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 vous plaît
정중함
하마

 

프랑스에서는 숫자를 되게 특이하게 센대.

어떻게?

21을 20에 1을 더한 걸로 세는 거야.

진짜 특이하네.

80은 4에 20을 곱한다?

걔들은 왜 그렇게 복잡하게 살까?

그러니까 말이야.

20을 중요하게 여기는 건가.

오, 그럴 수도 있겠다, 산아. 대단한데?

그냥 해 본 말이야. 뭐가 대단해.

또 부끄러워서 그러지. 하여튼 귀엽다니까.

나 귀엽다 하는 거 형밖에 없다.

그걸 이제 알았어?

아, 박성화 진짜.

아하하. 장난이야.

-.

날렵하게 걷어 올린 남빛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고 흰 장삼을 걸친 무용수가 발소리도 없이 들어선다. 어깨에는 붉은 가사가 매어져 있어 시선을 끌지만 흰 고깔을 쓰고 있어 그 얼굴을 쉬이 알아볼 수가 없다. 

몸을 굽혀 웅크렸다가 일어나 북소리와 함께 양팔을 서서히 들어 올리자 유려한 곡선이 부서지는 햇빛을 받아 자못 눈이 부시다. 정면을 등지고 선 채로 만들어내는 손짓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선을 끌게 한다. 비스듬히 내딛는 걸음하며 긴 장삼을 공중으로 길게 얽어내는 몸짓이 한없이 가벼우면서도 무게감이 있다.

6박자의 긴염불을 반주로 시작된 움직임은 매우 느리고 묵직하여 움직일 듯 말 듯 하다가 돌연히 한삼을 공중에 날려 둥그런 곡선을 그린다. 이윽고 조금 빠른 6박자의 반염불에 맞추어 북을 몇 차례 어르고 나서 4박의 장단인 타령에 발을 모로 딛고 유연한 움직임을 보인다. 북채를 든 손은 한삼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으나 세워 놓은 북을 간간이 치곤 한다. 자진모리와 당악(堂樂) 장단에 맞추어 시작된 북의 연타는 자칫 잘못하면 그 박자를 따라갈 수 없게끔 휘몰아친다. 

-

성화는 산이 혼자 연습을 하고 있을 때 가끔 문가에 서서 물끄러미 바라보기를 했다. 처음엔 그것이 신경 쓰여 나가 있든지 들어와 있으라 했으나 성화는 금방 나갈 것이라고, 서서 보는 게 좋다며 연습이 끝나갈 때까지 줄곧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적이 많지는 않았으나 그때마다 온 몸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 움직임이 둔탁해지는 것이 저절로 느껴졌다. 

무용을 하지는 않았으나 무용수의 아들로 살아 온 성화가 그 차이를 모르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그는 늘 별다른 말 없이 조용히 수건을 건네며 수고했다, 한 마디를 남길 뿐이었다. 산은 역시 응, 하는 한 마디만 뱉고 수건을 받아 들어 얼굴을 닦았다. 둘 사이에는 그리 많은 말이 오고 가지 않았다.

산이 처음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스승은 자신의 아들을 소개하며 한 살 차이니 형 동생 하며 잘 지내거라, 말을 했지만 서로 말없이 고개만 까닥이고 말 뿐이었다. 대학생인 성화와 무용수인 산의 시간은 꽤 다른 궤도로 흘러갔고 성화가 방학을 맞아 집에 내려왔을 때에야 겨우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스승의 집에서 생활을 했지만 산은 스승의 옆방인 1층에서, 성화는 2층의 구석에 있는 본인의 방에서 지냈기에 아침 식사 시간에 몇 번 마주친 것 외에는 같은 집에서 생활하는 사이라고 하기엔 모자람이 있었다.

처음 긴 이야기를 나눠 본 것은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스승이 오랜만에 서울에 다녀 온다며 오늘은 자유롭게 쉬라 하였으나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몰라 거실에 앉아 무용 영상을 틀어두고 멍하니 있었다. 눈을 감고 소리만 듣고 있어도 어떤 손동작을 해야 하고 어깨는 얼마나 낮춰야 하며 발걸음은 어디로 향해야 할지 알 만큼 오래 보고 추었던 춤이다. 밖에서는 빗방울이 토독, 소리를 내며 창에 부딪혔다. 그렇게 한참동안 소리로만 춤과 비를 듣고 있을 때 다른 소리가 귀에 섞여 들어왔다. 나무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를 듣자 하니 성화가 방에서 나온 모양이었다. 

스승이 새벽부터 일찍 나간 덕에 평소에 암묵적으로 다 같이 모여야 하는 아침식사는 제 시간에 일어난 산 혼자 간략하게 이루어졌고, 그 탓에 둘은 오늘 처음 보게 되는 것이었으나 굳이 고개를 돌려 인사를 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부엌으로 가 식사를 하거나 밖으로 나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성화는 산이 앉은 소파의 반대쪽 끝으로 와서 걸터앉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나 싶었지만 달리 적당한 것은 생각나지 않았고, 둘은 그렇게 한참 동안 나란히 앉아 tv에서 흘러 나오는 장단을 귀에 흘려 보냈다. 북소리가 잦아지고 빗소리가 그 자리를 대신할 때쯤 성화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산아, 나는 네 춤이 좋다.

뭘 얼마 보지도 않아 놓고 그런대.

그냥 좋아.

싱겁기는.

그 후로 둘 사이에 인사 외의 말들이 오고 가기 시작했다.

-

모든 일이 그렇듯 연습이 늘 뜻대로 잘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산은 기복에 관계없이 늘 연습실에 있었고 스승은 그런 산의 태도를 높이 샀다. 집에까지 들일 정도의 제자는 그의 40여년 간의 무용 생활에 있어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아끼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굳이 부연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었다. 특히나 산은 그 제자들 중 가장 어린 나이였다. 

그러나 아낀다고 해서 그 방식이 늘 친절한 것만은 아니었다. 본인의 성에 차지 않으면 한 동작을 수없이 반복하도록 했으며 그 덕에 온 몸이 땀에 흠뻑 젖어도 산은 아무런 대꾸 없이 묵묵하게 몇 백 번이고 해냈던 것이다. 하루는 그러기를 반복하다 바닥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한 적도 있어 스승은 놀라 사람을 불러오기도 했다.

너는 왜 그렇게까지 미련하게 굴어.

침대에 누워 있는 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성화가 입을 열었다. 필요 없다 하였으나 성화는 굳이 방문을 열고 들어와 옆에 의자를 끌고 와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딱히 간호라고 할 것도 없이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기에 끝내는 그 시선을 이기지 못할 것이었으나 애초에 이길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저런 말을 하면 뭐라 되받아 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말이나 하려고 들어왔어?

입은 살아있는 걸 보니 죽을 정도는 아니구나.

언제 들고 왔는지 정갈하게 깎아 놓은 사과가 담긴 접시를 내민다. 그러면 산은 고맙다 말은 없이 꼭 지 같이도 깎아 놨어, 하는 생각을 하며 하나를 집어 먹는다. 성화 역시 별다른 말은 하지 않은 채 사각거리는 소리에 이어 우물거리는 입을 보고서야 만족한 듯 미소를 보인다.

산아, 너는 춤을 언제부터 췄어?

글쎄, 한 20년 됐으려나.

한 살부터 췄다는 거야?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거의 그 정도라는 거지. 기억이 있을 때부터 몸을 움직이고 있었으니.

진짜 대단하다.

대단할 것도 많다.

나도 어릴 땐 무용수가 되고 싶었는데.

박성화가?

뭐야, 그 반응은?

아, 그냥. 상상이 안 되네. 무용수 박성화라니. 하하.

참나, 됐어.

아, 나가지 말아봐. 근데 왜 안 했어?

이유야 간단하지. 재능이 없었거든. 아버지 피는 다 어디로 갔는지 몰라.

이쪽으로 안 간 것은 확실하네.

자꾸 말 안 이쁘게 한다.

사과 잘 깎았네, 하나 먹어.

팔을 뻗어 접시에 남은 사과 중 하나를 집어서 입에 물려주니 그제야 어이 없다는 듯이 또 웃는다. 웃을 때마다 눈썹 끝이 내려가는 것이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은 웃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입원해 있을 때 맨날 한 거라곤 과일 깎는 것뿐이었거든.

입원?

말 안 했나? 나 대학 가기 전까지는 집보다 병원에서 더 오래 살았어. 나중엔 하도 할 게 없다 보니 병실에 있는 과일이나 깎게 되더라. 뭐가 됐든 맨날 하면 는다니까. 춤도 그렇잖아.

그렇긴 하지.

마지막 남은 사과 하나를 반으로 쪼개 반은 접시에 두고 나머지 반을 입에 털어 넣으며 산이 대꾸했다. 

-

연습복은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매일같이 세탁기를 돌리는 것이 번거롭지는 않았으나 가장 많이 사용하기에 빨래는 자연스럽게 산의 담당이 되었다. 빨랫감에는 가끔 성화의 옷가지가 몇 벌 섞여 있기도 했다. 산의 연습복은 검은색이 많았고 성화의 옷은 주로 흰색이었다. 이러면 색이 섞이니 세탁기를 따로 돌리라 몇 번 말을 했는데도 성화는 상관 없다며 그냥 한 번에 하자고 했다. 말은 그래도 정작 물이 들면 온종일 신경 쓸 것이 뻔했기에 세탁기 안을 살펴 흰색 옷들을 따로 꺼내놓는 것까지가 산의 몫이었다.

성화는 교양으로 프랑스어 수업을 듣는다는 것 외에는 학교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산은 가끔 성화가 학교에서 어떤 공부를 하는지 궁금했지만 대학에 다녀보지 않아서 궁금한 것인지 그냥 성화가 궁금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냥 성화의 생활이 궁금했던 것도 같았다. 

성화가 외출을 하는 일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은 자기 방의 침대에 누워 지냈다. 아직도 몸이 완전히 좋아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산이 2층에 올라가는 일은 여전히 적었다. 가끔 아침식사 시간에 성화가 나타나지 않을 때는 스승의 얼굴이 찌푸려지기 전에 몸을 일으켜 나무계단을 가볍게 뛰어 올라갔다. 복도 끝에 위치한 성화의 방 앞에 서서 괜히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노크를 두어 번 한 뒤 문을 살짝 열면 이불을 코 끝까지 끌어 올려 덮은 채 고개만 문 쪽으로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눈가엔 웃음이 가득한 것이 어이가 없어 그만 피식 웃어버리게 된다.

일어났으면 내려와서 밥 먹어야지 뭐해.

너 오는 거 기다리고 있었지.

뭐?

아버지 아직 화는 안 나셨지? 이리 와 봐.

아 왜.

툴툴대면서도 침대 머리맡으로 다가간다. 이건 박성화를 일으키기 위해서이지 이리 오라는 말을 듣는 것은 아니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얼른 일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허리춤에 손을 감고 얼굴을 비비적거리는 통에 휘청거릴 뻔했다.

뭐, 뭐하는 거야.

아, 산아. 너한테서 좋은 냄새 난다.

징그럽게. 빨리 일어나라니까 박성화.

으응, 나 머리 어지러워. 잠깐만 이러고 있을래.

건강에 대한 말을 조금이라도 하면 어쩔 줄 모르고 해달라는 대로 해 주는 것을 기가 막히게도 이용해먹는 모습에 어쩔 수 없이 오늘도 져 주기로 한다. 허리를 감고 기대고 있는 손을 가만히 둔 채 자고 일어나 부스스해진 머리칼을 손으로 살살 쓰다듬는다. 강아지도 아니고, 참.

밥 식는다 이 놈들아.

스승의 언짢은 듯한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면 그제야 몸을 떼어 성화의 팔을 붙잡아 일으킨다. 그럴 때마다 푸스스 웃으며 고마워, 하는 얼굴이 그저 좋아서.

이런 날들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보 같은 생각을 애써 모른 척하며 계단을 내려간다.

-

나는 스무 살이 넘으면 뭔가 달라질 줄 알았는데.

한참을 가만히 있던 성화가 입을 열었다. 어찌나 오래 낼 일이 없었던 것인지 건조해진 목소리가 공기를 비집고 나오는 것이 힘겨워 보여 괜히 울컥해졌다. 그것을 들키고 싶지 않기에 창가로 향한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저 있는다.

여전히 여기에서 이러고 있네.

성화가 서울에 있는 모 병원에 입원한 지도 한 달이 지났다. 하필이면 산이 작품을 준비하는 시기와 겹쳐 몇 번 찾아와보지도 못했으나 겨우 짬을 내어 고속버스를 타고 잔뜩 피곤이 내려앉은 눈을 비비며 병실에 들어서면 성화는 매번 미안한 표정을 짓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내려가는 눈썹을 보기가 싫어 일부러 쌩쌩한 척을 했다. 최소한의 연습시간을 채우느라 밤을 새고 첫 차를 타고 올라오며 정신을 놓고 쪽잠을 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렇게라도 볼 수만 있다면야, 잠을 줄이는 것쯤이야 아무런 일도 아니었다.

스승은 그의 아들을 위해 좋은 병원의 1인실을 마련해주었지만 그것이 성화에게 좋은 일이었을지는 모르겠다. 원래도 말수가 적은 사람이지만 혼자 있으니 더욱 심해져 가끔은 아무런 말 없이 서로 물끄러미 바라만 본 적도 더러 있었다. 그러다 어느 한 쪽이 웃음을 터뜨리면 둘 다 한참을 웃는 일도 있었으나 성화의 상태가 나빠질수록 그것도 추억이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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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다음 생을 받기까지는 7일의 시간이 7번 필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 49일 동안 너를 보낸 적이 없다.

사람들이 산 사람은 살아야지, 라는 위로의 말을 건넨다.

나는 그 ‘산’과 나의 이름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닮아 있기에 입을 열어 무어라 뱉어보려다 그만 입술을 짓씹고 말아버린다.

나는 매일같이 너와 만나는 꿈을 꾸며 몸짓을 만들어낸다.

너라고 부른다 해서 화를 내지는 않겠지.

아니, 화라도 내 주었으면 좋겠다. 그러지 말라고, 웃는 듯 우는 듯한 그 사무치게 보고 싶은 얼굴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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귓가에 맴돌던 북소리가 멎음과 동시에 무용수의 손짓을 통해 긴 장삼이 허공에 뿌려지고 발을 말리며 어깨를 저정거리는 것이 마치 무언가를 달고 어르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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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곳으로 잘 가라,

부디(S'il vous plaî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