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dnight Blue
혜악
WARNING
※외국어는 이텔릭체로 표기합니다.
※다소 잔인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후각은 오감 중 가장 빠르게 피로해지는 감각이라 하였다. 이론적으로 그 어떤 향취든 금세 인간은 적응하여 느낄 수 없다 했다. 허나 어떤 순간이 와도 지워질 수 없는 향이 존재했다. 밀려오는 구역질을 삼키며 박성화는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다 찢어지고 헤진 방독면은 제 역할을 못하게 된 지 오래였다. 기억에 각인된 악취는 두려움을 몰고 왔다. 땀이 줄줄 흘렀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느껴지는 것은 다만 흙의 감각이 아니었다. 제가 밟고 있는 것이 과거에 누구였는지도 분명치 못했다. 누군가는 박 중위님만 믿겠다며 눈을 반짝이던 부하이자 전우였을 것이며, 누군가는 자신을 타깃으로 하여 목숨을 앗아가겠다 이를 바득바득 갈던 적이었을 것이다. 허나 지금은 모두가 한 줌의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지옥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이곳이야말로 진짜 생지옥 그 자체였다. 박성화는 생각한다.
바닥에 질퍽하게 깔린 붉은 것들이 모조리 불길이었으면, 뭉그러진 살점들이 모두 가시였으면. 가시로 사지를 찢어발겨 저지른 수많은 업보를 청산하고, 불길 속에서 연소하여 영원히 소멸할 수 있었으면.
박성화는 주검으로 이뤄진 산을 올랐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갈기갈기 찢어진 몸뚱이들 사이 끔찍한 형상의 두개골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박성화는 토악질을 했다. 하지만 한걸음, 한걸음 모두 즈려밟고 올라섰다. 그리고 정상에 올랐을 때 국제연합군의 깃발을 꽂았다.
그때의 박성화는 끔찍하게 붉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비린 향으로 절여졌다. 상공을 빙빙 돌던 헬기가 내려왔다. 박성화는 고개를 올려 헬기를 바라보며 오열했다.
왜 이제야 왔어. 날 왜 이제야 구해. 이걸 진짜 승리했다고 볼 수 있어? 이게 진정 너희가 원하는 것이야?
소리를 쳤지만, 실상 그것은 누구에게도 전달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무엇이라도 원망하고 싶었지만 그 누구의 탓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박성화 본인이 제일 잘 아는 것이었다. 저주받은 능력, 그보다 더 끔찍한 건 저 자신이었다. 박성화는 이 자리에서 자신이 사랑했던 이름들을 모두 상흔으로 기록했다.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상처가 지독하게 아렸다. 흉터조차 되지 못하고 평생 심장 깊숙한 곳에서 박성화를 괴롭힐 상처가 벌어져 죄악을 토해냈다. 모든 건 네가 괴물로 태어난 것에서 시작된 거야. 진실을 고하며 마구 그를 난도질했다. 박성화는 차라리 이곳에서 최후를 맞았다면, 행복했을 것이라 실소했다.
"호명하는 수상자 및 부대 지휘관은 단상으로 이동하여주시길 바랍니다. 공로훈장, 연합국 특수군 중위 박성화."
채 목숨을 잃은 자들의 빈소가 마련되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박성화를 이 시점에 단상에 올리는 것이 도리인가, 아닌가. 혹 도리가 아니라면 어찌하여 아니고, 올려야만 하는 거라면 어째서 올려야 하는가. 아군과 적군이 모두 몰살 당한 전무후무한 상황에 언론은 신나게 갑론을박을 펼치며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냈다.
박성화는 그날, 스스로 자신의 폭주를 잠재웠다. 대단한 정신력이었다. 폭주 전조 증상만으로 반경 1km 근방이 모두 가루가 되었다. 그와 같이 출정했던 이들이 모두 전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박성화가 스스로 자신을 잠재우지 않았더라면 대륙 하나가 지도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외상은 전무했으나 내상이 심각했다. 헬기 이송 도중 실신한 박성화는 며칠간 깨어나지 못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박성화는 어느새 대륙을 구한 영웅이 되어 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인명피해를 최소화한 영웅.
전 세계의 의료진이 모여 그의 상태를 지극정성으로 살폈다. 박성화는 연합 센터 내 가이드가 존재치 않는 유일한 센티넬이었다. 여즉 가이드가 발현하지 않은 박성화는 가이딩 약물 개발의 핵심에 서 있었다. 가장 좋은 실험 표본을 잃을 수 없다 판단한 의료진들은 모두 그에게 최선을 다하였다. 박성화는 수단일 뿐이었다. 결국 '박성화'를 위해서 그에게 헌신하는 이는 그 어디도 존재하지 않았다.
연합군 소속인 데다 연합 센터에서 태어나 자란 터라 국적이 명확하지 않은 박성화덕에 어느 나라가 지역 점령에 대한 공을 가져갈 것인지, 연합국 간 합의도 장안의 화제로 떠올랐다. 한국인의 핏줄이니 저들이 가져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한민국과, 예로부터 대한민국은 중국의 속국이었다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늘어놓는 중국, 그리고 국제센티넬연합이 위치한 미국은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점점 범위를 넓혀만 가는 반정부군 단체가 두려워 국가들은 연합을 이루었으나 그 연합은 언제 깨질지 알 수 없을 만치 얄팍하고 위태로웠다. 머지않아 깨어난 박성화가 연합군 전체의 공으로 돌리고 싶단 발언을 하지 않았다면, 연합국간 내전으로 번질 뻔한 아찔한 상황이 펼쳐졌다.
"귀하는 세계 안전 보장에 이바지한 공로가 크므로 센티넬국제협약에 의거하여 다음 훈장을 수여합니다. 공로훈장 2XXX년 XX월 XX일 국제센티넬연합연구소장."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채 부상 회복도 덜 된 박성화는 단상 위에 올랐다.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연합군이 승리했다. 반정부군은 투항하라. 공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선전용 스피커로 엄청난 크기의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연합국 특수군 중위 박성화는 전세계인의 앞에서 이름을 알렸다. 이는 반정부군의 가장 큰 표적이 될 것이란 신호이기도 했다. 살이 내린 박성화의 얼굴은 처연하기까지 했다. 군인에게 훈장이란 엄청난 축복이지만 그는 결코 기쁜 표정을 지을 수 없었다.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는 무늬뿐인 축하였다. 가슴에 달린 훈장이 오늘따라 너무도 무거워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훈장 하나 당 수천 명의 원망이 서려 있을 것이었다. 박성화는 하루아침에 가장 소중한 이를 잃었을 수백 명 군사들의 측근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혈혈단신 홀로인 자신이 죽었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란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하지만 박성화는 살아야만 했다. 더 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그가 잃은 만큼의,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의 인명피해를 줄이기 위해 박성화는 존재해야만 했다. 박성화는 그러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였다.
박성화는 전장에 나가기 전 부러 그들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지 않으려 애썼다. 어차피 그들 중 반 이상이 총알받이로 끌려나온 일반인일 것이었다. 이상과 이념들이 만나 충돌하는 마당에 권력자들은 정부의 편에 서 납작 기며 곱게 자란 제 아들딸들까지 바쳐댔다. 어리바리하게 헬멧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아이들은 곧 전장에서 죽음을 맞이할 터였다. 그들을 기억하는 건 사람들의 몫이었다. 박성화는 굳이 자신이 그 일까지 도맡을 필요는 없다 생각했다. 윤리가 소멸한 시대에 아등바등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권력을 쥐고 태어났어도 약한 자는 거재되어야만 강한 자들이 자신의 목을 지킬 수 있었다. 박성화가 아무리 노력해도 모두를 살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포기했다. 자신만 지키기로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성화의 뇌리 깊숙한 곳에 박히는 말들은 꼭 존재했다. 인간인지라 여즉 죄책감이란 감정은 언제나 그를 무겁게 눌러왔다. 중위님! 해맑게 자신을 부르며 존경한다 일렀던 열댓 살 소년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시체더미 사이에서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며 수습조차 되지 못했을 그의 시신, 앞날이 너무도 훤했던 어린 아이가 채 뜻을 펼치지 못하고 져버렸을 것이라 생각하니 너무도 괴로웠다. 그 어린 아이들이 어른들의 욕심에 의하여 강해져야만 하는 것인가. 박성화는 고개를 숙였다. 눈을 감았다 뜨니 외나무다리 위였다. 위태롭게 비틀거리는 성화는, 선택의 기로에 있었다.
MIDNIGHT BLUE
능력이 있는 자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다. 그들은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한 순간,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전부터 인류의 우두머리로 군림해왔다. 약육강식의 세태에서 살아남은 그들은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피라미드 꼭대기에 올라서 권력을 잡고 강건하게 버티고 있었다.
본래 그들은 수많은 언어로 불리워지다 1990년대 센티넬연맹-국제센티넬연합의 전신이다.-이 창설되며 만국 공통 '센티넬(Sentinel)'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능력은 세습되었다. 특정 능력을 지닌 자가 존재하는 가문은 그 다음 세대의 자손 중 가장 깨끗한 성정을 지닌 한 명만이 해당 능력을 지닐 수 있었다. 능력 발현 시기는 보통 취학 전후가 되곤 했는데, 때문에 그 전까지 센티넬 가문의 사람들은 철저하게 아이들을 교육하였다. 발현한 한 명의 아이를 질투·시기하여 따돌리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중간중간 가문과 상관 없이 태어나는 센티넬도 존재했는데, 그런 자들 역시 국제연합에선 쉽게 수를 알아챌 수 있었다. 사유는 센티넬의 발현과 동시에 발현하는 가이드들 덕분이었다.
센티넬은 과도하게 능력을 사용하는 순간 폭주를 한다. 마지막으로 내재되어있던 모든 힘과 능력을 소진한 뒤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를 막아주는 존재들이 가이드이다. 가이드는 체액을 통해 가이딩 파장을 전달하고, 센티넬은 가장 안정적으로 다가오는 파장을 받아들여 능력 과다 사용으로 인한 후유증을 치유하게 된다.
가이드란 존재 역시 센티넬과 마찬가지로 가문 내에서 세습되었다. 다만 가이드 가문은 센티넬 가문에 비해 현저히 적으며, 랜덤하게 능력이 부여될 수도, 부여되지 않을 수도 있는 센티넬 가문들과는 달리 거의 모든 구성원에게 가이딩 능력이 내재 되어 있다. 가이딩 파장은 자신의 센티넬을 향해서만 움직인다. 고로 자신과 파장이 맞는 센티넬을 기다리며 가이드의 가이딩 파장은 신체 내 깊은 곳에서 잠재되어 있다, 발현하는 센티넬의 에너지와 함께 폭발적으로 솟구친다.
한 명의 센티넬과 대응 되는 가이드는 단 한 명뿐이며, 그들은 운명 공동체로 센티넬과 가이드는 보통의 경우 한쪽이 목숨을 잃게 된다면 나머지 한쪽도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다. 센티넬은 폭주하는 순간 거리와 상관없이 제 가이드의 모든 가이딩 파장을 제어없이 빨아들이고 소멸한다. 갑작스럽게 가이딩을 빼앗긴 가이드는 심각한 내상을 입은 채 사망하게 된다. 반대로, 가이드가 죽게 된다면, 가이딩을 받지 못하는 센티넬은 머지않아 폭주하여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막기 위해 센터는 센티넬에게 팔찌를 차게끔 해왔다. 신체에 내제된 가이딩 수치가 10% 아래로 내려가면 심장마비로 사망케 하는 장치였다.-성화는 항시 10%미만의 가이딩 수치로 버티는 일이 잦기 때문에 이 장치를 차고 있지 않다.- 하지만, 불필요한 인력 낭비라는 목소리가 터져나오며, 연구원들은 가이드가 없어도 센티넬이 연명할 수 있는 센티넬 전용 가이딩 약물을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어찌 되었든 센티넬·가이드 가문들은 막대한 부와 명예를 지니고 사회의 지도자 층이 되었'었'다. 되었었다니, 그럼 현재는? 어릴 적부터 온갖 부와 명예를 누렸던 그들의 후예들, 즉 현재의 센티넬들은 그 혈통이 약해져 예전과 같은 힘을 내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버릇이 없고 갑질을 일삼아 사회 면에 자주 등장하곤 하였다.
사회의 트러블메이커가 된 센티넬들 사이에서 박성화는 천연기념물이라는 별명으로 통용되었다. 애당초 박성화는 자연발생한 센티넬이 아니었다. 철저한 보안에 가려진 진실은 박성화 본인조차도 몰랐다. 박성화의 출생은 보안등급 최상위 문서로 분류되어 있었다. 그의 태생에 있어서 미심적은 부분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능력이 처음 발연하는 순간 자연적으로 함께 발현해야만 하는 가이드가 없는 점도 이상했고, 일반적으로 취학 전후로 하여금 '발현'을 통해 능력을 얻는 다른 센티넬들과는 달리 태초의 센티넬에 가까운 괴물같은 능력을 지닌 채 태어났다는 점도 이상했다. 이상함은 포장하기 나름이었다. 촌스러운 땡땡이 포장지 아무렇게나 덮으면 미친 놈이 되는 거고, 나름 노력해서 싸구려 포장지로 포장하면 특이한 놈이 되는 거고, 비싼 명품으로 둘러 금칠하면 특별한 놈이 되는 것이었다.
정부에겐 언론이란 명품 포장지가 있었다. 박성화를 둘둘 만 포장지는 그의 숨을 옥죄었다. 숨이 막혀오면 막혀올수록 박성화는 박성화 자체만으로 아주 매력적인 명품이 되었다. 일반인들은 혼란스러운 시대에 영웅을 필요로 하였고, 보기 좋게 예쁘장한 얼굴에 적당한 풍채를 뽐내는 박성화는 영웅으로 보여지기에 충분했다.
성화는 그 일 이후로 현장을 뛰지 않고 얼굴이나 팔아먹으며 센티넬 정부군 이미지 정화에 힘을 보태 벌어먹었다. 이곳저곳 성화를 원하지 않는 곳은 없었다. 정부 입장에선 훌륭한 군간부를 잃은 것이니 아쉬울 따름이었지만 성화의 겸직 신청을 받아들이고 행정 쪽으로 업무를 돌렸다.-센티넬군 관련 행정 업무는 군무원이 아닌 군인의 몫이다.- 그 마저도 표면상의 일이었다. 성화는 홍보대사에 가까운 자가 되었다. 손해는 없었다. 성화 덕에 바닥까지 추락했던 센티넬국제연합군의 위상이 드높여지며, 전 세계 센티넬들이 군인이란 직업에 시선을 두기 시작했다. 사사로이 능력을 활용하여 돈을 쓸어담던 사람들이 대의를 논하며 군에 자원입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자연스레 인력부족으로 허덕이던 센티넬국제연합군의 군사력이 대폭 강화되었다. 이제 박성화의 사기에 가까운 능력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같이 전장에서 싸우던 이들은 모조리 몰살되었고, 그의 능력에 대한 미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될 뿐,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었다.
"박성화 새끼 진짜 재수없어. 가문도 없고, 뭐 가진 거 좆도 없으면서 나대. 것도 조온-나. 야, 그때 기억하냐. 걔가……."
졸지에 박성화는 하는 일도 없는 주제에 계급장만 높은 간부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 과거보다 훨씬 안정되었다지만 여전히 위험한 현장을 도는 군인들이 박성화를 틈만 나면 씹어댔다. 박성화를 향한 질투와 시기는 언제나 그림자처럼 그를 졸졸 따라왔다. 옛날이라면 상상치도 못했을 일이었다. 시발……, 또 시작이네. 박성화는 속으로 있는 힘껏 욕을 짓씹으며 막 받은 배식판을 들고 신나게 절 씹고 있는 이름 모를 남자에게로 가 부러 쾅 소리가 나도록 식판을 내려놨다. 방금까지 펄펄 끓고 있던 국이 왈칵 범람하며 남자의 손으로 튀었다. 남자는 벌떡 일어나 고통을 호소했다.
"죄송합니다, 잭슨. 실수했습니다."
성화는 무표정한 얼굴로 입에 발린 말을 뱉었다. 아, 아닙니다. 화상 입은 손을 탈탈 털며 매서운 눈매를 바짝 세워 남자에게 역정을 내려던 잭슨이 성화를 보고 아연실색했다. 성화는 다른 테이블에서 제가 오길 기다리고 있던 여상을 향해 뭐 하냐는 듯 눈짓했다. 저 형 진짜……. 잔뜩 귀찮음을 떠안은 표정으로 일어난 여상이 느릿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성질 좀 죽이십쇼. 박 대위님."
중사님께서는 말 좀 조심하십쇼. 듣기 싫습니다. 상큼한 미소를 띤 여상이 습관처럼 팩트에서 기반한 말들로 정곡을 찌르며 팔목에 찬 능력 제어 팔찌를 풀었다. 팔찌를 그가 입은 흰 가운 안에 집어넣자 오른쪽 손으로 하여금 흰 연기같은 것이 스멀스멀 밀려나오기 시작했다. 여상이 오른손을 잭슨의 환부에 대자 순식간에 붉어진 피부가 아물며 제 빛을 찾았다.
상처가 아무는 것을 관망하고 있던 성화가 제 식판을 들고 일어나 여상의 식판 앞에 제 것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화통을 삶아 먹은 건지 커다란 음성이 블라블라 성화의 귀에 때려박혔다. 어지간히도 성가신 잭슨의 행태에 질린 성화는 식당에서 소란 피우지 않습니다! 하며 고함쳤다. 순간적으로 식당에 적막이 감돌다 이내 담소로 와글와글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능력 제어 팔찌를 차고 흰 가운 자락을 휘날리며 제 식판이 있는 쪽으로 돌아온 여상은 걱정 어린 얼굴을 하고 성화에게 말을 건넸다.
"형 한 번만 더 센터 센티넬 조지는 거 걸리면 센터장님이 죽여버린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너 있는 데서 했잖아. 증거 인멸하려고."
그리고 난 센터장 안 무서워. 아……. 형, 진짜 재수없고 치밀하고 대단하네요. 여상이 무언가를 깨닫기라도 한 듯 단마디 탄성을 내뱉었다. 성화는 여상의 말을 구태 정정하지 않고, 잭슨을 바라보는데 집중했다. 요즘 센터 분위기가 워낙 흉흉하고 뒤숭숭하여 신경쓰이는 터였다.
"쟤, 훈련하는 거 본 적 있어?"
"하늘색, 아주 옅은 하늘색이었어요."
무엇을 듣고 싶은 지 단번에 캐치한 여상이 성화가 듣고픈 바를 뱉어냈다. 능력의 색상은 발현 당시 해당 센티넬의 감정의 영향을 받았다. 발현의 연유가 '특별한 사건'으로 인해 일어난 특수한 경우가 아니고선 대부분 태초의 심리상태와 비례하였다. 겉모습은 다정한 척, 고고한 척 누구든지 할 수 있으나, 능력을 쓰는 순간 모든 게 드러나버렸다. 그의 진면모는 훈련 때에 드러날 터였다. 박성화는 항시 폭주 위험군 안에 있어 과거와는 달리 훈련에 참여하지 않았다. 고로 훈련실에서 평범한 군사들을 마주할 일이 드물었다. 해서 아쉬웠다. 직접 제 두 눈으로 봤으면 어떤 느낌인지 더욱 확고하게 알 수 있었을 텐데, 옅은 하늘색의 범위가 너무도 넓었다. 결국 박성화는 보편적인 하늘색의 특징들을 머릿속에 줄줄 읊어보았다. 그다지 거슬리는 바는 없었다.
"나쁜 애는 아닌가보네."
"네, 집중력이라곤 조금도 없고 심약하긴 이를 데가 없을 뿐이죠."
대화 내용과 어울리지 않게 여상의 목소리가 쾌활했다. 성화는 그런 여상이 익숙한 듯 고개 한 번 까딱하고 다시 음식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둘 사이에 오고 가는 말이 없어지자 여상의 눈동자가 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식판에 얼굴을 박고 있던 성화는 통 밥 먹는데 집중을 못하는 여상을 향해 말을 걸었다.
"여상아, 나한테 할 말 있지."
여상이 움찔거렸다. 조곤조곤 할 말은 다 하는 강여상이 무언가를 숨기려 한다는 건 꽤나 중대한 사항이라는 의미였다. 성화가 어디 한 번 말해보라며 숟가락을 내려놓고 여상을 바라봤다.
"형, 나중에 알려줄게요. 지금은 좀 곤란해요."
뭔 일이 있기는 있구나. 성화의 지레짐작은 확신으로 자리잡았다. 속이 더부룩해서 더는 못 먹겠어요. 젓가락으로 밥알을 세며 한참 굴려대던 여상이 그토록 좋아하는 치킨엔 손도 대지 않은 채 베시시 웃었다. 박성화는 여상이 궤변을 늘어놓고 있단 걸 알고 있었다. 그래, 좋아. 성화가 식판을 들고 일어났다. 갑작스레 숟가락을 내려놓는 성화에 여상의 큰 눈이 더욱 크게 확장되었다.
"가자고. 그 나중, 지금으로 하게."
형 밥은……. 여상을 뒤로한 채 성화가 자릴 떴다. 하여튼 제멋대로라니까. 속으로 중얼거린 여상이 급히 성화의 뒤를 따랐다. 성화의 발걸음이 향하는 방향을 보아하니 그 끝이 어딜지 예상할 수 있었다.
여상의 예상은 엇나가는 법이 없었다. 마치 제것이라도 되는 양 먼저 와서 푹신한 개인 의자를 먼저 차지한 채 타준 적도 없는 커피를 스스로 타 홀짝이고 있는 모습이 볼만했다. 누가 보면 형 자린 줄 알겠어요. 여상이 자리가 내 자리지, 뭐. 천연덕스러운 태도가 꽤나 얄미웠다.
"할 말이 뭔가?"
하급자를 대하는 상급자의 고압적인 어투가 성화도 모르게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평생을 군림하는 자로 살았던 자의 어쩔 수 없는 습관이었다. 여상의 시선이 다시 데구르르, 자리를 찾지 못하고 떠돌았다. 무언가를 찾는 것인지 한참을 헤매던 시선이 고정되었을 때, 그 자리엔 알 수 없는 서류 뭉텅이들이 쌓여 있었다. 박성화가 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사건 수사록이에요, 형."
오 년 전 형 폭주한 날. 쨍그랑, 파열음 소리가 사무실 안을 울렸다. 허연 바닥 위로 갈색 액체가 번져갔다. 눈에 초점이 사라진 성화는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하고 허망하게 서 있었다. 수사도 없이 마무리된 줄 알았던 사건이었다. 성화의 군복이 벗겨질 뻔한 사건이었다. 그림자가 드리운 성화의 눈치를 설핏 살피던 여상이 능력 제어 팔찌를 풀어 컵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순식간에 컵이 제 상태로 조합되었다. 컵을 주워든 여상이 손목에 찬 센터 전용 워치를 조작하여 콜을 넣었다. 쏟아진 커피는 제 힘으로 청소할 수 없었다.
"이걸, 이게 왜 여기……."
지금 다른 사건때문에 자료의 열람권이 저한테 넘어왔어요. 당시 형 검사 결과지도 안에 있어요. 성화의 손이 덜덜 떨렸다. 여상이 그의 동태를 살피며 애써 고개를 돌려주었다. 자신의 보안 등급으로도 열리지 않던 문서를 하관에게서 발견했으니 충격받을만도 했다.
"형에게 도움을 요청할 것이 있어서 데려왔어요. 그 자책 가득한 얼굴 그만 봤으면 하는 맘도 있고."
여상은 두꺼운 서류 틈에서 따로 놓은 종이 한 장을 꺼내 성화에게 내어 놓은 뒤 빽빽하게 쓰여진 검은 글자들 틈새에서 한 가지 부분을 손으로 가리켰다.
'출처 불명, 외부의 힘에 의한 가이딩 흡수'
반정군 측에 가이딩을 흡수할 수 있는 센티넬이 있는 것 같아요. 여상은 부러 숨을 조각내어 얕게 뱉었다. 깊은 숨은 낭비일 뿐이었다.
"지금 그 센티넬이 센터 안에 있어요."
"뭐?"
"형 이렇게 만든 사람, 센터 안에 있다고요."
여상은 믿지 못하는 성화의 심정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단호하게 강조하였다. 성화는 다시 군림하는 자리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 누구보다 사람들 머리 위에 있는 것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러려면, 공을 세워야만 했다.
"센터 사람들이 하나둘씩 죽어가고 있어요. 사유는 모두 가이딩 부족이에요. 가이딩이 부족해지면 가이드에게 콜이 갈 텐데, 사망한 센티넬의 가이드들은 모두 본인 센티넬의 가이딩 고갈 여부를 모르고 있어요."
"이걸 나한테 말하는 이유가 뭔데."
"형이 이 사건의 책임자를 해주셨으면 해요."
여상의 말이 튀기가 무섭게 성화의 표정이 뒤틀렸다. 말같지도 않은 소리 집어치워. 험악해진 낯짝에 살기가 돌았다. 여상의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태초의 힘에 가까운 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위엄을 지니고 있었다. 그간 유한 표정에 숨기고 있던 사나움이 드러나자 그것은 매섭게도 여상을 질책하며 압박해왔다. 가뜩이나 하얀 여상의 얼굴이 더욱이 새하얗게 질리자 성화의 표정이 평소와 다름 없이 돌아왔다. 열 받으니 저도 모르게 전장에서 날뛰던 시절의 모습이 표출되었다. 자신도 모르게 나온 것인지라 성화도 제 자신이 당황스러웠다. 본성을 잘 눌러왔다고 생각했는데, 전장의 야차는 아직 살아있었다. 숨막히는 적막 속에 청소로봇이 덜그럭거리며 연구실에 도착함과 동시에 성화의 워치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귀찮은 사람의 콜이었다. 성화는 여즉 화가 가시지 않은 것인지 숨을 색색 내뱉었다. 청소로봇이 눈치도 없이 둘 사이를 파고들어 청소를 시작하였다. 바닥을 잔뜩 적셨던 커피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센티넬특수조사 1팀 팀장 대위 박성화……."
야! 하는 소리가 성화의 귀에 꽂힌 히어러블을 넘어 여상에게까지 전달이 되었다. 으, 저러다 고막 뚫리겠다. 질색을 하는 여상과는 달리 일상인 듯 표정 하나 안 바뀐 성화는 덤덤하기 그지없었다.
"말씀하십쇼."
일단 튀어와! 빨리! 하는 불호령이 떨어지자 박성화가 여상에게 대충 손을 흔들며 급히 연구실을 뛰쳐나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련의 상황에 여상은 멀뚱하게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무엇이 지나갔나 싶었다.
구두 바닥에 남았던 커피 탓에 바닥에 커피 자국이 새겨지자 성화가 지나간 자리를 따라 청소로봇이 삐그덕삐그덕거리며 길을 나섰다. 100m 전방, 오른쪽 방으로 이어져 있음. 청소로봇은 프로그래밍이 설계된 대로 이동했다. 방문이 닫혀 있어 동선이 막히자 로봇은 교육받은 대로 방문을 똑똑똑 두드리고 반응이 없자 조용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피슝, 무언가가 로봇에게로 날아왔다.
'시스템이 종료됩니다.'
가이딩실의 문 앞에 청소 로봇의 잔해가 뒹굴었다. 제 앞에 있는 할배가 기어이 로봇 하나를 부숴먹는구나. 오늘로 몇 번의 소음공해인지, 박성화는 오른손을 들어 귀를 후볐다. 고막이 나갔나 싶었다. 끝나고 다시 여상에게 가야겠다, 다짐하며 제 앞에 있는 할배와 처음 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뭣하느라 콜을 안 받아! 심각한 일이면 어쩔 뻔했어, 어!"
불같이 화를 내는 할배의 행태가 익숙한 듯 이어지는 잔소리마저 머릿속으로 빠르게 시뮬레이션 하자, 성화가 생각한 것과 똑같은 구성의 언사가 흘러나왔다. 청소 로봇도 명령 외 변수를 따르는데, 이 인간은 도저히 변수라곤 하나 찾아볼 수 없을만치 단순했다. 지루함에 터져나오는 하품을 억지로 눌러 삼키던 성화가 깔고 있던 눈동자을 슬몃 굴려 남자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체구는 작지만 꽤나 강한 인상의 남자는 답잖게 안절부절 못하며 노한 할배 뒤에 쭈뼛거리고 있었다. 그의 불안을 인지한 성화가 여유로운 표정을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괜찮다는 소리였다. 한참을 성화에게 퍼부어대던 할배의 잔소리가 멈추고, 할배는 제 뒤에 있던 남자의 팔뚝을 덥석 잡아 제 앞에 내세웠다. 남자는 힘없이 할배의 손에 끌려 나왔다.
"인사해라. 이번에 새로 임관해서 부임한 김홍중 소위고, 이쪽은 센티넬 연합군의 아이돌 박성화 대위. 이 놈이 좀 무뚝뚝하고 싹수는 없어도, 나름 괜찮은 놈이니 잘 해 봐."
센티넬 연합군의 아이돌이란 대목에서 할배 몰래 구역질을 한 성화는 남자와 할배를 번갈아가며 심각하게 위아래로 훑어봤다. 저 구렁이 오천 마리 삶아 먹은 늙은이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성화의 표정이 조금씩 엉망으로 흐트러지자, 할배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저 하늘로 치솟으려 했다.
"선물."
"무슨 말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대화하면서 천천히 알아가도록 하십쇼. 박성화 대위?"
할배가 남자를 향해 턱짓했다. 갑자기 뚝 떨어진 선물이란 존재에 좀처럼 당혹함을 숨기지 못하는 성화의 모습이 즐거운지 할배가 고른 치열을 한껏 드러내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까 그리 분노했던 이가 맞나 싶을만치 커다란 웃음 소리가 적막한 가이딩실에 울려 퍼졌다.
"소위 김홍중과 대위 박성화는 현 시간 십오 시 삽십 분 부로 약 십칠 시 정각까지 가이딩실 외 센터 모든 공간의 출입을 금지한다. 알았나."
성화는 찝찝한 표정으로, 홍중은 군기가 잔뜩 들어있는 모습으로 예! 하며 짧고 굵은 대답을 남겼다. 좋다. 난 이만 가보겠다. 김 소위는 십칠 시 이후에 내 방에 들리도록. 할배가 로봇의 잔해를 대충 차내며 가이딩실을 나갔다. 수억을 들여 만들었을 로봇이 마치 깡통처럼 치였다. 깡깡, 소리가 청명했다. 살아있는 역사께서 오죽하시겠어요. 성화가 할배의 뒷모습을 보며 비아냥거렸다.
"한국인인가."
홍중에게로 시선을 던진 성화가 무심하게 가이딩실의 의자를 빼 앉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렇습니다."
김홍중의 입에서 유려한 한국어가 튀어나왔다. 아, 예. 박성화가 머슥하게 웃었다.
"헌데 제가 한국어 할 줄 아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동향 언어를 할 줄 아는 분이라며 센티넬연합군 사령관님께서……."
"그냥 센터장이라고 하십쇼."
"예, 센터장님께서 알려주셨습니다."
"그 할배는 참 입도 가볍다니까."
성화가 투덜거렸다. 처음 듣는 발음의 외국어를 마구 쏟아내는 성화를 바라보던 홍중이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습니까."
"귀여우셔서 웃습니다."
"제가 괜히 센터의 아이돌이 아닙니다."
부끄러워할 땐 언제고 제 입으로 뻔뻔하게 아이돌 운운하는 성화의 모습이 꽤나 깜찍했다. 홍중은 웃음기 띤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소위 김홍중, 센티넬특수조사 1팀 부팀장으로 전입을 명 받았습니다."
센티넬군은 일반군과는 달리 이러한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 누가 보아도 밖에서 군생활을 하다 온 태가 났다. 내민 손에 굳은살이 가득했다.
"칼과 총을 쥐어보셨나 봅니다."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모두 총을 한 번씩은 쥐어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박성화는 아……. 하며 수긍하곤 악수를 위해 김홍중과 손을 맞잡았다. 그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박성화의 온몸을 타고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청량한 기운이 돌며 주변이 남색 안개로 물들었다. 처음 느껴보는 기운에 놀란 박성화는 김홍중의 손을 뿌리치고 뒤로 물러났다. 박성화가 물러나자 안개도 언제 그를 덮쳤냐는 듯이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다.
"이게……, 뭡니까."
혼란이 시야를 가렸다. 성화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심장이 마구 뛰며 알 수 없는 기분이 몰아쳤다. 이것을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도 없었다. 마치, 투명하고 깨끗한 바다에 수장되어 질식해가는 듯했다. 성화는 화장실로 달려가 속을 게워내었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 이질적이다 못해 역겨웠다. 분명 청량한 감각인데, 무언가를 억지로 밀어넣는 기분이었다. 너무나도 역했다.
"괜찮으십니까?"
성화의 반응에 놀랐는지 곧 성화를 따라 들어온 홍중이 성화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성화는 그 손길을 거부했다. 거칠게 침을 뱉고 물을 내린 성화가 홍중을 냉혹하게 식은 눈으로 처다보았다.
"너 뭐야."
당신 가이드. 김홍중이 생긋 웃었다. 그 미소가 참으로 위태롭고도 아름다웠다.
박성화는 이후 며칠간 김홍중을 열심히 피해다녔다. 만날 시간도 그다지 없었다. 가이드로 발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는 김홍중은 가이딩 교육을 받기에 여념이 없었고, 센티넬 계의 아이돌이라 불리는 박성화는 브라운관을 종횡무진 누비느라 바빴다. 일반인들과 함께할 땐 혹여나 있을 사고에 대비해 능력 제어 팔찌를 차고 출연하곤 했는데 그 무게가 상당하여 하루만 차고 있어도 팔목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박성화는 이걸 24시간 차고 있는 강여상을 새삼 대단하다 느꼈다. 센티넬의 능력을 물리적으로 억제하는 장치이니 센티넬 몸에 가는 무리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다보니, 능력을 쓰진 않아도 항상 가이딩 약은 챙기고 다녀야만 하는 것이었다. 가이딩 약 다섯 개를 한꺼번에 넣어 물도 없이 씹어 먹으며 박성화는 김홍중을 떠올렸다. 가이딩 약을 먹는 느낌과 유습했지만 김홍중의 가이딩은 훨씬 더 농도가 짙고 진득했다. 하지만 한 번 김홍중의 가이딩이 몸에 들어오자 가이딩 약이 전과 같이 들지 않았다. 20%를 웃도는 제 가이딩 수치를 보며 박성화는 약 다섯 개를 더 우적우적 씹어먹었다. 몸이 나른하게 늘어졌다. 박성화는 센티넬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쓰러지듯 잠들었다.
얼마나 긴 잠을 잤을까, 도어락을 해제하는 소리에 박성화는 본능적으로 잠을 깼다. 긴장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본능적인 것이었다. 자신의 공간을 침입한 낯선 이의 정체를 알아내야만 할 것이었다. 소리에 집중했다. 달달달달 하며 무언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 인기척의 방향을 재다 박성화가 낯선 이에게 달려들었다. 낯선자는 박성화의 습격을 가벼이 피하고 몸을 뒤로 물렸다. 박성화는 가이딩 약물을 들이 부은 상태였다. 온전치 못한 몸이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앞으로 넘어지려 하는 순간 낯선 그 자가 박성화의 허리를 감싸 단단한 팔로 지탱하고 팔목을 당겨 중심축을 맞춰주었다.
"김홍중 소위?"
당황한 박성화의 목에서 삑사리가 났다. 의도하지 않게 김홍중에게 안긴 자세가 된 박성화는 빠르게 김홍중을 밀어내고 캐리어와 김홍중을 번갈아서 보며 미간을 구겼다.
"상황 설명 좀 해주십쇼.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김홍중 역시 별안간 목숨을 잃을 뻔한 것이 억울한지 자초지종을 조목조목 설명해갔다. 김홍중의 말을 한참 듣던 박성화가 스탑을 외쳤다.
"그러니까, 결론은 김 소위랑 나랑 같이 살아야 한단 말 아닙니까. 그쪽은 나 가이딩 해주고, 난 현장 복귀하고."
김홍중은 예, 그렇습니다. 하고 짧게 대답했다. 박성화는 슬슬 머리가 아프려 했다. 딱 봐도 눈이 아플만치 화려한 캐리어 상태 하고는 흑과 백으로 깔끔하고 모던하게 꾸민 집의 경관을 해칠 것이 분명했다. 박성화는 화장실이 딸린 큰 방으로 김홍중을 안내하였다. 빈 방은 많았지만 가장 구석진 자리에 있는 방이었다.
"아오, 할배 노망났나."
박성화가 화를 삭이지 못하고 방에 들어오자마자 시계를 집어던졌다. 시계가 와장창 깨지며 톱니바퀴가 이리저리 흩어졌다. 소형 청소로봇이 바쁘게 조각들을 먹어치웠다. 맞물리지 못하는 톱니바퀴가 청소로봇 안에서 조각나고 구겨져서 결국 하나가 될 터였다.
박성화는 해가 밝기가 무섭게 득달같이 할배에게 달려갔다. 언질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간 박성화는 불같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아니 진짜 할배 미쳤어?"
"멀쩡한 사람을 왜 미쳤다 하고 그래, 이 사람아. 난 안 미쳤고 지극히 정상이야."
지극히에 악센트를 넣어 강조해 말하는 할배에 박성화가 열불을 터트렸다. 그런 박성화를 할배는 눈에 힘을 주고 빤히 응시했다. 가볍게 박성화의 분노를 넘겨버린 할배가 시원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아무튼 할배가 영어를 쓸 때 제일 재수가 없었다.
"걔 너네 방에서 빼주는 건 죽어도 안 되고, 네게 선택지는 두 가지야."
"하, 진짜 할배."
"전장 나갈래, 센티넬조사팀 팀장 역할 똑바로 할래?"
"아니 나 센티넬군 홍보 잘하고 있잖아, 왜 그래. 진짜 할배……."
"그 할배 소리 좀 적당히 하고, 남이 들으면 이상하게 생각한다."
"아, 예. 그러시겠죠. 최종호 사령관님. 그 얼굴에 사령관 달고 있는 게 더 이질적이거든."
최종호가 혀를 쯧쯧 차내렸다. 알았어. 그냥 평소같이 살어. 대신, 그 아이는 집에 둬야 해. 단호하게 합의점을 내비춘 종호에 더이상의 합의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박성화가 알았다 투덜거리며 방문을 쾅 닫고 나섰다. 박성화가 나간 자리에 최종호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상황이 재미있게 돌아갔다.
성화가 방에서 나오기가 무섭게 코너를 돌아 다른 곳으로 향하는 김홍중의 뒷모습을 목도하였다. 휘파람을 휘휘 불어가며 걸어가는 것이 어딘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김홍중은 금세 자리에서 사라졌지만, 복도엔 무언가가 형광등에 비춰져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박성화는 천천히 나아가 물건을 확인해보았다. 군에서 쓰는 인식표였다. 김홍민? 성화의 눈에 익은 이름이었다. 어디서 들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어딘가에서 들어본 것은 확실했다. 박성화는 한 번 들은 것은 잊지 않았다. 박성화는 직감했다. 이것이 김홍중과 박성화를 이어주는 매개체가 될 것이라고. 인식표를 주워 가슴쪽 작은 주머니에 집어넣은 박성화가 아무렇지 않게 다시 길을 나섰다.
그리 중요한 물건은 아니었던 것일까. 숙소에 돌아와서 본 김홍중은 물건을 잃어버린 것조차 모르는 것인지 평온해보였다. 주머니의 인식표는 점점 존재가 잊혀져만 갔다. 김홍중과 박성화의 동거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김홍중은 보기보다 요란하지 않았으며, 박성화는 점차 조금씩 자신의 결벽을 고쳐갔다. 박성화는 김홍중이 온 이후로 처음, 집에서 안정감을 맛봤다. 이상하게 김홍중이 존재하는 집안은 안정적이었다. 자연스레 김홍중과의 사이도 점차 편안해져갔다. 이제 집에서 담소를 나눌 정도의 사이는 된 듯했다. 둘은 매일 간단한 담소를 나누며 끼니를 함께했다. 박성화는 이런 게 식구인가, 싶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박성화는 김홍중이 편했다. 김홍중이 주는 안정감이 스며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김홍중이 집에 있을 땐 가만히 있어도 가이딩 수치가 급속도로 차올랐다. 여상에게 이 현상에 대해 물었더니 방사가이딩이라는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는 가이딩 방법이 있다며 설명해주었다. 그걸 쓸 줄 아는 자는 처음 본다는 듯이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살인사건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었다. 하루 많게는 셋, 적게는 한 명의 센티넬이 죽어나갔다. 처음엔 하급 장교들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하였지만, 점차 상급 장교로 번져 총부사관마저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 망할 센터가 드디어 무너지는 날이 오나 보다 싶어 씁쓸했다. 어떤 미꾸라지 새낀지 몰라도, 유능한 센티넬 연구관들이 다 붙어도 찾지 못하는 걸 보면 지능범임에 틀림없었다.
"피곤해 죽겠어요."
여상이 눈을 꾹꾹 눌러대며 말했다. 며칠째 잠도 못 자고 조사하고 있는데 진전이 없다고 했다. 성화가 여상이 보여주는 화면을 검토하려 몸을 숙이자 가슴팍에서 툭, 하고 무언가가 여상의 허벅지 위로 떨어졌다. 성화가 잊고 있던 인식표였다. 무심코 인식표를 들어 이름을 본 여상의 표정이 한순간에 싸늘하게 식었다. 성화는 아, 그거 별 거 아니니까, 줘. 하며 여상에게 손을 내밀었다.
"형, 이 사람 뭐 특별한 의미가 있었어요?"
"왜?"
"피해자 물품 수거 하나도 안 했다면서요."
그때 와서 바로 쓰러졌다고……. 영문을 모르는 듯한 성화의 얼굴에 여상이 입속 여린 살을 잘근잘근 깨물며 파일 하나를 찾아 빠르게 이름을 서치하여 입력하였다.
"이 사람 봐봐요. 이름부터 소속, 군번, 혈액형이 RH-인 것까지 완벽하게 똑같아요."
그제야 박성화는 그날의 열댓 살 소년의 환한 미소와 홍중의 어딘가 아스라하고 위태로운 미소가 겹쳐 스쳐갔다. 나 왜 몰랐지.
"쟤 김 소위 동생인가 봐."
박성화는 하루 종일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다행이 오늘은 촬영이 없는 날이었다. 김홍중을 기다렸다. 오늘도 같이 저녁 먹어야 하는데, 나 쟤랑 겸상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제 걱정이 기우였기라도 했는지, 김홍중은 그날 답잖게 잔뜩 취해서 왔다. 술을 얼마나 마신 건지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비틀거리면서도 용케 집은 잘 찾아왔네. 박성화는 취한 김홍중을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술에 취한 김홍중이 박성화를 보고 근심걱정 하나 없는 얼굴로 웃어댔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뭘 좋다고 웃어.”
“내가-, 그으- 널 가이딩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거든?”
근데에-. 김홍중의 손에서 커다란 푸른 색의 구형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가이딩이 농축되어있는 매우 짙은 구형이었다.
“이게 뭐야.”
“네가 자꾸- 가이딩을 거부하니까 내가 이걸 이렇게- 퍼트려서 할 수밖에 없잖아.”
김홍중이 구에 손을 한 번 대자 구가 먼지처럼 수 없는 조각으로 갈기갈기 찢겨 번져갔다.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양이었다. 제 멋대로 가이딩을 퍼트린 김홍중이 그대로 잠들었다. 교육받고 온다는 애가 술은 언제 누구랑 마시고 온 거야, 김홍중은 자꾸만 단순하고픈 박성화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너 진짜 교육 받고 오는 거 맞지, 김홍중. 자꾸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박성화는 다음날 긴급한 업무가 생겼단 이유를 핑계로 꾸준히 출현하던 프로그램 몇 개에 양해를 구했다. 성화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으로는 여상에게 사정을 해 부탁하였고, 네가 지금 조사하고 있는 것에 관한 사안이라 언질을 주니 여상은 당장 하겠다 열의를 불태웠다. 그렇게 간신히 낸 시간에 박성화는 가이드 교육원을 찾아갔다. 교육을 받는 중인 이들의 명단을 받아 몇 번을 읽어봤지만 김홍중의 이름은 그 어디도 없었다. 그럼 김홍중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박성화는 김홍중에게 콜을 넣었다.
“예, 대위님.”
“홍중아, 나 좀 보자. 대위 대 소위 말고, 인간 대 인간으로.”
김홍중이 금세 기숙사 안으로 발을 들였다. 박성화는 싸한 얼굴로 김홍중을 기다리고 있었다. 의심하기 싫었지만 모든 정황이 김홍중을 가리키고 있었다.
"홍중아."
담담한 목소리가 나즉했다.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음성이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인식하고도 김홍중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 대 사람이면, 동갑이니 이름 불러도 되는 거지?"
성화야. 어린 시절 이후로 본인조차 잊고 있던 이름 두 자가 곰살궂게 흘러나오자 박성화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해줘."
"알았어. 성화야."
"그간 나 속이고 있었어?"
침묵은 완곡한 긍정임을 시인할 수 없었다. 그 언젠가 홍중은 진실을 꺼내게 될 날을 수없이 상상해왔으나 막상 닥쳐오자 성화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거 네 동생 이름 맞지."
"알고 묻는 거잖아."
"왜 날 죽이지 않았어. 왜 내 곁에서 머물렀어?"
변명을 할 자격도 없었다. 김홍중은 자신도 왜 그리 했는지 몰랐다. 그저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 현실을 마주할 때였다.
"평생 소원이었어."
"……."
"그 아이 죽은 이후로 줄곧 바라왔어. 삶의 목적이고 목표고 하나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어. 다른 건 그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그래서 더 독하게 살았어. 그 목표를 이루려면 목표와 가까워져야 했거든."
홍중이 오래토록 묵혀뒀던 고해를 시작했다. 성화는 제가 성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신자를 해하는 성자는 지탄받아 마땅할 터인데 홍중은 성화가 여즉 신성한 것이라도 되는 양 굴었다.
"넌 내게 정말 닿기 힘든 사람이었어. 성화야. 네게 닿기 위해 모두 견디고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결국 실패하고 말았어."
“왜 그랬어.”
“네 능력이 너무 지독하게 우울했으니까. 나보다 더 딥한 푸른색을 가진 센티넬은 처음 봐서, 죽일 수가 없었어.”
홍중이 성화를 끌어안았다. 마냥 크게만 느껴졌던 성화가 작게 움츠러들었다. 토닥토닥 어깨를 쓸어주자 잘게 몸이 흔들리며 흐느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당당한 네가 미웠어. 네가 지키지 못한 내 동생은 그렇게 죽어버렸는데, 누구보다 단단하고 차갑게 자릴 지키는 네가 원망스러웠어. 복수하고 싶었고, 살려내라 소리리고 싶었어."
흐느끼는 소리가 조금 커졌다. 온기가 전하지자 서러움이 터져나오는 듯했다.
"근데 가까이서 본 넌 나보다 더 지옥에서 살고 있더라, 성화야. 스스로에게 벌을 내리며 매일을 속죄하고 살고 있더라. 내가 널 벌하기엔 네가 나보다 더 위태로이 세상을 견디고 있더라."
성화는 홍중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편하게 입은 면티가 서서히 축축하게 젖어들어갔다.
“지금은, 널 지키려 한 것이었어. 그 사람들이 널 해하려 했어. 위험하다고,”
난 널, 이 망할 조직으로부터 지키고 싶었어. 홍중은 연신 성화의 등을 쓸어주었다. 너른 등을 단단하게 받혀주며 흔들리지 않는 기둥이 되어줄 것임을 보여주었다. 성화에게 홍중은 바다였다. 계속해서 커다란 파란을 일으키며 그를 질식시키려 드는 존재였다.
"두려워. 홍중아."
너도, 세상도, 모두 두려워. 잔뜩 젖은 목소리가 위태롭게 흩어졌다. 바다는 그를 부드럽게 감싸며 위로했다. 성화의 머릿속에선 파란이 일었다. 푸름이 밀려왔다. 타인의 죽음에서 기인한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지독한 우울의 파장이었다.
“나랑 도망가자.”
p.s.
안녕하세요! 혜악이라고 합니다. 시간이 부족해 얼레벌레 마무리지어 뒤로 갈수록 내용이 많이... 빈약해졌는데, 어쨌든 제출한 것에 의의를 두려 합니다. 불친절한 글이라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섷른 대메이저!! 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