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혐오 외전
자기애 / 불확실 / 관심 / 짝사랑 / 사랑에 대하여 / 새로운 시작
우싼

땅만 쳐다보는 수현. 그런 수현을 바라보는 연호. 정적 속에서 수현이 겨우 입을 연다.

수현: (계속 땅을 보며) 난 겁이 많아. 그래서 맨날 숨기만 해. 어떨 때는 네 연락 다 씹고 죽은 사람처럼 일주일을 보내기도 할 거고, 또 어떨 때는 미친 사람처럼 콱 죽어버릴 거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할 거야. 그래도 괜찮아?

연호: (땅을 보는 수현과 눈을 맞추며) 괜찮아. 네가 어디에 숨든 내가 찾을게. 찾아서 옆에 있어 줄게. 나한테 소리 지르고 화내고 울어도 그냥 말없이 옆에 있을게. 네가 괜찮아질 때까지.






자기애

 

 박성화가 느낀 정윤호의 첫인상은 나르시시즘 그 자체였다. 자기애와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사람. 지나가며 마주친 적은 많았지만 공식적인 첫 만남은 <자기혐오> 오디션 현장이었다. 성화의 시나리오가 대박이라는 소문이 돌았는지, 과 내 연기 전공자들은 물론 교외의 배우들까지 오디션을 보고 싶다고 찾아왔었다(산의 표현을 빌리자면 오디션 지원자가 예대 건물 두 바퀴를 돌고도 남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서 성화가 원한 연호는 없었다. 누구는 연기를 못 해서, 누구는 목소리가 너무 높아서, 또 누구는 사투리가 심해서. 정윤호도 예외는 아니었다. 연기력은 우수했지만 성화가 원한 연호의 얼굴이 아니라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나 윤호는 쉽게 나가떨어질 인물이 아니었다. 탈락 문자를 보낸 그 날부터 줄곧 성화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녔다.

 

 “형, 저 진짜 잘할 수 있다니까요? 저 말고 누가 연호를 해요.”

 “죄송하지만 누누이 말씀드렸잖아요. 그쪽은 제가 생각한 연호랑 너무 다르게 생겼다니까요.”

 “제 연기 보셨잖아요. 저한테 연호 맡겨주시면 형이 생각했던 외모도 싹 다 잊게 될 걸요?”

 

 정윤호의 말이 완전히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었다. 오디션을 보러 온 사람 중에서 연기를 가장 잘했고,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매력도 있었다. 그러나 성화는 윤호가 껄끄러웠다. 단순히 연호를 닮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냥 그와 엮이면 안 될 것 같았다. 오디션 현장에서 윤호가 성화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너 남자 좋아해?”

 

 대사를 뱉었을 때, 성화는 직감했다. 정윤호가 박성화의 인생을 꼬아버릴 거라고. 어떻게든 그를 떨쳐내고 다른 배우를 찾으려 했지만 윤호는 끈질겼고 먹잇감을 문 사냥개처럼 성화를 물고 놔주지 않았다.

 

 “저기, 이렇게까지 연호를 하고 싶은 이유가 뭐예요?”

 “재밌을 것 같아서요.”

 “…네?”

 “전 연호처럼 살아본 적이 없거든요. 담배 피워본 적도 없고, 남을 구원한 적도, 남자를 사랑한 적도 없어요. 그래서 연호가 하고 싶어요.”

 “연호처럼 살아본 적도 없으면서 연기는 어떻게 할 건데요.”

 “김재욱은 뭐 사람 죽여봐서 모태구를 했었나요? 그래도 형이 원하시면 담배도 피우고 남자도 사랑해볼게요.”

 

 짜증 나게 쟤는 왜 말도 잘해. 성화는 23년 인생에서 가장 큰 딜레마에 빠졌다. 죽어도 엮이지 말라는 마음의 소리를 듣고 정윤호를 내치느냐, 마음의 소리고 뭐고 완성도 있는 작품을 위해 그냥 정윤호를 쓰느냐. 감독에게는 인생이 곧 영화였고, 영화가 곧 인생이었다. 박성화 역시 작품에 죽고 작품에 사는 영화인이었기에 결국 연호 역할로 윤호를 캐스팅하였고, 정확히 이주 후 이날의 선택에 대해 후회하게 된다.





불확실

 

 성화는 윤호를 캐스팅한 과거의 자신을 죽이고 싶었다. 윤호 때문에 작품에 지장이 생겨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연호를 너무 완벽하게 소화해내서 컷 소리가 날 때마다 현장에 있는 모든 스태프들이 윤호를 향해 박수갈채를 보낼 정도였다. 그런데도 성화가 이렇게 후회를 하는 이유는 윤호의 묘한 태도 때문이었다. 성화는 카메라가 돌지 않을 때마다 자신을 좇는 시선이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조연출인 산과 대화하는 척 숨으면 또 금세 시선을 거두었기에 성화는 그 눈빛이 그저 자신의 착각일 거라고 생각했다. 확실하지도 않은 감으로 타인을 재단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착각이 아니란 걸 깨달은 건 마지막 촬영 날이었다. <자기혐오>에서 가장 중요한 고백 씬 촬영 도중 급한 사정으로 인해 수현 역을 맡았던 배우가 잠시 자리를 비웠는데, 촬영 일정을 미룰 수도 없는 상황이라 연호 단독 컷을 먼저 촬영하게 되었다.

 

 “저 뻘쭘해서 그런데 아무나 대역 해주시면 안 될까요?”

 

 말은 ‘아무나’라고 했지만 윤호의 시선은 정확하게 성화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래 감독인 니가 하는 게 낫겠다 성화야. 이럴 때만 한마음인 스태프들의 물타기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성화가 대본을 집어 들고 윤호의 앞에 섰다. 차마 윤호의 눈을 마주 볼 용기가 없어서 대본에 얼굴을 묻다시피하고 촬영을 시작했다.

 

 “…할 말이 뭔데.”

 “왜 내 전화 안 받았어?”

 “그냥. 받기 싫어서.”

 “그래서 내 문자도 씹었고?”

 “…….”

 “혹시 내가 불편해?”

 

 응, 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성화는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본의 검은 글자들 위로 교복을 입은 여상의 얼굴이 그려졌고, 18살의 여상이 23살의 성화에게 묻고 있었다. 선배는 내가 불편해요? 성화가 아무 말 없이 서 있자 산이 눈치껏 엔지를 외쳤다.

 

 “형, 왜? 무슨 문제 있어?”

 “어? 아…. 아니. 미안. 다시 가자.”

 

 다시 촬영이 시작되고, 차마 여상의 얼굴을 지울 수 없던 성화는 대본을 덮고 눈을 감은 채로 대사를 이어갔다.

 

 “혹시 내가 불편해?”

 “…응.”

 

 몇 초간 정적이 이어졌다. 이어져야 할 대화가 끊기자 의문을 느낀 성화가 슬며시 눈을 떴다. 눈치를 보던 산이 끊으려던 찰나에 윤호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렇게 도망 다니는 거야?”

 “어?”

 

 이런 대사는 없었는데. 당황한 성화가 고개를 들어 윤호를 쳐다보자 지금까지 성화를 좇던 묘한 눈빛을 띄고 있었다. 그 눈빛에 묶여버린 성화는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윤호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내 눈 똑바로 봐준 적 한 번도 없었잖아.”

 “…….”

 “저… 그런 대사는 없는데….”

 “아, 죄송해요.”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챈 산이 끼어들자 윤호는 금세 표정을 풀고 강아지 같은 웃음을 보였다. 어색한 공기가 윤호와 성화 주변을 맴돌고 있을 때 수현 역의 배우가 돌아왔고, 성화는 불편한 상황을 면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성화가 서 있던 자리에 배우가 들어가고 성화는 카메라 뒤편에서 윤호의 연기를 지켜보았다. 아까의 일은 모두 잊은 듯 태연하게 연기하는 윤호를 보고 감탄하던 성화는 모니터를 잠시 보다가 다시 윤호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묘하게 윤호의 시선이 상대 배우가 아니라 자신을 향해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 너 좋아하나 봐.”

 

 이 장면의 마지막 대사를 읊으며 정확히 자신을 바라보는 윤호 때문에 성화는 눈을 피하고 말았다. 불확실했던 성화의 감이 확실해지고 있었다. 정윤호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는 감이. 





관심

 

 예술에 대한 견해와 함께 욕설이 난무하는 술집의 어느 테이블, 성화는 모든 게 지겹다는 표정을 한 채 테이블의 가운데에 앉아있다. 항상 있는 듯 없는 듯 구석에 처박혀 깡소주만 들이키던 성화가 사람들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이유는 그가 이 자리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한 학기 동안 문턱이 닳을 정도로 교수님의 사무실을 드나들며 시나리오와 콘티를 완성하고, 일주인 간은 밤낮없이 촬영만, 또 일주일 간은 아아메와 함께 죽어라 편집만 했던(한마디로 박성화의 뼈와 살을 갈아 만든) 작품인 <자기혐오>가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성화는 이 자리가 별로 달갑지 않았다. 원래 내향적인 탓도 있고, 영화를 만드는 동안 모든 인류애를 상실하는 바람에 그 어떠한 인간이랑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나 제 맞은편에 앉아있는 정윤호는 더더욱. 오른편의 산과 함께 웃고 떠들고 있는 윤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애꿎은 소주 뚜껑만 만지작거리는데 가장 열심히 말을 내뱉던 동기 인철이 갑자기 성화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박성화! 니가 말해봐. 너는 예술 영화의 존재 의의가 뭐라고 생각하냐? 엉?”

 

 성화의 미간이 한껏 구겨졌다. 영화 좆도 못하는 새끼가 입만 살아서는.

 

 “몰라 씨발. 나 담배.”

 

 짜증을 낸 성화가 담배를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그러나 몇 마디의 핀잔을 던지고는 다시 예술이란 무엇인가, 윤리란 무엇인가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성화는 열심히 서로에게 삿대질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미동도 없이 저만을 바라보는 한 쌍의 눈동자를 무시하며 가게 밖으로 나왔다.

 

 아직도 여름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9월의 밤은 후덥지근했지만, 성화는 저 안으로 다시 들어갈 바엔 그냥 골목길에 쪼그려 앉아서 줄담배나 피우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빨리 피우고 집이나 가야겠다.’

 

 돛대 하나만을 남겨두고 세 대째 담배를 꺼내 무는 순간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렇게나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정윤호가 서 있었다. 성화는 순식간에 어색해진 공기를 이기지 못하고 급하게 담배를 빨았다. 

 

 ‘말 걸지 말고 그냥 들어가. 제발 다시 들어가라….’

 

 성화의 간절한 바람을 무시하는 듯 윤호가 그의 옆에 쪼그려 앉더니 턱을 괴고 성화를 가만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촬영 때의 그 묘한 눈빛으로. 까만 눈동자가 꼭 저를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성화의 담배가 반쯤 타들어 갔을 때, 윤호가 입을 열었다.

 

 “형 아이스 잭 펴요? 어울린다.”

 “담배에 어울리고 말고가 어딨어요.”

 “있어요. 형 여기 펭귄이랑 닮았거든요.”

 “아, 네….”

 

 담배가 손가락 두 마디 정도로 짧아지자 성화가 담배를 버리고 일어섰다. 대충 라이터를 갑 안에 넣어두고 윤호를 지나치려는데 갑자기 일어나서 자신의 팔을 붙잡는 윤호 때문에 자연스레 몸이 돌려졌다.

 

 “근데 수현이도 아이스 잭 피지 않았나.”

 

 어? 윤호가 무심한 표정으로 던진 한 문장의 말은 창이 되어 성화의 머리에 꽂혀버렸다. 설마 눈치챈 건가 싶어서 윤호의 얼굴을 올려다봤지만 그저 강아지처럼 웃고 있을 뿐이었다. 무의미한 말에 괜히 예민하게 반응했다고 생각한 성화는 강아지 같은 윤호를 마주 보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아…. 맞아요. 기억력 좋으시네요.”

 “당연히 기억하죠. 잠깐이나마 제가 사랑했던 사람인데.”

 

 부들부들 떨리는 입꼬리를 유지한 채 팔을 빼내려 했지만 윤호가 의도적으로 손에 힘을 주고 있는 탓에 도저히 뺄 수가 없었다.

 

 “저기… 손 좀.”

 “근데 형 수현이랑 되게 닮은 거 알아요?”

 “…네?”

 “자기혐오 그거, 형 얘기 맞죠?”

 

 먹잇감을 발견한 사냥개의 눈처럼 반짝이는 윤호의 눈동자를 마주한 성화는 생각했다. 아, 좆됐다.





짝사랑

 

 윤호는 자기애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항상 자신의 연기에도 확신이 있었다. 성화에게서 오디션 불합격 문자를 받기 전까지는. 윤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문자를 읽고 또 읽었다. 오십 번쯤 읽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윤호는 곧장 산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성화 형 지금 어디 있어?”

 

 일주일 내내 성화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겨우 연호 역을 얻어냈을 때, 윤호는 다짐했다. 완벽하게 연호를 만들어내겠다고. 친구에게 부탁해서 인생 처음으로 담배도 피워보고, 퀴어 영화를 있는 대로 찾아보고, 상대 배우와 단둘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윤호의 연기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준비한 인물이 연호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노력하였다. 촬영을 할 때에도 최대한 연호가 되어서 수현을 사랑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다 촬영이 중반부까지 진행되었을 즈음, 윤호는 자신이 연호로서 수현을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연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수현이라는 인물에게 호감이 생겼던 것이다. 자신이 실재하지 않는 인물을 사랑하게 됐다는 생각에 혼란스러워한 것도 잠시, 윤호는 수현과 성화가 굉장히 닮아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겉으로 드러나는 공통점은 디스 아이스 잭을 피운다는 것밖에 없었지만 윤호의 감이 말하고 있었다. 수현과 성화는 동일 인물일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자신이 호감을 갖고 있는 사람 역시 수현이 아니라 성화라고.

 

 노빠꾸 인생을 살아온 윤호는 사랑에 관해서도 빠꾸가 없었다. 디나이얼의 시간도 없이 바로 자신의 감정을 사랑이라고 정의 내렸고, 다음 단계는 박성화를 꼬시는 것이었다. 산에게 인사하며 자연스레 성화에게 말 한 번 더 걸고, 쉬는 시간에는 눈으로 성화를 좇고, 지나가다 마주치면 필살의 강아지 웃음을 보이고. 한 번은 스태프들에게 커피를 돌린 적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아메리카노였지만 성화 것만 딸기 스무디였다. 하지만 이런 윤호의 애정을 단순한 호기심으로 여겼던 성화는 윤호를 피하기 바빴다. 말을 걸면 단답으로 일관하고, 눈으로 좇을 땐 산의 뒤에 숨고, 강아지 웃음을 보여주면 어색한 미소와 함께 도망가고. 촬영이 막바지에 이를 때까지 둘의 간격은 좁혀지지 않았고, 빠꾸 없는 정윤호는 결국 마지막 촬영 날 성화에게 공을 던졌다. 직구로 던지면 또 피할까 봐 약간 변화구로.

 

 “나 너 좋아하나 봐.”





사랑에 답하여

 

 “성화 형!”

 

 윤호와 성화가 가만히 서로를 마주 보고 있을 때, 가게 안쪽에서 산의 목소리가 들렸다. 산의 부름에 정신을 차린 성화는 윤호의 손에게 제 팔을 빼냈다. 얼른 가게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이번엔 뒤에서 윤호가 성화를 불렀다.

 

 “형, 저희끼리 2차 갈래요?”

 “…둘이서요?”

 “네. 형 할 말 많은 것 같은데.”

 

 윤호가 성화를 지나쳐 가게로 들어가더니 자신과 성화의 짐(이라고 해봤자 휴대폰 뿐이었지만)을 챙겨서 나왔다. 할 말이 많긴 했지만 오픈된 곳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라고 판단한 성화는 어쩔 수 없이 윤호를 데리고 자신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내가 방을 치우고 나왔던가.

 

 소파에 기댄 채 병 채로 소주만 홀짝이는 둘 사이에는 어색한 공기가 맴돌았다. 한참 동안 정적이 이어지자 분위기를 깬 건 성화였다.

 

 “어떻게 알았어요?”

 “뭘요?”

 “내 얘긴 거. 그건 산이도 모르는데.”

 “그냥… 감?”

 

 윤호의 답을 들은 성화는 헛웃음을 지었다. 아니라고 잡아뗄걸.

 

 “사실 저 팩션 되게 좋아해요. 어디까지가 팩트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궁금하잖아요.”

 “…….”

 “자기혐오는 어디까지가 팩트에요? 얘기해주면 안 돼요?”

 

 성화는 왠지 윤호에게 다 이야기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이 들어간 탓인지 윤호가 말을 잘하는 탓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말하고 싶었다. 그간 속에 묻어두기만 했던 <자기혐오>라는 제목의 유래와 수현과 연호가 아닌 19살의 성화와 18살의 여상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의 결말까지. 윤호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만 간간이 끄덕이며 성화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럼 형 고등학교 자퇴해서 1년 늦었던 거에요? 재수가 아니라?”

 “네…. 근데 굳이 해명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서 그냥 재수한 척 했어요.”

 “아…. 형 그럼 저 오디션 떨어졌을 때 저랑 연호랑 안 닮았다고 했잖아요. 형은 그 여상이라는 분을 계속 생각하고 있어서 그런 거예요?”

 “…그런가 봐요. 저도 모르게 닮은 사람을 찾고 있더라고요.”

 

 또다시 정적이 이어졌다. 성화가 괜히 이야기했나, 하고 후회하고 있을 때 갑자기 윤호가 남은 소주를 한 번에 들이키더니 탕 소리가 나게 병을 내려놨다.

 

 “형 그럼 앞으로는 연호하면 누구 떠올릴 거에요?”

 

 성화는 눈에 힘을 주고 자신을 바라보는 윤호가 마치 늠름한 척하는 강아지 같다고 생각했다. 윤호가 자신의 과거를 가지고 허튼짓을 할 사람은 아니라는 확신이 드니까 성화를 둘러싸고 있던 벽이 허물어졌다.

 

 “모르겠는데….”

 

 자신의 대답에 순식간에 울상이 되는 윤호를 보고 옅게 웃음을 터뜨린 성화가 말했다.

 

 “당연히 그쪽이 생각나겠죠. 일주일 동안 그렇게 고생했는데.”

 “형 그럼 자기혐오 외전 써볼 생각은 없어요? 좀 다르게.”

 “주인공은 누군데요?”

 “당연히 수현이죠. 대신 외전은 좀 해피엔딩으로 가요.”
“어떻게?”

 “수현이가 도망가지 않는 걸로. 숨지도 않는 걸로.”





새로운 시작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서 학사모를 쓴 성화가 골목에 기대어 서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다. 한 손에 꽃다발을 든 채로 담배를 피우는데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한 성화가 장초인 담배를 지져 끄고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형, 어디야? 또 담배 피우고 있지.”

 “나 예대 건물 뒤쪽인데 학교 정문으로 갈게. 기다려.”

 

 전화를 끊기도 전에 성화의 발이 움직였다. 거의 달리다시피 도착한 정문에는 사람들로 인해 시끌벅적했다. 남들보다 머리 한 개는 더 있는 큰 키 덕분에 성화는 금방 윤호를 찾았다.

 

 “많이 기다렸어?”

 

 아니, 별로. 성화가 개구지게 웃는 윤호에게 자신의 학사모를 씌워줬다. 그에 대한 답례인 것 마냥 윤호가 꽃다발을 내밀었다가 이미 성화의 손에 들려있는 꽃다발을 보고 표정을 구겼다.

 

 “뭐야. 이거 누가 줬어? 내가 제일 먼저 줄려고 했는데….”

 “아…. 이거 아까 연호가 주고 갔어.”

 

 이렇게 갑자기 만날 줄은 몰랐는데. 약 1시간 전, 여상이 성화를 만나러 왔었다. 오랜만이네요 졸업 축하해요 선배. 졸업하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손에 꽃다발까지 든 채로. 어 고마워…. 거절할 이유도 없고, 딱히 하고 싶지도 않아서 그냥 꽃다발을 받았었다.

 

 “무슨 소리야. 형한테 연호는 나뿐인데.”

 

 윤호가 잔뜩 토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윤호를 본 성화는 마치 어린 동생을 달래듯 그를 어르며 꽃다발을 받았다.

 

 “미안. 우리 윤호가 준 꽃이 제일 이쁘네.”

 “그치. 근데 형이 더 이뻐.”

 “뭐래, 너 미쳤어?”

 

 마치 세상에 둘만 남겨진 것처럼 마주 보고 웃다가 윤호가 성화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수현아.”

 

 성화가 양손 가득한 꽃다발을 왼팔로 끌어안고는 반대 손으로 윤호의 손을 맞잡았다.

 

 “응, 연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