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섷] 다시 만난 피터 — 콩
안녕하세요 콩입니다. 이번에는 좀 도전적인 글을 써보았습니다. 여러분은 바다거북 스프 게임에 대해 아시나요? 간단히 설명하자면 복잡한 스토리의 어떤 이야기를 결말만 보고 그 결말의 전말을 추리하는 게임입니다. 오직 결말과 그 직전 일부의 상황만으로 홍중과 성화에게 어떤일이 있었던건지 한 번 상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2026.09.19.
kio 기 메노 빨쑤씨 뻔 이로 파토 콩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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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화제의 주인공이죠 생애 첫 장편 출간작으로 베스트셀러에 등단하신 박성화 작가님 모셨습니다.”
뜨거운 조명이 내리쬐는 모 방송국의 스튜디오에서 사람들이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성화가 수줍은 얼굴을 한 채 연신 허리 숙여 인사하며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진행자가 건네주는 마이크를 조심스레 받아 카메라에 인사했다. 잠깐의 상황 정리 후 정숙해진 스튜디오에서 진행자는 성화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며 인터뷰를 이어갔다.
“네 작가님 이번에 쓰신 [다시 만난 피터]가 첫 장편소설 이시라고”
“맞습니다. 간간이 단편소설로 모음집에 이름을 올리긴 했는데 이렇게 장편으로 소설을 써 출간한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몇 번이나 읽어봤지만 이 주인공들이 감정 묘사가 정말 사랑스럽거든요. 서로가 꿈에서만 보던 남자를 현실에서 마주치며 연인으로 발전하는 일상 판타지 로맨스, 물론 소재도 독특하지만 이 작품이 주목받게 된 가장 큰 특징은 아무래도 작가님의 남다른 표현력 덕분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 장면이 가장 마음에 들었는데요. 꿈에서만 보던 피터를 처음 마주친 마스의 표정 묘사와, 가슴 벅차게 전하던 ‘보고 싶었어, 피터’ 크으 그 장면을 생각하면 아직도 전율이. 작가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어…. 하하 저도 제 글이 이렇게 사랑받을 줄 몰랐어요. 제가 꿈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그저 글로 표현한 것 뿐인데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셔서 너무 감사할 따름입니다.”
“꿈이요?”
“네 이 소설의 주인공이 제 꿈에 항상 나오는 친구와 저에 관한 이야기예요. 그런 꿈을 꾼 지도 벌써 10년이나 됐네요. 매일 밤 잠에 들면 그 친구가 웃는 얼굴로 저를 반겨줘요. 소설에 나왔듯이 함께 손을 잡고 바다를 거닐거나 꽃이 지평선 너머까지 가득 찬 꽃 밭을 구경해요. 느긋하게 차 한잔하기도 하고요 저를 잘 아는 정말 가족 같은 친구 느낌이에요”
“그럼 그 장소들은 실제로 가보신 어떤 곳을 모티브로 하신 건가요? 독자들 사이에서 소설 속 내용과 비슷한 장소들이 가끔 SNS에 올라오기도 하던데”
“아뇨 그냥 꿈에서만 봤던 곳이에요 비슷한 꿈을 계속 꾸다 보니 세세하게 표현할 수 있어서 그렇게 보였나 봐요”
“몰입도를 높이는 디테일들은 작가님의 특별한 꿈속 경험 덕분이었군요. 다른 질문 한 번 드려볼게요. 글은 보통 언제 쓰시나요”
“아침에 눈 뜨면 바로 책상에 앉아서 글을 써요 꿈에서 깨고 몇 시간 동안은 꿈에서 느낀 그 감정들이 여전히 남아있거든요. 그 친구와 본 것 느낀 것 나눈 감정까지 전부, 눈을 뜨면 세세하게 기록하는데 어느 날 제 노트를 돌아보니 정말 소설 속 한 장면 같더라고요. 그래서 장편도 한 번 도전했던 거예요”
“마지막으로 그 특별한 친구의 이름을 혹시 여쭈어봐도 되나요?”
“하하 막상 말하려니 조금 부끄럽네요. 그 아이 이름은..”
김…홍..ㅈ 지지직
“아이 또 말썽이네”
남자가 한숨을 쉬며 지직거리는 라디오를 탁탁 쳤다. 10년 즘은 되어 보이는 오래된 모델이라 그런지 말썽이었다. 노이즈만 들리다 몇 번 더 때리니 신호가 잡혔는지 다시 방송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진행자의 인사를 끝으로 엔딩음악이 흘러나왔다. 중간 내용 다 못 들었는데… 남자는 병원 배드에 걸터앉아 허벅지에 올려놓은 박성화의 책을 내려보다 이내 제목 밑의 작가 이름을 엄지로 쓰다듬었다. 잠시 눈을 감고 있으니 간호사가 품에 클립보드를 안고 들어왔다.
“김홍중 님, 퇴원 수속 도와드릴게요.”
네, 남자는 대답하며 곱게 접혀있는 환자복을 내려다보다 일어나 가방을 대충 걸친 후 절뚝절뚝 걸어 나갔다.
맑은 바다가 보이는 어느 카페, 성화는 익숙한 듯 음료 두 잔을 시켜 창가에 앉았다. 눈을 감고 시원한 파도 소리를 감상하고 있으니 드르륵 누가 의자를 꺼내며 맞은편에 앉았다. 성화는 입꼬리 슬며시 밀어 올리며 눈을 떴다.
“보고 싶었어, 성화야”
“나도”
성화는 언제나 처럼 홍중에게 음료를 건넸다. 홍중이 잔을 잡은걸 확인하자 성화도 빨대를 입에 물었다. 시원한 음료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감각이 생생했다. 홍중은 음료를 마시는 성화에게 언제나 처럼 먼저 입을 열어 재잘재잘 떠들었다. 별거 없는 일상의 내용이었지만 성화는 홍중의 눈만 마주쳐도 웃음이 나왔다. 평소처럼 즐거운 대화가 진행되다보니 슬슬 해가 수평선 너머로 몸을 숨기기 시작했다. 성화는 바다로 시선을 옮겼다. 예쁘다. 읊조리듯 말했다.
“성화야, 우리 바다 보러 갈래? 진짜 바다”
음? 평소와는 다른 흐름에 성화가 눈썹을 들썩였다. 지금쯤이면 해변으로 손을 잡고 나가야 하는데 이상하다며 성화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홍중은 그런 성화의 표정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성화를 향해 웃었다. 여태 보던 얼굴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정했다.
“보고 싶어 성화야”
허어억…!! 온 몸이 식은 땀으로 젖은 채 성화가 꿈에서 깼다. 꿈은 매일이 비슷한 내용이었다. 바닷가 앞 카페, 꽃 밭 그리고 홍중의 집. 그런데 오늘은 이상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진짜 바다’ 그게 뭘까 이런 적은 없었는데 고민하며 침대에서 벗어나 늘 하던 것 처럼 책상에 앉았다. 노트를 펼치고 펜을 들어 꿈속의 내용을 복기했다. 따스한 카페 내부, 청량한 파도 소리 그리고 보고 싶다며 환하게 웃는 김홍중
주룩 성화의 양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어라 이런 적이 없는데 눈물을 애써 닦았지만 알 수 없는 그리움에 사무쳐 그칠 기미가 없었다. 홍중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귓가에 맴돌았다. 다정하고 사랑해 마지않는 달콤한 속삭임 눈물방울의 크기는 점점 커져 성화는 어느새 손바닥에 고개를 파묻고 엉엉 울고 있었다.
눈물을 그치고 나니 힘이 없었다. 글을 쓰긴 커녕 아무것도 하기 싫어 핸드폰을 집어 들고 거실로 나왔다. 소파로 널브러져 핸드폰을 확인 한 순간 핸드폰이 한 번 울렸다. 메일함을 열었다.
박성화 작가님,
소설은 잘 읽었습니다. 소설 속에 묘사된 바다 앞 카페가 제가 잘 아는 곳과 비슷해 주소 보내봅니다. 한 번 가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이 (메일)주소는 학창 시절에나 쓰던건데.. 어떻게 알고 보낸 건지 모르겠는 메일이었고 발신인도 알 수 없었다. 처음 보는 주소였다. 평소 같으면 무시하고 넘겼겠지만 오늘 꾼 꿈부터 이상했다. 뭔가 꼭 확인이라도 해야만 할 것 같은 이상한 직감, 카페 주소를 확인하려 아래로 스크롤 하니 함께 온 사진 파일이 있었다. 반신반의 하면서도 손가락은 정직하게 파일을 다운받아 열어보았다. 그리고는 모니터 속 모습에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거짓말..”
소파에 늘어진 몸을 일으켰다. 정말 꿈속에서만 보던 그 카페였다. 항상 보던 그 자리였다. 똑같은 음료였고 창밖으론 푸른 바다가 끝도 없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다. 무조건 가야 한다. 성화는 그 길로 바로 차 키를 챙겨 출발했다. 단 1초도 지체할 수 없었다.
몇 시간 후, 집에서 꽤 먼 장소였지만 잠깐의 쉼도 없이 단 번에 도착했다. 주차 하자마자 해변가로 달려갔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장면이 완벽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건지 놀람이 가득했다. 홍중과 함께 손 잡고 거닐던 모래사장을 혼자 걸어보았다. 신발 사이로 들어오는 파고드는 고운 질감과 간간이 보이는 소라 껍질, 짭짤한 바다향 몇 번이고 와본 것 같은 익숙함이었다. 적응되지 않는 감각에 고개를 연신 흔들며 걷다 보니 어느새 그 카페였다. 성화는 신발 벗어 대충 털어내고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카운터 앞에 섰다. 익숙한 얼굴의 점원에게 늘 주문하던 음료를 부탁했고 금세 나온 음료 두 잔을 들고 바다가 잘 보이는 구석 자리로 가 앉았다. 뭔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늘 하던 것처럼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시원한 파도 소리를 듣고 있으니 맞은편에서 드르륵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설마 꿈일까 테이블 밑으로 허벅지도 꼬집어 봤지만 꿈이 아니었다.
눈을 슬쩍 뜨며 맞은편에 앉은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 성화가 탄성을 내뱉었다. 익숙한 옷과 익숙한 몸 게다가 향까지 슬며시 미소 지은 입꼬리는 분명 오늘 봤던 아름다운 미소였다. 고개를 더 들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김홍중, 꿈 속의 그 김홍중, 그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성화에게 인사를 건넸다.
“보고 싶었어, 성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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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쪽을 새까맣게 불태운 오크통 안에서 꼬박 10년을 버틴 위스키.
잔 안에서 찰랑이는 러셀 리저브 10년의 호박색 액체는 깊고 묵직했다. 그 기나긴 세월 동안 나무의 진액과 불의 냄새를 묵묵히 머금고 숙성된 독주. 고작 몇 년 만에 바닥을 드러내며 차갑게 식어버렸던 우리의 연애와는 퍽 대조적인 무게감이었다.
창밖으로는 시베리아의 매서운 눈보라가 쉴 새 없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연인 시절, ‘러브 오브 시베리아’에 취해 삼 년 뒤 이 낯선 땅에서 만나자고 속삭였던 치기 어린 약속. 서로가 절대 오지 않을 거라 짐작했으면서도 기어이 이국의 낡은 바 한구석에 홀로 앉아있는 꼴이 스스로도 우스웠다.
영하의 러시아 130번 거리. 끝이 나버린 구연인을 기다린다는 미친 짓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술은 없었다.
45도의 액체를 천천히 목구멍으로 넘겼다. 혀끝에 끈적하게 감기는 다크초콜릿의 단맛 너머로, 속을 빈틈없이 데우는 ‘켄터키 허그’의 황홀경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차갑게 얼어붙은 몸에 억지로 열기를 불어넣으며 위안을 얻던 바로 그때였다.
식도를 태울 듯 흘러내리던 위스키의 열기도, 핏줄을 타고 흐르던 나른한 취기도 거짓말처럼 차갑게 얼었다. 찬 바람과 함께 쏟아져 들어온 것은 시린 러시아의 겨울이 아니었다.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가장 먼저 시야에 박혀온 것은 눈이 시리도록 낯선, 하얀색에 가까운 탈색모.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이질적인 머리칼 아래로 드러난, 시선을 빼앗길 만큼 선이 고운 얼굴.
오지 않을 줄 알았던, 박성화였다.
순간 고개가 돌아갔다. 이미 나를 본 게 분명한 그의 표정이었으나 나를 알아보지 못했으면 했다. 무엇이 두려웠던 거지? 지금 생각해도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 전연인을 마주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아니면, 혹여나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남자가 그의 새연인일까 하는 걱정? 아니면 둘 모두였을까.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삼 년을 잊었다고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해온 대가를, 지금 이 순간 한꺼번에 치르고 있다는 것.
성화는 내가 앉은 곳으로부터 두 칸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고작 바 스툴 두 개가 비워진 거리였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그러나 아득하게 벌어진 간극.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모든 것이 읽혔다. 가죽 장갑을 벗어 바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소리, 두꺼운 코트 자락이 스치며 훅 끼쳐오는 서늘한 눈 냄새. 감각의 촉수는 온통 오른쪽을 향해 뻗어 나가고 있었으나 몸은 정면의 진열장만을 향해 굳어 있었다.
섣불리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숨 막히는 배려인지, 혹은 관망인지 모를 그 기묘한 침묵이 오히려 목을 조여왔다. 곪아버린 감정들이 속수무책으로 요동치고 있는데, 겉으로는 평온한 척 잔만 어루만지는 꼴이라니.
곧 낮고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러셀 리저브 10년. 스트레이트로. 이방인들로 가득한 러시아의 변두리 바에서, 하필이면 내 잔에 담긴 것과 똑같은 버번위스키를 고르는 저의가 무엇인가. 투명한 글라스에 호박색 액체가 채워지고, 잔이 목조 테이블에 부딪히는 둔탁한 마찰음이 유난히 크게 울렸다.
각자의 잔만 응시했다. 마치 애초에 일행이 아니었던 타인처럼, 혹은 세상에 오직 둘만 남겨진 사람처럼. 속이 다시금 뜨겁게 들끓기 시작했다. 먼저 일어서서 도망쳐야 할지, 아니면 차라리 멱살이라도 쥐고 흔들어야 할지. 수백 가지의 충동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나무 테이블 위로 무언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두 칸의 거리를 넘어, 정확히 내 잔의 바로 옆까지 밀려온 그의 투명한 글라스였다.
“혼자 마시면,”
시야의 가장자리로 툭 떨어지듯 닿아오는 목소리. 삼 년 전보다 조금 더 낮게 가라앉은, 그러나 너무나도 익숙한 음색이었다.
“그거 엄청 쓰고 떫을 텐데.”
반사적으로 시선이 얽혔다. 성화의 모습이 온전히 시야에 들어찼다. 낯선 백금발 아래, 여전히 사람을 기만할 정도로 선이 고운 얼굴이 희미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시린 한기를 품은 채 비스듬히 뻗어온 그의 시선은 집요했다.
그 입술에서 흘러나온 농담 같은 한마디에,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끈이 툭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매일 밤 내 속을 썩게 만들었던 원흉치고는 지나치게 여유로운 태도 아닌가. 억눌러왔던 원망과 반가움이 잔뜩 뒤엉켜 목끝까지 차올랐으나 입 밖으로 튀어나온 것은 어린애 같은 날 선 방어기제였다.
“누가 혼자 마신대?”
참으로 유치하고 얄팍한 거짓말이었다. 영하 20도를 밑도는 이 시베리아의 매서운 칼바람을 뚫고, 그것도 하필 약속했던 130번 거리의 이 다 쓰러져가는 바에서 일행을 기다릴 리 없다는 건 그가 가장 잘 알 터였다.
성화는 내 가시 돋친 대답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호선을 조금 더 짙게 그리며, 턱을 괴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러고는 밀어냈던 제 몫의 잔을 다시 집어 들며 몸을 일으켰다.
두 칸의 거리가 단숨에 무너져 내렸다. 내 바로 옆자리의 체온과 코트 자락에 묻어온 서늘한 향이 한데 섞여 훅 끼쳐올 만큼의 거리에 성화가 다시 자리를 잡았다.
“그래? 그럼 일행 오기 전까지만 합석하지, 뭐.”
“야, 박성화.”
“너 나 볼 때마다 미간 구기는 거 여전하네.”
“잘 지냈어? 난 너 하나도 안 보고 싶었는데.”
거짓말. 나를 올곧게 꿰뚫어 보는 저 시선이, 매끄럽게 호선을 그린 입술과 달리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저 손끝이 전부 거짓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거짓말.”
결국 튀어나온 것은 비아냥이 아닌, 허탈함이 섞인 무언가였다. 나는 테이블 위로 얽힌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그의 손끝을 향해 턱짓을 했다. 안 보고 싶었던 것치고는,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갔잖아.
내 지적에 성화의 시선이 잠시 제 손등으로 향했다. 꽉 쥔 주먹 탓에 하얗게 질린 마디 위로 푸른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허공으로 흩어지는 옅은 숨결에서 쌉싸름한 위스키 향이 배어 나왔다.
“여기가 좀 춥잖아.”
핑계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바 안은 히터가 터질 듯 돌아가고 있었고, 무엇보다 지금 우리 둘 사이의 좁은 틈을 채우고 있는 건 숨이 막힐 듯 뜨겁고 팽팽한 열기였으니까.
성화는 더 대꾸하는 대신 단숨에 제 몫의 잔을 비워냈다. 길고 날렵한 목선이 느릿하게 움직이는 양이 적나라하게 시야에 박혔다. 빈 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은 그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독하네, 이거.”
“그래? 위스키 입문자용이라는데.”
“네가 없어서 그동안 술이 좀 줄었나 봐.”
“머리는 왜 이 꼴이야. 너답지 않게.”
“그냥. 좀 변하고 싶었어.”
“혹시라도 네가 나를 다시 봤을 때, 그때의 나를 떠올리지 않았으면 해서.”
가슴이 기분 나쁘게 쿵덕거렸다. 과거의 자신을 지워내기 위해, 탈색약을 머리에 들이부으며 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를 숨 막히게 했던 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던 너였는데.
허공으로 물러난 내 손길에 성화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쓸데없는 짓을 했네. 어차피 얼굴은 그대론데.”
동요하는 속을 들키지 않으려 애써 목소리에 가시를 세웠다. 성화는 작게 실소를 터뜨릴 뿐 상처받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긴 하네. 그래도 아까 못 알아본 것 같던데. 그거면 절반은 성공한 거지.”
“착각하지 마. 나 너 보러 온 거 아니야.”
갈 곳을 잃고 헤매던 시선이 텅 빈 위스키 잔에 가닿았다.
“그냥, 여행 온 김에 들른 것뿐이니까.”
누가 들어도 변명이었다. 내 알량한 자존심이 만들어낸 형편없는 도피였으나, 성화는 기꺼이 그 허술한 거짓말에 속아주기로 한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나도 그냥 여행 온 거야. 신기하네, 여기서 이렇게 마주치고.”
그는 다시 테이블 위로 턱을 괴며 희미하게 웃었다. 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순응이 또다시 내 안의 무언가를 긁어내렸다. 이 좁은 바에 더 마주 앉아 있다가는, 간신히 쌓아 올렸던 이성의 벽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나는 남은 것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다크초콜릿의 단맛은 온데간데없고, 식도를 찢을 듯한 알코올의 독기만이 선명하게 남았다.
“먼저 일어날게.”
스툴을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코트를 챙겨 입는 내 등 뒤로, 다급하게 스툴이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데려다줄게. 밖은 위험해.”
“됐어. 괜찮아.”
등 뒤로 다가오던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는 것이 느껴졌다. 밤공기를 깊숙이 들이마시며 잰걸음으로 눈밭을 걸었다. 쫓아오지 말라는 내 모진 말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로 우연한 여행객의 태도를 지키려는 것인지, 성화는 따라 나오지 않았다.
그 감정이 상실감이라고 확언할 수조차 없는 밤이었다. 주머니 속엔 내일 아침 모스크바를 떠나 바이칼로 향하는 환바이칼 열차 티켓 한 장이 쥐여 있었다. 어차피 내일이면 이 우연도 끝일 테니까. 나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중얼거렸다.
숙소의 철문을 닫고 자물쇠를 걸어 잠그고 나서야, 억눌러왔던 숨이 터져 나왔다. 등을 문에 기댄 채 주르륵 미끄러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라디에이터가 윙윙거리며 뿜어내는 건조한 열기만이 비좁은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온몸이 펄펄 끓는 듯 뜨거웠다.
외투도 벗지 못한 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눈을 감자마자 망막 위로 그의 머리칼이 보이는 듯했다.
혹시라도 네가 나를 다시 봤을 때, 그때의 나를 떠올리지 않았으면 해서. 바닥으로 낮게 깔리던 그 목소리가 귓가에 엉겨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동안 그를 잊어보겠다고 발버둥 쳤고, 이국땅에서 보자며 스치듯 했던 그 치기 어린 약속 따위 진작에 바스라졌을 것이라 생각해왔다. 그럼에도 그는 이를 기다리며 제 머리칼에서 색을 전부 빼내고 나타났다. 내가 과거의 자신을 보고 숨 막혀 할까봐. 그 거대한 사랑을 뒤집어쓴 채.
비틀거리며 욕실로 들어가 수도꼭지를 틀었다. 얼음장 같은 물을 양손에 받아 얼굴에 끼얹었다. 핏발 선 눈동자가 거울 속에서 나를 마주했다. 형편없었다.
차디찬 물방울이 턱을 타고 떨어지는 것을 보며, 삼십 분 전 바에서 내가 내뱉었던 변명들을 곱씹었다. 속이 훤히 보였다.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그 따위 말이었다. 그리고 성화는 그 어설픈 가시를 기꺼이 맨손으로 쥐어주었다.
침대로 걸어가 털썩 쓰러지듯 누웠다. 무엇이 그렇게 두려워서 도망친 걸까.
나는 늘 버거웠을지도 모른다. 상처받은 티를 내보이지도 않은 채 그저 내 모든 것을 수용해 버리는 그 헌신이 나는 늘 아팠다. 상처를 주려 작정하고 찌른 칼날조차 제 속으로 깊숙이 밀어 넣으며 내 손이 다치지 않았는지만을 살폈다. 성화는, 아마도, 제가 내게 주고픈 사랑이 너무 깊어 그 안에서 곪아버렸을지도 모른다.
... 쓸데없는 생각이었나. 뒤척이며 주머니 속에 쑤셔 두었던 티켓을 꺼내 들었다. 기차에 오르기만 하면, 나는 다시 그를 놓아줄 수 있다. 아까 바에서 나를 쫓아 나오지 않았던 것처럼, 그는 선을 지킬 것이다.
침대 헤드에 몸을 웅크린 채 무릎을 끌어안았다. 눈을 감아도, 떠도 온통 성화뿐이었다.
새벽의 이르쿠츠크 역은 안개와 매서운 추위로 빈틈없이 짓눌려 있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밤을 지새운 터라 관자놀이가 깨질 듯 욱신거렸다. 발걸음을 재촉해 환바이칼 열차의 플랫폼으로 향하는 내내, 손의 티켓 한 장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빨리 이곳을 뜨고 싶었다. 그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싶었다. 그러나 승강장 입구에 다다랐을 때,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구식 열차를 배경으로 서 있는 커다란 인영.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도 달빛처럼 시리게 빛나는 머리칼.
그는 두꺼운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고는 플랫폼으로 걸어 들어오는 나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내가 이 새벽 기차를 탈 것을, 아니, 비겁하게 도망칠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속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여기가 어디라고 따라와. 내 목소리는 정말이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성화는 주머니에서 천천히 손을 빼내어 내 눈앞에 내밀었다. 그의 길고 하얀 손가락 사이에는 바이칼 호수로 향하는 2인실 쿠페 티켓 두 장이 들려 있었다.
“어차피 목적지는 같잖아.”
덤덤하게 떨어지는 음성이 칼바람을 타고 귓가를 때렸다.
“네가 바이칼로 갈 거라는 것쯤은 알아. 꼭 가보자고 했었으니까.”
기가 막혔다. 삼 년 전 침대 위에서 스치듯 나누었던 그 실없는 말들을 대체 어디까지 파편처럼 주워 담아 안고 살아온 걸까. 억장이 무너지는 동시에 무거운 그의 애정이 다시금 숨통을 조여왔다. 표를 빼앗아 눈밭에 흩뿌리고 뒤돌아갈까 하는 충동이 일었지만, 곧이어 발차 경적 소리가 내 발목을 붙잡았다.
우리가 배정받은 곳은 2인용 객실이었다. 미닫이문을 닫자 적막과 미적지근한 히터의 열기만이 좁은 공간을 채웠다.
내 맞은 편, 1층 침대 한구석에 자리를 잡은 성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객실 안은 숨이 막힐 정도로 고요했다. 기차 바퀴가 선로를 마찰하는 소리만이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올 뿐이었다. 침묵의 부피가 너무 커서 산소가 희박해지는 기분. 창밖으로는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카만 어둠과 끝을 알 수 없는 자작나무 숲이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시야에 그를 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성화의 시선이 온전히 나를 향해 있다는 것을. 차창 유리에 흐릿하게 반사된 그의 실루엣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 조용한 시선이 뒷목을 타고 내려와 움츠러든 어깨를 훑고, 불안하게 꼼지락거리는 내 손끝에 머물렀다. 살갗에 닿는 시선의 감각이 선명해 마치 손에 잡힐 것만 같았다. 차라리 원망 어린 눈빛으로 노려봐주지.
히터의 열기 때문인지, 아니면 저 시선 때문인지. 숨쉬기가 점점 벅차올랐다. 말라붙은 입술을 축이며 유리창에 이마를 기댔다. 유리의 냉기가 닿았으나 맥박이 뛰는 관자놀이의 열기를 식히기엔 부족했다.
“그렇게 구석에서 빤히 좀 보지 마. 사람 숨 막히게.”
참지 못하고 고개를 홱 돌려 쏘아붙였다. 날 선 목소리에도 성화는 어젯밤 바에서 그랬던 것처럼, 기죽은 기색 하나 없이 그저 희미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릴 뿐이었다.
“너 편하게 나름대로 자리 양보하고 있는 건데.”
나를 질리게 했던 건 늘 저거였다. 겉으로는 여유로운 척, 농담인 척하면서도 결국 그 모든 신경은 온전히 내게만 쏠려 있는 저 맹목적인 집중. 이 고립된 공간 안에서 다시금 나를 향해 쏟아지는 그 묵직한 시선을 마주하고 있자니 두려움과 동시에 갈증이 등줄기를 타고 기어올랐다.
차창 밖으로 끝없는 어둠이 밀려들고 있었다. 이건 위험했다. 도망치는 것으로 끝낼 수 있었던 삼 년 전보다 훨씬 더, 끊어내기 힘든 감정이었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채, 나는 신경질적으로 입술 안쪽을 씹었다. 방금 전 내가 내뱉은 말이 허공에 부딪혀 다시 내게로 돌아와 박히는 기분이었다.
사실 나는 그렇게 여유롭고 통제력이 강한 부류의 인간이 못 되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예민하고, 상처받는 것에 겁이 많아 차라리 먼저 가시를 세워버리는 쪽이었다. 방금 느꼈던 그 기이한 우월감의 정체도, 실은 이 버거운 상황을 어떻게든 감당해보려 내 무의식이 만들어낸 얄팍한 방어기제에 불과했다.
등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내 무릎 위로 조심스럽게 무언가가 덮였다. 성화가 제 캐리어에서 꺼낸 두툼한 담요였다.
“창가 쪽은 외풍 들어서 추워. 덮고 있어.”
닿을 듯 말 듯한 조심스러운 손길이 내 무릎 언저리에 머물렀다 떨어졌다. 이런 식이었다, 늘. 제 몫의 짐은 단 한 번도 내려놓지 않았다.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웅크리는 그 소리 없는 다정함에, 나는 담요를 걷어내지도 못한 채 미련하게 주먹만 꽉 쥐었다. ... 이래서 도망쳤던 건데. 바보처럼 또 이 남자의 반경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는 자책감이 밀려왔다.
슬류댠카 역입니다. 정차 시간은 15분입니다. 러시아어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기가 무섭게, 나는 코트 주머니에 든 담배와 라이터를 움켜쥐고 도망치듯 객실을 빠져나왔다. 도무지 그 미적지근한 히터 열기와 얽혀오는 시선을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드문 플랫폼 끝자락으로 걸어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러나 아무리 부싯돌을 튕겨도 불꽃은 위태롭게 흔들리다 이내 꺼져버리기를 반복했다. 아, 진짜…. 빨갛게 언 손가락으로 연거푸 라이터를 켜대며 신경질을 부리던 찰나였다.
사납게 몰아치던 눈보라가 거짓말처럼 멎었다. 내 뒤로 바짝 다가선 누군가가 제 넓은 등으로 바람막이를 자처하고 선 탓이었다. 놀라 고개를 들기도 전에, 꽁꽁 얼어붙은 내 두 손 위로 손이 겹쳐졌다.
“바람 불잖아.”
뒤에서 나를 감싸 안다시피 한 자세로, 성화가 내 손을 쥔 채 라이터의 불씨를 지켰다. 불꽃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따뜻하게 일렁였다.
불은 붙었으나 연기를 들이마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불을 붙여준 뒤에도 성화는 겹쳐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얼어붙은 내 손가락 마디마디를 녹여주려는 듯, 조금 더 힘을 주어 꾹 쥐어올 뿐이었다.
“누가 이런 거 해달래?”
“손이 차길래.”
그의 뺨이 가까웠다. 백금발이 바람에 흩날리며 내 이마를 간지럽혔다. 어젯밤 술집에서 마셨던 러셀 리저브의 독한 알코올 기운이 여태 남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와 닿은 손끝부터 온몸으로 뜨거운 피가 도는 기분이었다.
너, 정말... 짜증 나게 하는 데 뭐 있어. 성화는 내 어깨너머로 웃으며 입에 문 담배를 가볍게 톡 쳐주었다.
나는 결국 내 손을 감싸 쥔 그의 커다란 두 손을 뿌리치지 못한 채, 애꿎은 담배 연기만 차가운 허공으로 길게 뱉어냈다.
안내 방송과 함께 경적 소리가 울렸다. 나는 타들어 간 담배꽁초를 비벼 끄고는 서둘러 열차에 올랐다. 등 뒤로 바짝 붙어오던 온기가 떨어져 나가자마자, 한기가 다시금 피부를 찌르듯 파고들었다. 하지만 좁은 객실 안으로 돌아와 마주 앉은 후에도, 바람을 막아주며 두 손을 겹쳐 쥐었던 그 단단한 체온은 손끝에 끈질기게 들러붙어 있었다.
열차가 다시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유일한 소음이라고는 규칙적인 선로의 마찰음과 건조한 히터 소리, 그리고 내 반대편에 앉은 그의 고요한 숨소리가 전부였다.
견고한 적막을 깬 것은 성화였다. 그가 제 짐가방에서 익숙한 모양의 병을 꺼내 작은 간이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그걸 챙겨왔어?”
“어제 바텐더한테 남은 거 병째로 팔라고 했지.”
성화는 플라스틱 컵 두 개를 꺼내 묵직한 호박색 액체를 따랐다. 좁은 객실 안으로 바닐라와 캐러멜, 그리고 짙은 오크나무 향이 훅 끼쳐왔다.
건네받은 잔을 망설임 없이 단숨에 들이켰다. 차라리 취해버리는 편이 나았다. 맨정신으로는 이 좁은 공간에서 나를 향해 쏟아지는 저 시선을 감당할 재간이 없었으니까.
“천천히 마셔. 그러다 체해.”
테이블 위로 턱을 괸 성화가 낮게 입을 열었다. 알코올 기운이 훅 끼쳐오는 다정한 핀잔에 나는 대꾸 없이 빈 플라스틱 잔을 내려놓았다.
단단하게 세워두었던 방어기제가 알코올에 속절없이 녹아내리며 등받이에 기댄 몸이 조금씩 나른해졌다. 무겁게 가라앉은 적막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술기운이 오른 탓인지, 아니면 좁은 의자가 불편했던 탓인지 성화는 아예 테이블 위로 상체를 무너뜨리듯 엎드렸다. 겹쳐진 제 두 팔 위로 얼굴을 묻은 채, 낯선 백금발을 흐트러뜨리며 나를 올려다보는 시선이 어딘가 눅눅하게 젖어 있었다. 기차가 선로를 굽이치며 흔들렸고, 엎드려 있던 성화는 테이블 위로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허공을 가르고 다가오는 손. 그런데도 나는 피하지 않았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알코올 탓인지 몸이 마비된 것처럼 굳어버렸다.
“피할 줄 알았는데.”
성화는 테이블에 얼굴을 묻은 채 앓는 소리로 웅얼거렸다. 나는 내 뺨에 닿은 그의 체온을 기꺼이 받아내며 비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 취했나봐. 나 역시 얼마나 형편없이 허물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너는 머리를 이 꼴로 하고 와서도, 여전히 사람 숨 막히게 하는 법을 아네.”
“불편해?”
“어, 짜증 나.”
부러 모진 말을 해댔다. 그러나 내 목소리는 조금 전 마신 위스키처럼 끈적하게 늘어져 있었고, 나를 감싼 그의 손길을 차마 밀어내지도 못한 채 뱉는 폭언은 그저 투정에 불과했다.
성화의 짙은 눈동자가 느릿하게 깜빡였다. 내 뺨을 쥔 그의 커다란 손은 여전히 온기를 잃지 않은 채, 부서질 듯 조심스럽게 내 피부를 쓸어내리고 있었다.
“네가 밀어내면 언제든 밀려나 줄게. ”
기꺼이 나를 위해 또다시 버려지고 상처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선언. 나의 비겁함마저 전부 품어 안겠다는 그것은 미련하리만치 순수하고 거대했다.
“... 졸리다. 그만 자자.”
잠이 올 리 없었다. 나는 또다시 무력했다. 나는 그냥 눈을 감았다.
열차는 정오가 다 되어서야 우리를 종착지에 토해냈다.
리스트비얀카 마을에 당도했을 때, 우리를 반긴 것은 안개가 걷힌 끝없는 얼음 사막이었다. 나는 묵묵히 앞을 향해 걸었다.
단단하게 언 빙판 위로 쌓인 눈을 밟는 소리만이 무겁게 울렸다. 내 뒤로는, 내가 밀어낸 세 걸음의 거리를 유지하며 성화가 걷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달려와 내 뺨을 감싸 쥐고 싶을 텐데. 제 맨손을 주머니 속에 쑤셔 넣은 채 내 그림자만 밟고 있었다.
... 그가 내게 주려던 그 사랑을, 제 살이 깎여나가는 줄도 모르고 내 모든 것을 수용해버리던 그 헌신이 버거워 도망쳤음에도 나는 왜 자꾸만 뒤를 돌아 애정 속으로 추락하고 싶은 건지.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빙판의 얕은 굴곡을 미처 보지 못한 내 발끝은 미끄러졌고, 이내 나를 감싸 안은 그의 팔은 떨렸다. 넘어질 뻔한 나를 잡아주었다기엔, 나를 옭아맨 그 품이 너무도 절박하고 애달파서.
흉통이 크게 부풀었다 가라앉기를 몇 번. 귓바퀴에 닿을 듯 머물던 그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 홍중아.”
온기가 떨어져 나가는 속도는 느렸다. 내 곁에 머물고 싶은 본능과 이성이 충돌하는 듯, 그의 손끝이 내 코트 자락을 스치며 멀어졌다. 왈칵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참아내느라 차마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너무 멀리 가지 마.”
미세하게 얼음에 균열이 가는 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울렸다. 그 숨 막히는 고요 속에서, 성화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눈길 위로 내려앉았다.
“있잖아,
우리 왜 헤어졌더라.”
“그냥.”
“감정이 식어서.”
... 넌 화를 낼까. 아니면 이대로 뒤돌아 가버릴까. 차라리 나를 욕하며 떠나주기를 바랐으나, 등 뒤에서 들려온 것은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 같은 옅은 한숨 소리뿐이었다.
“거짓말.”
귓가로 흩어지는 목소리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홍중아, 나는, 널 다시 만나면 묻고 싶은 게 참 많았는데.”
물기를 잔뜩 머금은 음성이 흩어졌다. 빙판을 딛고 선 두 발이 금방이라도 까마득한 심연으로 꺼져 내릴 것만 같았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는 저 말 속에는 수만 가지의 원망이 깃들어 있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귓바퀴를 파고드는 그의 목소리에는 그 흔한 가시 하나 돋아있지 않았다.
그의 다정함. 나를 기어이 질식하게 만들고야 말았던 그 무결함.
그날도 너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내가 말도 없이 약속 시간에 세 시간이나 늦었을 때도, 기껏 한 달 전부터 예약해 둔 저녁 약속을 피곤하다는 핑계 하나로 일방적으로 취소했을 때도. 너는 굳은 얼굴로 화를 내는 대신, 외투에 쌓인 차가운 눈을 털어내며 내 어깨에 먼저 네 코트를 걸쳐주려 했다. 제 시간과 기대가 무참히 어그러졌음에도, 너는 그저 내가 추위에 떨지 않는 것에만 안도하고 있었다.
뾰족하고 모난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유일한 안식처. 내가 어떤 꼴이어도, 얼마나 추악해져도 떠나지 않을 거라는 거대한 안전지대. 내가 내어미는 가시까지도 기꺼이 제 맨손으로 감싸 쥐며 괜찮다고 다독여주는 사람.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느끼고 있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박성화라는 사람의 형체는 점점 옅어지고 있다는 것을.
나를 옭아매는 집착이나 구속과는 달랐다. 내가 밀어내면 순순히 물러났고, 내가 필요로 하면 기꺼이 네 자리를 내어주었다. 그속에서 너는 네 취향도, 네 감정도, 심지어 마땅히 쏟아내야 할 화와 상처마저 묵묵히 지워내고 있었다. 나를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로, 너는 끊임없이 너 자신을 비워내고만 있었다.
그것이 숨이 막힐 듯 무서워져 기어이 잔인한 말을 뱉어냈던 그날 밤의 정적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너는 왜 나한테 화를 안 내?”
내 어깨에 코트를 덮어주려던 성화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화를 내야 해?”
“어. 화를 내야지.”
“내가 세 시간이나 늦었고, 네 시간 다 망쳤고, 방금도 이렇게 말도 안 되는 핑계로 이기적이게 굴고 있잖아.”
나를 향해 쏟아져야 할 원망을 기다렸으나 성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곤란한 기색으로 그저 나를 달래려 애쓰는 그 고요한 얼굴이 나를 벼랑 끝으로 밀어 넣었다. 나는 바스라질 것 같은 숨을 뱉으며 그를 몰아붙였다.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해도 왜 다 괜찮다고 해? 내가 너한테 상처를 주고 엉망으로 굴어도... 왜 끝까지 내 탓을 안 하는 건데.”
성화는 손에 쥐고 있던 코트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가 아주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가 괜찮지 않은데, 내가 어떻게 화를 내.”
눈앞이 아득해졌다. 네가 아프면 나는 상처받을 자격조차 없다는 그 맹목적인 이해. 내가 너를 찌르고 피를 내도, 너는 끝내 그 아픔을 네 탓으로 돌리리라는 확신.
그 완벽한 희생을 감당하기에 나는 너무도 얄팍하고 자존심만 센 인간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네가 나라는 인간에게 갉아먹혀 텅 빈 껍데기만 남게 될 거라는 걸, 나는 뼈저리게 깨달아버렸다.
그만하자, 우리. 길고 무거운 침묵 끝에 내 입에서 그 말이 떨어졌을 때, 성화는 미동도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왜?”
나는 끝내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떨구었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죽을 만큼 사랑해서, 네가 나 때문에 네가 아닌 사람이 되어가는 것을 더는 지켜볼 수가 없었다.
“너는 나 말고도 살아야 하잖아.”
“나도 내 삶 살고 있어.”
“아니. 너는 몰라.”
억지로 짓누른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려왔다. 눈물이 차올라 시야가 뿌옇게 번졌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방식이... 나는 너무 무서워. 내 가시에 찔리면서도 그 가시마저 품어 안으려 드는 너의 그 투명한 애정 앞에서, 나는 완전히 무력했고 비참했다.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마지막 사랑은, 그 거대한 다정함으로부터 너를 놓아주는 것뿐이었다.
발끝이 시렸다.
도망치면 끝날 줄 알았다. 내가 널 버리면, 네가 다시 원래의 온전한 너로 살아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를 지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별을 선언하고 첫 겨울, 낯선 도시의 바에서 위스키 라벨에 새겨진 글자만 봐도 숨이 턱 막혀 잔을 밀어냈던 밤이 있었다. 누군가 새로 사귄 사람과 마주 앉아있으면서도, 갑자기 이별을 고하곤 한참을 걸었던 적도 있었다. 서점에서 우연히 시베리아 기행문을 발견했을 때, 손이 먼저 떨렸다는 걸 부인할 수 없었다. 그 모든 순간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같은 거짓말을 반복했다. 이건 그리움이 아니라 습관일 뿐이라고. 삼 년이면 충분히 무뎌질 시간이라고.
그러나 결코 무뎌지지 못했다. 오히려 나는 그 감정을 다루는 데만 능숙해졌을 뿐이다.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그리움을 티 나지 않게 삼키는 것, 그의 이름이 나올 것 같은 대화에서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는 것. 사랑을 끝낸 게 아닌, 그저 사랑을 잘 숨기는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뿐이다.
그러니 지금 이 얼어붙은 호숫가에서 느끼는 이 감정은 새로 생겨난 게 아니었다.
백금발이 흩날리는 소리가, 두꺼운 코트 자락이 눈발에 스치는 소리가 여전히 내 뒤에 있었다. 낯선 색으로 지워낸 머리칼. 삼 년이 지나서도, 저 사람은 여전히 자기 것을 먼저 지우는 쪽을 택하고 있었다.
바뀐 게 하나도 없구나.
“나 여기 있을 자격 없는 거 알아. 근데,”
“자격 같은 건 나도 처음부터 없었어.
“그래도 여기 있잖아, 너.”
숨이 턱 막혔다. 거짓말이라고, 도망친 건 나였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삼 년 동안 나 혼자 몰래 앓아온 것들이, 지금 이 순간 그의 담담한 한마디 앞에서 전부 무의미해졌다. 나는 코트 주머니 속에서 하얗게 질리도록 꽉 쥐고 있던 주먹에 천천히 힘을 풀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나는 그를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맹목 속에서 내 모든 가시를 받아내어 주던 칠 년. 그리고 너를 망치기 싫어 도망친 뒤, 홀로 속을 애태워야 했던 삼 년.
안쪽을 새까맣게 그을린 오크통 안에서, 제 살을 숯으로 만들어가며 독한 원액을 품어 안아야만 비로소 완성된다던 그 버번위스키처럼. 고작 몇 년 만에 식어버린 줄 알았던 우리의 시간도, 사실은 10년이라는 그 아득하고 견고한 세월 동안 서로의 잿더미 속에서 가장 지독하게 묵혀지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나, 아직도 널 사랑해.”
너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내 볼에 조용히 네 볼을 기댔다.
45도의 독주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 온몸에 퍼지던 그 켄터키 허그처럼. 짙고 묵직한 호박색 액체가 오크통의 나무 진액을 다 머금어내듯.
TEXT
여기, 캘리포니아 드림을 지닌 한 청년이 있다.
습기가 목 끝까지 차올랐다. 몸이 온통 물에 젖어 입을 벌리면 물방울이 쏟아질 듯했다. 땀에 푹 절은 민소매를 가슴팍까지 걷어올린 채 평상 위에 몸뚱이를 욱여넣고 널브러져 있었다. 몸 위로 끈적한 땀방울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의미 없이 눈동자만 굴리다 시선이 꽂힌 곳은 누렇게 변한 벽걸이 달력이었다. 붉은색 매직으로 투박하게 그어진 무수한 엑스표들. 일곱 살 즈음 내 생일을 저리 애타게 기다렸는데.
캘리포니아! 어쩌면 당연하게도 나는 그 곳에 가본 적이 없다. 사실 누군가에게 제대로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저 텔레비전 속에서 스쳐 지나가듯 본 야자수와 눈부시게 파란 하늘, 그리고 살갗에 들러붙지 않는 바람이 전부였다.
손을 뻗어 옆에 굴러다니던 주먹만 한 얼음 조각을 집어 들었다. 이미 반쯤 녹아 끈적해진 얼음을 목덜미에 문지르자 찌릿했다. 입 안에 얼음을 머금었다.
목젖을 찌르는 얼음조각에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것은 아버지가 날 이 제빙 공장으로 내쫓던 날의 눈빛이었다. 홍콩 뒷세계를 주름잡던 아버지는 덩치만 컸지 제 밥그릇 하나 챙기지 못하는 아들이 그저 짐덩이 같았던 모양이다. 악을 쓰거나 원망이라도 했겠건만, 나는 쫓겨나던 그날 밤 짐을 싸들고 나왔다. 평소와 다른 점이라고는 하수구 구석에 웅크려 앉아 속을 게워냈던 것뿐이었다. 무언가 목젖을 찌르는 느낌이 계속 들어 불쾌했다. 위산이 섞인 씁쓸한 토사물을 뱉어내며 생각했다. 가족인데, 매정하네.
다시 달력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10년. 아버지가 적선하듯 던져준 이 생명줄을 붙잡고 딱 10년만 버틴다. 돈이 모이면 미련 없이 캘리포니아로 떠나, 그 눈부신 해변에서 술이나 마시다 죽어야지. 그게 내가 가진 유일하고도 비루한 소원이었다.
턱 밑으로 차갑고 둥근 쇳덩이가 짓눌린 것은, 눈을 감은 채 더위와 씨름하던 찰나였다. 훅 끼쳐오는 피비린내와 단내 섞인 향수 냄새. 덜덜거리는 선풍기 소리 사이로 헐떡이는 숨소리가 섞여 들렸다.
움직이지 마. 이에 나는 미동도 않았다. 사실은, 제 경동맥을 누르는 총구보다는 살갗에 들러붙는 이 더위가 더 거슬렸다.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옆구리부터 시커멓게 젖어있는 실크 셔츠를 입고 있는 그는,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 떨렸다. 상처를 꽉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피가 꿀럭거리며 쏟아져 내렸다. 바닥 위로 핏방울이 떨어지며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독기만 남은 번들거리는 두 눈이 당장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듯 흉흉했다.
喂?
저기요?
힘이 실리지도 않은 가벼운 손짓 한 번에 겨우 버티고 있던 거의 손목이 속절없이 꺾였다. 장전된 총이 바닥으로 나뒹굴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씹...
욕설을 뱉으려던 그의 몸이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내 가슴팍 위로, 피투성이가 된 그가 무너져 내렸다. 뜨겁고 끈적한 피가 엉겨 붙었다. 비린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색색거리는 그의 몸은 불덩이처럼 펄펄 끓고 있었다.
피로 엉망이 된 가슴팍과, 그 위에 엎어진 그의 정수리를 번갈아 내려다보았다. 뺨을 툭툭 치며 말했다.
한국 분이셨구나.
......문이나 닫아봐.
입가의 피거품이 보였다. 열기에 들뜬 시선이 공장의 반쯤 열린 셔터문 밖을 향해 있었다. 누군가의 축 늘어진 다리 한 짝이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떨어져 있는 여권을 펼쳤다. 힐끔 눈을 돌려 그의 얼굴을 보았다. 박성화. 이름 예쁘네. 진짜 여권인가? 혀를 쯧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슴팍에서 성화의 몸이 떨어져 나가며 쩍, 하고 굳어가던 피가 뜯어지는 소리가 났다.
박성화, 라는 이름을 가진 그 남자를 평상 한 구석에 대충 밀쳐두고는 슬리퍼를 끌며 셔터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틈으로 밀려 들어오는 후끈한 밤공기가 목덜미를 덮쳤다. 골목 어귀에 버려진 더블백 바깥으로 튀어나온 사내의 구두코를 발끝으로 툭, 걷어찼다.
반항 없이 덜렁거리는 묵직함 무게감. 죽었네. 시체를 내버려 둔 채 셔터를 마저 내리려 하자, 등 뒤에서 쇳소리가 날아들었다.
아직 안 죽었어.
평상에 널브러진 성화가 손을 덜덜 떨며 제 품을 뒤적거렸다. 이내 허공을 가르고 무언가가 발치로 날아와 둔탁하게 떨어졌다. 묶음조차 풀지 않은 미화 백 달러짜리 다발. 성화의 옆구리에서 배어 나온 피와 땀에 절어 지폐 뭉치는 번들거리고 있었다.
얼음 상자에 사흘만 묻어둬. 냄새 안 나게.
싫은데요.
바닥에 구르는 돈다발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셔터문 손잡이를 잡았다.
경찰 깔리기 전에 그거 들고 나가요 형. 나 귀찮은 거 질색인데.
돈 더 줄 수 있어.
셔터를 내리려던 팔뚝이 허공에서 멈췄다.
너 원하는대로 줄 수 있으니까,
원하는대로. 입술 사이로 덥고 탁한 숨이 새었다. 셔터 손잡이를 쥔 채 삐딱하게 고개를 돌렸다. 평상에 처박힌 그는 당장 내일 아침 시체로 굳어버린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몰골을 하고 있었다.
원하는 것? 내가 원하는 게 뭔지나 알고 저렇게 함부로 혓바닥을 놀리는 걸까. 그는 나를 모른다. 내가 매일같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아버지가 내 목에 채워둔 목줄이 얼마나 숨통을 조여오는지 알 리가 없었다. 그저 으레 침을 흘릴 만한, 가장 뻔하고 눈 먼 미끼를 던졌을 뿐이다. 지독하게도 우스운 일이었다. 나는 그 얄팍한 미끼에 속수무책으로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바닥에 나뒹구는 백 달러 뭉치. 벗어날 수만 있다면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아야 했다.
얼마나요?
이 바닥 뜨고... 하와이 가서 남은 평생 놀고먹을 만큼.
공허하기 짝이 없는 약속이네. 제 한 몸 건수하지 못해 남의 얼음 창고에 기어들어 온 주제에. 그러나 나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지폐 뭉치를 주워 대충 바지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기분 나쁜 두께감이 묵직하게 눌러왔다. 발길을 돌려 더블백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축 늘어진 몸뚱이가 담긴 가방이 억센 마찰음을 내며 바닥 위로 끌려 들어왔다. 온몸의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다시 한번 굵은 땀줄기가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가방을 공장 안쪽으로 완전히 밀어넣은 뒤, 온 체중을 실어 셔터문을 끝까지 내렸다.
참으로 기가 막힌 희극이었다.
결국 나도 자본주의에 꼬리를 흔드는 흔해 빠진 개새끼였다. 돈 냄새 한 번에 그 귀찮은 일을 내 공장 한가운데에 고이 모셔둔 꼴이라니. 나를 내다 버린 아버지가 이 꼴을 봤다면, 비웃다 못해 박장대소하며 당장 내 머리통에 총알을 박아주었을 것이다.
헛웃음이 샜다. 더블백 지퍼를 내리자, 핏기가 싹 가진 사내의 얼굴이 어두컴컴한 공장 조명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파들거리는 숨통이 아직 끊어지진 않았다. 묵직한 몸뚱이를 끌어당겨, 얼음 블록 사이 깊숙한 곳으로 던져두었다.
평상 위로 시선을 돌리자 그는 구급 상자의 알코올을 제 옆구리에 냅다 들이붓고 있었다. 지랄 났네. 지독한 소독약 냄새가 순식간에 공장 안의 비릿한 혈향을 가렸다. 입술이 터져라 씹으면서도 신음 한 방울 새어 나오지 않게 참아내는 모양새가, 지독하게도 독했다.
아까 주머니에 쑤셔넣은 그의 여권을 다시 펼쳤다. 나랑 한 살 차이 나네. 어린 놈 둘이서 지랄 맞게도 꼬였다.
나는 눈을 감았다. 주머니 속에 쑤셔 넣은 지폐 다발의 묵직한 감촉이 허벅지를 눌렀다. 내일 아침 저 놈이 차가운 시체로 변해있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 따위는 접어주기로 했다. 뒤지면 뒤지는 대로 시체 두 짝을 바다에 수장시키고 내 인생을 한탄하면 그만이었고, 살면 사는대로 그 잘난 돈을 뜯어내면 될 일이었다.
그는 소독약이 하얗게 끓어오르는 상처 위로 붕대를 대충 칭칭 감아맸다. 그리고는 핏물에 절어버린 제 실크 셔츠 대신, 내가 평상 구석에 처박아둔 낡고 헐렁한 반팔티를 주워 입었다. 저 꼴을 하고 대체 뭘 어쩌겠다는 걸까. 몸을 일으킨 그가 셔터문 밑으로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 꼴을 하고 어딜 가는데요?
알 거 없어.
미쳤나. 옆구리에 구멍 뚫린 채로 길바닥에서 죽겠다는 거예요?
어이가 없었다. 뒤지려면 저 혼자 뒤질 것이지. 혀를 쯧 차면서도 나는 평상 아래로 다리를 내렸다. 슬리퍼를 질질 끌며 다시 셔터문을 밀어 올리고 그 뒤를 밟았다.
나는 곧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구역감을 애써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 꼴로 카지노를 온 그를 나는 아마 평생 이해 못할 듯하다. 옆구리에 총구멍이 난 반송장이 기어들어 오기엔 적합하지 않은 곳 아닌가.
코파카바나. 전혀 어울리지 않게도, 화려한 축제의 해변을 부르짖는 경쾌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붕대 위로 새어나온 피 탓에, 그의 반팔티 옆구리는 시커멓게 늘어붙어가고 있었다. 그는 펠트천 위로 칩을 밀어 넣었다.
딜러가 카드를 뒤집자마자 환호성이 왈칵 터졌다. 판돈으로 올려둔 거금이 딜러의 갈퀴 아래로 쓸려 들어갔다. 그 돈을 통째로 바닥에 흩뿌려대면서도 미련 한 줌 없었다. 오히려 속이 다 시원하다는 듯 씁쓸하게 비트는 입술 모양새가 신경을 긁었다.
아니, 뱃속이 왈칵 뒤집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그의 눈동자가 참 이상했다. 지폐 뭉치를 움켜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저 놈이나 나나. 꽁무니 쫓아가며 부스러기나 주워 먹겠다고 이러고 서 있는 내 신세가 더 찌질하고 처량하다.
그새 남은 칩까지 다 털린 그는 바스라진 지폐 몇 장을 여자의 가슴팍에 쑤셔 박았다. 분내를 풍기는 여자가 꺄르르 웃으며 그의 허벅지를 쓸어 올렸고, 목덜미에 붉은 립스틱을 뭉갰다. 그의 옆구리 위로 파우더 가루가 지저분하게 엉겼다. 붉은 칠을 한 여자의 손톱이 붕대 근처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갈 때마다 잘게 떨리는 속눈썹. 그는 기계처럼 팔을 뻗어 위스키 병을 쥐더니 잔도 없이 입에 가져다 대었다.
여자가 무어라 간드러진 광둥어로 웅얼거려도 듣는 척도 안 했다. 그저 여자의 목덜미에 얼굴을 박고 숨을 헐떡일 뿐이었다. 숨이 막혀 죽기 직전에 오물통 속으로 제 대가리를 밀어 넣는 꼴이네. 여자의 손이 옷 속으로 파고들 때마다 턱에 핏대를 세우며 신음을 삼키는 듯했다. 상처를 타고 흐르는 피가 바지춤까지 질척하게 적셔가는 꼴이 꽤 볼만 했다.
입안이 바짝 말라갔다. 더 눈에 담고 있다간 아까 먹은 게 전부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짜증이 치밀었다.
行開啲。
비켜요.
구겨진 지폐 한 장을 꺼내어 여자의 무릎 위로 툭 떨어뜨렸다.
여자가 물러나는 동시에, 테이블 위로 엎어진 그의 뒷덜미를 억세게 틀어쥐었다.
손아귀에 들어차는 마른 목선이 뜨거웠다. 당장이라도 타죽을 듯 펄펄 끓는 기분 나쁜 열기. 억지로 끌려 일어난 그가 비틀거리며 나에게 기댔다. 허물어지는 그의 허리를 잡아끌고 카지노를 빠져나왔다. 골목의 습기가 덮치자마자, 얌전하던 몸이 발버둥을 쳤다.
고꾸라진 그가 위액을 토해냈다. 핏물이 배어 나오는 얇은 등허리가 가쁘게 들썩였다. 나는 짝다리를 짚고 섰다. 한참을 게워낸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땀에 젖어 엉망이 된 머리카락 사이로 흐릿하게 풀린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주저앉으려는 그의 겨드랑이 밑으로 팔을 욱여넣어 일으켜 세웠다. 귓가에 밭은 숨소리가 닿았다.
발걸음을 떼려던 찰나, 끈적한 액체가 발 앞에 떨어져 내렸다. 그의 옷을 적신 검붉은 피가 바지춤을 타고 바닥에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토악질을 하느라 아까 감아둔 붕대가 완전히 풀려버린 모양이었다.
미간이 구겨졌다. 머릿속으로 거리를 가늠한다. 여기서 제빙 공장까지는 꼬박 한 시간이다. 택시를 잡는 건 애초에 미친 짓이었다. 얘를 태울 운전기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또한 큰길 쪽에서는 경찰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이리 피칠갑을 한 채 걷는다면 십중팔구 눈에 띌 터였다. 이대로 무식하게 끌고 가다간 내 돈은 길바닥에서 과다출혈로 죽거나, 감방 철창 안에서 증발해 버릴 게 뻔했다.
고개를 돌렸다. 골목 끝, 파리 떼가 엉겨 붙은 쓰레기통 너머로 네온사인이 점멸하고 있었다. ...지랄 맞게 꼬이네. 선택지가 없었다. 품에 안긴 몸뚱이는 턱없이 얄팍했지만, 의식을 놓아가는 사내의 무게는 무겁게 나를 짓눌러왔다. 바닥으로 질질 끌리는 그의 다리를 당겨 안으며 허리를 쥐었다.
여관 계단을 오르는 내내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좁아터진 방 안은 스프링 침대 하나가 전부였다. 그를 침대 위로 내려놓았다. 푹 꺼지는 매트리스 위로 그가 고꾸라졌다. 들뜬 시선은 천장을 향해 흐릿하게 꽂혀있었다.
티셔츠 벗어요.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올려다보았다. 네가, 벗겨보든가. 도발인지 자학인지. 헛웃음을 흘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죽어가는 주제에 어지간히도 잘난 척이었다. 그것도 병이에요. 알아요? 나는 허리를 숙여 그의 옷자락을 잡고 위로 말아 올렸다. 반팔티가 살갗에서 떨어지는 불쾌한 마찰음이 났다.
드러난 마른 상체는 불덩이처럼 끓고 있었다. 벌어진 상처 틈으로 여전히 피가 꿀럭거리며 새어나오는 중이었다. 살갗마다 터져 나온 식은땀이 불빛 아래서 번들거렸다.
방 안 공기가 살갗에 직접 닿은 탓인지, 마른 가슴팍이 크게 들썩였다.
죽고 싶으면 돈이라도 주고 죽어요.
한쪽 무릎을 침대 위로 올려 그의 두 다리 사이를 파고들듯 무게를 실어 눌렀다. 가슴팍이 짓눌린 그가 욕설을 내뱉으며 몸을 비틀었다. 창백한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무릎으로 그의 골반을 지그시 내리누른 채 구겨진 수건 하나를 꺼내 들었다.
얌전히 있어요.
반대쪽 손에 쥔 수건으로, 그의 옆구리를 내리눌렀다. 허리가 홱 꺾여 올랐다. 무릎 아래 깔린 허벅지가 떨리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짐승의 앓는 소리 같은 신음이 입술 사이로 질척하게 새어 나왔다. 아래가 뻐근했다. 상처를 지혈하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눈가에 붉게 핏발이 섰다. ....숨 막혀. 그가 땀에 젖은 고개를 젖히며 숨을 헐떡였다. 저항할 힘조차 잃어버린 그가 마침내 축 늘어진 채 숨만 색색 내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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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아-!!”
몽롱한 정신 속을 통렬하게 파고드는 목소리. 천국같은 안락함을 제공하는 이불 속에서 부스스 눈을 뜬 성화가 잠긴 목을 울려보았다. 갈라지는 목소리가 거진 죽어가는 듯 낮았다.
“으어어...”
“성화아빠. 아빠아!!”
우와악. 이불 덮인 몸 위로 덮쳐오는 무게에 성화가 우스운 소리를 냈다. 옆에서 핸드폰을 하던 우영이 저 들었다고 피식 웃었다.
꼬물꼬물 품안으로 파고들다 이내 축축 늘어지는 작은 몸을 일으키며 성화는 졸린 눈을 비볐다. 오늘도 이 까랑까랑하고도 우렁찬 부름을 모닝콜로 성화는 기상한다.
정수빈 7세. 박성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사랑스런 따님이셨다.
“씨발.”
애한테 다 들릴텐데 뭐하는 짓이냐며 성화가 옆구리를 찔러왔지만 멍하니 시선을 고정한 우영은 딱히 반성하거나 후회하지 않았다. 좌측으로 높이 뜬 공 잡히며 쓰리아웃 경기 종료. 7회까지 잘 하다가 돌연 만루홈런맞고 역전패였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는 우영은 씨발이라는 욕지기를 대신해 지금 제 감정을 표현할 마땅한 단어를 떠올리지 못했다.
“저 미친새끼들. 오늘로 8연패야.”
“저런.”
“내일도 지면 또 스윕이라고. 미친, 미친. 어떡하지?”
너가 걱정을 하든 기도를 하든 굿판 벌여 작두 타든 뭐가 바뀔 수 있겠니. 요즘 야구에 미쳐 사는 우영의 한풀이를 들어주다 못한 성화였기에 답지않게 삐죽한 대꾸가 떠올랐다. 애매한 침묵으로 대응하는 성화가 못미더워 입술을 비죽이던 우영은 동그란 눈 똘망이고 있는 수빈을 끌고와 제 무릎 위에 앉혔다.
“히잉 수비나아. 우영아빠 너무 슬퍼어.”
“아빠 슬퍼?”
“우웅. 수빈이가 달래줄 수 있어?”
“아아-니! 우영아빠도 이제 어른이잖아. 혼자서 뚝 해야지.”
“...”
“푸흡,”
“거기 박성화씨 웃는 거 다 들리거든요?”
빠직 열받은 우영이 입술 불퉁 내밀고 꿍얼댔다. 아무도 내 편이 안 돼주네. 우영아빠는 외로워요. 두 팔로 스스로를 끌어안은 채 불쌍한 척 웅크리는 우영을 성화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수빈아 점심 뭐 먹을래? 나긋한 투로 묻는 성화의 얼굴엔 행복이란 것이 퍽 어울리고 익숙한 말간 낯빛이 비쳤다.
“짜잔~”
잠깐 담배 핀다며 나갔던 우영의 손에는 웬 케이크 상자가 하나 들려 있었다. 아빠 그거 케이크 맞죠? 먼저 우영을 마중나간 수빈이 들뜬 목소리로 쨍알대고 있었고 그보다 한 발 늦게 방에서 나온 성화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케이크를 다 사왔어?”
“흐흥. 일단 받아.”
케이크를 힐끔대는 성화가 우영에게 물었다. 아직 잡는 힘이 약해 불안한 수빈을 대신하여 성화가 케이크 상자를 건네받았다. 특별히 멋 부릴 것 없이 간단하고 깔끔한 과일 생크림 케이크였다. 흐뭇한 얼굴을 하고서 팔짱 낀 우영은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만 으쓱였다.
“10년 채운 기념으로 사왔지.”
“뭐가 10년째인데?”
“뭐야아. 우리 여보는 그런것도 기억 못하는거야?”
“잠깐만. 잠깐만 있어봐. 내가 맞춰볼게.”
우영이 슬쩍 긁는대로 울컥 반응하는 쉬운 남자 박성화는 한참동안 곰곰이 생각했다. 10년전에 나 뭐했더라. 식탁에 올린 케이크 상자를 열면서도, 접시와 포크를 3개씩 꺼낼 때도 한참 생각해 봤지만 기념할만한 특별한 사건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찌푸리고 있던 눈썹 축 늘어뜨린 성화가 백기를 들었다.
“모르겠어. 정답 뭐야?”
“하아. 정말이지 이걸 말해줘야 안다니...”
절레절레 고개 젓는 저 과장된 제스처 조금 열받았지만 대체 뭐길래 우영이 이렇게 밑밥을 까는지 성화는 정말로 궁금했다. 하지만 우영의 입에서 나온 답은 너무도 허무하고 어이가 없었다. 허, 하는 헛웃음이 성화의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우리가 헤어졌던 시간 2년.”
“응.”
“그리고 형 돌싱 된지 8년.”
“그게 무슨 상관이야?”
“도합 10년의 아픔과 사랑을 기념하는 날이라구.”
“에. 결국 아무 날도 아니라는 거잖아.”
“알게뭐야. 아무튼 내가 만든 기념일이니까 초 불어.”
어느새 길쭉한 생일초 10개가 케이크 위에 다닥다닥 꽂혀있었다. 라이터를 켠 우영이 생일초에 불을 붙였고 그를 바라보던 성화도 초 하나를 뽑아 거들었다.
타오르는 열개의 작은 불꽃 앞에서 성화는 눈을 반짝였다. 누가 이 광경을 보고서 설레지 않을 수 있을까. 수빈이도 같이 불자. 식탁 맞은편에 앉은 우영이 제 무릎 위에 수빈을 앉혔다.
“불기 전에, 소원.”
빌어야지. 우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성화는 두손 꼭 모으고 눈을 감았다. 수빈도 성화를 따라했다. 저도 모르게 눈 감은 채 빙긋이 웃고 있는 성화와 수빈을 우영이 아주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꿀뚝뚝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건 안비밀. 아우 어떻게 이렇게 똑같이 생겼어어.
“후-”
“와아, 정우영의 파란만장한 도합 10년치 사랑을 기념하여! 박수우!”
우영아빠가 뭘 축하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케이크를 눈앞에 두고 신난 수빈은 앙증맞은 고사리손으로 짝짝 박수쳤다. 성화는 박수를 치려다가도 뻔뻔한 우영이 못 말리겠다는 듯 피식 웃고만 말았다. 그런 성화가 익숙한 우영은 얌전히 케이크에 꽂힌 불 꺼진 초들을 뽑았다.
플라스틱 칼을 든 우영이 신중하게 케이크의 반을 갈랐다. 조금 비뚤게 잘렸다고 수빈에게 한소리 듣긴 했지만. 에이 괜찮아. 어차피...
“성화아빠가 다 먹을거니까 상관없어.”
“나?”
“우움. 역시 그렇겠지.”
수빈마저도 성화의 먹짱 기질에 동의했다. 그리고 실제로 틀린 말도 아니어서 성화는 긁히지도 않았다. 냉장고에 또 들어가면 맛없어진다고. 그런 먹짱적 신조를 핑계삼아, 성화는 오늘 이 케이크를 남김없이 먹어치울 생각이었다. 성화의 위장 크기로는 빵집에서 파는 가장 작은 케이크 한 판 정도야 아무 문제 없기 때문이다.
“그럼 나 이만큼 먹는다?”
“우와. 봐도봐도 신기하다니까. 어떻게 형 몸에 그만큼이 들어가?”
“성화아빠 진짜 많이 먹어.”
곧바로 케이크 반절을 잘라가는 성화의 행보에 우영도 수빈도 놀라워했다. 우악스레 한 포크 크게 떠 와악 쑤셔넣자 우영이 깔깔 웃으며 좋아했다.
“형.”
“으응.”
“성화형.”
“왜. 뭐.”
“사랑해.”
어른도 슬슬 잠들어야 할 깊은 밤. 잠들기 직전 받아버린 조금은 뜬금없는 사랑고백에 감았던 눈을 뜬 성화가 물끄러미 우영을 바라봤다. 수면등 하나 켜진 안방이며 코앞에서 느끼하게 웃어보이는 우영은, 어둠에 익숙해진 성화의 눈으로는 너무나도 잘 보였다.
나른하게 풀린 눈매 안에 멜로눈깔 장착한 우영이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성화는 피하지 않았고 그대로 키스했다. 지그시 짓누르듯 밀어내 침대에 눕히길래 그대로 덮치나 싶었다.
“아직 고백할 거 남았어.”
“응. 들어줄테니까 해.”
우영이 성화의 위에 반쯤 몸을 겹쳐 엎드렸다. 성화는 자연스럽게 우영의 어깨에 손을 올려 튀어나온 날개뼈를 토닥였다.
“나 형이랑 수빈이랑. 이렇게 오손도손 사는거 말야. 내가 꿈꿔왔던 가장 이상적인 미래였어.”
“우영아.”
“진짜. 바랐던 소원이 하나도 빠짐없이 이뤄졌어.”
그래서 너무 행복해. 끝내 배시시 얼굴을 붉히다 쑥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꿍 이마를 박았다. 간질간질 사춘기 소년마냥 부끄럼 타는 우영의 고백에 성화도 낯이 뜨거워지고 속이 간지러웠다.
“진짜 말도 안 되는 확률이야. 야구로 치면 10할 타자라는 거지. 완전 미친 거 아냐?”
“그렇게 말해도 나는 잘 몰라...”
“아잇, 아무튼.”
부끄러워 괜히 장난스레 오바하는 게 보여 성화는 푸슬푸슬 웃다 그냥 우영을 꼭 안았다. 고양이의 애정표현처럼 성화의 목이며 쇄골에 제 이마를 부비는 우영이 다시한번 말했다.
사랑해 성화형.
그 즈음 성화는 과거의 한 기억을 회상하는 중이었다. 장난삼아 본 이름점 궁합도 자긴 안믿을거라며 북북 선 그어버리던 우영이 떠올랐다. 그거 두 자리수 나올 때까지 더해야돼. 백퍼센트는 없어. 계산하는 법을 알려줘도 우영은 막무가내였다. 그럴거면 다 니맘대로 정하지 뭐하러 점을 보냐며 시큰둥하게 따진 그때의 성화였지만, 지금의 성화는 우영의 마음을 더 선명히 알 것 같았다.
‘아냐, 아냐. 형이랑 나는 무조건! 백퍼센트 찰떡궁합이라고.’
그때의 이름점부터 어쩌고 저쩌고 10주년이라던 오늘의 이벤트까지. 그런 우영만의 계산법과 고집이 있었기에 성화도 지금의 행복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모든 걸 채워줘서 고마워, 형.”
고개를 든 우영이 조심스레 성화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가만 눈 감은 성화는 그 아래에서 우영의 손을 꼭 그러쥐었다. 우영의 말대로 저희는 꼭 100퍼센트. 10할의 확률 같았다. 찰떡같은 우리 궁합도, 너무 밝아 마치 꿈같은 우리의 미래도 최대로 꽉꽉 들어찬 100퍼센트일거라고. 성화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달콤한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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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시간보다 한참을 일찍 도착했다는 걸 알면서도 시간을 자꾸 확인하게 됐다. 그럴 때마다 간신히 일 분이 지나 있었다. 투명한 창밖으로 한낮의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고민이 없어 보인다. 초조함에 나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다가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손을 내려놓았다.
마지막으로 사귀었던 그가 꼽았던 수많은 이유 중에는 그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이 서른이나 먹고 손톱 물어뜯는 것도 별로야. 그냥 헤어지자고 해도 됐을 텐데, 그는 굳이 사소한 이유를 하나하나 나열해 가며 이별을 고했다.
아닌가. 이별의 그 순간을 떠올리니 손이 다시 절로 입가로 올라간다. 그의 말마따나 나이를 서른이나 먹은 참이다. 그냥 헤어지자는 말로는 납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내게 남은 만남은 몇 번이나 될까. 그 몇 번 안에 운명의 짝을 만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내가 바란 것은 운명의 짝 같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나를 견뎌줄 수 있는 사람이면 항상 충분했다. 내가 서른을 먹든 예순을 먹든, 손톱을 뜯든 뜯지 않든, 있는 그대로의 나를 견뎌줄 사람.
“뭐야, 박성화, 일찍 왔네?”
익숙한 질문에 꼬리를 물던 상념이 툭 끊긴다. 고개를 드니 그곳에는 더 이상 익숙하지만은 얼굴이 떠 있다.
“…우영아.”
“오랜만이네.”
거의 이 년 만인 거 같은데, 아닌가? 그렇게 심상하게 물으며 맞은편 자리에 앉는 얼굴이 과연 어딘지 모르게 낯설다. 광대뼈에서 턱에 이르는 선은 조금 둥글어졌는데, 눈가는 아주 미묘하게 더 깊어진 모양새다. 무엇보다도 그간 이런저런 색과 스타일로 멋을 내던 머리가 차분한 자연모다. 길을 가다 마주쳤더라면 알아보았을까? 아무래도 자신이 없다.
무어라고 말을 꺼내야 하는데 좀처럼 목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하다못해 잘 지냈냐는 아무래도 좋은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허공에서 헤매는 내 시선을, 우영이가 부드럽게 잡아맨다.
“뭐라도 시켜놓지 그랬어.”
그러면서 앞에 놓인 메뉴를 찬찬하고 느긋한 손길로 넘겨가며 묻는다.
“먹고 싶은 거 있어?”
지독히도 낯선 질문이다. 원래라면 내 의중 따위 묻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건 세월이 지나면서 생긴 배려일까, 아니면 그만큼 우리 사이가 멀어졌다는 방증일까.
“그냥… 아무거나.”
“진짜로? 나 진짜 아무거나 시킨다?”
“…응.”
그제야 우영이가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불러다 놓고는 주저라곤 없는 손길로 메뉴의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주문한다. 나는 그런 우영이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본다.
우영이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걸 보는 게 얼마 만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로는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뒤로 만날 때면 우리는 언제나 단둘이었다. 서로를 향해 있는 힘껏 팔을 뻗어야 간신히 손을 맞잡을 수 있는, 각자의 세계 끄트머리. 그곳이 아니면 서로를 만날 수 없었으니까.
“근데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아? 무슨 일 있어?”
주문을 마친 우영이 거침없이 물어온다. 나는 고개를 작게 젓는다.
“별일 아냐, 그냥…….”
“왜, 깨진 지 얼마 안 됐어?”
“…….”
“와, 진짜? 미안, 나 그냥 해 본 소린데.”
우영이가 곧바로 입을 다문 채로 시선을 내리깐다. 약간의 혼란이나 주저와도 비슷한 것이 두 눈 안에서 헤엄치고 있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종이 냅킨의 끄트머리를 손톱 끝으로 꾹꾹 눌러댄다. 이 어색한 정적을 먼저 깨는 것은 나여야만 한다는 걸 알아서,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 본다.
“괜찮아,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고.”
“……형이 그렇다면 그런 건데.”
우영이의 입술 사이에서 큰 한숨이 샌다. 고민으로 아랫입술이 눈에 띄게 밀려 나온다. 그 광경이 십 년도 더 전의 어느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나 걔랑은 진짜 잘해보고 싶었단 말이야. 나는 얼굴조차 본 적이 없는 여자애에게 단 이 주 만에 차여서 돌아온 열여덟의 우영이가 입술을 비죽이던 게 엊그제 같기만 하다.
마음 한구석이 아려서 좀처럼 다음 말이 떨어지질 않는다. 괜찮으니 어서 말해보라고, 네가 갑작스레 보자고 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노라고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해주어야 하는데. 얼마 전 헤어진 그의 말대로였다. 나이를 서른이나 먹고, 어른다운 구석이라곤 하나 없는 건 역시 문제다.
때마침 음식이 우리 사이를 가르고 나온다. 나누어 먹기 좋은 샐러드, 카나페 따위가 테이블 위에 놓인다. 우리는 말없이 각자의 음식을 개인 접시에 덜어 먹는다. 나는 양상추 이파리 하나를 작게 썰어 한 조각씩 입에 넣는다. 입맛이 없는 건 아닌데 두려웠다. 전채 뒤의 메인 디쉬 뒤의 디저트, 그 뒤가.
“형, 나 결혼해.”
카나페를 집어 들며 우영이 불쑥 뱉는다. 접시 위에서 괜스레 분주하게 움직이던 손이 우뚝 멎는다. 이런 말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 눈을 좀처럼 마주칠 수 없다.
“그래서 그동안 연락 못했어. 앞으로도 못할 것 같고. 오늘은 그 말 하려고 부른 거야.”
오래전에, 그러니까 십 년 전에 해야 했을 말이 내 정수리 위로 쏟아진다.
“우리가 그동안 만날 때마다… 그랬어서… 사실 이번에도 만나자고 연락할까 말까 엄청 고민했어. 그래도 이런 얘기는 얼굴 보고 하는 게 맞는 거 같아서. 혹시 기대하고 나왔으면 미안해.”
고개를 수그린 채로는 우영이의 표정이 어떤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목소리만은 차분해서, 여러 번 연습해 본 말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나는 홀로 거울 앞에서 우리의 이별을 입에 담아 보는 우영이를 상상해 본다. 그 거울 속에 비친 우영이의 모습은 어쩐지 열아홉의 우영이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안쓰럽고 애틋하다.
“아니야, 나도……”
사실은 알고 있었어. 그렇게 문장을 맺어야 하는데 쉽지 않았다.
그래,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이렇듯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이렇듯 번듯한 곳에서 만나자고 한 적이 없었으니까. 허름한 모텔, 어둠에 잠긴 뒷골목과 편의점, 희끄무레한 잿빛 새벽. 우리 사이에 일어났던 일의 대부분은 그런 곳에서 일어났으니까. 아무도 보지 않고, 보더라도 신경 쓰지 않는 곳에서.
문득 그런 곳에서 내가 얼마나 애를 썼는가를 떠올린다. 우영이의 손가락과 얽은 내 손가락에 얼마나 세게 힘을 주었던가를.
그걸, 이제는 놓아야 한다니. 다시 잡아볼 기회도 없이 영영.
어찌해볼 새도 없이 눈물이 접시 위로 툭 떨어진다. 내가 화들짝 놀라 얼른 눈가를 손등으로 거칠게 문지르는 것과는 다르게, 우영이는 침착하고 능숙한 동작으로 들고 온 가방에서 휴대용 티슈를 통째로 내민다.
얜 언제부터 이런 걸 챙겨 다녔지, 하는 때아닌 의문이 든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옛날부터 말없이 챙겨주는 건 잘했지. 그런 생각이 드니 눈물이 더 쏟아진다.
“어머… 괜찮으세요?”
파스타를 내오던 종업원이 놀라 묻는다. 나는 황급히 눈가를 눌러닦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대낮에 식당에서 남자 맞은편에 앉아 울고 있는 꼴이 얼마나 이상해 보일지 알면서도 눈물은 쉽게 멎지 않는다. 이상해 보인다고 생각하니 더.
우영이는 그런 나를 말없이 기다려준다. 예전 같았으면 파스타 식으면 맛없으니까 먹고 울라는 농담 한마디쯤은 하고도 남았을 텐데, 그저 가만히 나와 함께 이상한 풍경의 일부가 되어 준다. 나도 모르게 눈물 섞인 중얼거림이 입 밖으로 샌다.
“아, 흑, 너 왜…….”
“……?”
“왜, 언제… 이렇게 컸어…….”
와핫, 하고 우영이가 크게 웃음을 터뜨린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웃음.
“누가 들으면 형은 무슨 엄청 어른인 줄 알겠네.”
그러면서 내 몫의 파스타 접시를 내 앞으로 밀어준다. 나는 어쩐지 시무룩해져 입술을 비죽이며 중얼거린다.
“…언제는 서른 넘으면 아저씨라며.”
“아직 안 넘었잖아, 그럼 괜찮지.”
“…너 진짜 제멋대로야, 알지?”
“알지, 근데 형이 다 받아줬잖아.”
밝은 조명 아래서, 한낮의 햇살이 따사롭게 쏟아지는 창가에서 보는 우영이의 웃음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다. 나는 그로부터 좀처럼 눈을 뗄 수 없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단 일 초라도 더 마음에 담고 싶다.
“…진짜 이상하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걸 알고 있었는데도 이상해. 내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에 우영이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그래? 난 몰랐는데.”
그러면서 제 몫의 스파게티를 말아 올려 입 안 가득 넣는다. 닿으면 델 법한 선을 우리 사이에 그은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로는 얄궂기 그지없었으나, 아이처럼 입가에 소스를 묻힌 채 우물거리는 모습을 보며 결국 나는 그를 도무지 미워할 수 없음을 안다. 아니, 앞으로도 우영이가 많은 것을 모른 채로 살아갔으면 싶다.
모른 채로도, 행복하게.
우리는 각자의 파스타를 먹으며 그간 밀렸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냥 다 싫대. 내가 미역국에 마늘 넣는 것도 싫대.”
“미친 새끼네, 지가 끓이던가. 잘 헤어졌다, 형.”
“그런가… 모르겠어.”
“왜 몰라, 답답하게. 형 좋다는 남자들 저만치까지 줄 서 있는 거 내가 뻔히 아는데.”
우영이가 기억하는 나는 어느 시절의 나일까. 아무리 되짚어봐도 내가 그렇게까지 열망의 대상이 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단언하는 우영이의 표정은 자신만만하다.
“그러는 너야말로 하루가 멀다고 여자 친구 갈아 치웠잖아. 와이프 될 분이 그건 아셔?”
“대충은? 그래도 괜찮대.”
“진짜로? 너 엄청나게 잘해야겠다.”
“어, 완전 잘하려고. 지금도 강아지 산책이랑 목욕 내가 다 시키긴 해. 그리고 아기 생기면 내가 다 키운다고 했어.”
“…상상해 본 적 없긴 한데, 넌 육아 하면 잘할 거 같긴 하다.”
“그래? 박성화가 그렇다니까 나 완전 자신감 생기는데?”
웃음이 방울져 흘러넘친다. 우리가 이런 말들을, 이렇게 밝은 곳에서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가슴에 뜨겁게 맺힌다. 그 순간만큼은 우리가 손을 잡고 함께 한 발짝 나아간 것 같다. 가늘지만 밝게 빛나는, 어떤 선을 사뿐히 뛰어넘은 것만 같다.
제 접시를 다 비운 우영이가 냅킨으로 입가를 깔끔하게 닦는다. 그리곤 아직까지 웃음기가 맺힌 눈빛으로 내 눈 안쪽을 가만히 응시한다.
“고마워, 형.”
“뭐가.”
“나 사랑해 줘서.”
“…….”
“십 년 동안 내 손 잡아 줘서.”
내가 맨정신으로는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던 말들이 우영이의 입에서 우영이의 목소리로 흘러나온다. 다 알고 있었구나. 다행히 아까 다 울어버린 덕에 눈물은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거 알아? 먼저 손을 내밀어 줬던 것도, 언제나 먼저 전화해 줬던 것도 너였어.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어떤가 싶어서, 나는 그저 고개를 작게 끄덕인다. 나를 뒤로하고 떠나는 길에 그 무엇도 지워주고 싶지 않다.
“아, 디저트 먹을래?”
우영이가 짐짓 쾌활한 목소리로 묻는다. 여기 크렘 브륄레 맛있대.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젓는다.
“됐어, 요즘 누가 디저트 같은 걸 먹어.”
“하긴, 나도 식 전에 다이어트해야 하긴 해.”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우영이가 엉거주춤 일어선다.
“아, 나 진짜 잠깐 나온 거라 가 봐야 할 거 같다. 형은 천천히 있다 가.”
그 말이, 계산서를 집어 드는 손길이, 너무나 낯익어서 도무지 마지막 같지 않다. 하지만 우영이 손을 흔들며 하는 말은 십 년 내도록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다.
“행복하게 살아, 박성화.”
갑작스러운 그 말에 무어라 대꾸도 제대로 해주지 못했다. 카운터에서 계산하는 뒷모습이 이내 가게 문을 밀고 나갈 때에야, 작은 중얼거림이 입술 새로 흘러나온다.
“…너야말로.”
나는 너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언제까지고 불행하더라도 좋았으니까. 그러니까 이번에도 참아 볼게.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 참아 볼게.
그런 말들이 내 안에 메아리치도록 둔 채로, 나는 가게 창 밖에서 팔이 떨어져라 손을 흔드는 우영이를 향해 작게 손을 흔들어 준다. 머리 꼭대기에서 작열하는 태양 빛에서 웃는 우영이의 머리칼이, 눈동자가, 눈부시게 빛난다.
이런 모습이라면, 다시 보지 못하더라도 괜찮았다. 언제 어디서라도, 눈을 감기만 하면 다시 생각날 테니.
나는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부른다. 그리고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그에게 주문한다.
“여기 크렘 브륄레 하나랑 따뜻한 커피 한 잔 주세요.”
아, 또 생기부 진로 희망 써 오래. 이번엔 뭐 쓰냐.
너는 하고 싶은 거 없어?
아니, 형은 있어?
진로 희망…까진 아니고, 꿈은 있지.
엥, 뭔데?
나는 좋은 사람 만나는 거.
……?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는 사람 만나서, 강아지도 키우고, 고양이도 키우고. 운 좋으면 아기도 키우고.
…아니, 그런 원대한 꿈이 있는 줄 전혀 몰랐네. 그런 건 일단 누구든 사귄 지 삼 개월은 넘어보고 꿈꿔야 하는 거 아냐?
남 말하네. 그러는 너도 원하는 미래 같은 건 있을 거 아냐.
난 별거 없는데. 인생 뭐 있나, 그냥 되는 대로 사는 거지.
…하긴, 그럴 줄 알았다, 내가.
그래도……
응?
형이 꿈 이루는 거는 보고 싶다.
…그게 뭐야.
오늘부터 그걸로 할게, 내 꿈.
PIC
안녕하세요 콩입니다. 이번에는 좀 도전적인 글을 써보았습니다. 여러분은 바다거북 스프 게임에 대해 아시나요? 간단히 설명하자면 복잡한 스토리의 어떤 이야기를 결말만 보고 그 결말의 전말을 추리하는 게임입니다. 오직 결말과 그 직전 일부의 상황만으로 홍중과 성화에게 어떤일이 있었던건지 한 번 상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런 순애. . . 너무 오랜만에 써서 정말 공들여 작업하고 싶었지만, 어찌저찌 급하게 된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드네요. 그 둘은 어떤 연애를 했을까요? 그리고, 앞으로 어떤 연애를 하게 될까요. 제 생각으로는, 스무 살부터 칠 년 간의 연애 동안 아마 성화는 계속 헌신해왔을 겁니다. 화내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자기 몫의 서운함이나 지침은 한 번도 꺼내놓지 않은 채로요. 그게 사랑이라고 믿었을 거예요. 상대가 어떤 모습이어도 다 받아주는 것, 자기를 조금씩 비워내면서라도 상대의 자리를 지켜주는 것.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완벽한 헌신이 홍중에게는 안식처가 아니라 벼랑이었던 것 같아요. 사랑받는 게 아니라 빚지는 기분이었을 테니까요. 그래서 도망쳤던 거고요. 이 소설의 제목을 '러셀 리저브 10'으로 정한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오크통 안에서 까맣게 타들어가면서도 그 안의 원액을 품어 안아야 완성되는 위스키처럼, 두 사람도 서로에게 상처를 내면서 동시에 서로를 숙성시키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었어요. 어쩌면, 3년 간은 곪아갔을수도 있겠습니다.. ^^
쓰면서도 마감을 할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어떻게든 해냈네요..ㅎ 10년이란 주제를 보고 뭘 쓰지 한참 고민하다가 저한테 산이는 10년째 첫사랑만 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남자라 낫섷을 하게 됐어요ㅎㅎ 그리고 산성화만큼 잘 맞는 조합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최고의 페어♡ 10회차도 함께 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다같이 섷른합시다!!
섷른합작이 벌써 10회차라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요즘 생업 최고조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지라 글도 무척 오랜만에 쓰게 되었는데요..(9회 합작 이후로 처음입니다..반성..) 그래도 합작 덕분에 강제 일 년 2회라도 쓰는 게 어딘가 싶으면서도.. 읽어주시고 기다려주시는 분들께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ㅠㅠ
이번 글은 벌써 오 년도 더 된(!) 3회 합작의 "그레이존"의 후속의 형태로 글을 쓰게 되었는데요! 뭔가 글 속 세계의 우영이와 성화의 인생의 한 장을 닫아주면서 제 안의 무언가도 정리하게 되는.. 그런 카타르시스를 좀 느꼈던 것 같아요. 그간 써왔던 스타일보다 좀 더 감정적으로 명확하게 드러나는 부분들이 있다면 그래서인 것 같습니다. 물론 하도 글을 안 써서 기교적 역량이 떨어진 것도 한몫하겠습니다만... 반성 또 반성...ㅠㅠ
10회라는 기념비적인 숫자를 맞이할 때까지 함께해 주신 섷른러 여러분께 무한한 감사와 사랑을 전하며..❣️
엩페스 N년 하는 동안 이렇게 많은 페이지를 단시간 안에 그린 경험은 처음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쫑섷이 부흥했으면 하는 마음 덕분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도 쫑섷 많이 사랑해주세요.