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데케이드
홍섷/윤섷by. 익명
김홍중은 오랜만에 박성화를 마주한다.
십년 만이다.
아니지. 십년 전의 박성화는 십년 만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나머지 말도 안 되는, 정신 나간 소리. 하지만 그만큼 정신 나간 상황 속에 있다.
익숙한 정사 이후 욕실 문을 연 서른 살의 박성화는 긴 정적 끝에 스무 살의 박성화가 되어 김홍중의 방에 발을 디딘다. 끝이 조금 덜 마른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홍중은 혀끝을 잘근댄다. 드디어 미쳤군.
시간이 지나도 절대 잊히지 않는 기억들이 있다. 예를 들면 손에서 놓친 풍선이 까만 점으로 변할 때까지의 시야, 우산도 없이 달리던 비에 젖은 밤의 골목, 그리고 첫사랑 같은. 그 모든 순간을 박성화와 함께 겪은 홍중이 모를 리가 없다. 서른 살의 박성화보다 조금 짧고 짙은 머리, 조금 더 연한 눈꺼풀, 조금 더 동그란 볼의 박성화를.
그리고 스무 살의 단단한 김홍중을 한없이 무르게 했던 스무 살의 박성화를.
어쩌면 벌일지도 모른다. 함부로 이별을 선택지에 둔 홍중을 향해 믿지도 않는 신이 형벌을 내렸을지도. 한쪽 눈썹을 올린 홍중은 욕실의 뿌연 수증기만큼 희뿌연 고뇌에 잠긴다. 그 동안 스무 살 박성화의 얼굴을 하고 서른 살 박성화의 옷을 입은 성화는 눈을 동그랗게 뜬다.
“홍중이?”
마치 타지에 사는 동창을 우연히 만난 듯한 어조로 조심스럽게 굴려지는 이름. 김홍중이라는 이름이 조그만 스노우 글로브라도 되는 것처럼 섬세하게 다루는 입매에 홍중은 확신한다. 스무 살의 박성화, 그것도 모자라 김홍중과 사귀기 전의 박성화다. 헛웃음이 자연스레 입 밖을 탈출한다. 순수한 낯섦이 서린 동그랗다 못해 땡그란 눈동자를 눈 앞에 두고 홍중은 눈을 사르르 접어가며 웃는다. 심란한 속과 달리 가벼운 웃음이 자꾸 입술 새로 샌다. 박성화 덕에 어색해졌던 비속어가 자꾸만 떠오른다.
십년의 지난한 연애, 수 없는 다툼과 화해와 섹스, 위악과 한숨의 역사 끝에 이별한 전연인이 돌아왔다.
십년 전의 모습으로. 사랑한 기억을 모두 잊은 채로.
어쩌면 다행일지 몰랐다. 한 편으론 안도가 들었다. 금방 그 안도에 죄책감이 스며들긴 했지만. 혼란에 빠져 방 안을 고개 열심히 돌려가며 관찰하는 얼굴에 전과 같은 감정이 없어서일 것이었다. 여기서 전이라 함은 고작 한 시간 전의 축약형이다.
홍중이 대답을 하지 않자 성화는 침대에 앉은 홍중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물기 서린 발이 땅을 디딜 때마다 홍중의 바디워시 향이 훅 끼쳤다. 아니, 성화가 좋아해 홍중이 늘 구비해 놓은 바디워시 향이.
조심스러운 손길이 홍중의 두 뺨을 감쌌다. 반강제로 들어올려진 시야에는 어쩐지 걱정 어린 성화의 얼굴이 담겼다.
“언제 왔어? 무슨 일 있었어?”
김홍중의 집에서 김홍중이 언제 왔냐고 묻는다고. 그러다 홍중은 기억한다. 스물의 김홍중은 스무 살의 반을 외국에서 지냈다는 것을.
허탈한 웃음이 입가에 스몄다. 스물 박성화에겐 이 공간이 낯설다는 사실이 중요치 않았다. 스물 박성화는 오로지 서른의 김홍중을 걱정하고 있었다. 십년의 공백을 아직 이해하고 있지 않으니 소년스러움이 바란 얼굴은 분명 낯설 것이었다. 아마 외국 생활이 그 정도로 고단했나 생각하고 있겠지. 보드라운 엄지가 홍중의 볼을 동그랗게 쓸었다. 순수하게 홍중의 상태만을 걱정하는 눈이 낯설었다. 미련, 후회, 슬픔, 이런 아픔으로만 탁했던 게 익숙해서 그런가.
“성화야, 너 몇 살이야?”
갑작스러운 질문에 성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당연한 것을 묻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스물. 왜?
“나는 서른이야.”
볼을 쓰다듬던 손길이 멈췄다. 홍중은 굴하지 않고 얘기했다. 최대한 또박또박, 성화가 놀라 도망가지 않도록 부드럽게.
“나는 서른이고, 지금은 2025년이야. 너는 방금 스무 살로 돌아갔어. 나도······. 나도 이유는 모르겠네.”
성화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왠지 눈동자에 배신감이 여리게 섞였다. 이런 표정은 김홍중이 일에 치여 데이트를 여러 번 미뤘을 때나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분명 박성화 속이 말이 아닐 게 뻔한데도 자꾸만 웃음이 번진다. 이렇게 다채로운 성화를 본 게 얼마만이지. 홍중이 눈을 접자 다른 감정이 불쑥 동공에 나타났다.
아, 역시 박성화는 투명하다. 오로지 김홍중 앞에서만.
한때는 그게 특권이었던 적도 있었지.
서른의 박성화도 얼굴을 마음의 창으로 쓰는 사람이지만 스물의 박성화는 표정이 클리어 슬라임보다도 투명했다. 자기 감정을 다루는 데에 급급했던 스물의 김홍중이 몰랐던 걸 서른의 김홍중은 알고 있다.
마주한 눈 속의 의심을 읽은 홍중은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주장에 신뢰감을 더할 구실을 찾기 위해.
“너는 나를 좋아해, 그렇지?”
동그란 두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홍중은 손을 떼려는 성화의 미세한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둘의 손을 포갠 채로 말을 이어갔다.
“고삼 때 내 사물함에 몰래 사탕도 넣어놨잖아.”
점점 빨갛게 달궈지는 얼굴을 하고 자꾸만 손을 빼려고 해 아예 깍지를 꼈다. 홍중의 집요한 면은 십년 동안 끊임없이 발전만 했으니까. 아직 어리고 미숙한 성화는 감히 덤벼들 수도 없을 만큼 농도가 짙으니까. 단단히 얽힌 손을 제 볼에 댄 채로 말을 이었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고백도 하려고 했고. 그런데 못했잖아. 내가 작곡한다고 대학을 안 가서.”
손에 힘이 풀어졌다. 하지만 홍중은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알아야 할 게 있었다. 과연 박성화는 십년 전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갔는가. 둘의 연애는 미국으로 잠깐 나갔던 홍중이 돌아온 스물의 늦여름에 시작되었으니.
“휴학하고 미국으로 따라오려고도 했지?”
이쯤이면 홍중은 성화에게 박수 무당이다. 이 모든 정보는 박성화 본인이 십년 동안 김홍중에게 차곡차곡 쌓아준 것들이지만.
토끼 눈을 하고 입을 살짝 벌린 성화의 섬세한 얼굴 근육 움직임까지 홍중은 전부 관찰한다. 그리고 스물 김홍중이 머물렀던 도시를 하나씩 나열한다. 시애틀에 있었던 건 알지? 알고 있는 눈치다. 디트로이트? 여기도 알고 있는 눈치. 그럼 트렌턴은? 성화는 고개를 살짝 갸웃댄다. 그렇다면 시기 상 늦봄에서 초여름. 그렇다면 정확히 십년 전이라 해도 될 정도다.
홍중은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성화의 휴대폰을 들어 화면을 톡톡 건드렸다. 2025년을 포함한 날짜 선명한 화면을 얼어붙은 성화의 손에 쥐여줬다. 성화는 한참을 밝은 화면을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까만 눈썹을 브이 자로 그리고 이런다.
“나 왜 놀려?”
홍중은 참지 못하고 크게 웃음을 터트린다. 오랜만이다. 입동굴 깊은 시원한 웃음을 얼굴에 띄운 건. 이것도 다 박성화 때문이지만. 입술 삐죽대는 건 스물 박성화나 서른 박성화나 똑같다. 순간 홍중은 팔을 뻗어 마른 허리를 끌어안을 뻔했다. 다행스럽게도 실행 전에 정신을 차렸지만.
또 하나 변하지 않은 게 있다. 서른의 박성화나 스물의 박성화나 김홍중의 감정을 쥐고 뒤흔든다. 김홍중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도, 슬프게 하는 사람도, 화나게, 아프게, 좌절하게 하는 사람도 박성화뿐이다.
홍중이 신중하게 제시해 준 증거들은 성화를 설득시키기엔 충분했다. 무엇보다 지금이 2015년이 아닌 2025년이라고 하는 홍중의 얼굴에 어른스러움이 서려서. 하지만 장난스레 스스로를 아저씨라고 부른 것 치고는 아직 소년 같았다.
박성화가 기억하는 김홍중보다 조금 볼살이 없고, 선이 조금 더 굵어진 정도. 그리고 더 피곤한 모습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랑할 이유가 충분한. 성화는 침대에 풀썩 앉아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반은 익숙하고 반은 낯선 풍경이었다. 스무 살 홍중이 언젠간 갖고 싶다고 했던 비싼 장비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아무래도 꿈을 이룬 모양이었다. 눈이 절로 호선을 그렸다.
“근데 홍중아.”
아무래도 조심스러웠다. 서른살의 남성을 함부로 이름으로 부르는 건. 비록 그게 성화와 고등학교를 같이 다녔던 그 홍중이라지만. 얌전한 다람쥐 같은 얼굴은 십년이 지나도 여전하구나. 저를 향하는 두 눈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질문을 다시금 상기했다.
서른의 홍중은 스물 성화의 비밀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완전한 친구로 남기 위해 하나하나 즈려밟아 없애려고 했던 감정들을 모두. 그러나 서른의 성화는 여전히 홍중 곁이었다. 내막이 궁금했다. 정말로 친구로 지낼 수 있을 때 털어놓았는지, 잠시 홍중이 성화를 피한 기간이 있었는지,
아니면, 정말 말도 안 되지만······.
입술을 달싹이려고 할 때 손에 든 휴대폰 화면이 번쩍댔다. 자연스레 둘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윤호 [형!]
윤호가 누구지? 성화가 떠올릴 수 있는 윤호는 한 명뿐. 하지만 그럴 리가 없는데. 서른의 박성화에게 또 다른 윤호 지인이 생겼으려나. 통째로 사라진 기억에 처음으로 난감해졌다. 서른의 박성화가 꼭 답장을 주어야 할 사람이면 어떡하지. 직장과 관련된 사람이라든가.
혹시나 홍중이 답을 알까 봐 도움을 달란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성화가 마주한 건 홍중의 설명이 아닌 완벽한 정적이었다. 홍중은 이미 꺼져버린 화면에서 두 눈을 못 뗀 채였다.
기다란 속눈썹 그림자가 유독 짙었다. 낯설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십대의 박성화도 가끔 목격했던 얼굴이었으니. 특히나 성화의 눈이나 손길을 피할 때의 표정. 그럴 때면 성화는 생채기 난 마음은 잠시 저 뒤로 미뤄두고 홍중의 기분을 우선순위로 놨다.
하지만 아직 서른의 홍중이 낯선 성화는 함부로 홍중이 그어 놓은 선을 넘지 않았다. 대체 홍중은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을까 고민도 시작하기 전, 다시 화면이 켜졌다.
윤호 [저 강의 끝났어요!]
윤호 [저녁 같이 먹어요 💕]
연달아 온 메시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니면 십년 뒤에는 하트가 온점 대신 쓰이나? 통신 예절을 다시 익히기 위해 홍중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입술을 떼기도 전에 홍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성화야. 윤호 기억 나?”
“윤호?”
“응. 옆집 윤호.”
성화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설마 했는데. 성화 인생에 유일한 그 윤호가 맞다니. 태권도 수업이 끝나면 학원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교복 입은 박성화에게 안겨 하루 일과를 재잘대던 그 아기 윤호. 미쳤구나, 미래의 박성화. 그런 성화의 표정을 홍중은 흥미 반, 그리고 미지의 감정 반 섞은 표정으로 관망했다.
“우리가 아는 윤호? 그 윤호 맞아?”
성화의 입에서 나오는 우리라는 단어가 낯설었다. 나잇값도 못하고 그 두 글자에 심장이 팔딱댔다. 우리, 십년 동안 우리는 우리였다. 다 과거의 일이지만. 홍중은 AI 챗봇처럼 (성화는 AI도 모를 테니 이런 비유도 이해 못할 게 분명했다.) 감정 없는 어조로 성화의 휴대폰을 검지로 두드리며 말했다.
열어서 대화 내용 확인해봐.
얌전히 홍중의 지시를 따른 성화의 미간이 날짜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감에 따라 더욱 깊게 파였다. 뭐야? 뭐지. 왜 이런. 분홍색 입술은 끝없이 의문만을 담았다. 어디예요. 보고 싶어요. 좋아해요. 이보다도 솔직할 수 없는 말풍선이 대화방을 도배했다. 서른의 성화는 비슷한 온도의 답을 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화를 계속 이어간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결국 휴대폰을 침대 끝으로 던져버린 성화는 두 무릎을 들어 모았다. 침대 위에 쪼그려 앉은 모양새인 성화는 동그란 무릎에 얼굴을 폭 기대고 중얼댔다.
“진짜 양심 다 죽었구나, 계란 한 판 박성화.”
그러다 고개를 팍 쳐들고 홍중을 향해 물었다. 어쩐지 약간 매서운 눈으로.
“원래 나이 먹으면 다 이래? 양심 없이 애기 좋아하고.”
홍중은 코웃음을 쳤다.
“나도 모르지. 나도 나이 먹는 거 처음인데.”
평생 사랑해본 사람이 박성화 하나뿐이었단 사실은 함구했다. 아마 지금도 사랑하고 있을 거란 말은 더더욱.
스물의 박성화가 봐도 서른의 박성화가 정윤호를 좋아하고 있는 것 같냐는 확답도 굳이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두려워서.
김홍중도 정윤호를 알았다. 하얗고 동글동글 예쁘게 빚은 쌀송편 같은 아이. 열 일곱 성화에게 안겨 조그만 손 꼼질대며 머리카락을 만져대던 유치원생은 홍중만 보면 입을 일자로 꾹 다물었다. 졸지에 열 살 어린 연적이 생긴 홍중은 어쩐지 조금 부러울 때도 있었다. 성화에게 안기고 싶어서 만은 아니고, 아이 답게 솔직하길래.
형 좋아. 나는 크면 형이랑 결혼할래요.
그러면 성화는 얼굴에 웃음 가득 띄웠고 홍중은 뒷목을 긁었다. 야, 나도 성화랑 결혼하고 싶거든. 그런 유치한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고.
동그란 쌀송편은 2차 성징을 근사하게 겪었다. 어느 순간 홍중을 따라잡더니 성화의 키도 훌쩍 넘어버린 교복 입은 쌀송편은 현관 앞에 멈춰 섰다. 홍중은 기억한다. 성화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던 그 늦은 밤, 성화를 말없이 바라보던 윤호의 눈빛을. 인기척을 느낀 성화가 고개를 돌렸다.
“어, 윤호야!”
열 일곱 정윤호는 박성화를 한 번, 김홍중을 한 번 쳐다보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도어락 버튼을 눌렀다. 피곤한 가봐. 머쓱한 듯한 성화의 속삭임에 홍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십년 째였다. 김홍중이, 그리고 정윤호가 박성화를 좋아하게 된 지. 그때 까지만 해도 스물일곱 김홍중은 열 일곱 정윤호가 마냥 귀여웠다. 여자 많이 울리겠네, 자식. 위협적이기까지 한 넓은 등짝을 보며 그렇게도 생각했고.
그땐 그렇게 안일했다. 김홍중과 박성화의 이별 따위는 미래에 있지도 않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오직 그랬기 때문에. 그로부터 삼 년 뒤, 김홍중의 부재와 동시에 정윤호가 제 첫 수를 뒀다.
이별 후 홍중은 자연스럽게 성화의 집 근처를 맴돌았다. 사심보다는 귀소본능이었다. 인생의 반 가까운 시간을 성화와 함께 지냈기에.
그날 성화는 홍중이 감탄했던 윤호의 등에 업혀 귀가했다. 술에 취한 채로. 더 이상 책임이 없는 관계라는 걸 알면서도 안면근육이 굳어버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홍중과 연인 사이였을 때는 선이 확고했던 성화라는 걸 알아서. 주량을 넘기는 게 일상이었던 대학 생활 때도 동기들의 부축 마저도 받지 않았던 박성화라는 걸 알아서.
“들어가실 거예요?”
인사도 생략한 윤호가 대뜸 물었다. 성화의 몸을 고쳐 업는 다정한 몸짓과는 상반된 냉랭한 목소리였다. 홍중은 숨을 짧게 들이켰다. 질문이 아니었다. 스무 살의 패기에 가까웠다.
“아니. 오늘은 안 가.”
적어도 진심이긴 했다. 더는, 이제는, 습관처럼 박성화를 찾지 않겠다는 진심. 윤호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무표정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무언갈 계산하는 듯한 눈빛이 스쳤다. 그 나이 또래 같지 않았다. 아니, 스무 살 정윤호는 스무 살의 김홍중 같지 않았다. 괘씸할 정도로. 자기 감정에 얽매여 눈 앞의 성화도 못 봤던 홍중과는 달랐다.
“언제까지 흔드실 거예요, 성화 형.”
아니야, 비슷할 지도 몰랐다. 숨기는 데엔 좀 능할지 모르는 정윤호도 어쨌든 교복 벗은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명확히 드러나는 조바심에도 불구하고 윤호는 단단했다. 한 마디 한 마디에 모든 무게를 감당하겠다는 태도가 서렸다. 길고 곧게 뻗은 다리, 넓은 어깨, 그리고 사랑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눈. 성화를 빼앗으려는 게 아니라 받아내려는 듯한 태도가 벌써 어른의 모습을 띄었다.
“네가 잡아줘. 흔들리지 않게.”
도발이 아니라 부탁이었다. 홍중도 알고 있었으니. 얼마든지 성화를 손에 쥐고 흔들 수 있는 입장이었다. 십 년이란 세월이 그랬다. 마음도 약하고 정에도 약한 성화는 홍중에게 속절없이 흔들려줄 것이었다. 그것이 본인을 좀먹더라도. 매일이 아픔의 연속이더라도.
홍중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성화의 잠든 얼굴이 현관의 미약한 불빛에도 선명했다. 긴 속눈썹, 살짝 벌어진 입, 그리고 익숙한 숨소리. 매일 밤 홍중의 불면을 안아준 나긋한 숨결이 너무나도 멀었다.
그날 홍중은 오래동안 잠들지 못했다. 그날도, 그 다음 날도.
박성화가 찾아온 날 마저도.
충혈된 눈을 비벼대도 눈 앞의 성화는 사라지지 않았다. 가까워지는 숨결에 위스키 향이 퍼졌다. 술도 못 하면서 왜 위스키를 마셨어. 이렇게 타박도 못하게 촉촉한 눈을 한 성화는 문이 열리자마자 무작정 입술을 부딪혀왔다.
앞니가 아프게 부딪히고 찝찔한 피 맛이 혀끝에 감돌았다. 진정시키려 해도 홍중을 안는 팔이 간절해서 밀어내지도 못했다. 열린 문으로 아직 따사로운 햇빛이 와르르 쏟아졌다. 아주 지랄이었다, 둘 다. 불면에 낮과 밤을 뒤섞은 사람이나, 대낮부터 위스키 때려 부은 사람이나.
취했지 박성화. 몰아쉬는 숨 새로 물었다.
아니야. 뻔히 보이는 거짓말에는 속아넘어가줬다.
작업실에서 틀어박혀 사느라 건조해진 입술은 몇 번 깨물리지도 않았는데 제대로 적셔지기도 전에 쩍쩍 갈라졌다. 이렇게 피 질질 흘리는 키스는 모든 게 서툴었던 첫키스 이후로 처음이었다. 마른 숨결이 뒤엉켰다.
결국 며칠 새에 더 말라 뾰족해진 어깨를 잡고 밀어냈다. 홍중의 아랫입술을 그루밍하듯 핥던 혀가 홍중과 마찬가지로 건조한 입술 틈으로 사라졌다. 성화는 눈을 느릿느릿 깜박였다. 그리고 속삭이듯 물었다.
“나 싫어?”
인간의 삼대 욕구 중 하나인 수면도 충족되지 않을 만큼 제정신이 아닌, 반쯤 죽어 있는 김홍중 모습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왔다.
대답해줘. 이젠 나 싫어?
그래놓고 홍중이 대답도 하기 전에 어깨를 밀어 침대 위로 넘어트렸다. 침대 위로 기어올라와 홍중을 제 두 팔 사이에 가두고 물기어린 목소리로 애원했다.
나 싫어하지 마, 홍중아.
단단히 취한 게 분명하다. 동이 트고 나서야 겨우 작업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한테 그렇게 빌다니. 차라리 에베레스트 산을 등단하지 말라고 비는 게 더 말이 되었다. 박성화를 싫어하는 김홍중이란 건 존재할 수가 없다. 홍중 본인보다 홍중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성화가 퀭한 홍중의 눈을 눈치 못 챘을 리 없었다.
최소한의 방어력도 없는 김홍중을 박성화는 최대한으로 이용했다. 스스로를 고문하듯 한계로 밀어붙였고, 정신을 놓고 헐떡였다. 그리고 체액에 푹 젖은 색정적인 얼굴을 괴로운 듯 일그러트리며 속삭였다.
“좋아한대, 윤호가.”
홍중이 잘 알고 있던 사실이라 놀랄 것도 없었다. 하지만 자연스레 성화의 무릎에 올렸던 손은 그대로 굳었다. 표정 변화 하나 없는 홍중에 성화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홍중은 눈을 감았다. 위스키로 인해 김홍중 행동 해석학 에프 학점 받은 박성화는 다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나도 말하기 전까진 몰랐어. 알고 그렇게, 윤호가, 윤호가 말해줬어. 너 왔었다고. 알고도 윤호랑 술 마신 건 아니야······.”
홍중은 눈을 살며시 떠 체액에 반질대는 간절한 박성화의 얼굴을 눈에 담는다.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막말로 박성화가 김홍중에게 오기 전 정윤호와도 잤어도 눈 하나 깜짝 안 했을 거였다. 다만 홍중에게 중요한 건,
“넌?”
그저 박성화의 마음이다. 성화의 눈동자가 놀란 듯 팽창했다. 그래놓고 금세 표정을 감췄다. 그러나 혼란과 약간의 희망을 담은 눈망울은 숨길 수 없었다.
“나는······.”
“······.”
“너한테 왔잖아, 홍중아.”
“······.”
“이런 대답은 싫어?”
홍중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을 뻗어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만져주고 싶었지만 그러면 안 됐다. 귀소본능. 익숙한 곳으로 돌아가려는 자연스러움. 결국 김홍중 곁으로 돌아오는 지랄맞은 굴레에서 박성화를 자유롭게 해줘야 했다. 시달리지 않도록, 아프지 않도록.
차라리 스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랬다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화를 이 지난한 시간에 묶어두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으로 목을 옥죄지 않았을 것이다. 이룰 수 없는 수많은 가정이 홍중을 맹렬히 공격한다.
가만한 눈을 한참 뚫어져라 마주하던 성화는 무릎에 놓인 홍중의 손을 살며시 떼어냈다.
“먼저 씻어. 나 좀, 피곤해서.”
온도 낮아진 말에도 홍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뜨거운 물에 몸을 적시며 이 모든 게 꿈이길 빌었다. 눈시울이 뜨거운 건 비단 물의 온도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당연히 부식되는 사랑을 움켜쥐려 했던 지난 시간들을 곱씹었다. 사랑을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욕실에서 나온 홍중의 어깨를 살짝 스치고 들어간 성화는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홍중은 잠잠히 기다렸다. 마치 진공 상태에 있는 듯 그 어떤 소음도 들리지 않는 공간에서 탁한 머리 속을 정리할 생각도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갔는지도 몰랐다. 억겁의 시간이 흐르고 욕실 문이 열렸다. 홍중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김홍중은 오랜만에 박성화를 마주한다.
십년 만이다.
신의 형벌일지도 몰랐지만 동시에 축복일지도 몰랐다. 술에 취해 전남친과 몸 섞는 건 어떻게 생각해도 후회만이 남는 일이니까. 그런 기억 따위 없는 스물의 박성화가 반가워야 할지도 몰랐다.
아직도 문자의 여파가 남았는지 서른 살의 박성화는 바보라고 꿍얼대는 동그란 입술에 입꼬리를 살며시 올린 홍중은 평온한 표정을 얼굴에 덧씌웠다. 시선을 들어 그 얼굴을 마주한 성화의 두 볼이 살짝 발그레해졌다. 고등학생 김홍중은 읽지 못했던 변화. 스물의 박성화는 스물의 김홍중을 그만큼 열렬히 사랑하고 있었다.
“있잖아.”
“응.”
“나, 그러니까 삼십, 서른 살인 나도 여기 있었던 거야?”
“그치.”
여기서 한 게 알코올과 눈물로 얼룩진 섹스뿐이란 사실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성화의 눈에 반짝 생기가 돌았다.
“그럼······.”
예감이 좋지 않다. 성화의 얼굴이 환해질수록 홍중의 속은 타들어 갔다. 제발, 속으로 간절한 주문을 외웠다.
“우리는 계속 친구였어?”
안타깝게도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세밀한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 박성화다웠다. 이미 속으로 경우의 수를 다 생각했을 것이다. 마음을 들켰는데도 계속 친구 관계로 남을 수 있는 사이는 흔하지 않으니까. 둘 중 하나만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로 남았든가, 아니면 더 깊은 관계로 발전했든가. 서로의 집을 편하게 드나들 정도라면 후자의 가능성이 더 크고.
솔직할 수 있었다. 우리는 얼마 전 이별한 사이고, 이별 후에도 서로를 맴도는 중이라고.
얼마든지 거짓될 수도 있었다. 욕심만 낸다면. 뻔뻔하게 입꼬리를 올려대며 뻔하지 않냐며, 우리는 연인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었다. 아마 스무 살 박성화는 뛸 듯이 기뻐할 것이다. 정말로 뛸지도 모른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날 잠도 못 자고 밤새 홍중의 뺨과 코에 입맞추고 깨물고 마치 홍중이 잊을까 봐 두려운 사람처럼 끊임없이 사랑한다 속삭였으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성화를 다시 마음껏 사랑할 수 있었다. 양심의 가책을 견딜 수만 있다면.
하지만 홍중은 그럴 수 없었다.
“응. 친구였어.”
완전히 진실할 수도, 완전히 거짓일 수도 없는 최악의 선택이었다. 아. 성화는 실망을 숨기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올라간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그럼······. 똑같은 마음은 아니었다는 거네?“
“응.“
“그렇구나.“
성화의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 미세한 차이도 알게 된 홍중은 애써 외면했다. 적어도 스물의 성화에겐 그런 홍중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었다. 홍중은 태연한 얼굴로 일어섰다.
“윤호가 밥 먹자고 한 거 아니야?“
“맞아.“
“갈 거야?”
돌아오는 답은 예상 밖이었다.
“갈까?”
홍중은 믿을 수 없단 눈으로 성화를 바라봤다. 아직 감정이 일렁이는 눈과 달리 성화의 입매는 굳건했다. 가지 말라고 한다면 성화는 가지 않을 것이다. 홍중은 확신했다. 그랬기에 홍중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데려다 줄까?“
“아니. 괜찮아.“
억지로 웃음짓는 입꼬리를 홍중은 끝까지 눈치채지 못한 척했다. 가면 갈수록 연기만 느는 것 같았다. 미련이 남아 성화를 현관문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자연스럽게 어깨를 감싸려던 손을 세게 주먹 쥐어 내렸다.
말해주고 싶었다. 나는 십년 동안 똑같은 곳에 살고 있다고. 언제든 돌아오라고.
하지만 홍중은 말하지 않았다.
“홍중아.“
신발을 신던 성화가 고개를 내린 채로 홍중을 불렀다.
“왜, 성화야.“
입안에서 굴리는 이름이 달았다. 수없이 되뇌이고 싶을 정도로. 성화는 고개를 들었다. 홍중을 살짝 내려다보는 그 익숙한 각도로 시선을 두고 한참을 말없이 쳐다봤다.
“우리 정말 친구였어?“
성화의 목소리는 마치 잡아달라는 듯 간절했다. 홍중은 여력을 다해 입꼬리를 올렸다. 최대한 순수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친구였어.“
기어이 그 십 년을 무너트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