하고 자신의 주머니에서 가지고 나온 휴대폰을 꺼냈다. 시간은 새벽 4시가 넘어가고 있었고 휴대폰을 보았을 때 거기에는 3일 동안 윤호가 성화에게 보낸 카톡 알람이 떠 있었다. 성화는 그 카톡을 보며 점점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을 보았다. 성화의 무릎은 다 까져서 피가 나고 있었고 손과 팔은 바닥에 쓸려 흙과 먼지가 잔뜩 묻어있었다. 이제야 밀려오는 아픔에 성화는 눈물이 났다. 그리곤 왜인지 자꾸 윤호가 보고 싶어졌다. 성화는 핸드폰을 들어 윤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륵
뚜르르르륵
…
몇 번의 신호가 갔지만 윤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성화는 끊지 않고 기다렸다. 하지만 그 신호가 점점 길어지며 성화는 아까 자신이 윤호에게 했던 말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게 생각났다.
성화는 더 이상 윤호와 볼 수 없는 거겠냐는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그 울음소리가 점점 커져 신호가 들리지 않을 때쯤 갑자기 휴대폰에서 윤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어…성화형?”
윤호는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성화의 이름을 불렀다. 성화는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당황하여 울음을 멈추고 자신의 핸드폰 화면을 보았다. 거기에는 윤호의 이름 아래 신호 중이라는 문구가 아닌 시간이 표시되고 있었다.
“형? 형 맞아요?”
다시 들리는 윤호의 목소리에 성화는 울음을 터트렸다. 믿기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성화의 전화를 받아서일까 둘중 아무거나 상관없었다. 그냥 윤호의 목소리를 듣고 난데없이 눈물이 흘렀다.
“형, 뭐에요.
왜 울어요.
형 왜요? 또 무슨 일 있어요?
왜 울어요……”
윤호는 지금 우는 게 성화가 맞는지 왜 울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계속 울고 있는 탓에 아무런 답을 얻을 수 없었다. 윤호는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고 조금의 침묵을 갖다가 성화에게 말했다.
‘지금 어디예요.’
성화는 아까까지와는 달라진 목소리에 잠시 울음을 멈추고 자신의 위치를 말했다.
‘나 OO학원 옆 골목 쪽 계단, 보고 싶어.‘
성화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고 처음으로 자신이 윤호에게 말한 진실된 마음이었다. 윤호는 갈게요. 라는 말을 하고 바로 갈 준비를 했다. 그때 성화가 말했다.
”끊지 마! 전화 끊지마…..
나 무서워…
여기 골목이라 무서워…“
성화는 두 손으로 핸드폰을 꼭 쥐고 말했다. 전화기 너머에서 윤호가 말했다.
‘형 괜찮아요. 저 전화 안 끊을 거고, 진짜 5분이면 가니까 제발 울지 마요.’
성화는 작게 대답한 후에 핸드폰 너머에서 들리는 윤호의 소리만 의지한 채 윤호를 기다렸다. 3분? 4분? 정도 되었을 무렵 앞에 보이는 윤호의 모습에 성화는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그리고 윤호는 성화에게 다가가 안겼다. 성화를 안은 채 달려와 차 있던 숨을 몰아쉬며 성화를 더욱 꽉 안았다. 조금 진정된 후 윤호는 말했다.
“형 죄송해요. 제가….
형이 잘못한게 아닌데..
그때 제가 갔었으면 안 됐는데 진짜 너무 죄송해요….”
윤호는 울며 성화에게 말했다. 계속 죄송하다고 미안하다고. 성화는 윤호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말하는지도 몰랐지만, 자신을 꽉 안은 이 윤호의 품이 너무 따뜻해고 미안해서 성화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아니야..나도 미안해, 내가 미안해….
내가 그냥 다 미안해…진짜 그냥 너가 이런 내 모습 보는 게 싫어서 그랬어…..
너가 싫어서 그런 말을 한 게 아니라……
나의 이런 모습이 나도 싫은데 너는….너는 얼마나 싫겠어..”
성화는 울음으로 인해 다 뭉개져 가는 발음이었지만 계속 말했다. 윤호는 몸을 조금 떨어뜨려 성화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하지만 계속 아프게 우는 얼굴에 눈물은 멈출 기미가 안 보였다. 계속 닦아주던 윤호는 자세를 바꾸려고 안았던 성화를 잠시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성화가 윤호를 계속 끌어당기며 말했다.
‘왜….피해..
안아줘.’.
윤호는 그런 성화가 귀여워 조금 장난을 쳤다.
‘그럼 안 울면 안아줄게요, 눈물 그만.’
그리고 윤호가 성화에게서 몸을 떼니 조금씩 진정하던 성화의 눈에서는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윤호는 급하게 성화를 다시 안아주며 장난이라고 말하며 울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둘은 사소한 장난으로 긴장이 풀렸다. 긴장이 풀린 성화는 자신이 겪어온 가정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성화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폭력을 당하는 어머니를 보며 커왔지만 기죽으며 살지 않았다. 집이 잘사는 것도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자신을 사랑으로 돌봐주시는 어머니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성화는 어렸을 때부터 춤을 좋아했고 어머니는 그런 성화를 매일 응원했다. 그래서 성화는 춤 동아리로 유명한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처음 동아리에 갔을 때 모든 사람들이 성화의 춤을 보고 놀랐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성화는 동아리의 1학년 중 리더로 불리며 자신의 춤 실력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행복이 있다면 불행도 있는 걸까? 그렇게 2학년이 시작하던 시점에서 성화의 불행이 시작되었다. 바로 자신을 그렇게 아끼고 사랑해 주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었다. 원인은 자살. 고등학교에 다니고 나서부터 성화는 집에 많이 들어가지 않았다. 늦게까지 연습하고 친구의 집에서 자거나 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어머니의 전화를 받지 못한 일 또는 연락을 씹은 일들이 있었다. 그게 성화의 불행을 일으켰던 걸까. 그렇게 며칠 동안 방에만 처박혀 자고 또 자고 또 잤다. 매일 일어나 바깥을 바라보면 어떤 날은 노을이 있고 어떤 날은 보름달이 있었다. 그러면 밖으로 나가 천천히 걸었다. 그러다 질 나쁜 애들과 놀며 그 일을 잊으려고 애썼다. 그리곤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눈을 감았다. 이게 성화가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성화는 어머니의 일이 모두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힘듦을 알면서도 춤을 선택했다는 생각에 정말 더 이상 춤을 출 수 없을 거로 생각했다. 어머니의 수첩을 열어보기 전까지 말이다. 성화는 눈을 감아도 잠이 안 오는 그런 날 어머니의 화장대를 바라보며 누워있었다. 그러다가 눈에 띈 하나의 수첩 성화는 홀린 듯 그 수첩을 펼쳐보았다. 그곳에는 그동안 성화의 공연 사진들이 붙여져 있었고 그 사진 옆에는 그날의 날짜와 어머니의 감상이 쓰여 있었다. 그렇게 하나하나 읽으면서 성화의 눈은 점점 눈물로 흐려졌다. 어머니의 수첩 마지막 페이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우리 아들은 춤출 때 제일 멋있어.’
성화는 곧장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나가 공원으로 향했다. 새벽이라 아무도 없는 공원에서 음악 하나를 틀고 정말 자신이 내키는 대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렇게 노래가 끝나고 성화는 그 바닥에 주저앉아 차오르는 숨을 몰아쉬었다. 성화는 그동안 자신이 춤을 포기하려고 해던 생각들이 정말 쓸모없는 짓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다시 댄스부의 동료들을 볼 면목 따윈 없었다. 그래서 밤늦게 몰래 연습실을 사용했었다. 처음에는 문이 잠겨있어서 창문이나 다른 곳으로 들어갔었는데. 언제부턴가 문이 잠겨있지 않은 걸 보게 되었다. 성화는 그 배려가 너무 고마웠지만 아직도 동료들을 볼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몇 개월 동안 혼자 연습을 하다가 윤호를 보게 되었다고 얘기했다.
윤호는 성화의 얘기가 끝나자마자 성화를 안았다. 어째서인지 윤호의 몸은 떨고 있었다. 성화는 갑자기 안겨져 당황했지만, 순간 떨리는 윤호의 몸을 느끼고 윤호를 안았다.
“형, 제가 이때까지 아무것도 몰라줘서… 죄송해요..
제가 진짜 아무것도 모르고….”
윤호는 울먹거리며 말했다. 윤호는 알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기댈 수 없는 상황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윤호는 그런 상황을 성화로 인해 견뎌냈다. 하지만 성화에게는 자신이 힘이 되지 못했다는 그 사실이 너무 미안했다.
성화는 그런 윤호를 보며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을 느꼈다. 바로 사랑받는 감정. 누군가가 나의 고통을 공감해 주고 위로해 주며 나를 정말 소중한 존재로 여겨주는 것이 너무나 오랜만이었다. 성화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는 자기를 아낄 수 없었다. 근데 나와 그저 몇 주? 정도 본 윤호가 나를 그런 감정으로 위로해 주고 있다는 것에 윤호에게 많은 감정들을 느꼈다. 그리고 알았다. 자신이 윤호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성화는 충동적으로 윤호의 얼굴을 잡고 윤호의 볼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댔다. 그리고 입술을 떼고 성화가 윤호를 쳐다보았을 때 윤호는 성화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내렸고 윤호의 귀는 빨개져 있었다. 조금이 정적이 흐르자, 성화가 민망한 표정으로 윤호의 뒤통수를 보며 싫어..? 라고 말했다. 윤호는 큰 한숨을 쉬며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말했다.
“아, 아니 그, 갑자기 이러면… 어떻게요……”
“왜, 진짜 싫어?”
윤호는 고개를 들며 말했다.
‘아닌 거 알잖아요..’
성화는 윤호를 보며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윤호는 웃는 성화를 째려보며 입술을 내밀었다. 성화는 웃음이 조금 진정되었을 때 윤호를 쳐다보며 말했다.
“근데, 너는 내 가족이 저런 사람인데… 상관없어?”
“네?! 저런 사람이 어떻게 형 가족이에요..!
그리고, 전 형만 있으면 돼요.”
성화는 윤호의 말을 듣더니 얼굴이 빨개졌다. 그리고 흔들리는 눈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말했다.
“너.. 뭔소리를 하는 거야….”
성화의 그런 모습을 보고 윤호는 이제야 자기가 한 말이 생각나며 당황하며 말했다.
“아, 그 어… 그게 그런 뜻으로 말한 게…아니라..!!”
성화는 당황한 윤호의 모습이 웃겼는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웃었다. 윤호는 성화의 가까이에 가서 왜 웃어요! 뭐에요..! 라며 말했다.
성화는 얼굴을 가리던 손을 내리며 말했다.
‘아니,
나도 너만 있으면 돼.’
누구든 그런 시기가 있지 않은가. 이런 힘듦은 나만 알 거 같고 아무도 나의 이런 힘듦을 공유할 수 없을 때 그럴 때일수록 누군가가 필요하다. 내 힘듦, 아픔을 공감해 주는 상대가 아닌, 그냥 지금의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 여름은 둘의 인생이 잊을 수 없는 하나의 이야기처럼 남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더운 여름 자신들에게 시원한 얼음물을 가져다준 사람이 아닌 옆에서 자신도 더워 땀을 흘리고 있지만 손으로 나를 부채질 해주던 그런 사람이었다.
성화에게 윤호는
윤호에게 성화는
WARNING: 폭력 소재 주의. 낫섷이 서로를 죽도록 팹니다.
*
학교에서 시비가 붙어 맞고 돌아온 초등학생 아들에게. 맞고 다니지 말라며 -그리고 차라리 때리는 쪽이 되라며- 복싱 학원에 보내는 아버지는 지구에 얼마나 계실까.
터무니없는 잡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산은 종종 떠올렸다. 캠퍼스 구석 잔디밭에 누워 구름을 볼 때나, 자기 전 침대에 들어가 이불을 덮고 있을 때나,
지금처럼 실컷 두들겨 맞고 링 위에 뻗어 있을 때나.
"최산! 당장 일어나!"
아.
무슨 1라운드부터 다운이냐.
Round 1 - Dance on the floor, dance
그의 존재를 산이 인식한 건 전날 계체량(*현 체중이 체급에 맞는지 경기 전에 측정하는 것)이 있던 때였다. 전국 곳곳에서 모인 대학부 선수들이 줄줄이 소시지가 되어 체중계 위로 올라가고 내려오는 지루한 시간. 트렁크 한 장 덜렁 걸친 징그러운 사내놈들밖에 보이지 않는 갑갑한 공간.
하루빨리 벗어나고픈 그곳에서 지난 몇 년간 잊고 지냈던,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 강렬하게 각인된 이름이 들려온 것은 필시 운명일 것이라고. 산은 아직까지도 그렇게 믿었다.
"박성화, 웰터급."(*66.68kg 이하)
"?!"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퍼뜩 고개를 돌렸지만 산의 눈에 보이는 것은 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뒤통수들 뿐이었다. 아니. 체중계에서 내려와 유유히 자리를 떠나는 바로 옆줄의 남자가, 추억 속 첫사랑의 얼굴을 하고서 산을 스쳐지나갔다.
단정하게 내린 흑발을 찰랑이며 걸어가는 모습은 그때 그 시절과 흡사하면서도, 복싱선수 특유의 담대함과 함께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몇 가닥 내려온 산의 앞머리가 바람에 작게 흔들렸다. 향수라도 뿌렸는지 그가 지나간 길에는 꽃바람이 일었다.
그대로 얼이 빠진 산은 제 뒤에 줄선 사람이 짜증을 낼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 행님아. 뒤늦게 불러보았지만 저만치 멀어진 그는 산을 돌아보지 않은 채 자리를 떠났다.
심판의 카운트가 멈추고 관객석의 함성이 높아진다. 뭉툭한 글러브 끝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난 산이 푸르르 고개를 털어 젖은 머리카락에서 땀방울을 흩었다. 경기 재개를 기다리는 상대는 고압적으로 턱을 치켜들고 산을 내려다봤다. 래프트 훅이 제대로 들어간 산의 이마에 오른쪽 눈썹 위 붉게 찰과상이 피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일어나 다친 쪽 눈썹을 들어보인 산이 속으로만 기겁한다. 더운 숨을 내뱉는 그의 입 속 마우스피스가 은색으로 반질반질 빛나고 있었다. 전날 보았던 단정하고 뽀송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왁스로 쓸어넘긴 헤어스타일과 함께 날티를 풀풀 풍기는 그가 여유롭게 혓바닥을 내밀어 제 입술을 쓸었다. 곧이곧대로 도발에 넘어가는 산이 빠직 눈살을 찌푸렸다.
크게 벌어진 입매에서 그대로 입꼬리를 끌어당긴 성화가 눈을 치뜨고 자세를 잡았다. 섬짓 몸을 긴장시킨 산도 곧바로 가드를 들었다. 또다시 얼굴을 노리고 날아오는 펀치. 맞붙은 두 글러브에서 펑 하고 요란한 소리가 났다.
훅-
"힉,"
이번에도 간신히 피했다. 스텝을 밟는 산의 뒷발이 발목의 각도를 확실히 정하지 못해 갈팡질팡했다. 확고한 눈빛을 번뜩이는 성화와 달리 산은 동작 하나하나에 고민하고 있었다. 최근에 스타일을 바꾼 영향이 컸다.
메타고 상성이고. 나라는 캐릭터의 고유한 특성이 있는 건데. 앞뒤 꽉 막힌 코치는 산의 인파이터 기질을 싫어했다. 경기를 안정적으로 운영해 메달을 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제아무리 퍼포먼스를 뽐내며 화려한 경기를 보여준들 성적이 안 나오면 복싱선수로 먹고살 수 없다며 순진한 대학 새내기를 제 입맛대로 다뤘다.
퍼억-
"끕...!"
내 갈비! 산은 입안의 마우스피스를 꾹 깨물고 통증을 견뎌냈다. 전국체전 준결승전이라는 중요한 경기만 아니었다면 산은 링 밖으로 뛰쳐나가 코치에게 소리를 빽빽 질렀을지도 모른다. 제가 해오던 방식대로 훈련했다면 성화를 상대로 이렇게 고전할 일이 없었을 거라고. 산은 마구 따지고 싶었다.
성화는 지금의 산이 어설프게 흉내내고 있는 아웃복서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적당히 거리를 유지한 채 상대의 주위를 돌며, 긴 리치를 이용해 야금야금 체력을 깎아먹는. 우아하고도 지능적인 플레이.
길고 가늘어 시원하게 뻗은 다리로 가볍게 스텝을 밟으며 예기치 못한 틈을 파고드는 성화의 플레이는 마치 한 마리 나비처럼 춤을 추는 듯했다. 그리고 산은 그 살랑대는 움직임에 놀아나는 새끼 고양이였다.
그리고 동시에 성화는, 상대와의 거리를 좁혀 빠른 공격을 쏟아붓는 인파이터에게 약한 상성을 갖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이 부류의 선수들은 산의 밥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했다.
그때의 기억을 살려 상대하려다가도. 자꾸 파고들지 말라는 코치의 한껏 성난 목소리가 산의 머릿속에서 울리며 그를 망설이게 만들었다. 학교의 이름을 걸고 나온 대회에서 과연 전속 코치의 지시를 어길 수 있는가. 그 상태로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가. 마음처럼 흘러가지 않는 경기가 산은 당황스럽고 곤란했다.
"크윽, 헉-"
펑.
분명히 가드를 들어 공격을 막았음에도 어딘가 반 박자쯤 느렸다. 아웃복서로서 정면승부를 하기에는 경기의 운영방식과 숙련도 차이가 확연히 드러났고. 어쩌다 공격에 성공해도 기습적으로 들어오는 카운터 펀치가 산에게 불리한 교환을 만들었다. 이대로라면 산이 성화를 이길 가능성은 희박했다.
행님. 아무리 경기라고 해도 글치. 내를 우예 이만치 줘팬단 말입니꺼. 라운드 말미에 다다르자 산은 서럽기까지 했다. 그게 당연한 것이자 저에 대한 예의임을 알아도 사적인 감정은 일체 느껴지지 않는 프로다운 성화의 태도가 산은 내심 서운했다.
땡땡땡. 내내 처맞기만 하다가 1라운드가 끝났다. 비틀대며 링 귀퉁이로 온 산에게 코치는 너의 플레이가 이러니 저러니 알아듣기 어려운 온갖 전략을 쏟아냈다. 침 튀기는 열변을 한 귀로 흘려보내며 산은 찬물을 삼켰다.
짧은 휴식시간이 끝나고. 땀 닦은 수건을 링 아래로 던진 산이 건방지게 한 마디 툭 던지고 갔다. 뭐라 소리치려다 만 코치가 뒷목을 잡았다.
"됐고 마. 걍 내 방식대로 할랍니더."
두들길수록 단단해지는 쇠가 뜨겁게 빛나듯이 날카로워진 산의 눈 또한 투지로 이글거렸다. 멀찍이서 그 시선을 마주한 성화가 찡그린 얼굴로 씩 웃었다. 산도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고.
Round 2 - 총알보다 빨라 내 주먹이
"잘 들어라 산아. 니는 이제부터 맞는 거에 익숙해져야 한다."
"네에?!"
"내 아프게는 안 때린다. 그니까 피하지 말래이."
"ㅅ, 살려. 싫슴다 관장님. 살려주이소!"
복싱 학원에 등록해 기본 스텝만 죽어라 익히고. 드디어 주먹 좀 써보겠구나 싶었을 때 청천벽력같이 떨어진 관장님 말씀에 산은 냅다 뛰었다. 그래봤자 네모난 링 안에 갇힌 초딩에 불과했으니, 아프다기보다 기분나쁜 주먹에 팡팡 맞으며 데굴데굴 굴러야 했지만.
산보다 한참 큰 형들이 득실득실한 학원은 거칠었고 무섭기도 했지만. 덕분에 산은 깡다구 하나는 끝내주는 녀석으로 자라났다. 맷집은 말할것도 없었다.
주먹만 치켜들어도 여자애마냥 꺄악 비명을 지르던 겁쟁이가 중학생 형한테 선빵을 맞아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미친놈이 되기까지 산은 아동인권따위 없던 그시절의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어쨌거나. 아버지 때문이든 뭐든 대한남아 최산은 참을성 있게 견뎌냈고, 자연스럽게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복싱부에 들어가 선수활동을 시작했다.
복싱선수의 주먹은 흉기나 다름없으니 함부로 휘두르면 안된다고. 관장님께서 누누히 강조하셨건만 산이 그를 완전히 깨닫게 된 건 그 손으로 직접 위력을 확인해본 뒤였다.
"저기..."
"넹?"
"미안한데. 돈 좀 빌려줄 수 있어?"
먹음직스럽게 설탕까지 뿌려진 휴게소 통감자를 오물대던 산이 동그랗게 뜬 눈으로 제 앞에 선 소년을 바라봤다. 조곤조곤 말하는 입술부터 오똑 선 코, 맑은 빛으로 반짝이는 눈망울까지. 작고 동글동글한 얼굴에 그게 다 야무지게 들어차 있었다. 와. 엄청나게 예쁜 형이다. 처음 든 생각이 이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뒤늦게 상황파악. 내한테서 삥을 뜯겠다고? 하는 삐딱한 생각도 들었지만 주눅 든 소년의 태도는 오히려 뜯기면 뜯겼지 뜯을 상은 아니었다. 합. 감자 한 알을 입에 넣은 산이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렸다.
어라, 그 생각을 하고 나니 배경에 불과했던 남자애들 무리가 산의 눈에 들어왔다. 이쪽을 손가락질하고 저들끼리 키득대는 기척을 느낀 소년이 움찔 몸을 떨었다. 가늘게 눈을 뜬 산이 꼴딱 입안의 감자를 삼켰다.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도와주까요?"
"도와줘?"
"돈 필요한 거. 점마들 때문에 그런거죠."
"..."
"내가 콱 조사버리면 되긋네. 안 그래요?"
2라운드가 시작되자마자 들이받듯 돌진한 산이 주먹을 난사했다. 순발력 좋게 첫 공격을 피한 성화였지만 1라운드와는 전혀 다른 산의 전술에 당황해 빠르게 이어지는 다음 공격에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두툼한 글러브로도 막을 수 없이 광범위하게 쏟아지는 주먹에 몇 방 유효타를 먹은 성화가 링 구석으로 몰렸다. 링 위를 지배하는 기세. 무자비하게 전해지는 타격감. 그래 이 느낌이야. 한껏 몰입한 산이 힘있게 발을 디뎠다. 여기서 한 방 제대로 먹이면-
"컥,"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는 경기에 관중들이 환호했다. 공격에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순간방어에 불리한 스텝을 밟은 산이 옆으로 빠르게 이동하는 성화를 맞추지도 피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카운터를 맞았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서면 최산이 아니지. 얼굴을 가격당해 상체가 휘청이면서도 빠르게 무게중심을 옮긴 산이 짧게 끊는 스텝으로 다시 성화와의 거리를 좁혔다. 예상대로 옆구리를 노린 공격을 막고 남은 손으로 빠른 잽을 날렸다. 그에 지지않고 끈질기게 다음 공격을 전개한 성화가 사이좋게 한 대씩 치고 맞는 러브샷 구도를 만들었다.
얼굴을 맞은 둘이 동시에 주춤 물러나며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비처럼 쏟아지는 땀방울 사이로 조금 더 끈적한 액체가 산의 윗입술에 맺혔다. 입안으로 불쾌한 비린내가 퍼졌다.
심판이 경기를 잠시 멈추고 산에게 경기를 계속할 의사가 있는지 물었다. 산은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메달 색이 걸린 경기에서 겨우 이정도로 물러날 수 없었다.
대충 팔뚝으로 코피를 닦아낸 산이 뺨에 가깝게 든 가드 사이로 히죽 웃어보였다. 그게 너답다는 듯 성화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 징글징글한 놈이라고 속으로 감탄이라도 하는지 조금 찌푸려진 눈썹과 함께.
"커헉. 컥,"
"후-"
"우욱!"
산의 인파이터 기질이 깨어나 점점 더 몸에 붙었다. 더킹(*Ducking. 오리처럼 상체를 숙여 공격을 피하는 기술.)을 즐겨쓰는 성화에게 있어 자세를 낮추고 돌격해오는 산은 상대하기 한결 까다로운 상대가 되어버렸다. 머리가 덜 노려진다는 점이 위로 아닌 위로랄까. 하지만 몸통에 누적된 충격이 점점 견디기 어려워졌다. 치솟는 아드레날린 속에서도 통증이 느껴질 정도면 내일은 거의 앓아눕겠지. 성화는 반쯤 체념했다.
그만, 그만, 그만 좀 붙으라고! 대각선 뒤로 콩콩 뛰는 성화의 스텝이 쫓기듯 조급해졌다. 온 몸을 던져 날아오는 산의 일격을 성화는 매번 흘려내고 있었지만, 링 전체를 자유롭게 휘젓고 다니는 그의 도약에 의해 제 연속적인 동선이 죄 끊어먹히고 있었다. 체중이 실린 묵직한 펀치는 분명히 막아냈음에도 관통당한 것처럼 가드 너머까지 얼얼했다.
상성에서 불리해진 성화는 매 순간 최선을 다했음에도 경기의 흐름을 산에게 조금씩 빼앗겼다. 확고한 스타일을 가진만큼 성화도 인파이터를 견제하는 훈련을 해 왔지만, 아무리 피하고 때리길 반복해도 지치지 않고 달라붙는 저 놈은 어떻게 해야하나 막막했다.
"쿨쩍."
"...!"
끝까지 산의 얼굴 주변을 떠나지 않는 가드와 코 훌쩍이는 소리에서 성화는 하나의 답을 찾아냈다. 프로씬이 아닌 이상, 선수의 출혈이 계속되면 산이 아무리 괜찮다고 한들 심판의 판정 하에 경기가 종료될 수 있다. 맷집은 어떻게든 늘린다쳐도 그건 못 막겠지. 이제부터 얼굴만 노린다.
번뜩이는 성화의 눈빛을 본 산이 흐릿한 잔상만 남기고 달려들었다. 약점을 들켰다는 걸 또 알아채는 눈치가 어쩜 이렇게 귀신같은지. 단 하나의 승부수를 차지하기 위해 두 선수가 치열하게 맞붙었다. 체육관 벽과 바닥을 울리는 타격음이 만발했다.
귀를 멍멍하게 하는 함성 속에서 성화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갔다. 최산 이 미친놈이 제 경기 분석과 계획따위 깡그리 무시한 채 냅다 가드 내리고 난타전을 벌인 탓이었다. 야, 네가 여기서 가드를 왜 풀어?! 너 한대라도 잘못 맞으면 끝장이야. 혼 좀 나볼래-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줘 샌드백마냥 무방비하게 두들겨 맞으며 성화가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정확히 얼굴로 들어오는 공격을, 고개만 숙여 정수리로 받아낸 이 또라이만 아니었다면 성화는 여기서 어렵지 않게 TKO 승리를 따냈을 것이다.
"끅-"
뻑 하는 둔탁한 소리가 마침표처럼 강렬하게 경기의 흐름을 끊었다. 헉 하고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관중석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저거 괜찮은거야? 맨 앞열에 앉은 여자의 목소리를 들은 성화가 칫 코웃음을 쳤다. 저게 괜찮겠냐.
헤드기어도 없이 머리에 스트레이트가 꽂힌 산이 휘청이며 뒤로 물러났다. 간신히 당장의 판정패만 피했을 뿐. 머리에 받은 충격은 쉽게 무시할 것이 못 되었다. 3라운드가 남은 걸 생각하면 산의 선택은 썩 좋은 것이 아니란 것을 성화도 알았다.
반격을 허용해 패색이 짙어진 지금. 3라운드에서 무력하게 두들겨 맞느니 지금 기권하는 것도 산에게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성화는 생각했다. 우리, 잘 싸웠잖아. 일단 메달은 확보했잖아.
(*전국체전의 복싱 경기는 4위도 3위와 같이 동메달을 받는다. 한 대회에 동메달이 2개인 셈.)
무릎이 꺾인 산이 주저앉기 직전, 운좋게 땡땡땡 종이 쳤다. 구석에 몰려있던 성화는 등 뒤의 기둥에 몸을 기대고 참고있던 숨을 터뜨렸다. 헉, 헉. 두어번 숨을 몰아쉬자 물병을 들고 다가온 코치님이 입 벌리라 손짓했다.
1분밖에 되지않는 피같은 휴식시간. 물 한 모금 마시기도 전 성화는 아직까지 링 중앙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산에게 다가갔다.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돌발상황에 링 주변엔 긴장감이 감돌았다.
턱 밑에 상대의 글러브가 들어왔음에도 맥을 못 추는 산의 눈은 흐리멍텅했다. 다운된 상대를 모욕하는거냐며 곳곳에서 야유가 터져나왔다. 산의 턱끝을 밀어 고개를 들게 한 성화가 산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했다. 산이 움찔 눈꺼풀을 떨었다. 웅웅 울리는 머릿속에서 그의 목소리만은 선명하게 들렸다.
"내가 여기 있는데. 그래도 포기할거야?"
성화가 굽혔던 무릎을 펴 일어났다. 그와 함께, 산도 성화에게 들린 턱끝을 따라 실 달린 인형처럼 스르르 일어났다. 서로를 죽어라 패는 잔혹한 스포츠에서 좀처럼 나오기 힘든 그림이었다.
관중들이 작게 술렁였고 만약의 돌발상황을 제지하기 위해 가까이 있었던 심판은 이새끼들 뭐지 하는 눈만 꿈벅였다. 얼핏 보기엔 그저 훈훈한 광경이었지만, 무시할 수 없는 묘한 분위기가 산과 성화에게서 감돌았다.
쏟아진 향수에서 퍼져나오는,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짙은 향내에 잠식된 것처럼 사람들은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거나 코 밑을 쓸며 인상을 찡그렸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완벽한 정적이 견고하게 링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서로의 호흡과 심장 박동만이 들리는 링 위에서 산이 성화의 어깨에 제 팔 한짝을 걸쳐 기댔다. 곧게 선 성화도 산의 어깨에 툭 손목을 올려놓았다.
산의 어깨에 올린 팔을 당긴 성화가 제 뒤편 산의 코치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그를 보냈다. 여전히 초점 없는 눈을 하고 있었지만 산은 천천히 걸어갔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성화도 제자리로 돌아갔다. 반대 방향으로 서로를 스쳐지나가는 산과 성화의 옆모습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전광판 화면에 가득 들어찼다.
링 귀퉁이에 다다르기 전 문득 산이 뒤를 돌아봤다.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상처난 산의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냉정하리만치 완전한 뒷모습만을 보여주고있는 성화에게 머문 시선을 산은 쉽게 떼어내지 못했다.
코치에게 물병을 건네받은 산이 뒤늦게 생수를 들이켰지만 이상하게도 소용이 없었다. 물로는 충족할 수 없는 갈증이 생긴 것만 같았다.
이새끼들 뭐지?
나 최종호. 타이트한 흰색 와이셔츠와 깜찍한 리본 넥타이를 훌륭하게 소화해내는 갭모에 끝판왕 복싱 심판이다. 용돈벌이 삼아 시작했던 심판 경력도 어느덧 2년차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내가 보고 들은 게 없어도. 이딴 상황은 대체 뭔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이 악물고 서로를 공격하던 게 1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뜬금없게 이 무슨 게이 퍼포먼스란 말인가. 둘이 사귀기라도 했어? 그렇지 않고서야 전국대회에서 맞붙기 전 일면식도 없었을 두 학생에게서, 어떻게 전생의 연인같은 분위기가 나는거지?
...아아. 그냥 이해하지 말자. 알아봤자 기분만 더러워질 것 같다. 지금도 충분히 불쾌하니 그만두자고. 당신들도 이제부터는 진지하게 임하는 거야. 제발. 응?
휴식시간 끝. 마지막 3라운드 시작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삑 울렸다.
Final Round - 그 끝에는 누가 서 있는지
"느그가 우리 행님 괴롭혔나!"
"야. 뭐냐 쟨?"
"산아, 이럴 필요 없어. 그만-"
"친구 돈이나 뺏고, 이 나쁜새끼들. 마, 덤비라!"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아 카랑카랑한 어린이 목소리가 제법 당찼다. 체격 좋은 남중생 셋을 앞에 두고서도 산은 주눅들지 않았다. 그 뒤에 선 성화만 커지는 판 속에서 안절부절 못 하고 있었다.
고속버스 타고 수학여행 가는 길, 잠시 들른 휴게소에 저희 중학교 2학년 말고 누구 또 아는 놈이 있단 말인가. 산의 출처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녀석들은 삥뜯을 놈 하나 더 생겼다고 히죽댔다.
야 박성화. 눈깔에 힘 안빼냐? 가운데 선 놈이 건방지게 말했다. 제 어깨를 잡은 성화의 손에 꾸국 힘이 들어오는 것을 산은 느낄 수 있었다. 성화를 돌아본 산이 비장한 눈을 하고 말했다.
"행님아. 맡겨만 주이소."
"안돼. 네가 낄 필요는- 아, 최산!"
성화 몫까지 용기를 낸 산이 성화의 손을 뿌리치고 무리에게 달려들었다. 아악! 거리를 좁히자마자 한 대 맞고 나가떨어지는 산의 모습에 성화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게 너는 왜 생판 남 일에 끼어들어서 이 고생이야. 서럽게 눈썹을 늘어뜨린 성화가 바닥에 엎어진 산을 일으켰다. 어, 그런데 고개를 든 산은 웃고 있었다.
"니가 먼저 쳤제, 이제 내가 칠끼다."
"뭐래 이 새끼가. 안 꺼ㅈ-"
방금 상황 덕에 더더욱 방심해 대충 머리채를 잡아채려는 손을 산이 잽싸게 피했다. 그리고 낮춰진 자세를 이용해 그대로 어퍼컷. 빡 하는 타격감 사이로 잇새가 딱 다물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녀석은 뒤로 넘어간 그대로 뻗어버렸다.
"히익...!"
"맞다. 얼굴은 안 칠라고 했는디. 내도 모르게 쳐뿟네."
성화만큼 기겁하지는 않았지만 산도 제 몸의 위력에 조금은 당황했다. 주먹질을 배운 이후로 몸싸움을 한 일이 없어서 몰랐는데, 저보다 덩치도 큰 놈이 이렇게 맥없이 뻗을 줄이야.
"미친. 저 새끼 운동 배웠어. 튀어!"
"이 씨발!"
만화 속 악당들처럼 깔끔하게 사라져준 문제아들을 뒤로하고. 성화가 산의 두 손을 잡았다. 사람을 쳐 붉어진 손등뼈를 살살 쓰담는 성화의 엄지손가락이 간지러웠다. 한쪽만 맞았는데 볼따구는 왜 둘 다 간지럽지. 부끄러워 뺨을 붉힌 산이 입술을 오물대며 젖살이 통통한 뺨을 씰룩댔다.
"너 정말 운동해?"
"예에. 복싱부인데요."
산이 짧게 대답하자마자 어머니처럼 인상을 찌푸린 성화가 찰싹 산의 팔을 때렸다. 선수가 사람을 치면 어떡하냐고. 잘못됐다간 선수생활 다 꼬인다고 뻔한 잔소리를 늘어놓는데, 그것조차 처음인 중1따리 최산은 푹 숙인 고개를 꾸닥이며 잘못했다고 반복했다. 어휴 한숨을 쉰 성화가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가야 할 시간이다.
"그래도 고맙단 말은 해야겠지. 고마워 산아. 돈은 못 돌려받아도 이렇게 혼쭐내주고. 감자도 나눠주고."
"그건 행님이 다 뺏어먹은거- 아, 아입니더."
"우리 중학교는 서울에 있어서 앞으로 만나기 힘들겠지만.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잘 지내야 돼. 알았지?"
"저도요. 꼭 최고의 복싱선수가 돼가꼬! 행님 만나러 서울 올라갈낍니더."
"에이. 서울도 얼마나 넓은데, 거기서 어떻게 만나겠다고."
"내도 알그등요. 같은 촌놈끼리 무시하긴."
"어. 사투리 억양 티 나? 전학온지 꽤 됐는데."
"티 나요. 갱상도 사람을 내가 몬 알아보겠나."
마지막으로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주고받다 쿨하게 헤어진 산과 성화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삶을 이어나갔다. 그 다음해에 성화가 복싱을 시작하게 된 것도. 꾸준히 실력을 쌓은 산이 정말로 인서울한 것도. 이번 전국체전이 열리고서야 전부 알게 되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파이널 라운드. 투지로 번뜩이는 서로의 시선을 마주한 채 가드를 든다. 산과 성화 모두 쇄골뼈가 도드라진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비 오듯 내리는 땀이 눈썹뼈며 턱끝에 방울져 링 바닥으로 떨어졌다. 때릴 거 다 때리고 맞을 거 다 맞아 체력이 바닥난 지금. 이제부터는 정신력 싸움이다.
어김없이 라운드 시작과 동시에 돌격하는 산을 성화가 가볍게 피했다. 능숙하게 스텝을 옮겨 산의 측면을 파고들고, 빠른 잽으로 얼굴을 노렸다. 방어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산은 어렵지 않게 성화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방어에 성공한 산이 침착하게 전개한 스트레이트가 성화에게 닿기 전, 빠르고 철저하게 연계된 성화의 훅이 산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테크닉을 여태 숨기고 있던건지 재능으로 금방 카피한건지 이전의 성화는 보여주지 않았던 플레이었기에 산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큽-"
"...!!"
성화가 엄청난 기지를 발휘해냈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이 산에게 썩 효과적이지는 못했다. 예상치 못한 공격을 당해도 산은 마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흔들리지 않고 제가 생각해둔 대로 몸을 움직였다.
옆구리를 맞은 그대로 숨을 참은 산이 빠르게 주먹을 내질렀다. 어깨, 배, 머리, 다시 어깨... 게의 집게발처럼 글러브와 양팔로 몸통을 방어하고 버티던 성화가 팔을 뻗어 산의 어깨를 밀어내고 기습적으로 등 뒤를 파고들어 서로의 자리를 바꾸었다.
구석에 몰렸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저 공격을 퍼부으려던 산이 움찔 몸을 굳혔다. 성화가 가까이 다가와 포옹하듯 몸을 겹쳐온 탓이었다.
성화의 흐트러진 머리카락 끝에서 떨어진 땀방울이 산의 맨어깨에 떨어졌다. 성화의 거친 숨소리가 귀 바로 옆에서 들렸다. 가쁘게 오르내리는 마른 배는 최소한의 거리를 두고 있었으나, 맞닿은 둘의 가슴은 공기를 들이마셔 부풀어오르며 서로를 짓누르기까지 했다. 당황스러움과 민망함, 뜨겁고 끈적한 온갖 감각과 감정에 산은 뜨악 입을 벌렸다.
격하게 몸을 움직여 이미 온 얼굴이 달아올라 있었고, 터질 듯 심장이 뛰고 있다는 사실이 미약하게나마 산을 위로했다. 그래, 이건 경기고 승부잖아. 자연스러운 거야. 질끈 눈을 감은 산이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산의 글러브가 허공에 뜬 채 방황했다. 아마추어 복싱은 프로씬보다 규칙이 빡세서 온갖 행동이 다 반칙이라 조심해야 했다. 상대의 후방을 타격하는 것, 글러브의 정면이 아닌 손바닥이나 손등 방향으로 치는 것 등 온갖 게 패배요인이 될 수 있다. 때문에 등 뒤의 기둥과 성화 사이에 끼인 산은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러한 경기 룰을 이용해서 부러 상대 선수와 몸을 밀착하는 일은 체력이 고갈된 후반 라운드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발악이다. 시간을 끌고 체력을 비축하는 작전이기 때문에 훈련 중 스파링에서는 거의 하지 않는 행동이고, 더군다나 대학부 전국체전에 처음으로 출전한 산은 당하기는커녕 실제로 본 적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이성적으로 상황을 받아들이려 애를 써도, 산에게는 땀에 젖은 맨살을 적나라하게 맞대는 첫사랑과의 포옹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저 멀리 허공만 바라보던 산이 슬쩍 시선을 돌렸다. 비단 산만이 이 상황을 이상야릇하게 느끼는 건 아닌지 호루라기를 입술에 가져간 심판의 표정이 썩어 있었다.
필요 이상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성화에게 경고가 주어지기 전 산이 성화에게 말을 걸었다. 무엇때문에 심기가 불편한지 산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쓰고 있었다.
"저기, 행님."
산이 부르는 말에 성화가 흠칫 놀라 산을 마주봤다. 입에 물려진 마우스피스 때문에 형편없이 뭉개지는 발음으로 산이 웅얼웅얼 말했다.
"딴놈들한테도 이래요?"
그 질문을 듣자마자 성화가 푸훗 웃었다. 삑삑 호루라기 소리가 울리고 산과 성화는 라운드를 시작할 때처럼 링 가운데로 이동했다. 슬렁슬렁 뒷걸음질쳐 이동하는 성화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매끈하게 떨어진 옆선을 보이는 그의 얼굴이 뒤를 돌아보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저를 마주하기 부끄러워서인지 산은 헷갈렸다.
"날 이만큼 몰아붙인 놈이 있었어야 말이지."
대답을 뭐 그딴 식으로 해요? 수줍은 소녀처럼 아닌 척 대답하는 성화가 참을 수 없이 앙큼하고 깜찍해 산은 성화에게 달려들어 그를 마구 깨물어주고 싶었다.
안된다 산아. 깨무는 것도 반칙이야. 챱챱 제 뺨을 때리는 산을 바라보는 성화의 얼굴에는 작게 미소가 피어 있었다. 그 미소가 삽시간에 싸늘하게 굳어 승부사의 얼굴로 변모하는 것마저 산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목을 뚜둑 꺾은 산이 가드를 들었다. 성화와 겨루는 것만큼 저를 흥분시키는 건 이 세상에 없을 거라고 산은 확신했다.
*
마지막 30초가 진짜다. 막판 뒤집기를 주특기로 한 편의 드라마같은 짜릿한 역전승을 따내는 산에게 어느새부턴가 그런 문장이 붙어다녔다. 그 전부터 주인공의 각성이니 최종보스의 2페이즈니 장난처럼 따라다니던 표현들을 산은 부정했지만, 윤호가 찍어온 제 결승전 영상을 본 뒤로 산은 할 말이 없어졌다.
3라운드 두 번째 다운에서(*아마추어 복싱경기는 한 라운드 내에 3번 다운되면 패배한다.) 정말이지 포효라고밖에 할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코어 힘으로 일어나는 광기의 최산 괄호치고 십팔세. 그리고 폭풍처럼 몰아치는 공격으로 정확히 23초만에 상대를 녹다운시킨 경기 영상은 산과 윤호의 고등학교 SNS 페이지를 시작으로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그 덕에 산은 이 바닥에서 나름 유명인사였고 체대 입시를 치를 때도 몇몇은 그를 알아봤다. 하지만 반짝이는 샛별을 시기하는 이들은 어딜가나 존재했다.
명문대도 피해갈 수 없는 체대 특유의 똥군기. 네가 그렇게 유명하다며? 실력 좀 보자. 비쩍 마른 산보다 체급도 한참 높은 선배가 스파링을 명목으로 그를 일방적으로 두들겨 팼을 때에도 산은 때리는 쪽이 질려서 나가떨어질 때까지, 몇 번을 쓰러져도 좀비처럼 일어나길 반복했다. 가만 서있는 것도 힘에 부쳐 몸을 후들대면서도 산은 꿋꿋하게 가드를 들어보였다.
전치 몇주 부상을 입어 상대를 폭행범으로 고소하고 말고 이전에 그 고통을 묵묵히 감내하는 악바리가 모두에게 공포를 심어주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산이 군기를 잡힌 날. 상처로 엉망이 된 얼굴에 단 하나 변하지 않는 산의 눈깔을 본 모든 이들이 독한놈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쓰러져도 계속해서 일어난다고. **대 록키라는 타이틀까지 따낸 산은 개강 1주차만에 건드리면 큰일나는 미친놈으로 낙인찍혔다. 불합리한 갈굼에서 벗어나게 됐으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산은 법정에 고소장을 제출하는 대신 교수님께 병원 영수증을 제출하고 4주간 입원했다.
저 선배, 새내기 갈구다 입원까지 시켰대. 갈비뼈인가 어디 부러졌다더라. 주변의 시선과 커뮤니티의 저격글을 견디다 못한 그 선배는 휴학계를 낸 뒤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고. 4주 뒤 돌아온 산은 동기들에게 전해들었다.
"널 록키라 부른다고? 겨우?"
"겨우라니. 그 영화 주인공. 엄청 멋있잖아."
"아무리 잘 싸웠대도. 록키는 챔피언에게 졌잖아. 그런데 넌?"
"..."
"넌 이겼어. 그 해에도, 그 다음 해에도 금메달은 네 것이었다고."
"우... 유노야..."
"뭐야, 울어? 사실대로 말한건데 뭘 울고 그러냐."
그러니까 이번 전국체전에서도 확실히 보여주고 와. 네가 등장하기만 해도 모두가 네 이름을 외치도록 마음껏 흔들어주라고. 꽃다발을 들고 병문안을 와준 윤호는 살포시 산을 안아주었다. 고등학교 동창의 품에 안겨서야 산은 참아왔던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
운나쁘게 준결승전에서 만난 챔피언께선 체력관리도 철저했다. 이럴 줄 알고 아까 끌어안은 건가. 경기 종료 직전에 모든 걸 쏟아내는 산의 스타일을 이미 꿰뚫은 듯 성화는 빈틈없는 방어와 기습적으로 내지르는 공격을 조화롭게 사용해 산이 포텐을 폭발시킬 틈을 주지 않았다.
이렇게 공격을 충분히 하지 못해 체력이 남는다면 그것은 낭비였고, 승패 판정에 불리하게 작용하게 된다. 성화는 한 번도 하지 않은 다운을 저는 1라운드에 냈으니, 이대로라면 산은 판정패라는 고배를 마시게 된다.
이 경기를 승리로 끝낼 방법은 단 하나. 박성화를 완전히 쓰러뜨린다. 산이 입안의 마우스피스를 꾹 깨물자 턱 아래로 핏대가 돋았다. 쇄골께까지 번개치듯 내려오는 핏대를 본 성화가 토끼같이 콩콩 뛰는 스텝으로 거리를 벌렸다.
그 소심한 회피가 무색하게 한발에 뛰어 도약한 산이 온 힘을 실은 라이트 훅을 휘둘렀다. 팔로 막을 각이 나오지 않는 무지막지한 위력을 예감한 성화는 상체를 바짝 숙여 산의 공격을 피했다. 보통 이 다음 공격은 낮아진 머리를 공략하는 어퍼컷으로 연계되는데, 산의 불규칙한 공격 패턴은 다시한번 성화의 예상을 빗나갔다.
헛스윙의 반동을 이용해 빙글 한 바퀴 돈 산이 다시한번 라이트 훅을 꽂았다. 무의식적으로 다음 박자에 상체를 일으킨 성화는 웰터급 체중이 실린 주먹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다. 귀가 터질 것 같은 굉음이 들렸다. 막아도 막은 게 아니었다.
이건 정통적인 복싱 스텝이 아니다. 굳이 비슷한 걸 찾아내자면 태권도 시범에서 화려하게 선보이는 연속 돌려차기 정도였다. 태권도장 관장님인 아버지 덕에 태권도 정도는 패시브로 습득한 산은 복싱의 틀을 넘어선 활용까지 야무지게 해냈다. 그걸 성화가 알 리 없었을 뿐.
여기가 종합격투기 경기장이면 몰라. 이런 놈까지 상대해야 해?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온 충격에 바닥으로 넘어진 성화가 문득 서러운 표정을 지었다. 왕관을 쓰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첫 챔피언 방어전부터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허억. 헉..."
결국 한 차례 성화를 다운시킨 산이 가만히 서서 숨을 골랐다. 머리에서 나온 전략 대신 몸에 배인 움직임을 따라간 결과 긍정적인 변수를 창출해낼 수 있었다. -실수로 다리가 나갔다가는 그대로 반칙패를 당했겠지만-
성화는 중심을 못 잡아서 순간 넘어졌을 뿐, 누적된 고통을 감내하고 일어나야 할 다운은 아니었다. 하지만 옆으로 주저앉은 성화는 좀처럼 일어나질 못했다. 어딘가 불편한 표정과 함께.
아. 산은 경기 직전 코치에게 들었던 브리핑을 떠올렸다. 안정된 무게중심으로 좀처럼 다운을 내주지 않아 포인트 득점에서 늘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 박성화의 철옹성같은 강점이라고.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은. 제가 그걸 얼떨결에 공략해낸 것이고, 그래서 성화가 충격에 빠진 것이다.
씩씩 분한 숨을 내쉰 성화가 카운트가 끝나기 전 벌떡 일어났다. 투지를 넘어선 굴욕감과 복수심으로 불타는 눈동자에 살짝 기가 눌리면서도 산은 머릿속에서 제 작전을 다시한번 점검했다. 실전에서 처음 해보는 것이니 먹힐지 안 먹힐지 모르겠지만... 에라 모르겠다. 올인.
퍽. 펑-
"이익...!"
후웅-
조금 전과 똑같이 들어오는 라이트 훅을 당연하다는 듯 정확하게 막아낸 성화가 지금 나 무시하냐는 눈빛을 쏘아대며 그 괴랄한 은색 마우스피스를 악물었다. 글쎄. 고개를 작게 갸우뚱 기울인 산이 다시 민첩하게 턴을 돌았다. 내보여진 등을 가격할 수도 없는 성화는 분을 삭이며 산의 공격을 기다렸다. 그 뻔한 주먹따위 피해버리고 반 박자 빠른 카운터 어퍼컷을 먹여주리라 바득바득 이를 갈면서.
펑-
그래. 이 정도 잔머리는 쓸 줄 알아야지. 그대로 훅을 날리는 척 팔을 휘두르던 산이 반대손으로 어퍼컷을 시도했으나 성화는 그를 가볍게 막아냈다. 지나치게 정직한 공격만 해오던 산이 페인트(*어떤 기술을 쓰려는 척 움직임을 보이다 다른 기술을 사용하는, 훼이크의 정중한 표현.)를 사용한 건 조금 의외였다. 너라면 끝까지 고집부릴 줄 알았는데. 조금 전 결심한 대로 산에게 어퍼컷을 날린 성화가 한 차례 숨을 골랐다. 이제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 들어오는 공격에 카운터만 치면서 버티면-
뻑.
"커헉...!"
산은 성화가 제 페인트를 간파하고 카운터 어택을 하는 것까지 예측하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반 박자 빠른 카운터 다음 조금의 쉼표도 없이 남은 반 박자에 카운터의 카운터를 구겨넣는 최산의 미친 리듬감에 경악할 새도 없었다. 그건 음악의 전주조차 못 되는 못갖춘마디의 한 음절 정도에 불과했다.
분명히 실컷 두들겨 놨는데 왜 더 강해진 거지? 반의 반 박자까지 쪼개가며 벌과 같이 쏘아대는 공격이 빗방울처럼 쏟아졌다. 어차피 다 처맞는 거 성화도 가드를 풀고 반격을 했지만 앞서 경험했듯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좀비와 다를 게 없는 최산은 픽픽 고개를 꺾어가면서도 두 팔을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나 빠르게 주먹을 연사해본 적 없는 성화는 난타전에서 일방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숨을 참은 성화의 호흡이 점점 딸려왔다. 하지만 숨을 들이키는 중 몸통을 맞으면 정말 큰일날 수 있기 때문에 꾸욱 참아야 했다. 얼굴이 터져라 힘을 주고 주먹을 꽂는 산도 한계에 다다라 보였지만, 그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내부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코피가 흘러나왔다.
땡땡땡-
"악, 미친놈아. 큭- 그만! 그만 하라고!"
종 쳤는데 왜 계속 때리는거야! 제 페이스에 완전히 몰입한 산은 심판의 제재가 들어가고 나서야 성화를 향한 공격을 멈췄다. 마지막 자존심의 힘으로 링에 등을 기댄 채 간신히 버티고 선 성화가 천천히 숨을 골랐다.
입안 온 곳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한 경기에서 이만큼 맞아본 적이 없었는데. 꼴사납게 바닥에 드러누운 채 경기를 마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성화는 여기까지 버텨준 제 몸에게 잠시 고마워하는 시간을 가졌다.
Time's up! - We're Boxers
두 선수의 손목을 그러쥔 심판의 판정만이 남은 순간. 관내의 모두가 숨죽이고 링 안을 지켜봤다. 성화는 긴장감에 고개를 조금 숙인 채 눈을 감고있었고, 산은 아직도 경기의 여운이 가시지 않는지 멍한 눈으로 저 멀리 어딘가를 천천히 훑어보고 있었다.
와아아아아-!
"아..."
"엥? 네에?"
성화의 팔이 위로 치켜들리지 않았다. 건너편에 서서 한쪽 겨드랑이를 시원하게 드러낸 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관중석과 심판을 번갈아봤다. 고개를 끄덕여주는 심판을 마주하고서도 산은 쉽사리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수고했어. 산아."
덤덤하게 패배를 받아들인 성화가 먼저 다가가 산을 안아주었다. 믿기지 않는 결승 진출보다 피부에 닿아오는 뜨뜻한 포옹이 더 기분좋은지 산이 얼떨떨한 얼굴로 성화를 마주안았다.
좋아서 아이마냥 방방 뛰는 산의 코치에게로 산의 등을 떠밀어준 성화가 코치의 다독임을 받으며 대기실로 돌아갔다. 반쯤 언 생수를 벌컥벌컥 마시고, 땀 닦은 수건을 감싸 부어오른 눈가를 찜질했다.
-
샤워를 마치고 대기실로 나온 성화가 토끼처럼 동그랗게 뜬 눈을 꿈벅였다. 내내 여기 죽치고 있었는지 글러브도 풀지 않은 경기복 차림 그대로인 산이 고개를 번쩍 들고 성화를 쏘아봤다. 왜. 무슨일이야. 아이를 어르는 투를 섞어 부드럽게 물었지만 산의 뾰족해진 눈꼬리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성화가 머리를 말리고 뻐근한 몸 곳곳에 파스를 붙이고 옷을 주워입을 때까지 소파에 뚱하니 앉아 입술만 삐죽이던 산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방금 경기. 진짜 제가 이긴 거 맞아요?"
"응 네가 이겼어. 아직도 실감이 안 나?"
"제가 묻는 건 최선을 다한 결과냐는 거예요."
거울 앞에 앉아있던 성화가 싹 표정을 굳히고 거울 속 산과 시선을 맞췄다. 그러면 뭐. 내가 널 봐줬다고 생각해? 먼저 시선을 내리깐 산이 고개를 저었다. 빙글 의자를 돌린 성화가 축 풀이 죽은 산을 마주했다. 산이 힐끔 눈을 들었다.
"그러니까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저나 형이나 선수 대 선수로서 전심전력을 다하지 못한 것 같아서..."
"돌려말하지 말고. 뭐가 그렇게 불편한데."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면. 분명히 형이 이겼을 거라고 생각해요."
산을 향해 상체를 숙이고 심문하듯 말을 캐묻던 성화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고개를 젖혔다. 흐음. 눈을 감고 방금 전 경기를 천천히 복기했다. 그 얼굴이, 그 눈빛이 아니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길쭉한 다리로 빙글 의자를 돌리는 성화가 느릿하게 대답했다.
"공과 사를 구분하는 것도 멘탈이고 실력이야. 전심을 다하지 못했더라도 그러고자 노력했다면 최선을 다한거지."
"그런가요..."
"난 최선을 다했어. 너도 그럴 테고. 그러니까 그만 생각해. 잡생각이 많으니까 순발력이 좋아도 자꾸 행동이 느려지잖아."
착 소리를 내며 신발 밑창을 바닥에 붙인 성화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내일 너 결승전이야. 빨리 들어가서 쉬어야지. 성화의 손에 잡혀 일으켜진 산은 어느새 대기실 문 밖까지 밀려났다. 저, 형. 아쉬움이 남아 문고리를 붙잡은 산에게 성화는 필살기를 날렸다.
"최고의 복싱선수가 되기로 했잖아, 산아."
"..."
"그래야 예쁜 행님 만나지."
"근데 이미 만났잖아요."
"안돼. 은메달 목에 걸고 오면 문 안열어줄거야."
"흐이씨. 알겠어요."
어길 수 없는 어릴 적 약속을 꺼내자 고집을 부리던 산도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푸슬푸슬 웃으며 산의 앞머리를 쓸어넘겨주던 성화가 눈썹 위 붉은 찰과상에 시선을 남겼다.
쪽-
"??... 형?"
"우승하면 입술에다 해줄게."
보드라운 입술이 지그시 누르고 간 상처 주변을 더듬던 산이 성화의 속삭임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큼큼 헛기침을 한 산이 뒷걸음질로 한 발짝씩 소심하게 멀어져갔다.
"저 내일 이길 거예요."
"웅."
"뽀뽀 받고싶어서 이러는 거 아니에요."
"그래."
"금메달 따야 형 방에 들어갈 수 있으니까, 노력하는 거라구요."
"야, 그런 말을 복도에서...! 못 살아!"
샐샐 눈웃음치다 이내 쌩하고 도망간 산을 뒤로하고. 성화도 숙소로 돌아갈 채비를 마저 했다. 성화도 내일 3,4위 결정전을 치뤄야 하니 최대한 쉬어둬야 했다.
같은 동메달이래도 대충 하란 법 없으니까. 패배의 쓴맛이 아직도 입안을 굴러다녔지만 성화는 그것을 떨쳐내려 후우 숨을 골랐다. 한쪽 어깨에 가방을 둘러매고서 대기실을 떠나는 성화가 작게 중얼거렸다.
"나 이겨놓고서 우승 못하기만 해봐."
*
"야 최산! 뒷풀이 자리에 네가 빠지면 어떡해~!"
"술도 못 마시는 놈 뒀다 뭐한다꼬. 에이 몰라. 난 갈 거야!"
"쯧. 저거 억지로 끌고가봤자 재미 없어. 록키 하고싶으신 대로 둬라 걍."
"록키라니, 이제 어엿한 챔피언이신데! 야아- 최산!!"
저 멀리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동기들을 뒤로하고 산은 홀로 호텔로 향했다. 결승전부터 시상식까지 모두 끝났으니, 한 자리에 모인 선수들이며 관중들이 우르르 방을 빼 호텔 복도는 청소직원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고객들이 진작 체크아웃한 시간에 호텔로 돌아온 남학생 한 명을 모두가 의아한 눈으로 힐끔대는 가운데, 산은 한 사람을 발견하곤 화아아 미소를 피웠다.
"행님아아!"
"꼬맹이. 왔어?"
우윽. 폴짝 뛰어 저를 끌어안는 산을 버겁게 받아낸 성화가 얼마안가 산을 밀어냈다. 장난스레 쭉 내민 입술도 가볍게 찰싹 때려주고 새침하게 팔짱을 낀 성화가 웃음기 띤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문 안열어줬거든."
"치이. 그럼 빨리 열어줘요. 띵동-"
"악! 미쳤나봐!"
입으로 초인종 소리를 흉내내며 검지손가락으로 성화의 가슴을 쿡 찌른 산은 각오했던대로 머리를 감싸쥔 채 성화에게 짜악 소리나게 등짝을 맞아야 했다. 위치를 정확히 맞췄는지 펼쳐진 손바닥도 그의 주먹 못지않게 아팠다.
부끄러워 빨개진 얼굴로 씩씩대다가도 이내 진정한 성화가 선서하듯 손바닥을 들어보였다. 등짝이 아파 몸을 배배 꼬던 산도 호들갑 떨던 몸을 바로 세우고 눈을 꿈벅였다.
"카드키 대."
산이 눈을 감듯 눈꼬리를 휘며 미소지었다. 시상식도 같이 했으면서 새삼스럽게 무슨. 능청스러운 산의 혼잣말에 성화도 소리없이 웃었다. 산이 제 가방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들었다. 가지런히 접힌 천을 펼치자 반짝이는 금빛 광채가 호텔 천장을 쨍하게 비췄다.
성화가 그를 멍하게 올려다보는 사이 손바닥에 차갑고 딱딱한 금속 재질이 느껴졌다. 뒤이어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어 깍지끼는 따뜻한 체온까지.
"삑-"
"...사실 열려있었어. 그냥 들어와."
"에이, 그럴 줄 알았어."
"움-! 야, 사람들 다 보는데서. 으아. 너 메달, 메달!"
성화의 어깨에 재깍 단단한 팔이 둘러매였다. 쪽 하고 바로 입술을 맞부딪히는 산에게 기겁할 시간도 없었다. 성화가 정신차릴 틈 없이 깍지를 푼 손으로 성화의 뒤통수를 받친 산이 성화의 입술이며 아닌 곳이며 마구잡이로 뽀뽀를 난사했다.
정말로 제가 꽃에게 달려드는 꿀벌이 된 것마냥, 성화에게 부딪히는 입맞춤마다 달콤한 향내가 팡팡 터지며 콧속을 메웠다.
링 위에서보다 더욱 일방적으로, 반격할 여지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성화가 애처롭게 산의 메달을 찾았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스 하나 날까봐 극진히 대해지던 금메달은 땡그랑 경쾌한 소리와 함께 타일 바닥을 구른 지 오래였다.
길바닥에 떨어진 10원짜리마냥 형편없는 처지가 된 메달을 본 성화가 질끈 눈을 감았다. 띵하게 울리는 두통 대신 온 얼굴에 내려앉는 말캉한 감촉을 선택한 성화가 돌변한 태도로 산에게 키스했다. 산이 놀라 뒷걸음질 칠 정도였지만 산의 목덜미 뒤로 깍지를 끼고 단단하게 매달린 성화는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놀란 눈을 깜박이는 산이 살풋 찌푸려진 성화의 감긴 눈꺼풀이며 속눈썹을 바라봤다. 문득 제가 무엇을 위해 이 길을 오랜 시간 달려왔는지, 무엇을 위해 그토록 치열하게 싸웠는지 주마등이 스쳐지나갔다. 모든 걸 얻은 이 행복한 순간에. 죽기 직전도 아닌데 무슨 주마등이냐-하는 산의 의문은 얼마안가 해결되었다.
눈앞을 빠르게 스쳐지나가던 반투명한 필름들의 상이 사라졌다. 아니, 점차 선명해져 눈앞의 성화와 완벽하게 맞물렸다. 시상식보다 가슴 벅차오르는 이 순간이. 금메달 대신 제 목에 걸려있는 존재가 답을 증명했고 정답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아, 나는 이 사람을 위해 살아왔던 거구나.
내리깔린 눈을 완전히 감은 산이 고개를 틀어 주도권을 빼앗았다. 허리가 바짝 휘어잡혀 중심을 잡기 어려워진 성화가 휘청이다 끝내 벽에 등을 기대고 코로 작게 끙끙대는 소리를 흘렸다. 너는 무슨 키스할때도 이런식이야? 성화는 묻고 싶었지만 링 밖에서 몰아붙여지는 이 느낌이 마냥 싫지 않아 얌전히 입술을 내어줬다. 피비린내 나는 입안에서 왜인지 달콤한 향이 퐁 퐁 터져나왔다.
*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한 타일 바닥 위 반짝이는 것을 발견한 윤호가 허리를 숙여 부드럽게 그것을 낚아챘다. 하얀 의료용 안대에 가려져 하나뿐인 눈을 꿈벅이며 손안의 물건을 확인한 윤호는 허 바람빠진 소리를 냈다. 누군 눈탱이 팅팅 붓도록 싸우고 덤벼들어도 못 따냈던 금메달을, 다른 누구는 바닥에 막 흘리고 다녔다.
트레이닝복 바지를 뒤적여 제 핸드폰을 꺼낸 윤호가 카메라 앵글 안에 손에 든 금메달과, 저 창가쪽 벽에 달라붙어 키스에 열중한 산을 담았다. 측면으로 고개를 꺾어 안그래도 예술인 최산 턱선이 두드러져 제법 분위기있는 그림을 만들었다. 한번뿐인 기회 신중히 수평을 맞추고 찰칵.
카메라 소리가 들리고나서야 산과 성화는 둘만의 세상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렸다.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닦는 성화를 뒤로하고. 제가 찍은 사진을 확인하며 실실 웃는 윤호를 향해 씩씩 성난 소리를 내는 산이 크게 발을 구르며 다가갔다.
"정윤호,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아이 왜, 난 신경쓰지 말고 하던 거 마저 해. 분위기 좋구만."
"사진 지워. 메달도 내놔! 야이씨. 진짜 죽여버린다?!"
산의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으로 핸드폰과 메달을 치켜든 윤호가 키득키득 웃으며 신나게 산을 골려주고 있을 때, 조용히 그 앞으로 성화가 다가갔다. 끈질기게 버티던 윤호도 그에 매달려 안간힘을 쓰던 산도 유치한 힘겨루기를 멈추고 자세를 바로 했다. 친절한 미소를 그린 성화가 윤호에게 정중하게 악수를 청하며 말을 걸었다.
"산이 친구신가요? 시상식 때 잠깐 뵌 것 같은데. 준우승이셨나,"
"아 네, 네. 맞아요. 정윤호라고 해요. 산이랑 고등학교에서 같이 복싱부 했었고, 이번에 미들급(*72.57kg 이하) 은메달이에요."
"그러시구나. 저어, 초면에 실례지만. 윤호씨 번호 좀 받을 수 있을까요?"
"???????"
아니면 블루투스라도... 조금씩 작아지는 성화의 뒤 문장은 이미 산에게 들리지 않았다. 우리 행님이. 우리 행님이이이이...!!! 정윤호 번호를 왜 따?!?!?! 나랑도 번호교환 아직 안했잖아요!!!! 내면의 산은 이미 비통의 폭우 속에서 무릎을 꿇은 채 하늘을 향해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억장이 무너져 다리까지 풀리기 직전인 산의 눈치를 보며 윤호가 당황스러운 투로 되물었다.
"ㄴ, 네?"
"방금 찍으신 사진... 저도 갖고 싶어서요."
"...아. 아아! 사진 때문에에. 당연히 보내드릴 수 있죠."
대화 내용이고 뭐고. 둘이서 핸드폰 쥐고 알콩달콩 이야기하고 있는 꼴에 산은 정신이 아득해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고 허공만 봤다. 블루투스로 사진을 전송한 윤호는 성화에게 산의 메달까지 돌려주고서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한번 눈 돌아가면 제 몸무게로 눌러 제압하기 전까지 진심으로 주먹을 날려대는 최산 성깔을 알아서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돌아선 성화가 나라 잃은 표정으로 덩그러니 남겨져 있는 산을 발견했다. 허투루 잃어버리지 말라고 소중한 금메달 목에 걸어주고서, 매끈한 양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 가볍게 입을 맞췄다.
쪽-
"정신차려 산아."
"행넴... 우째 이럴수가 있으요..."
"아, 그런 거 아니야. 아니래도."
으휴. 손 안에서 세상 억울한 표정으로 짜부러져 울먹이는 산 앞에서 성화가 못 말린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콩 맞대이는 이마의 감각에 산이 촉촉한 눈을 들었다. 톤이 확 낮아진 성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산아, 하고 부르는 억양이 사뭇 달랐다. 산이 킁 코를 들이켰다.
"내 니밖에 없는거 아나 모르나."
"...힝."
"좋아한다."
"에."
기습적으로 들어온 고백에 굳어버린 산을 성화가 끌어안고 부둥부둥 좌우로 뒤뚱댔다. 손바닥에 닿는 날개뼈 언저리를 토닥여주며 성화가 말을 이었다. 그 다독임이 있음에도, 귓가에 속삭여지는 달콤한 사랑고백에 산은 그만 심장이 터져버릴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수학여행 다녀오고나서도 자꾸 니 생각 났다. 그 쬐꼬만 게 형아들한테 뎀비는 게 으데 쉬운 일이가. 내도 글케 멋진 놈 되고 싶어가, 3학년 되자마자 복싱부 들어갔다.
"행님아..."
"걍 취미로 할라캤는데. 분명 니라면 열심히 해가꼬 대회 나가겠단 생각이 들더라. 내도 참가하면 거서 만날 수 있겄다, 해서 내 빡시게 했다. 고 꼬맹이가 을매나 멋있어졌을랑가 기대 많이 했데이."
"내 금메달 땄심더. 최고로 므찐, 흡. 뽁서가 돼가꼬. 이쁜 행님 만나가,"
"응. 최고로 믓지데이, 우리 산이."
"내도 행님 좋아함다. 좋아서 아주 돌아버리겄습니더."
그 말을 증명하듯 성화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은 산이 성화를 살짝 들어올려 빙글 돌았다. 푸스스 흩어지는 웃음을 지은 성화가 찔끔 눈물이 나온 산의 눈매에 입을 맞췄다. 그 위로가 무색하게 끄흐흡 울음을 터뜨리는 순정남 꼬옥 안아 달래주며 성화가 눈을 감았다. 제 어깨에 얼굴을 묻은 산도 같은 마음이리라.
오랜 시간 헤매다 끝내 링 위에서 재회한 운명을 두번다시 놓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산과 성화는 서로가 남긴 상처로 엉망이 된 몸이 부서져라 서로를 꽉 끌어안았다. 언젠가 다시 마주하는 날에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새끼손가락 걸어 약속했다. 제가 이길 거라고 으스대는 농담도 잊지 않았다.
우린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복서니까.
2023년 09월 16일의 김홍중
휴대전화를 켰다. ‘박성화’ 세 글자 위에서 손가락이 방황했다.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는 건 결국 화면을 껐다는 소리다.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왼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다시 휴대전화를 켰다. 연락처 상단에 고정된 번호는 박성화 하나였다. 전화라고는 걸어본 적도 없지만 즐겨찾기로 설정해 둔 건 언젠가, 그래 그 언젠가를 위해서였다.
2016년 03월 02일의 김홍중
대한민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3월에 떠올리는 새 학년의 추억이 하나쯤은 있을 테다. 그리고 오늘은 고등학교 삼 학년의 시작이다. 대학이니 어른이니 하는 변화를 준비하는 마지막 일 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안다. 이번 일 년의 고생이 앞으로 남은 평생의 행복을 의미한다는 말은 질리도록 들었다. 그럼에도 마음 한 켠이 허한 건 내가 걸어갈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해서인 걸까. 복잡한 마음에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섰다.
십 분이 채 되지 않는 등굣길은 오늘따라 유난히 길었다. 한참을 걸어 교문 앞에 다다르면 나보다 앞서 학교로 들어가는 아이가 보였다. 누구인지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박성화.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아이였다. 도통 학교를 오지 않는 탓에 말이라도 나눠본 건 겨우 다섯 번이나 될까, 했지만. 삼 학년이라고 마음을 새롭게 먹었나. 의미 없는 감상을 남기고는 교실로 걸음을 옮겼다. 삼 학년 이 반.
텅 빈 교실은 어쩐지 쓸쓸한 느낌이었다.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수학 문제집을 펼쳤다. 숫자나 두어 개 끄적이다 창문 너머로 시선을 두었다. 운동장 스탠드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박성화가 보였다. 가방도 메지 않은 뒷모습에 그럼 그렇지, 하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간이 지났다. 아이들은 하나둘 등교하기 시작했고, 교실은 점차 소란스러워졌다. 문제집을 덮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달라진 건 없었다. 다들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는 점만 빼면.
조례를 알리는 종이 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담임 선생님이 교실 문을 열었다. 낯선 얼굴은 아니었다. 몇 년째인지는 몰라도 학생주임만 주구장창 맡고 있는 수학 선생님이었다. 규칙에 인생을 걸었다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깐깐한 선생님이 담임이라는 사실은 몇몇 아이들을 좌절하게 만들었다. 차마 소리 내지 못한 한숨이 교실에 깔렸다. 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교탁 가운데에 서서 출석부를 펼쳤다.
이름 순으로 불리는 출석은 나로 하여금 앞부분에만 집중해도 된다는 의미였다. 물론 중반부의 어떤 이름에서 출석이 막히기 전까지만 말이다.
“박성화.”
대답이 없었다.
“박성화 안 왔어?”
선생님이 다시 물었다. 나는 교실을 둘러봤다. 분명 나보다 먼저 교문을 통과했는데.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직도 그 자리에 있나 해서. 그 아이가 앉아 있던 자리는 텅 빈 채였다. 이상했다.
“누가 박성화한테 연락해서 오늘 종례 전까지 안 오면 죽는다고 전해라.”
안 좋은 일이 있는 건 아닐까 잠시 걱정이 되긴 했지만 금세 머릿속에서 생각을 지워냈다. 뭐, 삼 학년은 개학 날 1교시부터 정상 수업을 한다는 소리에 놀라 생각이 달아난 쪽에 가깝긴 했지만 말이다. 이어지는 수업은 지루하기만 했다. 수능이 이백몇 날 남았다는 소리만 질리도록 들었으니까. 수능이고 자시고 빨리 끝나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점심을 먹고 이어지는 5교시는 언제나 그랬듯 잠과의 투쟁이다. 모노톤으로 이어지는 선생님의 목소리를 적군의 함성 삼아 싸워대다 문득 창밖을 내다봤다. 야외 체육 수업을 하는 반은 없는 것인지 운동장은 텅 비어있었다. 무의식 중에 박성화를 찾았다. 시선이 한쪽 구석에서부터 스탠드를 훑어 내렸다. 중간 정도였나, 또 다시 오도카니 앉아 있는 사람 하나가 보였다. 그 무엇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학교에 있으면서 교실에 안 들어오는 건 대체 어떤 이유에서인지….
한참이나 시선이 그 아이에게 머물렀다. 집중하라며 날 부른 선생님의 목소리도 바깥을 향한 내 마음을 붙잡아두지는 못했다. 수업이 끝날 때가 다 되어서였나. 박성화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학교 건물 뒤편으로 향했다. 박성화를 좇던 나의 시선이 대상을 잃는 순간이었다. 이번 교시가 끝나면 박성화를 만나러 가볼까, 하는 고민이 생겼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생각이지만 이상하게 그날은 그랬다. 원래 사랑이라는 건 불현듯 찾아오는 거니까.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리자마자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도, 해야 하는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조차도 이유를 알 수 없는 행동이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고민도 없이 건물 모퉁이를 돌았다. 벽에 기대어 서 있는 박성화를 보고 나서야 후회가 몰려왔다. 할 얘기도 없는데 그냥 돌아갈까, 하고 고민하던 찰나 박성화가 눈을 떴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먼저 말을 건넨 쪽은 박성화다.
“아, 볼 일 있어?”
물음은 답을 요하지 않았다. 박성화는 자리를 피하려는 듯 몸을 돌렸다.
“잠시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도, 해야 하는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 아이를 붙잡아 세운 건 지금까지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박성화가 다시 몸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나만큼 박성화도 당황한 것 같았다.
“어……, 아. 선생님이 너 교실로 오래. 우리 같은 반이거든.”
박성화가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이어지는 어색한 상황에 내가 다시 물었다.
“같이 올라갈래? 6교시 금방 시작할텐데.”
박성화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박성화는 당연히 그러자고 할 법한 질문에 거절을 표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아이였다. 끊어져 버린 대화에 나는 먼저 교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날 박성화는 끝까지 교실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2016년 03월 02일의 박성화
아침 댓바람부터 엄마가 동생을 깨웠다. 밥을 먹고 가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굳이 가족들과 같이 있고 싶지는 않았다. 학교에 다녀오겠노라며 교복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언제나 그랬듯 걸음은 학교로 향한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운동장 스탠드 구석을 향한 것이긴 했지만. 분명 3월은 봄이라고 했는데 아직 날씨는 조금 쌀쌀했다. 꽃은 언제 피려나, 나와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라는 건 알지만 머릿속에 스쳐간 감상까지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발 끝만 흔들며 의미 없이 운동장을 바라봤다. 교문을 통과하는 아이들의 소리가 조용해지면 자리를 옮길 때가 되었다는 의미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학교 건물 뒤편의 아지트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계속 이어지는 무념무상의 시간이다. 누군가 내게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느냐고 물으면 댈 핑계야 많았다. 수업이 지루해서, 어차피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몰라서, 밖이 더 좋아서, 같이 수업 째고 놀러 갈 친구를 기다리느라, 혹은 이미 수업에 늦어버려서. 수도 없이 돌려 막던 핑계였는데 이상하게 그 아이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말 이상하게….
김홍중. 이름은 익히 알고 있었다. 아마 작년에도 같은 반이었을 텐데. 우린 평행선을 달렸다. 그 아이도, 나도 서로의 삶에 관심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정말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 아이는 뜬금없이 다가와서 맥락 없이 말을 전했다. 교실로 가자고 했다. 선생님이 그 아이를 골라 시킨 걸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어색해하는 걸 보니 심부름 차 온 건 아닌 듯했다.
고개를 저었다. 교실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미련만 남을 일에 시간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거절을 전해 들은 아이가 걸음을 돌렸다. 그 뒤로는 다시 온전한 혼자다. 다시 생각 속에 잠겼다. 학교가 싫은 건 아니었다. 공부가 하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단지 방향을 상실한 노력을 들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빤한 집안 사정에 대학에 가겠노라며 부담을 얹어 주고 싶지 않은 쪽이었다. 대학에 가는 건 쌍둥이 동생 하나로 충분했다. 공부야 걔가 더 잘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대학에 가는 대신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건 아니었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불안하기는 했다. 우리나라 대학 졸업률이 70%가 넘는다던데…….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냈다. 숨만 붙어 있으면 먹고 살 방법이야 생기겠지. 걱정한다고 해결되지도 않을 문제들은 구태여 마음에 담아두지 않기로 했다. 한숨이 새어 나왔다. 눈을 감고 벽을 따라 미끄러지듯 주저 앉았다. 속이 어지러웠다. 어디로 가는 게 맞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2016년 04월 11일의 박성화
매일이 뭣 같았다. 여전히 학교에서의 나는 문제아였고, 집안에서의 나는 한심한 아이였다. 나조차도 방향을 모르는 순간들이 이어졌다. 그나마 조금 달라진 것이라면 친구라고 부를 만한 아이가 하나 생겼다는 것 정도. 개학 날 나누었던 애매한 대화는 관계의 시작이 되었고, 그 아이는 점심시간마다 학교 건물 뒤편으로 날 데리러 왔다. 정의 내릴 수 없는 감정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고, 우리는 어느덧 서로에게 마음을 기대고 있었다.
그 아이도 미래를 불안해했다. 하고 싶은 걸 잃었다고 했다. 자신이 들인 모든 노력이 의미 없는 일이 될까 두렵다고 했다. 우리는 끝을 모르고 커져 가는 미래에 대한 방황을 공유했다. 가장 이상했던 것은 이 모든 감정이 함께 있을 때면 사그라든다는 데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구원으로 여겼다.
2016년 05월 07일의 박성화
“성화야.”
점심시간 종이 울리고 딱 십 초. 곧이어 내 이름이 들린다. 양 팔을 벌린 채 뒤를 돌았다. 홍중이가 보는 눈이 많다며 날 말렸다.
“뭐 어때.”
순순히 안겨 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서운한 마음은 새어 나왔다. 홍중이 가볍게 내 팔을 쳤다.
“그럼 손.”
오른손을 척 내밀었다. 내 얼굴과 손을 두엇 번갈아 바라보던 홍중이 내어 민 손을 가볍게 쳤다.
“치…….”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고는 급식실로 걸음을 옮겼다. 음식을 받아다 한쪽 구석에 마주 앉았다. 홍중이가 자연스레 반찬을 내 식판 위로 덜어 주었다. 어느덧 일상이 되어버린 행동이었다.
“근데 성화야.”
뜬금없는 부름이었다. 고개를 들어 그 아이를 바라봤다.
“우리는 뭐야?”
맥락 없는 물음이었다. 무슨 의미냐며 되묻는 눈빛을 보냈다.
“아니, 그냥…. 일단 먹어.”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난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내가 널 좋아하는 만큼 너도 날 좋아하냐는 물음이었겠지. 답은 명확했지만 대답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모르는 척하는 게 나았다. 지금까지의 관계라도 유지하려면.
홍중이는 다시 묻지 않았다.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도, 나의 마음에 대해서도. 우리는 여전했다. 여전히 방황을 나누었고, 시간을 공유했다. 평소와 다름 없는 시간이었다.
2016년 08월 22일의 박성화
사람을 구원 삼지 말라는 건 분명 잃어버리는 그 어느 날을 위한 조언이었을 테다. 2학기의 시작과 함께 홍중이가 전학 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분명 직접 얘기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아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홍중이에게 난 그 정도의 의미를 갖는 사람이 아니었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에서 지워내기로 했다. 우리는 다른 세계에 살던 사람이니까. 마음은 공허했지만 슬프지는 않았다. 체념하기로 했다.
2016년 07월 28일의 김홍중
얼마 전 1학기 성적 통지표를 받아 든 엄마가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내 학교 생활에 무슨 문제가 있느냐는 물음에 선생님이 박성화 이야기를 했나 보다. 엄마가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끊었다. 몇 달만 지나면 되는데 왜 자꾸 다른 데 관심을 두냐며 소리를 질렀다. 그 문제는 그날로 끝난 줄 알았다.
“홍중아. 2학기 시작하면 전학 갈 거야.”
오늘 이 말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3학년 2학기에 전학 가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엄마가 내 탓을 했다. 이상한 아이랑 어울려서 성적이 떨어지지 않았느냐고. 무어라 대꾸하고 싶었지만 의미 없는 일이라는 건 익히 알았다. 성화에게 말해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방법을 몰랐다.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지금의 상황을 성화에게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2016년 11월 17일의 김홍중
모든 일을 잊었다. 눈 앞에 놓인 수능과 입시에만 신경을 쏟았다. 걱정이니 고민이니 하는 것들은 싹 다 한쪽 구석에 집어 넣었다. 미래에 대한 고민은 박성화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어질 것만 같아서.
2016년 11월 18일의 김홍중
수능은 끝났지만 마음은 복잡했다. 부모님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고도 남을 성적을 받았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켰다. 연락처를 내려 ‘박성화’를 찾았다. 전화 걸기 버튼 위에서 한참을 방황했다. 문자라도 남길까 했지만 그마저도 용기가 없었다. 연락처의 별 버튼을 눌러 즐겨찾기로 설정해뒀다. 나중에, 정말 나중에. 용기가 생기면 변명이라도 해보려고.
WARNING: 사망, 질병 소재 주의
우영이 성화와 만난 것은 이른 겨울이었다.
뒤통수에 스치는 바람의 온도가 이미 위험스럽게 낮을 즈음이었다. 함께 남하하던 무리와 떨어진 우영은 마음이 조급했다. 걸음을 옮기고 있으면 먹을 것이 떨어질까 불안했고, 먹을 것을 찾고 있으면 추위에 따라잡힐까 불안했다. 눈을 뜨면 곧바로 걷기 시작했고, 좀처럼 눈을 뜨고 있기 어려울 때까지 걸었다. 생존을 위해 홀로 치열히 싸우던 시기였다.
처음 만났을 때 성화는 소리죽여 울고 있었다. 빠르게 내려앉는 어둠 속에서 불씨 한 점 없이, 잠이 든 것처럼 죽어 있는 남자의 몸을 앞에 둔 채였다. 밤을 지낼 곳을 찾아 쓰러져 가는 건물에 들어선 우영은 횃불의 빛이 가닿는 끄트머리에서 성화를 발견했다. 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성화의 눈빛이 빠르게 불타오르는 광경이 어스름 속에서도 뚜렷했다.
불안. 그것이 제 불안과 같은 온도라는 데 가벼운 안도를 느낀 것도 잠시였다. 잠깐만요, 으악! 쇠파이프를 치켜드는 성화를 볼썽사나운 외침으로 만류하자 그 눈빛이 다시 사그라들었다. 도로 작게 웅크려 앉으며 성화가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냥, 가세요. 그 앞에 우영은 횃불이 수명을 다할 때까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무것도 안 보여서 여기서 자야 할 것 같은데. 사방이 갑작스러운 어둠에 잠기자마자 우영은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콘크리트 바닥의 냉기가 외투를 뚫고 등골을 타고 올랐다. 배낭에서 모포를 꺼내 두르느라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뚫고 작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그 울음소리에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그거, 누구예요? 의외로 순순히 답이 돌아왔다. …친구요. 어쩌다가? 엊그제부터 열이 많이 났는데, 쉴 틈이 없다고 무리하다가….... 그 뒤로 정적이 내려앉았다. 겨울이 다가오는 길 위에서 질병으로 사망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우영은 한숨을 잇새로 삼켰다.
훌쩍이는 소리가 길게 이어지더니 그 끝에 눅눅한 사과가 달라붙었다. 아까는 미안했어요. 뭐가요? 이거, 쇠파이프…. 아. 콘크리트 바닥에 파이프가 쓸리며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상하죠, 분명히 직전까지는 그만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쪽이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자마자 손부터 먼저 나가는 게… 살고 싶은가 봐요, 나. 그 말에 일순 명치께가 답답했다. 우영은 토하듯 대꾸했다. 살아요, 그럼. 네? 친구도 그쪽이 살았으면 해서 무리했을 거 아니에요.
짧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 뒤에 울음이 크게 터져 나왔다. 달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 성화는 아이처럼 목놓아 울었다. 괜한 소리를 했다 싶어진 우영은 모포를 머리끝까지 뒤집어 쓰고 눈을 감았다. 한층 더 짙어진 어둠 속에서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아픈 몸을 한 발짝 더 내디뎌서라도 상대를 살리고 싶은 마음,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상대가 없는 세상에서 더는 살지 않기로 선택하는 마음. 그런 마음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했다.
성화는 사흘 동안을 울다 멈추다를 반복했다. 말없이 걷다가도 울었고, 땅바닥에 쪼그려 앉아 숨을 고르다가도 울었으며, 그 남자가 남기고 간 식량을 나눠 먹을 때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울었다. 그때마다 우영에게 미안해, 미안해, 하고 반복해서 사과했다. 우영은 성화가 울면 우는 대로, 사과하면 사과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제가 입을 열기만 하면 더 큰 소리로 운다는 것을 몇 차례 확인한 뒤였다.
우영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울었을 때가 언제였는지 떠올려 보려고 했다. 길 위에서 숱한 작별을 겪었음에도 단 한 번도 그 때문에 운 적은 없는 것 같았다. 넌 남자애가 돼서 무슨 눈물이 그렇게 많니? 하고 놀리듯 웃던 엄마의 핀잔을 어렸을 적의 기억에서 건져 올렸지만 그뿐이었다. 심지어는 그때 무엇 때문에 그렇게 자주 울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추위가 찾아오기 전의 세상을, 우영은 잘 기억하지 못했다.
매일 울기는 했지만, 그날 밤 이후 성화는 살기를 선택했다. 꺽꺽거리고 울면서도 걸음을 떼었고, 눈물과 함께 말린 버섯 따위를 삼켰다. 우영은 그 사실에 안도했다. 그냥 가기도 벅찰 판에 살기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가는 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으니까. 그렇다고 성화를 그대로 두고 갈 매정함도 없었으므로, 바람에 울음소리가 섞이는 것 정도는 우영에게 아무렇지도 않았다.
성화를 만난 지 닷새째가 되던 날 아침, 죽은 풀을 밟으니 간밤에 얼어붙은 이슬이 서걱거렸다. 형, 우리 더 빨리 가야 돼. 우영은 아직 잠에서 덜 깬 성화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며 채근했다. 응…. 대답인지 콧소린지 모를 것을 흘리면서도 성화는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우영아. 한참을 우영의 뒤에서 걷던 성화가 불렀다. 왜. 외마디와 함께 흰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빠르게 옮기는 걸음 중간중간에 숨을 몰아쉬느라 토막 난 문장으로 성화가 그랬다. 예전에 들었던 건데,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도, 하나의 현상일 뿐이래. …무슨 소리야, 갑자기. 이렇게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고, 겨울이 오고, 그러는 것처럼, 살아 있는 것도, 그냥 현상이라는 거지. …참나. 현상 중에서도,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현상이래, 살아 있다는 건. 우영은 더는 참을 수 없어졌다. 형. 응. 차라리 울어라, 그냥.
우영의 그 퉁명스러운 말을 끝으로 성화는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언 땅 위에 발소리만 둔탁하게 내려앉는 게 어쩐지 어색했다. 우뚝 멈춰 서니 뒤따라오던 발소리도 멈췄다. 뒤를 돌아보니 성화가 입술을 짓씹으면서 울음을 참고 있었다. 그 모습이 딱하다는 생각에 더해 미안함마저 들었다. 너무 오랜만에 느껴서 생소하기까지 한 감정 앞에서 우영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고, 그래서 반사적으로 나온 말 역시 불퉁했다. 울라니까 왜 참아. 성화는 눈물을 눌러 담느라 띄엄띄엄 답했다. 너는, 왜, 항상, 말을, 그렇게 해? 그렇게가 뭔데. 그렇게, 삐딱하게, 솔직하지 못하게. 참나, 내가 언제? 이거 봐, 지금도.
말이 안 통하네, 진짜. 우영은 다시 몸을 홱 돌려 걸어가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안 그래도 늦었는데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 앞서 몇 걸음을 저벅저벅 걸어나가는데, 제 발소리를 제외하고는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만 귓가에 울렸다. 혹여나 제가 뒤따라오는 발소리를 놓치고 있는 걸까 귀를 곤두세워 봤지만, 성화가 더는 따라오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뒷덜미가 선득거렸다. 하지만 뒤돌아보는 데에는 어쩐지 용기가 필요했고, 우영에게는 그럴 용기가 도무지 나지 않았다.
소름이 돋다 못해 몸이 부르르 떨릴 때쯤 우영은 멈춰 섰다. 돌아봐야 해. 주먹을 꾹 쥐고 마음을 굳게 먹은 찰나, 뒤쪽에서 타박, 타박, 작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그 뒤에 무거운 죄책감이 가라앉았다. 뭐지,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뒤에서 들려오는 성화의 발소리가 저를 따라잡으려고 타박타박, 빨라지는 속도만큼 더 그랬다. 우영은 어느새 걸음을 늦춘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미안해, 우영아. 어느덧 뒤통수 바로 뒤에서 성화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채로 울먹였다. 내가, 미안해, 그러니까, 나, 두고 가지 마.
그날 걷는 내도록 성화의 그 말이 우영을 괴롭혔다. 성화가 우는 게 슬퍼서나 억울해서가 아니라 차라리 울라는 제 말 때문인 것 같았고, 성화가 사과하는 게 정말 미안해서가 아니라 제 비위를 맞춰주려는 것 같았다. 아니, 사실은 성화가 도대체 왜 울고 사과하는지 우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데 이해하고 싶었고, 이해하고 싶은 저 자신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게 싫었다. 두고 가지 못할 걸 알면서 왜 그런 말을 해? 그렇게 물어보면 될 텐데 물어볼 수 없었다.
우영과 성화는 꼬박 하루를 말없이 걸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랬더니 정말 말을 안 하네. 그렇게 말을 건네면 왜 또 그렇게 삐딱하게 말하느냐고 할까 봐 말하지 않았다.
우영은 그 침묵의 시간 동안 앞길에 대해 생각했다. 충분히 따뜻한 곳에, 아니, 지나치게 춥지 않은 곳까지 가닿으려면 얼마나 더 걸어야 할까. 계산은 무리와 떨어지게 되면서부터 어긋났고 성화와 만나고부터는 의미가 없어졌다. 그렇다면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는지 자문하느라, 우영은 제때 멈춰 서는 걸 잊었다.
우영아, 좀 있으면, 해 지겠어. 성화가 그렇게 숨을 몰아쉬고 나서야 우영은 사위가 어둑해졌음을 깨달았다. 아, 씨. 그 뒤로 욕을 더 뱉을 뻔한 것을 꾹 참았다. 주위를 재빠르게 둘러보았지만 앙상한 팔을 위로 치켜든 나무만 드문드문 서 있을 뿐, 하룻밤을 쉬어갈 만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추위가 가까이 다가온 시점에서 바람조차 막지 못한 채 잠이라도 들었다간 영영 깨어나지 못할지도 몰랐다. 우영은 말없이 성화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우영은 부지런히 걸었다. 길의 경계선이 어둠에 녹아들어 도무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걸었다.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면서도 성화는 그만 손을 놓으라거나 천천히 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질질 끄는 발걸음으로 우영의 뒤를 계속 따라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되고서야 우영은 멈추어 섰다. 뺨을 세차게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얼음조각이 섞여 있는 것처럼 아팠다. 내일부터는 틀림없이 눈이 올 것이다. 아니, 원래 오늘과 내일의 경계란 없으므로 눈은 언제고 올 것이다. 눈이 오는 것은 신호였다. 스쳐가는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하는 계절이 바로 뒤꽁무니까지 쫓아왔다는 경고. 이제부터 걷는 길은 계속해서 추위에 떨어야 한다는 서느런 예언.
달이 떠오르기 전, 별들마저 구름 뒤에 가려 버린 완벽한 어둠 속에서야 우영은 먼 곳의 불빛을 발견했다. 그토록 새까만 세상에서조차 눈을 잘못 깜박이면 시야에서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미미한 불빛이었다. 우영은 그 불빛을 향해 일직선으로 걸음을 떼었다. 오랜 세월을 그곳에 서 있다가 말라죽어 버린 나무들을 제외하면 발끝에 챌 만한 것은 바위뿐이었다. 성큼성큼 걷는 우영의 손목을 성화가 양손으로 매달리듯이 붙잡아왔다. 우영은 성화의 손목을 잡은 손아귀에 더 힘을 주어 잡고 앞으로 나아갔다.
어둠 속에서 한 점을 향해 걷는 것은 시간의 결을 헤아리는 일과 비슷했다. 좀처럼 닿지 않는 빛을 향해 나아가며 우영은 제 앞에 남은 계절이 몇이나 될지, 몇 번의 겨울을 더 피해 도망가야 할지 헤아려 보았다. 그리고 그 중 성화와 함께 걷는 날은 며칠이나 될지 문득 궁금해졌고, 그런 생각이 드는 자신이 두려워졌다.
꺼져, 대가리 깨부수기 전에. 빛이 발원하는 녹슨 컨테이너의 문을 열어젖히자마자 우영은 윽박질렀다.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킨 것은 낯선 남자였지만 정작 그 말을 하는 머릿속에는 성화가 떠올랐다. 아니, 정확히는 제 마음속에 자리한 성화의 눈물, 타박거리는 발소리, 가쁘게 몰아쉬는 숨소리 따위에 대고, 우영은 허공에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욕설을 내뱉었다.
질겁해 밖으로 뛰어나오는 남자를 보며 성화가 옆에서 만류했다. 우영아, 그만해, 내쫓지까지 않아도 되잖아. 안 내쫓으면 뭐, 여기서 같이 자게? 우영의 사나운 질문에 모닥불 빛에 희미하게 떠오른 성화의 고개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기가 차서 절로 허, 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형, 제정신이야? 그치만, 지금 내쫓는 건 죽으라는 거잖아. 불 때놓고 잠든 시점에서 죽여달라는 거나 마찬가지지. 우영아, 그러지 말고.
성화의 애원에 가까운 말에 우영은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푹 패인 뺨에 눈빛마저 생기를 잃은 남자였다. 우영은 길에서 그런 이들을 숱하게 보아왔다. 몇 년을 말동무도 없이 홀로 겨울에 쫓겨 다니는 사람들. 지금도 그들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성화와 만나기 전까지 며칠을 혼자 걸었던 우영은 그 고독만은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한숨만 푹 내쉬고 말없이 컨테이너에 들어서니 그 뒤를 성화와 남자가 따라 들어왔다. 우영은 불씨를 밟아 끄며 컨테이너 한구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남자는 우영의 얼굴을 흘긋거리며 우영이 가리키는 구석으로 가 몸을 웅크렸다. 이 형한테 고마운 줄 알아. 우영은 어둠에 잠겨 더는 보이지 않는 구석을 향해 내뱉었다.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우영은 성화의 허리를 감아 안다시피 해 가장 먼 대각선의 구석으로 향했다. 철제 벽에 등을 대고 앉으니 추위가 발끝까지 퍼졌다. 바로 옆에 웅크린 성화의 입술 사이로 덜덜 떨리는 날숨이 비어져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우영은 팔을 벌려 성화를 끌어당겼다. 헉, 하고 숨을 뱉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윽고 성화의 팔이 겨드랑이 밑을 파고들어 왔다. 형, 많이 추워? 바로 턱밑에 수그린 정수리에게 낮은 목소리로 묻자 가슴께에 닿은 고개가 끄덕거렸다. 우영은 성화의 어깨 너머로 두른 팔에 한층 힘을 주며 뺨을 성화의 이마에 갖다 비볐다. 이러고 조금만 있다가 뭐라도 먹자. 그 말에 으응, 하는 낮은 콧소리가 흘러나왔다.
우영은 성화를 끌어안은 채로 포옹을 풀지 않았다. 마른 풀을 입안에 머금을 때도, 억센 줄기를 오래 씹을 때도, 어둠에 잠긴 구석을 노려볼 때도. 이내 저도 모르게 잠에 빠질 때조차, 우영은 맞잡은 손을 놓지 않았고 맞붙인 살갗을 떼지 않았다. 내쫓을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것이 우영이 잠들기 전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던 생각의 끄트머리였다.
우영은 잠에서 화들짝 깨어났다. 눈앞이 일순 번쩍 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숨 쉬는 방법을 잊은 것처럼 숨이 쉬어지지 않았고 다리에 힘을 주는 방법을 잊은 것처럼 몸이 일으켜지지 않았다. 성화의 날카로운 비명과 낮고 긴 괴성이 뒤섞여 들려왔다. 왜, 왜 그래, 형? 묻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으아악! 아악! 성화가 연신 지르는 고함에 뒤섞여 퍽, 퍽, 하는 둔탁한 파열음이 들려왔다. 심장이 일순 덜컥 내려앉았다.
그만해! 자지러지는 듯한 비명만은 크고 또렷하게 입에서 튀어 나갔다. 목소리가 터져 나오자마자 몸의 모든 감각이 한 번에 돌아왔다.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정수리 부근에서 느껴지는 저릿한 아픔이었다. 처음에는 저릿하기만 했던 것이 이내 불에 지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쿵, 쿵, 불규칙적으로 뛰는 심장 소리에 맞추어 통증이 더 거세게 밀려들었다. 아…. 우영은 앓는 소리를 내며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등을 벽에 기댄 채로 눈에 한껏 힘을 주니 시야가 흐릿하게 돌아왔다. 우영은 이른 새벽의 쪽빛 어스름에 떠올라 있는 성화의 시선과 마주했다.
우영아…. 성화의 헐떡이는 숨소리 사이로 제 이름이 잔뜩 떨렸다. 우영의 것과 얽혀든 성화의 눈빛이 삽시간에 젖더니 눈물이 되어 뚝뚝 떨어졌다. 뭐야, 또 왜 울어? 그렇게 묻기도 전에 우영은 성화의 손에 들려 있는 쇠파이프에서 방울져 떨어지는 피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뒤에 미동도 없이 고개를 땅에 처박은 채 쓰러져 있는 남자도.
우영아, 저 남자가, 갑자기 널, 나는, 더 빨리, 어떡해…. 성화가 문장이 되지 않는 단어들을 지리멸렬하게 흩어놓았다. 손에 쥐여 있던 쇠파이프가 미끄러져 떨어지며 떼그르르 굴렀다. 이제는 머리가 통째로 불타는 것 같은 느낌과 싸우며 우영은 한 자 한 자 눌러 말했다. 형, 나 봐, 숨 쉬어. 성화가 초점을 잃은 눈으로 울먹였다. 우영아, 미안해, 우영아…. 우영은 더는 참을 수 없어졌다. 박성화. 우영아, 내가…. 나 보라고.
비로소 성화의 눈물 젖은 눈이 똑바로 제게 향했을 때 우영은 힘주어 말했다. 여기서 나가자, 형.
컨테이너 밖으로 나왔을 때는 세상이 희뿌연 잿빛으로 밝아 있었다. 작은 눈발이 먼지처럼 날렸다. 문득 눈앞에 진득한 것이 흘러내려 손바닥으로 훔쳐보니 피가 시뻘겠다. 우영은 흥건히 젖은 손을 옆으로 무심하게 털어냈다. 정수리께가 여전히 살점을 도려낸 듯 아팠지만 감히 손을 대 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우영아, 흑, 미안해, 미안해…. 성화가 뒤를 따라오며 히끅거렸다. 우영은 뒤를 돌아보았다. 흩날리는 눈 속에서 성화가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울고 있었다. 나, 어떡하면 좋아, 나는….
성화의 그 익숙하기까지 한 모습에 때아닌 웃음이 터졌다. 형. 으응…. 그 새끼가 죽었을까 봐, 형이 죽인 걸까 봐 그래? 응, 그것도 무섭고…. 그리고? 네가, 네가… 아플까 봐…. 씨발, 당연히 아프지, 머리가 깨졌는데 안 아프겠냐? 농담하며 사납게 웃자 성화의 얼굴이 한층 더 일그러졌다. 미안해…. 왜 형이 미안해, 형이 그런 것도 아닌데. 내가 억지만 안 부렸어도…. 그런 사이코 새끼일 줄은 몰랐잖아. 그래도…. 계속해서 말꼬리를 흐리는 데에 대고 우영은 큭큭거리고 웃었다. 걱정하지 마, 안 죽어. 그렇게 말하는데 심장 한켠이 바늘로 쑤시는 것처럼 아팠다. 우영으로서는 난생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두려움이었다.
먼지처럼 흩날리던 눈이 점점 굵어져 급기야 시야를 가리기 시작했다. 눈이 하늘 가득 쏟아지는 날을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이 겪었음에도 눈이 가져오는 고요만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발목보다 높이 쌓인 눈은 뒤에서 따라오는 성화의 발소리와 숨소리마저 집어삼켰다. 폭설은 언제나 나쁜 소식이었지만 머리에서 자꾸만 피가 흘러내리는 처지가 되고 보니 마치 죽음처럼 느껴졌다. 모든 것을 묻어버리는 백색의 고요. 자신이 죽고 없어져도 이 땅에 눈은 계속해서 내릴 것이고 누군가는 그 눈을 피해 계속해서 걸을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마저 죽고 없어져도 눈은 계속해서 내릴 것이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고요한 흰색.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더는 아프지 않았다.
결국 살아있다는 건 제 머리에서 나는 피 같은 게 아닐까 하고 우영은 생각했다. 붉고 끈적하고 어지럽고 고통스럽고 불쾌한. 그런 건 끝나는 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했다. 문득 성화가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도, 하나의 현상일 뿐이래. 현상 중에서도,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현상이래.
우영아. 뒤에서 성화가 불렀다. 형 말이 맞다, 라고 하려던 순간이었다. 쉬었다 가자, 피가 많이 나.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도 한가득 쏟아지는 눈에 파묻혀 작았다. 어쩌면 귀가 잘 안 들리기 시작한 건지도 몰랐다. 쉰다고 피가 안 나나. 그래도, 조금이라도 닦고…. 됐어, 눈 더 오기 전에 빨리 가자. 점점 감각이 사라져가는 발로 눈을 헤치며 우영은 성화의 죽은 친구를 떠올렸다. 어렴풋이 그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고 생각하면서.
하룻밤을 자고 나니 몸에 열이 올랐지만 우영은 계속해서 걸었다. 하지만 이튿날은 도무지 빨리 걸을 수 없었고, 해가 질 때가 되어서는 눈앞이 어지러워 걷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우영아! 뒤따라오던 성화가 새된 비명을 지르더니 연달아 기침을 뱉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잠에 빠지기 전에도 연신 젖은 기침을 들었던 것 같았다. 눈이 내리기 시작한 이후로 제 안에 쌓여 가던 새하얀 고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우영은 일어나려고 시도하는 대신 그대로 땅에 드러누웠다. 계속해서 내린 눈이 옷 속을 파고들어 살갗에 차갑게 와 닿는 느낌이 오히려 기꺼웠다. 눈 속에 처박힌 채로 우영은 성화를 올려다보았다. 눈물이 가득 매달린 눈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난 역시 모르겠는데. 우영은 키들거리고 웃었다. 성화 형. 응, 우영아, 말해 봐. 우리 그만 걸을까?
성화의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쏟아져 뺨 위에 젖은 길을 그렸다. 옆에 쪼그려 앉는가 싶더니, 이윽고 밤을 지낼 때 그러는 것처럼 몸을 눕혀 품에 파고들어 왔다. 응, 그만 걷자.
한 번 지기 시작한 해는 눈 깜짝할 사이에 떨어져 사방이 순식간에 어둠에 잠겼다. 점점 짙은 감색으로 잠겨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우영은 추위가 온몸을 잠식해 오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다행이다. 추위에 어눌해진 발음으로 우영은 웃었다. 품속에서 웅얼거리는 질문이 흘러나왔다. 뭐가? 이렇게까지 추우면, 머리에서 나는 피도 얼 거 아냐. 뭐야, 그게. 그리고, 형 눈물도 얼고. 넌 진짜 말을 이상하게 해, 정우영. 성화가 덩달아 웃으며 떨리는 몸을 더 작게 웅크렸다.
뭐야, 아직 얼진 않네. 우영은 어느새 눈물로 젖어든 제 뺨을 훔치며 중얼거렸다. 이상했다. 슬픈 것도 아닌데 감정이 고장 난 것처럼 눈물이 났고, 추위가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 밤에 눈에 파묻혀 있으니 어느 밤보다 추워야 하는데 춥지 않았다. 문득 어렸을 적 어머니의 핀잔이 무엇 때문이었는지가 떠올랐다. 전날 일기예보에서 첫눈이 온다고 했는데, 그래서 눈사람을 만들러 가기로 했는데 눈이 오지 않아서였다. 이제 눈도 오는데 왜 우냐, 대체. 혼잣말을 중얼거리니 성화의 목소리가 웃는다. 괜찮아, 얼 거라며.
우영은 작게 숨을 뱉으며 품 안의 성화를 더 꼭 끌어안았다. 응, 그때까지 같이 있자, 그때까지만.

김홍중이 아스터를 만난 건 여섯살이 되는 생일이었다. 국가재난관리대책본부 서울지부 센터장이었던 부친 김창현은 다소 이른 감이 있는 그의 성질을 짓누를 생각이 조금도 없는 사람이었다. 홍중아. 똑바로 봐. 이게 너의 전부가 될 거다. 당신의 키 절반도 되지 않는 아들의 어깨를 꽉 잡고는 그렇게 말하던 아버지가 생생했다.
홍중의 눈앞에는 족히 삼미터가 넘어 보이는 유리관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조그만 남자애가 몸을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정확히는 담겨 있었다. 푸른 보존액이 가득 담긴 유리관 안에서 몸 이곳저곳에 전선을 꽂고는 이따금 공기 방울을 뱉어냈다.
아플 것 같아요.
홍중의 감상평에 김창현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홍중아.
‘저것’은 아픔을 못 느낀단다.
아니, 안 느낀다고 봐야지.
그때는 너무 어렸던 홍중은 그저 연구원 몇몇이 들어와 유리관의 상태를 조절하고 보존액에 무언가를 집어넣는 상황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김창현의 수작. 유리관에 담긴 남자애는 아버지가 평생을 갈아 넣은 단 하나의 군사무기라고 했다. 지구의 온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치솟은 지 정확히 백 년이 지난 시점부터 출몰하기 시작한 괴생명체들을 피해 지구 한가운데 커다란 돔을 지어 숨어 살기 시작했던 인류의 삶은 슬슬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돔 바깥은 미지의 세계였다. 중산층 이상의 인구가 모인 지구의 유일한 요람 바깥은 야만인들과 사람을 찢어 죽이는 괴생명체들로 가득한 무법지대로 알려져 있었다. 돔 안의 인구는 그저 중앙에서 한 달에 한번 소탕 작전을 생중계하는 영상을 보고서는 두려움에 떠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하지만 자원은 한정되어 있었고, 흉악범들을 바깥으로 추방하는데도 한계가 있었다. 돔은 영원하지 못할 것이고 인구는 어찌 되었든 가까운 미래에 돔 바깥의 세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인공천장에 구현해놓은 유성우 떨어지는 가짜 밤하늘이 아니라 드론들이 줄지어 서 있는 진짜 밤하늘을 보아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괴생명체에 당해 돌아오는 병력이 늘자 돔 안의 국가 연합은 각 나라에 국가재난관리대책본부를 세우기로 하고 돔을 유지할 방법과 더불어 인류를 지킬 최고의 군사무기를 개발하도록 약속했다.
그렇게 국가재난관리대책본부가 세워진 지 어언 이십년이었다.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중 하나는 김창현의 아들 김홍중과 김창현의 수작 아스터의 탄생이었다.
아이큐 200이 넘어가는 여섯살 아들에게 아스터를 소개해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천부적인 지능을 타고난 아들의 손 아래에서 아스터가 제대로 업그레이드만 된다면. 아스터의 바이털이 실시간으로 찍히는 화면 앞에서 김창현은 매일같이 미래를 그렸다. 아직 다섯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이 조그만 남자애 외형의 것은 회복력이 놀랍도록 높았다. 당연히 수십번을 배양해서 붙여놓은 인공피부가 보통의 것과 비슷할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이것은 기대 이상이었다. 나의 아스터로이드, 나의 작은 종말아. 김창현은 푸르게 빛나는 유리관에 이마를 박고 벅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홍중은 남들보다 빠르게 자랐다. 머리가 크고 몸이 단단해지며 고교과정을 수료하고 아버지의 밑으로 들어갔다. 논문을 내고 중앙에서 보여주는 돔 바깥의 영상 분석 보고서를 썼다. 돔 유지 방안을 강구했고 안드로이드 병력을 대량 업그레이드했다.
아스터는 홍중보다 더 빨리 자랐다. 미네랄과 자극제 비스름한 것들을 섞어 만든 배양액은 아스터의 형체를 만들고 그를 죽기 직전의 실험들에서 가까스로 살려내 주었다. 아스터가 처음으로 배양액 속에서 눈을 뜬 날, 김창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막 직립보행을 시작한 아스터를 밀폐된 셀로 데려갔다.
아버지.
왔니.
김창현과 똑같은 가운을 차려입은 김홍중이 셀 바깥에서 차트를 들고 서 있었다.
첫 실험이다. 잘 봐둬라.
김창현은 이제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연구원 김홍중의 어깨를 잡아 세게 쥐었다. 통유리창 뒤로 아스터의 첫 실험이 준비되고 있었다. 팔목과 발목에 구속구를 채우고 흥분할 것을 대비해서 안대를 씌웠다. 눈을 뜨자마자 묶이게 된 아스터가 새된 비명을 지르자 쇄골 밑부분에 진정제를 주사했다. 까딱하다 돔을 날려버릴 수도 있었다.
반항이 심하네요.
오늘만 그럴 거다.
홍중이 옆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끄덕이며 차트를 쓸어내렸다. 창 위에 띄워진 타이머가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오.
사.
삼.
이.
일.
순식간에 셀 안쪽이 희부연 먼지로 가득해졌다. 아니. 가스인가? 커다란 폭발에 반사적으로 몸을 말았던 홍중이 게슴츠레하게 눈을 떴다.
셀 안에는 온 몸에 총알구멍이 난 아스터가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아버지!! 지금, 지금 뭘 하신-
홍중아. 진정하고 다시 봐라.
홍중이 몸을 덜덜 떨며 셀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사방에 피가 튄 끔찍한 광경 속에서 늘어져 있던 인영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게 아스터다.
떨림을 이기지 못한 눈물방울이 홍중의 볼을 타고 떨어졌다. 서서히 걷히는 먼지 뒤로 보이는 모습은 홍중의 상식선에서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피가 뿜어져 나오는 총알구멍들이 우글거리며 새살을 만들어내는 광경이란. 아스터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박살이 난 셀의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한 번도 총을 맞아본 적 없는 사람처럼. 진정제를 주사한 쇄골 밑에는 벽이 부서진 조각이 박혀있었다. 빠른 회복력을 이기지 못하고 시멘트 조각에 새살이 엉겨 붙으며 핏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틀어막고 있었다.
홍중아.
..네.
뒷처리는 너에게 맡기마.
김창현은 그 말을 하고 난 직후 한 무리의 연구원들을 데리고 상황실을 빠져나갔다. 아버지가 저를 지나쳐가는 그 공기의 흐름 속에 가만히 남아있던 김홍중은 그제야 먼지가 모조리 걷히고 남은 아스터를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안녕.
들릴 리가 없는 인사를 두꺼운 창문 너머로 전해보았다. 아스터는 여태 가만히 앉아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중이었다. 차트에 떠 있던 타이머가 종료를 알리자 셀 바깥에서 잠가놓은 철문이 바람소리를 내며 열렸다.
아버지의 명령대로 뒷처리를 하기 위해 트레이를 끌고 셀 안으로 들어가자 바닥에 흥건히 고여있던 피가 눈에 들어왔다. 셀 중앙에 멀쩡히 앉아있는 이 남자애의 몸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을 수 없는 양. 너 왜 아프다 소리를 안해? 홍중이 트레이에서 스왑을 꺼내며 물었다. 총알구멍이 생겼던 상처 위에 마구잡이로 새살이 돋아 온 몸이 울퉁불퉁했다. 설상가상으로 쇄골 밑에 박힌 시멘트 파편은 살 밑으로 들어가 생살을 잡아 찢지 않는 이상 빼낼 수 없는 상태였다.
네가 아프다 안 아프다 얘기를 해줘야 내가 뭘 해주지.
몸을 닦아주던 손을 멈추고 홍중이 말했다. 아스터는 그 말에 텅 빈 눈동자를 홍중의 눈에 맞췄다. 그러곤 입을 뻐끔거렸다.
뭐라고?
...
다시 말해줘.
난, 안 아파.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겨우 하는 말이 그거였다. 유리관 안에서 태어난 지 얼마 안된 개체라 언어능력이 없다는 아버지의 말이 생각나자 서투른 말투가 이해가 갔다. 안 아프다니. 나의 아버지는 인간이었으면 즉사했을 상처를 입고도 징그럽게 새살이 붙는 이 군사무기에게서 유일한 인간성인 고통도 빼았았다. 홍중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이거 뺄건데. 괜찮겠어?
아스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홍중의 손에 얇은 메스가 들리고 곧이어 시멘트 조각 밑부분의 살을 긋기 시작했다. 칼자국을 따라 빨간 피가 터져나왔지만 아스터는 눈 하나 깜짝 안하고 묶여있는 그 자세 그대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린이의 유치처럼 살덩어리가 붙은 시멘트 조각이 떨어져 나오고 홍중은 그것을 밀봉해 트레이 위에 올렸다. 그 찰나의 순간 사이에도 상처는 금방 회복되어 절개된 자국조차 남지 않았다.
앞으로 내가 너 전담이야.
...
김홍중. 내 이름.
홍중..
텅 비어있던 눈동자에 안광이 서렸다. 마치 자신을 치료해준 연구원을 기억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아스터가 고개를 천천히 돌려 홍중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숱하게 배웠던 실험체와의 라포 형성과 애착관계 같은 것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론은 도움이 안돼. 홍중이 트레이를 끌고 셀을 나오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스터의 첫 실험이 예상보다 성공적이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중앙에서 기존에 계획했던 예산의 다섯배를 보내줬대. 그말인즉슨 아스터의 몸값이 대한민국 원수의 현 몸값과 비등하다는 소리였다. 김창현은 당연히 아들의 어깨를 그러쥐고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요물을 만들었어.
아스터는 그날 이후 본격적으로 소탕 작전에 쓰이기 시작했다. 회복력 뿐만 아니라 민첩성과 파괴력이 상당한 개체더구나. 화면을 통해서 괴생명체를 찢어발기는 아스터를 바라보며 김창현이 중얼거렸다. 아버지의 눈이 빛날수록 아스터가 작전에 차출되는 횟수가 늘어났고, 당연히 홍중이 아스터를 전담하는 날도 많아졌다.
*
백업용으로 붙인 안드로이드 군단이 아스터의 손에 모조리 쓰러진 어느 날이었다.
홍중아.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등에 박힌 철근 주변을 얇은 메스로 잘라내던 홍중이 고개를 들었다. 왜?
넌 내가 안 징그러워?
징그럽다니. 그런 생각은 해본 적조차 없었다. 되려 경이롭다고 해야 맞지. 화면으로 매일같이 보던 아스터의 전투 활약상은 아름답고 무서웠다. 허허벌판인 돔 바깥에 혼자 서서 득달같이 달려드는 괴생명체를 맨손으로 찢던 사람이 지금은 나의 손에 모든걸 맡기고 있다니. 메스를 잡던 손길이 멈칫했다.
한번도 그런 생각 해본 적 없는데.
나는 이렇게 철근 맞고 죽지 않는데도?
응.
다행이다... 멈칫. 고개를 푹 숙인 아스터의 얼굴 위로 눈물자국이 수없이 나있었다. 너, 너 왜 울어. 아파? 이거 그만할까? 아직 고통은 느끼면 안되는데.. 너 요즘 무리한다 했어. 이거 상처 어떡하지.. 아버지한테 말씀드려서 몇 주 동안은 시뮬레이션만 돌리자고 내가 얘기를,
좋아서 그래.
어?
내가 안 징그럽다고 해줘서. 좋아.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아스터가 홍중의 팔을 잡아끌었다. 눈물로 범벅이 되어있던 입술이 천천히 홍중의 입에 닿았다. 첫키스의 맛은 밍밍했다.
...
...
이만 갈게.
..야. 야 너 철근!
뎅그렁 소리와 함께 육중한 철근이 피를 터트리며 셀 바닥에 나뒹굴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강화인간의 구멍난 등만이 홍중을 마주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
모두가 잠든 새벽에도 보존실의 불빛은 환히 켜져있었다. 온갖 모니터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각종 그래프들을 찍어내고 있었고 그 중간에는 커다란 유리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따금씩 뽀그르르 공기방울을 뱉어내며 보존액 한가운데 떠있는 아스터가 보였다.
내가 너 때문에 잠이 안와서 여기 왔어.
유리관 밑에 털썩 주저앉은 홍중이 퉁명스레 말을 뱉었다. 눈을 감고 있는 아스터는 이 말이 들리는지도 모르게 아까와 똑같은 상태 그대로였다.
그렇게 뽀뽀하고 가버리기 있냐?
...
나는 그게 첫.. 뽀뽀였다고.
귀까지 시뻘개진 홍중이 유리관 벽을 주먹으로 쿵 쳤다. 보존액이 출렁거리고 아스터의 주변에 부유하던 공기방울이 터져나갔다.
명명은 주체가 어떤 상황에서 대상의 가치를 인식하고 그 대상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라는데,
아 이게 아닌데. 홍중이 뒤통수를 벅벅 문질렀다. 내가 누굴 좋아해본 적이 있어야지. 아무튼. 아스터는 공식 명칭이잖아. 너 이름 내가 만들어왔어. 연구 가운 안주머니에 소중히 품어온 종이를 펼쳐들었다. 아스터로이드에서 따와서 아스터잖아. 그러니까 너 이름도 별로 지었어. 별 성자에 될 화. 성화.
이제부터 너는 성화야.
유리관 벽면에 입김을 불어 종이에 써놓았던 한자를 옮겨적었다. 네모난 글씨가 다 쓰이기도 전에 보존액 속에서 부유하던 아스터가 홍중의 앞으로 다가왔다.
성화
난 좋아
뻐끔거리는 입모양이 공기방울을 뱉으며 말했다. 푸른 용액 속에서 빛나는 속눈썹과 손끝 따위가 제법 별 같다고 홍중은 생각했다.
*
레드코드, 레드코드 입니다.
지금 아스터 상태는요. 바로 가겠습니다.
홍중이 연락을 받고 급하게 셀로 이동했다. 아침에 작전 갔다온게 화근이었나. 보통 때였으면 멀쩡하게 걸어서 복귀했을 성화가 오늘은 베드 째로 돔으로 실려왔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상태부터 브리핑해주세요.
가장 마지막 업그레이드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보존실에 세시간 있었는데 회복이 하나도 안돼서...
회복이 하나도 안되었다니 그게 무슨,
홍중의 시야에 새빨간 베드와 산소호흡기를 달고있는 성화가 들어왔다.
성화야. 너 왜 그래.
홍중이 축 늘어진 몸을 조심스럽게 잡고 흔들었다. 어쩐지 이송하면서부터 이상하더라니. 왜 몰랐지? 회복력이 더딘 수준이 아니었다. 하다 못해 바닥에 쓸리며 생긴 생채기 조차도 그대로 남아있었다. 손 끝에 닿는 온도가 소름끼치도록 차가웠다. 이렇게 더딘거면 다 터진 장기가 하나도 안 붙었을 텐데, 생각하는 순간 늘어져있던 성화의 눈이 뒤집혔다.
성화야 나 봐. 지금 정신 놓으면 안돼. 제발 나 봐!!
베드가 시뻘건 피로 젖어있었다. 등에 촉수가 박혔다 빠진 상처와 떨어져 부서진 갈비뼈 중 그 무엇도 제대로 나은 것이 없었다. 계속해서 피를 뱉어내는 상처를 급한대로 붕대를 뭉쳐 누르자 성화가 온몸을 비틀었다. 아, 어떡해. 잘난 머리가 고통스러워하는 성화를 보자 보기좋게 멈춰버렸다. 급하게 비상호출버튼을 누르고 추가인력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렸다. 여기, 여기 지금 연구1동 지하 병동 A셀입니다. 아스터 상태가 이상합니다.. 결국 말 끝에 눈물이 서렸다.
..홍중아,
어, 어 성화야. 잠시만 기다려. 곧 연구원들이 올거야. 나 말고 너 낫게 해줄 사람들.
싫어..
호출버튼을 다시 누르려던 홍중이 뒤를 돌아보았다. 운다. 성화가 울고 있었다.
그래놓고 상처의 고통을 참지 못해 온몸이 경련하고 있으면서 힘겹게 고개를 돌려 홍중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프지.. 내가 미안해 성화야, 내가, 내가 잘 했어야 하는데. 전투 중에 이상있다고 했을 때 내가 잘 들었어야 했는데..
홍중아,
네 잘못 아니야. 울지 마. 속죄하는 김홍중을 되려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위로하고 있었다.
김홍중!!
아, 아버지.
철썩 소리와 함께 고개가 돌아갔다. 어?
넌 어떻게 된게 실험체 하나 간수 못하고 이지경을 만들어!!
멍해진 시야에 베드째로 옮겨지는 성화가 보였다.
쟤 어디로 데려가는 거에요. 지금 피 흘리는거 안보이세요?
넌 내 말을 어떻게 들은거냐. 저것한테 정 주지 말라고 몇번을!!
저것. 그 단어를 듣자 순간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아, 김창현에게 성화는 아스터일 뿐이었다. 이 센터에 있는 모두에게 홍중의 성화는 그저 군사무기일 뿐. 똑같이 피 흘리고 아파하는 애인데. 뺨을 맞고 바닥에 쓰러져있던 홍중이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아버지, 아스터 관리 권한 이제 저한테 넘기신다 하셨죠. 이제부터 관리감독은 제가 합니다.
아니. 넌 권한이 없다. 앞으로도 없을 거고.
그게 무슨,
데려가세요.
아버지. 그게 무슨 말, 아버지!!
뒤이어 연구원 두명이 홍중을 붙잡았다. 손이 뒤로 묶이고 목 뒤쪽에 바늘이 닿는 느낌이 차가웠다. 아버지. 아버지!! 곧이어 정체모를 약이 혈관을 타고 들어오는 것이 느껴지고 흐린 시야 뒤로 김창현의 뒷모습이 보였다. 성화 쟤, 지금 상태 이상한데. 아프다고 말 했는데... 눈을 감는 순간까지 성화의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
허억.
홍중이 숨을 들이키며 눈을 떴다.
깨셨습니까.
..여기 어디야.
잘 아실 텐데요.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온통 흰 벽과 줄줄이 늘어선 베드. 아하하... 자조적인 웃음이 튀어나왔다. 아버지가 기어코 나를 셀에 가두는구나. 옆에서 말해주는 형식적인 안내가 조금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베드에 묶인 오른손이 더럽게 끔찍했다.
감시하라고 아버지가 붙였니?
그럼 제가 여기 왜 있겠습니까.
이거 풀어. 수갑을 덜컥이며 홍중이 말했다. 지금 그 잘난 아스터가 멀쩡한 곳이 없는데 나를 가둬두겠다고? 내가 총괄 책임자인데? 쟤 상태 제일 잘 아는건 나야!! 소리질러도 돌아오는 건 명백한 무시뿐이었다.
김 연구원님.
풀어줄거 아니면 말 걸지 마.
아스터는 오늘 내로 무기화가 진행될 거에요.
..뭐?
순간 시야가 까맣게 변했다. 무기화. 단 세글자가 머리통을 죄다 박살내놓는 기분이었다. 순식간에 보존액 속에서 부유하는 성화와 전투에서 겨우 살아돌아온 피투성이의 아스터가 겹쳐보였다. 아, 결국 성화는 아스터일 뿐이었나. 아버지의 유일하고 완벽했던 전투무기. 사람의 인격을 지우고 오로지 무기로서 기능하는 것을 만드려는 아버지의 계획이 결국 성공하고 말았구나. 감히 사랑해서는 안됐는데. 뺨을 갈기며 쏘아붙이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그것에게 정 주지 말라고 했지. 내 사랑이 결국 성화를,
그래서 내가 빼왔어요.
뭐?
멍청하게 되물은 홍중의 앞으로 여상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빼왔다니까요, 아스터. 정말 여상의 말대로 성화가 있어야 할 의무실과 보존실 감시카메라 화면 너머에는 사람의 모습 하나 보이지 않았다. 몰래 빼오느라 모셔오지는 못했고요, 곧 있으면 여기로 올라올 텐데.
여상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화면 끄트머리에 빨간 불빛이 들어왔다. 잠시만 계세요. 벙찐 홍중을 뒤로하고 여상이 가운을 펄럭이며 셀을 나갔다. 홍중은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 있었다. 성화를 빼왔다고? 강여상이? 왜? 무기화 직전의 실험체를 빼왔다고?
셀의 철문이 다시 열리고 여상이 청소도구함을 질질 끌며 들어왔다. 급하게 빼오느라 모시지는 못했다고 했죠? 적당히 감출 곳이 여기밖에 없었으니까 이정도 양해는 하세요. 홍중이 떨리는 손으로 뚜껑을 열자 정말 그곳에는 성화가 있었다. 불과 몇십분 전에 마주보았던 상처들이 흰 붕대로 둘둘 감겨있는 상태로 청소도구함에 구겨져 있는 성화. 여즉 멍해있던 홍중의 수갑이 철커덕 풀리는 소리가 났다.
가세요.
여상아,
중앙 게이트 닫히기 전까지 최소 십오분이에요. 지하실 가면 차 주차되어있는건 아실테고. 그거 타고 도망가요.
여상이 축 늘어진 성화를 조심스레 들어 홍중의 품에 안겨주었다. 조심하세요. 아무리 추적기를 뗐다고 해도 여기 중앙 직속 연구소라 잡히는 건 시간문제니까. 홍중이 쉽사리 발을 떼지 못하자 여상이 등을 떠밀었다. 지금 아니면 나도 형도 다 죽어요!! 그러니까 빨리 가라고!! 셀의 철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리고 끝없는 복도에 비상등이 하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형!!
나가면 꼭 살아요!!
꼭이에요!!
시뻘건 복도 끝자락에서 여상이 소리질렀다. 아직은 축 늘어져 있는 성화를 업은 손에 힘을 주었다. 성화는 분명히 이 돔의 하나뿐인 희망이자 아버지의 평생이었다. 돔 밖에 한번도 나가보지 못한 자신이 성화를 데리고 나가는 것은 명확한 반역 행위이자 자살 행위였음에도 홍중은 지금 당장 성화를 데리고 나가는 것이 중요했다. 살같이 찢겨서 뼈가 훤히 보여도, 피가 베드를 척척하게 적실만큼 온 몸이 뜯겨 와도 아프다 한마디 하지 않던 모습이 사무치게 떠올랐다. 세상이 망해도, 아버지가 나를 버리더라도, 인류 전체가 망하더라도, 하다못해 너를 데리고 나가는 순간 내가 숨이 막혀 죽는다고 하더라도 너를 돔 밖으로 데리고 나가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여상의 말대로 지하실에는 수동으로 조작하는 구식 자동차가 몇대 주차되어 있었다. 한번도 몰아본 적 없는 기종 투성이었지만 홍중은 자신 있었다. 뭐든 잡아보면 알겠지. 옆좌석에 성화를 조심스럽게 눕히고 운전대를 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지하실의 창 너머로 새까만 밤하늘이 보였다.
진짜 밤하늘. 돔에서 꾸며낸 그래픽이 아니라 드론이 빼곡히 배열되어있는 진짜 밖의 밤하늘. 별이 보고 싶다던 성화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때는 별은 무슨 별이냐고 비웃었었는데.
짜여진 삶을 살던 김홍중에게 운석처럼 떨어진 아스터, 성화에게 이제는 자신이 직접 별을 보여줄 차례가 왔음을 홍중은 직감했다. 빌어먹을 세상 따위에게 성화를 뺏기기에는 아직 주지 못한 사랑이 차고 넘쳤다. 인류의 마지막 보루이자 종말의 운석을 훔쳐 달아나고 있다. 하지만 그게 이제는 무슨 상관인가. 설령 돔 바깥에서 유독가스를 들이마시고 그대로 죽는다고 해도, 홍중은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가장 아름다운 종말을 위하여.
홍중이 차에 시동을 걸었다.
장마가 끝나 선선해진 날씨. 9월 초 개강을 맞이하여 대학가는 술냄새로 가득하다. 상하의 모두 세 줄 박힌 검정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자는 가장 구석에 있는 포장마차로 들어간다.
“박성화 왔냐-“
누군가는 취업을 했고, 누군가는 취준을 하고, 누군가는 초과학기를 다닐 수 있는 4학년 2학기. 막학기에 접어들어 동기들끼리 소소하게 개강파티를 했다.
“너네 S급 신청 할 거야? 오늘까지던데.”
“미쳤다고 S를 넣어? 차라리 일반B를 넣지.”
“공익도 B급으로 쳐주냐?”
공무원.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그리고 공공기관의 업무를 맡는 직업. 이들이 사는 델타시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람다시에서 S급 공무원의 역할이 수행된다. A급과 B급 공무원은 보통 베타시, 감마시, 델타시에서 채용된다.
“너네 주변에 S급 공무원 넣은 사람 있어? 실제로 본 적 없거든.”
“나도 없어.”
“엉? 박성화가 아는 사람 중에 한 명 있는데.”
“누구?”
박성화는 남들이 어느 대학에 다니냐고 물어볼 때 2초만에 대답이 나오는 정도 대학의 경영학도다. 중학생까지 검도를 했고 선수까지 준비했으나 고관절을 심하게 다친 후 운동은 접었다. 같은 체육관에 다니던 사람들 중 유독 박성화에게 잘해주었던 형이 한 명 있는데, 그 사람이 2년 전 S급 공무원 신청을 넣고 붙어 람다시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 형이랑 연락이 돼?”
“…아니, 너한테나 잘해줬지 난 허구한 날 등짝 맞았다고.”
S급 공무원에 대한 수많은 소문들이 있다. 예를 들면 일을 못할 시에 생매장을 당한다… 정도? S급 공무원은 단순하게 신청으로만 이루어진다. 신청 조건(만 23세 이상, 성별 무관, 도시 간 이동에 제약이 없음)만 맞는다면 매 분기마다 랜덤으로 20명 채용된다.
이 세상은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 카파, 람다, 뮤 총 8개의 도시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인구가 적은 소규모 도시임과 동시의 최상의 도시라 불리우는 알파시는 쉽게 이주할 수 없다. 반대로 가장 쉽게 이주할 수 있는 도시인 뮤시, 범죄자들을 처벌하고 형벌을 내릴 수 있는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어 범죄를 저지른다면 뮤시로 끌려간다.
많은 대학생 및 직장인들이 거주하는 베타시, 감마시, 델타시. 노년층 및 고아 등이 살아가는 엡실론, 카파시.
한 가지 빠진 곳이 있다면? 모든 도시와의 거리가 가장 먼 람다시. 가장 알 수 없는 도시기도 하다.
“야, 나도 S급 넣어볼까.”
말 없이 가운데 손가락을 올리는 동기와 눈이 왕방울만해진 동기, 이마를 짚는 동기까지 박성화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아쉬울 게 없었다. 붙어도 그만, 붙지 못해도 그만. 베타시든 감마시든 델타를 떠날 생각은 하고 있었던 터라 돈도 많이 벌고. 어차피 가족도 나 혼잔데.
“알파시에 갈 수 있잖아. 그냥은 못 가는 곳이라고.”
“거기에 환상 갖지 마.”
“그래, 남들 다 안하는 데엔 이유가 있어 성화야.”
“3년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정말?”
대학도 4년인데 막학기잖아. 고집 센 박성화는 마지막 잔을 비우자마자 신청할 것처럼 보였다. 너 알아서 하고 꼭 붙어서 자랑하라는 동기의 코를 꼬집었다. 넌 말을 해도.
거짓말같이 신청양식이 간단했다. 이름, 성별, 생년월일, 연락처, 거주지, 가족관계, 그리고 도시 이동에 제한이 없는지. 잠시 소름이 끼쳤다. 신청은 오늘까지인데 결과가 내일 나온단다.
“미리 선정해두고 신청하면 넣어주는 거 아냐? 일정이 어떻게 이래…”
찝찝하지만 당장의 취업길이 없는 박성화는 신청 버튼을 누르고야 만다. S급 공무원은 오직 신청으로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채용 시 거부가 불가하다. 뭐, 이주 당일 죽어서 거부하거나 하진 않을 테니. 가족이라고 본인 한 명 뿐이라 걱정될 건 없었다. 신청은 이미 끝났으니 어쩔 수 없고. 마지막 학기지만 3일이나 학교를 간단 사실에 절망하며 일어났다.
이번 학기는 꼭 열심히 살 거라는 결심과 동시에 하염없이 졸리기만 한 오리엔테이션 주간에 3시간 꽉꽉 수업으로 채운 교수를 욕하며 불을 붙인다.
“꿀강이라며, 누가 오티부터 풀강을 때리냐? 미친교수.”
“너 이거라도 아니었으면 2학점 때문에 계절행이야. 필라테스 듣기 싫다며?”
“그래, 고~맙다. 참, 너 신청 결과 나왔냐?”
나왔나? 눈 뜨자마자 모자 눌러 쓰고 나오는 바람에 미처 문자 확인을 하지 못했다. 핸드폰을 꺼내들고 메세지 아이콘을 누르는 순간 왼검지와 중지 손가락에 걸쳐있던 장초가 땅으로 추락한다.
“얏,”
붙었다. 동그란 눈을 크게 뜨니 더 동그래 보였다. 본인도 될 줄 몰랐다는 듯 입을 막고 좋아한다.
“실험자 전형..? 아 몰라, 너 알파시로 가게 되면 나 좀 어떻게 안되냐?”
“거기에 환상 갖지 말라며, 나한테도 천국의 문이 열리는 건가-”
당장 다음 주에 도시 이동을 진행해야한다. 나 이렇게 돈만 보고 신청버튼 하나도 쉽게 취업해도 되는 걸까.
처리해야할 것들이 상당히 많았다. 학교부터 시작해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편의점, 카페, 동아리 등 사람들과의 작별도 필요했다. 그리고 람다시에서 살아가기 위해 정보수집도 필요했다. S급 공무원이 어떤 일을 하는 지 정확하게 알진 못했다. 워낙 보안이 철저하기 때문에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어느정도 사람이 하는 일이겠거니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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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람다시는 훨씬 컸다. 묘하게 숨 막히는 것 같지만 기분탓이겠거니 넘기고 신분증 재발급 및 직급 배치를 위해 중앙센터로 갔다. 박성화는 실험자였고 도시 이동으로 인한 신분증 재발급도 빠르게 마쳤다. 근무 센터 안에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었다. 숙식은 기본이고 샤워장도 칸마다 문 달린 개인 샤워장이었다. 이 거대한 센터장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간혹가다 센터 옆 병원으로 나가는 사람밖에 마주치지 못했다.
“원래 이 시간에 사람이 없…나요?”
“네, 3일 후부터 전체 일과 시작이라서요. 방은 여기 사용하시면 되고, 1인실이에요. 이제 업무에 대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이 센터는 ‘아프로실’이라는 약물 실험 센터다. 아프로실은 노화 방지, 생명연장, 치료 목적의 약물이다. 개발팀이 만든 아프로실이 제대로 만들어진 건지 실험자들에게 투여한다. 투여 후 몸에 일어나는 이상반응, 뇌파 등을 분석한다. 실험은 2주에 한 번 진행되며 실험을 연속 6차례 성공한다면 한 달 간 휴식을 취한다. 부작용은 대부분 즉시 나타나기 때문에 2주 간 격리에 들어간다. 격리 후에도 약물로 인한 상태가 나아지지 않는다면 ‘처리장’으로 끌려가 처리된다.
그렇게 3년을 반복해 단 한번의 실패도 없이 성공한다면 1순위로 알파시에 갈 수 있으며 3번 이하의 실패를 가지고 성공한다면 2순위로 알파시에 갈 수 있다. 꼭 알파시에 가야 하는건 아니지만, 건 당 받는 돈의 액수가 어마어마 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최상의 도시 알파시에 가서 평생 돈 쓰며 편하게 살길 원한다. 그에 맞게 일생에 얼마나 생길 지 모르는 알파시 이주 권한이 생기는 것이다.
“이해 안되신 부분은 언제든 물어보시구요, 임상 실험이다보니 부작용과 별개로 갑자기 사망하시는 분도 계세요. 생명 수당으로 입금 될 금액입니다. 확인하시면 보안서약서 작성하시고.”
이게 합법적으로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일인가. 선입금 금액조차 델타시에서 취업했으면 평생 만져볼 수나 있는 금액인가. 보안서약서는 대충 읽어도 센터에서 하는 내부 실험내용 발설 시 즉결처분한다는 내용 같았다. 이렇게 임상실험을 해서 수출하는 곳은 엡실론과 카파정도라 예상한다.
일과 시작 전 3일 간 밖은 자유롭게 나갈 수 있다고 하여 아르바이트하며 모아두었던 돈으로 돌아다녀볼 생각이었다. 아직 본 실험은 시작도 하지 않았기에 수당이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센터 실험실 직원 출입증 만들 때 적어 낸 통장으로 실험수당, 기초수당이 차례로 들어왔다. 과연 액수는 어마어마하다. 람다시 자체가 실험을 위한 도시이기 때문에 돈이 많은 것도 있지만, 이 모든 분야는 알파시에서도 후원받는다.
어찌보면 대가다. 임상 실험을 통해 완성품을 수출하여 수익을 얻기 때문에. 사람의 생명을 돈 주고 산 것이다. 이런 불법이라 해도 믿을 임상실험을 나라에서 공무원이라고 채용하다니, 영 찝찝함이 가시지 않는다. 당장 센터 밖의 람다시도 궁금했지만, 가장 궁금한 건 내가 살아가고 돈을 벌 이 센터. 지하8층부터 지상10층까지 총 18층의 이 건물을 하루동안 돌아다녀볼 예정이다.
1층부터 4층은 직원들의 생활공간이라 구경할 수 없었다. 5층부터 7층은 격리실, 8층은 라운지, 9층부터 10층은 출입증을 찍어 인증된 사람만 출입할 수 있었다. 어찌보면 입사한지 한 시간 된 박성화는 당연하게 출입이 되지 않았다.
지상층에서 그나마 갈 것 같은 곳은 8층의 라운지. 나름의 구색을 갖추었다. 꽤나 비싸보이는 카우치부터 시작해서 바같이 보이는 곳도 있고, 카페처럼 보이는 곳도 있고. 편한 휴식공간 같아보였다. 카페 구석에는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 둘이 대화를 하고 있었다.
지상이 생활시설같은 곳으로 취급하다보니 지하에나 볼 게 있다 싶어 내려갈 수단인 엘리베이터로 몸을 돌리려던 순간, 두꺼운 서류뭉치를 들고 가던 남자와 부딪혔다. 대충봐도 저보다 십 센티미터는 커 보였다. 먹물같이 까만 머리와 뽀얀 피부의 남자가 들고 있던 서류들이 휘날렸다.
“아,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잠시 다른 생각 하느라.”
“괜찮습니다. 이거요.”
떨어뜨리셨는데. 4월 3주차라고 쓰여있는 봉투를 주워주며 처음으로 남자와 눈을 마주했다.
“바쁘세요?”
“네?”
“아니신 것 같은데. 같이 지하4층 좀 가주세요, 보시다시피 받을 손이 없어서.”
초면에 이게 무슨 똥매너인지. 저 웃는 모습도 개같다. 아, 큰 강아지.
어차피 지하로 내려가던 참이었다며 엘리베이터로 먼저 걸어갔다. 남자는 뒤 따라왔고 엘리베이터에 같이 타자마자 서류뭉치의 반을 박성화에게 넘겼다.
“이걸 왜 나줘요? 무겁게.”
“있어봐요. 지금같은 시기에 돌아다니는거 보면 센터 온 지 얼마 안되신 것 같은데, 지하4층 가는 법 모르시잖아요.”
코웃음이 나왔다. 버튼 누르고 내려가는게 뭐 어렵다고 짐까지 맡기면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는가. 지금 지하로 갈 생각이었다고 꿍얼대며 버튼을 보았지만 B4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때 남자의 팔에 걸려있는 사원증 뒷면이 눈에 띈다. 사원증 뒷면엔 출신 도시, 보직, 근무지, 그리고 개인 바코드가 있다. 이 남자의 출신 도시는 알파시, 보직과 근무지는 (-) 표기. 무슨 의미인지 곰곰히 생각하다보니 지하3층에 도착했다. 다시 서류뭉치를 저에게서 가져가며 보인 이름, 정윤호.
“지하4층은 마음대로 못 가요. 따라오세요.”
지하3층에서 통로로 이어진 지하별관 끝 쪽에 철창같은 것이 보였다. 그곳을 지나진 않았지만 매우 수상해보였다. 이런 통로에 사람이 다닐 수는 있는 곳인지 공기도 탁하며 냄새도 쿰쿰하다. 태양빛이 일절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무얼 하겠다고.
“윤호씨, 지금 되게 수상한거 아시죠.”
“내 이름 아네요? 알아요. 질문은 이따가.”
창고 같은 곳에 비밀번호를 치더니 사원증을 인식하고 서류 뭉치를 대충 누군가에게 던져넣는다. 안에서 알아서 처리해줄 거라며 빨리 돌아가자고 한다. 지금 이 3초를 위해. 아… 나 얘 진짜 싫다.
정윤호는 빠르게 라운지로 다시 올라와 창가 쪽 카우치로 안내한다.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 지라 당장이라도 소리 지르고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애초에 도움을 승낙한, 승낙? 억지로 도와준 내가 불쌍하여 얼굴 마주보고 엉덩이를 붙였다.
“뭐예요?”
“물어보세요. 궁금한거.”
“저 이 센터 오늘 처음 왔어요. 아는 것도 없는데 궁금한게 있겠어요?”
“음… 그럼 제가 물어볼게요. 이름 뭐예요?”
박성화는 질문을 들은 직후부터 약 0.8초정도. 이름을 알려주었을 때 생길 일과 알려주지 않았을 때 생길 일을 예상해보았다. 빠른 판단으로 박성화, 세 글자를 뱉으니 예쁜 이름이라며 여러 차례 곱씹어본다.
구경이 목적이라면 지하는 미리 가지 않는 게 좋을 것이라 신신당부하는 정윤호에 알겠다고 답하고선 질문을 바라는 눈빛에 이기지 못하고 왜 9층부터 10층은 아무나 갈 수 없고 지하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하 4층은 왜 엘리베이터를 타고 갈 수 없는지 등 속사포로 뱉었다.
우선 10층은 상황통제실이라 하였고 9층은 9층에만 출입하는 특정그룹들이 있다고 했다. 크게 거창한 건 없다고 했고 지하에선 보통 실험이 진행되기 때문에 약품이 많기도 하며 현재 실험기간이 아니기에 어느 약품이 어디에 굴러다니는지 몰라 위험해서 그렇다고 한다.
그러면 실험이 시작되는 기간에는 그 위험을 누가 처음으로 감수하냐 묻자 입을 꾹 다물었다. 약간의 정적 후 지하 4층은 ‘처리장’으로 연결되는 곳이라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특히나 실패실험자가 아닌 사람들은 더더욱.
“3일 뒤부터 3분기 정식 실험이 시작돼요. 실험자로 왔죠?”
“…뒷조사 했어요?”
“하하… 신규 센터원 정보는 제가 관리해서요, 저보다 한 살 많으시던데.”
”아…”
“편하게, 응? 편하게 하셔도 된다구요. 말도. 네 말고 응. 어차피 많이 마주칠 텐데.”
처음부터 끝까지 수상한 점이 마치 이 센터를 나갈 때까지 엮일 것 같다…정도. 굳이굳이 18층짜리 건물에, 8층 라운지에서, 내가 나온 시간에, 서류를 들고 부딪혀서,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지하4층에 같이 발을 들였다.
“…그래라.”
3분기 정식 실험 기간 첫 날, 딱히 정해진 일과는 없다. 평생 만져보지도 못할 거액을 받으며 생활하지만 이렇게 아무것도 안해도 되나 싶다. 하지만 센터에 들어올 때 약속된 3년이라는 기간이 끝날 때까지 통신망이라곤 1층 로비에 있는 공중전화가 끝이다. 센터 내에선 무전기 및 송신기만 사용하도록 규정되어있다.
“아… 심심해.”
운 좋게도 첫 날 세 번째 타임 실험인 박성화는 오후 전까지 진한 숙면을 취하고 여유롭게 기상했다. 말그대로 자유의 몸인 박성화는 전 날 무리하여 밖을 돌아다녔다. 센터에서 언제 나갈 지 확실하지 않으며 박성화가 지내게 될 새로운 도시였기에 잠을 줄여가며 눈에 세상을 입력했다. 곧 점심시간이고 실험 당일이니 특식 먹을 생각으로 이르지만 식당에 내려갔다.
‘실험자에 해당하시는 분들은 실험 당일 기존 세 끼와 더불어 특식이 제공됩니다. 식사를 거르지 마십시오.’
센터 식당 문에 붙어 있는 문구다. 보통 임상실험이라 함은 공복상태에서 이루어진다. 이 센터에서의 실험은 개발 단계지만 꼭 속을 든든하게 채워두어야 한다. 아니면 버티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 델타시에서 먹으려고 아르바이트 했던 결심을 가지고 특식을 털어주리라.
“성화 형!”
아. 개다. 언제 그렇게 자주 봤다고 호칭이 형으로 바뀌었는지 어이가 없을 찰나에 옆에 있는 사람보다 한참 쌓여있는 밥을 보고 웃음이 나오더라. 저 덩치는 식성에서 나온 덩치겠거니,
“언제 왔니.”
“얼마 안됐어요. 한 10분?”
“너는 오늘 뭐해?”
“음… 돈놀이?”
아…그래. 정윤호 못지 않게 쌓아온 밥을 크게 한 술 뜨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사원증이라고 들고 다니면서 보직도 미공개, 근무지도 미공개. 3분기 첫 실험 시즌에. 그것도 첫 날에. 하는 일은 돈놀이. 수상하다못해 무서울 지경이다. 박성화는 시간이 지날 수록 정윤호에게 많은 정보를 주는 것 같았지만 그에 반해 정윤호는 박성화에게 의문만 더해주고 있었다.
델타시 모 대학의 학식과는 차원이 다른 맛이다. 허구한 날 요상한 것만 튀겨버리는 학식을 뒤로하고 편의점 가서 라면 까던게 하루이틀이 아니다. 오랜만에 밥 다운 밥을 먹는 것 같았다. 열심히 그릇을 비우던 와중 머릿속에 스쳐지나간 생각. 아, 지금을 즐겨야 한다.
“형, 첫 실험 파이팅입니다. 실험 직후 저와 마주치지 않길 바라요. 식사 맛있게 하세요!”
정말 개자식이 따로 없다. 이쯤되면 박성화는 정윤호 손에 놀아나고 있는게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 뭐하는 지도 모르는 키 큰 놈이 말하는 대로 모든게 이루어진다. 짜증을 뒤로 하고 환상적인 특식까지 위장으로 밀어넣는다.
너무 많이 먹었나 싶지만 특식까지 주며 든든하게 먹으라는데 마다할 이유 또한 없기에 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며 지하 2층으로 내려간다. 지하는 2층 단위로 끊겨있다. 지하 1층과 지하 2층이 같은 그라운드에 층으로 나뉘어져 있고 3층과 4층, 5층과 6층, 7층과 8층 이런식으로.
“코드번호 H-4323 박성화, 제1실험실로 들어가세요.”
지하2층에 사원증을 찍고 들어가자마자 문 앞에 방호복을 입은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 실험실을 안내한다. 모든 것이 낯설었던 박성화는 걸음걸이 하나하나가 조심스럽다. 동시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정말 하는구나, 임상실험.
실험실 안은 생각보다 훨씬 쾌적하고 넓었다. 온갖 약품이 들어있는 약장과 뇌파 분석기기, 심전도기 등…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었지만 거부감은 덜했다.
“MRI 찍어보셨어요? 방식은 비슷합니다. 이거 착용하고 누우시면 되고요. 주의할 점은…”
한창 고관절 치료 받을 때 수도 없이 사진을 찍고 영상을 찍었기에 방식은 몸에 익어있다. 주의사항을 꼼꼼하게 듣고 머리에 새기는데 첫 날 직원에게 들었던 설명도 떠올랐다. 부작용과 관련없이 사망하였다는 것. 그게 본인만은 아니길 바라며 장비착용 후 누웠다. MRi와 다른 점은 모양이 관과 같다는 것.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구요. 서서히 잠드실 건데 몸이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움직이셔야 해요. 본인이 생각했을 때 몸이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바닥 두어 번 치세요.”
총 실험시간은 회복시간을 포함하여 2시간 40분 정도. 분석결과는 이틀 뒤에 나오며 부작용은 즉각적으로 반응이 온다고 한다. 가장 무서운 부작용은 중독 및 환각증세. 약물 투여와 관찰이 2시간동안 진행되고 40분은 보통 회복시간이다. 실험이 끝나면 특식과 저녁을 먹고 또 잘 텐데. 하루 내내 자고 밥 먹고 자고 밥 먹고.
다행스럽게도 멀쩡하게 1차 실험이 끝났다. 한 달에 두 번 진행되는 실험이기 때문에 다음 분기 즈음 통장이 채워지겠거니 싶었으나 회복시간이 끝나고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돈이 들어왔다. 여전히 미친 금액. 실험 전 생명수당, 실험 후 본수당. 이걸 눈 딱 감고 일흔 번 정도 반복하면 된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센터에 적응하고 쌓여가는 돈에 흥미를 잃어갈 때쯤 1년정도가 지나고 2분기가 시작되었다. 약 서른 번의 실험동안 부작용 한번 없이 성공으로 돌아왔고 나름의 친구도 사귀었다. 동갑이었고 박성화보다 약 3개월정도 일찍 센터에 들어왔다. 라운지에서 자주 놀며 서로의 실험 날이 다가오면 간식도 챙겨주고 그랬다.
아, 정윤호와도 꽤나 가까워졌다. 박성화의 의도완 다르게. 지나가다 자연스레 마주하면 인사정도 할 생각이었으나, 정윤호는 시도때도 없이 박성화와 마주쳤다. 마주할 때마다 실험 끝났는지, 뭐 할 건지, 외출 나갈 건지, 밥 먹었는지, 커피 마실 건지, 라운지 갈 건지. 끝도 없는 질문 세례에 한번은 할 일이 그렇게 없냐고 묻자 없었으면 좋겠다고 답하더라. 아직도 이상하다.
실험이 끝난 ‘성공자'들은 보통 보류기간 이틀 후 외출을 나가곤 한다. 센터 내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영화를 보러 간다던지, 바다를 보러 간다던지. 체험이나 문화 생활을 즐기러 나가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외출 신청을 사흘동안 하고 이틀 밤 내내 피씨방에만 있기도 한다. 센터 방에 컴퓨터가 없는 것이 아니지만 게임을 다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형 제발…”
“시간이 얼마나 있다고, 너 할 일 좀 없었으면 좋겠다며.”
“그냥 한 말이죠오…”
“나 말고도 친구 많잖아 너.”
정윤호가 빈다. 방까지 찾아와서. 개 꼬리뼈에 쥐나겠다. 1분기 마지막 실험이 이르고 2분기 첫 실험이 2주차 타임인 박성화는 시간이 꽤 널널하다. 그를 아는 정윤호는 같이 외출하자고 30분 째 설득하고 있다. 형을 위한 데이트코스라며 같이 전시회를 보러 갔다가 노을이 질 때쯤 바다 근처 오션뷰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카페에서 음료를 테이크아웃하여 해변가를 걷자는 것이었다. 박성화는 무슨 우리끼리 데이트코스냐며 빨리 실험을 해버리고 싶지만 차례가 오지 않아 답답한 마음을 너가 아냐며 거절에 거절을 더했다.
“형. 답답하죠, 답답하죠? 아아, 가슴이 답답한 게 꼭 바다를 보러가면 뼝 뚫리겠네!”
“알았어. 가자. 언제로 신청해?”
“헷. 2일 후로 잡아주세요. 아침먹고 준비해서 가요. 오후부터 내일까지 저 못 볼 거예요. 보고 싶어도 참아요.”
저 윙크하는 왼눈을 어찌하면 좋을까. 아마도 나가지 않았더라면 주먹이 반응했을 지도 모른다. 어쩜 저렇게 사람이 밝지만 속 모르게 호감으로 생활할 수 있지-라 생각하며 실험차례나 왔으면 좋겠다고 한숨을 뱉는다.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는다. 미래의 알파시 생활을 떠올려본다. 그러다가 자각한 현실. 지금 나에게 좋은 것은 없다.
-
정윤호와 약속한 그 날, 아침에 일어나 식당으로 내려가자마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살이 좀 빠진 것 같기도 하고. 정윤호의 말대로 이틀동안 볼 수 없었다. 평소만큼 산처럼 밥을 쌓아두고 먹지도 않았다. 괜찮은 컨디션인지 물어보려던 찰나 남은 밥을 버리고 나갔다.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식사 후 얼마 전 외출 때 샀던 옷을 매칭했다. 정윤호 성격 상 컨디션과 별개로 먼저 하자고 한 일을 무르지 않기 때문에 특별히 신경 써 기억에 남는 날로 만들어 주고 싶었다.
약속한 시간 즈음 되니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평소의 정윤호라면 또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박성화를 반길 것이고, 당연하다는 듯 박성화의 방 앞에서 기다릴 것이다. 왼쪽 손목 위 시침과 분침의 술래잡기를 구경하며.
그리곤 틀리지 않은 예상. 정윤호가 기다릴 것 같아 박성화는 평소보다 빨리 나왔다. 그런 박성화를 예상했다는 듯 방 앞에 있는 정윤호. 원래 이렇게 일찍부터 기다리는 건지, 아님 운 좋게 타이밍이 맞았을 지도 모르겠다.
“많이 기다렸어…?”
“아니요, 빨리 가요.”
눈을 마주하자마자 오늘따라 잘생긴 것 같다며 눈꼬리가 휘어지게 웃는다. 얇디 얇은 박성화의 손목을 잡고 출구로 이끈다. 분명 컨디션이 좋지 않아보였고 기분도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았던 정윤호가 이틀동안 너무너무 보고싶었다고 방방 뛴다. 또, 개 꼬리뼈 쥐나겠다.
생각보다 데이트 코스는 본격적이었다. 전시회와 식당, 카페까지 써놓은 메모지를 읽으면서 작은 초콜릿 하나 까주었다. 차를 타고도 꽤 나가야 하는 바닷가 근처 좋은 식당은 언제 어떻게 알아봤는지 예약까지 되어 있었다.
센터와 꽤 먼 거리에 있는 전시회장은 ’유토피아’를 주제로 한 알파시 주최 전시회가 열려 있었다. 사진이 아닌 그림으로 만들어진 전시회는 평소 박성화가 바라던 이상향과도 같은 알파시를 간접적으로 구경하는 것 같았다. 높은 건물들과 구름이 예쁘게 배치 되어있는 하늘, 냇가에 여러 높이로 쌓여있는 돌 등 넋 놓고 보게 된다.
하지만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면 상식적인 색이 아니라는 것. 건물들 사이의 가로등 불빛이 초록색이라거나, 태양빛이 푸르다거나. 타 도시의 이상향 그 자체인 알파시에서 바라는 이상향은 차별화가 되었다. 기괴할 정도로.
전시회장 끝에 있는 작은 소품샵에서 열쇠고리를 구매했다. 분홍색 세잎클로버와 파란색 네잎클로버. 따로 포장 해달라고 하는 박성화를 보며 왜 굳이 그러냐 물어봤으나 검지 손가락을 흔들며 몰라도 된다고 했다. 아무래도 누군가에게 주려는 것 같았다.
소품샵까지 갈 줄은 몰랐다고 생각보다 더 좋아하는 것 같은 박성화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전시회장과 많이 멀지 않은 식당은 음식부터 대우까지 부족한 게 없었다. 예쁜 바다가 보이고 테이블 간 파티션 간격이 넓었기에 작은 소음 외에는 서로의 목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나 기분이 되게 좋다, 윤호야.”
“다행이에요. 형이 좋으면 저도 좋아요.”
“아침에 식당에서 너 봤는데 컨디션 별로인 것 같길래 꾸미고 나왔거든.”
“어쩐지 특히나 잘생겼더라, 식당에서 전 못 봤는데...”
꽤나 아쉬운 입꼬리다. 거기서 불러도 못 들었을 거라며 같이 나와준게 고맙다고 덧붙인다. 거의 마친 식사에 박성화는 자켓 주머니를 뒤져 작은 봉투 두 개를 꺼냈다. 전시회장 소품샵에서 산 열쇠고리다. 작은 봉투를 만지작 거리며 테이블에 올려두는 소심한 손을 쫓는다.
“뭐예요?”
“하나 골라봐.”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왼쪽에 있는 봉투를 고른다. 투명한 포장지가 아니기에 어느 봉투에 파란색 네잎클로버가 들었는지, 분홍색 세잎클로버가 들었는지 모른다. 먼저 선택권을 준다는 듯 봉투에서 손을 뗐던 박성화는 남은 봉투를 가져간다. 정윤호는 분홍색 세잎클로버를 꺼내보았다.
“세잎클로버는 행복을 뜻한대. 그건 네 고향에서 온 행복. 내 거는 네 고향에서 온 행운. 너무 수상했던 너랑 만나서 행운이고, 행복하고.”
정윤호는 당장이라도 울 것만 같았다. 단순히 전시회가 만족스러워 기념으로 산 것이라 생각했는데 사실 카페에서 주려 했으나 빨리 주고 싶은 마음에 꺼냈다는 박성화의 말에 크게 감동받았다. 실험자인 박성화는 실험 날이 아니면 활동적으로 돌아다니는 스타일이 아니기에 자연스럽게 마주할 날이 많지 않았었다. 대부분의 만남은 정윤호의 의도가 담겨있었다.
“정말 저 만나서 행운이에요?”
“응. 너가 센터에서의 첫 친구잖아. 그리고… 뭔가 자주 마주치는 것 같기도 했고.”
식당에서 나와 카페를 들러 타르트 두 개를 포장하고 돌체 라떼와 딸기 라떼를 사서 해변 산책로를 걸었다. 바로 센터에 갈 수 있음에도 해변 산책로를 꼭 걷고 싶다는 정윤호의 바람을 받아들였다. 적당히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걸음 속도를 맞추었다. 박성화가 센터에 오게 된 이유와 계기부터 알파시에 가고 싶은 이유까지. 쉽게 말할 수 없는 가정사를 조곤조곤 털어놓았다.
“...그래서 혼자 사는게 많이 외로웠어. 돈 벌면서 학교 다니는 게 재미도 없었고… 델타시에 질렸달까.”
“형은 알파시가 그렇게 가고 싶어요?”
“응, 이주하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게 알파시잖아. 돈이 많든, 적든.”
정윤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고향에 대한 동경이 어색했다. 박성화에겐 어린 나이에 람다시 센터로 온 정윤호가 이상할 정도로 의외였다. 탄생지가 알파시인데 왜 굳이 힘들게 센터에서 일하는가. 그렇게 둘의 보폭은 산책로의 끝에서 같아졌다.
사고다. ‘격리자' 혹은 ‘실패자'로 돌아온 적이 단 한 번도 없던 박성화에게, 계약 기간동안 얼마 남지 않은 실험에서. ‘격리자'로 분류됐다. 여느 때와 같이 약물 투여 후 행동관찰 과정 중 갑자기 기침을 많이 하더니 그 자리에서 속을 게워냈다. 손이 떨리면서 떨어지는 눈물은 비명소리에 묻혔다. 즉시 투여 중단 및 관찰 종료.
6층 격리실으로 실려가던 와중 시야가 흐려지고 맥박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박성화는 이러다 죽는 건가라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맺힌 눈물이 피가 아니길 바랐다. 그리고 떠오른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누구보다 박성화의 안부를 많이 물어보고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사람. 정윤호. 나 살고 싶어 윤호야.
박성화는 2주 간 격리에 들어간다. 다행스럽게도 박성화의 회복력은 나쁘지 않았고 격리 3일 만에 가벼운 움직임 정도는 가능한 수준으로 돌아왔다. 격리관찰 중 대부분의 수치가 정상이었다. 가끔 시야가 흐릿하고 목과 팔이 간지러웠다. 그정도는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며 회복상태와 상관없이 딱 2주 간 격리한다고 했다.
희생 없이 찾아오는 행복이 어디 있으랴. 박성화는 격리하는 동안 많은 생각이 들었다. 여태 잘해왔던 실험에서 갑자기 신체의 거부반응으로 인해 격리된 점이 너무나도 화났다. 동시에 저 많은 실험자 중 격리자가 본인이며 무얼 위해 그렇게 아파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단순히 엡실론시와 카파시의 행복을 위해서? 처음에는 간절하지 않았던 알파시가 실험을 더해갈 수록 간절해진다.
알파시까지의 여정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열 번도 남지 않은 실험을 당장 끝내고 싶다. 빨리 그 두꺼운 주사바늘이 내 혈관을 뚫어 약물이 들어왔으면 한다. 그렇게 눈을 감고, 팔이 저려오는 걸 느끼며, 두통을 달고, 잠에 든다.
그 날 밤, 박성화는 꿈을 꾸었다. 한 번도 겪지 못한 센터 지하 4층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지하 3층에서 통로로 내려가 허가된 출입증을 인식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다. 철장으로 둘러싸인 그 곳은 마치 무저하와도 같다. 통로로 이어진 만큼 별관이라고 이해하면 쉽다. 그 아래로 얼마나 더 내려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지상으로 따지면 2층 정도의 층으로 나뉘어 1층은 시스템이 돌아가는 곳과 집행실, 2층은 여섯 개 정도의 통유리창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지하 높이부터 어디까지 떨어지는지 모르는 바닥은 매우 뜨거운 온도의 모래가 끝도 없이 순환되고 있다. 집행실에서 무더기로 떨어지는 ‘실패자'들은 끝도없이 모래로 뒤덮인다. 집행실 맞은 편 온도실과 연결된 수로에서 나오는 물은 모래를 단단하게 만들어 ‘실패자'들이 올라오기 힘들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렇다면 통유리창인 2층에선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저 ‘실패자’들이 1층까지 기어 올라와 살아 남을 수 있는지 베팅을 한다. 사람을 상대로 도박하는 것이다. 어마어마한 액수가 걸린 불법도박판의 시작은 알파시다. ‘실패자'들의 정보는 지상 9층에서 서류로 확인이 가능하다. 실험과 격리, 처리 모두 2주에 한 번씩 이루어진다. 각 분기 마지막 실험 후 무조건 공백 3일이 생기게 되어 있는데, 이 때부터 서류 확인 후 베팅을 하는 것이다. 다음 분기 첫 생존자가 누구일지. 그리곤 지하 3층 통로 사이 사무실에 서류를 ‘삭제'하는 과정이 진행된다.
이러한 도박판을 아는 사람, 알파시 마이너거리 투기장의 간부들이다. 람다시 실험에 투자하는 사람들이며 알파시 출신들은 이를 모를 리 없었다. 그렇게 생존한 사람들은 바로 알파시로 넘겨버렸고 약물 과다투여 부작용 중 하나인 [환각]의 영향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알파시는 없는 세계와도 같았다. 세상의 모든 도시 중 인구가 최소이며 자살율 1위인 최상의 행복도시. 모순에 모순을 더한 도시 그 자체다.
박성화는 ‘실패자'로 분류되어 집행실에서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모래로 빠졌다. 재활 치료를 중단했던 고관절이 저려왔고 빠른 속도로 빨려들어갔다. 거의 턱 끝까지 차올랐을 때 실험실부터 흘렸던 눈물이 신호를 보냈는지 정윤호가 눈 앞에 보였다.
그렇게 꿈에서 깨고 베개가 젖을 정도로 식은 땀을 흘린 박성화가 진정을 목적으로 관찰자에게 약물투여를 청했다. 도저히 오늘이라는 시간을 버틸 수 없을 것 같다고 진정제를 겸비한 실험 약물투여를 원했다. 격리자에게 약물투여는 금지되어 있다. 앞머리 끝이 전부 젖고 눈이 빨개진 채로 바늘 없는 주사기를 계속 팔에 찧었다. 꿈의 내용을 잊고 싶은 행위다. 격리 4일만에 경고가 누적되었다. 약물 중독 또한 ‘실패자'로 분류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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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동안 박성화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방에 찾아가도 없고 요근래 명단 처리를 한 적 없는 탓인지 박성화의 실험이 진행됐는지 아닌 지도 모르고 있었다. 마침 이번 분기가 거의 끝나가 슬슬 서류정리를 할 때가 되어 간단히 실험이 진행됐는지 신원조회만 해볼 생각이었다. 코드번호 H-4323 박성화. 정윤호는 두 눈을 의심했다. 비고에 적혀있는 글자가 오류이길 바랐다.
<제 68차 실험 ‘격리자’ 분류 - 경고 누적 1회>
대체 왜? 내가 확인했던 박성화는 약하지 않다. 그렇게 약한 사람이라면 애초에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3년이라는 계약 기간에 맞춰 실험종료시점부터 알파시에 데려가 함께 살 생각이었는데, 변수가 생겼다.
“야, 담당자 누구였어?”
“실험4팀입니다. 문제 생겼나요?“
”난 저렇게 투여 하라한 적 없는, 아니.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실험4팀이면 정윤호가 간부 위치에 있는 팀이다. 지하4층 도박장의 네 번째 방, 실험4팀. 그 방에서 처리장으로 떨어지는 박성화를 향해 돈 거는 꼴은 볼 수 없었다. 무엇보다 간부 위치로서 베팅판에 빠질 수 없으므로 어떻게든 박성화를 회복시켜 센터 나가는 것이 중요했다.
박성화의 격리가 끝났다. 최종 검사 결과 이상 없음. 평소와 같은 일상생활이 가능했으며 바로 방에 갔다. 낯설지 않은 침대에 몸을 던지며 다시는 이런 고통을 겪지 않길 바랐다. 격리동안 정윤호와 함께 했던 수많은 시간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 남 위한 실험 하다가 죽고 싶지 않다.
똑똑-
누군가 문을 조심스레 두드린다. 정윤호였으면 좋겠다. 항상 저를 향해 웃어주던 예쁜 웃음이 보고 싶었고 안정시켜주던 품이 그리웠고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안에 있냐는 말에 문이 열려있다 답했고 박성화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형 괜찮아요…?”
무언가 바리바리 싸들고 왔다. 각종 진통제며 이온음료며 간식거리며… 작은 종이가방을 책상에 올려둔 뒤 몸을 일으키려는 박성화에게 누워 있어도 된다고 의자를 끌어왔다. 그리웠던 정윤호가 왔음에도 시선은 벽을 향해있었고 정윤호는 상관 없다는 듯 축 늘어져 있는 손을 잡아주었다. 격리기간동안 고생했다는 걸 증명하듯 더 빠진 살이 안타까웠다.
“...실험, 그만하면 안될까요.”
“...”
“목적이 알파시로 가는 거라면, 제가 같이…”
“윤호야.”
“...네.”
“난 언제까지 너한테 의지해야 하니.”
사실 박성화는 정윤호가 보고싶고 같이 있고 싶었지만 그만큼 정윤호를 보는게 힘들었다. 누구보다 박성화를 잘 알고 있는 정윤호였기에, 박성화의 목표인 알파시 생활은 정윤호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순리였다. 태생이 델타시였던 사람과 알파시였던 사람의 간극은 아무리 노력해도 좁혀지지 못했다.
“나도 힘들어. 하기 싫어. 자그마치 3년이야. 누군가에겐 회사가 바뀌고 누군가에겐 학교가 바뀌어. 하지만… 유일하게 혼자 해낼 수 있는 게 이런건데 어떡해.”
“...”
“나도 너가 좋아, 윤호야. 너 없이 웃는 법을 까먹었을 정도로. 그런데 너만 보면 열등감이 올라와. 나한테는 평생의 목표가 알파시야. 너는 원하면 갈 수 있잖아. 난 법적으로 안된다고. 평생을 가족없이 혼자 델타시에 살았어. 람다시에서 아는 건 너랑 실험 실패로 방출된 친구 한 명이야. 나한테 남은 건 너 하나라고. 이제 너가 내 세상의 전부인데, 너 없으면 못 살겠는데 어떡하라고…”
박성화의 문장, 단어 하나하나가 비수를 꽂는 것 같았다. 쌍방이었던 마음이 한명의 고통으로 인해 사라질 때. 그만큼 비참할 때가 없다. 솔직한 본인의 마음을 이런 상황에, 이렇게 내뱉은 적이 없던 박성화가 낯설었다. 잡힌 손을 빼지도, 벽을 향한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다. 담담하게 쌓인 감정들을 뱉어냈다.
그리곤 꿈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다. 꿈이라 과장 된 이야기인지, 실제로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윤호가 어디에서 근무하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높은 위치에 있는건 알겠다. 유추한 이유는 무엇보다 실험자 중 알파시 사람이 없었다. 높은 위치라면 이 센터의 진짜 목적과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정윤호가 가담하는 지도.
“네, 정확하게 맞아요.”
“너도 투기장에 있니?”
“...”
“나 실험 4번 남았어. 어차피 가게 될 알파시야. 너를 떠나지도 않을 거고. 솔직하게 얘기 해주라.”
벽을 응시하던 박성화가 눈을 마주친 순간이었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눈으로 진실을 원했다. 어차피 가게 될 알파시라는 말만 맴돌았다. 정윤호는 박성화만 원한다면 당장 이 센터를 나갈 수 있고, 당장이라도 실험 중단을 외칠 수 있다. 하지만 투기장은 이야기가 다르다. 박성화가 유일하게 있던 친구 또한 처리장으로 들어왔을 때 생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으니.
그럴 것 같았어. 손을 놓고 몸을 일으킨 박성화는 옆으로 오라는 듯 침대를 톡톡 쳤다. 머뭇거리다가 이불을 치우고 걸터 앉은 정윤호는 박성화를 쳐다볼 수 없었다. 정윤호의 어깨에 기대 깍지를 껴오는 박성화를. 처음으로 정윤호가 뚝딱거리던 순간이다. 깍지 낀 오른 손을 쓰다듬으며 드러난 신체를 여기저기 훑었다. 형, 팔이 이게… 바늘 꽂을 데도 없겠어요. 다 끝나면 레이저 할 거야. 넵.
박성화의 마지막 실험 날이다. 센터를 떠난다는 해방감과 더이상 실험 진행을 할 수 없다는 아쉬움. 모든 짐정리를 끝내고 마지막 실험장으로 발을 옮긴다. 한번 격리 된 이후 세 차례에 걸친 실험에서 같은 약물 중 가장 수치결과가 좋았다며 감사 인사까지 받아냈다. 이번만 잘 넘기면 정윤호와 알파시에 갈 수 있다. 그것만으로 행복하다. 정윤호는 박성화의 실험 종료 후 센터에 잔류하지 않고 같이 알파시에서 생활하기로 약속했다.
마지막 실험인 만큼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회복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역대 실험을 마무리 하는 느낌으로 간단한 부작용 테스트만 하면 됐다. 부작용 정도에 따라 경고 순위가 누적되고 알파시 이주 차례가 밀릴 수 있다. 박성화는 걱정 없었다. 처음으로 편안하게 지하 7층으로 내려갔다.
“코드번호 H-4323 박성화, 제8실험실로 들어가세요.”
많은 실험실과 많은 센터의 층을 거쳐 꽤 내려왔다. 델타시에 쭉 살았다면 절대 상상할 수 없는 일인데, 익숙해지고 당연해지는 과정들이 두렵고 달랐지만 처음과 비슷하게 검사기 부착 후 누웠다.
“불편하진 않으시죠? 금방 끝납니다. 72회차동안 수고 많으셨어요.”
정말 끝났다. 부작용 테스트는 곧바로 결과가 나온다고 하는데, 결과를 알려주지 않았다. 문제가 없으니 알려주지 않았겠지 싶어 계약 종료 서류를 가지러 통제실에 들렀다. 그렇게 가장 빠른 순서로 알파시에 갈 수 있는 조건이 충족 되었다. 진작 준비하고 있던 정윤호와 함께 람다시를 떠난다.
“끝난 소감이 어때요?”
“문제 없이 나가니까 기분은 좋다. 돈도 꽤 많고.”
“목숨값이라 생각해봐요. 엄청 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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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시로 이주한 후 둘의 합친 이름처럼 꽤나 호화스럽게 살 수 있었다. 중간중간 박성화가 헛것을 보는 것처럼 불안해 할 때 진정 시켜주는 걸 뺀다면, 모든 일정은 정윤호와 함께했다. 따로 일을 구할 필요 없이 평생 써도 남을 돈으로 하고 싶은 걸 많이 하고 살았다. 가끔 센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정윤호는 투기장에서 아예 빠졌다고 한다. 판이 잘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 정도만 하고 손을 뗐다고.
“윤호야.”
“응?”
“나 다시 실험자로 갈래.”
박성화에게 알리지 않았던 마지막 부작용 테스트에서 모두 건강한 수치로 나왔으나, 한 가지 위험 수치로 있던 것. [중독성]
마치 마약과도 같은 실험에서 박성화에게는 주기적으로 불법적인 약물을 포함해 투여했다. 박성화는 결국 다시 센터로 돌아갈 수 밖에 없고 죽을 때까지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예상이 포함된 지시였다.
실험4팀, 정윤호로부터.
이번 합작은 홍섷으로 참여하고 싶었는데 홍섷을 생각하니까 바로 떠오르는 노래가 친구였어요. 실제로도 친구라는 노래가, 홍중이가 성화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쓴 거라고도 했으니까 잘 어울릴 것 같았구요. 서로를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하는 와중에 친구 이상의 감정의 느껴버린 둘은 그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였으면 좋겠어요. 성화는 그 감정을 빨리 받아들이고 홍중이에게 고백 아닌 고백으로 표현하지만 홍중이는 은근히 부끄러워하는 게 포인트인 것 같아요. 홍중이 시점으로는 일찍 자각을 못 했을 뿐이지 어쩌면 성화가 자신을 좋아한 것보다 더 먼저 성화를 좋아했을 수도 있겠네요. 홍섷은 친구이지만 서로 친구 이상의 감정을 갖고 있을 거라 생각해요.
WIN이라는 노래의 개선장군.. 같은 면모를 생각하면서,, 뭔가 스포츠에서 1등을한 그런... 느낌의 뭔가가 보고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평소 관심있던 자동차 경주랑 접목한.. 간단한 만화를 그려봤습니다. 그냥 단순한 내용이라 만화에 대한 해석같은건.. 덧붙일 것이 크게 있지는 않아용! 그냥 가볍게 즐겨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여담으로 사실 처음 합작이 열렸을 때만 해도 다른 분들이 한거 즐겨야지.. 같은 마음가짐이었는데 어쩌다 추가 모집에 홀린 듯이 신청해서 ... 연장의 연장을 거듭해서 ..합작 마감을 하고.. 생전 처음 각 잡고 스크롤 형식으로 만화도 그려보네요 .. 헤헤 다들 재밌게 즐겨주시기를... 후기도 환영합니다. 많이많이 즐겨주시고 다른 분들 합작 작품도 즐겨주시기를....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mayday입니다. 우선 이 작품을 만들 때 피버라는 노래의 어두운 걸 많이 살려서 조금 보기가 힘들 수 있을 거 같아요ㅎㅎ 하지만 그만큼 마지막에 밝은 요소를 둬서 마무리했는데 어떨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이 작품의 제목이 mayday인데, 이건 아픈 시간을 가지고 있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구조 요청을 하는 느낌을 살리고 싶어서 이렇게 지었습니다. 피버의 느낌을 많이 내고 싶었는데 공간적인 요소를 많이 못 넣은 게 너무 아쉽습니다. 그리고 피버에서 나온 가사 중 하나인 ’내 고통은 딱 나만 앓지 누가 알아‘ 이 가사가 정말 이 작품의 성화와 윤호에게 잘 어울리는 거 같습니다. 이만 말을 줄이고 처음 합작하는 건데 너무 좋은 경험 할 수 있도록 해주신 우리 합작 주최자분 너무 감사드리고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작품 봐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홍섷으로 참가한 라디입니다.
지난번에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합작 신청부터 하고 난 뒤라 익명으로 참여했었는데 이제는 익명이 아닌 라디로 참여하게 됐습니다. 사실 이번 합작 글에는 아쉬운 점이 너무 많아요.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시간이 부족해서 생각했던 플롯을 뺀 것도 많고 제출도 늦었어요. 제 기준에서 미완성 글이지만 어떻게든 여러분께 보여드리고 싶어서 이렇게라도 제출합니다. 글의 제목인 아가베 아테누아타라는 식물의 꽃말은 소원성취입니다. 홍섷의 이야기와 잘 맞아서 제목으로 설정했어요. 쓰다보니 주제인 WAVE와 다른 것 같지만 파도 하면 떠오르는 모습을 토대로 글을 썼습니다. 재밌게 감상해주세요 :)
이번에도 합작에 참여하게 되어서 정말 기쁘네요 :) 사실 주제곡인 데자부보다는 본문에 첨부된 음악을 더 많이 들으면서 약간 피로하고 노곤한(?) 느낌마저도 주는 금기의 상황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윤섷을 좋아하시는 분들께서 재밌게 읽어주시길 바라며, 모두 늘 좋은 일 있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계속해서 꿈꿀 수 있다는 것에 여러 모로 경이로움을 느끼는 요즘입니다. 여러분의 부자연스럽고도 아름다운 현상이 계속될 수 있기를.
안녕하세요, 우선 제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눈치 채신 분들은 이미 아셨겠지만 제 글은 최근에 있었던 여러 다중우주 및 평행우주 관련 영화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에이티즈의 세계관을 심도있게 이해하는 건 아니지만 제 나름대로 세계관을 적용해 예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던 이야기를 썼습니다. 제 머릿속에 있던 상상을 드디어 글로 적게 되어 힘들기도 했지만 동시에 뿌듯하네요. 부디 재미있게 읽으셨길 바랍니다. 글을 쓸 때만 해도 땀을 뻘뻘 흘리는 여름이었는데 어느새 초가을이 됐네요. 모두 건강하고 행복한 2023년 하반기가 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파토입니다! 섷른합작에 참여하는 게 이걸로 두 번째가 되었는데요, 분명히 이번에는 가볍게 가야지 맘먹었던 것 같은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전 참여작보다 분량이 많아졌네요ㅎㅎ; 이게 다 저를 과몰입하게 만든 두 남성 때문입니다
록키... 후... 더 펠로십 콘서트를 가보신 분이라면. 혹은 그냥 영상으로 접하신 분들이라도 록키 무대를 처음 봤을때의 충격을 다들 잊지 못하실 거예요. 그만큼 퍼포먼스가 훌륭하고, 수많은 킬링포인트가 몰아치는 무대에서 이 글을 쓰기 위해 제가 꼽은 것은 3절 브릿지의 성화 파트랍니다.
늘 하나가 되어 같은 편에서 싸우는 에이티즈가 링 위에서 마주한 라이벌이 되어 있다니! 하지만 그와 동시에 네가 있어 다시 일어난다는 가사와, 성화가 산이를 일으키는 안무에서 절도있는 스포츠맨십과 단단한 유대감이 느껴져서 정말 아름다운 파트라고... 저는 느꼈답니다 흑흑
선공개에서 보여드린 그 짧은 순간에 개연성을 부여하기 위해 빌드업을 하면서 힘이 부치기도 지치기도 했지만 꿈과 사랑 모두를 쟁취한 낫섷을 위해서라면 뭔들 못할까요. 완성하고 보니 힘들었던 만큼 뿌듯합니다. 여러분의 피드백까지 있다면 저는 더 더 행복해질거예요(관심구걸
글을 읽기 전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후기와 기타 썰은 합작 링크가 첨부된 주최측 트윗에 인용으로 타래를 달 생각입니다. 모쪼록 재미있게 즐겨주시고, 앞으로도 저와 끝내주는 섷른을 함께해주세요!! 모두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방황하는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 바칩니다. 사랑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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