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적소리가 시끄럽게 울려대고 온갖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혼잡한 도심. 그 아래 한적한 골목에 위치한 작은 바가 있다. 직원은 3명, 마스터와 아르바이트생 둘로 구성된 아주 작은 술집. 간판도 없고 아는 사람들만 찾아온다는 그런 술집이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무제’, ‘럼’ 등으로 이름이 정해진다. 뭐라고 불리든 밤 9시, 나무 간판 아래 걸려있는 푸르스름한 조명이 켜지면 밤이 시작된다. 딱히 정해진 복장 규정이 없어 직원들의 복장은 자유로웠다. 금발의 탈색 머리를 한 여자 직원과 눈썹뼈 부근에 피어싱을 착용하고 있는 마스터,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죽 재킷에 얇은 금빛 목걸이를 한 남자.
윤호는 손님 맞을 준비를 하면서 유리잔을 닦고 있었다. 깨끗한 소리를 내는 잔들은 하나둘씩 제 자리를 찾아갔고, 거꾸로 걸려있는 잔들 사이로 바의 풍경이 어지러이 흩어졌다. 그 틈 새를 바라보다 보면 주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기 가득한 윤호가 있다. 누구든 말을 걸면 서글서글하게 웃어 보이면서 유하게 대화를 이끌어가는 윤호는 나름 손님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리고 항상 이 시간에 자리를 찾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같이 오는 사람들은 자주 바뀌는데 거의 마스터가 전담해서 윤호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저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며 흘린 이야기를 담는 정도였다. 마침 그가 들어왔다.
“성화 씨,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먹고살아야죠.”
성화라고 불리는 사람이 앞장서서 들어왔다. 늘 올 때마다 한두 명 정도의 사람들을 데리고 온다. 오늘도 역시 테이블을 잡지 않고 카운터 쪽에 자리를 잡았다.
“다이키리 한 잔. 그리고 마스터가 추천하는 거 한 잔 줘요.”
목 끝까지 올린 넥타이와 검은색 정장. 넥타이는 주로 남색 계열의 무난한 색상. 요즘도 검은색 정장을 입는 회사가 있었나. 성화를 관찰하는 것은 윤호의 업무 일과 중 하나가 되었다.
성화의 칵테일은 항상 마스터가 제조했다. 마스터 말에 의하면 오래된 단골손님이라지. 윤호가 궁금해서 여러 번을 물었었지만,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냥 밤에 일하는 사람이라는 정도가 다였다. 성화는 능숙하게 자리에 앉아 같이 들어온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표정과 손짓을 대충 보아하니 유혹하는 모양새였다. 항상 뒷문과 가까운 위치에 자리 잡은 것은 마음에 안 들면 도망치기라도 하기 위함인 걸까. 마음에 들면 손잡고 호텔이라도 향하는 걸까. 윤호는 성화의 직업이 조건만남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뭐 더 시킬래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성화는 손을 들어 윤호를 불렀다. 윤호는 정장 소매 위로 드러난 가느다란 손목이 예쁘다 생각하며 다가가서 메뉴판을 건넸다. 시키는 것은 똑같지만, 예의상 건넨 것이다. 성화에게 윤호는 관심 밖의 범주에 속했으니까. 성화는 다이키리 한 잔을 추가했고, 올리브 절임을 시켰다. 마스터가 칵테일을 제조하는 동안 윤호는 새로 통조림을 열었다. 안타깝게도 미리 썰어둔 게 다 떨어졌다. 미끌미끌한 올리브를 집어 도마 위에 올렸다. 이걸 왜 먹는 거야. 피자를 먹을 때도 올리브를 빼고 먹는 윤호라, 그 달큼하고 짭짜름한 냄새부터 친근하지 못했다.
“오늘은 꽝인가 보네.”
“꽝은 뭐가 꽝이냐. 정윤호 일 안 해? 콱 잘라버린다.”
화요일 저녁은 한산해서 성화를 쳐다보는 일이 수월했다. 윤호는 바 안쪽에 있는 직원 휴식용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하는 척 성화를 봤다. 자기보다 어두운 피부에 깊은 눈매, 그리고 립스틱이라도 바른 양 붉게 반들거리는 입술. 단정하게 정리된 새카만 머릿결을 손으로 빗어주는 따위의 상상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한참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마스터에게 혼나기도 쉬웠지.
성화가 바에서 머무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1시간 정도, 혹은 대화가 진전이 있으면 2시간까지도 머물렀다. 윤호의 생각으론 그랬다. 진전이 있을 경우엔 같이 나가고, 그게 아니면 같이 온 사람을 두고 먼저 자리를 뜬다. 덕분에 윤호는 성화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먼저 떠나있으니까. 참 독특한 사람이야. 최근 들어 성화는 혼자 나가는 일이 잦았다. 하긴 요즘 데려오는 사람들이 과하게 성화한테 집적거리긴 했어. 아저씨들하고 밤을 보내긴 싫겠지. 윤호는 성화에게 꽤 호기심이 많았다. 오죽하면 다이키리가 어떤 맛인지 궁금해서 마스터에게 만들어달라고 칭얼거리기까지 했다. 물론 대차게 거절당했지만.
오늘도 성화는 혼자 술집을 나섰다. 윤호에게 살짝 고개를 저어 인사하고, 꽉 맸던 넥타이를 주머니에 넣었다. 뒤에서 같이 온 남자가 어디 가냐고 외치는 소리를 무시한 채, 자연스럽게 차에 올라탔다. 외롭게 남은 저 아저씨가 불쌍하다고 생각한 윤호였다.
-
술집이 오픈하기 전, 윤호는 아침 6시에 기상해서 7시에 버스를 탄다. 8시쯤이면 목적지에 도착한다. 활기차고 먼지가 날리고 오만 냄새와 향기가 섞인 곳이었다. 8시가 지나면 일정의 벌을 부여받거나, 돈을 지불해야 들어갈 수 있는 곳. 갑과 을에 의한 위계질서가 분명한 곳.
“고마 자라.”
“숙제 좀 보여줘.”
그렇다. 고등학교. 그것도 남자 고등학교. 윤호는 건장한 19세 남학생이었다. 개인의 취향인 가죽 재킷도 입을 수 없는 이 속에서 윤호는 그저 밤새 모자란 잠을 보충했다.
“닌 밤에 뭘 허기에 그렇게 만날 디비자노?”
“말도 안 되는 사투리 쓰지 마.”
“요즘 드라마도 안보냐. 시시하긴.”
윤호는 공부와 연이 없어 일찍부터 일자리를 알아보러 다녔다. 그러다 관심이 생긴 게 바텐더라는 직업이었고, 불법이지만 지인을 통해 술집 알바를 하며 일을 배웠다. 딱히 모범시민은 아니었거든. 누구 말처럼 먹고살아야 하니까. 딱히 집안이 가난하다든가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일을 배우는 게 더 빠를 것이라 좋은 판단을 내린 것이지. 목적 없이 인생을 살고 있지 않았다. 윤호의 삶의 목표가 공부가 아닐 뿐이다.
-
그렇게 아주 길고 지루한 시간이 지나면, 윤호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 제일 좋아하는 옷으로 갈아입고 술집으로 향한다. 물론 윤호에게 번호를 물어오는 여성들도 있었다. 윤호는 자신이 꽤 잘생긴 편이라는 걸 인정했다. 술집에 도착해서 흐트러진 머리까지 정리하고 가게의 불을 올리면, 그때부터 윤호의 하루가 시작된다. 그리고 오늘도 성화는 윤호의 하루에 방문해 주었다.
“거기 젊은 친구, 마스터는 어디 갔어요?”
정말 성화가 30대쯤이라도 된 건가. 말투가 심상치 않았다. 젊은 친구라니. 그래도 무작정 반말을 하지 않은 것에 감사했다. 윤호가 닦던 잔을 내려두고 성화 쪽으로 향했다. 오늘 마스터가 출장이 있어서 내일 올 예정이라는 내용을 전했다. 어두워서 잘못 봤나. 당황해서 두리번거리는 눈동자를 본 것 같다.
“어......”
“왜 그래요?”
옆에 서있던 남자가 성화에게 말을 걸었다. 성화는 당황해하며 그를 데리고 밖으로 다시 나갔다. 성화의 업무에 마스터가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었나. 윤호는 궁금해서 슬쩍 창문 쪽으로 향했다.
화가 난 채 택시 문을 쾅 닫고 떠나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마스터 하나 없다고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성화가 택시를 잡아준 모양이었다. 오늘은 그냥 돌아가려나 보네. 어차피 오늘도 올 것이었다면 마스터가 자신한테 왜 일을 안 알려줬지. 괜히 우울해진 윤호였다. 매번 말이라도 걸어볼 걸 후회하는 게 다였지만, 이렇게 금방 갈 줄은 몰랐다.
-
한 시간쯤 지난 후, 누군가 들어왔다. 예상은 했겠지만 성화였다. 그러나 평상시와 다르게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정장이 아닌 후드티는 둘째 치고 얼굴에 그늘이 가득했다. 윤호도 처음에는 성화가 아닌 줄 알았다. 항상 앉는 자리에 다시 앉고서야 성화임을 확신했다. 주문을 하지 않고 주머니에서 작은 수첩 하나를 꺼내 펜으로 쭉 그으며 잔뜩 신경질을 부렸다. 메뉴판을 가져다 주려 했지만 뭐가 그리 안 풀리는지 혼자 씩씩대고 있는 그의 상태가 영 아닌 것 같아 결국 윤호가 알아서 메뉴를 준비해 가져갔다. 다이키리 한 잔과 올리브.
“어, 고마워요.”
예상외의 접대라 생각했는지, 성화는 한층 누그러진 채 윤호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둘은 바의 양 끝에 앉아있었다. 머리를 뒤로 넘길 때 손가락 사이를 지나는 머리칼도, 평상시와 다르게 잔뜩 구부정해 있는 자세도, 어딘지 모르게 화나있는 듯한 표정도. 모두 새로운 모습이었지만, 그 모습조차 윤호는 꽤 마음에 들었다.
“심심하네. 친구 나한테 말 좀 걸어줘요.”
“어......”
“매번 나 쳐다보잖아요. 뭐 궁금한 거 없어?”
“아셨어요?”
“모를 리가 없지.”
몰래 야동이라도 보다 걸린 듯, 윤호는 당황해서 말을 얼버무렸다. 한산한 술집의 장점이랄까. 직원과 손님들은 밤 동안 각자의 세월을 털어놓았다. 오늘이면 더 좋은 얘기를 들을 수 있겠구나, 싶었던 윤호는 지금껏 말 한번 나눠보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을 받는 기분이었다.
“친구가 생각하는 일 그런 거 아냐. 물론 내 얼굴이 영향을 끼치긴 하지만, 내가 저런 사람들하고 떡칠 수준은 아니지 않아요?”
성화를 통해 들은 이야기는 간단했다. 이름은 박성화, 나이는 20대 후반, 근무지는 서울 전역, 매일 사람이 달라지는 이유는 업무상의 계약 때문이라 했다. 비밀이 중요한 일이라 더 이상의 말을 하지 못하는 걸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친절함까지 곁들였다. 성화의 입에서 나오는 저급한 단어조차 친절하게 느껴졌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성화는 잔을 비워갔다. 손님도 없는데 한잔해요.라는 성화의 말에 당장이라도 들이부을 수 있었지만, 차마 학생이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그 둘의 사이에 작은 판도라 상자가 놓여있는 듯했다. 누가 먼저 손을 댈지는 아무도 몰랐다.
“이거 술......?”
“...? 네. 그런데요.”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지났을 때, 성화가 계속해서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더운가 싶어 윤호가 문도 열어줬는데, 벌게진 얼굴은 가라앉을 기미가 안 보였다. 옷까지 펄럭여가며 열을 식히려는 성화의 모습에 윤호가 놀란 듯 바라보았다.
“나 술 못 먹는데. 그리고 올리브 안 좋아해요.”
“매번 시키시던데.”
“그건 걔들이 좋아하는 거죠.”
성화는 목까지 빨개져서 윤호를 원망스럽게 쳐다봤다. 어쩐지 오늘은 초점이 흐트러져 있었다. 몇 잔을 비워도 똑 부러지는 말투였는데 고작 한 잔을 비우고 혀가 꼬였다. 술을 못 먹을 줄은 전혀 몰랐다. 성화는 당연히 마스터가 그것쯤은 교육하고 갔을 줄 알았다. 성화의 다이키리에는 라임 베이스에 럼을 추가하는 것 대신 라임 주스를 사용했다. 그게 성화가 이 직업에서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자리 하나씩 차지한 정계 사람들이 여간 까다로워야지.
“죄송합니다. 술 못 드시는 줄 몰랐어요... 그만 드세요.”
“이거 먹다 보니까 맛있네요.”
윤호가 술잔을 뺐어들었지만, 이미 입안에 탈탈 털어버린 성화였다. 아직 초짜라 비율을 잘 못 맞춰서 술이 독하게 타졌을 것이다. 윤호는 결국 술잔을 뺏는 걸 포기하고 물을 내왔다. 성화는 뭐가 좋다고 양 볼을 감싸고 웃기 시작했다.
“근데 왜 내가 밤일하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야 밤에만 오시니까요.”
“편견이 심하시네요.”
“그건 아닌데...”
“아니면, 나랑 자고 싶어요?”
맛이 갔다. 상황을 보아하니 잔뜩 술에 취한 게 분명했다. 저 소리를 시작으로 헛소리는 막을 새 없이 퍼졌다. 마땅히 누울만한 자리도 없는데, 성화는 자꾸 눕겠다고 주정을 부렸다. 이제 차 열쇠까지 내보이며 집에 가서 같이 자자며 소리를 질렀다. 성화의 입을 막아보려 노력도 했지만 이미 취해버린 사람을 막기에는 턱도 없었다. 덕분에 손님들이 자리를 떠서 일찍 마감을 준비하기 수월했다는 게 그나마 잘 된 일일까. 윤호는 절대 성화에게 술을 먹이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며 서둘러 정리를 마쳤다.
“나 운전 못해요.”
“왜 운전을 못해요! 집에 가요 우리. 여기서 잠들면 입 돌아가요.”
“집 어딘지 몰라...”
“정신 차리고, 자. 주소 불러봐요.”
눈은 풀리고 휘청거리면서도 할 말은 다 했다. 가방을 챙기고 나온 윤호는 성화를 부축했다. 아 바닥에 엎어지지만 말고 일어나 봐요, 응? 팔을 잡아 일으켜도 종이인형마냥 맥없이 쓰러지는 성화의 몸뚱이에 윤호는 간절한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느님 아버지.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술 취한 사람을 집에 데리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면허도 없는 윤호가 운전대를 잡을 수도 없었다. 이걸 어쩌나 하면서 길거리를 방황할 때였다.
“그럼 자고 가지 뭐.”
“네?”
“내가 오랜만이긴 한데. 그래도 잘 할 수 있어요.”
호탕하게 파이팅까지 하는 성화였다.
-
결국 윤호와 성화는 나란히 근처 호텔로 걸음을 옮겼다. 모텔은 싫다며 굳이 호텔로 윤호를 이끌었다. 이렇게 갑자기 윤호의 상상이 현실이 되었다. 성화는 아니라고 했지만, 술집을 나온 후에 성화가 이렇게 사람들을 데리고 오는 게 아닌가 하는 오만가지 상상을 더했다. 방에 성화를 눕히고, 욕실에 들어가서도 윤호는 안절부절못했다. 엄한 소리를 하는 술 취한 사람을 대상으로 해도 되는 행위인 건가. 누가 깔리는 거지, 관장이라도 해야 하나, 콘돔은 있나, 윤호는 발만 동동 굴렀다. 역시 오늘은 안 되겠다. 집에 가서 더 찾아봐야겠어. 경험이 없는 윤호는 있을지도 모르는 다음 기회를 기약했다.
결국 윤호는 몸만 씻고 화장실을 나왔다. 성화 씨 오늘은 아닌 것 같아요.라는 말을 하려고 했다. 분명 그러려고 했다. 입 밖으로 성화 씨라는 말까지는 나왔다. 성화가 침대에 누워서 다리를 벌리고 있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뭐해요. 박아.”
정말 성화는 윤호의 상상 이상의 사람이었다. 분명 자신이 아래에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마음의 준비를 하려 했다. 예상 밖의 전개에 당황했고,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았다. 어느새 성화의 손에는 담배가 들려있었고, 코끝에는 안경이 걸쳐있었다. 문제는 그것 외에 걸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고선 하는 말이 저것이었다. 담배 연기가 몽롱하게 방을 채웠다.
“화재경보기는 조심해야죠.”
윤호는 성화의 손에서 담배를 빼앗았다. 성화는 입에 머금은 연기를 윤호의 얼굴로 뿜었다. 호기심으로 담배를 물어본 것 이외에는 담배를 피워본 적이 없던 윤호는 인상을 쓰고 기침을 토했다. 그 기침이 성화에게 닿기도 전에, 성화가 먼저 윤호의 입술을 담았다.
그 누구의 손이 먼저 판도라의 상자를 건드렸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정신을 차려보니 상자는 열려있었다. 윤호와 성화는 오래간 몸을 섞었다. 윤호는 성화가 좋아하는 다이키리, 그 맛이 꼭 이럴 것이라 생각했다.
-
다음날 아침, 먼저 잠에서 깬 윤호는 눈가를 비비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난잡한 호텔방의 상황은 둘의 질펀한 사랑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학교만 아니었으면 성화를 깨워 한 번 더 즐길 수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며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채 윤호는 바닥에 마구잡이로 어질러진 옷가지를 들어 팔을 꿰어 넣었다. 옷을 다 입고서야 주섬주섬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윤호가 짐을 챙겨 일어났을 때, 자리를 더 살폈어야 했다. 재킷 주머니 안쪽에서부터 떨어진 급식 신청표가 주인을 애타게 찾았다. 결국 주인을 잃은 종이는 뒤늦게 일어난 성화의 손에 들어갔다.
-
“고삐리?”
“그러니까 다음에라고 했잖아요.”
“참나. 떡 쳐 놓고?”
“조용히 좀 해요......!”
성화는 윤호가 학교에서 일하는 사람인가 생각했다. 찾아갈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아침에 혼자 자신을 버려두고 간 놈 직장을 보고 싶긴 했다. 교사 아니면 적어도 직원. 그것도 아니라면 교생. 두 탕을 뛴다는 말이지. 교사면 어떻게 골려줘야 하나 생각하기 바빴다.
하지만 곧 맞닥뜨린 윤호의 모습에 기가 찼다. 성화는 사촌 동생을 찾으러 왔다는 명목으로 학교를 들쑤시고 다녔다. 널찍한 운동장에 어울리지 않는 외제차에서 내린 사람은 교내에서 주목받기 쉬웠다. 학생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하필 그 속에서 윤호를 발견했다. 기껏해야 직원일 줄 알았다. 진심이다. 키가 커 무리 내에서 쉽게 눈에 띈 윤호는 영락없는 고등학생의 모습이었다. 어젯밤 본 가죽 재킷의 바텐더는 마치 꿈이었다는 듯 멀뚱멀뚱 서있는 윤호의 모습에 성화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고삐리랑 떡을 쳤다니. 그것도 아주 질펀하게. 윤호가 자신의 엉덩이를 들이밀 때 그냥 받아들일 걸 그랬다고 후회하는 성화였다. 그렇게 했다면 자존심은 지켰을까.
“우선 들어가요. 이따 얘기해요.”
“너 술집에서 일하는 건 선생님이 알아?”
“아 좀! 다음에. 다음에 해요.”
성화는 기회를 잡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한 번 잃은 자존심을 회복하기로 결심했다. 성화는 이젠 아예 복도 한복판에 있는 소파에 자리까지 잡았다.
“뭘 다음에 해요야. 다음에도 떡치자고? 여러분 얘가......!”
“아악! 성화형!”
“언제 봤다고 형이래?”
금방이라도 일어서서 지나가는 학생을 붙잡으려는 듯한 성화에 윤호는 급하게 팔을 내밀어 그를 다시 앉혔다. 제 앞에서 휘적대는 긴 팔을 밀어낸 성화는 한숨을 쉬며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작은 소란에 아이들이 몰리자 교사가 제재를 위해 다가왔다. 성화는 능숙하게 사촌동생을 좀 보러 왔다고 거짓말을 했고, 동시에 젊은 교사에게 눈웃음을 던지며 작업을 쳤다. 교사는 당황한듯했으나 곧 수줍게 웃으며 곧 수업이 시작하니 학교가 소란스러워지면 안 된다고 주의해 달라 하며 걸음을 돌렸다. 내쫓는 것도 아니고 주의라니. 윤호는 새삼 성화에게 감탄했다.
교사가 복도 뒤로 없어질 때쯤 수업 종이 울렸다. 성화는 옆에서 질척이던 윤호를 떼어내고 일어섰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걸 알리는 의미로 윤호의 머리까지 쓰다듬으며 걸음을 떼었다. 물론 뒤를 돌아 싱긋 웃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부글부글 끓는 속은 윤호만이 알고 있었다.
“우리 어린 윤호 학생은 수업 들으셔야죠. 성교육은 안 하나 요새?”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들려온 말에 참 한결같이 군다고 윤호는 생각했다. 그런 생각도 잠시 어서 들어오라는 담임의 말에 윤호는 급하게 문을 찾아 들어가 책을 폈다.
-
“왜 혼자 와요?”
“너랑 떡치려고.”
“안 받아요. 같이 온 사람도 없는걸 보니 할 일도 없어 보이는데, 여기서 영업 방해하지 말고 빨리 가요.”
“참나. 너 보려고 온 건데?”
학교에서 친구들의 질문에 시달렸던 윤호는 잔뜩 초췌해졌다. 사촌 형은 너랑 안 닮았네부터 소개시켜 달라 까지, 이리저리 달라붙는 친구들에 윤호는 이미 지난밤을 후회하고 있었다. 성화는 흥밋거리를 윤호로 잡은 게 확실했다. 그러기에 성화의 관심 범주에 들어간 지금을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속을 가라앉히며 바 뒤에서 열심히 무언갈 만들던 윤호는 자리에 앉은 성화 앞에 라임주스를 쾅 하고 올려놨다.
“진짜 일 안 해요?”
“백수야. 거래 날렸어. 그때 내보낸 사람이 나랑 일 안 하겠대.”
“안타깝네요. 여기서 알바라도 하세요 그럼.”
“작업장에 원나잇 한 애가 있는데 어떻게 일을 하니.”
차라리 성화에게 칵테일을 먹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평소 마시던 잔보다 더 큰 잔을 성화 앞에 대령했다. 가득히 럼을 부어 들이밀었다. 그러자마자 성화의 구세주처럼 나타난 마스터가 술 아깝게 뭐 하는 짓이냐고 잔소리를 했다.
“난 성화 씨 여기서 일하는 거 찬성인데.”
“쟤 자르면 제가 들어갈게요. 마스터, 쟤 고삐리에요.”
성화는 신나서 마스터와 손깍지까지 끼고 웃고 있었다. 물론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을 윤호가 아니었다. 윤호는 마스터의 손을 쳐내고 그 자리에 자신의 손을 끼웠고, 겹쳐진 손에 기가 차다는 듯 웃은 성화는 그런 윤호의 손등에 가볍게 뽀뽀를 했다. 부드러운 감촉에 해실 웃으며 깍지 낀 손을 살짝 흔들던 윤호는 이내 몸을 틀어 성화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그 모습을 본 마스터는 혀를 차며 등을 돌려 주방으로 향했다.
조용한 평상시와 다르게, 들뜬 분위기가 가득했다. 그렇게 라임 향이 가득한 술집의 새로운 밤이 또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