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를 놓친 사랑은
짝사랑 / 동정



0.

 

송민기는 박성화와 사귄다. 하지만 이 둘의 관계는 뜯어보면 보통 연인의 관계와는 많이 달랐다. 송민기의 일방적인 구애와 그 애정을 받으면서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 박성화. 그래, 명백히 일방적인 관계였다. 송민기의 친구 정우영은 잊을 만할 때마다 한 번씩 송민기에게 묻곤 했다. 너는 박성화 형이랑 왜 만나? 어차피 그 형은 너 안 사랑하잖아.




사랑. 고작 고딩이 입에 담기에는 너무나도 어른의 말이라고 송민기는 생각했다. 나도…, 사랑하는 건 아니야. 좋아하는 거지. 구질구질한 말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이러지 않아도 송민기는 충분히 불쌍한 역할을 맡고 있으니까.




1.

 

BGM: All the rest-Ghost Heart

 

송민기의 지긋지긋한 짝사랑은 대략 일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지금도 송민기의 옆에 붙어 있는 정우영과 제발 공부 좀 하자며 결의를 다지는 마음으로 서울권 대학을 탐방하러 갔던 고등학교 이 학년의 어느 더운 여름날 송민기는 박성화를 만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만났다기보다는 우연히 마주친 것이었지만.




2.

 

“야, 학교 되게 넓다.”

 

“그르게. 우리 학교도 넓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남고가 넓어봤자 얼마나 넓겠냐?”




팔 월 육 일.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뒤에서 일 등을 다투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보다 아주 조금 나은 성적을 가지고 있던 송민기와 정우영은 고등학교 이 학년 이 학기를 맞아 이제는 정신을 좀 차려보자는 마음가짐으로 서울로 대학 탐방을 갔었더랬다, 둘 다 문과에 지망하는 과도 비슷해-그렇지만 가난한 전공이다- 어렵지 않게 구경하러 갈 대학을 정할 수 있었다. 아홉 시까지 터미널에서 보는 거다? 정우영 니 늦으면 뒤져, 진짜. 아 알았다고! 니나 늦지 말라고! 가뜩이나 높은 톤의 목소리가 빼액 소리를 지르니 송민기는 반사적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아 새끼 목소리 존나 쨍해.




그렇게 각자 메신저백 하나씩 메고 상경한 촌놈-엄밀히 말하자면 쌩 촌놈은 아니었다 서울까지 버스 타고 한 시간밖에 안 걸렸으니까-들은 어떻게 지하철까지 마스터해 대학 정문을 밟았다. 대학교 전경부터 건물 사진, 여러 마스코트 동상들까지 휴대폰 카메라로 찍으며 다니다 보니 학교 한 바퀴 도는 건 일도 아니었다. 교내 카페에 앉아 미리 대학생 기분이나 내 보자고 설레발치며 시험기간에나 마시던 아메리카노를 각자 앞에 두고 한가하게 창밖이나 쳐다보고 있던 송민기는 그때 박성화를 보았다. 노트북 파우치 하나 들고 카페로 들어선 박성화가 잠깐 두리번거리다 자리 잡은 곳은 송민기와 정우영이 앉아 있는 창가 테이블 바로 옆이었다. 여기서 잠시 짚고 가야 할 사실은 박성화가 송민기의 완식이라는 사실이었다. 진동벨이 울린 후 박성화가 가져온 음료는 블루베리 스무디. 귀엽다. 그런 생각을 했다. 여전히 의자 등받이에 기대 휴대폰을 만지고 있는 정우영에게 카톡을 보냈다.




[야]

[우리 옆 테이블에 있는 형]

[번호 따도 되냐]

 

[오 존나 니가 좋아하게 생겼네]

[해보던가]

[근데 애인 있을 것처럼 생김 ㅋ]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가볍게 눈을 흘긴 송민기가 그대로 일어서 박성화에게 다가갔다. 저기요. 노트북 자판에 고정되었던 시선이 송민기를 따라 위로 올라왔다.




“네?”

 

“저 형이 마음에 들어서 그러는데.”

 

“…….”

 

“번호 좀 주실 수 있을까요?”




박성화의 눈썹이 들썩, 움직였다. 제 앞에서 두 손으로 휴대폰을 내밀며 손을 살살 떨고 있는 모습이 조금 귀엽게 다가오기도 했고. 그래서 순순히 번호를 찍어주었다. 감사합니다! 하며 다시 옆자리에 가 앉는 뒷모습과 그 앞자리의 친구로 추정되는 남자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신입생인가?




3.

 

그렇게 송민기의 일방적인 구애가 시작되었다. 타과 새내기인 줄 알고 다짜고짜 초면에 휴대폰을 들이미는 송민기에게 번호를 찍어줬던 박성화는 고등학생, 거기다가 이 학년이라는 사실에 송민기의 연락을 거절했었다. 애인을 만들 생각은 없었고, 세 살이나 어린 사람을 만날 생각은 더더욱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모순적이게 박성화는 만나자는 송민기의 부탁을 여러 번 수락했었다. 은근슬쩍 손을 잡아오거나 팔짱을 껴 오는 송민기를 알면서도 눈감아주었다. 그래, 박성화는 자신이 송민기에게 여지를 주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송민기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대하는지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한 발 물러나 송민기가 원하는 바를 주며 관망했다. 송민기는 그것이 좋으면서도 못내 불안했다. 언제든지 저를 내치고 도망갈 수 있을 박성화를 알았기 때문에.




4.

 

둘의 관계를 알고 있는 정우영을 제외한 남들이 보는 송민기와 박성화는 휘두르는 연하와 휘둘리는 연상이었다.




“박성화.”

 

“왜?”

 

“오늘 저녁에 동기들이랑 술 마실 건데.”

 

“아, 나 오늘은 안 돼.”

 

“또 걔 만나?”




박성화는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웃을 뿐이었다. 다음에 만나자고 해. 같이 밥 먹자는데, 만나줘야지. 너답지 않게 잡혀 산다, 박성화. 박성화는 굳이 부정의 뜻을 내비치지 않았다. 제가 나서면서까지 그 오해를 고쳐줘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5.

 

그렇지만 오히려 잡혀 사는 쪽은 송민기였다.




6.

 

야, 나 오늘 보충이랑 야자 뺀다. 정우영은 종례가 끝나자마자 들려오는 송민기의 목소리에 한숨을 삼켰다. 너 또 그 형 만나러 가? 공부 의지를 다지자며 갔던 대학교 탐방에서 웬 형한테 코를 꿰였으니, 정우영은 송민기를 한심하게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너 대학 안 가게? 그 형은 뭐 이렇게 자주 만나자 그래? 내가 만나자고 한 거야. 정말, 빠져도 단단히 빠진 것 같았다. 안 될 사람인 걸 알면 깔끔하게 포기할 줄도 알아야지,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왕복 두 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버스로 왔다 갔다 하고 제 돈 다 써 가며 박성화를 만나고 오는 송민기가 한심했다. 기저에 안쓰러움이 깔려 있는 한심함이었다.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냐, 송민기? 너 같으면 포기가 되겠냐. 송민기가 책가방을 한쪽 어깨에 둘러멨다. 나 간다. 내일 보자. 오키, 송민기 니 오늘은 집 일찍 들어가라. 정우영은 교실 문 밖으로 나서는 송민기의 뒷모습을 걱정 섞인 눈으로 보았다. 저러다 한 번 크게 데이지….




형. 멍하니 지하철역에 서 있던 박성화는 제 뒤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어, 민기야. 왔어?




“죄송해요. 차가 많이 막혀서. 많이 기다렸죠.”

 

“아니. 별로 안 기다렸어.”




나도 방금 나왔는데. 이어지는 박성화의 말에 송민기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오늘은 뭐 먹을까요? 글쎄…, 곱창 먹을래? 좋아요. 반걸음 뒤에서 박성화를 따라가던 송민기가 발걸음을 재촉해 박성화의 바로 옆에 가 섰다.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한 채 모르는 척 손을 잡아 오는 송민기를 곁눈질로 힐끔 본 박성화가 손에서 힘을 풀었다. 힘이 풀려 자연스레 구부러진 박성화의 손은 애매하게 송민기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한 것인지 송민기는 박성화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알싸하게 밀려오는 아픔에 인상을 찌푸린 박성화는 거기에서 그쳤을 뿐이다. 아프다는 말도, 빼달라는 행동도. 아무것도 없었다. 박성화는 항상 그랬다. 이도저도 아닌 태도, 원하는 것도 바라는 것도 없는 미적지근한 사람. 그리고 송민기는 굳이 그 사실을 상기시키지 않으려 노력했다. 사랑 없는 관계인 것도 비참한데, 이렇게 확인 사살을 당하기에는 송민기가 그다지 강인하지 않은 멘탈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행복 회로 돌리기에도 바쁜데 굳이 현실을 곱씹으며 초를 치고 싶지는 않았다.




박성화는 그런 송민기의 태도에 기인한 이 상황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서도 연일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이 관계의 시작이 송민기였으므로 언젠가 마주할 끝도 송민기여야 했다. 박성화는 막연히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박성화의 머릿속에 사랑에 빠진다, 는 가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7.

 

그렇지만 관계의 전환이라는 것은 예상치 못하게 찾아오는 법. 박성화는 그 사실을 간과했다.




8.

 

송민기가 변했다. 제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나 되는지, 박성화는 속으로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지? 삼 주 전 저녁에 만나 곱창을 먹었던 날. 그 날이 마지막 만남이었다. 고삼이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찾아오던 송민기였는데, 아무리 송민기와 전혀 같은 마음이지 않았다 해도 머릿속이 송민기와 관련된 생각으로 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주기적으로 얼굴을 마주하던 상대와 연락도 없이 만남이 끊기고, 그 이유를 물어볼 수조차 없다는 사실. 이것만으로도 박성화가 송민기를 기다릴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사실, 박성화는 자신이 송민기의 연락이라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는 못했지만. 휴대폰 홀드 버튼을 자꾸만 누르는 박성화를 눈치 챈 동기가 박성화의 휴대폰을 가져다가 제 주머니 안에 넣었다.




“너 오늘따라 왜 그래?”

 

“뭐가.”

 

“교수님 수업하는데 집중도 못 하고,”




너답지 않게. 교수님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은 기분에 황급히 입을 다문 동기가 다시금 볼펜을 잡고 수업에 집중했다. 고요해진 동기와는 다르게 박성화의 머릿속은 한없이 시끄러웠다.




박성화가 사랑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나름 고등학생이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사람을 사귀었던 경험도 있었고, 주변에서의 경험담으로도 많이 접해왔으니까. 단지 이토록 갑작스러운 감정 변화에 익숙하지 않을 뿐이었다.




9.

 

야. 박성화가 제 옆자리에 앉아 있던 동기를 불러 세웠다.




“너 내 남자친구 알지.”

 

“그 너 좋다고 쫓아다니는 애?”




송민규인지, 송민기인지. 근데 왜? 박성화에게 휴대폰을 돌려주고는 동방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동기가 질문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오던 앤데 삼 주 전부터 안 오거든? 연락도 안 되고.”

 

“엉.”

 

“뭔지 모르겠어.”

 

“뭘 뭔지 몰라.”

 

“아니, 난 걔를 좋아하는 게 아니잖아.”

 

“응.”

 

“걔만 나 좋다고 따라다니고. 난 그냥 받아주기만 하고.”

 

“각 나오네, 뭐.”




걔 이제 마음 접은 거 아니야? 잠수 탄 거 보면 반쯤은 확실하고만. 근데 걔 고딩이라 그러지 않았냐? 그냥 먼저 차. 걔도 이제 공부해야지. 덧붙인 동기의 말은 미처 박성화의 머릿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박성화는 한 번도 만족할 만한 반응을 해준 적 없음에도 절 계속 쫓아다니던 그 송민기가 정말로 식은 건지. 확인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어떻게? 제 마음에 대한 확신도 없으면서, 이미 잠금을 풀고 메신저 앱을 켠 후 송민기와의 대화창까지 연 박성화의 손가락이 우뚝 멈췄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걔한테 왜 안 오냐고 물어봐. 안 오면 나한테 좋은 거 아니야? 그래도 그렇지, 매번 돈은 돈대로 다 내면서 나 보러 왔었잖아. 그냥 오던 애가 안 오니까. 허전해서 그런 거지. 쓸데없이 안 하던 짓 하지 말고 그냥 신경 꺼. 이제 와서 그래봤자 뭐가 달라지는데?




10.

 

액정 위를 몇 번이고 배회하던 박성화의 손가락은 결국 아무 문장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홀드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