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삐삐-
“…아, 머리야.”
우영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겨우 한쪽 눈을 치켜 떴다. 간밤의 술자리가 과했던지 이렇게까지 머리가 아픈 적은 또 오랜만이었다. 울리는 핸드폰을 무시하며 기억을 더듬어보니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나 고깃집에서 소주로 시작해 그 중 한 놈의 집에 들렀다 양주로 마무리한 것이 두통의 원인인 것 같았다. 집에는 어떻게 용케 들어왔대, 예전 같지 않은 체력에 속상하다가도 아직 집에 들어올 정신은 있는 것을 위안 삼기로 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울리는 알람부터 꺼야겠다는 생각에 엎드린 채로 몸을 꾸물꾸물 움직여 팔을 뻗어 겨우 핸드폰을 집었다.
토요일 오전 10시에 왜 알람을 설정해놓은 걸까. 점심 약속이라도 잡아 뒀었나? 기억이 없는데.
핸드폰을 다시 바닥에 던지고 잠이나 더 자야겠다 싶었는데 무심코 화면을 쓸어 내리다 알림창이 보였고, 낯선 이름에게서 온 카톡이 몇 개 눈에 띄었다.
박성화?
스팸인가 해서 차단이나 해야겠다 싶었지만, 대화창을 눌러본 순간 술이 반쯤 깨는 기분이었다.
[그럼 내일 12시에 홍대로 알고 있을게요.]
[조금 늦을 것 같아서 그러는데 12시 30분에 만나도 될까요?]
[우영씨 보면 답장 주세요]
이게 뭐지?
대화창을 올려 보니 가관이었다.
[섷ㅎㅇ와씨그러면내일 홍데 112시]
[ㅋㅋ좋아요. 근데 많이 취하셨는데 이만 자고 내일 일어나서 연락해요]
[ㅇㅏ저안츃셋는데여]
[내일 봐요~]
미친놈인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술주정? 박성화는 누구고 새벽의 정우영은 무슨 짓을 한 거지?
“야, 빨리 나 어제 뭔 일 있었는지 말해봐. 존나 급해.”
우영은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뭔가 약속을 해 둔 것 같아 급하게 일어나 샤워를 하고 나와서 지난밤 같이 술을 마셨던 여상에게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니가 뭘 했는지 어떻게 알아, 나도 집에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구만.’
“야야, 그러지 말고. 진짜 존나 급하다니까? 나 어제 뭐 이상한 짓 안 했어?”
‘늘 이상해서 특별히 이상할 것도 없는데.’
“강여상 너 자꾸 이딴 식이면 앞으로 안주 없어.”
‘아 맞다. 너 어제 그… 뭐지, 재디? 잭디? 그걸로 난리 쳤잖아.’
“뭐? 재, 잭디…?
-
그러니까 강여상이 우영의 닦달을 견뎌내며 전해준 지난 밤의 전말은 다음과 같았다.
친구들끼리 가진 술자리에 빠지지 않는 안주거리는 바로 연애사였다. 얼마 전에 헤어진 놈, 소개팅을 받은 놈, 2주년 기념으로 여행을 가겠다는 놈 등 다양한 사연이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우영은 조용히 술잔만 들이키고 있었다. 모든 화젯거리에 빠지지 않고 중심에 서는 놈이 그러고 있으니 주변에서 의아해한 것도 당연했다.
“웬일로 정우영이 아무 말도 없냐?”
우영이 못 들은 척 몸을 뒤로 젖혀 의자 등받이에 기대자 옆에 앉아 있던 여상이 대신 입을 열었다.
“얘 연애 못한 지 1년도 더 됐을 걸.”
“야, 너는 그걸 왜 말해!”
“뭐, 없는 말 한 것도 아니고.”
“와~친구는 안 만나도 연애는 해야겠다던 정우영 다 죽었네.”
“이 새끼가, 야. 니 말 다 했냐?”
자존심 빼면 시체인 정우영은 결국 발끈하고 말았고, 야 이것들아 나는 어? 맘만 먹으면 남자도 꼬실 수 있어, 라는 말을 던졌으며, 너 나 할 것 없이 취해 있던 그의 친구들은 와 정우영 패기 보소, 어디 한 번 해 봐! 라며 부추겼던 것이다. 여상의 말에 의하면 우영은 바로 핸드폰을 켜서 어플을 다운받더니(그런 어플은 어떻게 알았냐며 추임새를 붙여 우영은 나도 몰라 새끼야, 해버렸다) 리스트를 훑고(그 손짓이 너무 자연스러웠다던 여상의 말은 못 들은 척 했다) 이 얼굴이 마음에 든다며 바로 연락을 시작했다고 한다.
우영은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니까 내 손으로 직접 어플을 깔아서, 올라온 셀카들을 보고, 마음에 든다며 먼저 연락을 해 버린 사람이, 이 박성화라는, ‘남자’였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으나 간밤의 카톡은 분명히 그 증거가 되어주고 있었다.
홍대입구역으로 향하는 2호선에 올라타자 토요일 낮이라 그런지 사람이 더 많은 느낌이었다. 한껏 초조한 모습을 가릴 수 있으니 차라리 다행이었다. 적당한 소음과 사람들에 섞여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동안 우영은 손톱을 물어뜯으며 머리를 굴렸다. 어떤 말을 어떻게, 무슨 표정으로 해야 할까? 싶다가도 이게 무슨 소개팅 나가는 사람이 할 법한 생각인가 싶어 어이가 없었다. 사실 눈 한 번 딱 감고 차단 버튼을 누르고 쓰레기가 되는 방법도 있긴 했다. 그러나 박성화라는 사람의 프로필 사진을 한참 동안 들여다 본 결과, 이왕이면 분리수거는 가능한 쓰레기가 되어 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잘생겼다고 해서 꼭 멀쩡한 사람이라는 법은 없으므로 여상에게 6시까지 아무 소식도 없으면 먼저 연락해 달라는 카톡을 남겨뒀다. 여상이 읽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약간은 안심이 되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만나기로 한 9번출구에 조금 일찍 도착해서 어떤 사람인지 스캔 해 볼 요량이었다. 사진빨일 수도 있잖아?
다행히 15분에 지하철에서 내렸고, 공항철도와 경의중앙선과 2호선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대문짝만한 아이돌 광고판을 몇 개 거쳐 사람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계단에 다다랐다. 진짜 생각 없이 9번 출구에서 보자고 했네, 한숨을 내쉬고 앞사람을 따라 한 계단씩 천천히 올라갔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9번 출구엔 늘 사람이 가득해 몸을 감추기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KFC가 있는 건물 1층에서 출구를 지켜보기로 했다.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기에 카메라 어플을 켜서 셀카 모드로 바꾼 뒤 얼굴을 대충 확인했다. 음, 이 정도면 밤새 퍼 마신 것치고는 괜찮네. 조금 붓긴 했지만 못 봐줄 정도는 아닌 것 같다. 간만에 넘긴 머리도 괜찮은 것 같고, 초면에 실망할 정도는 아니겠다 싶어 얼굴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어렸다. 옆머리가 잘 넘겨졌는지 확인하느라 핸드폰을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조금 뒤쪽에 서있던 사람이 화면에 걸렸고, 아차 싶어 황급히 얼굴 쪽으로 다시 돌려서 괜히 한 번 더 비춰보고 화면을 껐다.
그런데, 방금 비친 사람 얼굴이 어딘가 익숙하다.
어라?
-
숨막히는 어색함 속에서 두 남자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홍대 한복판을 걷고 있다. 우영은 뭐라도 말을 붙여야 하나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괜히 더 어색해질 까봐 입을 꾹 닫았다. 아까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뒤로 휙 돌려 ‘혹시, 박성화 씨…?’ 라고 물어보자 당황해 하던 얼굴이 머리에 박혀 있었다. 박성화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지만 우영의 머릿속은 새하얘진 상태라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만 어정쩡하게 던진 후에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박성화가 ‘제가 아는 가게로 가실래요?’라고 말을 해 준 덕분에 바로 ‘네!’하고 대답했다.
아는 것이라곤 얼굴과 이름뿐이었기에 옆에서 나란히 걷는 것은 뭔가 부끄러웠다. 일부러 걸음을 조금 느리게 해 뒤따라 가면서 본 박성화의 뒷모습은 제법 마음에 들었다. 본인보다 키가 큰 것에 자존심이 조금 상하기는 했지만 멀끔하게 차려 입은 코트에 단정한 구두까지 어른스러워 보여 괜히 라이더를 입고 나왔나, 하고 쇼윈도에 비친 모습을 힐끔 스쳐보게 되는 것이었다. 함께 비춰진 박성화의 옆얼굴을 보고 남몰래 한 감탄은 덤이었다. 사진보다 낫네.
“초밥 괜찮아요?”
“어우, 없어서 못 먹죠.”
“다행이네요.”
간장을 그릇에 담아주며 살짝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남자를 만나 본 적은 없지만,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얼빠였다니. 이 관계가 어찌 되든 간에 잘생긴 남자랑 분위기 있는 곳에서 초밥을 먹는 경험이라면 아주 해 볼 만한 게 아니겠나 싶어 기분이 좋아졌다.
주문한 초밥세트가 나왔고, 장어에 연어에 광어, 새우가 종류별로 있는 것에 눈이 휘둥그레진 우영이 젓가락을 든 채 멍하니 있자 성화가 어서 먹으라며 웃었다. 우영은 이 정도면 꽤 비쌀 텐데, 그래도 반반 하면 괜찮겠지? 하다가도 지난 밤 쓴 술값이 생각나 마음을 놓기로 했다. 친구 놈들과의 술자리보다 훨씬 가치 있는 시간을 보내는데, 돈을 아까워하는 게 말이 되겠냐고.
밥을 먹으며 얘기를 나누다 보니 겨우 한 살 차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얘기를 듣고 나서 자세히 보니 옷만 어른스럽게 입었지 얼굴 자체는 확실히 별로 차이가 안 나 보였다. 우영이 얼굴을 뚫어져라 보자 너무 그렇게 쳐다보지 말라며 눈을 피하는 것이 귀엽기까지 했다. 한 살 차이쯤이야, 뭐. 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자신에게 놀라고 마는 우영이었다. 대화도 끊이지 않고 티키타카가 잘 되는 것이 이 정도면 정말 괜찮겠다 싶었고, 계속 웃는 얼굴인 성화를 보며 내심 뿌듯했다.
갑자기 너무 많이 먹은 탓인지, 긴장한 탓인지 배가 살짝 아파 화장실에 다녀오겠다 했더니 흔쾌히 그러라고 말을 한다. 화장실에 들어와 문을 잠그고 세면대 거울을 보니 잔뜩 긴장한 얼굴이 비춰졌다.
정신 차려, 정우영. 할 수 있어 새꺄! 쫄지 마!
양 볼을 쫙 소리 나게 치니 정신이 좀 들어 스스로 난 할 수 있다, 세뇌를 하며 핸드폰을 꺼내 여상에게 카톡을 하나 더 보낸다. 여전히 읽지 않은 상태지만 또 여전히 스스로의 안도감을 위해서.
[나 이제 남자 만날 거임. 연락하지 마 방해 되니까.]
파이팅 넘치게 손을 씻고 나오자 성화는 핸드폰을 보고 있다가 우영이 오는 것을 보고는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자리에 앉으며 무심코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어느새 3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보통 소개팅이라면 이 타이밍에 카페로 넘어가든지 할 텐데, 이건 소개팅이라고 하기엔 애매하고 그렇다 해서 사무적인 만남도 아닌 것이,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 난감해졌다. 하나 분명한 점은 이대로 헤어지고 싶지가 않다는 것이었다. 재빨리 머리를 굴려 친구의 지인이 홍대에서 펍을 운영한다던 기억을 떠올렸다. 한 번 가서 팔아주라는 말을 귓등으로 흘려 들었는데, 지금이 바로 팔아주러 가야 할 때인 것 같다.
“저, 근처에 제가 아는 형이 하는 펍이 있는데, 혹시 괜찮으시면 같이 가실래요?”
“펍이요?”
“아, 카페가 나을까요? 술 안 드세요?”
“아니 그냥, 대낮부터 펍이라길래 조금 놀랐는데. 뭐, 상관 없어요.”
혹시나 거절당할까 조금 긴장했던 것이 풀려 기분이 좋아진 우영은 신이 나서 카드를 꺼내 들고 먼저 카운터로 향했다. 술까지 같이 마셔준다는데, 이 정도 초밥쯤이야!
“저, 이미 계산하셨는데요.”
“네?”
“아까 일행 분께서 계산하셨어요.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내가 로또라도 맞은 건가?
-
“아니 혀엉, 그걸 다 계산해버리시면 어떡해요.”
혀 꼬인 소리가 술이 조금 들어가니 잘도 술술 나온다. 물론 조금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영의 기준이었다. 성화가 300cc를 반절도 넘게 남겨둔 상태에서 우영은 이미 두 잔을 비우고 있었다.
“제가 딱 멋있게 카드 딱! 하려고 했는데에.”
“맛있게 먹었으면 됐죠, 뭐.”
크, 멋있다. 얼굴만 봐도 반하겠는데 지갑까지 반해버리게 만드네. 이미 남자를 만나고 어쩌고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진 우영이었다. 딱 보니 벌써 얼굴이 빨갛게 올라온 것이 술은 못 하는 것 같아 안주를 성화 쪽으로 밀어주고 벨을 눌러 500cc를 새로 주문했다.
“그래서, 제가요. 원래 이렇게 막 어플로 갑자기 사람 만나고 이러지 않거든요? 근데, 형은 궁금한 거예요. 술을 그렇게 먹고도 만나 보고 싶다는 생각이 정도로.”
“그랬어? 고맙네.”
어느 순간 슬쩍 말을 놓고 있는 성화를 보면서 더 가까워졌다는 생각에 짜릿해졌다. 이거 이대로면 완전 탄탄대로인 걸, 절대 말 안 놓을 것처럼 굴더니. 딱딱해 보이던 첫인상과도 달리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도 조금 더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그나저나 연상은 처음인데, 어떻게 이어나가야 하나, 등의 생각을 하며 기분이 붕 떠 있었다.
“그런데,”
“네?”
우영이 500cc를 거의 다 비웠을 무렵, 처음 시켰던 300cc의 끝을 보인 성화가 입을 열었다.
“우영씨 이쪽 아니죠?”
이쪽? 이쪽으로 오라는 건가? 아니 뭔가 말이 이상한데, 내가 술이 덜 깨서 말을 잘 못 알아듣는 건가? 무슨 말이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봤자 답이 나오지 않으므로 결국 솔직하게 반응하기로 한다.
“이, 이쪽…이요? 네?”
“…그럴 줄 알았어.”
물론 솔직함이 항상 좋은 결과를 불러오는 것은 아니다. 일순간 싸늘해진 눈빛과 코트를 집어 들고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모습이 그것을 증명한다. 빈 잔을 들고 멍해진 우영은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방금 전까지 분위기 좋았잖아?
“어? 아니, 형? 아니 저기, 저기요, 성화씨?”
허겁지겁 라이더를 대충 주워 입고 이미 문을 열고 나간 성화를 붙잡으러 가려는데 그러기도 전에 ‘아는 형’-즉 친구의 지인에게 손목이 붙들려 계산부터 해야 했다. 하필 이런 타이밍에 계산하느라 붙잡혀 있어야 한다니, 한 시가 급한 입장에서 다리가 달달 떨렸다. 게다가 또 하필 카드 리더기가 말썽인지 대여섯 번을 긁은 후에야 겨우 결제가 되었다. 대충 인사를 하고 건네주는 카드를 낚아 채 달려나가면서 우영은 속으로 울고 있었다. 이래서 갤럭시를 써야 하나 봐. 팀쿡 개새끼야 애플페이 언제 해주냐고.
-
제발, 제발 받아라. 아 좀 받아주세요, 제발.
우영은 지금 보이스톡을 정확히 열 번째 걸고 있다. 번호를 받아두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지만 지금은 차단당하지 않은 것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 같았다. 급하게 뛰쳐나갔지만 당연하게도 성화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할 수 없이 집에 돌아오는 길에 머리를 긁으며 인터넷을 뒤진 결과 ‘이쪽’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나서야 이마를 팍팍 쳤다. 입이 방정이라며 입도 쳤다가 부어 오른 것을 가라앉히느라 냉장고에서 꺼낸 맥주 캔을 입에 대고 있다.
물론 잘못은 했지만 이대로 끝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게까지 매달리는 것 자체가 정우영 인생에서 한 번도 없는 일이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지금 자존심이 대수랴.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만나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처절하게 매달리는 중이었다. 진짜 마지막이라고 다섯 번 정도 되뇐 뒤 열 한 번째 보이스톡을 걸었다.
‘…네.’
“아, 헐, 아니 저기 성화씨! 아 진짜 받아줘서 고마워요. 제가 진짜 잘못한 거 알고 있거든요?”
‘알고는 있다니 다행이네요.’
“제가 진짜, 정말로 죄송한데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요….”
‘굳이 뭐 변명할 필요는 없어요. 사과는 받은 걸로 할게요.’
차가운 목소리가 야속하기만 했다. 몇 시간 전까지 좋았으면서, 물론 잘못을 한 것은 맞지만, 나도 나름 마음 먹고 노력한 건데. 우영은 어느새 약이 바짝 올랐다. 이왕 분리수거는 가능한 쓰레기가 되기로 마음 먹은 거, 뭐라도 해봐야 쓰레기가 될 것이 아닌가?
‘더 할 말 없으면 이만 끊을게요.’
“아니, 형, 그럼 초밥은 왜 사 준 거예요.”
‘뭐…?’
“왜 그랬냐고요. 그럴 줄 알았다면서요? 근데 그 비싼 걸 왜 사줘요?”
핸드폰 너머로 정적이 느껴졌다. 어느 정도는 정곡을 찌른 것 같아 약간 기세가 등등해졌다.
“사람 헷갈리게 만들지 말고 얘기해 봐요.”
‘…그냥 막상 만나 보니까 귀여워서. 됐죠? 끊을게요.’
뭐라고??
“방금 뭐라 그랬어요?”
‘뭐요.’
“저 귀여워요?”
‘…아니, 그러니까. ……그냥 못 들은 걸로 해요.’
“그럼 저 만나봐요. 저 잘해요.”
기왕 이렇게 된 거, 갈 데까지 가 보자. 버튼 하나로 차단해버리면 그만일 사이, 나도 아쉬울 것 하나 없다 이거야. 자존심 빼면 시체인 우영은 지금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뭐, 뭐라고요?’
“아니, 그니까. 남자랑 해 본 적은 없는데, 아무튼 잘 한다니까요. 한 번만 만나보면 후회 안 할 걸요?”
반쯤은 도발이었으나 또 반쯤은 자존심의 표현이었다.
-
그 자존심은 성화의 꽤 넓은 오피스텔에 들어서는 순간 약간 꺾였다. 겨우 한 살 차이인데 이렇게 차이가 나도 되나. 하지만 목적이 있어서 왔으니 여기서 쫄리면 죽도 밥도 안 될 것을 알기에 애써 태연한 척 집 좋네요, 한 마디를 던지고 여유 있는 척 시선을 한 번 돌렸다. 성화는 우영이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보겠다는 듯 말 없이 한 번 웃고 말 뿐이었다.
두 번째로 꺾인 것은 성화와 입을 맞추며 자기도 모르게 미친, 너무 좋잖아? 라는 말을 뱉을 뻔 했을 때였다. 어떻게 이런 맛을 모르고 살았지, 지난 날에 대한 회한이 스쳐가며 허리에 손을 감아 오는 성화의 얼굴을 붙잡고 열심히도 입술을 물고 빨아댔다.
세 번째로 꺾인 것은 자신의 손 때문이었는데, 키스를 하며 셔츠 속으로 손을 넣어 가늘지만 탄탄한 허리를 쓸다 그만 날개뼈까지 올라가 버렸던 것이다. 그 순간 둘 사이에 흐른 정적에 우영의 머릿속은 이대로 등짝을 맞을까 뺨을 맞을까 벗은 몸으로 쫓겨나는 건가, 하는 생각들로 가득했고-그 찰나의 시간이 25층부터 층마다 멈추는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길게 느껴져 차라리 뭐라도 말을 해주세요, 라며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으나-한 살 위의 연상은 눈을 가늘게 떠 힐끔 째려보더니 어른스럽게 한 번만 봐주겠다는 듯 혀를 진득하게 얽어오기에 천만다행이었다.
그 꺾인 자존심이 회복된 것은 어느새 상황을 우영이 리드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사실 어릴 적 철없을 때 대딸 정도야 해 보았지만 남자와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처음이었기에 손을 멈칫한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을 성화가 알아챌 틈이 없게끔 일단 키스부터 열심히 했다. 그리고 우영은 자신감이 있어도 될 만큼 잘 하는 편이었기에 성화는 우영의 손이 허우적거리는 것을 볼 틈도 없이 눈을 감은 채로 그저 받아내기에 바빴다. 그 사이에 우영의 손은 대충 여길 만지면 좋겠거니 싶은 부분들을 지분대기 시작했다.
문제는 성화를 침대에 눕히고 나서였다. 얼굴에 열이 잔뜩 오른 채로 숨을 헐떡이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성화의 눈이 이미 반쯤은 풀려 있었기에 이제야말로 ‘넣을 타이밍’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하지만 이대로 넣어도 되나? 뭐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 그냥 넣어도 되나? 하는 혼란스러운 심정으로 일단 가슴께를 쪽쪽대며 재빨리 머리와 눈알을 굴렸다. 무신론자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속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을 읊으며 한 번만 도와주십쇼, 를 외쳤다.
그리고 우영은 결정적인 순간에 운이 좋은 편이었다.
침대 옆 협탁에 놓인 페페젤에서 후광이 비치는 것을 봤다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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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어땠어요.”
까무룩 잠이 들었다 정신 퍼뜩 들고 나서 성화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우영이 뱉은 말이었다. 성화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한참을 웃었지만 우영은 진심이었기에 약간 발끈하여 빨리 말해보라고 보챘다. 성화는 말없이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몸을 꾸물꾸물 움직여 그 가리킨 방향으로 가 보니 쓰고 난 콘돔이 몇 개나 떨어져 있어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으나 동시에 자존심이 최대치로 회복되어 광대가 저절로 올라갔다.
성화가 씻어야겠다며 몸을 일으키는데 그 가느다란 허리가 눈에 들어와 저도 모르게 팔을 뻗어 감아버렸다. 고개를 돌려 내려다보는 그 얼굴이 어제 자신의 밑에서 흔들리며 울던 그 얼굴이 맞는지,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저 만나볼 마음, 생겼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