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블루
짝사랑 / 불확실
산또

점심시간에는 항상 운동장 벤치에 나란히 걸터앉아 하늘이나 보는 게 다였다. 어쩌다 한 번 공을 차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몇몇의 환호가 들리면 그쪽을 향해 틈틈이 멋쩍은 감탄만 해주곤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굳이 그렇게 하는 것에 이유는 딱히 없다. 정윤호와의 사이가 어색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고 말을 붙이기 싫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하늘을 보고 있으면 좋은 생각이든 나쁜 생각이든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아서 좋았다. 정윤호도 딱히 말을 걸거나 터치하지 않았다. 오늘도 별다를 것 없이 여전히 시끌벅적한 운동장. 여전히 깊은 하늘.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하늘을 보던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이 시렸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곤 다시 눈을 떴다. 삼월의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오늘 하늘 되게 예쁘네요.”

 

퍽 다정한 목소리가 정적을 깨서 조금 놀랐다. 구름이 아무렇게나 흘러가는 걸 보다 시선을 돌렸다. 바람에 약간 흩날리는 갈색 머리, 뽀얀 볼 위로 보기 좋게 패인 보조개, 크고 짙은 눈꺼풀 밑으로 다정스런 눈동자, 항상 보는 모습인데도 우습게도 마음이 울렁거렸다. 그냥, 뭐…. 나는 뻣뻣하게 정윤호를 보던 시선을 거뒀다. 그러고는 고개를 올려 그대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쓸데없이 맑았다. 웃음이 났다. 정윤호도 나를 보다 이내 옅게 웃음을 뱉고 다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내가 보고 있는 하늘. 정윤호가 보고 있는 하늘. 정윤호의 하늘을 보고 있는 나. 너는,

 

너에게는 어떤 하늘인지 모르겠다.

 

-

 

정윤호를 처음 봤을 때를 기억한다.

 

1년 전. 내가 고2가 되던 날. 너는 고등학교 첫 입학식날이었다. 처음인 낯선 환경에 몽글몽글한 감정을 가지며 설레하는 아이들, 이미 무리 지어 다니는 아이들, 의기소침하게 있는 아이들, 혼자 무덤덤해 보이는 아이들. 다른 표정들이 내뿜는 각자 다른 냄새들은 같은 공간에 서로 섞여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그런 냄새와 분위기가 썩 내키진 않았다. 항상 따분하고 지루하기 그지없는 점심시간에는 딱히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혼자서 운동장 스탠드 구석에 다리를 꼬고 앉아 턱을 괴고 팩 우유나 쪽쪽 빨아대면서 그런 어수선한 분위기를 천천히 눈에 담고 있었다. 봄비가 오고 난 후라 공기가 축축하고 조금은 무겁기도 했다. 해가 먹구름 사이에 가려져 옅게 비췄다. 그날따라 유난히 바람도 많이 불었다. 나는 바람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덮힌 앞머리 사이로 들어오는 찹찹한 바람이 머리를 헤집는 느낌이 허하고 떨떠름했다. 눈을 찔러대는 조금 길어져 버린 머리칼이 불규칙적으로 날리는걸 손가락 사이로 빗으며 정리했다. 기껏 아침에 뜬 머리 정리했는데. 다시 원위치 되어버릴 머리가 안 봐도 눈에 선했다. 툴툴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새까맣게 삐죽 튀어나온 머리칼들을 올려보다 저쪽에서 들리는 큰 웃음소리에 무의식중에 잠깐 시선을 돌렸다.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눈을 이쁘게 접어 웃고 있던 정윤호와 눈이 마주쳤다.

 

그때의 찌릿함은 아직까지도 기억한다. 그가 몰고 온 바람은 내 눈꺼풀을 스쳐지나 뒷머리칼을 헝클어 놓았는데 순간 화끈거렸지만 그렇다고 뜨겁지만은 않은, 따스한 초봄의 바람이었다. 겨울의 막을 알리는 듯한 그런 바람. 향기로웠다. 콧잔등 위로 꽃잎 하나가 살포시 얹힌 것 같이 간질거렸다. 순간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너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의해 예쁘게 흩날렸다. 어…. 나는 널 보며 바보 같은 소리를 냈다. 넌 그런 나를 보며 휘어져 있던 눈이 원래의 모양새로 돌아와 의아한 얼굴을 하였다. 널 바라보며 초조하게 생각했다. 눈을 떼야 하는데. 그러니까, 그게-. 고장 난 로봇처럼 삐그덕댔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머리칼을 정리하던 손이 허공에서 방향을 잃었다. 나는 바보처럼 두 눈만 끔뻑였다. 그대로 부자연스러운 몇 초가 흘렀다. 그러다 너는 이내 눈꼬리를 접고 깊게 패인 보조개를 보이며 예쁘게 웃어 보였다. 구름에 가려졌던 해가 너를 내리쬐었다. 널 빛냈다.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정말로, 왜였는지 모르겠다. 그냥, 그러니까.

 

왜인지 너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정윤호의 웃음은 바라보고 있으면 심해처럼 그 깊이를 전혀 가늠할 수 없다. 쉴 새 없이 울렁이는 그 한가운데에서 혼자 멀뚱히 둥둥 떠다니다 결국 방향을 잃는다. 그와 반대적으로 말한다면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순수한 하늘. 마치 자그만한 때 한 점 없는 맑고 새파란 칠월의 하늘을 보는 것 같았다. 최면에 걸린 것 마냥 정윤호의 하늘은 계속 보게 되지만 그만큼 침식된다. 내가 계속 하늘을 올려다보는게 변명거리가 될지도 모른다. 그나마 정윤호의 하늘에 면역이 될까 봐서. 그러면서 맨날 올려다보는 하늘은 항상 정윤호의 하늘과 비교당했다.

 

“정윤호보다 못하네.”

“뭐가 못한데요?”

 

우왓씨, 깜 짝아!왼쪽 볼에 닿는 차갑고 딱딱한 느낌과 동시에 귀 바로 옆에서 들리는 낮은 목소리에 온 신경이 그쪽으로 쏠렸다. 익숙한 좋은 향기.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피가 순식간에 머리로 쏠리는 느낌이었다. 너무 놀라 어줍짢게 앞으로 팔을 뻗어버렸다. 요상한 말에 요상한 포즈. 원래라면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쪽팔려 죽을 일이지만 갑자기 나타나버린 정윤호 때문에 놀란 마음이 더 우선이었다. 내 옆으로 태연하게 털썩 앉고는 캔 음료를 따 목을 축이고 있는 정윤호를 눈을 땡그랗게 뜬 채 한참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고는 허공에서 길 잃고 허둥이던 내 손에 차가운 물기 서린 캔 음료를 쥐여주는 정윤호 때문에 너무 당황한 나머지 바보처럼 말을 더듬었다. …너, 너 지금 수업시간 아냐?아니야?괜히 찔렸다. 아까 한 말 무슨 말인지 물어보진 않겠지?심장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댔다.

 

“체육 시간인데 그냥 머리 아파서 보건실 갔다 온다고 거짓말 쳤어요.”

 

정윤호는 그게 당연하다는 듯 태연히 말했다. 땡땡이를 밥 먹듯 하는 나에게는 별일 아니지만 정윤호가, 그것도 전교회장이나 되는 정윤호가 굳이 수업을 째고 나와 같은 공간에 있다라…. 묘한 감정이 교차했다. 알 수 없는 어딘가 간질거리는 느낌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정윤호를 마주 봤다. 정윤호는 넓은 어깨를 으쓱하며 입꼬리를 당겨 웃어 보였다. 다행히 아까 내가 혼자서 한 말에 대해서는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심장이 벌렁거리던게 조금은 안정되었다. 치, 별꼴이야. 마음이 놓여 괜히 툴툴대고는 정윤호를 보던 고개를 돌려 그가 준 캔 뚜껑을 따 곧장 입으로 가져다 댔다. 복숭아 맛. 입 안 전체에 스며들어 달짝지근하게 향이 퍼졌다. 정윤호는 탄산을 좋아하지 않는 나를 잘 알고 있다. 내가 시큼한 것을 잘 먹지 못한다는 것도, 그리고 달달한 것을 정말 많이 좋아한다는 것도. 단게 입으로 들어와서인지 정윤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이 금새 나른하니 촉촉해졌다. 올려다 보고 있는 하늘과 코 안으로 퍼지는 달콤한 과즙향이 참 잘 어울렸다. 콧노래가 절로 삐져나왔다. 정윤호와 나는 항상 그랬듯이 나란히 앉아 캔 음료를 삼키며 아무 말 없이 하늘 구경을 했다. 그런데 정윤호는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어떻게 알고 온걸까. 알고 온거라면 굳이 혼자있는 나한테 온 이유는 뭘까. 좋아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오해하고 싶었다. 나에게 이렇게 항상 행동하는 너의 이유를.

 

근데 내가 여기 옥상에 있는 거 어떻게 알고 왔어? 나는 반 정도 남은 캔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괜히 엄지로 캔의 물기들을 닦아대며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항상 정윤호에게 말을 먼저 꺼내는 것에 대해 쑥스러움을 느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정윤호와 원래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아서? 그의 대답에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서? 아니면,

 

“그냥 왠지 형이 여기 있을 것 같아서요.”

“….”

“알잖아요, 하루에 한 번이라도 나 꼭 형 봐야 하는 거.”

 

정윤호의 대답은 항상 예상할 수 없어서.

 

쓸데없이 다정함이 가득 담긴 두 눈. 예쁘게 패인 보조개. 좋은 향, 또 좋은 목소리. 정윤호는 하늘을 보던 시선을 거둬 내 눈을 마주쳤다. 나는 그런 정윤호를 눈에 담았다. 봄바람이 불어와 머리칼을 흔들어 놓았다. 정윤호와 나 둘을 제외한 주변 모든 것들이 흐릿해졌다. 정말로 시간이 그대로 멈추어 버린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정윤호가 시간을 멈추어 버리게 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윤호의 다정함은 시간마저 사랑에 빠지게 만든다. 멍청하게도 나는 한참 동안 정윤호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정윤호의 새까만 눈동자가 햇빛에 의해 반짝거렸다. 너의 다정함의 온도는 36.5도를 넘기고 내게 화상을 입힌다. 전에 언뜻 보았다가 한참을 푹 빠져있었던 사랑 시가 머릿속에 스쳐 갔다. 정윤호의 다정함은 몇 도일까. 그 이하일까 그 이상일까. 내가 지금 너에 의해 화상을 입고 있다는 걸 너는 알고 있을까. 과일 향에 젖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윤호야. 나는 너를,

 

너를 좋아해. 

 

-

 

나는 한 번씩 끝도 없이 우울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밤에 집 옥상에 올라가 가슴팍까지 오는 낡은 난간에 기대어 영문 모를 우울감에 대해 생각을 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우울감. 아니, 실은 요즈음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 것들은 아주 많았다. 내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 하필 정윤호를 좋아하게 돼버린 것. 정윤호는 날 좋아하지 않는 것. 며칠 전 정윤호가 내게 던졌던 말, 처음 보는 표정. 모든 것들이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우울에 빠지게 만들었다. 시선을 발밑으로 떨어뜨렸다. 난간 밖으로는 벚꽃들이 하얗게 만개해 있었다. 벌써 사월. 저번보다 훨 따수워진 날씨. 분명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정윤호에 대한 마음이 확실해졌을 때부터 나는 정윤호를 최대한 피해 다녔다. 네게는 아무것도 아닐 행동 하나하나가 나에게는 그게 아니라서. 너와 학교에서 마주칠 때면 멀리서부터 밝게 인사하는 네 얼굴. 안색이 좋지 않은 나를 걱정해주는 네 얼굴. 가슴이 울렁거리고 동시에 아려오기까지 했다. 머리가 잠을 자지 못한 것처럼 띵하게 아팠다. 모든 것에 의미부여를 하게 되는 내가 싫어서. 그래서 피했다. 너의 다정함이 내게는 독이라는 것을 나는 뒤늦게 알아차렸다. 

 

“형. 요새 나 피하는 거 다 알아요. 무슨 일 있는 거예요? 연락도 안보고.”

 

하교 길이였다. 책가방을 대충 싸매곤 터덜터덜 학교 정문을 나서던 중, 내 손목을 낚아채는 누군가에 의해 몸이 틀어졌다. 정윤호. 사뭇 진지했던 얼굴. 너와는 절대 어울리지 않았던 표정. 나는 잘못을 들킨 아이처럼 하얗게 질렸다. 또 가슴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잡혀있던 손목을 뿌리친 채 서둘러 뒤를 돌았다.

 

“집에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형 저 좋아해요?”

 

아니죠?정윤호의 말에 옮기던 발걸음을 멈췄다. 나를 의심하는 듯한 목소리. 자신의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을 애써 동조해 주길 바랬던 말투.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쿵쿵댔다.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장난스럽게 아니라고 둘러대기엔 내가 정윤호를 너무 많이 사랑해버려서. 나는 정윤호가 원하는 대답 대신 그 상황을 도망쳤다. 무작정 뛰었다. 정윤호가 최대한 보이지 않는 곳으로. 아무 건물 사이로 뛰어 들어가 벽 뒤에 기대어 천천히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숨이 콱 막혔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나는 왜,

도망친 곳이 결코 낙원이 아닌 걸 알면서도 항상 도망치기 바쁜 걸까.

 

머리에서 시도 때도 없이 울부짖었다. 밤마다 윙윙대는 잡음 따위로 울리는 머리를 쥐어 싸맸다. 똑같은 꿈을 꾼다. 아무것도, 아무런 이도 없는 새파랗다 못해 눈이 시려울만큼인 정윤호의 하늘에서 방향을 잃고 헤매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정체 모를 웅웅거리는 소리는 이내 이명이 되어 귀를 찢을 것처럼 날카롭게 울렸다. 온몸의 피부가 쓰라리고 저렸다. 눈을 질끈 감으면 몸을 짖누르고 있던 중력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몸이 힘없이 뒤로 고꾸라졌다. 정윤호의 바닷속이었다. 동그랗게 빛이 내리쬐는 곳을 향해 있는 힘껏 물을 찼다. 그리고는 그 빛을 향해 무작정 손을 뻗었다. 거센 물결이 그걸 방해한다는 듯 날카롭게 쏘아 나를 휘저었다. 순식간에 저 밑자락의 바닥에 등을 부딪쳤다. 숨이 막혔다. 다시 눈을 떴다. 눈을 뜨면 보이는 건 결국은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함이 묻어 내린 정윤호의 하늘에서 방황하고 있는 나였다.

 

나는 너에게 완전히 잠겨버렸다.

 

-

 

정윤호가 자기를 좋아하던 여자 후배와 사귄다.

 

며칠 전부터 이곳저곳 아프던 몸 때문에 그런지 담임은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인다며 조퇴를 권했다. 한쪽 어깨에 가방을 대충 메고 어딘가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무거운 몸을 이끌며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정윤호와 그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둘은 잘 어울리고 또 예뻤다. 정윤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수줍게 미소 짖는 여자아이. 내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그런 깨끗하고 순수한 미소였다. 뒤통수를 세게 얻어 맞은 기분이 들었다. 사랑을 하면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 가슴 한 켠이 시큰거렸다. 계단 앞에 멈추어 서서 그 여자아이와 정윤호가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때, 정윤호가 나를 봤다. 나를 발견한 정윤호의 표정은 점점 딱딱하게 굳어갔다. 1년 전 우리가 처음 눈을 마주쳤을 때처럼. 정윤호는 내게 더 이상 예쁘게 웃어주지 않았다. 한참을 마주쳤을 때, 정윤호는 내게 어렵사리 눈을 피해 그 여자아이와 그 자리를 떴다. 조금 가라앉은 듯한 검은 눈동자. 예전의 반짝이던 그 눈동자는 더 이상 내게 보여주지 않았다.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

 

‘나는 여기저기 물이 새고 비명을 지르는 내 작은 배를 수리한다. 그리고 배를 녹슬고 좀먹게 하는 무지와 두려움을 부지런히 씻어낸다. 나는 이른 새벽에 떠난다. 이 향해에서 만선을 꿈꾸기보다, 떠난 뒤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바다로 나선 후에는 아무런 이표도, 길을 물을 이도 없고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확인할 방법도 없다.’

 

그저 내가 고요한 대양에 다다르기까지의 확률을 믿는 것. 그 뿐이었다…. 확률이라. 뻐근하게 관자놀이를 조여 오는 느낌에 읽고 있던 책을 신경질적으로 덮었다. 좁은 데스크 위로 아무렇게나 책을 집어 던지고는 픽 쓰러지듯 침대에 앉았다. 벽에 등을 기대어 무거운 눈을 감았다. 속에서 뜨거운 입김을 뱉었다. 확률. 정윤호와 나. 우리가 막을 내릴 확률. 또는 0.01의 퍼센티지로 다시 막이 열릴 확률. 전자보다 당연 후자를 갈망했다. 참 어리석어 헛웃음이 났다. 고작 0.01퍼센트의 말도 안 되는 기적 따위를 믿는 하찮은 병신같으니라고. 그건 동화 같은 곳에서만 가능한 거야. 여긴 동화 그딴 건 없어. 박성화. 

 

-

 

까닭 없이 이곳저곳 아팠던 몸이 드디어 병이 난 듯했다. 몸이 자꾸만 추웠고 으슬으슬 떨렸다. 고개를 들고 있을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수업 도중 선생님께 양해를 구해 비틀거리며 반쯤 감긴 눈으로 양호실을 향했다. 조용한 곳에서 조금 눈을 붙이면 괜찮아질 것 같았다. 아무도 없을 줄 알고 문을 열었던 양호실엔 신기하게도 그렇게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정윤호가 서 있었다. 흐릿해진 시야 사이로도 이상하게 정윤호의 모습은 또렷하게 보였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정윤호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고개를 돌려 멈추었던 걸음을 옮겨 침대 쪽으로 향하였다. 지금은 정윤호를 대꾸해 줄 상황이 아니었다. 머리가 자꾸 핑핑 돌아 그냥 당장 침대로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정윤호는 나를 보며 조금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 자리에 멈춰서 나를 쳐다보았다. 정윤호는 내게 시선을 떼지 않고 나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성화 형.”

 

내가 좋아하는 목소리. 속에 있던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순간 울컥하며 나올뻔 했다. 그렇게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무시하더니, 이제 와서.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나는 정윤호의 대답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정윤호는 말을 이었다.

 

“어디 아파요?”

“…신경 꺼.”

 

열나는 거 같은데. 정윤호는 내게로 더 가까이 다가와 커다란 손을 내 이마 위에 올렸다. 조금 차가운 듯한 손바닥의 감각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뒤로 빼 버렸다. 내 이마를 짚고 있던 정윤호의 손은 허공에 남아있었다. 걱정스러운 눈빛. 짜증 났다. 너는 왜 항상 내게 다정한 얼굴을 하는 건지. 목소리는 또 왜 그렇게 다정해서,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건지. 그런 정윤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뜨거움에 달 뜬 숨을 뱉었다. 정윤호에게 결국 모난 말이 튀어 나갔다.

 

“너 나한테 왜 그러는데.”

“….”

“왜, 갑자기 내가 불쌍해? 그냥 보고는 못 지나치겠어?”

“형, 그게 아니잖,”

“너도 알고 있잖아. 내가 너 좋아하고 있었다는 거. 너 나 더럽다고 생각하고 있잖아. 그래서 너 나 보란 듯이 찼잖아!”

 

찢어지는 쉬어 빠진 목소리로 억눌려져 있던 응어리를 토해내듯 쏘아댔다. 머리가 핑핑대며 깨질 것 같았다. 숨이 막혀 가슴이 펄떡였다. 다리가 곧 무너질 것처럼 후들거렸다. 코끝이 쓰라리다. 정윤호를 향해 부릅 치켜떴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내 앞 정윤호의 형태는 블러 처리 된 것마냥 점점 불투명해져 갔다.

 

“그래서 내가 너 이제 안 좋아하겠다잖아. 알아서 떨어져 주겠다잖아. 근데 왜, 도대체 왜 이러는건데, 왜이러냐고….”

 

제발 그만 잘해줘. 그만 다정하란 말이야. 흐릿해져 보이지 않던 시야에 끝내 정윤호의 윤곽이 또렷하게 보였다. 조금 내려앉은 얼굴, 새빨개진 두 눈, 초점 없는 검은 눈동자. 가슴에 돌덩이들을 얹은 것 같이 꽉 막혔다. 너에게 내 감정을 인정해버렸다. 별로 좋지 않게. 난 항상 이게 문제다. 정윤호 앞에서는 이성적이지 못한 거. 다짐한 것들이 결국 정윤호의 모든 것에 의해 전부 망가져 버리는 거.

 

“정윤호.”

“….”

“내가 어떤 마음으로 널 좋아했는지 정윤호 니가 알았으면 좋겠어. 전부 사과해. 내 마음 다 알고 있었으면서 날 오해하게 만들어 놓고 그렇게 밀어낸 것도, 결국 그게 니 본심이였단 것도.”

 

다시는 사랑할 수 없을 정도로 날 너덜너덜하게 만든 것도.

 

내가 찾던 별 아래 다다르기까지 수십 번 길을 잃는다. 그 과정에서 나는 필연적으로 아주, 아주 고독해야만 했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새로운 용기를 강구해왔지만.

 

“나한테 잘해주지 마. 처음부터 나랑 아예 몰랐던 사이처럼 지나쳐 줘, 윤호야.”

 

결국 이 바다 위에서 나의 존재와 힘은 너무나 미약하고 보잘것없다는 것을.

 

“부탁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