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

홍섷

by. K-페퍼

한낮인데도 하늘은 어둑했고, 창밖은 무채색처럼 느껴졌다.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성화는 조용히 책장을 넘겼다. 책은 지루하진 않았지만, 딱히 집중도 되지 않았다. 페이지에 적힌 문장은 한 귀퉁이로 스쳐 지나갔고, 마음은 창밖의 흐린 빛에 자꾸만 가 닿았다.

그때, 누군가 성화의 앞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말도 없이 자리에 앉은 남자는, 손에 커피를 들고 있었고, 다른 손엔 책 한 권을 들고 있었다.

 낡은 표지의 시집.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제목이었다.

성화가 아무 말도 못한 채 눈을 마주치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괜찮다면, 여기… 앉아도 될까?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조용한 카페 안에서도 잘 들릴 정도로 단정한 음색.

 성화는 어쩐지 거절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그는 자리에 앉아 커피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

 박성화. 

그 순간, 성화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처음 듣는 목소리인데, 자신의 이름을 정확히 불렀다.

 익숙한 발음으로. 오래도록 알고 지낸 사람처럼.

 …저기요, 성화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저 아세요? 

그는 눈을 마주치며 미소 지었다.

 쓸쓸하고, 다정한 웃음이었다.

 그럼. 당연히 알지. 

 …죄송한데, 전 처음 뵙는 것 같은데요. 

 넌 지금 날 처음 보지. 늘 그랬어. 

 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난 오늘, 너랑 보내는 마지막 날이야. 

성화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농담일까? 장난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눈동자엔, 긴 이별을 마주하는 사람 특유의 애틋함이 있었다.

 …무슨 말이에요? 

커피 향이 미묘하게 씁쓸하게 느껴졌다.

 말이 되지 않았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이별이라니.

 장난하시는거에요? 

 아니야. 난 진심이야. 

 그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하늘이 흐리네. 오늘은 네가 많이 우울했을 것 같았어.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냥, 그럴 것 같았어. 

그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성화는 그의 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어디까지가 농담이고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 사람은, 자신을 알고 있다. 아주 오랫동안.

그리고 그건… 이상하게, 위로처럼 느껴졌다.



어색한 침묵과 조용한 대화가 반복됐다.

 그는 성화가 좋아하는 시집을 언급했고, 성화는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침묵하며 바라볼 뿐이었다.

 시간이 됐네 이제 가야겠다. 

시계 바늘이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성화는 붙잡을 이유도, 이유조차도 알 수 없었는데… 이상하게 말리고 싶었다.

 다시 볼 수 있을까요? 

 자신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대답은, 반대로였다.

 응 아마 내일 또 볼 수 있을거야. 

하지만 그땐… .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읊조리듯 멀하곤 그는 그렇게 걸음을 돌렸다.

 한 걸음, 두 걸음.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성화는, 테이블 위에 놓인 한 장의 종이를 발견했다.

노란색 메모지.

 거기엔 단정한 손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2025.04.22

 내가 너를 잊어가기 시작한 날.

 김홍중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봐도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천천히 입을 굴려 동글동글한 글자를 발음해봐도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김홍중. 흔한 이름이 아니라 기억할만도 한데 이렇게까지 기억에 없는걸보니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것이 분명하다.

그래 분명 처음보는 사람인데 왜 이리 익숙함이 남는지…





2025.03.21

그 날 이후 김홍중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원래 없던 사람인것처럼 다시 자연스럽게 내 일상에서 한 발자국씩 멀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 그가 쓴 안경이 동그란 얇은 안경이었는지 아님 두꺼운 뿔태였는지도 가물가물 할 무렵 다시 내 눈 앞에 나타났다. 품 안 가득 팝콘을 들고. 

 성화야.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내 앞으로 와 품안에 있던 팝콘통을 넘겨주었다. L사이즈 카라멜, 솔트 반반. L사이즈의 콜라하나. 내게 팝콘통을 건네준 홍중의 손에는 작은 S 사이즈의 팝콘이 들려있었다. 마치 내 팝콘을 따로 준비해둔 것만 같았다. 내 취향을 정확히 맞춘 팝콘과 밝게 웃으며 흔들어보이는 영화표 두 장. 뭐라 말 할 틈도 없이 홍중이는 내 손을 이끌고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상영관 뒤에 있는 커플석에 앉아 영화를 보는 내내 한 손을 꼭 잡고 영화를 봤다. 

영화는 판타지 멜로 영화였다. 각자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두 주인공이 아무리 대화해도 맞지 않는 관계에 이상함을 느끼고 서로의 시간선을 살아보며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그런 내용이었다. 




 오늘 영화 어땠어? 오늘이 마지막 상영이래. 

 재밌더라 내가 좋아하는 내용이야. 적당히 달달하고 적당히 애틋한 그런거. 



 그치. 그럴 것 같았어 후기 보는데 딱 너가 좋아할 것 같더라. 

 어떻게 알았어? 

 응? 

 내가 이거 좋아할거라는거. 내 팝콘 취향이랑 그런거 어떻게 알았냐고. 

 당연히 알지~ 내가 왜 몰라. 

 홍중아.

우리 두번 만났어. 

 응? 

 우리 오늘 두번째 만남이라고. 

 아… 

 그치 넌 두번째지. 

 무슨말이야? 

 아냐 아무것도 아 맞다 3월 24일 오후 1시 여의도 한강공원 앞에서 만나 알겠지? 

 응? 잠시만 홍중아 김홍중! 

뭐라 할새도 없이 그는 내 눈 앞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03:00

여의도 한강공원

 잔잔한 강물 위로 흐린 햇살이 깔려 있었다.

성화는 약속 시간보다 십오 분 일찍 도착해 있었다. 누가 봐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한참을 서성이다가, 벤치에 앉았다. 아직 오지 않았겠지. 그래도, 온다고 했으니까.

홍중과 보냈던 시간을 천천히 되짚어본다..

 팝콘을 받아들고 영화관에 들어갔던 기억, 커플석에서 그의 손을 잡고 앉았던 따뜻한 체온. 그가 웃을 때 눈이 반달처럼 휘어졌던 얼굴.

그리고 3월 24일 오후 1시, 여의도 한강공원 앞에서 만나. 

 그 말에 이끌려, 그는 지금 여기에 있다.

성화는 조심스레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다, 저만치서 다가오는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했다.

 긴 코트를 입은 남자. 조용히 다가와 성화 앞에 섰다.

 …왔네. 

 성화가 말하자,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혹시 많이 기다렸어? 

성화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도 방금 도착했어. 

조용한 공원의 산책길을 함께 걸었다.

 한강을 따라 천천히 걷는 걸음, 말이 많지는 않았지만 성화는 그 시간 자체가 좋았다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연인처럼 편안했다.. 몇 걸음쯤 앞서 걷는 홍중을 바라보다가, 문득 물었다.

 저번에 영화 재밌었지? 

홍중의 발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

 그는 고개를 돌려 성화를 바라봤다.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영화? 

성화는 웃으며 말했다.

응. 너가 예매해 준 거. 커플석에서 봤잖아. 팝콘도 나한테 맞춰서 준비해줬고. 

홍중은 눈을 깜빡이며 잠시 머뭇거렸다.

 우리 그 영화 같이 봤었나…? 

 무슨 소리야. 그저께 나랑 봤잖아. 

 성화는 장난기 섞인 듯 말했지만, 마음 어딘가가 순간적으로 쿵, 하고 울렸다.

홍중의 표정이 복잡하게 일그러졌다가, 다시 애써 웃음으로 덮였다.

…미안. 내가 요즘 좀 정신이 없나 봐. 



성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홍중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그 미소가 너무 조심스러웠다. 마치 뭔가를 모른다는 것에 불안함을 감추려는 듯한 미소.

 그리고, 성화는 그제야 느꼈다.

뭔가 이상하다.

 말투, 눈빛, 표정, 그리고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

 미묘하게 조금 달랐다.

 똑같은 웃음인데… 오늘의 그는 어딘가 좀 달라보였다.



 오늘은, 너랑 그냥 산책하려고. 너 여기 좋아하잖아. 

 홍중이 말했다.

 …그걸 또 어떻게 알았어? 

 성화는 습관처럼 웃으며 물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미소 지은 채 걸음을 옮겼고, 성화는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따라 걸었다.

걷는 내내 마음이 복잡했다.

 말은 이어졌지만, 감정은 엇갈리는 느낌.

 나는 어제보다 더 가까워졌다고 느끼는데, 그는 어제보다 더 멀어져 있었다.

뭔가 반대로 걸어가고있는 기분이었다









홍중이는 항상 먼저 나를 찾아왔다. 내가 어디에 있든 무얼 하든 항상 내가 필요한 상황에 딱 맞춰 나타났다. 마치 미래를 다 아는 것처럼. 그런 그가 좋았다, 편했다. 홍중이는 분명 이상한 아이였지만 그런 그가 좋아서 이상한 것 쯤은 그냥 눈감아주기로 했다. 어제 한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나랑 한 적 없는 일을 마치 나와 시간을 보낸 듯 자세하게 이야기 해도, 심지어는 한 번도 알려준 적 없는 번호로 그가 전화를 걸어왔을 때조차 나는 그냥 그의 이상함을 품고 그를 사랑하기로 했다.




홍중아!

응 성화야.

미안해 많이 기다렸지, 이거 사오느라.

아냐 괜찮아 얼마 안 기다렸어.

근데 진짜 신기하다 

응? 뭐가? 

넌 항상 내가 뭘 좋아하는지 다 맞추잖아. 저번에 영화랑 공원 산책도 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고. 이 고양이카페도, 내가 고양이 좋아하는건 어떻게 알았어?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날 알고있던 것 같아



그는 아무 말 없이 웃으며 날 바라봤다 

사실 날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있었던거 아냐? 내가 기억을 못하는건가? 아니면 어디 멀리서 온 외계인이라던지~

그냥~ 내가 널 많이… 좋아해서 그런가봐 내가 많이 사랑하나봐

응? 뭐라고 홍중아?

아냐 아무것도 그냥 너라면 뭔가 그럴 것 같았다고.

그래? 홍중이는 똑똑한가보네 나를 다 알고~ 우리 이용 시간 언제까지였지?

응? 아 9시까지 이제 한 30분 정도 남았어.

그래? 아쉽다… 좀 더 놀고싶은데… 어쩔 수 없지 홍중아, 우리 다음에 여기 또 오자

응응 그러자 꼭 다시 오자



시간이 흘러 어느새 홍중이와 함께 있는 시간들이 익숙하고 편안해져갔다. 마치 오래된 연인처럼, 또는 오랜 친구처럼. 




오랜만에 혼자 앉아 티비를 본다. 티비에선 좋아하는 드라마 연속극을 방영해주고 있었다. 한참을 바라보다 문득 드라마 사이에 낀 광고 하나에 눈길이 갔다.



지금껏 본 적 없는 세계가 펼쳐진다. 서로 다른 시간선을 살아가는 주인공, 안녕? 나는 내일의 너를 만나고 왔어. 천만영화 바운시의 송민기 감독 신작! 열두시. 4월 21일 대개봉! 박스오피스…

열두시…? 분명 저번에 봤던 그 영화다. 그 떄 김홍중이 분명 마지막 상영일이라 했는데… 

곧장 일어나 핸드폰 검색엔진을 켰다. 

열…두시…








열두시 (상영중)

영화 . 12:00




개요 맬로, 로멘스. 대한민국. 210분

상영일 2025.04.21.~2025.10.09.

감독 송민기

.

.

.





정 반대다. 홍중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나와 정 반대를 가리키고 있다. 

만약 김홍중이 나와 정 반대의 시간을 살아간다면…? 어제 했던 일을 기억하지 못 하는 것도, 처음 본 나를 마치 오래 본 연인처럼 대하는 것도 다 설명이 된다. 마치 서로를 향해 마주보고 걷는 것 처럼 모든 것이 다 정반대다. 그럼 서로 마주보고 난 뒤엔 어떻게 되지…? 그대로 지나쳐가는건가…




06:00

창밖의 하늘이 아주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어딘가 새벽과 아침 사이, 분명히 낮은 아닌 시간.

 성화는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잠들지 못한 얼굴, 테이블 위에는 펼쳐진 메모지 몇 장과 휴대폰, 그리고 커피잔.

노란 메모지.



 그가 두고 간 첫 번째 메모 이후, 성화는 조심스럽게 날짜와 기억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열두시’라는 영화.

 그리고 김홍중이라는 사람.

그는 분명히 말했다. 그 영화는 마지막 상영이었다 고.

 하지만 실제로는 영화를 본 그 날 개봉한 영화였다. 2025년 4월 21일.

 성화는 어젯밤 검색창을 보자마자, 순간적으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적어도, 홍중은 진심이었다.

 그렇다면…

 …진짜로, 시간을 거꾸로 살아가는 건가? 

입안에서 조심스럽게 맴도는 말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비현실적이었지만, 비현실을 뺀다면 모든것이 완벽하게 설명되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다가,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다.

[김홍중]

 오늘은, 4월 19일 오후 5시. 예전에 같이 갔던 그 골목길 책방 기억나? 거기서 보자 :)

예전에…

 성화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오늘을 기억하는구나.’

 하지만 성화는 아직 그곳에 한 번도 간 적이 없었다.



7:00

좁은 골목길의 오래된 책방 앞,

 홍중은 성화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작은 종이봉투 하나를 들고, 책장 사이에서 조용히 성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홍중아. 

 그가 돌아봤다.

 익숙한 웃음. 그러나, 눈 밑의 그늘은 전보다 더 깊었다.

 왔구나. 오늘은 좀 늦었네? 

응. 미안, 길을 조금 헤맸어. 

괜찮아. 나 여기 자주 와. 너도 좋아할 것 같아서. 

성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책 냄새와 잔잔한 클래식 음악,

 그리고 책장 사이사이 그와 함께 서 있는 이 시간이 마치 오래된 기억처럼 편안했다.

 이거. 

 홍중이 봉투를 내밀었다.

 안에는 시집 한 권.

 성화가 며칠 전 읽고 있던 바로 그 시집이었다.

 …이거 어떻게 알았어? 

 홍중은 눈을 피했다.

 그냥, 너라면 좋아할 것 같았어. 

 또다시 같은 대답.

 그러나 성화는 이제 알고 있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감’도 아니다.

 기억이다.

그는 이미 이 모든 날을,

 이 순간을,

 겪어낸 것이다.

 …홍중아. 

성화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오늘은… 내가 먼저 물어볼게. 

홍중은 고개를 갸웃했다.

 뭘? 

 네가 어제, 아니… ‘내일’ 나랑 했던 말들. 기억나? 

그 순간, 홍중의 얼굴이 잠깐 멈췄다. 눈빛이 조용히 흔들렸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래. 너는 모르겠지. 아마 내일, 이 장면을 기억하게 되겠지. 



성화는 조심스레 그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체온이 전해졌다.

 우리가 지금,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는 거지? 난 어제를 살아가고, 넌 내일을 지나오고. 

홍중의 눈이 천천히 흔들렸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 손을 꼭 쥐었다.

 아니라고 말해도, 믿지 않을 거야. 

지금은… 말할 수 없어. 

 왜. 

 말하면, 너는 더 아플 거야. 그리고 난, 점점 더 널 잊게 될 테니까. 

성화의 눈가가 조금씩 젖어갔다.

 …언제부터 나를 잊기 시작한 거야? 

홍중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조용히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조금 구겨진, 낡은 노트 한 권이었다.

표지에 적힌 날짜.

2025.04.22 – 내가 너를 잊어가기 시작한 날.

 왜 이런 걸 쓰고 있었던 거야. 

 …기억은 점점 사라져. 내가 내일로 걸어갈수록, 너는 나한테서 멀어져.

 그래서… 기억해두려고 했어.

 다음 날의 나한테, 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내가 얼마나… 너를 사랑했는지. 

성화는 조용히 노트를 받아들었다.

 페이지마다 빼곡한 글씨.

 함께한 시간, 그가 웃던 순간, 성화가 좋아하던 말투와 표정.

 그가 지워가기 전에, 기억하려 애쓴 기록들이었다.

 언젠가는… 

 홍중이 조용히 말했다.

너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게 될 거야. 

 …그건, 네가 정한거야? 

 아니. 그건, 시간이 정해. 

성화는 노트를 조심히 가슴에 안았다.

 그리고 그를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엔, 이미 어딘가를 향한 이별의 기색이 고여 있었다.

 그러면, 우리… 

 …같은 날을 마주할 수 없는 거야? 

홍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화는 알았다.

 그들이 살아가는 시간은 서로를 향하지만, 닿을 수 없는 시곗바늘처럼 어긋나 있었다는 걸.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화는 결심했다.

닿을 수 없다 해도, 그를 기억하겠다고.

 지워지기 전에, 하나라도 더 오래, 마음속에 남기겠다고.

그래, 그날은 언젠가 반드시 온다.

 그러니 그는 오늘을, 가능한 천천히 보내고 있었다.

 그의 시간은 끝을 향해 가고 있고,

 성화의 시간은 시작을 향해 가고 있다.

두 사람의 시간은,

 12시를 중심으로 완전히 반대로 흐르고 있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성화는 작은 조명 아래 노트를 펼쳐 놓고 한 자 한 자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종이 위에 빼곡히 적힌 글자들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2025.04.21

 오늘 성화가 내 손을 잡았다.

우리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걷는 거지? 

 그가 그렇게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이 정답이라는 걸, 내일의 내가 기억할 수 있을까.』



『2025.04.20

 성화가 웃었다. 정말 오랜만에, 그가 환하게 웃었다.

 이 미소를, 잊고 싶지 않아.

 그런데 아마도 나는… 잊게 되겠지.

 성화는, 눈웃음이 정말 예쁘다.』



『2025.04.19

 성화가 내 얼굴을 찬찬히 바라봤다.

너 요즘 좀 이상해. 

 들켰다. 하지만 아직은, 그가 다 알지 못해서 다행이다.

 조금만 더. 오늘 하루만 더, 곁에 있고 싶다.』



성화는 종이를 넘길 때마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다.

 그의 시선은 점점 더 또렷해졌다.

 …너는 내일의 나를 위해 계속 기억하고 있었구나. 



노트는 멈추지 않았다. 하루 전, 또 하루 전.

 그는 계속해서 ‘성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점점 지워져가는 기억을 붙잡기 위해,

 잊고 싶지 않은 감정을 글자에 새겨가며.

성화는 무릎을 꿇은 채, 이불 위에 노트를 펼쳐놓은 채 조용히 속삭였다.

 그럼 이제… 내가 해줄게.

 내가 너를, 기억할게.

 네가 잊어가도, 난 잊지 않을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노트 옆에 조용히 펜을 하나 놓았다.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2025.04.22

 오늘, 나는 네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게 됐다.

 그리고 이제, 너의 시간을 추적할 거야.

 너의 발자국을 따라, 너를 기억하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08:00

며칠이 흐르고,

 성화는 그날의 대화를 곱씹으며 홀로 자취방 창가에 앉아 있었다.

 창밖의 하늘은 흐리고,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반사되고 있었다.

스마트폰 캘린더를 열어 그동안 만난 날짜들을 정리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단 한 번도 같은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그날 밤, 성화는 꿈을 꾸었다.

 짧고 어지러운 장면들.

 홍중이 눈물도 없이 웃으며 뒷모습을 보이고 있었고,

 그의 손에 들린 메모지에 성화의 이름이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꿈에서 깨어난 성화는, 눈앞이 뿌옇게 흐려진 것을 느꼈다.

 울고 있었다.

그 순간, 성화의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꺼내졌다.

 알 수 없는 감정이 가득 밀려왔다.

기억은 사라지지만, 사랑은 남는다면—

 그 사랑을 따라 진실에 닿을 수 있을까.

성화는 이제 알고 있었다.

김홍중은 단순히 ‘거꾸로’ 걸어간 것이 아니었다.

 그는 성화를 향해 걸어온 것이었다.




09:00

 성화야. 

 카페에서 만난 홍중이 먼저 말을 걸었다.

 언제나처럼 익숙한 미소였지만,

 오늘은 어딘가 어색했다.

 목소리의 높이, 손짓의 간격.

평소 성화에 대해 자세히 알던 홍중이 아니었다.

 아, 음료는 뭘로 할래? 혹시… 딸기 좋아했었나?

…응, 맞아. 

그럼 딸기라떼 하나랑… 나도 그걸로 할게. 

자리로 돌아온 홍중은 성화를 바라보며,

 애써 대화를 이끌었다.

 그의 눈빛은 혼란스러웠다.



‘아, 오늘이 그날이구나.’

 홍중이가 나를 잊어가는 그 날..

성화는 손을 꼭 쥐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웃었다.

 마지막처럼.



10:00

그날 이후 성화는 매일 기록을 남겼다.

 기억이 엇갈리고 감정이 교차하는 날들.

 그 안에서 그는 점점 확신하게 되었다.

우리는 12시를 중심으로 정반대 방향으로 흐르고 있어. 

그의 오늘은 나의 내일이고, 그의 어제는 나의 내일이었어. 

 그리고 결국, 어느 날,

 성화는 4월 22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 홍중이 오늘이 마지막이야 라고 말했던 바로 그 날.






11:00

4월 21일 밤.

 성화는 종이 한 장에 짧은 글을 썼다.

 그간 받은 모든 메모의 글씨와 어투,

 말투와 날짜를 비교하고,

 그가 어떤 순서로 성화를 기억해왔는지를 정리한 표 옆에,

 작은 글씨로 썼다.

당신의 처음이 나의 마지막이라면,

 그 처음에도 내가 있었으면 좋겠어.

잠들지 못한 채 아침을 맞이한 성화는

 다시 약속했던 장소로 향했다.

 마지막이라는 걸 알면서도,

 혹시, 혹시나—

 그가 오늘만큼은 기억하고 있기를 바랐다.



12:00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벤치에 앉은 홍중은,

 조용히 고개를 들고 성화를 바라보았다.

 …왔구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홍중은 성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건 곧, 오늘이 정말로 마지막이라는 뜻이었다.

 성화야. 

응. 

내일 우리 다시 만나면,

 그땐 네가 나보다 먼저 나를 사랑해주면 좋겠어. 

성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흘렀다.

 …그때, 나는 처음일 테니까. 

…괜찮아. 난 널 너무 많이 사랑했으니까. 그 기억으로 충분해. 

홍중이 조심스럽게 성화의 손을 잡았다.

성화의 손에 작은 메모리칩을 하나 주었다.

 서로의 온기를 손끝으로 기억하며,

 아무 말 없이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날, 성화는 기억을 다 가진 채,

 그의 마지막을 지켜봤다.

그리고,

 시계는 한바퀴를 돌아 처음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12시에서 출발한 각자의 시간이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정각으로 돌아왔다.



어둠이 가라앉은 방 안.

성화는 책상 위에 메모리칩을 올려두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노트북에 메모리칩을 연결하자마자, 자동으로 하나의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화면엔 홍중이 있었다.

익숙한 공간, 그의 자취방.

조명이 어두운 가운데에서도 그의 눈동자만은 이상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기억이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그건 홍중이 독백처럼 기록한 다큐 영상의 일부분이었다.

 짧은 장면마다 담긴 것은 모두 성화와의 일상이었다.

 카페에서 웃던 모습, 골목길을 걸으며 어깨가 닿았던 순간,

 성화가 피곤에 눈을 감고 그의 어깨에 기대던 장면까지.

「사랑은 기록이 아니라 감정이다.

 하지만 기록이 없으면, 감정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성화는 눈을 떴다.

 화면이 흐려질 정도로, 눈물이 그의 시야를 덮고 있었다.

 …기억하지 않아도,

 내가 널 사랑했다는 건, 변하지 않아. 

성화는 노트북을 덮고, 조용히 속삭였다.

 그리고 나도…

 시간을 거슬러서라도 널 다시 찾아갈게. 



한낮인데도 하늘은 어둑했고, 창밖은 무채색처럼 느껴졌다. 

작은 우산을 하나 챙겨들고 밖으로 나온 성화는 천천히 비내음이 나는 거리를 걸어갔다.

그에게로 가는 발걸음이 딱히 지루하진 않았지만, 딱히 집중도 되지 않았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들은 빗소리와 함께 씻겨 내려갔고, 마음은 저 멀리 카페 안쪽 밝은 빛에 자꾸만 가닿았다.

그때, 성화의 시야에 누군가가 자리잡았다.

짧은 곱슬머리에 진한 뿔테안경. 한 손에는 책을, 다른 손에는 책 한 권을 들고 앉아있는 남자가 보였다.

눈을 맞춰 가만히 내려다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괜찮다면, 여기… 앉아도 될까? 

조용한 카페 안에 성화의 낮은 목소리가 울려왔다.

앞에 앉은 남자가 끄덕거리자 성화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말 했다.

 김홍중 

익숙한 발음으로. 오래도록 알고 지낸 사람처럼.

 ...저기요,

 혹시, 저 아세요? 

성화가 눈을 마주치며 미소지었다.

 그럼 당연히 알지. 

 죄송해요 제가 기억이 안 나서 처음 뵙는 것 같은데요. 

천천히 어색한 대화가 오고갔다.

홍중은 성화에게 작은 질문들은 던졌지만 성화는 그저 알 수 없이 웃으며 바라볼 뿐이었다.

 시간이 됐네 이제 가야겠다. 

시계 바늘이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성화는 눈 앞에 놓은 작은 메모지에 글씨를 써내려갔다.

2025.04.22 

내가 너를 잊어가기 시작한 날.

-박성화-



성화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내일이면 오늘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할 거라는 것을. 홍중과 성화의 시계는 영원히 반대로 돌아간다는 것을.

12시에 올라섰던 각자의 시계바늘이 다시금 서로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