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오르페우스
홍섷by. 카피
주요 인물의 사망¿
김홍중이 뭔가 이상했다. 평소와 달랐다.
잠에서 깨어보니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반쯤 감긴 눈으로 침대에서 미적거리다가 거실에 나가보니 김홍중이 귀신처럼 소파에 앉아 있었다. 차라리 여느 때처럼 웅크려 자고 있으면 놀랍지도 않을 것을, 김홍중은 방금 막 깨어난 듯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선 어딘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입술을 물어뜯고 있다. 제일 이상한 건 눈빛이었다. 왜 또 소파에서 잤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성화의 눈은 샅샅이 김홍중을 훑는다. 가죽 자켓을 벗지도 않은 채 거실 시계를 노려보는 김홍중을.
아침을 먹는 내내 김홍중은 이상하게 말이 없었다. 내려앉은 정적에 어색한 표정을 짓던 성화는 전날 사둔 블루베리잼 병을 일부러 뻐엉, 경쾌한 소리가 나도록 땄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김홍중은 미동조차 없다. 새 크림치즈까지 뜯고 나서 성화는 조금 머쓱한 표정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이게 전남친 토스트라는 거야. 너 몰랐지? 그러고서는 그새 노릇하게 구워진 식빵에 잼과 치즈를 야무지게 발랐다. 커피만 홀짝이며 영혼 없는 대답을 몇 번 던지던 홍중이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끝을 보고 왔어.”
“끝?”
“응. 끝.”
“무슨 끝? 설마 너랑… 나? 너 지금 내가 전남친 토스트 알려줬다고 이러는 거야 지금?”
“아니.”
“그럼 뭔데. 너 오늘 이상해.”
“세상.”
“뭐?”
“세상이 끝나는 거. 그걸 보고 왔어.”
“...이거 농담 아니구나?”
“응.”
“그렇구나...”
“응.”
“언젠데?”
“3일 후.”
“그러니까 너 지금 3일 전으로 돌아온 거야?”
“...응.”
“어떻게?”
●
세상이 멸망하던 그 순간, 눈앞에 반짝이는 선택창이 떴다.
세이브 지점으로 되돌아가시겠습니까?
Yes / No
홀린 듯 왼쪽을 누르자 띠링- 하는 효과음과 함께 의식이 아득해졌다.
●
깨어보니 정확히 3일 전이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작업실에 틀어박혀 씨름하다가 새벽에서야 겨우 집에 기어들어 온 날이었다. 박성화가 자는 걸 괜히 깨우면서까지 안방에 들어가기 싫어서 씻지도 않은 채 소파에 구겨져 잤던 것이 희미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자켓도 벗지 않고 잤는지 신축성 없는 가죽에 팔이 조이는 느낌이 났다. 구겨져 있던 몸을 일으키니 허리가 살살 아팠다. 시계는 아침 7시를 가리키고 있다. 자꾸만 현실감이 사라졌다.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생각을,
“왜 또 소파에서 잤어.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들어오라니까.”
“...아.”
“그거 잠깐 깨는 게 뭐 별거라고.”
“...”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 그냥 좀 피곤해서.”
“지가 언젠 안 그랬다고… 나 아침 먹을 건데.”
“어, 응.”
전남친 토스트인지 전남친 요거트인지. 박성화는 이 빵이 전남친 어쩌고라며 한참 종알댔다. 홍중은 선이 얇고 긴 성화의 손가락이 구운 빵에 블루베리잼과 크림치즈를 꼼꼼하고 균형감 있게 바르는 광경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생각이 깊고 많으니 도저히 입맛이 돌지 않아 그냥 먹는 것을 지켜만 보게 된다. 성화가 익숙하게 한 잔 내려준 드립 커피를 받아들자 머그잔의 뜨거운 온기가 손아귀에 감겼다.
김홍중은 관성적으로 커피를 한 잔 다 마시고서야 더는 작업실에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카페인으로 졸음을 누를 필요가 없다는 것도. 세상이 망하는 판에 믹싱은 무슨. 작업은 무슨. 아직 어떻게 된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주어진 것이 기회라면 일 따위에 낭비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그리고. 성화도 회사에 가지 않고 집에 같이 있으면 좋겠다, 그런 욕심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다만 미래를 보고 온 자신도 믿기지 않는 일을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래도 최대한 논리정연하고 깔끔하게 설명하려고 했는데. 말을 고를 새도 없이 입에서 한 마디가 툭 튀어나왔다.
“끝을 보고 왔어.”
홍중은 그 말을 들은 성화의 반응을 믿을 수가 없다. 성화는 홍중이 말을 꺼내자마자 모든 것을 바로 믿었다. 곧 세상이 망한다는 뜬금없는 예언을. 아니, 그것뿐만 아니라 홍중이 어떻게 돌아왔는지, 그 과정이 얼마나 황당했는지까지 모두. 성화가 자신에게 가지고 있는 믿음과 신뢰가 벅찼다. 그리고 또 막막하기도 했다. 홍중은 흔들림 없는 성화의 눈을 보며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를 물었다. 아니다. 어떻게가 아니라 왜에 가까웠다. 왜 나를 그렇게 믿는지를. 저도 모르게 나온 질문이었다. 성화는 세 장의 토스트를 그새 먹어 치운 후 네 번째 식빵을 이글이글 노려보다가 홍중의 질문을 듣고선 웃으며 답했다.
“니 눈 보면 알아 바보야. 너 나한테 안 들키는 거짓말 못 하잖아.”
●
눈앞에서 목도하게 된 멸망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거대하고 불가해한 것이어서, 일개 음악 프로듀서인 홍중으로서는 꼴랑 이 3일의 회귀로 멸망 자체를 막아보겠다는 발상조차 떠올릴 수 없었다.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폭풍우를 불러온다지만 드넓은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지구조차 티끌 같은 존재다. 지구조차 티끌, 산과 강과 바다도 티끌, 폭풍우도 티끌, 그렇다면 김홍중은...
세상에 알릴 의지조차 샘솟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에게 단체 메시지라도 보낼까 하다가 그것도 그만두었다. 믿는다는 보장이 있어야 말이지. 아무래도 미친놈 취급받고 끝나리라, 하는 계산이 섰기에 영 맘에 밟히는 친한 동생들 몇에게만 따로 전화를 돌렸다. 속는 셈치고 들으라고. 당장 내일 죽는다고 생각해 보라고. 지금 니 맘속에 딱 떠오르는 아쉬운 그거, 더 늦기 전에 그거 하라고. 제발 사랑하는 사람 곁에 있으라고. 동생들은 죽어도 그런 말을 안 할 것 같은 사람이 갑자기 미쳤다고 끔찍해했으나 도리어 그 이유 때문에 홍중의 말을 반쯤은 믿게 된 것 같았다.
끊으면서 생각했다. 반쯤 믿었으면 됐지 뭐. 그 이후로는 알아서 하라지.
●
홍중은 일도, 약속도 내팽개치고 집에 틀어박혔다. 성화는 복잡한 심경 속에서도 기쁜 내색을 숨기지 못했다. 둘은 불을 안 켜도 훤한 평일 대낮부터 안방 침대에 잠옷 차림으로 엉겨 붙어 있는 중이다. 성화의 품에 자꾸만 깊게 파고들던 홍중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해. 진작, 내가 진작 더…”
작게 웃는 소리가 홍중의 머리 위에서 울렸다.
“그래도 왔잖아. 나 보러 다시 온 거지?”
홍중이 머리를 작게 끄덕였다. 그런 홍중의 머리칼을 가만가만 쓸어주는 손길이 있다.
“있잖아. 그, 마지막은… 아파?”
홍중이 고개를 저었다.
“느낌도 없었던 것 같아. 너도 못 느낄 거야, 아마.”
“얼마나 무서워?”
“그 질문은 쫌 어렵네… 살짝 무서울 수도 있겠다.”
“옆에 있어 줄 거지?”
홍중이 성화의 품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끄덕였다. 조용하던 성화가 문득 물었다.
“저번에, 그니까 너 돌아오기 전에.”
“응.”
“그 마지막 순간에… 우리 같이 있었어?”
열심히 움직이던 홍중의 머리통이 처음으로 잠잠해졌다. 성화는 놀랍지 않다는 듯 홍중의 머리를 쓸어 넘긴다.
“그랬구나. 이번에는 같이 있자.”
의문형이 아니라 청유형이었다. 홍중은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는다.
●
그러고서는 정말로 같이 있었다.
성화는 생각보다 더 떨었고,
홍중이 손을 잡아주자마자 쉽게 진정했다.
충만한 결말이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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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브 지점으로 되돌아가시겠습니까? (1)
Yes /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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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보니 또 3일 전이었다. 거실 소파에 앉아 막 다시 돌아온 현실 감각을 한창 느끼고 있으려니 어느샌가 안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박성화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들어본 적 있는 대사다.
“왜 또 소파에서 잤어.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들어오라니까.”
“아.”
“그거 잠깐 깨는 게 뭐 별거라고.”
“별거지. 니가 자다가 깨는데 별거지 그게.”
“뭐야? 김홍중 왜 이래?”
“뭐가아.”
“소파에서 푹 잤나 봐 아주? 그냥 거기서 평생 자고 싶냐, 진짜?”
“아이. 무슨 말이야 그게. 아침이나 먹어. 너 배고프잖아.”
“요상하네 오늘…”
가자 가자. 홍중은 의심스러운 얼굴을 하는 성화의 허리를 능글맞게 감으며 부엌으로 간다. 성화는 싫지 않은 기색으로 홍중의 안내를 따라 식탁에 앉았다가는 곧 무언가가 생각난 듯 파드득 일어나 냉장고로 갔다. 보라색 잼이 든 병과 흰색 통을 꺼내 양손에 쥐고 흔든다. 홍중이 본 적 있는 것들이다. 성화는 어제 새로 샀다고 중얼거리며 블루베리잼과 크림치즈를 식탁으로 들고 왔다.
홍중이 빙글빙글 웃으며 컨닝한 정답을 당당히 던져놓았다. 전남친 토스트? 그 말을 들은 성화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어떻게 알아? 와, 김홍중 캐붕. 고개를 갸웃거리며 잼 병을 여는 성화에게 홍중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나도 하나 해줘 봐 봐.”
“...뭘?”
“빵. 그거 바른 거.”
성화는 눈과 입을 동그랗게 만들며 놀라더니 또 고개를 갸웃거리며 새로 구워진 빵에 잼과 치즈를 바르기 시작했다. 다 바르자마자 홍중에게 멀뚱한 얼굴로 토스트를 내민다. 겉면에 바삭한 느낌이 들 정도로 따끈하게 구워진 빵을 받아들자 식탁 중앙에 토스트 가루가 살짝 떨어졌다. 김홍중은 주저 없이 토스트를 한 입 베어 문다. 와삭, 하는 소리가 났다.
“...맛있다.”
“그치?”
“...응. 진짜 맛있다.”
“당연하지. 내가 먹는 거에 얼마나 진심인데.”
너 복 받은 거야. 알아? 그러면서도 성화의 얼굴에는 방글거리는 미소가 돌았다. 토스트 더 해줄까? 하나로 되겠어? 아, 커피 내려줄게. 홍중이 토스트를 겨우 한 입 맛있게 먹었다는 이유로 시골 할머니보다 바빠진 성화를 보며 홍중이 피식 웃었다.
“괜찮아. 커피 안 마실래. 우유만 한 컵 따라와야겠다.”
“어? 왜? 아, 아침 먹고 다시 자려고?”
홍중이 냉장고 문을 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 오늘 작업실 안 가. 작업 안 해.”
“...진짜? 왜?”
“내일도 안 가.”
“...무슨 일 있어?”
“모레도.”
“...”
우유를 한 잔 따라서 다시 식탁에 앉은 홍중의 얼굴에 성화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쏘아졌다. 홍중은 식탁을 두어 번 톡톡 치다가 입을 열었다.
“성화야. 나 끝을 보고 왔어. 세상의 끝.”
“...”
"세상이 끝나. 진짜야.”
“뭐지. 김홍중 구라 못 치는데.”
“거짓말 아니니까.”
“근데 거짓말이 아니라고 치면. 그게... 곧인가 보네?”
“응. 3일 후.”
“3일 후…”
“세상이 딱 끝났는데, 나한테 되돌아가겠냐고 물어보더라.”
“그렇구나.”
“그러겠다, 했더니 오늘 아침이었어.”
“그렇구나…”
“나 작업실 안 가. 너도 회사 가지 마.”
“그래. 이거 치우고 연락해야겠다.”
“...그래.”
“어? 엥?”
“엉?”
“야 김홍중.”
“왜.”
“너 왜 나한테 안 물어봐? 이런 얘기를 어떻게 한 번에 믿는지?”
“아아. 넌… 내가 거짓말하면 다 알잖아.”
성화가 한쪽 입꼬리를 씨익, 끌어올렸다.
“그치. 니 눈 보면 다 안다니까. 견적이 딱 나와 김홍중은.”
●
한 번 내팽개쳤던 일을 다시 버리는 건 더 쉬웠다. 홍중은 간만에 외출을 제안했으나 성화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결국 이번에도 간택 받은 건 대낮의 안방 침대다. 성화의 팔꿈치가 얼마나 뾰족하고 맨들한지 돌돌 굴리듯 만져보던 홍중이 별안간 고개를 번쩍 들고 성화와 마주 보았다. 이번에는 눈을 보며 이야기할 테다. 제대로 눈을 보고 사과하지 못한 것이 마지막 순간에 마음에 걸렸다.
“미안해. 내가 진작 더 잘했어야 했는데. 집에도 잘 들어오고. 너도 잘 챙기고.”
성화가 조금 놀란 얼굴로 홍중의 눈을 마주했다. 한참 가만히 김홍중을 보다가는,
“이리 와.”
하고 홍중을 자신에게로 다시 끌어당긴다.
“그래도 왔잖아. 나 보러 다시 온 거지?”
단단한 성화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홍중이 무심코 고개를 끄덕거리려다가 다시 몸을 들어 성화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다시 눈을 맞추고 대답한다.
“응. 너 보러 왔어.”
성화의 귀가 희미하게 발개졌다.
“니 좀 뻔뻔해졌다.”
“좋으면서.”
대답 없이 홍중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손길이 부드럽고 다정했다.
“있잖아. 그, 마지막은… 아파?”
홍중이 고개를 저었다.
“못 느끼더라. 너도, 나도.”
“얼마나 무서워?”
홍중이 눈을 감고 생각했다.
“너 작년에 방에서 혼자 하기 무섭다고 거실에 들고나와서 하던 무서운 게임. 그거 할 때만큼 떨던데.”
“헉… 벌써 무서워. 어떡해.”
홍중이 눈을 감은 채로 킥킥 웃었다. 성화가 그 입을 밉지 않게 톡톡 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있지, 옆에,”
“있을 거야.”
홍중은 눈을 뜨고 확신을 담아 성화를 보았다.
“저번에도 우리 같이 있었어. 이번에도 같이 있을 거야. 안 떨어져.”
그 선언 같은 약속에 성화가 놀란 듯, 울컥한 듯…
●
그러고서는 정말로 같이 있었다.
성화는 미리 카운트다운을 해달라고 했고,
홍중은 성화의 입에 초콜릿을 넣어주었다.
성화는 무섭지 않다고 중얼거리다가
홍중을 보고선 아주 크고 상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충만한 결말이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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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브 지점으로 되돌아가시겠습니까? (2)
Yes /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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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브 지점으로 되돌아가시겠습니까? (3)
Yes /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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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브 지점으로 되돌아가시겠습니까? (4)
Yes /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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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브 지점으로 되돌아가시겠습니까? (5)
Yes /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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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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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브 지점으로 되돌아가시겠습니까? (997)
Yes /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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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에서 눈을 뜬다. 홍중은 정신이 들자마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간다. 눈을 반쯤 감은 채로 침대에서 느적대던 성화의 옆자리에 그대로 파묻힌다. 성화가 왔어, 하고 웅얼거리다가 홍중이 입고 있는 가죽 자켓을 만지작대며 불만스러운 신음을 뱉었다. 너 또 안 씻고 들어왔지, 하는 듯한 말이 한껏 웅얼거리는 말투에 먹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홍중은 대답 없이 이불로 파고든다.
“왜. 많이 피곤했어? 뭐가 잘 안 풀려?”
홍중이 고개를 젓는다.
“아니. 그냥, 그냥 좀…”
성화가 홍중을 폭 안았다. 홍중은 잠시 숨을 고르다가 속에 고인 말을 쏟아낸다.
“성화야. 있지. 사흘 후에 세상이 멸망해. 그 끝을 보고 왔어. 그래서 니 옆에 사흘 동안 있을 거야. 너 내가 하는 말 다 믿는 거 아니까 괜히 안 믿는 척 장난 안 쳐도 돼. 넌 내 눈만 봐도 알잖아.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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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브 지점으로 되돌아가시겠습니까? (998)
Yes /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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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에서 눈을 뜬다. 홍중은 정신이 들자마자 안방으로 가려다가 잠시 멈춘다. 입고 있던 가죽 자켓과 양말을 벗어 소파에 던진 후 티셔츠와 츄리닝만 입은 상태로 안방으로 들어간다. 성화 옆자리를 차지하며 침대 매트리스에 파묻히자 성화가 웅얼거리며 인사했다. 홍중을 꼭 껴안으며 귓가에 왔어, 피곤하겠다, 벌써 아침이네, 하는 둥의 말을 잠에 취한 채로 중얼거린다. 홍중은 대답 없이 이불로 파고든다.
“왜, 많이 피곤했어? 뭐가 잘 안 풀려?”
홍중이 고개를 젓는다.
“성화야.”
“으응.”
“나.”
“으응.”
“내가 아직 멀쩡한 사람일 때 끝내고 싶어.”
●
성화가 애써 웃는 것이 느껴졌다. 이게 전남친 토스트야, 말해주며 홍중에게 한 조각 먹을 테냐고 눈짓한다. 홍중은 고개를 젓는다. 너무 많이 먹었다. 너무 많이.
대신 홍중은 여느 때처럼 성화가 내려준 커피를 한 잔 들고 모든 걸 이야기했다. 한 번의 돌아옴이 아니라, 이제는 천 번에 육박하는 그 모든 돌아옴에 대해서, 모두.
“성화야. 내가 닳아가고 있어.”
“...”
“나만 닳으면 괜찮은데… 나만이면 괜찮은데. 내 안에 있는 너에 대한 사랑이… 자꾸 같이 마모되는 기분이야.”
“...”
“그게 싫어 성화야. 그게 너무 힘들어.”
“...”
“나 있지, 내가 아직 멀쩡할 때 끝내려고. 끝까지 너는 몰랐으면 좋겠다, 싶다가도… 말해주는 게 예의인 것 같았어.”
“...”
“성화야. 나 다음번엔 안 돌아올 거야. 돌아갈 거냐고 물어보면 아니요, 할 거야.”
“...그럼 이제 너도 죽는 거네? 진짜로?”
“응.”
“그러지 말라고 하고 싶은데…”
니 표정이 너무 지쳐 보인다. 그니까 욕심 안 부릴게. 그걸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홍중은 알아들었다.
●
“사랑해. 사랑해 성화야. 널 사랑하는 채로 끝내고 싶어. 내가 닳아가는 게 너무 무서워. 다 닳아버린 내가 관성적으로 돌아와서 널 상처 주게 될 미래가 무서워. 내가 나일 때 끝내고 싶어. 끝내야 해.”
“…그래. 그렇게 해, 홍중아.”
“…”
“그러자. 같이 가자.”
“...응.”
“안 무서울 거야. 홍중아, 하나도 안 무서울 거야.”
“응.”
“내가 옆에 있어줄게.”
“응.”
“절대 안 떨어져.”
“응.”
●
세이브 지점으로 되돌아가시겠습니까? (999)
Yes / N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