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 Collab Season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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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의 색

주유

낫섷흰색

비밀번호를 누르고 열기만 하면 되는 문 앞에서 최산은 정승마냥 잠자코 서 있기만 했다. 기껏 용기 내서 여기까지 온 건데 문을 열기까지는 얼마나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한 걸까. 결국 현관 비밀번호 여섯 자리 알면서도 문을 두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쉽게 열리는 문이 야속했다. 성화는 열린 틈 사이로 최산을 발견하곤 활짝 문을 열어주었다. 차가운 공기가 들어서자 얇은 티셔츠 한 장 걸친 몸이 움츠러들었다. 밖에 눈 왔어? 최산은 대답 대신에 문을 닫고 등진 몸을 돌려세웠다. 이렇게 마주 보는 게 얼마 만이지. 최산은 머릿속으로 지나간 시간들을 되짚었다. 이제는 눈높이가 얼추 맞았다. 헝클어진 초록색 머리 아래 흔들리는 동공은 올곧게 성화를 응시하고 있었다. 성화는 자신의 얼굴을 볼 때마다 반응하는 진한 갈색빛의 눈동자를 사랑했다.

 

 

첫사랑의 색

 

 

연습생 생활을 한 지 햇수로 이 년 되어가던 해. 성화는 데뷔 이외의 목표가 없었다. 자신을 돌보는 일에도. 종일 연습하고 혹여나 싸움 나면 중재하고 나가려는 사람 붙잡은 채 설득하고. 선두 제외한 나머지 두 개는 원래 성화가 하던 일이 아니었으나 현우가 나간 후 그런 일들은 온전히 그의 몫이 되었다. 성화는 현우가 나간 후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통 친절하게 굴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최대한 상냥한 말투 구사하려 노력했다. 현우 하나 때문에. 꼬박 석 달을 말이다. 여느 때와 같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반쯤 감기는 눈으로 연습 도중 뛰쳐나간 놈에게 전화하려던 순간 문을 열고 최산이 들어왔다. 몇 달 만에 들어온 새 연습생. 성화는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성화는 최산을 보고 있을 때마다 생각에 잠겼다.

 현우는 8번 보컬룸 밖에서 느릿한 피아노 연주를 반주 삼아 노래 부르는 성화를 쳐다보고 있었다. 성화는 인기척을 느끼자마자 손가락을 멈추곤 고개를 돌렸다. 형. 입 모양으로 뻐끔대는 단어는 알기 쉬웠다. 현우는 웃으며 문을 열고 들어섰다. 김현우는 지금 있는 연습생 중에서 자기가 제일 연장자라 했다. 자신이 책임지고 챙겨주겠다며 고민이 있으면 언제든 찾아오라는 말 무색하게 현우가 성화를 찾을 때가 더 잦았다. 그 짧은 시간 사이에 벌써 성향을 파악한 건지 먼저 찾아와 상태를 살폈다. 넌 먼저 안 말할 거 같아서. 힘든 거 말이야. 정확했다.

 최산은 연습생 사이에서 겉돌았다. 최산의 문제가 아니라 명확히 기존 연습생들의 문제였다. 성화는 이 년 전의 자신이 생각나 구석에서 물을 마시는 최산의 옆에 슬그머니 앉았다.

 “안녕. 산아.”

 “…….”

 “힘든 건 없어?”

 “아직은 괜찮아요.”

 “생기면 형한테 말해.”

 그 말에 부산스럽던 움직임이 멈추곤 시선이 맞닿았다. 최산의 표정은 미묘했다. 회사에 들어온 뒤 처음 받아보는 호의라 그랬던 건지. 고깝게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성화는 말을 이어갔다. 이건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형이 해결해 줄 수도 있잖아.”

 왜 이렇게 마음이 쓰일까. 오지랖 말라고 하면 어떡하지. 성화의 우려와 달리 최산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성화는 그때 최산에게 보조개가 있다는 걸 알아냈다.

 

 최산은 노래든 춤이든 열심히 했다. 빈말로도 잘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열심히 한다는 건 눈에 보였다. 땀 뻘뻘 흘리며 행했던 첫 월평 순위는 그닥 높지 않았지만 최산은 만족하는 표정이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자기는 후회하지 않을 만큼 보여줬으니 만족한다고. 성화는 처음으로 자신이 여태 어떤 마음으로 여기까지 달려왔는가를 생각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연습생끼리 모여 하는 회의에서 낯 가리는 성격 탓인지 분위기의 영향인지 도통 의견을 내지 않자 연습생 내에서 골칫덩이 취급받는 하나가 트집을 잡았다. 무리 중에서 저런 사람은 한 명씩 있기 마련이다. 성화는 날이 섰다. 그래서 중재하지 않았다. 입을 열면 화를 낼 거 같아서. 매번 있는 일인데 왜 화가 나지. 평소와 다르게 입 꾹 다물고 있자 분위기 이상하다며 자리가 와해됐다. 연습생들이 하나둘 나간 후 성화는 급하게 따라 나가려는 최산의 손목을 잡았다. 형?

 “산아. 다음 월평 나랑 하자.”

 충동적인 언행이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처음부터 잘하는 부류가 있는 반면에 아닌 부류도 있다. 최산은 후자였다. 성화는 차라리 그게 다행이라 생각했다. 발군은 오만을 낳는다. 항상 거울 앞에 서서 한결같이 춤을 추는 최산을 보곤 성화는 옅은 호감을 느꼈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배움이 빠른 것. 성화는 그게 최산의 장점이라 생각했다. 둘의 월평 안무 창작은 성화가 도맡았다. 조금이라도 경력 있는 사람이 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성화는 그때와 같은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입을 열 수 있도록 주도했고 의중을 알아챈 건지 최산은 느릿하게라도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짜인 안무 중에서 세세한 부분들은 모조리 그의 의견을 반영했다. 안 좋은 구석도 없었으니까. 월평 하루 전 새벽 내내 연습실에 남아 춤을 춘다고 티셔츠는 땀범벅이 됐다. 깨끗하지 않은 바닥에 나란히 누웠을 때 최산이 숨소리 잔뜩 섞인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챙겨줘서 고마워요. 형.”

 형이라서 편하게 말할 수 있었어요. 그 말은 굳이 꺼내진 않았다. 고맙다는 말보다 간지러워서. 말의 무게가 다르니까. 월평은 딱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나왔다. 나란히 있는 이름을 보곤 최산은 뒤늦게 온 성화를 껴안았다. 성화는 패딩에 돌돌 싸인 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둘은 월평을 계기로 같은 팀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가슴 한구석에 담아두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도보로 오 분 거리엔 편의점이 있었다. 성화는 연습하다 말고 쪼르르 와서 귓속말로 ‘형 나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말하는 최산을 모른 체하지 못했다. 아이스크림 먹으니까 춥다. 당연하지, 겨울이잖아. 형은 무슨 계절이 좋아? 난 겨울. 나는 겨울 싫던데. 추워서. 반대구나. 원래 반대일수록 마음이 간대. 누가 그래? 영양가 없는 말들만 늘어놓았다. 그게 좋아서 슬리퍼 직직 끌며 밤 알갱이 박혀있는 아이스크림과 메론 맛 아이스크림 하나씩 집어 든 채 괜히 빙빙 돌아 회사로 갔다. 느릿하게 걷다 말고 하늘을 쳐다보았을 때 성화는 문득 숨통이 트인다는 게 뭔지 알 것만 같았다. 성화는 분위기에 약한 사람이었다. 분위기에 약한 사람들은, 그런 환경이 조성되면 평소보다 더 솔직해지기 마련이다.

 “산아.”

 “응.”

 “나는 너랑 같이 데뷔하고 싶어.”

 몸을 조금 틀자 시선 아래에서 빛나는 눈동자가 보였다. 나도. 형. 아이스크림을 물고 있어 부정확한 발음이었지만 마음만은 온전하게 전해졌다. 그날 둘은 보컬룸 한중간에서 손을 맞잡은 채 키스를 했다. 밀폐된 보컬룸은 두 사람이 들어가도 빈 공간 없이 꽉 메워졌다. 처음 하는 입맞춤인 걸 티 내는 듯 최산은 서투르고 끈질기게 혀를 얽어왔다. 깍지 낀 손등이 하얘질 정도로 간절한 마음. 입술을 떼어냈을 때는 붉어진 얼굴과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이 성화를 보고 있었다.

 

 시기적절하게 데뷔 조엔 최산과 성화가 들어갔다. 형 이제 금방이겠다. 최산은 간격도 없이 성화의 옆에 앉아 좋다며 웃고만 있었다. 이제부터가 진짜니까 더 잘해야지. 말은 초 치듯 해도 행동은 아니었다. 어깨에 살짝 걸쳐진 머리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 뒤 살살 쓰다듬었다. 최산은 그런 상냥한 행동 하나하나가 좋았다. 서로의 감정에 확신이 들던 소중한 순간들.

 

 

 최산이 스물하나, 성화는 스물둘이 되던 해. 결과적으로는 한 명만 데뷔했다.

 

 거의 확정됐던 데뷔가 한 번 엎어질 뻔했던 순간이 있었다. 연습생 하나의 문란한 사생활이 밝혀지며 퇴출되어서. 퇴출된 연습생이 하필 센터였다. 성화는 그것까진 괜찮았다. 오히려 데뷔 전에 퇴출된 게 다행이지. 견고하던 정신이 무너진 건 소속사 사장의 갑질 때문이었다. 입에 담기 힘들 정도의 욕설에 이어 물세례를 받은 날 성화는 결국 제 발로 회사를 나갔다. 남아있는 사람 몇 없을 새벽 짐 싸는 내내 최산은 옆에서 훌쩍이기만 했다. 온몸 던져 막지 않았던 건 이유를 알았기 때문에. 어떤 마음으로 나가는 건지 알기 때문에. 하지만 가방 들쳐 맨 순간에는 참지 못하고 옷깃을 붙잡았다. 형 안 가면 안 돼……? 성화는 항상 물기 어린 얼굴에 약했다. 잡힌 옷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성화는 우는 최산을 상냥하게 달래줄 수는 있었으나 가지 않겠다는 소리는 끝끝내 하지 못했다.

 

 최산의 그룹은 오 인조 그룹이었다. 최소 여섯 있는 다인원 그룹인 대세일 때에 내놓은 그룹 속 최산의 포지션은 메인 댄서와 리드 보컬. 그리고 센터. 데뷔곡은 최산의 파트 독식으로 이어졌다. 데뷔가 결정된 후 최산은 성화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뒤늦게 기사를 접한 성화만 속이 상했다. 내 눈치 안 봐도 돼. 최산은 할 말이 없었다. 데뷔 쇼케이스 내내 관중을 쳐다보지 않았다. 성화가 있을 게 뻔했으니까.

 성화는 회사를 나간 후 뒤늦게 대학에 들어갔다. 신환회에서는 예상했던 질문 세례를 받았지만 솔직하게 말하진 않았다. 몇 년 동안 연습생 생활을 했는데 사장이 뭣같이 굴어서 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라고 어떻게 말해. 적당히 가정사라 둘러댔다. 이어지는 질문은 ‘여자 친구 있어?’ 술자리 특유의 들뜬 분위기는 좋은데.

 “아뇨. 근데……. 좋아하는 사람은 있어요.”

 이런 질문들은 싫다. 대답을 하면서 성화는 최산을 생각했다. 데뷔 이외의 목표가 없었던 성화가 회사를 나갈 수 있었던 건 최산 덕분이었다. 성화는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최산을 보며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재정립했다.

 

 

 방금 씻고 나온 건지 머리에선 물이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할 말 있는 표정이네. 생각하기 무섭게 최산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나 형 좋아해.”

 “…….”

 저돌적인 고백의 말로. 잠깐의 정적 후 성화는 아무 말 없이 최산의 머리 위로 쌓인 눈을 툭툭 털어주었다. 손길이 닿을 때마다 움찔거리는 건 의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최산은 좀처럼 대답 않는 성화에 초조함만 쌓였다.

 “진짜 급하게 왔나 보다. 이런 모습으로 오고.”

 고백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잖아. 말은 그렇게 했으면서 몸은 멍하니 서 있는 최산을 끌어안았다. 말과 다른 다정한 행동은 최산이 성화를 좋아하는 오십 가지 이유 중 하나였다. 목 근처에 닿는 숨결과 샴푸 향기에 최산은 얼굴이 달아올랐다. 형이 또 떠나버릴 거 같으니까……. 마른 허리를 힘주어 감싸 안자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이 들려왔다. 몸이 멀리 있다고 해서 마음마저 멀리 있는 건 아니잖아. 곧이어 이마에 닿는 입술이 이상하리만큼 따뜻했다. 몇 년간의 올곧은 첫사랑이 이루어지던 순간. 첫사랑은 새하얀 눈과 함께였다.

p.s.

안녕하세요. <첫사랑의 색>으로 참여한 주유입니다.

주제의 이유는 합작 신청 당시 하얀 눈으로 뒤덮인 겨울이 생각나서 흰색으로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겨울과 눈, 그리고 순수한 첫사랑. 제가 흰색을 떠올리면 나열하게 되는 것들인데 글 속에 잘 녹아들었는지는 모르겠네요. 글 쓰는 내내 벌써 몇 년을 훌쩍 넘겨버린 제 첫사랑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았어요. 첫사랑 특유의 두근거리는 감정과 배로 간질거리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서요. 또 흔히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지만 글 속에서는 이루어지도록 했어요. 지고지순한 마음이 버려지는 건 속상한 일이니까.

별 탈 없이 마무리해서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글 읽어주신 분들, 합작 참여진 분들, 합작 이끌어주신 총대님 모두 감사합니다. 모든 분의 앞길에 행복만 있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