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ey's End
홍섷by. 야미
“어서 오세요.”
공간 가득 풍기는 원두 향과 함께 들려오는 목소리에 홍중이 미소를 지었다. 익숙하게 남자의 앞에 선 홍중은 메뉴판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상큼 딸기 요거트 스무디를 주문했다. 남자는 당황한 듯 홍중을 바라보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드시고 가시나요?”
“네.”
“음료는 일행분 오시면 드릴까요?”
“아, 아뇨. 바로 주세요.”
“네~ 앉아 계시면 가져다드릴게요.”
결제까지 끝낸 홍중은 카운터가 잘 보이는 자리로 향했다. 음료를 만드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벽걸이 시계와 손목시계를 번갈아 보며 확인했다. 홍중의 손목시계는 벽걸이 시계와 시간이 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홍중의 옆으로 음료를 든 남자가 다가왔다. 맛있게 드세요- 남자는 음료를 내려놓으며 보기 좋은 미소를 지었다.
“아, 그쪽... 이름 알려줄 수 있어요?”
“성화..예요. 박성화.”
“저는 김홍중이에요.”
당황한 성화는 홍중의 시선을 피하다 때마침 들어오는 손님에 도망치듯 카운터로 향했다. 상큼 딸기 요거트 스무디를 전해주려던 홍중은 물방울이 맺히는 컵을 쥔 채 성화의 뒤를 쫓다 한숨을 내쉬었다. 성화와 대화하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 기억이 돌아오지 못하게 하려는 성화의 무의식일 것이다. 손목시계의 시간이 흘러갈수록 홍중의 한숨이 커졌다. 녹고 있는 스무디만 보던 홍중이 성화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화 씨. 혹시 오늘 끝나고 시간 괜찮으세요?”
“...시간이요?”
“네. 성화 씨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요.”
잠시 고민하던 성화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표정이 풀어진 홍중이 스무디를 성화에게 건넸다. 이건 성화 씨 주려고 산 거예요- 성화가 놀란 얼굴로 스무디를 받았다. 웃으며 성화를 바라보는 홍중에 눈만 굴리던 성화가 스무디를 마셨다. 홍중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로 돌아갔다. 성화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둘의 취향으로 꾸민 타임머신을 꼭 보여주고 싶었다. 이번이 몇 번째인지, 성화와 대화하는 시간이 짧아질수록 타임머신을 보여주는 날도 줄어 초조해지는 홍중이었다.
마감 시간이 가까워지고 홍중은 가게 앞에서 성화를 기다렸다. 정리를 하던 성화가 창밖으로 보이는 홍중의 뒷모습을 바라보자 지나가던 알바생이 다가왔다.
“저 기억 났어요.”
“응?”
“저분, 며칠 전에도 사장님 보러 왔던 분이잖아요.”
“며칠 전에도...?”
“네! 그때도 아메리카노랑 딸기 스무디 시켜서 기억나요.”
“난 기억이 안 나는데...”
“진짜 사장님 좋아하나 봐요!”
신나서 이야기하는 알바생을 진정시키며 정리를 끝낸 성화가 피곤한 숨을 내쉬었다. 카페를 나서며 조심스럽게 홍중의 옆에 선 성화는 곁눈질로 홍중을 살폈다. 성화가 옆에 서 있음에도 쉽게 입을 열지 못하던 홍중이 성화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시간 여행... 좋아해요?”
“네?”
“시간... 여행이 가능해요?”
“...아뇨. 그냥 성화 씨랑 시간 박물관에 가고 싶어서요.”
“아, 네...”
성화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홍중의 손은 잡지 않았다. 홍중은 주먹을 쥐었다 펴며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었다. 둘은 발맞춰 걸으면서도 박물관에 도착하기 전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저랑 시간 박물관에 오고 싶었어요?”
“보여주고 싶은 게 있거든요.”
“...며칠 전에도 저희 카페 오셨다면서요.”
“아... 기억하세요?”
“아뇨. 전 기억이 안 나는데 저희 알바생이 기억하더라구요.”
당황한 홍중이 그 자리에 멈춰서 성화의 시선을 피했다. 저한테 보여주고 싶은 거 있다면서요- 보다못한 성화가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성화의 발걸음을 따라가던 홍중이 성화를 앞서가며 자신의 타임머신으로 향했다. 은색으로 가득한 타임머신은 곳곳에 마리골드가 새겨져 있었다. 타임머신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성화를 보며 홍중이 뿌듯한 웃음을 지었다.
“제 취향은 어떻게 아셨어요?”
“내일이면 성화 씨는 기억 못 하겠지만, 저희 꽤 친했어요.”
“왜 기억을 못 해요. 이번에는 꼭 기억할게요.”
“아뇨. 기억하면 안 돼요. 제가 찾아 올 거니까 성화 씨는 기억하지 마요.”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채 홍중과 타임머신은 성화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동시에 눈을 깜빡인 성화는 제가 왜 이곳에 있는지 기억하지 못한 채 의문을 품고 집으로 향했다.
*
“어서 오세요.”
익숙하게 미소를 지으며 들어선 홍중이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상큼 딸기 요거트 스무디를 주문했다. 평소처럼 주문을 받던 성화가 의아한 듯 홍중을 바라봤다.
“혹시, 저희 어디서 본 적 있어요?”
“...아니요.”
“아, 죄송해요. 제가 착각했나 봐요. 같은 메뉴로 주문하셨던 분이 있어서요.”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인 홍중이 결제하고 늘 앉던 자리로 향했다. 음료를 가져다주면서도 성화는 홍중의 얼굴을 살폈다. 낯익은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성화는 보기 좋은 미소를 지었다. 맛있게 드세요- 성화가 카운터로 돌아갈 때까지 홍중은 미동도 없이 앞에 놓인 음료만 바라봤다.
마감 시간이 한참 남았는데도 홍중은 성화를 뒤로 하고 카페를 나섰다. 제 욕심 때문에 성화가 기억을 되찾게 할 수는 없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성화를 데리고 시간 여행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만 몇 번째인지. 한동안 성화를 찾아오지 말자는 다짐을 하며 되돌아가는 홍중이었다.
*
끝없이 욕심을 내던 인간들은 마침내 시간 여행이 가능하게 되었다. 과거로 돌아가 로또를 사거나 미래를 다녀와 발명품을 미리 만들어내는 등 타임머신을 가진 자들의 남용이 판을 쳤고, 인간들은 시간 여행의 기준을 정하기 시작했다. 당시 학생이었던 홍중과 성화는 시간 여행 기준에 대한 정보를 알지 못한 채, 평행 우주로 시간 여행을 했다. 평행 우주의 성화와 마주하게 된 성화는 영원히 그곳에 갇히게 된 것이었다. 평행 우주의 성화가 죽음을 맞이하면서 성화는 기억을 잃은 채 반복되는 날만을 살고 있었다.
그렇다고 홍중이 성화를 구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무력으로 타임머신에 태워보기도 했고, 평행 우주로 가기 전의 시간으로도 되돌아가 봤다. 그럴 때마다 성화는 시력을 잃거나 청력을 잃고, 심지어 몸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을 겪기도 했다. 겨우 찾은 해결법은 기억을 지운 채 평행 우주에서 삶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홍중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성화에 서운하면서도 타임머신을 완성했다는 기쁨에 제대로 알아보지 않은 채 성화를 데리고 시간 여행을 한 것도 자신이라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홍중이 자책하며 성화를 찾아가지 않은 지 한 달째, 기억을 되찾은 성화가 본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홍중에게서 주워들었던 지식만으로는 타임머신을 만들 수 없었고, 시간 여행이 금지된 평행 우주에선 돈으로도 타임머신을 구할 수도 없었다. 홍중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시간 박물관을 방문했다.
성화는 퇴근 후 당연하게 시간 박물관으로 향했다. 홍중의 타임머신이 있던 곳은 늘 비어 있었지만, 오늘은 곳곳에 마리골드가 새겨진 은색의 타임머신이 자리했다. 숨을 크게 들이쉰 성화가 손잡이를 잡자 스르륵 문이 열렸다. 안에는 홍중이 놀란 얼굴로 성화를 바라봤다.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 성화가 홍중에게 다가갔다.
“나도 데리고 가줘.”
“다 기억 났어...?”
“응. 나 놓고 가지 마. 제발.”
흐르는 성화의 눈물을 닦아주며 홍중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너 못 잃어, 성화야. 네가 날 기억하지 못한대도, 네가 살아만 있으면 돼.”
“나는... 그럼 나는?”
“이렇게 한 번씩 나 기억해 주잖아. 그거면 돼.”
성화의 얼굴을 매만지던 홍중이 성화에게 입을 맞췄다. 눈물의 짠맛과 함께 마리골드 향이 퍼졌다. 그대로 힘이 빠진 성화의 몸이 홍중에게 기울었다. 홍중은 쓰러진 성화를 안아 들고 카페로 향했다. 카페 안쪽 간이침대에 성화를 눕히고 한참을 바라보던 홍중은 해가 뜨기 시작하자 되돌아갔다.
“어서 오세요.”
공간 가득 풍기는 원두 향과 함께 들려오는 목소리에 홍중이 미소를 지었다. 익숙하게 성화의 앞에 선 홍중은 메뉴판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상큼 딸기 요거트 스무디를 주문했다. 성화는 당황한 듯 홍중을 바라보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드시고 가시나요?”
“네.”
“음료는 일행분 오시면 드릴까요?”
“아, 아뇨. 바로 주세요.”
“네~ 앉아 계시면 가져다드릴게요.”
결제까지 끝낸 홍중은 카운터가 잘 보이는 자리로 향했다. 음료를 만드는 성화의 뒷모습을 보면서 벽걸이 시계와 손목시계를 번갈아 보며 확인했다. 홍중의 손목시계는 벽걸이 시계와 시간이 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홍중의 옆으로 음료를 든 남자가 다가왔다. 맛있게 드세요- 성화는 음료를 내려놓으며 보기 좋은 미소를 지었다.
“딸기 스무디는 사장님 드세요. 일행이 못 온다고 하네요.”
딸기 스무디를 성화에게 건네며 홍중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